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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목사와는 달라요. 의도적으로 알리는 걸 안 해요. 저는 성골 진골이 아니라 6두품입니다.”
유명목사들의 설교가 방송되는 기독교 TV에서 본 적이 없다고 하자 거룩한빛광성교회 정성진(丁聖鎭·55) 목사가 들려준 답변이다. 기독교가 전파된 지 130년이 넘으면서 집안의 탄탄한 지원을 받아 국내 명문대와 해외 유명 신학교를 졸업한 ‘성골’ ‘진골’ 목사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공고 출신인 정성진 목사는 무인가 야간 신학대학과 한국방송통신대학(이하 방통대)을 졸업했다. 내세울 만한 학벌이라곤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것 정도이다.
정 목사는 사실 목사들 사이에서는 오래전부터 유명인사였다. 일반교인들에게는 지난 8월 15일 광복 60주년 기념 ‘한국교회 8·15 대성회’에서 설교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정 목사는 대성회 주최측으로부터 한국개신교 최대 교단인 예장통합의 차세대 리더로 선정되어 설교를 했다.
경기도 고양시 맨 끝, 파주와 맞닿은 곳에 위치한 거룩한빛광성교회는 창립 13년 만에 신도 1만명의 교회로 성장했다. 인구 100만명이 안되는 신도시에서 이룩한 상당히 이례적인 성과이다. 정 목사에게 성장비결을 묻자 “우리 교회는 성장전략이 없다. 건강전략만 있다”고 했다.
“독특한 역발상, 그런 게 많아요. 제가 하는 일이라곤 평신도들이 일할 수 있도록 조직을 만들어 주고 경영하는 것과 설교하는 것 정도죠. 별로 하는 게 없어요.”
이 교회의 조직이 촘촘하다는 것은 교회 홈페이지(www.kwangsung.org)만 검색해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세분화된 섹션에 풍부한 자료가 실려 있는 데다 지속적인 업데이트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 교회 내의 조직은 모두 350개이다. 이 많은 조직이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기독교 운동권 출신인 정 목사의 성향과 다분히 연관이 있다.
가난한 폐광촌에서 목회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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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들의 은사를 활용한 건강전략으로 성장한 교회. 교회는 신축하자마자 포화상태가 되었다. |
‘건강전략, 독특한 역발상, 강한 조직, 6두품’.
정 목사와 마주 앉자마자 다른 교회에서는 듣지 못한 단어가 마구 등장했다. 우선 그의 이력부터 알아보기로 했다. 정성진 목사는 네 살 때 경기도 안산에서 서울로 이사 와 장위동에서 자랐다. 평신도인 어머니가 경기도 안산에 교회를 지을 정도로 신앙이 깊은 집안으로, 형과 누나도 목사이다. 목사가 싫어서 한때 교회에도 안 나갔던 그의 청년시절 꿈은 정치가였다. 26세 때인 1979년 신민당에 입당하러 가던 날 하필이면 YH 사건이 터져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즈음 친구의 자살사건까지 겹쳐 상심하던 중 신학교 진학을 결심한다.
“믿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렇게 죽느니 주변에서 가라는데 한번 가 보자는 심정에서였죠. 몇 달 후 성경이 믿어지고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그로부터 30년 동안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대학입시에 낙방하고 들어간 방통대에서 초급 과정만 마친 상태로 당시 무인가였던 서울장로회신학대학 야간에 입학했다. 재학 중에 민중신학에 심취했던 그는 졸업 후 연구과정을 마치면 목사가 될 수 있었지만 목사 되기를 포기했다. ‘민중과 함께 살기로 했는데 목사가 뭐 중요하나’ 하는 생각에 남들이 안 가는 폐광촌을 찾았다. 충북 음성군 금왕읍에 있는 금왕광산 마을이었다.
“그 마을이 리 단위에서 전국 5번째로 가난한 곳이었어요. 여자는 과부, 남자는 병자만 남은 동네에서 교회를 시작했는데 2년간 140명이 출석했어요. 신혼 초기였는데 아내가 유산한 데다 간염을 앓아 고생을 많이 했어요. 그래도 거기서 평생 지내려고 했는데 너무 열심히 한다며 주변에서 질시를 심하게 하는 데다 아내의 건강이 안 좋아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인구가 많지 않은 곳에서 큰 성과를 얻은 걸 보면 비결이라도 있을 것 같네요.
“열심과 열정 외에 다른 비결은 없어요. 굳이 비결이라면 저 사람이 무슨 말을 하면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생리적으로 안다는 것 정도입니다.”
사람 심리를 파악하는 비결은 신문을 통해 습득했다고 한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3년간 동아일보를 배달했고 군대 가기 전에는 조선일보 무교지국에서 총무 일을 했어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신문을 정독하고 있어요. 총각 집사에다 군대에서 군종(軍宗)이었고 동아제약 말단 생산직 사원으로 일하면서 신우회를 조직해 초대 회장을 지냈어요. 깊이는 없을지 몰라도 세상을 다양하게 아는 거죠. 사람을 알면 한 수 접어 주고 대하니까 충돌이 별로 없어요. 누구를 만나든 눈높이를 맞출 수 있습니다. 인간군상이 다양하기 때문에 사람을 볼 줄 알아야 목회를 잘할 수 있습니다.”
군 면제 받았으나 체면 구기지 않으려고 군복무 마쳐
폐광촌에서 돌아온 그는 방통대에 들어가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기왕 목사가 되려면 정식으로 대학원에 입학하고, 그러기 위해 학사 과정을 밟기로 한 것이다. 11년 만에 대학을 졸업하고 한 해 1000명씩 떨어질 정도로 경쟁이 치열한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이하 신대원)에 합격했다. 공부하는 동안 여러 교회를 옮겨 다니며 전도사로 일했다.
“늘 어른들과 싸우는 바람에 자주 옮겼죠. 서울장신대에 다닐 때 혼자 강신명 목사 쫓아내는 운동을 했다가 오히려 쫓겨날 뻔했습니다. 신대원에 입학해 한 달 만에 데모를 주동했다가 징계를 받았어요. 99명의 학우 자퇴원서를 받아 싸워서 이사장, 학장, 재단사무국장 등 여럿 내쫓았어요. 2학년 때 신대원 회장이 되고 전국신학생대표자협의회를 만들어서 의장을 했죠. 어릴 때부터 어디를 가나 공동체를 이끄는 역할을 했어요.”
눈이 나빠 군대 면제를 받았으나 군대에 안 갔다 오면 체면이 안 선다는 생각에서 군복무를 마쳤을 정도로 매사에 강성이었다.
세상에 거칠 것 없던 그가 38세에 천호동 광성교회에 부임하면서 주춤해졌다. 1만명이 출석하는 대형 교회였다.
“그 전에는 수틀리면 담임목사한테 대들었는데 광성교회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어요. 담임목사님이 너무 강해서 대들면 그날로 바로 잘려요. 내가 혈기 9단이면 그 목사님은 10단이었어요. 2년간 갈등하다가 ‘내 것도 아닌데 왜 갈등하나. 좋은 것만 배우고 나쁜 건 반면교사로 삼자’고 마음을 바꿔 먹었어요. 그 교회에서 5년을 있으면서 많이 배웠지요.”
광성교회에 간 지 얼마 안되어 목사안수를 받았는데 하마터면 목사가 못될 뻔했다. 하필이면 신대원에 다닐 때 쫓아낸 재단사무국장이 장로로 있는 교회에서 안수식이 열렸던 것이다.
“그분이 나를 보더니 ‘여기서 안수 못 받는다’는 겁니다. 38세에 목사가 못되게 생겼으니 어떡해요. 가서 빌었죠. 그때 ‘원수지면 안 되겠구나. 반드시 만나는구나’ 하는 걸 알았죠. 가는 데마다 어른들과 싸우고 내쫓는 게 내가 똑똑하고 합리적이어서가 아니라 상처 때문이라는 것도 하나님이 깨닫게 해 주셨어요.”
부모의 별거로 그는 네 살 때부터 어머니와 살았다.
“형제 우애가 좋고 워낙 집안 분위기가 밝아 상처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아버지 없이 자라 남자 어른들과 친하지 못했던 거죠. 그때부터 어른들에게 잘하려고 애썼습니다. 광성교회에서 마지막 1년은 기도원 사역을 맡았어요. 민중신학부터 기도원까지,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다 경험을 했고 그것이 목회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설교를 잘하고, 열정적이고, 의리가 있는’ 무서운 목사 밑에서 지내며 그가 반면교사로 삼은 점은 ‘혈기를 죽이고, 남의 얘기를 듣고, 교회를 독재적으로 운영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같이 있을 때 굉장히 무섭던 목사님이 나올 때 확실히 밀어 주셨어요. 그 교회에서 나올 때 10억원을 주셨고 저를 도우라고 10가정을 보내 주었습니다.”
개척 첫해에 1000명 돌파
그는 1997년 1월 9일, 경기도 고양시 일산4동에 비어 있는 2층짜리 교회건물을 17억원에 사서 일산광성교회라는 간판을 달았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지하 150평이 본당이었다. IMF 관리체제로 들어간 그해 등록인원이 1000명을 돌파했고 550명이 출석했다.
“30만명이 사는 도시에 교회가 280개 있었는데 첫해에 그렇게 많이 왔으니 뭐라고 설명할 방법이 없어요. 굳이 비결을 찾으라면 백화점식으로 좋은 건 다 해 봤다는 점입니다. 상담실과 도서관을 열고, 수지침 치료교실을 운영하면서 문화강좌도 했지요.”
대중적인 프로그램이 아닌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 등 소수에 집중하려고 한 일이었는데 사람들이 몰려오자 그는 오히려 당황했다. 1년을 지내면서 일산이라는 곳을 저절로 파악할 수 있었다.
“가진 것은 없어도 배운 것은 있는 도시였어요. 우리나라 최고의 학력도시입니다. 강남이나 분당보다 일산 사람들의 학력이 더 높아요. 그리고 도시가 젊어요. 1997년에 도시 주력인구가 35세였어요. 지금은 남자 41세, 여자 40세예요.”
실력 있는 사람들을 활동할 수 있게 해 주면 되겠다는 결론이 났다. 교인들에게 ‘당신이 배우고 싶은 것과 가르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고 물었다. 결과를 토대로 무용, 영어, 테니스, 음악 등 23개 강좌를 열었다. 가르치는 것뿐만 아니라 조직운영도 평신도들에게 맡겼다. 창립하고 얼마 안되어 건물을 빌려 120평짜리 청소년회관도 개설했다.
8년 만인 2005년 현재의 자리인 고양시 덕이동에 새 성전을 지어 입당할 때 출석교인이 3500명이었다. 2000석짜리 본당은 오자마자 다 차 버려 또 다시 건축을 해야 할 지경에 처했다. 대지 9000평에 건평 5500평인 현재의 교회건물을 짓는 데 250억원이 들었다. 빌려 쓰는 땅 5000평까지 이 교회는 총 1만4000평을 사용하고 있다. 주차장은 900대를 동시에 주차할 수 있다.
파주 초입인 현재의 자리로 옮기면서 공모를 통해 교회 이름을 일산광성교회에서 거룩한빛광성교회로 바꾸었다. 9월 30일 현재 이 교회의 재적인원은 1만1720명, 출석인원은 9000명이다. 누적 등록인원은 3만명이나 매달 인원점검을 하여 1년 이상 안 나오는 사람은 명단에서 지우는 방식으로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다.
3개월에 한 번씩 예·결산 자료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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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개 문화강좌에 지역주민들도 많이 참여하고 있다. |
1만명 교회를 이룬 ‘건강’ 전략의 핵심은 무엇일까. 정성진 목사의 교회운영 첫 번째 철칙은 ‘투명성’이다. 이 교회는 3개월에 한 번 예·결산 자료를 인쇄해서 전교인에게 공개한다. 정 목사는 교회 빚이 300억원이라는 것을 교인들이 다 안다고 했다. 현재 정 목사의 사례비는 월 480만원이지만 고스란히 다시 헌금한다. 교회 지을 때 1억5000만원짜리 아파트를 팔아서 헌금해 재산이라곤 없지만 부흥회 강사료로 생활할 수 있다고 했다.
이 교회는 목사 정년 65세, 원로목사 폐지, 6년 시무 후 신임투표를 하기로 법을 정했다. 장로는 6년 단임, 시무장로 정년 65세 규약을 지켜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 대부분 교회의 목사 정년은 70세이고 65세 정년을 실시하는 교회는 1% 정도에 불과하다. 원로목사 제도를 폐지한 교회는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 교회는 원로, 명예라는 단어 안 씁니다. 하나님 앞에서 불경한 일이지요. 원로가 어디 있어요. 관(冠)을 쓰는 거잖아요.”
정성진 목사는 2006년 6월 신임투표에서 찬성 93.6%를 받았다.
“신임투표를 안 해도 쫓겨날 사람은 쫓겨나고 투표해도 있을 사람은 있어요. 신임하지 않은 6.4%가 저를 살리는 선생들입니다.”
―10년 후면 은퇴인데 집도 없고 원로목사 자리도 없으면 불안하지 않을까요.
“10년도 길지요. 말로는 ‘하나님이 키워 주셨다’고 하면서 놓지 않아요. 저도 약하기 때문에 언제 바뀔지 몰라 제도로 만들어 공표한 겁니다. 아무 문제 없어요. 마음을 비우면 되니까. 일부러 연금도 안 들었어요. 깡다구로 하는 거죠. 말씀 그대로 믿는 거지. 목사는 소유하면 안 돼요. 말은 천사같이 하면서 목사들이 믿음 없는 짓을 해요. 안전장치로 연금 들고 먹고살 거 다 쌓아 놓고.”
―요즘 65세면 너무 젊은데 은퇴 후에 무슨 일을 할 건가요.
“조용히 할 일 하다가 양로원 가면 되고, 천국에 가면 되죠. 연금도 없고 재산도 없고 원로도 안 하고 어떻게 살 거냐고 다들 묻는데, 그럼 준비 안된 사람은 다 죽나? 아프리카는 어떻게 살아? 어떻게든 살지 죽나?”
연세대 의대와 연세대 정외과에 다니는 두 딸에게 물려줄 재산은 당연히 없다. 정 목사는 “방통대 나온 나도 사는데 그 학교 나와서 왜 못 살겠어요”라며 웃었다.
13년 동안 9개의 교회 개척을 지원한 것도 이례적이다. 10억원의 지원을 받아 독립한 정성진 목사는 이 교회 출신 목사 9명에게 3억원씩의 개척자금을 지원했다. 제일 먼저 독립시킨 파주 주사랑교회는 현재 출석교인이 1700명이다. 교회를 독립시킬 때 교인을 몇십 명을 딸려 보내는데 정 목사는 10억원 지원에 500명씩 내보내는 게 목표라고 했다. 내년에 2개 교회를 독립시킬 예정이라고 한다.
정부보다 빨리 미소금융 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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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교 동창으로 신앙동지인 정성진 목사 부부. |
지난 교회에서 50개였던 문화강좌가 지금은 180개로 늘었고 예전에는 무료였으나 요즘은 유료이며 일부 강사는 전문 초빙강사이다. 문화강좌의 인기가 예전만 못해 작년에 평생교육원을 개설했다. 또 대안학교인 드림초등학교와 드림중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이 교회는 복지사업에 많은 노력을 쏟고 있다. 2007년에 20억원을 출연하여 사회복지법인 해피월드를 출범시켰다. 파주노인복지관과 노인들을 위한 노아스쿨, 해피천사운동 등 다양한 복지사업을 추진 중이다.
현재 정부에서 실시하고 있는 미소금융을 이 교회는 이미 5년 전부터 시행했다. 미소금융 출발을 앞두고 정 목사가 국무회의에 참석하여 1시간반 동안 성공사례를 발표하고 브리핑을 했다. 5년 전에 1억원으로 시작한 이 교회 대출사업은 지금 나라의 지원을 받아 수십억 원 규모로 커졌다. 지원대상은 교인이 아니어도 가능하다. 각종 부대시설은 교회 안의 350개 조직에서 관리하고 운영한다.
“교회 내 모든 사역을 평신도들이 운영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문화원을 관리하는 부서는 외부강사 초청부터 모든 일을 주도적으로 합니다. 해피월드팀에 들어가면 파주노인복지관의 1만2000명 노인과 40명의 직원관리 등 다양한 복지사역을 하죠. 교육도 부목사와 평신도들이 함께 합니다.”
이 교회 조직의 특징은 보고의 의무가 없다는 점이다.
“망할 자유를 주는 거죠. 두 번 망하면 그 사람은 다시 리더를 맡을 수 없어요. 그렇게 했더니 오히려 망하는 조직이 없어요. 매년 전교인 인적조사를 다시 하여 재배치하고 조직의 리더는 2년에 한 번씩 바꿉니다. 평신도들이 재능을 살려 일할 수 있도록 하는 은사중심 사역을 하는 거죠.”
거룩한빛광성교회는 온라인 행정 시스템이 매우 잘되어 있다. 모든 수칙이 교회 홈페이지에 자세히 게시되어 있으며 매주 헌금 명단도 공개한다. 상조회사와 협력하여 전용 추모관을 운영하고 있다. 장례에 관한 세심한 배려는 여기저기서 모여 서로를 잘 모르는 신도시 사람들의 삶의 패턴 때문이라고 했다. 일의 연속성을 갖도록 하기 위해 이 교회는 올해 500페이지 분량의 <사역운영 매뉴얼>을 발간했다.
‘깨끗한 게 정답’
―홈페이지에 ‘한국교회 개혁모델’이라고 명시해 놓았더군요.
“강하게 얘기는 안 하지만 우리 교회의 모든 화두는 개혁입니다. 처음에는 나라를 바꾸고 싶어 정치를 지망했고, 신학하면서 교계를 바꿔야겠다는 꿈을 꾸었죠. 목사가 되어서는 교회를 바꾸고 싶었으나 지금은 나 하나 바꾸면 잘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개혁적이다 보니 전교조 출신 도교육위원, 야당대변인 출신 인사 등 이른바 진보성향의 교인이 많다.
“목사는 누구나 다 포용해야 합니다. 비판적이고 똑똑한 사람들이 갈 데가 없어요. 사실은 다른 게 아닌데 언론에 의해 길들여져서 갈라진 겁니다. ‘내가 정답’이 아니라 ‘깨끗한 게 정답’입니다.”
―설교할 때 신경이 좀 쓰이겠습니다.
“가능한 한 한쪽으로 치우치는 얘기는 안 합니다. 정의와 진리를 얘기하죠. 우리 교인들은 정치성향이 달라도 수용성이 있어서 싸우지 않아요. 싸우면서 할 만큼 좋은 일이란 없습니다. 사람들은 진리의 문제가 아닌 비본질적 문제로 싸웁니다. 보신탕 먹는 게 좋나 안 먹는 게 좋나, 이런 거 갖고 싸우는 거죠. 설교로 이해시키고 조정합니다.”
정성진 목사는 앞으로 학원을 세울 계획이라고 했다.
“학교를 운영해 보니 돈이 너무 많이 들어요. 학원을 하여 돈을 벌면 얼마든지 재투자할 수 있잖아요. 학원에 청소년 상담실을 설치하고 채플도 할 겁니다. 소극장도 짓고 장기적으로 요양병원을 세울 계획도 갖고 있습니다. 출판사업과 장애인들을 위한 사업체도 시작하게 됩니다.”
당장 연말에 청소용역 회사를 출범시킨다고 전한다. 교회, 복지관, 학교, 요양원 청소만 해도 청소회사가 운영되기 때문에 사회적 기업을 신청해 놓은 상태다.
“난 뽕잎 먹고 비단 뽑는 분들에 비하면 B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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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억원 출연으로 사회복지법인을 출범시켜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
“교회는 돈 들어가는 것만 하지 버는 건 못해요. 교회에 돈이 있으면 타락한다고 하는데 투명하게 운영하면 됩니다. 우리 교회는 연간 200억원을 운용하지만 감사와 이사를 세워 철저하게 관리하기 때문에 문제가 없습니다. 우리 교회 감사는 삼일회계법인에서 일하는 회계사가 하고 있어요.”
―민중신학을 했는데 지금은 어떤 성향이고 민중신학이란 정확히 어떤 겁니까.
“나이브한 형태로 실천하고 있습니다. 투쟁적이고 비판적이지 않고 실제적으로 실천하는 거죠. 백성이 민중이고 민중신학은 가난한 자, 병자, 소외된 자의 친구가 되자는 게 핵심입니다. 부자도 영혼은 가난하죠. 예수님 정신으로 가난한 사람을 부요하게 해야 합니다. 사랑하고 남을 섬기는 사람이 부요한 겁니다.”
이 교회는 전 교인이 북한돕기헌금과 사랑긍휼헌금을 따로 하고 있다.
“중국 도문에 국수공장을 지어 북한으로 국수를 보내고 나진·선봉지구에 생리대공장을 운영하고 있어요. 북한 여성들이 생리대가 없어 낙엽을 사용한다는 소리에 너무 가슴이 아팠습니다. 사랑긍휼헌금은 국내 어려운 사람을 돕기 위해 하는 겁니다.”
―작은 교회 돕기 운동을 펼치고 있더군요.
“창립 초기부터 했던 운동이고 그동안 많이 도왔어요. 요즘은 이 운동을 열심히 하는 박재열 목사님을 통해 돕고 있죠. 고양시와 파주시에 있는 작은 교회에 매월 자금을 지원하고 우리 교회 전도팀을 파견해 작은 교회의 성장을 돕고 있습니다.”
―교회 성장에 설교능력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나요.
“쉽게 이해가 가도록 교인들에게 논리적으로 전달하려고 애씁니다. 제가 기본적으로 말을 못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엘리트 코스를 밟은 건 아닙니다. 뽕잎 먹고 비단 뽑는 분들에 비하면 아무래도 B급이겠죠. 내용이 좋건 안 좋건 감동을 주어야 마음이 움직입니다. 열정은 모을 수 있고, 설교는 잡을 수 있고, 인격은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인터넷 시대지만 정 목사는 일일이 책을 찾고 손으로 써서 설교준비를 한다. 집무실에 딸린 서재에 책이 엄청나게 많았다. 벽에 ‘我死敎會生’(아사교회생, 내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이라고 쓰인 액자가 걸려 있었다.
“살려고 하니까 죽는 겁니다. 밥벌이하려 하지 말고 나를 깨끗하게 포기하면 교회가 브랜드 가치를 갖게 됩니다. 소문이 좋게 나고 차별화가 되는 거죠.”
그는, 목사는 가난해도 교인은 깨끗한 부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교인이 잘 벌어서 헌금하면 교회가 잘 써서, 바친 사람이 대리만족할 수 있게 해 줘야 합니다. 목사들이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교회를 새로 시작하는 목사들을 위해 특별한 성장비결을 공개해 주시죠.
“앨빈 토플러가 ‘기업이 시속 100㎞로 갈 때 교회는 10~20㎞로 간다’고 했습니다. 공무원, 학교, 교회가 가장 변화가 늦어요. 변화속도가 늦으면 죽습니다. 교회개척 노하우는 스킬에 있는 게 아니라 정신에 있어요. 다들 기술만 본받으려고 하지 정신에는 관심이 없어요. 예수님은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했습니다. 죽어야 삽니다.”⊙
출처: 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viw_content.asp?nNewsNumb=201011100043&ctcd=&c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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