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제목은 그때를 아시느냐고 했지만, 모르는 동문이 누가 있겠습니까?
15회가 6학년때(그러니까 1972년도쯤일까--)입니다.
봄철에 보성군내 국민학교 체육대회가 보성읍내에서 열립니다. 대회준비를 위해 몇달간 뻘흙같은 서교운동장에서 연습도 열심히 했지요. 저는 축구선수였습니다. 선수대부분이 운동화가 없어서 맨발로, 또는 고무신이 벗겨지지 않도록 새끼줄로 고무신 신은 발을 묶고서 공을 찼고, 형편이 더 나은 집 애는 검정고무줄을 사서 고무신 신은 발을 꽁꽁 묶고서 공을 찼습니다.
드디어 체육대회날입니다. 보성중학교 운동장에서 대회입장식을 하는데, 보성북교, 보성남교, 벌교남교 등 소위 읍내 큰 학교들은 밴드부가 있어서 딴따라 풍악에 맞춰 멋들어지게 입장을 합니다. 득량남교, 조성남교 등 중간정도 큰 학교도 그때보기엔 제법 그럴싸하게 유니폼을 차려입고 입장을 합니다. 우리 서교는 정말 꾀죄죄한 복장입니다. 위는 흰 난냉구에 등사잉크로 가슴에 <득량서> 세글자를 새기고, 팬티는 검정 광목입니다. 그때는 삼각팬티를 속에 입을 형편들이 못되어서 땅바닥에 앉으면 검정팬티사이로 고추가 달랑달랑 보였습니다. 본부석 앞을 지날때 노랑물 들인 손수건을 골마리에 감춰 뒀다가 <본부석을 향하여 경례>구령과 함께 골마리에 둔 손수건을 꺼내 흔들었습니다. 그래도 그때는 입장식 점수를 조금이라도 더 받으려고 선생님들께서 궁리하신 것인데, 지금 생각하니 쪽팔리군요---
암튼 1차전에 축구를 보성군의 최강팀인 보성남교와 붙었습니다. 보성남교는 몇년을 꿀은 (꿀었다는 말을 못알아먹는 동문은 선문규에게 전화문의 하세요,016-543-1611) 놈이 센터포드를 하는데 우리 키는 그놈쉐키 가슴밖에 닿지 못했습니다. 값비싸 보이는 축구화를 신은 애들과 시합을 하는데 우리편 애들은 공을 뻥 차면 공과 함께 고무신도 날라갔습니다. 고무신을 잃어버리면 집에 가서 혼나니까, 공은 놔두고 고무신을 찾으러 갑니다. 라인 밖에서는 선생님께서 공을 쫓아가라고 큰소리를 치셨지만, 승부의 세계를 모르는 촌놈들에게는 고무신한짝이 더 소중합니다. 그러하고도 기적과 같이 득량서교가 2대1로 이겼습니다. 이변이 일어난 것입니다. 쉬는 시간에 선수2명당 사이다1병이 주어졌습니다. 이놈이 한모금, 저놈이 한모금 생전 처음 마셔보는 사이다는 왜 그리 트림이 나오는지--- 33년전 일이었습니다. 끝.
첫댓글 가슴 아픈 이야긴데 왜 웃음이 날까요? 그러한 일들이 오늘의 우리를 건강하게 만들지 않았을까요?
34년전에도 그런일은 어김없이 반복되고 그래서 열받아서 기차 안타고 봉화산을 달음박지로 와부렀네 집에 오니까 소 깔(일명꼴) 비라고 그래서 그날 나는 두번 열받았네
34년전에도 그런일은 어김없이 반복되고 그래서 열받아서 기차 안타고 봉화산을 달음박지로 와부렀네 집에 오니까 소 깔(일명꼴) 비라고 그래서 그날 나는 두번 열받았네
ㅎㅎ....
저희때도 고무신이었습죠. 전영찬선생님께서감독하실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