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약 60여년 전에 이태리에서 에디오피아의 오지마을로 가신 젊은
신부님은 그 곳에 있는 나무에 성모상과 십자가를 모시고 미사를 드리셨다.
당시 신부님께서 그 근처에 심은 나무들이 지금은 아름드리 나무 숲이 되어있고, 성당과 학교도 지어졌는데
아직도 신부님께서는 80세가 훨씬 넘은 연세에도 직접 미사를 집전하고 계신다.
* 위의 사진은 소금을 파는 소녀....,
몇 년전, 아들과 함께 오랜 세월동안 알고 지냈던 로돌프 신부님(Fr. Rodolfo Cipollone)을 만나 뵈러 에디오피아로 가게 되었다. 로돌프 신부님은 이태리 신부님으로 50년이 넘게 에디오피아의 가장 오지 마을에서 평생을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해 오신 분이시다.
에디오피아라는 나라는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 이외에는 거의 아는 것이 없었다. 단지 아프리카라서 무척 더울 거라는 것과 모기에 물리거나 야채를 날걸로 먹으면 안 된다는 상식만으로 예방접종 조차도 하지 않고 떠났다. 우리가 가는 곳은 에디오피아의 수도인 아디스 아바바(Addis Ababa)에서 자동차로 약 6시간을 가는 아와사(Awassa)로 가서 또 다시 비포장도로를 약50분간 들어가야 하는 플라사(Fullasa)라고 하는 오지마을이다.
우리는 긴 비행끝에 새벽에 에디오피아의 수도인 아디스아바바 공항에 도착을 했는데 로돌프 신부님과 젊은 신부님인 타페쎄 신부님께서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셨다. 그 전날 오지마을에서 출발해 하루종일 운전을 해서 아디스 아바바에 있는 한 수도원에서 일박을 하고 나오신 것이다.
오랜 여정 끝에 신부님이 계시는 플라사로 갔다. 길도 없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빗물을 받아 마신다는 그 곳......., 그 성당에는 36세때 그 곳으로 오셔서 78세가 되신 몬세토 원장신부님과 68세의 로돌프 신부님, 그리고 타페쎄 신부님과 세분의 인도 수녀님이 계신다. 로돌프 신부님께서는
"약 2년 전에는 한국 수녀님도 두 분이 계셨어요. 수녀님들은 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고, 산모들이 아기를 낳을 때 도와주고, 이 곳 주민들이나 아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있어요."라는 설명 해 주셨다. 작은 성당과 사제관에는 얼마 전부터 자가발전을 해서 전기가 들어오기는 하지만 밤 9시가 되면 저절로 꺼져 버린다. 어떻게 그 곳은 달도 별도 없는지......, 간혹 가다가 "우~, 우~~"하고 하이에나가 운다.
"그 전에 있던 한 수녀님은 비만 오면 밤에 무서워서 밖에 나가지도 못했어요."라고 말씀 하셨지만 나는 비가 오지 않은 밤에 집 안에서도 찰흙 같은 어두움이 더 무서웠다.
그렇게 첫째 날을 지내고 두 번째 날부터 우리는 아침 일찍부터 더 오지 마을에 있는 작은 성당들로 미사를 집전하러 가시는 신부님을 따라 다녔다.
"이런 성당들이 이 주변에 65개가 있는데 나를 비롯해 두 분의 신부님이 번갈아 가며 미사를 드리러 가도 약 두 달에 한 번꼴로 밖에 신자들을 만날 수가 없어요. 나는 평상시에는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데 앞으로 70세가 넘으면 너무 위험해서 차로 다녀야겠어요."라고 말씀 하시는 신부님은 험한 길을 잘도 운전해 나가셨다.
길을 지나가다 아이들은 우리가 탄 차를 보면 "아빠, 아빠"라고 반갑게 손을 흔든다. "아빠"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아버지"라는 뜻으로 신부님을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덜커덩거리는 차를 운전해 가시던 신부님께서
"아! 그리고 이 지역은 얼마 전까지 부족 간의 싸움으로 60명이상의 사상자가 생긴 곳이예요. 이곳 사람들은 종교보다도 자신의 부족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어요."라는 설명을 해 주셨다.
* 오지 마을의 성당 모습, 혼자서 미사 준비를 하고 계시는 몬세토 원장신부님
* 성당 밖에서...., 어딜가나 사진 찍는걸 무척 좋아하고 신기해 한다.
성당 지붕은 양철로 만들었고, 외벽은 흙과 진흙으로 반죽을 해서 만들었다. 바닥은 그냥 흙이고 의자 몇 개가 있을 뿐이었다. 신부님께서는 손수 미사 준비를 하시고, 미사가 시작되기 전에는 모든 신자들이 거의 성사를 보는데 어떤 때는 두 시간씩 걸릴 때도 있다고 한다. 약 두 달이나 세 달에 한 번씩 미사를 드려야 하는 신자들로서는 그 시간이야말로 하느님을 만나는 가장 귀한 시간이니까 아이들까지 모두 미리 와서 북을 치면서 노래를 부르거나 기도문을 열심히 외우고 있었다. 미사가 다 끝나면 신부님께서는 가지고 간 사탕을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시는데 어떤 곳에서는 그 사탕이 모자라 못 받은 아이들과 엄마들이 아기를 안고 울먹이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다. 미사 후에는 언제나 그 곳의 사람들은 신부님께 대접하기 위해 여러가지 곡물을 찧어 만든 음식을 대접하는데 대충 부어주는 탁한 물에 손을 씻고 맨손으로 먹는다. 부락민들은 우리가 다 먹을 때까지 함박웃음을 지으며 기다리며 서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음식과 물이 귀한 그 곳에서는 오래간만에 오시는 신부님께 드리는 따스한 마음이리라.
어느 날, 그날 도 오지마을에서 미사를 드리고 산길을 지나는데 로돌프 신부님께서 "잠깐 이리로 와 보세요."라고 안내를 해서 가 보니 시뻘건 진흙물이 고여 있는 곳에서 한 여자아이가 물동이로 물을 뜨고 있었다.
"이곳 주민들은 이 물을 떠서 식수로 사용하고 있어요."
"그래도 병이 나지 않나요?"
"여기 사람들은 그런대로 면역이 생겨서 괜찮은 것 같아요. 하지만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 저 물을 마시면 병이나요."
가슴이 짠해 온다. 시뻘건 흙탕물을 식수로 마시는 사람들......, 어딜 가나 아이들이 물통을 들고 물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는 모습을 쉽게 볼 수가 있었다. 대 여섯 살 쯤 된 여자아이는 뒤에 짐을 잔뜩 지고 하염없이 걷고 또 걷고 있었다
"이 곳에서는 한 시간씩 걸어 다니는 것은 보통이고, 저렇게 읍내에 가서 곡물을 팔아 생계를 꾸리기도 해요. 보통 하루종일 걷기도 하고, 여기서는 당나귀가 아주 요긴한 교통수단이 되지요."
그러고보니 당나귀에 짐을 잔뚝 싣고 가는 사람들이 많이 눈에 뜨인다.
어느 날에는 동고라 지역에 있는 성당을 가게 되었다. 그 성당은 60여년 전에 이태리에서 오신 신부님께서 처음에는 병원과 학교를 지으셨는데. 성당이 없어 나무에 자연적으로 파인 곳에 성모님 상과 십자가를 모시고, 그 나무 밑에서 미사를 드렸다고 한다. 그 때 신부님이 그 근처에 심으신 나무들이 지금은 울창하고 아름다운 숲이 되어 있었다. 86세가 된 고령의 신부님께서는 아직도 그 곳에서 미사를 드려주고 계셨다.
홍콩에 돌아오기 마지막 전날에는 로돌프 신부님을 따라 성당 근처의 마을을 걸어 다니기로 했다. 어느새 우리 뒤에는 많은 아이들이 따라 다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붕은 볏 집단으로 만들고 벽은 진흙으로 만든 고조베트(에디오피아의 전통가옥)에서 살고 있는데, 내 손을 잡고 있던 소녀가 이끄는 대로 그 집안을 들어가 보았더니 대 낮인데도 한치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깜깜했다. 그 작은 집에 엄마, 아빠, 그리고 대 여섯명의 아이들이 가축들과 함께 살고 있다고 한다. 언덕을 막 넘는데 멀리 보이는 집에서 한 청년이 헐레벌떡 뛰어 왔다.
"아침 식사를 하지 않았으면 함께 먹자"고 했단다. 하지만 우리는 방금 식사를 끝난 후라 함께 가지는 않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결코 가난하지 않은 나눔의 정을 느낄 수가 있었다.
* 사진은 로돌프신부님 (Fr. Rodolfo Cipollone)과 건훈이, 항상 밝게 웃는 이쁜 아이들.....,
홍콩으로 오는 날은 가장 연세가 많으신 몬세또 원장신부님께서 하루 종일 운전해야 하는 그 먼 길을 마다 않으시고 우리를 공항까지 데려다 주셨다. 홍콩으로 돌아오니 갑자기 세상이 밝아졌다. 현란한 조명과 콸콸 나오는 수돗물, 그리고 무엇보다도 따스한 물에 씻을 수가 있다는 즐거움, 편안한 화장실......, 그 곳에 있는 동안 밤마다 왱~ 왱~거리는 모기에게 얼굴은 온통 수 십군데를 물렸고, 하이타이 풀은 물에 그냥 설거지를 하는 거 도와주다가 손은 거칠어졌는데 이곳에 오니 금방 부드러워졌다. 모든 환경이 열악한 그 곳에서 평생을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굶주리는 사람들과 함께 보낸 많은 신부님들과 수녀님들, 그리고 사탕 하나를 못 받아 울먹이는 아이들......, 어딜 가나 우리를 따라다니던 아이들의 "까르륵~ 까르륵~"하는 해맑은 웃음 소리가 귀에 멤돈다. "쎄나미 뗄나무(평화를 빕니다)"
글, 사진 : 박동주 요안나
* 위 글은 홍콩 교민소식지와 홍콩 한인성당 주보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