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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야만 보이는게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여행을 꿈 꿉니다. 현재를 더 깊이 있게 보여주는 역사기행은 꼭 필요합니다. 한국사 교사인 저는 근대 들어 뒤틀린 한일관계에 관심이 참 많은데요.
최태성/역사교사: 저는 역사 교사로서요. 인문학적 소양 중에서도 역사적인 배경, 사람들의 이야기가 최고의 인기 관광지 속에 들어가 있는 이야기를 전달해 드리고자 합니다. 저와 함께 최신 트렌드, 똑똑해지는 역사기행!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개항사를 되짚어 보는 역사기행 이라면 역시 바닷길로 가야죠. 현해탄은 일제 강점기 안타까운 이별이 벌어졌던 눈물의 바다이기도 한데요. 한일관계를 고민하는 여행인만큼 개항직후 조선시찰단 처럼 현해탄을 건너가고 싶었습니다.
최태성: 이 경로를 통해서 조선 통신사도 갔고 조사시찰단도 갔고 저도 갔고 이런 걸 통해서 뭔가 역사의 공감대를 생각할 수 있는 여유, 이런 것들이 배 여행의 매력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최신 쾌속선이라 후쿠오카까지 불과 3시간이 채 안걸렸는데요. 이렇게 가까운 나라인데 그동안 왜 멀게만 느껴졌을까요. 이번 여행의 출발지인 시모노세키 까지는 렌트카를 이용했습니다. 일본은 대중교통요금이 비싸기로 유명하죠. 도쿄가 아닌 지방을 누벼야 하는 역사지 답사에는 역시 자동차가 제격입니다. (시모노세키/일본 야마구치현).
최태성: 여기가 바로 시모노세키입니다. 역사책에도 자주 등장하고요. 바로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 부대가 출발했던 기항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청일전쟁 때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말이죠. 이 시모노세키는요. 역사적으로 유명하지만 이걸로도 유명합니다. 바로 이겁니다.-복어! 저는 이거 먹으러 왔습니다. (가라토 시장/일본 시모노세키). 복어는 시모노세키의 상징입니다. 일본 복어의 70%가 이곳을 거쳐 간다고 할 정도입니다.
최태성: 와! 역시 복어의 고장 시모노세키답네요. 대형 복어가 “여기는 복어의 고장이에요” 라고 보여주고 있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출병을 위해서 바로 이 시모노세키에 많은 군사들을 모아놓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여기에 워낙 복어들이 많으니까 그걸 병사들이 잡아먹은 거죠. 그런데 잘못 먹어가지고 병사들이 죽어나가는 거예요. 예기치 않은 참사에 크게 당황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복어섭취 금지령을 내렸고 이후 300년간 복어는 금기의 생선이었습니다. 지금은 한해 사오백만명이 복어에 반해 가락동 어시장을 찾는데요. 금지됐던 복어가 어떻게 시모노세키의 얼굴이자 효자상품이 된 걸까요. 먼저 이곳에서 복어를 먹는 방법은 우리와 좀 다릅니다. 회나 스시를 여러 개 사서 피크닉처럼 야외에서 먹기 때문에 골라먹기 좋게 포장되어 있습니다.
최태성: 진짜 회가 싱싱하고 싸 보입니다. 다 먹고 싶네. 어떡하지? 재미있는 건 삼백년이나 금기시 됐던 복어를 자유의 몸으로 풀어준 주인공이 우리가 잘 아는 역사 속 인물이라는 겁니다.
최태성: 안녕하세요. 시모노세키의 복어는 왜 유명한가요?
이토 카즈코/복어상인: 시모노세키 복어가 유명한 이유는 이토 히로부미가 먹고서 맛있다고 한 것이 계기가 되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습니다.
최태성: 이토 히로부미에게 고마우시겠어요?
이토 카즈코: 당연히 감사하죠. 우리가 지금까지 이렇게 장사할 수 있는 것은 그 덕이니까요. 정말 감사할 따름이에요.
아주머니가 이토 히로부미를 업고 다닐 기세네요. 우리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여서 여행 초기서부터 좀 놀랐습니다.
최태성: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못 먹게 했던 이 맛있는 복요리를 다시 먹게끔 했던 인물이 바로 한국인들이 너무 잘 알 고 있는 일본인 이토 히로부미였습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얼마나 이 복요리를 좋아했냐면요.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이겼잖아요. 그런데 패전국 청나라 대표 리홍장을 불러서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토록 했던 곳이 바로 복요리 전문점 춘범루였습니다. 이거 먹고 춘범루가 여기 가까이 있거든요. 춘범루나 한번 가보려고요.
청일전쟁은 일제가 침략의 마수를 드러낸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1894년 동학 농민군이 일어나 파죽지세로 전주까지 함락시키자 고종은 청나라에 편지를 보내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텐진조약을 명분삼아 일본까지 가세했고 우리 땅을 전쟁터 발판 삼아 청일 양국이 맞붙게 됩니다. (청일전쟁(1894~1895)-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놓고 벌인 전쟁. 이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한다).
서구열강의 문물을 일찌 감치 받아들여 최신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은 청국에게 대승을 거둡니다.이 전쟁의 강화회담이 바로 이곳 시모노세키에서 열린 곳이죠.
여기 지금 복어 동상이 있네요. 아마 세상에서 가장 존경 받는 복어가 아닐까요? 최초의 복어 요리점으로 알려진 춘범루는 실은 이토 히로부미가 즐겨가던 요리집이었습니다. (춘범루/시모노세키). 회담장소 부터 승전국 대표 이토의 자신감이 느껴집니다. 史蹟春帆樓 日淸講和談判場. 개항 이후 서구 열강에 주눅들었던 일본은 청일전쟁 승리를 계기로 열등감을 털어내고 아시아 침략에 본격적으로 나섭니다. 그날 회담장 분위기가 생생하게 재현되어 있는데요. 일본이 청일전쟁의 승리를 얼마나 자랑스러워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회담의 중국측 대표는 일본이 지명한 북양대신 이홍장 일본측대표는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였습니다.
강화조약을 발판삼아 본격적으로 한반도와 대륙침략에 나서려는 이토는 조약 내용부터 청나라를 압박하고 기선을 제압하려 했습니다. 특히 조약 제1조는 한글자도 고치지 못한다고 못박았습니다. 日淸兩國講和條約. 시모노세키 조약. 제1조 청국은 조선이 완전 무결한 독립 자주국가임을 확인하고 (중략) 조선의 청국에 대한 조공-헌상-전례 등은 영원히 폐지한다.
청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은 청의 간섭없이 조선을 마음껏 유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아시아의 무게 중심이 일본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최태성: 청일전쟁이 일어난 장소도 한반도였고 청일전쟁의 결과도 제1조가 조선의 운명과 관련된 것들을 바로 이 회의장에서 청나라와 일본 두 나라가 체결하고 있는 모습, 너무 가슴이 아픈 우리 근대사의 현장을 지금 일본에 와서 확인하고 있습니다.
조선이 세계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이토를 필드로 하는 일본은 조선침략을 착착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최태성: 이토 히로부미와 복어 이야기 속에는 300년 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루지 못했던 중국대륙진출의 깃발을 드디어 이토 히로부미가 이뤄냈다는 이야기가 담겨져 있죠. 그들의 꿈이 이루어진 겁니다. 그런데 그 꿈 속에는 바로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가 담겨져 있음을 잊지 말아야되겠습니다. (히카리/일본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에서 차로 3시간 달려와 시골길을 한참 걸었습니다. 누굴 좀 만나야 해서요. 이사람의 일대기를 알면 일본을 비약적 성장으로 이끌어 낸 개항사와 뒤틀린 한일 관계사를 한번에 이해할 수 있죠. 이 사람은 누굴까요? 바로 이토 히로부미입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한일간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인물입니다. 메이지 정부 초대총리로 총 네번이나 총리를 역임했고 헌법을 제정해 근대국가 건설을 주도 했습니다. 1984년까지 일본 지폐의 모델이었을 정도로 그는 일본이 자랑하는 근대인물입니다.
최태성: 반갑습니다.
모리시게 요시노리/이토공 자료관장: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한국의 유명한 역사 선생님이시라고 들었습니다.
최태성: 감사합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모리시게 요시노리: 이토 히로부미는 문인이었습니다. 서민들을 위해서 열심히 일한 사람이죠.
역시 답변은 예상대로 였습니다. (이토 히로부미 생가/일본 야마구치현).
저는 지금 1841년 바로 이토 히로부미가 태어난 생가에 와 있는데요. 딱 보면 알겠지만 나무로 만든 집에다가 초가 지붕을 올려가지고 딱 봐도 그냥 굉장히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제가 지금 둘러보니 정말 재밌는게 있는데 지금 여기 문 앞에 문패 같은 걸 걸어놨단 말이에요. 이토가 아닙니다. 바로 그 아버지 이름이 걸러있는데요. 아버지 성은 하야시, 이름은 주조, 하야시 주조라는 문패가 걸려있습니다. 이상하죠? 아버지가 다른가? 아니고요. 바로 하야시 주조의 아들이 이토 히로부미 맞습니다. 근데 이 집에서 살 때는 바로 하야시 리스케, 워낙 미천한 가문이라서 성도 부르지 않고요. 그냥 ‘리스케’, ‘리스케’란 이름으로 불리면서 여기서 태어났고 여기서 유소년기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죠. 태어나서 처음 몸을 씻겼다는 우물까지 보존해 놓았는데요. 가난하고 누추한 신분의 그가 어떻게 최고 권력의 자리까지 올라갔는지 더욱 궁금해 집니다.
최태성: 뭐가 굉장히 많을 줄 알고 제가 힘들게 왔는데 초가집 하나, 우물 이렇게 있네요. 이토 히로부미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세요? 을사늑약을 체결했던 주범, 그리고 안중근의 총에 맞아 죽었던 인물, 그 정도로만 알고 계신 것 아닌가요? 근데 일본 내에서 이 이토 히로부미는 근대화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는 영웅이었죠.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가 지금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우리가 몰랐던 이토의 역정에는 일본 근대화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하기/일본 야마구치 현). 이토가 청소년기를 보낸 곳, 두 강 사이에 낀 도시 인구 5만의 도시 하기시입니다. 이곳은 일본 근대화의 성지로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가 십대를 보낸 두번째 집은 한 눈에도 나아 보이는데요. 갑자기 나아진 살림살이에는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이토 히로부미 구택/일본 야마구치 현). 아! 여기네, 여기!
최태성: 제가 리스케의 운명, 그 어린 아이 리스케의 운명을 바꿔놓은 바로 그 집에 왔습니다. 건물을 보니까요, 기와가 있고 저 위로 지금 초가가 올려져 있잖아요. 아주 못 사는 집도 아니고 그렇다고 너무 잘 사는 집도 아니고 자 그럼 리스케가 왜 이곳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을까요? 다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리스케의 아버지가요. 조슈번 하기에 이토성을 가진 창고 관리인이었습니다. (조슈번-야마구치 현의 옛이름). 창고 관리인은 비록 신분은 높지 않지만 그래도 하급무사였거든요. (리스케의 아버지가) 그 이토성을 가진 창고관리인의 머슴으로 일을 해요. 굉장히 성실했나 봅니다. 이 창고 관리인이 후가 없었대요. 그래서 리스케의 아버지를 양자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지요. 이 과정에서 정말 미천한 출신의 리스케가 이토성을 갖게 되면서 신분상승의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죠. 완전 운명이 바뀌게 되는 전환점이 되는 곳이 바로 이 집이 되는 것입니다.
신분제가 요동치던 막부 말기, 운좋게 하급무사로 신분상승을 했지만 이토는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최태성: 이토 히로부미는 어린 시절의 그 이름 리스케가 그렇게 싫었답니다. 왜냐면 미천한 가문의 아주 흔한 이름이었거든요. 마치 조선시대 때 ‘개똥아’ 이런 종류의 이름 있잖아요. 리스케란 이름이 싫었대요. 그래서 이름을 바꿉니다. 뭐라고 바꾸느냐 하면 도시스케, 더 나은 도시스케, 조금 더 세련된 이름은 슌스케 이렇게 바꾸죠. 그리고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고관관리대작으로 사용했던 이름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가 되는 것입니다. (리스케-도시스케-슌스케-이토 히로부미). 이름의 변화를 보면 이토 히로부미란 한 인간이 갖고 있는 신분상승의 욕구 이런 것들이 개명 속에서도 나타나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만약 그가 하급무사 인생에 만족했다면 일본과 우리의 역사는 조금은 달라졌을 겁니다. 사무라이 잔심부름을 하던 10대 후반 이른바 존왕양이 운동에 가세할 정도로 그는 정치적 야심이, (존왕양이-막부 말기 실권을 쥐고 있던 막부체제에 반발해 일왕을 숭상하고 외세에 개방을 거부하는 사상).
최태성: 이토 히로부미는 왕정복고와 외세배척이란 두가지 기치를 내걸고 청소년기에 굉장히 과격한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암살을 도모하고 영국 대사관 방화를 저질렀던 이토는 돌연 영국유학을 감행합니다. 그런데 영국의 힘이 굉장히 강한 모습을 보면서 궁금했죠. 도대체 영국은 어떻게 저렇게 강한 나라가 되었을까요?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 바로 번(현)의 돈을 횡령해 가지고 영국에 밀항을 하게 되는 모습도 있습니다. (조슈5걸 長州五傑-1863년 유학을 위해 조슈번(현 야마구치 현)의 공금을 횡령해 영국으로 밀항한 이토 히로부미 등 5명으로 훗날 일본의 근대화를 이끄는 유력 정치가로 성장).
조슈5인방으로 불리는 친구들과 함께 유학시절 영어도 배우고 근대화된 모습을 목격하고는 개화론자로 변신하게 되는데요. (하기/일본 야마구치 현). 평범한 소년이 총리대신 까지 오르기까지 한 사람이 큰 영향을 미쳤는데요. 이토의 집 5분거리에 한 신사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더 놀라운 건 신사를 중심으로 메이지 정부의 고관대작들의 집이 포진해 있다는 겁니다. 쇼인신사-기도 다카요시(내무대신-문부대신-메이지유신 3걸), 야마가타 아리토모(총리 일본육군의 아버지), 이토 히로부미(초대총리 초대조선통감), 야마다 아키요시(초대 사법대신 근대일본법전편찬), 이노우에 마사루(철도청장관 일본철도의 아버지), 다나카 기이치(총리 1920년대 중국침략의 선봉), 가쓰라 다로(총리 가쓰라-태프트밀약), (쇼인신사/일본 야마구치 현). 이 신사는 요시다 쇼인이라는 한 사상가를 기념하는 개인신사입니다. 이곳이 일본인들에게 메이지 유신의 고향으로 불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차근 차근 풀어가 보겠습니다. (요시다 吉田松陰(1830~1858)-에도시대 말기 메이지 유신의 이론을 정립한 사상가이자 그 문하생 다수를 메이지 유신의 핵심인물로 부상시킨 교육자). 요시다 쇼인은 에도막부말 하급무사 출신의 재야학자로 이곳에서 3년간 제자들을 길러 냈습니다. 그에 대한 존경심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메이지 유신과 근대화의 영감을 준 사상가를 넘어 신으로 추앙받고 있는데요.
최근 일본정부의 유네스코 산업유산 등재시도 덕분에 관광객들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쇼인에게 절대적인 존경을 받치는 이유, 바로 신사 안에 있는 한 건물에 답이 있습니다. (쇼카손주쿠/일본 야마구치 현 쇼인신사). 쇼카손주쿠라는 이름의 사당입니다.
최태성: 정말 작은 건물이 하나 있는데요. 이 건물을 한번 들어가 볼텐데, 이곳은 조선시대로 본다면 한 시골의 작은 서당? 그 정도 되는 공간이거든요. 바로 이곳이 요시다 쇼인이 3년간 92명의 제자들을 가르쳤던 공간입니다. 이 작은 서당에서 쇼인의 사상을 이어받은 제자들은 훗날 메이지 유신을 주도하고 정부요직을 독차지 합니다. 때문에 일본근대화를 이끈 작지만 위대한 학교로 추앙받고 있는데요. 이토 히로부미 역시 이 서당출신입니다. 쇼인은 신분에 따라 제자를 차별하지 않았고 평등이라는 근대적 가치를 강조했습니다.
최태성: 이토 히로부미는요, 하급무사 집안의 아들, 그것도 양자로 입적해서 겨우 된 정말 미천한 집안 자식이거든요. 여기 보시면 아시겠지만 요시다 쇼인의 제자중에서는요. 정말 엄청난 사무라이 집안의 자손들이 굉장히 많이 있는데 만일 그 평등이란 개념이 없었더라면 이토 히로부미는 바로 이 공간에서 공부할 수 없었을 것이고 일본 근대화에 이토 히로부미는 아마 존재하지 않았겠죠. 또 하나는 요시다 쇼인 같은 경우는 역사교육을 굉장히 강조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역사교육은 생존을 위해 침략도 불사해야 한다는 제국주의적 사상으로 발전합니다.
-우리 번(현 야마구치현)이 조선과 만주를 지배하는 것이 가장 좋다.
-조선과 만주를 지배하려면 다케시마(독도)는 제일의 대기실이다.
-국력을 길러 차지하기 쉬운 조선-만주-지나(중국)를 정복한다.
-교역에서 러시아, 미국에 잃은 부분 또한 조선-만주에서의 토지로 보충해야 한다.
한반도와 아주 가까운 일본땅 야마구치현, 쇼인의 영향을 크게 받은 이곳 출신들은 훗날 조선침략의 주역으로 성장합니다.
오시마 요시마사(육군대장 관동총독)-1894년 경복궁 무단점령
야마가타 아리토모(총리 일본육군의 아버지)-1894년 청일전쟁
마우라 고로(육군중장 주한공사)-1895년 명성황후 시해
이노우에 가오루(외무대신 을미사변)-1895년 명성왕후 시해
이토 히로부미(초대총리 초대조선통감)-1905년 을사늑약
가쓰라 다로(총리 가쓰라-태프트밀약)-1910년 한일합방
데라우치 마사타케(육군대신 초대조선총독)-1910년 한국무단통치
국권침탈과 관련된 굵직한 사건들 마다 이곳 출신들이 빠지지 않는게 우연은 아닐겁니다. 이 쇼인의 사상은 훗날 정한론과 서양제국주의 세력에 맞서 일본이 아시아를 지켜낸다는 대동아 공영론의 토대가 되어 조선과 아시아는 물론 일본 또한 불행으로 몰아넣게 됩니다. 이처럼 쇼인이 꿈꾼 부국강병의 끝은 전쟁과 패망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쇼인을 배우려는 발길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쇼인 문하에서 쌓은 인맥에 영국에서 익힌 영어세력, 그리고 특유의 정치력을 무기로 이토 히로부미는 죽을 때까지 메이지 정부의 핵심으로 남습니다. 한국과 일본으로부터 전혀 다른 평가를 받는 두 얼굴의 사나이, 이토 그의 드라마틱한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최태성: 아까 봤던 기와집 위에 초가지붕이 있었잖아요 저기가 이토 히로부미가 청소년기를 보낸 곳이라면요. 바로 그 옆에 으리으리한 건물이 하나 있습니다. 이건 어떤 건물이냐하면 이토가 도쿄에서 살았을 때의 저택이에요. 도쿄 시나가와라는 곳에서 이렇게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살았는데 그중 일부를 조슈번의 유지들이 돈을 주고 사와서 여기 다시 복원을 해놓은 건물입니다. 별장의 삼분의 일만 옮겨온 것인데요. 규모와 호화로움에서 달라진 위상이 느껴집니다. 저택내부는 기념관으로 쓰이는데요. 이토가 사진 찍기를 좋아했나 봅니다. 1800년대의 인물임에도 방대한 양의 사진자료들이 방문객들을 맞았습니다.
최태성: 이와쿠라 사절단, 여기 지금 이토 히로부미 얼굴이 보이고 있습니다. 이와쿠라 사절단이야 말로 일본 개항의 시대를 본격적으로 알리게 되는 그 출발점이 되거든요. 1871년부터 일년 10개월간 미국과 유럽의 발전상을 이잡듯이 배워온 이와쿠라 사절단은 근대일본의 산업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합니다. 유학경험으로 이미 서양 전문가로 뽑히고 있었던 이토는 여기에 핵심멤버로 참여하게 됩니다. 덕분에 의회구성과 천황 중심의 메이지 헌법제정을 주도합니다. 출세에 가속도가 붙은 건 당연한 일이죠.
이렇게 개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다가 여기 보니까 ‘초대내각 총리대신에 취임했다’ 라고 써있네요. 이 과정 속에서 일본의 헌법, 지금 일본 왕을 중심으로 한 정치체제를 구축해 놓은 인물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 라고 볼 수 있습니다. 조선침략 후 그의 성공이야기는 우리의 슬픈 역사이기도 합니다.
최태성: 여기는 또 한국 통감에 취임한 그 사진이 나와 있죠. 이토 히로부미 같은 경우에는 청소년기엔 정말 과격한 모습이 있었는데 관리가 되면서 특히 구미열강에는 굉장히 신중한 모습들을 보이죠. 반면에 중국이라든지 한국에 대해서는 청소년기의 과격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아마 그런 사진의 연장선상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지금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의 황태자 영친왕과 함께 사진을 찍는 모습, 아, 식민지로 가는 과정을 밟고 있는 모습이고요. 그 아래 보니까 사진 한 장이 있는데 이걸 또 어떻게 봐야 되나요. 이토가 한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에요. 한국의 왕실 가족들과 함께, 한복을 입은 이토의 모습이 이채로운 사진 한장, 바로 황족이자 친일매국에 앞장섰던 이재용 내외가 도쿄에 가서 이토 내외에게 한복을 선물한 것을 기념해 찍은 사진이라고 합니다. 이토에게 식민지배를 즐기는 오만함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이죠. ‘하얼빈역에서 암살당하다’, 하얼빈 역에서 내리고 있는 모습이고요. 출세의 신화, 그러나 어느덧 침략의 화신이 된 그는 결국 조선의 청년 안중근의 손에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최태성: 실례하겠습니다. 여기는 어떻게 오셨나요?
고바야시 쇼다/관광객: 야마구치 현은 8명의 일본 총리를 배출해낸 지역입니다. 일본근대화에 있어서도 중요한 곳이죠. 그중 초대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의 저택이 있다고해서 와보고 싶어 가족들과 들렀습니다. 어떻게 하면 두나라의 역사인식의 차이를 좁힐 수 있을지 고민스러웠습니다.
이토 히로부미의 삶을 통해서 완전히 평민인 정말 미천한 계급에서 일본 최고의 실력자가 된 그의 모습을 통해서 바로 일본 개항기에 보여줬던 신분제 해체, 그리고 평등사회를 지향하는 근대의 모습을 한번 살펴볼 수 있었고요. 그리고 그가 걸어온 족적 속에서 우리가 갖게 되는 가슴 아픈 역사 바로 한일관계의 뒤틀린 현장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아픈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또는 지금의 일본을 읽기 위해 일본개항사 여행은 계속됩니다. (EBS 세계견문록 아틀라스 145회. 일본개항사-1부 “이토 히로부미의 두 얼굴”에서 정리).
① 이토 히로부미와 복어 이야기 속에는 300년 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루지 못했던 중국대륙진출의 깃발을 드디어 이토 히로부미가 이뤄냈다는 이야기가 담겨져 있죠. 그들의 꿈이 이루어진 겁니다. 그런데 그 꿈 속에는 바로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가 담겨져 있음을 잊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② 이토 히로부미는 한일간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인물입니다. 메이지 정부 초대총리로 총 네번이나 총리를 역임했고 헌법을 제정해 근대국가 건설을 주도했습니다. 1984년까지 일본 지폐의 모델이었을 정도로 그는 일본이 자랑하는 근대인물입니다.
③ 이토 히로부미는 왕정복고와 외세배척이란 두가지 기치를 내걸고 청소년기에 굉장히 과격한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암살을 도모하고 영국 대사관 방화를 저질렀던 이토는 돌연 영국유학을 감행합니다. 그런데 영국은 어떻게 저렇게 강한 나라가 되었을까? 유학시절 영어도 배우고 근대화된 모습을 목격하고는 개화론자로 변신하게 됩니다.
④ 평범한 소년이 총리대신까지 오르기까지 한 사람이 큰 영향을 미쳤는데요. 요시다 쇼인이라는 한 사상가입니다. 요시다 쇼인(1830~1858)은 에도시대 말기 메이지 유신의 이론을 정립한 사상가이자 그 문하생 다수를 메이지 유신의 핵심인물로 부상시킨 교육자입니다. 요시다 쇼인은 에도막부말 하급무사 출신의 재야학자로 이곳에서 3년간 제자들을 길러 냈습니다. 일본인들의 그에 대한 존경심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메이지 유신과 근대화의 영감을 준 사상가를 넘어 신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⑤ 요시다 쇼인이 3년간 92명의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쇼인의 사상을 이어받은 제자들은 훗날 메이지 유신을 주도하고 정부요직을 독차지 합니다. 이토 히로부미 역시 요시다 쇼인의 문하생이죠. 쇼인은 신분에 따라 제자를 차별하지 않았고 평등이라는 근대적 가치를 강조했다고 합니다. 또 하나는 요시다 쇼인은 역사교육을 굉장히 강조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역사교육은 생존을 위해 침략도 불사해야 한다는 제국주의적 사상으로 발전합니다.
⑥ 한반도와 아주 가까운 일본땅 야마구치현, 쇼인의 영향을 크게 받은 이곳 출신들은 훗날 조선침략의 주역으로 성장합니다. 오시마 요시마사(육군대장 관동총독)-1894년 경복궁 무단점령, 야마가타 아리토모(총리 일본육군의 아버지)-1894년 청일전쟁, 마우라 고로(육군중장 주한공사)-1895년 명성황후 시해, 이노우에 가오루(외무대신 을미사변)-1895년 명성왕후 시해, 이토 히로부미(초대총리 초대조선통감)-1905년 을사늑약, 가쓰라 다로(총리 가쓰라-태프트밀약)-1910년 한일합방, 데라우치 마사타케(육군대신 초대조선총독)-1910년 한국무단통치
⑦ 이 쇼인의 사상은 훗날 정한론과 서양제국주의 세력에 맞서 일본이 아시아를 지켜낸다는 대동아 공영론의 토대가 되어 조선과 아시아는 물론 일본 또한 불행으로 몰아넣게 됩니다. 이처럼 쇼인이 꿈꾼 부국강병의 끝은 전쟁과 패망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여전히 일본에서 쇼인을 배우려는 발길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쇼인 문하에서 쌓은 인맥에 영국에서 익힌 영어세력, 그리고 특유의 정치력을 무기로 이토 히로부미는 죽을 때까지 메이지 정부의 핵심으로 남습니다. 한국과 일본으로부터 전혀 다른 평가를 받는 두 얼굴의 사나이, 이토 히로부미,
⑧ 1871년에 일본의 이와쿠라 사절단, 이와쿠라 사절단이야 말로 일본 개항의 시대를 본격적으로 알리게 되는 그 출발점이죠. 1871년부터 일년 10개월간 미국과 유럽의 발전상을 이잡듯이 배워온 이와쿠라 사절단은 근대일본의 산업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합니다. 유학경험으로 이미 서양 전문가로 뽑히고 있었던 이토는 여기에 핵심멤버로 참여하게 됩니다. 덕분에 의회구성과 천황 중심의 메이지 헌법제정을 주도합니다. 출세에 가속도가 붙은 건 당연한 일이죠.
⑨ 메이지유신(明治維新)-1868년 3월 14일 16세의 어린 일왕(日王)이 또박또박 대국민 선언문을 읽어 내려갔다. 그동안 꼭두각시에 불과했던 천황이 국가를 직접 통치한다는 친정(親政) 선언이었다. 일본 근대 국가 수립과 제국주의의 원동력이 된 메이지(明治) 유신의 개막이었다.
일본의 근대화는 자생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이른바 검은 배(黑船) 네 척을 끌고 에도 만 입구에 나타났다. 일본이 세계 무대에 데뷔하게 된 침입이었다. 페리 제독은 일본에 통상을 요구했고, 그간 일본을 지배해 온 에도 막부는 미국의 위세에 굴복해 불평등 조약을 맺어야 했다.
페리 제독(가운데)과 미국 선원들
타의에 의한, 그것도 무력에 의한 개국으로 250년에 걸친 일본의 쇄국 정책은 종말을 고했다. 이것이 신호탄이 되어 서구 제국주의 열강들의 침탈이 본격화되었다. 막부는 열강들과 싸울 때마다 번번이 패했고, 러시아,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과 차례로 불평등한 통상 조약을 맺었다. 당연히 막대한 배상금이 따라붙었다.
가뜩이나 재정 악화와 기강 쇠퇴로 흔들리던 막부의 권위는 끝간 데 없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위기 상황에서 막부는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이 틈을 타 그간 지배 체제로부터 소외받던 하급 사무라이들과 신흥 상인들을 중심으로 무능한 막부를 대신할 새로운 체제를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확산되었다. 이들은 존왕양이(尊王攘夷, 천황을 받들고 오랑캐를 배척함)를 기치로 천황 중심의 정치 체제를 세우고자 했다.
일본의 천황은 중국의 황제나 조선의 왕과는 성격이 전혀 달랐다. 천황은 명목상으로는 신(神)으로서 절대적이고 신성한 존재였지만, 실제로 정치적 권한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무기력한 존재였다. 11세기경 사무라이들이 막부를 세우고 정권을 장악한 이래 천황은 권력에서 소외된 채 제사나 주관하고 소일하며 살았다. 실질적인 권력은 사무라이 정권인 막부가 쥐고 있었고, 나라도 그들이 통치했다. 이것이 막부로 대변되는 일본의 오랜 정치 체제였다. 17세기경부터 천황은 백성들에게 잊힌 상태로 존폐가 불안한 상황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젊은 하급 사무라이들을 중심으로 막부를 타도하고 천 년 전 고대 천황제 시절과 같이 천황을 권력의 중심에 복귀시키자는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1860년대의 사무라이들
1868년 존왕파는 쿠데타를 일으켜 에도 막부를 무너뜨렸다. 막부군은 병력이 두 배 이상 많았지만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존왕파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마지막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에도를 장악하고 있었으나 새 정권이 대군을 편성해 정벌을 서두르자 싸워 보지도 않고 무릎을 꿇었다. 이로써 막부와 쇼군 제도가 사라지고, 700년이 넘게 이어온 봉건적 무사 정치 질서가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렸다. 천황이 기거하는 수도는 교토(京都)에서 막부가 위치했던 도쿄(東京)로 옮겨졌다. 지난 천 년간 상징적인 존재였던 천황이 현실 정치 세계로 화려하게 복귀했음을 알리는 천도(遷都)였다.
그러나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고 해서 소년 천황이 직접 유신을 설계하고, 실제로 절대 군주의 권력을 휘둘렀던 것은 아니다. 친정을 선언함으로써 천황은 다시 일본 역사의 전면에 섰지만, 이는 단지 천황의 이름으로 정치가 이루어진다는 의미에 불과했다. 유신의 지도자들은 부국강병을 위해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를 필요로 했고, 이를 위해 천황이라는 편리한 기제를 이용했다. 천황을 국가와 민족을 통합시키는 상징이자 절대적 존재로 상정하고, 그 천황의 뜻으로 국가가 움직인다면 어떤 정책도 반대나 저항이 있을 수 없었다. 아니, 있어서는 안 되었다.
메이지 유신은 천황의 작품이 아니라 신진 사무라이 세력이 구상하고 집행한 것이었다. 메이지 유신이 드라마에 즐겨 비유되는 것처럼 천황은 배우로서 드라마 속 역할을 연기했을 뿐이다.
정권을 장악한 신흥 세력들은 곧바로 국가 대개조 사업에 착수했다. 먼저 지방분권 사회였던 일본을 중앙집권 사회로 뜯어고쳤다. 1869년 신정부는 영주들이 갖고 있던 영지 지배권을 천황 아래로 모으고 행정 기구 개편을 통해 구체제의 ‘번(藩)’을 ‘현(縣)’ 체제로 개편했다. 영주들은 이제 현의 지사가 되었다. 이 현 제도는 오늘날까지 일본의 지방행정 체제로 유지되고 있다.
여기까지는 근대화라는 집을 짓기 위한 터를 고르는 작업에 불과했다. 부국강병이라는 시공술을 통해 강력한 근대 국가 일본이라는 거대한 집을 짓는 공사가 숨 가쁘게 이어졌다. 메이지 정부는 먼저 서양의 선진국에 대규모 사절단을 보내 선진 문물을 시찰하도록 했다. 메이지 시대의 기본 이념은 ‘화혼양재(和魂洋才)’, 즉 일본의 정신을 유지하되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화혼’과 ‘양재’가 균형 있게 도모된 것은 아니었다. 방점은 ‘양재’에 찍혀 있었다.
사절단이 보고 듣고 배워 온 제도들은 곧바로 일본에 도입되었다. 먼저 신분 제도가 철폐되어 해방된 천민과 평민들은 자본주의 경제를 지탱하는 값싼 노동력을 제공했다. 또한 징병 제도가 실시되면서 사무라이만이 가졌던 군사적 임무가 국민 모두에게 부과되었고, 이로써 사무라이의 특권이 사라졌다. 이에 더해 폐도령이 내려져 사무라이가 칼을 차는 전통도 금지되었다. 이제 사무라이는 평민과 더 이상 구분되지 않았다.
또한 근대식 학교가 설립되어 의무교육 제도가 실시되어 소학교 6년, 중학교 6년, 대학교 4년의 학제가 시행되었다. 소학교는 의무교육이었다. ‘식산흥업(殖産興業, 생산을 늘리고 산업을 일으킴)’이라고 하여 정부가 팔을 걷고 나서서 근대 산업을 보호하고 육성했다. 많은 산업을 국유화해서 정부가 직접 발전을 주도했다. 근대적 은행이 만들어졌고, 철도가 부설되었다.
근대 도쿄의 풍경
1800년대 긴자 거리를 그린 목판화
메이지 시대의 경제 발전은 부국강병의 기치 아래 철저히 국가의 주도로 진행되었다. 일본이 장차 군국주의와 제국주의로 나아가는 불행의 씨앗은 이때부터 잉태되었다. 메이지 개혁이 아래로부터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철저한 ‘위로부터의 근대화’였다는 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유신 당시 집권 세력과 다른 목소리를 내는, 이른바 자유민권 운동도 있었지만 지배층은 이들을 철저하게 탄압했다.
어쨌든 메이지 정부는 서구에서 수백 년에 걸쳐 이루어진 일들을 십수 년 만에 성공적으로 이루어 냈다. 유신의 주역들은 투철한 국가관으로 무장한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이었다. 유신을 처음 단행할 당시 이들의 나이는 대부분 30대에 불과했다. 이들 중 한 사람이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토 히로부미다. 그는 한국인들에게는 식민 침탈의 원흉이지만 일본인들에게는 근대화의 아버지요, 영웅이다. 지금까지 일본에서 출간된 그의 전기만 해도 수십 종에 이른다.
이토 히로부미는 하층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총리만 네 차례를 지낸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는 이 밖에도 일본의 근대적 헌법과 형법을 기초했고, 전권대사로 일본 외교의 큰 그림을 그렸으며 장관, 정당 대표, 조선 총독, 추밀원 의장 등 정계의 요직을 거쳤다. 1909년 그는 조선의 독립 운동가 안중근의 총탄에 맞아 사망했다.
‘정한론(征韓論)’은 이토 히로부미가 처음 생각해 낸 것이 아니다. 일본이 유신으로 근대화를 완성하기 전부터 확산되기 시작했다. 일찍이 개화파의 선구자 요시다 쇼인은 “일본이 독립하기 위해서는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라고 주장해 왔다. 정한론 논쟁은 조선을 침략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의 논의가 아니라 언제 침략하느냐에 관한 것이었다.
일본은 20년 전 미국의 페리 제독에게 당한 방법 그대로 조선을 공략했다. 1875년 9월 일본은 수차례에 걸친 통상 요구가 수용되지 않자 해안 탐측을 핑계로 강화도에 운요호를 정박시켰다가 조선 수군과 충돌했다. 이를 구실로 일본은 공격을 개시하여 조선군 35명을 죽이고 16명을 포로로 잡은 뒤 조선 조정의 사죄와 개항을 요구했다. 그 결과 양국 간 최초의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