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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기독교단 개혁연대 원문보기 글쓴이: 박승학
<제2차 세계대전중 나치독일이 자행한 유태인 대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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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정권에 의한 유태인 대학살, 홀로코스트의 살아남은 거의 10만 명의 생존자들이 미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생존해 있는 홀로코스트 역사의 증인들인 이 생존자들은 대부분 70대와 80대의 고령이어서 이들 가운데 약 10퍼센트가 매년 세상을 떠납니다.
미국의 젊은 세대들은 나치스의 홀로코스트에 관한 사실을 얼마나 알고 있고 그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VOA기자가 죠지 워싱턴 대학 캠퍼스에서 학생들을 만나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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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A 기자가 죠지 워싱턴 대학 캠퍼스에서 만난 학생들에게 홀로코스트에 관해 아느냐고 물었더니 각양각색의 대답이 나왔습니다.
Concentration camp prisoners (PETA exhibit) |
홀로코스트에 관해 학교에서 배웠으나 어떤 학생들은 상관하지 않는다거나, 더 이상 들으려 하지 않는 학생들도 많다는 것입니다.
어떤 여학생은 고등학교 2학년때 홀로코스트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와 어린 소녀 안네 프랑크의 일기 그리고 모든 피해자들에 관해 배웠다면서 끔찍한 비극이라고 말합니다.
이 여학생은 특히 2년전에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 ‘쉰들러스 리스트’를 보고난 다음에야 깊이 생각해보게 됐다고 말합니다.
어릴 때 홀로코스트 같은 것을 알게 되면 그런 일들이 마음 속 깊이 새겨져 1990년대의 아프리카 르완다 대학살 등 다른 경우의 집단학살 문제를 기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죠지 워싱턴 대학의 월터 라이히 교수는 많은 학생들이 고등학교 시절에 홀로코스트에 관해 거의 배운게 없다고 지적합니다. 홀로코스트에 관한 교육이 어떤 고등학교들에서는 잘 이루어지는 편이지만 그렇지 못한 학교들도 있고 심지어 어떤 학교들에선 홀로코스트를 전혀 가르치지 않는 학교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영화나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통해 홀로코스트에 관해 알게 된다고 라이히 쿄수는 지적합니다.
책을 읽어서 알게 되거나 박물관에 가보고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영화들이나 텔레비전 방송 프로그램들은 때로 아주 좋은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아주 나쁘고 오도하는 경우도 있다면서 라이히교수는 바로 그런 점이 문제이고 또 홀로코스트가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그리고 부정확하게 그려진다는 것도 문제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미국의 텔레비전 방송 프로그램들 가운데 1978년에 방영된 ‘홀로코스트’라는 제목의 드라마는 미국의 일반 대중에게 교육적인 것이었다고 라이히 교수는 평가합니다.
그 드라마는 중요한 얘기를, 실제로 일어났던 중요한 일들을 일반에게 알려주었고 실제로 미국의 많은 사람들에게 홀로코스트에 관한 인식을 일깨워주었다고 라이히교수는 말합니다.
대단히 강력한 효과를 낸 중요한 드라마였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텔레비전 드라마 ‘홀로코스트’가 방영되기 전까지는 미국에서 홀로코스트에 관해 얘기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고 라이히 교수는 지적합니다.
홀로코스트 생존 피해자들이 당시 일어났던 일들에 관해 얘기하려고 하면 ‘입을 다물라’는 소리를 듣곤 했었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어려웠던 일들에 관해 새삼 듣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반응이 지배적이었다고 라이히교수는 지적합니다.
중요한 것은 집단학살에 관한 것이고 전가족이 독가스실에서 살해된 것, 집단처형 구덩이들에 관한 것인데 그런 얘기를 하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에게 사람들은 흔히, 나이들어 헛소리 한다며 무시해 버리곤 했었다는 것입니다.
월터 라이히교수는 홀로코스트에 관해 가장 강력한 이미지를 전해주는 흑백 사진 한 점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 사진은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에서 누더기를 걸친 유대인 남녀가 느릿느릿 독가스 처형실로 걸어가는 모습입니다.
이 사진은 1993년에 워싱턴 홀로코스트 박물관 개관때 아주 크게 확대해서 걸렸던 것으로 라이히교수는 박물관 소장이었을 당시 어떤 여자가 그 사진을 들여다 보고는 저 분이 자신의 어머니이고 저 아이는 자기의 아이였다면서 사진 속의 아기를 쓰다듬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그 사진이 자기아이를 기억할수 있는 유일한 사진이라고 그 여성은 말했다는 것입니다.
월터 라이히 교수는 그 때 그 여자가 그 사진을 보고 오래전에 악마와 마주쳤던 일을 떠 올렸듯이 일반대중이 홀로코스트를 잊지 않고 기억할때, 새로운 후세들로 하여금 증오와 독재의 파괴적인 권력에 관해 경고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아우슈비츠"
폴란드어로는 "오슈비엥침" 이라고 한다.
우리에겐 이미 영화로, 소설로 익숙해질 만큼 익숙해져서 친근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크라코프 근교에 세워진 거대한 수용소,,
정치범이나 군포는 물론 유럽 각지에서 끌고 온 유태인와 집시들이 강제로 수용되어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강제노동을 하다가
열악한 환경 속에서 죽고, 가스실로 끌려가 학살당하던 곳..
전쟁이 끝나기 직저네 소련군에 의해 해방될 때까지
5년동안 400만명의 사람이 이런 식으로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문화인" 임을 자부하는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인류문명사의 오점으로 남게 될 이 곳.
폴란드는 이 쓰라린 상처의 장소를 모든 이에게 항상 무료로 개방하고 있었다.
한국어까지 포함된 여러 나라의 언어로 된 팜플릿과 짧은 다큐멘터리 영화도함께 상영하면서 말이다.
수용소 정문에 적혀있는 Arbeit macht frei 일하면 자유로워진다.. 라는 기만적인 문구.
지금은 아우슈비츠 하면 떠오르는 장면이면서 관광객들의 사진 촬영장소이지만
당시 수감자들은 이 글자 아래를 지나 매일 강제노동에 끌려가 12시간 이상씩 일을 해야 했다.
당시엔 고압전류가 흘렀을 철조망..
차라리 이 철조망에 몸을 던지는 게 나을 만큼 혹독한 수용소였다.
입구 옆에 붙어있는 당시 사진..
수용소 사람들이 행진할 때 오케스트라가 행진곡을 연주했다고 한다.
열을 맞추고 통제하기 쉽게 하려고 그랬다나..
고압전류가 흘렀던 이중으로 된 철조망
감시 망루와 해골표시..
HALT!! 이미 전류는 흐르지 않고 망루에도 아무도 없지만
저 해골 그림은 꽤나 잔인하게 여겨진다.
교수대...
시체를 태운 연기들이 뿜어져 나왔을 굴뚝
유럽 각지에서 유태인을 끌고 왔다는 것 알려주는 지도..
당시 수용자들이 생활하던 건물들은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되는데,
그 중 수감자들의 명단이다...
가슴에 노란색 별을 단 유태인들, 영문 모른채 끌려온 아이들.
체코,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노르에ㅞ이. 리투아니아, 그 외의 독일 점령국에서 끌려온
유대인과 집시들, 전쟁포로들과 정치범들이 이곳 아우슈비츠로 끌려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가스실로 보내져서,
명부에 등록되지도 않고 죽음을 당했다고...
수감자들을 샤워장이라고 얘기하며 밀어놓고 물이 나오지 않는 샤워기로 흘러나온 것은 독가스 "싸이클론 B"
이 약품 6~7Kg 정도 만든 독가스로 천오백명 가량을 죽일 수 있었다고 한다..
연합군에 의해 수용소가 해방되었을 때 창고에서 발견된 빈통들..
가스실 희생자들의 머리카락을 잘라 놓은 것....
저게 다 머리카락이라는 게 언뜻 납득이 되지 않는다..
가스실에 가스가 뿜어져 나오고 15분 이내에 모두 질식사하면,
금이빨을 뽑고, 머리카락을 자르고, 반지와 목걸이를 빼낸 시체는 화장터로 보내졌다.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은 머리카락을 이용해 천을 만들기 위해서란다..
사진은 머리카락으로 만든 천을 전시해 놓은 것..
안경도 모두 수거되고..
의족, 의수, 목발이나..
수감자들이 끌려 올 때 가져온 철제 그릇 등등..
녹여서 쓸 수 있는 것들도 모조리 수거되었다.
그들이 끌려올때 가져온 가방들...
기차에 타면서, 혹은 샤워를 하러(?) 가면서 나중에 돌려받을 줄 알고
찾기 쉽도록 자기 이름을 큼지막하게 적어놓았건만
반세기가 지나도록 주인을 찾지 못한 채 박물관 유리창 너머에 쌓여있다..
신발들...
구두솔과 칫솔들...
유태인들도 중노동을 견딜 수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수용소로 보내졌다..
옷과 소지품들을 빼앗기고 이런 세가지 포즈의 사진을 찍어야 했다고 한다..
옆면 정면 모자쓰고 45도 시선... 옆면 정면 45도 시선 모자...
영화에 많이 나와서 낯익은 4계절 통용 죄수복...
아침으로는 "커피라고 불리는 액체"를
점심에는 썩은 야채로 만든 물같은 스프,
저녁으로는 빵 하나와 마가린, 종종 치즈나 소시지..
중노동과 배고픔에 수감자들은 영양실조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지...
체중이 30Kg 정도까지 줄어 버린 여성의 사진...
아돌프 히틀러
아돌프 히틀러에 대해 생각해 보자.로마 카톨릭 교회의 지도자였던 히틀러는 유대인에 대해
다음과 같은 모독적인 성명을 발표했다.
*유대인의 심장에는 반역자의 피가 흐른다.
*7살이 넘은 유대인 아이는 부모의 동의 없이도 세례를 받을 수 있다.
*카톨릭교인은 유대인 예배에 참석할 수 없다.
*카톨릭교 여인은 유대인 아기의 유모가 될 수 없다.그것은 교회를 모독하는 행위다.
그것은 마귀가 성령과 접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카톨릭교인은 유대인과 함께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된다.
*기도할 때에 유대인을 "배신자"라고 불러야 한다.
*유대인은 군인이 될 수 없다.유대인은 오직 세탁업자,넝마주이,행상인,사채업자 등의
일만 해야 한다.
히틀러의 악행을 다시 상기시킬 필요는 없다.600만 명의 유대인들이 그의 손에 죽었다.
그의 종말은 어떠했는가?그는 자살을 했다.무솔리니가 사후에 조롱을 당했던 것처럼
러시아가 그를 조롱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그의 광적인 추종자들에게 자기의
시체를 불에 태라고 명령했다.
히틀러는 죽음 가운데서 눈을 감고,그의 영원한 심판자인 나사렛 예수라는 랍비를 만나기 위해
영원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내가 너를 저주한 자를 저주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