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오화변 최악의 비극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당시의 시선>
사도세자의 죽음은 당시에도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애초에 아버지가 아들을, 그것도 군왕이 후계자인 세자를 경악스러운 방법으로 죽인 사건이니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당연히 여러 말들이 나올만 했다.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을 지을때만 해도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서는 두 가지 시선이 있었다.
하나는
사도세자가 죽을 죄가 있어서 죽었다며 사도세자의 죽음을 정당화하는 시선이었다.
나머지 하나는
사도세자는 죄도 없고 병도 없는데 모함을 받아 죽었다는 것이었다. 바로 이것이 당쟁희생설이다.
혜경궁은 한중록에서 이 두가지 견해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을 드러내었다.
참고로
사도세자가 죄도 없는데 죽었다는 당쟁 희생설은 그 근원을 정조가 지은 사도세자 지문과 조한규의 임오본말에 있었다. 하지만 사도세자 지문은 애초에 실록 등과 다른 내용이 보이는데다가 지문이란 것 자체가 애초에 그닥 사료로써 신뢰할만한 부분이 되지 못하고 임오본말은 출처 자체가 불명확한 것들이 많다.
그래서 본래 대중들에게 인기가 있던 것은 사도세자가 당쟁의 희생양이 되기는 했지만 실제 미치기는 했다는 설이었다.
- 사도세자의 죽음은 과연 어떤 이유로 촉발되었을까? -
<절충설>
일단 편의상 이렇게 용어를 임의로 정의한 이 설은 한국에서 본래 90년대 중후반까지 대중들 사이 정설로 알려진 설이다. 이 설에 의하면 사도세자는 대리청정을 하게 되면서 남인, 소론, 북인 등 노론에 소외된 세력들이 사도세자를 등에 업고 정권을 장악하려고 했고 여기에 노론과 정순왕후, 숙의 문씨 등이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를 이간질을 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영조는 세자를 자주 질책했고 이런 질책을 못 이긴 세자가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며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다는 설이다.
사실상 이 설은 어떤 면에서는 당쟁희생설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사도세자의 광증과 그로 인해 벌어진 유혈 사태 자체는 부정하지 않고 관서 유람을 유람으로 판단한다는 점에서 당쟁희생설과는 차이가 있다.
1996년 출판된 박영규의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이 이 견해를 따르고 있으며
네이버 백과사전 등도 이 절충설의 관점을 따르고 있다.
<당쟁 희생설>
당쟁 희생설. 이 설은 사도세자는 미치지 않았고 죄도 없는데 소론 등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자 이를 경계한 노론의 이간질로 인해 희생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설은 이미 조선시대때부터 전해져 내려오던 것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다시 학술적인 논의 선상에 떠오르게 된 것은 1966년 성낙훈의 '한국당쟁사'로 인해서였다. 이 한국 당쟁사에서는 임오본말에 나온 두어가지 이야기를 근거로 사도세자의 당쟁 희생설을 주장했다. 이후 이 설은 이은순에 의해 체계화되었다. 이은순은 1968년에 쓴 논문에서 이 논의를 구체화시켰고 1988년 저술한 '조선후기당쟁사 연구'에서 이를 최종적으로 정리하였다. 그리고 10년후에 사도세자의 고백이 출판되었다.
- 당쟁희생설을 유명하게 만든 이덕일
이 설은 전반적으로 영조실록이나 한중록보다는 정조가 지은 지문을 더욱 중시하는 경향을 띄고 있다.
본래 1998년까지는 그닥 대중들한테 유명하지는 않았지만 영향을 안 준 것은 아닌 듯 하다.
일단 절충설부터가 광증의 긍정 유무를 빼면 당쟁희생설과 상당히 유사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대중들에게 완전히 소개가 안 된 것도 아니다.
일단 1997년에 출판된 윤승운 화백의 맹꽁이서당부터만 하더라도 당쟁희생설적인 견해를 보이고 있다.
윤승운 화백은 자신의 작품에서 사도세자의 광증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언급도 하지 않았고 영조와 사도세자의 사이가 나빠진 것은 전적으로 노론 간신배들과 화완옹주, 숙의 문씨 때문인 것으로 서술하였다.
다만 윤승운 화백의 경우 관서유람은 단순 유람으로 생각했다.(1)
또한 1998년 4월 웅진 출판에서 출판한 '21세기웅진학습백과'도 비슷한 견해를 보였다.
만약을 위해 이 백과사전에 수록된 '장헌세자' 부분을 전부 기록하자면 다음과 같다.
'조선 영조의 둘째 아들. 사도 세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어머니는 영빈 이씨이며, 부인은 영의정 홍봉한의 딸인 혜경궁 홍씨이다. 이복 형인 효장 세자(뒤에 진종으로 추존)가 일찍 죽어, 2세 때인 1736년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영조 때에는 노론 세력이 우위를 지키는 가운데 탕평이 전개되었는데, 세자는 어려서부터 노론의 전제에 반발하고 약세에 몰린 남인과 소론에 우호적이었다. 1749년(영조 25)에 세자가 대리청정을 하게 되자 노론은 강한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또한 노론가문 출신인 영조의 계비 정순 왕후 등의 견제로 영조와 사이가 나빠졌는데, 세자의 광증에 가까운 방종한 행실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1762년에 노론 척신들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을 상소로 올리자, 영조는 크게 노해 국가의 장래를 위한 일이라며 세자에게 자결을 명했다. 세자가 이를 따르지 않자 끝내는 서인으로 폐하여 뒤주 속에 가두어 죽였다. 죽은 후 사도라는 시호를 내렸다.
아들 정조가 즉위하자 장헌으로 추존되고 1899(광무 3)에 다시 정조로 추존되었다. 이름은 선, 자는 윤관, 호는 의재이다.'
전반적으로 윤승운 화백과 21세기 웅진 학습백과의 견해 역시 당쟁희생설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두 권 모두 세자의 행실 자체도 그닥 좋지 못한 편임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기는 했지만 모두 이를 광증의 수준으로까지는 보지 않았다. 잘해야 '광증에 가까운' 수준이었지 광증 그 자체로 인해 벌어진 것으로 보지는 않은 것이다.
이외에도 당쟁희생설을 다룬 서적이나 백과사전은 좀 더 있지 않을까 싶지만 미처 확인하지 못 했다.
이 설이 대중들에게 본격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사도세자의 고백' 덕분이다.(2)
이덕일의 이 책은 삽시간에 유명세를 떨치며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대중들의 생각을 바꿔놓았다.
다만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이덕일이 이 주장을 최초로 제기했다거나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덕일은 이은순, 성낙훈 등이 주장했던 것을 좀 더 살을 붙이고 하는 식으로 해서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고 각인시켰을 뿐이다.
- 이 설대로면 홍봉한은 사위를 버린 쓰레기 장인이 되버린다. 그러나 과연 진실은 어땠을까?-
<절충설과 당쟁 희생설 비판>
그러나 이 두 가지 설은 문제가 있다. 이 두 가지 설은 모두 '노론이 이간질을 했고 여기에 정순왕후, 숙의 문씨 까지 끼어들어갔다.'는 명제를 따르고 있다. 그런데 과연 이간질이라는게 존재는 하긴 했을까?
실록을 살펴보면 도저히 이간질이 있었다고 보기 힘든 대목들이 상당하다. 일단 빙애의 죽음만 하더라도 영조가 알아채는데 1년은 족히 걸렸다. 더군다나 영조는 나경언의 고변 당시 "사모를 쓴 자들은 모두 나를 속였으니 나경언이 없었더라면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 라고 하였다. 나경언의 고변장에 자기가 처음 보는 것들이 아주 많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더군다나 그나마 빨리 알아챈 것이 관서유람인데 그것도 족히 5달은 족히 지나서야 알았다. 과연 이간질이 있었다면 이걸 영조가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았을까? 거짓을 고할 것 없이 사실대로만 고해도 이간질 효과는 100% 장담할 수 있는데?
물론 관서유람의 경우는 영조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할 지 결정하느라 시간을 질질 끌었다는 해석도 존재한다.(3) 하지만 실제로 관서 유람이 역모라고 한다면 어떻게 할 지 생각하느라 시간을 질질 끌어야 했을까? 바로 신속하게 대응하는 것이 정상이다. 아니 그 이전에 실록의 묘사등을 보면 암만 봐도 영조는 관서 유람 자체를 인지하지 못 했고 사도세자는 어떻게든지 관서 유람에 대한 정보가 영조에게 들어가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더군다나 일이 오래 끌었다고 하기에는 너무 작은 규모로 끝났다는 점도 더더욱.
무엇보다 영조는 이미 상당히 고령이었다. 사도세자가 죽고도 십수년을 더 사는 위용을 과시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영조는 이미 60대였다. 조선시대 기준으로 언제 붕어해도 이상할 것은 하나도 없었다. 자. 과연 이런 상황에서 차세대 후계자와 군왕 사이를 이간질 할 미친 신하가 과연 있을까? 남동생도 없는데? 유영경이 광해군을 몰아내려고 했다지만 이 때는 영창대군이란 대안이 있었음을 기억한다면 견적이 나온다.
여담격이지만 정순왕후나 숙의 문씨의 개입 가능성도 문제가 있다. 애초에 정순왕후가 입궁한 것은 1759년. 하지만 최복 시위라던지 기타 정황등을 봤을 때 이미 정순왕후가 오기 전부터 두 사람 사이는 최악에 가까웠다. 이간질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이미 사이가 안 좋을 대로 안 좋아진 사이이다. 이 상황에서 과연 정순왕후가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을지부터가 의문이다.
숙의 문씨의 경우 실록에서도 기록되어있지만 사실상 정조와 혜경궁의 일방적 주장에 가깝다.
야사가 전해지는 게 있지만(4) 야사는 야사일뿐이다. 더군다나 아들을 낳지 못한 상황에서 이간질로 숙의 문씨가 어떤 이득을 취할 수 있는지부터가 의문시되는 판이다.
그리고 또 하나. 위의 두 가설은 모두 사도세자가 소론에 호의적이었다는 명제에 동의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사도세자가 소론 등에 호의적이었는지도 의문이다. 물론 한중록 등에도 그렇게 기록되어있다고 하고 사도세자를 키운것이 아무래도 친 소론적일수 밖에 없는 경종의 궁녀들이기는 했다. 하지만 이것을 사도세자가 직접 드러냈던 것 같지는 않다. 흔히 사도세자의 친소론적 태도가 드러났다고 하는 나주 벽서 사건 당시의 이종성 처벌 기각만 하더라도 영조의 입김에 의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박문수, 이천보를 살려준 것이 영조이고, 천의소감으로 노론세력에 불호령을 내린 것도 영조라는 것을 기억하자. 아니. 애초에 대리청정 자체부터가 말만 대리청정이었고 사실상 영조가 예전처럼 다 처리하던 상황에서 사도세자의 주관이 얼마나 드러났을지부터가 의문이다. 조재호의 죽음과 관련된 부분은 이전 편에 설명해놨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마지막으로 이 부분에 대해 절충설이나 당쟁희생설, 특히 당쟁희생설은 실록보다는 정조가 지은 지문이나 몇몇 사찬역사서에 더욱 의존한다는 점을 언급하고 싶다. 어떤 것의 신뢰성이 더 높은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긴다.
<당쟁 희생설에 대한 반격>
그러나 어찌되었든 당쟁희생설은 대중들 사이에서 급속하게 퍼져나갔다. 이덕일의 또 다른 대표적인 주장. 즉 정조 독살설이 이전부터 역덕들의 집중 공격을 받은 데다가 결정적으로 2009년에 발견된 정조 어찰첩 건으로 대중들 사이에서도 조금씩 흔들리던 것과 달리 사도세자의 당쟁 희생설은 나름 굳건한 지위를 유지하는 듯 했다. 그러나 2010년 출간된 신작 대중서 하나가 이를 강력히 비판했다. 바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5 경종, 영조실록'이었
- 박시백. 그는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하여 의문을 품게 된다.
박시백 화백은 자신의 만화에서 사도세자 문제를 책 전체 분량의 3분의 1을 할애하면서 상당히 공들여 분석하였다.
물론 분량의 한계로 말미암아 상당 부분은 단순 사실 언급 수준으로 끝났지만 여기서 그는 상당히 놀라운 주장을 하였다. 바로 당쟁희생설을 노골적으로 부정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만화에서 당쟁희생설의 대표적인 주장들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그는 당쟁희생설의 주요 명제를 조목조목 비판했다.
특히 노론 세력의 이간질 자체가 없었으며 오히려 신하들은 사도세자의 눈치를 보는 데 급급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박시백 화백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영조의 끝없는 질책 등으로 사도세자가 광증을 보이며 결격 사유로 가득찬 후계자가 되고 대신 세손이 뛰어난 자질을 드러내자 아들을 제거하고 자질이 뛰어난 세손을 후계자로 앉히기 위해 영조가 모든 걸 계획하고 실행했다고 보았다.
그리고 노론 대신들은 잘 해야 막판에 묵인이나 방관의 형식으로 영조의 의중을 따른 것이라고 보았다.
박시백이 한겨레 출신이고 한겨레가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밀어주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 한겨레가 2009년부터 강력하게 친 이덕일적 행보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나 이덕일이 박시백의 만화 추천평까지 남겨준 것을 볼 때 놀라울 정도로 강력한 비판이었다. 물론 자신도 이런 걸 고려했는지 아님 평소의 방식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덕일의 이름 정도는 언급하지 않고 넘어가주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2011년 초. 서울대 국문학과 정병설 교수가 문학동네 카페에 '정병설 권력과 인간'을 연재하면서 다시 한 번 이덕일의 당쟁희생설을 비판했다. 이덕일은 이에 정병설 교수의 주장을 한겨레 등을 통해 반박하였으나 정병설 교수 역시 이 문제에 다시 한 번 반박하며 이 논쟁과 관련된 글을 역사 비평에 실어버렸다. 전반적으로 정병설 교수의 판정승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지 않을 까 싶다.
이후 정병설 교수는 문학동네에서 한중록에 대해 쓴 글을 연재하며 사도세자의 인생, 죽음 등을 고찰하였다. 상대적인 분량 여유 덕인지 그는 박시백 화백이 사실만 언급하고 넘어간 부분에서도 자신의 분석을 넣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전반적으로 정병설 교수의 글들은 사도세자가 왜 죽었는가에 대한 답은 별로 주지 않지만 사도세자의 광증을 강력하게 긍정하며 당쟁희생설에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고 있다.
단 정병설 교수의 글에도 유의할 점이 있다.
전반적으로 정병설 교수는 조선왕조실록보다 한중록을 더욱 신뢰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한중록은 임오화변이 있은 지 족히 30년 이사이 흐른 뒤에야 저술된 반면 조선왕조실록은 그때그때 적은 승정원 일기 등을 바탕으로 했다.
더군다나 한중록은 전반적으로 혜경궁의 친정을 옹호하는 서술 방식이 너무나도 많이 보이는 등 주관적인 부분이 너무나도 많다.
그러나 실록의 경우는 그 편찬 방식 등에 있어서 객관성을 상당 부분 확보할 수 있다.
이런 점을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 물론 한중록이 임오화변과 관련하여 참고할만한 서적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사진 출처는 한국학중앙연구원-
(1) 다만 이걸 확인한게 2007년에 출판된 재판본이라 97년에 출판된 초판본의 묘사가 어떤지는 불명확하다.
(2) 21세기 웅진 학습 대백과보다 조금 늦게 출판됬다.
(3) 사도세자의 고백이라던지 그 이전에 출판된 영조와 정조의 나라에서 이런 견해를 보이고 있다.
(4) 이종성이 등용시킨 수문장이 이종성 명령에 따라 함지박을 불문곡직 베어버리니 수문장이 베어버리면서 죽
은 아기 가 나왔고, 그 아기는 숙의 문씨가 밖에서 몰래 들여놓으려고 했다는 야사가 전해지고 있다
융릉
융릉은 조선 제 22대 정조의 아버지인 장조(1735~1762)와 그의 비인 현경왕후(1735~1815)홍씨가 묻힌 곳이다.
인기 있는 드라마가 방송국의 이미지를 좌지우지하는 세상이 됐다.
특히 방송국 개국 이래 많은 사극중 단골로 등장하는 게 바로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이야기다.
사도세자의 비참한 죽음은 드라마 소재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이야기거리다.
장차 왕위를 이을 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이야기는 조선시대 500년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역사적
사실이자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세자의 죽음에 세자 주위의 온 가족이 관여됐다는 사실은 조선시대 정치의 비정함과 아울러
당파싸움의 본질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사도세자의 죽음, 즉 임오화변(壬午禍變)에 대해 아들인
정조와 부인인 혜경궁 홍씨의 해석이 다르다는 점은 이 죽음이 갖는 정치적 의미가 그만큼 크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 장헌세자 실기(1938년 11월 5일 보성서관 발행)
사도세자의 탄생부터 세상을 떠나기까지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
사도세자의 죽음이 화성과 어떤 인연이 있기에 이처럼 서론을 장황하게 늘어 놓는 것일까?
아주 명료하게 말하자면 사도세자 죽음은 신도시 수원과 화성 건설에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이때문에 화성을 이해하기 위해 사도세자와 성장과 죽음, 정조의 생모이자 세자빈이었던 혜경궁 홍씨
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사도세자는
1735년(영조 11년) 1월21일 영조와 영빈 이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영조는 큰 아들인 효장세자를 잃었기 때문에 사도세자의 탄생에 “삼종의 핏줄이 끊어지는가 했더니
이제는 지하에 가서 열조(列朝)를 뵈올 수 있게 되었다”고 할 정도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정조가 저술한 사도세자 일대기인 ‘현륭원지’에 따르면 사도세자는 3살때부터 글자의 뜻을 알고 ‘王’이라고 쓴 글자를 보고영조를 가리키고, ‘世子’라고 쓴 데를 보고 자기를 가리켰다. 또 ‘天地’나 ‘父母’ 등 글자 63자를 알고 있
었다고 한다.
또한 태어나기 전부터 구름이 가득했고 태어나서의 울음소리가 큰 종을 치는 소리와 같았다고 표현할 정도로
무협지의 주인공 같은 이야기가 기록되고 있다. 하지만 실록의 기록이니 믿을 수 밖에….
사도세자는
천성이 어질고 너그러웠을뿐만 아니라 배우지 않고도 글씨와 그림에 뛰어나 부왕인 영조와
같이 그림 그리기를좋아했다고 한다. 예술가적 기질을 타고난 것이라 하겠다.
훗날 정조가 ‘파초도’ 등 뛰어난 그림과 글씨를 남기게 된 건 사도세자의 예술가적 기질을 그대로 물려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도세자는 북벌을 주장했던 효종과 외모가 닮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기골이 장대한데다 장난감 무기를 갖고 전쟁놀이를 즐겨할만큼 어려서 풍부한 무사적 기질을 보였다. 자라면서 칼쓰기와 활쏘기 등을 위시한 기예에
특히 뛰어났고 유교경전보다는 점복을 비롯한 잡서들을 즐겨 읽곤 했다.
▲경모궁 편액--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에 걸었던 것으로, 정조의 친필이다.
당시 궁중에는 효종이 사용하던 청룡도가 있었는데 당시 무예의 고수들도 무거워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15~16세부터 이 청룡도를 자유롭게 사용할 정도로 신체조건과 무예에 대한 능력이 뛰어났다.
이러한 무사적 기질이 오히려 부자간의 관계가 악화되는 요인이 됐다.
영조는 자신이 소론의 지지를 받는 형인 경종을 독살하고 노론의 지지에 의해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는 오해에 대해
너무나 고통스러워했다.
그래서 ‘이인좌의 난’ 이후 더욱 적극적인 탕평정책을 추진했다.
사도세자 탄생 후 탕평책의 일환으로 형님인 경종을 모셨던 궁녀들을 궁궐로 불러 들여 사도세자를 보필하게 했다.
과거 국왕을 모셨던 궁녀들은 대단한 권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들은 철저히 당파에 의해 행동했다.
따라서 경종을 모신 궁녀들이 소론지향적인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사도세자는 어려서부터소론 위주의 이야기를 들어가며 생활했고 성장 이후에도 친소론
반노론의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10살의 어린 나이에 탁월한 정치적 직관력으로 노론 신하들의 잘잘못을 거론하기까지 했으니 노론의 입장에서
사도세자의 성장이 극도로 불안했을 것임에 틀림없었을 것이다.
영조의 명에따라 15세의 나이에 대리청정을 시작한 사도세자는
대리청정 초기 부왕(父王)의 도움을 받
아 무리 없이 정국운영을 했다.하지만 이 과정에서 사도세자는 기존의 무반 가문과 외척에 대한 불만을드러냈고 결국 영조의 측근 신하들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자연스럽게 부자관계가 비정상적 형태로 발전했다.
노·소론의 대립관계에서 소론을 지지하던 사도세자는 탕평을 주장함에도 노론을 후원하는 영조와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정치적 능력을 대부분 상실했던 것이다.
그러다 정조가 출생하던 1752년 겨울, 사도세자는 당론을 잘못 처리했다는 이유로 홍역이란 열병을 앓
은 상태에서 눈 위에 엎드려 대죄해야 했다.
또한 약간은 변덕스러운 영조가 세자에게 왕위를 넘기겠다고 선위소동을 잇따라 일으켜 며칠동안 차디찬 얼음
위에서 석고대죄까지 해야 했다.
그 결과 사도세자는 정신병을 얻었고 이것이 홧병으로 진행된 것으로 알려졌다.
과연 정신병이 사도세자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이었을까?
사도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는 자신이 쓴 ‘한중록’를 통해
“영조가 세자의 정신병때문에 장차 나라를 다스릴 수 없어 큰 결단을 내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사도세자가 정신질환 때문에 죽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들인 정조는 전혀 다른 해석을 하고 있다.
부친인 사도세자가 노론의 희생양이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사도세자가 옷을 입으면 발작을 하는 정신질환이 있었던 건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을까에 대해선 많은 의문이 남는다.
▲정조대왕제례
사도세자의 죽음을 강요한 계기는 나경언의 고변때문이었다.
나경언은 궁궐의 붓과 벼루를 공급하거나
열쇠를 보관하는 일을 담당했던 액정서의 별감인 나상언의 형이었다.
아주 미천한 자가 어찌 국왕에게 세자의 비행을 직접 고해바칠 수 있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또한 10가지의 고변 내용 역시 다 알 수가 없다. 당시의 기록을 모두 불질러버렸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경언은 사도세자가 자신의 아들을 낳은 첩을 죽였고 여승을 궁으로 불러 들여 잠자리
저자거리에 나가 외상술과 돈을 빌리는 등 세자로서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했다고 고해 바쳤다.
영조는 대로(大怒)했고 세자를 불러 자결을 강요하고 그가 거부하자 뒤주에 가둬 죽여버렸다.
고변 직후 세자에 대한 처분을 어찌할까 갈등하는 영조에게 세자의 죽음 밖에 없다고 건의한 이가 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이고 뒤주를 가져온 이가 장인인 홍봉한이요, 죽음을 명령한 이가 친아버지이니 비극 그 자체였다.
앞서의 정신질환과 비행이 결정적인 죽음의 원인이 아니었다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1761년(영조 37년) 봄에 있었던 세자의 평안도 여행때문이었다.
나경언 고변의 핵심 내용은 아마도 이것이었을 것이다.
세자가 평안도에 있는 군사력을 이용해 도성으로 쳐내려와 친위쿠데타를 일으켜 부왕인 영조를 내치고
조선의 국왕이 되고자 한다는 조작된 시나리오였다.
이 조작은 노론에 의한 것이기에 정조는 아버지의 죽음을 정치적 희생양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사도세자가 역적으로 죽었기에 그의 아들이었던 정조는 세손 시절에도 늘 불안의 연속이었다.
국왕으로 즉위 이후에도 국가 반역을 꾀했던 세자의 아들이란 이유로 국왕의 지위에 있어선 안된다는
흉언이 전국에 퍼지기까지 했다.
결국 정조가 국왕으로 온전한 정치행위를 하기 위해선 부친인 사도세자의 명예를 회복하는 길이
가장 급선무였고 이를 통해 자신의 정통성을 확립하고자 주력했다.
따라서 사도세자의 묘소를 당대 최고의 명당으로 옮기는 사업을 계획했고 그것이 장차 있을 수원부 읍
치 이전과 화성건설의 전초였던 것이다.
/수원시 학예연구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