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이성렬 <민촌 이기영 평전> | | ⓒ 심지 | "해방 후 남쪽에서는 '순수문학논쟁'이 다시 한 번 달아올라 '순수문학'이 판정승을 거두고 있을 때, 일제하에서 두 차례의 옥고(獄苦)를 치른 바 있는 민촌은 북한에서 장편소설 <땅>과 대하소설 <두만강> 등을 발표하면서 40년 가까이 사회주의 문단을 실질적으로 주도(主導)하였다. 우리의 문학사에 이렇게 큰 획을 긋고 있는 작가는 정녕코 다시없을 것이다." -'머리말' 몇 토막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주춧돌로 삼아 식민지 조선 농촌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경향소설(의도적으로 어떤 주의나 사상을 중심 내용으로 다룬 소설, 흔히 사회주의적인 소설을 말함)의 기념비적 작품' <고향>의 작가 민촌 이기영(1895~1984).
1930년대 이후 남북문학사를 통틀어 우리 문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의 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는 우리 문단의 거목 민촌 이기영. 그는 광복 뒤 월북하여 죽을 때까지 38년 동안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을 이끌었고, 북한의 요직을 두루 거치며 '이상사회' 구현에 앞장 선 문학적 실천가였다.
그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소위 '레드 콤플렉스' 때문에 사람들 입에 쉬이 오르내릴 수 있는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또한 그 때문에 그는 빈농 출신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고, 조강지처를 버리고 동경유학시절에 만난 '신여성'과 북으로 애정의 도피행각을 벌였다는 둥, 여러 가지 잘못된 평가를 받아왔다.
하지만 이번에 민촌의 차손인 이성렬(61)씨가 민촌의 삶과 문학을 엄정한 객관성을 바탕에 깔아 마치 뜨개질을 하듯이 꼼꼼하게 다룬 <민촌 이기영 평전>(도서출판 심지)을 펴냄으로써 제대로 된 민촌 문학 연구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게 되었다. 실로 15여년의 노력 끝에 얻어낸 민촌문학 연구의 결정체라 아니 할 수 없다.
이번 평전에서 이성렬씨는 민촌이 쓴 자신에 관한 단편적인 회고의 내용들을 다룬 작품과 다른 기록(족보, 호적, 기사, 사서, 증언 등)들을 씨실과 날실처럼 꼼꼼히 견주며 한 올 두 올 짜낸다. 때로는 여러 평자들의 논평과 글을 이씨 나름대로 단호한 태도로 비판하고 질타하기도 하면서.
이 책은 모두 4부로 나뉘어져 있다. 제1부 '어린시절'에는 '선대' '민촌' '모친의 죽음' '커나는 혼' 등이, 제2부 '학창시절'에는 '조혼' '새 시대' '부친의 파산' 등이, 제3부 '방황기'에서는 '암흑' '줄초상' '동경유학' '습작과 등단' 등이, 제4부 '작가시절'에는 '신여성(?)' '카프와 수난' '<고향>의 수난' '절필과 은둔' '북한에서' 등이 실려 있다.
15년 노력 끝에 얻어낸 민촌문학 연구의 결정체
"내가 어려서 모친상을 당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우리 집 환경에도 그 전보다 다를 것이 없을 것이요. 따라서 나에게도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커다란 변동이 없었을 터이니까, 내가 이야기책 속으로 뛰어든 것은 오로지 모친상을 당했기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나는 모친상으로 말미암아 문학에 투신했다고, 그것을 슬퍼하려는 생각은 조금도 없다. 나는 도리어 그렇다면 모친에게 감사해야 할런지도 모른다. 나는 비록 지금까지 실(實)답지 못한 문학을 한답시고 고향을 등지고 있는 것이 불효하기 짝이 없으나, 그러나 내가 만일 지금까지 모친의 슬하에서 자라났다면 나는 한층 불효를 하고 어떤 부류의 인간이 되었을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69쪽, '문학의 하게 된 동기' 몇 토막
민촌 이기영은 '나의 수업시대'에서 자신을 '비교적 명랑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헤매이던 발자취'에서는 '비교적 낙천적이던' 소년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민촌은 1905년 3월 7일(음), 11살의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 사별(死別)하게 된다. 어머니의 병명은 장질부사(장티푸스). 그때 민촌의 아래로는 일곱 살 먹은 동생과 세살 먹은 여동생이 있었다.
그때부터 어린 민촌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주체할 수 없는 슬픔과 공포에 시달리면서 말없는 외톨이가 된다. 그리고 사람이 죽고 사는 '도무지 풀 수 없는 수수께끼'(봄)에 사로잡혀 오래 오래 갈등과 번민에 휩싸인다. 게다가 그의 부친 또한 입신(立身)에 실패하여 술에 절어 살다가 급기야 파산하고 만다.
이에 대해 민촌은 '나의 수업시대'에서 "부친은 귀향한 후에 다급한 생활에 몰리어서 일책을 얻어 쓰고 나중에는 집까지 뺏기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어 민촌은 "그(아버지)는 원래 술을 좋아하고 친구를 좋아하기 때문에 사실 술값으로 나가는 돈이 일년에 적지 않았다"라며, "술집을 그저 지나가는 법이 없고 외상 안 진 주점이 없"었다고 꼬집는다.
줄초상의 상주(喪主) 민촌은 위험한(!) 불장난을 했다. 그가 부친의 혼백을 아궁이에 불사르고 제사도 지내지 않았음은 필자의 집안에 전해오는 유명한 구전(口傳)이다.
"나는 부친의 장례 후에 그의 혼백을 저녁불 때는 아궁이 속에 처넣어서 태워버렸다. 이 거동을 보고 숙부와 집안 식구들이 대성통곡을 하며 인제는 집안이 망하였다고 온통 난리가 났었다. 그러나 나는 끝까지 그들을 반항하고 초상 상제가 제사를 지내지도 않았다.
그것은 내가 광신앙이라기보다 미신 타파의 견지에서 한 행동이었다. 나는 신소설을 읽고 잡지와 신문을 구해 보던 중에 어느덧 새로운 것을 동경하는 개화사상을 가지게 되었다. 나의 그러한 지향은 이제까지 봉건 전제 도덕에 짓눌렸던 구습에 대한 일종 반발력을 치솟게 하였다.
나는 유교적 상제(喪祭)의 예법은 허례와 미신의 화신(化身)이라는 사상을 가졌기 때문에 그와 같은 짓을 한 것이다. 하여튼 나는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실행하였을 뿐이었다." ('이상과 노력')
-247~248쪽, '줄초상' 몇 토막
아버지의 혼백을 아궁이에 넣어 태워버린 뒤 제사조차 지내지 않았던 민촌 이기영. 그의 이러한 기이하고도 돌발적인 행동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술 때문에 집안을 파산시킨 이버지에 대한 미움과 원망 때문이었을까. 아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모두 구습에 대한 일종의 반발심이었다.
민촌의 차손인 이성렬씨는 "민촌이 학창 시절에 미신에서 벗어나게 되는 계기는, <봄>에 의하면 새로 부임한 '신 선생'의 가르침이었다"고 말한다. 이씨는 "신 선생은 '도깨비불이니 귀화(鬼火)니 하는 것'을 '인화(燐火) 작용'으로 설명하면서 '미신과 인습을 타매하였다"고 민촌에게 가르쳤다는 것이다.
| | ▲ 김일성 종합대학 학생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있는 민촌 이기영. | | ⓒ 심지 | | 게다가 민촌은 자신이 쓴 대하소설 <두만강>에서 부친은 3.1운동을 맞아 마을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의병과 합세하여 주재소를 습격하는 인물로 그린다. 그리고 부친은 순사부장을 처단한 뒤 왜놈들에게 잡혀 사형을 당하는데, 부친이 끝까지 당당하게 처신하는 모습을 감동 깊게 그려놓고 있다.
"부모가 생존했을 때의 그 정갈하던 집안과 양반의 법도를 지키던 것까지 일체가 허무하게 변해졌다. 남녀의 종들은 속량을 해서 모두 내보냈다. 그것은 살림이 꿀리어 종을 부릴 형편이 못 되기도 하였지만 개화사상에 공명한 이진경(민촌의 아버지)은 우선 자기 반상을 타파하는 모범을 보인 것이다" -40쪽, '두만강' 몇 토막
아버지의 혼백, 아궁이에 불태우다
이성렬씨는 문단에서 민촌 이기영 선생이 빈농 출신으로 잘못 알려지고 있는데 대해 민촌의 대하소설 <두만강>에 나오는 문구를 들추어낸다. 그리고 민촌의 집안이 대대로 꽤 큰 지주였으나, 민촌의 부친대에 이르러 조부대에 부리던 많은 하인과 머슴을 거의 다 속량해서 내보냈음을 증명한다. 실제로 민촌은 몰락한 양반가 출신이지만 어린 시절에는 꽤 윤택하게 살았다는 것.
게다가 이씨는 문단에서 '민촌이 조강지처를 버리고 동경유학 시절에 만난 신여성(홍을순)과 북으로 애정의 도피행각을 벌였다'는 것에 대해서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민촌의 둘째 부인인 홍을순은 항일운동을 하다가 순국한 절친한 친구 홍진유(1894~1928)의 여동생으로 구명운동 과정에서 운명적으로 맺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씨는 "그녀는 정규교육을 받지도 못하였고 미인도 아니었으며 지주에게 팔려 첩살이를 하다가 뛰쳐나온 이혼녀였다"며, 민촌 이기영 선생이 자신의 할아버지라서 적당히 두둔하는 것이 아니라 "민촌은 자신의 전 인격을 송두리째 내던지고 순국열사의 유가족을 보살폈다고 할 수 있다"고 못 박는다.
민촌의 대표적 장편소설 <고향>의 마무리에 대한 지적도 눈에 띈다. <고향>은 1933년 11월 15일부터 그 이듬해인 1934년 9월 21일까지 <조선일보>에 연재되었으나 모두 252회 중 217회부터는 민촌의 부탁으로 김기진(당시 31세)이 쓴 걸로 되어 있다. 이는 민촌이 1934년 8월, 카프 2차사건으로 검거되었기 때문이다.
그 뒤 민촌은 출옥한 뒤에도 이에 대해 별다른 이의를 달거나 개작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씨는 "이 소설은 주인공이 지도하는 소작쟁의가 승리하는 것으로 매듭 되나 주인공과 여성동지의 관계는 도덕적으로 마무리 된다"고 지적한 뒤, "민촌은 전작인 <서화>나 후작인 <땅>에서 일관되게 조혼의 폐습 타파를 주창했으므로 이 소설의 마무리 또한 정반대로 결말지어졌다"고 꼬집었다.
이씨는 "민촌에 관한 생생한 증언들이 거의 자취를 감춘 뒤라서 책의 내용은 그만큼 부실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걸 가지고 북에 계신 삼촌과 고모님들을 뵈올 것을 생각하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라며, "민촌의 월북 이후를 다루는 평전 2부는 남북통일이 된 뒤에 다른 사람이 써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민촌 이기영 평전>은 1905년 민촌 이기영 선생이 11살에 접어들 무렵부터 1984년 90세의 나이로 북한에서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민촌의 삶과 문학이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이 평전을 통해 그동안 우리 문학사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었던 민촌 이기영 선생의 올곧은 삶과 실천적 사상, 나아가 북한문학의 속내까지 맛보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 | 한국문학사에서 영원히 지울 수 없는 거목 | | | <고향>의 작가 이기영은 누구인가? | | | |
| | ▲ 민촌 이기영 | ⓒ심지 | | 민촌(民村) 이기영(1895~1984) 선생은 충남 아산에서 태어나 일본 도쿄(東京)에 있는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를 중퇴한 뒤, 1924년(30세) '오빠의 비밀편지'가 <개벽>(開闢)에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25년에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에 가담한 뒤, 줄곧 경향문학의 대표적 작가로서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했으며, 1931년과 1934년에는 1, 2차 카프사건에 연루되면서 두 차례에 걸쳐 옥고를 치렀다.
그 뒤 일제 말기에는 아예 붓을 꺾고 은둔하여 농사를 짓다가 해방이 되자 일찍이 월북하여 <북조선문학예술동맹>을 이끌었다. 이어 90세까지 살면서 최고인민회의 부위원장, 외교관 등 북한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소설집으로는 <민촌>(1927), <고향>(1936), <서화>(1937), <신개지(新開地)>(1938), <생활의 윤리>(1942), <봄>(1942), <동천홍(東天紅)>(1943), <광산촌>(1944), <처녀지(處女地)>(1944), <어머니>(1948), <땅>(1948), <두만강>(1954~1961) 등이 있다.
그의 작품세계는 가난의 체험을 당대 현실의 총체성과 관련시키는 방향으로 열려져 있으며, 특히 집단성의 묘사에서는 전형적이고도 탁월한 성과를 쏟아냄으로써 당대 프로문단의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았다.
특히, 계급문학이면서도 도식성을 벗어나 높은 예술성을 성취했다는 대작 <고향>은 식민지시대 농민의 형상을 전형적으로 창조, 농촌현실의 구체적 형상화를 통한 삶의 총체성을 확보, '경향소설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지금, 북한의 <아태평화위원회> 이종혁 부위원장이 민촌 이기영 선생의 아들이다. / 이종찬 기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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