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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잔 팔루디의 「백래시」독서토론
일시 : 2019년 5월 31일(금) 오후 7시-
장소 : 반월당 로스팅로보
사회 : 허샘
참석 : 8명
감상평
은: 어떤게 페미니즘은가? 생각해보게 되었다. 페미니즘 책을 추천한 것은 여성의 인권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소수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인권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해서다. 봉준호 감독은 영화 '기생충'을 인간에 대한 예의에 관한 이야기라 말하며 기생, 공생, 상생을 언급했다. 나도 상대에 따라 태도가 바뀌며 어떤 경우엔 예의없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런 것들을 뭉뚱그려 인권이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소수자의 인권존중 측면에서 페미니즘을 읽고 싶었다. 젠더 트러블은 읽고난 후 공감이 많이 되더라. 강성 페미니스트들은 내 얘기에 반발한다. 또 남성들도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반발한다. 나는 중간에 있는 입장인 것 같다.
홍: 잘 읽힐 것 같은데 생각보다 안 넘어갔다. 80년대 미국상황인데 우리는 30년도 지난 현재에서 보고 공감해야 하는가? 대체적으로 기조 자체는 우리의 상황과 맞닿아 있어 사실 슬펐다. 생각보다 뿌리깊고 쉽지 않구나하는 것을 느꼈다. 페미니즘 뿐만 아니라 진보에 대한 반격의 패턴이 역시 이렇지 않나 느꼈고, 내가 나도 모르게 내면화시킨 것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 있었다. 진보적이라 자평했지만 반격의 무리들이 만들어내어 교묘하게 변형시킨 도덕률같은 (예를 들면, 가정 내의 위계질서(동서지간, 형제지간 등)나 효의 문제와 같은) 구시대적 발상에 매몰되어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슬펐다. 내가 자발적으로 공부한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습득된 것으로, 일종의 이율배반, 모순의 현장에서 통렬한 자기반성의 계기가 되었다.
근: 서론에서는 전반적인 현황을 개관하였고 뒤로 가면서 구체적인 사례들을 풀어놓고 있다. 페미니즘보다는 사회고발의 측면이 강한 책. 인구정책 같은 정부의 시책이 사업화되는 과정이나 매스컴에 의한 여론조작 등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우리도 느끼고 있는 것인데 그것을 객관적 수치를 들어 고발하는 느낌. 지난 달 책을 읽으며 이번 책에도 엄청난 무언가가 있을 줄 알았는데 재미는 있었으나 지루해서 다 읽지는 못했다. 사회발달 즉, 먹고 살 만 하니까 소수의 권리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는 것 같다.
허: 맞다. 아주 못 사는 나라에서는 페미니즘의 대두를 기대하기 힘들다.
근: 사회도 발전단계를 거치듯 먹고 살 만 해야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관심이 생기듯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배: 이번 책을 계기로 페미니즘에 접근하고 싶었는데 정말 안 넘어가더라.
권: 책에 낙태, 직장 내 성차별 등이 드라마틱하게 구성되어 있다. 읽다가 분노가 느껴질 정도로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내가 이런 것들에 무관심하다는 것은 내 상태가 편하다는 증거인 것 같다. 페미니즘은 정말 쉽지 않다는 생각이 다시 한 번 들었다. 반격의 사례들이 많은데 지도층(=편한 사람)이 여성으로 인해 겪은 불편한 사례를 던지는 순간 다른 편한 사람들이 가세하여 반격이 시작되는 것 같다. 이 편한 사람들을 그냥 놔두지 않는 것이 바로 참정권이지 않을까? 예전에도 우리에게 참정권이 있었지만 그 때는 남편이 찍으라는 사람을 찍었다. 우리 사회에선 90년대 이후에 페미니즘이 등장, 대두되기 시작했는데 사실 페미니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반쪽짜리 민주화 밖에 안된다. 한 개인으로서 우리는 페미니즘의 실현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해봤으면 한다.
종: 내용과 제목의 괴리가 있다. 우리가 간과한 많은 것들을 분야별로 상세하게 서술하여 우리를 일깨워 준다. 7,80년대 미국의 각 분야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수록하고 있는데 현재 우리의 상황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낙태합법화에 대해 얘기해보자. 소수의 강성 페미니스트들이 있음으로써 사회가 변화하는 계기가 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박검사같은 사람들의 용기가 없었다면 우리도 당시의 미국처럼 흘러가는 것이다. 낙태는 여성의 권리 vs. 태아의 권리(생명존중)로 논쟁이 붙었는데 그럼 원인제공자인 남성은 여기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홍: 2부 끝에 자기계급의 속성을 배반하는 자들의 이야기, 즉 반페미니스트의 이야기가 나온다. 꼭 페미니즘이 아니어도 일상에서 많이 목격된다. 같은 페미니즘이지만 그 안에는 여러 층위가 있고 온도차가 존재한다. 포스트페미니즘은 강성에 대한 반격으로 나온 것. 반페미니스트들은 좀 더 온건해보이고 사실 사회에서 이들의 목소리가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 자기들이 현재 누리는 (당당한) 삶의 모습이 페미니즘 운동의 수혜를 받은 결과라서 더 괘씸한 측면도 있고.
권: 우리 시절에는 '엄마의 희생=당연한 것. 아버지의 가부장=카리스마'라는 사고가 있었다. 50년을 살다보니 여성이 큰 목소리를 내는 게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오죽했으면 메갈리아, 워마드가 등장하고 또 남성혐오를 그렇게 심하게 할까? 사람들이 안 들으니까.
허: 프로이드는 마조히즘 연구에서 남여의 차이를 분명히 했다. 마조히즘은 주로 여성, 사디즘(성도착증 등)은 주로 남성의 특질로 구분하는 경향. 월경증후군이란 말도 여성을 폄하하는 것. 의학이나 과학의 잣대를 들이대서 여성과 남성의 차이를 규정하면 이에 대한 반격이 쉽지 않다. 남성의 소아성애나 여성에 대한 성범죄가 질병으로 분류되면서 치료가 우선시되고 범죄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경향이 있어 심히 걱정스럽다. 의학이나 과학이 여성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부추기는 것이 아닌가?
논제 1: 각자 생각하는 페미니즘은 무엇인가?
허: 예전에는 페미니즘 시위 등이 TV에 나오면 안 다가왔다. 젠더 트러블을 읽으면서 경계짓기 바쁜 사회에서 경계를 허무는 것이 페미니즘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흑인/백인, 남성/여성, 빈자/부자 등으로 가르지 말고 공통점을 찾으면 계층의 구분이 허물어지지 않을까? 페미니즘은 공통점을 찾는 활동. 성소수자도 이해가 된다.
홍: 젠더 트러블을 읽고 기존의 사고가 바뀌었다. 이분법적 사고를 깨는 것이 페미니즘의 목표가 되면 인류사에 나타나는 많은 갈등의 해법 또한 여기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갈등을 뛰어넘는 페미니즘이라면 남성들도 충분히 끌어들일 수 있다.
은: 인간은 분류를 하려는 습성이 있다. 의도적으로 노력해야 이걸 깰 수 있을 것. 선입견 없는 인간은 없는데 어느 순간 어떤 계기로 인해 나를 깨치는가가 중요하다.
허: 그렇다면 남성 vs. 여성의 문제만 해결되면 인종, 종교 등 다양한 영역에서 다수와 소수의 갈등이 해결되는 것인가?
홍: 세상의 갈등을 해결하는데 있어 즉, 이분법적 사고를 벗어나는데 있어 페미니즘은 해법의 방법론 중 하나가 될 것이다.
권: 여성학이 좀 쉬워야 한다. 주디스 버틀러의 담론은 소수에게만 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평등을 논할 최소단위=가정. 가정에서는 어려운 말이 필요없다. 거기에서 문제가 시작되고 확산된다. 실천적 문제해결 측면에서 얘기해보자.
허: 생물학적 구분에 따른 구분, 성별의 차이나 인종의 차이처럼. 우성 vs. 열성의 차이보다는 그들간의 연관성을 찾아보자. 주디스 버틀러는 학문적으로 논제를 던진 것이다.
권: (해외의) 너무 많은 연구와 사례들이 짧은 시간 안에 우리나라에 쏟아져 들어와서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도 갈등이 존재한다. 용어도 어렵고 생활 속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근: 우리나라도 10년 뒤에는 더 발전해서 남녀 구분없이 생활하게 되지 않을까? 이미 그런 흐름을 탔다. 남자들만 경쟁해서는 전쟁밖에 일어나지 않는다. 영국에서는 여왕이 지배하던 시절에 뭔가 달랐다. 여성을 사회에 많이 진출시키면 정치나 외교 등이 분명 바뀔 것이다. 사회운동인데 너무 철학적으로 접근하면 안된다.
논제 2: 우리 사회에 왜 페미니즘이 대두되었나?
근: 자본주의 사회의 발전상에 따라 자연스럽게 나타난 것 아닐까?
권: 산업화, 문명의 발달에 따라 생존권이 보장되게 된 것이 큰 역할을 했다. 경제력이 남성에게 있을 때는 여성이 남성에게 예속될 수 밖에 없다. 산업화가 되면서 역할의 구분이 모호해졌고 여성들도 힘을 축적할 수 있었다. 특히 두뇌를 쓰는 일이 많아지는 현대사회로 들어서면서 여성들의 역할이 커졌다.
홍: 교육기회의 확대도 한 몫했다. 정보공유에 의한 힘의 분산이 이루어 진 결과.
권: 노동조합, 시민사회 등 동시다발적으로 여성의 권익신장을 위해 뛰어야 한다. 일개 가정에서도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허: 미투운동이 우리나라에서 최근 크게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종: 이 책에는 여성의 지위와 인식이 바뀌니까 기득권층이 두려워 가정으로의 회귀를 종용하는 반격들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우리나라에도 경제적, 사회적 지위를 가진 싱글여성들이 많다. 인식이 달라지고 시대상이 바뀌니까 미투도 더 관심을 받는 것이다.
홍: (경제력을 통해) 종속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 자녀들도 부모에의 종속으로부터 벗어나려면 경제력이 필요하다. 우리 세대만해도 중학교 진학을 못하는 여자 아이들이 꽤 있었을 정도로 교육기회가 균등하지 못했다. 교육기회균등은 경제적 독립이 가능하게 한다. 모순도 집약되면 터지듯이 역량도 쌓이면 기회를 만나 표출된다. 지금의 우리가 그런 상황이 아닐까? 80년대 우리나라에도 (성추행범의 혀를 깨문 여성의 사건처럼) 산발적으로 여성의 목소리를 내던 사례들이 있었다.
근: 우리나라에도 여성대통령이 나오면 80대도 태도가 많이 바뀔 것이다.
종: 이 책에도 (미국의) 여성부통령 후보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대선에서 패배하니까 언론이 이 여성 부통령후보를 매도해버렸다. 우리도 아직 사회분위기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들의 행동이나 실패(의 원인)을 지목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책 제목처럼 누가 페미니즘을 두려워하는가? 그건 기득권 즉, 남성이 아닐까?
허: SNS의 발달로 인해 이슈화시키기가 훨씬 용이해졌다.
근: 앞으로의 시대는 문명이 발달하니까 몸 쓸 일이 줄어든다. 여성의 미래에 대해 긍정적으로 본다. 남자는 힘쓰는 일을 잘 할 수 있다. 대중들에게 어필하는 영역은 여성들이 더 강하다.
홍: 여성으로서의 나의 시각, 아들을 둔 엄마로서의 시각이 서로 다르다. (엄마로서) 난 모병제에 찬성한다. 실리적 문제로 들어가면 이성이 아닌 감정이 개입되고 부딪히게 된다. 체제의 모순으로 이해하고 해결책을 고민해야 하는데 피부에 와닿는 그대로 접근하면 억울하다는 느낌을 가질 수 밖에 없을 것. 계급의 이해관계를 배반하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이 책에도 등장한다.
권: 자본주의는 욕망의 사회.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나를 끊임없이 자극하게 된다. BTS가 뜨는 이유가 뭘까? (자본주의 하에서) 패배의식에 젖은 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주기 때문일 것.
홍: 편견과 차별이 문제이다.
논제3: 반페미니스트에 대해
허: 근래 오세라비라는 여성학자가 한국사회에서 페미니즘에 반기를 들고 있다. 지금의 페미니즘은 잘못되었고 필요없다고 생각하는데 언론에서 부각시키니까 몇 번 보긴 했는데 설득력은 없었다. 어느 정도의 사회적 지위를 가진 이가 자신의 존재감을 부각시키기 위해 시류에 편승하는 모습은 씁쓸하다.
홍: 결국 돌고돌아 그들이 취했던 것은 결국 자신의 이익이었다. 사적 이해관계에 의한 반페미니즘운동인 셈. 자신의 삶은 보수층이 싫어하는 페미니즘적 삷이나, 하는 일은 페미니즘을 공격하는 것이다. 이기적인 마음에 공격의 근본이 있는 것 같다.
권: 성교육문제부터 시작해보자.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은 대부분 나의 성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보지 못한 채 어른이 된다. 남성들이 가진 성에 대한 선입견인 "육아(출산을 위한 도구) or 쾌락(을 위한 도구)"이란 이분법적 사고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이를 개인의 실천에만 무게를 둘 것인가?
홍: 가정에서도 반페미니즘의 일은 많이 벌어진다. 나부터도 내가 키우는 아이들에게 남녀 이분법적 사고를 주입시키는 경우가 있다. 제사때 동서가 불참하면 진심 화가 난다. 이 쯤되면, "나는 뭔가?"하는 생각이 든다. 알게 모르게 내 안에 중첩된 게 얼마나 많을까? 누가 나에게 그렇게 생각하라 강요한 것도 아닌데, 나름대로는 사회나 가정의 부조리와 싸우면서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슬펐다.
배: 그렇더라도 요즘 젊은 아빠들은 불쌍하다. '아빠 어디가?'를 보라.
논제4: 낙태의 합법화
홍: 미국은 종교의 영향, 남성의 지배와 낙태가 맞닿아 있으나 우리는 뿌리 깊은 남아선호사상과 낙태가 맞물려 있다. 즉, 이 책에서 말하는 낙태와는 온도차가 있다.
종: 아이는 여성과 남성이 같이 가지는 것인데 보통 남자의 책임은 얘기하지 않고 여성한테만 족쇄를 채우는 경우가 많다. 정당한가?
홍: 우리는 태아의 권리(생명존중) vs. 여성의 권리가 논쟁이 되는 경우.
권: 태아는 남성(의 씨)에게서 생명을 받았고 여성은 터전일 뿐이라는 생각이 강했다. 이 책에서는 왜 여자 맘대로 낙태를 결정하는가를 논쟁의 시작점으로 두고 있다.
허: 기독교신앙에는 낙태를 하지말라는 부분이 없다. 남자들이 아이 출생(출산)의 지배력을 갖고 있었는데 여자 마음대로 그걸 좌지우지하니까 지배력 상실이 두려워 생명존중의 문제로 몰아간 것. 심지어 '배아도 생명'이라는...
홍: 우리나라에서는 원치 않는 임신조차 여성의 목숨을 걸고 지켜야하냐로 논쟁이 있었다.
권: 한마디로 낙태금지법은 남자들이 여자들을 예속시키기 위한 방편이었다.
종: 여기서 낙태에 대해 찬반을 논하자는 것이 아니라, 원인제공자인 남자에게도 문제 또는 책임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홍: 언어도 문제.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라는 노랫말에서처럼 항상 여성은 정주성의 의미를 가진다. "남자는 씨, 여자는 밭"이란 표현도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면모를 여성의 것으로 만든다. "신대륙 처녀림"도 마찬가지. 하루에도 몇 번씩 여자들에게 '행동의 제약'을 걸어대는 선입견들, 표현들이 있다. 정형화된 여성성에 맞춰 나를 변화시켜야 하는가?
논제5: 대중문화에 스며든 여성비하
권: 남자들이 여자들의 외모나 스타일을 평가하는 패턴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 것 같다.
허: 책에도 소개된 '위험한 정사'나 '나인하프위크'를 그 당시에는 그저 재미있는 영화라 생각하며 봤다.
홍: 당시 영화를 보면서 내겐 양가적인 감정이 있었다. 색감이나 구성은 굉장히 신선해서 좋았는데 뭔가 불편한 감정이 남았다. 이제 저자의 책을 보니 이 지점(여성에 대한 비하)에서 찜찜함을 느꼈던 것 같다.
허: 걸그룹들을 보면 불편하지 않나?
홍: 기획사들(남성들)의 의지가 반영된 게 아닐까?
권: 남성중심의 섹슈얼리티를 부여하는 것은 오히려 여자들일 수도 있다. 오히려 기획사에서 여성들을 위해 욕망을 자극한다고 본다. 춤을 추는 사람들은 자신이 진정 춤을 좋아해서 하는 경우가 대부분. 상품화된 케이스들과 같이 묶여 싫은 소리 듣는 것이 안타깝다.
허: 선정적인 춤들도 있는데 아들의 입장에서 보면 절대 좋지 않다. 상업적 노림수가 개입되어 있다.
권: 어른들의 탐욕이 깃든 기획은 순수한 의도의 아이들에게 상처를 준다. 항상 어른들이 뒤통수를 친다.
허: 대중문화는 파급력이 굉장하다.
홍: 지금의 한국사회에서 청소년들이 트랜드를 따르지 않는 것이 굉장히 어렵다. 청소년들이 무리짓기 없이 독립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그 시절을 겪은) 어른으로서 해야 할 행동이 아니다. 아이들의 그 시기와 특성을 이해하고 좀 더 나은 문화 트랜드를 만들어줘야 하는 것이 어른들의 몫.
권: 어른들한테서 새로운 것은 나오지 않는 법. 아이들이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 마치 서태지와 아이들처럼...
홍: 여성이 극중에 또는 TV에 등장할 때는 전형적으로 그려지는 모습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아줌마는 극악스럽고 수다스럽다거나 괜찮은 인물은 예쁘고 스마트하다거나 하는 등의.
권: 언론의 성폭행사건에 대한 상세한 묘사도 문제다.
홍: 미국의 한 드라마는 성폭행 하나를 주제로 해서 시즌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얼마나 사례가 많다는 것인가? 걱정스럽다.
이후 자유분방한 토론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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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글을 읽으니 토론이 올올이 떠오르네요.
음성지원도 막 된다능ㅎ
방대한 내용 정리하느라 고생많습니다~^^
이렇게 빨리~ 참, 부지런하십니다 ㅎ
황금주말을 빼앗는 듯하여 죄송, 미안합니다 ㅠㅠㅠ
“인간은 분류하는 습성이 있다”고 한 은지쌤의 지적은 “인간은 차별을 당연시 한다” 로 읽어야 되는지 아니면 학문은 철학에서 개별학문으로 분화되는 이른바 범주론으로 설명될 수도 있는데 어떤 측면을 비판하신 건지...
부연설명 부탁드립니다 ㅎ
단어의 정의로 보자면 <분류>란 학문적 방법론이죠. 소크라테스가 분류를 통해 인식론의 발달을 가져왔다고 하죠.
보통 철학자를 비롯한 학문을 탐구하는 사람이 분류를 할수있고 보통사람들은 그런 능력이 없다고 보는 것이죠.
은지쌤은 아마도 <차별>을 그리 말한게 아닌가 싶습니다만..
@카이저 소제 그렇다면 인간에게 있어 ‘차별’은 어떤 근거로 당연시되는지,
선천적인 것인지 아니면 후천적 습득에 의해 고착화 되었다는 것인지...
잘 모르겠네요 ㅠㅠ
@TOPA 그렇죠.
차별이 인간의 습성이라고 쉽게 말할 내용은 아닌 듯 합니다~
젠더 문제 또한 역사적 맥락안에서 이해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요.
홍샘께도 질문 드려봅니다 ㅎ
“교묘하게 변형시킨 도덕률”에 “일종의 이율배반” 이라고 표현하셨는데
두 개의 모순되는 상황이란게 어떤것이 있는지 현실적 예를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가령 ‘위계질서’는 긍정하나 질서에 부가되는 ‘억압’을 모순으로 표현하신 건지...
@TOPA 기존의 유교적 위계질서나 그 안에 있는 억압에 대해 긍정하거나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습니다.
불합리함과 부당함에 대한 의견개진도 많은 편이어서 스스로를 진보적인 사람이라고 평소에 생각하고 있었는데, 일상적인 상황(예를 들면 제사와 같은 집안행사 등)에서 평소의 신념과는 다른 도덕률을 적용하거나 그에 따른 감정의 불편함(제사에 참석 하지 않는 동서에 대한 비난등)을 겪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조카의 어떤 행동이나 말이 예의없다고 지적할 때, 그것이 과연 인간에 대한 예의인건지, 어른에 대한 기존 질서적 예의인 건지 명확하지 않은 상황이 될 때도 있구요.
@별바라기 그럴 때면 자신의 언행불일치와 인지부조화 같은 상황이 당황스러울 때가 있는데 이런 현상이 왜 생기는지, 자신의 사고 안에 있는 보수적 도덕률이 어떻게 생겨난 건지, 왜 노력하는데도 뿌리깊게 잘 사라지지 않는지 이번 기회에 물어보게 되었다는 의미였습니다. 나 자신도 모르게 외부의 도덕률을 원래 내 것인양 내면화하여 장착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이런 질문들을 자신에게 던져보는 것은 유의미한 일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별바라기
도덕률.
문자 그대로 moral law.
사회에서 지켜야된다고 믿어지거나 강제되는 도덕법칙이 도덕률이니..
자신의 사고안에 있는 보수적 도덕률이 어떻게 생겨난 지는 궁금한 것이 아니라 자명한 것이겠죠.
노력하는데 왜 잘 사라지지 않고, <내면화되어 장착하고 있는가>를 반성하는 차원에서 의미를 찾는다면 우리들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 지를 생각해봐야 하겠네요.
결국은 실천의 문제군요.
저두 내친김에 홍쌤께 질문.
젠더간의 이분법적 사고를 허무는 것이 인류사의 계급 갈등의 해법 이라고 하는데 논리적 비약이 아닌가 싶어요..
그런 갈등을 뛰어넘는 페미니즘은 남성들도 끌어안을 수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요..
토론할 때 물어보고 싶었는데 짬이 안나서 댓글로 묻습니다~^^
젠더간의 이분법적 사고를 허무는 것이 인류사의 계급 갈등의 '유일한 해법'이라고 말씀드린 것은 아니구요.
세상 모든 갈등을 유발하는 흑백논리와 같은 이분법적 사고 중 어찌 보면 가장 뿌리 깊고 극복하기 힘든 것이 성별 차이가 아닐까 합니다. 최근의 생물학까지 장착하면서 그 벽을 허물기가 더 어려워진 점도 있구요. 버틀러의 논리를 빌어와서 그러한 주 모순이 해결될 수 있다면 다른 이분법적 갈등을 극복하는 방법도 더 쉽게 찾아질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점에서 말씀드려본 것입니다.
@별바라기 페미니즘이 단지 여권신장이나 여성해방의 범주에 머물러 있다면 젠더간 갈등의 진폭이 더욱 커질 수도 있겠지만 이분법의 경계를 허물고 인간종이라는 보편적 휴머니즘(인권 등과 같은)의 입장으로 확장되어 간다면 '인간해방'이라는 측면에서 남성, 여성 모두 함께 하는 운동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별바라기
젠더 트러블을 읽고 토론할 때,
주디스 버틀러의 주장을 이해하기 급급한 탓에 별고민없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게 아닌가 반성이 되었습니다.
그냥 외우듯이 말이죠.
페미니즘을 젠더간의 이분법적 경계허물기의 관점에서 보는 것은 프랑스 페미니즘의 특징이라고 하더군요.
(출처: 젠더의 역사)
주디스 버틀러 책을 읽고나서 우리는 충분한 고민없이 너무 쉽게 이분법적 사고의 극복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물어봤습니다.
젠더갈등이 주모순이어서 이것이 해결되면 다른 이분법적 갈등의 극복이 쉬워진다..이 말도 잘 이해되지 않네요.
드라마나 영화속에서 성범죄가 종종 다루어지는 것에 대해 제가 언급했던 것은 성범죄의 빈도를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
이 책 뒷부분에 나오듯이 성범죄 사례조차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소비하는 대중매체의 속성을 말하고자 함이었습니다.
갑자기 성범죄 드라마 이야기로 이어지면서 책 내용과 제 의도가 잘못 전달된 듯 싶어 말씀드립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