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일 서산시생활문화센터로 '아트 시인'들이 하나 들 모여들기 시작한다. 한 달 만의 공식 만남이다. 1.11일 마셜 B. 로젠버그의
'비폭력 대화'의 열기가 아직도 남아 있는 토론의 방이다. 토론의 아쉬움을 위해 1.25일 안준탁 회원이 '방부장'에서 성대한 자리를 마련하여
그 열기를 이어갔다. 오늘은 '난설헌'이라는 다른 주제를 가지고 함께 했다.
모두들 반가운 모습으로 인사를 나누고, 여기 저기서
준비한 다과와 차, 음료가 마음을 풍성하게 한다.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오가고 '난설헌(1563~1589)'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옮겨
간다.
*반갑습니다. 설 연휴 모두 행복하게 분주하게 보내셨지요? 세태가 많이 변해서 옛날 같은 분위기는 나지 않지만 민족의 대
이동을 매 번 보면서 전통의 무서운 힘을 보기도 합니다.
'난설헌'... 조선이 낳은 천재 시인, 허초희, 허난설헌을 만나
보았습니다. 그의 짧은 생을 만나면서 많은 감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난설헌은 세가지의 한을 풀어 놓았습니다. 첫째, 조선에서 태어남 것을 후회
했습니다. 둘째, 여인으로 태어난 것을 원망했습니다. 셋째, 남편 김성립을 만난 것을 통탄 했습니다. 27세의 꽃 다운 나이에 한을 남기고
세상과 하직을 했습니다. 난설헌의 불행의 단초는 무엇일까요? 한 마디씩 해 주시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지요.
* 지향하는 풍습이
전혀 다른 가정과의 만남이 불행의 단초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난설헌의 가정은 가부장적 풍습이 강하던 조선 후기에서 여성의 지위는 천대
받았지요. 그럼에도 나설헌의 가정은 남녀의 차별 없이 자유롭게 자라서 학문적 수준이나 시적인 천재적 감수성을 마음껏 발휘 하면서 자란반면,
김성립의 가정은 엄격한 유교적 가정에서 태어나 모름지기 여성은 시부모와 남편을 잘 봉양하는 현모양처 그 외의 것은 의미가 없다는 지향을 가진
집안에서 갈등이 표출 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 좋은 말씁입니다. 남편 또한 잘 못 만난 것 같습니다. 여러면에서 차이가
있어요. 학문적 수준도 차이가 나고 특히, 시적 감수성이 풍부한 난설헌의 정신적 영역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에 대한 열등감이 강했고,
고분고분하지만은 않은 난설헌에 대한 반발로 외도를 많이 했습니다. 난설헌의 자존심도 꽤 많이 상했으리라 집작이 갑니다.
* 꿈
속을 걷는 것 같은 전설의 여인, 선계의 여인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도가사상이라고 해야 할까요? 조선의 가부장적 유교사상이 뿌리깊은
가정에서는 적응하기 어려운 사고를 지향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 전해지는 213편의 시에서 신선이 되고 싶다는 시가 무려 128수라고 하니 그의 신선사상, 즉 도교의 교리에 심취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 그럴 수밖에요. 난설헌의 아버지 허엽(대사성)의 스승이 서경덕입니다. 서경덕은 황진이와의 애틋한 사랑으로 후대에
아름답게 얘기되고 있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서경덕은 도가사상에 심취해 있는 사람이지요. 만물과 내가 같다는 사상, 곧 인간과
자연, 남자와 여자를 차별하지 않는 인생관을 가지고 있는 사상이지요. '난설헌'이 도가, 즉 신선의 세계를 꿈꾼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난설헌의 불행은 그의 성격이 크게 차지 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선시대의 여인들이 다 불행한 것은 아니였지요. 지향하는 방향이
전혀 다른 부부가 다 불행한 것도 아니고요. 아마도 난설헌은 감수성이 예민한 천재적 시적 감각을 타고난 반면 대단히 이지적이고 냉정한 성품
같습니다. 포용력과 아량이 적은 냉철한 여인이 아니었나 봅니다. 그의 차원 높은 정신세계를 남편 김성립이 따라가기 어려웠고, 그것에 대한 불만이
컸던 것이지요. 당연히 김성립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기생과 놀아나는 것이지요.
* 천재는 평범하지 않아 평범한 삶을 살지 못해
불행한 것이 아닐까요?
* 천재라고 다 불행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들은 세속적이 아닌 그들 나름의 재능으로 몰두하며
즐거움을 찾는 것이니까요.
* 그럴 수도 있네요.
* 난설헌의 스승이었던 손곡 이달이 처음 초희의 '감우'라는 시를
보고 이렇게 이야기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난설헌이라... 참으로 대단한 자기애를 지녔구먼. 자고로 남자나 여자나 자아가 강하면 외로운 법.
이런 자아도취적인 정서는 칭송할 만한 것이 못되는 법이라네..'
* 그의 시적 천재성은 초희가 8살 때 쓴 '백옥루상량문'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이달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제까지 초희의 시를 수십편 읽었지만 내 가슴을 쿵 내려 앉을 정도로 감동한 시라고
했습니다. 그의 천재성은 분명히 평범한 삶을 살 수 없는 운명인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 우리는 수많은 천재적 업적을 남기고
요절한 과거의 사람들을 봅니다. 조숙했지요. 현재는 어떻습니까? 많은 젊은이들의 사고의 폭이 굉장히 어리고 좁습니다. 물론 다는 아니지만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진정한 교육의 상실이 아닌가요. 철학과 인문학이 사라졌지요. 안타깝습니다.
* 난설헌의 가정과 김성립의
가정을 대비해 놓았습니다. 김성립과 그의 어머니 송씨를 부정적으로 폄하했습니다. 난설헌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그런 것이 아니가 합니다.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난설헌의 가정은 아버지 허엽이 도가사상에 깊이심취여 선계에 심취하면서 자유분방함으로 큰아들 허성, 허봉, 난설헌, 허균까지
시적 감수성과 사상을 이어받아 5문장가의 가문으로 알려졌습니다. 반면 김성립의 가문 또한 만만치 않았습니다. 아버지 김첨은 홍문관 교리로 허봉과
동문수학을 했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난설헌과 김성립이 혼인을 했는데 이것이 잘못되었지요. 어머니 송씨가 못된 시어머니로 등장하는데, 송씨는
이조판서 송기수씨의 딸로 송기수는 경학으로 이름을 날린 학자였습니다. 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남자우선주의 교육에 철저했던 사람들이지요. 전혀 다른
가풍이었습니다.
* 난설헌이 좀더 당당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조선사회의 유교적 가풍으로 인한 여성의 굴레를 적극적으로 고발했으면 어떡했나 그런
아쉬움...
* 난설헌은 시인이지 사회운동가는 아니었나봅니다.
* 난설헌은 3가지를 원망했어요. 조선에서 태어난
것, 여인으로 태어난 것, 남편 김성립을 만난 것.. 그러면서 세상을 하직하며 허균에게 자신의 흔적 모두를 없애줄 것을 유언합니다. 자신이 쓴
시편들도 다 불태울 것을 명했지요. 여기서 난설헌의 소극적인 모습이 아쉬웠습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자신의 한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고발해야
하는 데..
* 허균이 너무 아까워 버리지 않은 시편 213편이 남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요.
*
난설헌의 시가 한구사에서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중국과 일본에서 알려져 국내로 들어왔거든요. 왜 그랬을까요.
* 세가지의
원인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 째,허초희의 시풍은 唐詩(중국 당나라(618∼907)의 시(詩). 당나라 때는 중국 서정시의 최성기이고, 그 시는
중국문학뿐만 아니라, 인류의 문학에도 위대한 유산으로 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에 속했으나 그 당시 조선은 16세기 말에서 17세기에
이르기까지 염락풍 시가 성행을 했습니다.염락풍 시란 '설리적 경향의 시로, 일반적인 송시와도 구별되는 독특한 특색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올바른 심성을 드러내는 시이고, 수양 과정과 유교적 가치관을 추구한 시이며, 천리를 따르는 사람의 마음을 노래한 시란점 이다' 전혀 상반된
것이지요. 둘 째, 허초희 집안은 동인이었지요. 동인이 쇠약하고 서인과 노론에 의한 정국이 오래 계속 된점. 셋 째, 중국에서 먼저 시집이 나온
것에 사대부들의 질시와 허균의 경박한 처세가 못마땅 한 것으로 보고있습니다.
* 예나 지금이나 국익보다 자신들의 이해 관계에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쉽습니다.
* 난설헌을 생각하면 애절하고 가슴이 먹먹합니다. 지금은 여권신장이 많이 되었나요?
*
어떤 면에선 여성 우월주의의 단계를 넘어선 듯 합니다. 여성중심, 처가댁 중심으로 넘어섰잖아요.
* 난설헌의 삶이 기구했습니다.
딸과 아들을 일찍 떠나 보내고, 유산까지 합니다. 허씨 가문이 기울기 시작합니다. 아버지 허엽이 경상감사 벼슬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던 중 상주
객관에서 사망합니다. 난설헌 18세때였지요. 설상가상으로 오빠 허봉이 21세 때에 동인학자들과 율곡 이이를 논하다 갑산으로 귀양을 가고, 허균이
유배를 가는 등 불운이 겹치자 죽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죽음은 오히려 피안이자 희망이라는 신선 사상으로 몰입하게 됩니다.
* 난설헌의 시에 유성룡이 발문을 씁니다. '말을 세우고 뜻을 창조함이 허공의 꽃이나 물 속에 비친 달과 같아서 형철 영롱하여 눈여겨 볼 수
없고, 소리가 울리는 형옥과 황옥이 서로 부딪치는 것이오...' 중국의 최고 지성이었던 주지번은 '티끌 밖에 나부끼고 빼어나면서도 화려하지
않으며, 부드러우면서도 뼈대가 뚜렷하다' 평을 했습니다.
* 난설헌은 조선 양반가 여인들 속의 이단아였습니다. 당시 양반 부인들의
정신세계와는 전혀 다른 파격적인 생각과 행보였지요. 당연히 시어머니와의 갈등이 심했습니다.
* 정인으로 등장하는 최순치는 누구보다
난설헌을 존경하고 사랑했습니다. 소설속의 절제된 사랑의 표현이 애절했습니다.
* 존경하는 오빠 허봉이 38세로 객사합니다.
난설헌이 26세때입니다. 사랑하는 동생 허균이 유배를 가는 등 정신적 의지처가 사라지고 유산까지 하게 되자 초현실세계로 도피하고자 결심합니다.
그의 죽음에 여러 설이 있습니다. 수원대 교수 김미라 연구에 의하면 '자신을 죄를 짓고 적강한 선녀로 생각하여 집 뒤에 별채를 짓고 선녀의
의관을 입고 향불을 피우며 살다 선녀 의관을 입은 채 죽었다'고 설명합니다. 또 다른 측면에서는 강물에 몸을 던진 것으로 나옵니다. 소설
속에서는 스스로 조용히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 현대 정신분석학적으로 보면 정신적 병에 걸린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 충분히 그럴 개연성이 있다고 봅니다.
* 죽음의 도피처에서 그는 피안의 세계에 대한 꿈을 많이 꾸었나
봅니다. 꿈에서 깨어난 뒤 그 정경이 상세히 떠올라 '몽유기'를 짓기도 했습니다.
* 몽유관상산 시를 마지막으로 피안의 선계로
들어갑니다.
몽유광상산시(夢遊廣桑山詩)/난설헌
-꿈속에서 광산산에서 놀다 -
碧海浸瑤海(벽해침요해)
靑鸞倚彩鸞(청란의채란)
芙蓉三九朶(부용삼구타)
紅墮月霜寒(홍타월상한)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넘나들고
파란 난새가 채색 난새와 어울렸구나
부용꽃 스물 일곱송이 붉게 떨어지니
달빛은 서리위에서 차갑기만 하구나
* 시대가 낳은 천재 시인 허초희, 난설헌(1563~1589).. 그가 피안의
세계로 간 후 430여년 후에 우리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를 만났습니다. 그의 생애는 결혼 전과 결혼 후가 극명히 대별 되면서 오로지 시로
절규했습니다. 그나마 시는 그의 안식처였습니다. 시로 토해내고 또 토해냈습니다. 결국 시도, 사랑하는 친정의 부모와 오빠 동생도, 가슴에 묻고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자신의 자식들도 다 떠나 보내고 마침내 마지막 꿈 속에서 본 십주 전경중 제일 아름답다는 선계에서 선녀의 황홀한 인도를
받아 노닐던 광상산의 선계로 영원히 떠났습니다.
*그의 묘소가 경기도 광주 초월면 지월리에 있습니다.
* 오래 전에 묘소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난설헌의 묘와 왼쪽에 두 자녀의
묘가 있고 윗편에는 김성립과 후처 홍씨 부인이 합장되어 있습니다. 난설헌과 합장이 안 된 이유는 자녀가 없어서 조선선의 관례가 그런가 봅니다.
난설헌이 두 자녀를 잃고 쓴 애절한 글이 새겨져 있어 안타깝게 했습니다.
시비 전면에는 난설헌이 두 자녀를 잃고 쓴
곡자시(哭子詩)가 새겨져 있습니다.
지난 해 귀여운 딸애 여의고/ 올 해는 사랑스런 아들 잃다니/ 서러워라 서러워라 광릉땅이여/
두 무덤 나라히 앞에 있구나/ 사시나무 가지엔 쓸쓸한 바람/ 도깨비불 무덤에 어리비치네/
소지올려 너희들 넋을 부르며/ 무덤에
냉수를 부어 놓으니/ 알고 말고 너희 넋이야/
밤마다 서로 서로 얼려 놀테지/ 아무리 아헤를 가졌다 한들/ 이또한 잘 자라길 바라겠는가/
부질없이 황대사 읊조리면서/ 애끊는 피눈물에 목이 메인다/
-난설헌 묘 -
-딸과 아들 묘 -
-난설헌과 두자녀의 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