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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묘에 봉안된 선조 사적>
무안박씨는 관향(貫鄕) 무안에 경기묘(景基廟) 사우(祠宇)에 시조 진승공(進昇公)을 주벽(主壁)으로 하여 12세(十二世)까지 15위의 위패를 봉안하고 세일사 재향을 올리고 있다. 2015년 3월 대종회에서는 경기묘지(景基廟誌)를 발간하면서 선조들에 대한 위패를 고쳐쓴 바 있다. 위패를 고쳐 쓰게 된 사유는 삼백년 전 처음 갑술 대동보를 발간하면서 범례에 기록하기를 무안박씨가 탄생하여 고려조에서만 400년여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년수(年數)에 비하여 선조(先祖)의 세수(世數)가 10세밖에 안되니 너무 적다하고 오래되어 실전(失傳)하지 않았는지 의심이 된다고 하였다. 더욱이 2세와 3세간에 나이 차가 백년이상 차이가 있어 부자(父子)관계인지 소목(昭穆)이 불명하다고 쓰여 있다. 그러던 차에 1993년 무안군 부인박씨(7世)묘지명이 발굴되었다. 묘지명(墓誌銘)의 기록과 족보의 기록이 다르다는 것이 밝혀졌다. 2세와 3세간에는 3대(3代)정도 실전(失傳)하였음이 확인되었다.
고려시대 조상의 소목(昭穆)이 바르게 밝혀졌으니 묘지명(墓誌銘)과 고려사(高麗史)를 참고하여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며 사적과 위패를 바로잡아 경기묘지(景基廟誌)에 게재하게 된 것이다.
다만 기왕에 통용하고 있는 갑인대동보와 갑자대동보의 잘못된 기록은 앞으로 족보를 다시 할 때에 고쳐 쓰기로 하였다.
시조 휘 진승(進昇) : 금자광록대부 국자좨주 무안군 진승(金紫光祿大夫 國子祭酒 務安君 진승)
고려초 성종(成宗 981-997)왕조의 문신(文臣)이시며 무안박씨 시조(始祖)가 되신다.
공은 박학경사(博學經史)하신 성리학자(性理學者)로서 학문에 정진(精進)하시고 입사초년(入仕初年)에는 국가의 인재(人材)를 양성하는 국립대학인 국자감(國子監) 좨주(祭主)에 등용되어 후진을 양성하셨다.
중년(中年)에는 고주사(高州使)로 옮겨 백성을 보살피는데 많은 치적(治績)을 남기셨으며 고주는 함경도 원산 부근이라 당시에 거란의 유민 여진족들이 자주 침략해 왔다. 상장군(上將軍) 배명(拜命)받아 적(敵)의 침략을 받아 적의 침략을 물리치고 나라를 주석(柱石)같이 다진 공훈으로 무안군공(務安君公)으로 봉작(封爵)되었다 한다.
2세 휘 섬(暹) : 광정대부 상서좌복야(匡靖大夫 尙書左僕射) 섬
현종(顯宗 1009-1031)왕조의 문신으로 고려사(高麗史)에 기록하기를 고려 현종원년(顯宗元年 1010년) 안북도호부사(安北都護府使)로 계실 때 거란 임금이 직접 40만 대군을 거느리고 침략해왔다. 중과부족으로 일시 후퇴함에 따라 개경(開京)으로 돌아오니 왕은 이미 나주(羅州)로 남행(南行)하였으므로 즉시 차가(車駕)를 따라 만나 임금님 행차에 수행하면서 극진히 호종(扈從)하였다. 양규(楊規) 장군의 방어로 거란군은 패퇴하여 화의(和議)하고 물러가자 현종(顯宗)이 개경으로 환궁(還宮)하여 고향 무안에서 요양하고 경저(京邸)로 돌아온 섬(暹)을 불러 사재경(司宰卿)에 임명하고 얼마 뒤 장작감(將作監)이 되었으며 다음에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올랐다.
다음 문종(文宗)이 즉위하여 조칙을 내리기를 현종(顯宗) 원년에 거란 대군이 침략해 와 우리 아버지 현종(顯宗)이 삼남으로 피난할 제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섬(暹)이 부설호종(負絏扈從)하고 개경수복(開京收復)에 시종(始終)이 여일(如一)하고 사직(社稷)을 편안히 하였으니 호종공신에 추증하고 초상(肖像)을 그려 능연각벽상(凌烟閣壁上)에 걸어 후진들에게 시범(示範)이 되게 하였다.
* 무안박씨 처음으로 창간한 족보가 갑술보이다.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종파의 보첩이 다 같지 않아 평강공의 가장보에 근거하여 쓰다 보니 고려사 인물열전에 등재된 섬의 증손 평장사 승중이 족보에 누락되었고 지평보에 기록된 판서 의룡의 아버지 판서 천무가 누락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고려사의 인물열전에는 승중은 2세 섬의 증손자이며 섬(暹)의 아들과 손자는 失傳하여 모른다고 하였다.』 이를 근거로 족보에 추가로 등재한다면 섬 아래에 실휘(失諱)한 아들 손자 두세대는 0란으로 비워두고 증손자 승중을 올려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족보는 3세 윤위(允位)와 4세 유(蕤)의 아래 후대(後代) 손으로 승중(昇中)을 등재하였다. 그것은 잘 못 올린 것이다.
왜냐하면 공(公)은 예종(睿宗 1105-1122)조에서 문과급제(文科及第)하여 인종(仁宗 1102-1146)대에 평장사(平章事)를 하신 분이다. 앞에 윤위(允位)는 명종(明宗)은 1170년대 사람이고 유(蕤)는 고종(高宗)은 1210년 사람이므로 승중공이 바로 윗대 조가 된다. 후손을 선조 앞에 올리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족보는 잘못되었지만 역사적 사실에 맞추어 섬(暹)공 아래에 승중3대를 기술하는 것이다.
0세 : 실휘
0세 : 실휘
0세 : 휘 승중(昇中) : 개부의삼사수태위중서시랑평장사(開府儀同三司守太尉中書侍郎平章事) 승중
예종(睿宗 1105-1122)때에 문과 급제하여 상안부록사(常安府錄事)에 보임된 뒤 중서주서(中書注書)가 되었다. 1105년 예종(睿宗) 1년) 김연(金緣), 김인존(金仁存), 최선(崔璿), 이재(李載), 이덕우(李德羽) 및 태사관(太史官)과 더불어 여러 음양지리서를 검토 정리하여 해동비록(海東祕錄)의 편찬을 담당하였다.
또한 한림시독학사(翰林侍読學士)로서 박경작(朴景綽), 김황원(金黃元) 등과 상정관(詳定官)이 되어 예의(禮儀)를 정하였다.
1107년 기거사인(起居舍人)으로 요나라에 가서 신정하례(新正賀禮)하였다.
1109년 예부낭중(禮部郎中)으로 호부낭중(戶部郎中) 한상(韓相)과 함께 여진족에게 9성을 환부하는데 반대하였다.
1111년 중서사인(中書舍人)을 거쳐
1113년 시강학사(侍講學士)로서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 김연과 더불어 시정책요(時政策要) 5책을 편찬하였다.
이듬해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가 되고 한림학사로서 국학(國學)에서 서경(書經)의 설명편(說命篇)을 강의하였다.
이 해에 동지공거(同知貢擧)가되어 진사를 선발했으나 급제자의 대책(對策)이 고작(古作)을 답습하였다고 하여 왕이 직접 복시(覆試)하였다.
1116년 국자좨주한림학사좌간의대부(國子祭主翰林學士左諫議大夫)가 되었으나 청연각에서 시신(侍臣)을 비평하여 판장작감으로 좌천되었다.
이듬해 한림학사지예부사(翰林學士知禮部事)를 거쳐 이 해에 청연각에서 시경관저편(詩經關雎篇)을 강의하였다.
1119년 장경도장(藏經道場)이 설치되어 향을 나누어 주기 위해 시신의 반차(班次)를 작성하던 중 홍관(洪灌) 이숙(李璹)과 더불어 웃고 말하는 소리가 어소(御所)에까지 들려 대관(臺官)의 탄핵으로 파면되었다. 이어 한림학사승지가 되었다.
그때에 가뭄이 들어 왕이 청연각에 나와 그에게 서경(書經) 홍범편(洪範篇)을 강론케 하였더니 우연히 비가 크게 내렸다.
1122년 좌상기상시(左散騎常侍)로서 지공거(知貢擧)를 역임하고 인종(仁宗)이 즉위 하자 보문각학사로 김부식(金富軾), 정극영(鄭克永)과 더불어 예종실록(睿宗實錄)의 편수관이 되었다.
1123년(仁宗 1년) 추밀원사가 되었으며
1125년 검교사공(檢校司空) 정당(政堂) 문학판한림원사(文學判翰林院事)에서 참지정사(參知政事)를 거쳐 수태위(守太尉)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로 승진하였다.
인종(仁宗) 때에 이자겸(李資謙) 난에 화를 당하여 고향인 무안에 부처(付處)되어 야인으로 불우하게 생을 마감하였다. 그러나 숙종(肅宗) 예종(睿宗) 인종(仁宗) 삼대에 걸쳐 왕을 보필한 공로로 학문과 문장이 높이 평가되어 그의 업적이 사기(史記)에 기록되어있다.
공은 좌복야 공 섬(暹)의 증손이며 자손이 있어 현손(玄孫)중 여서(女壻)가 덕수이씨(德水李氏)3세 이소(李邵)이며 이순신 장군의 7대 조모가 된다고 덕수이씨 족보에서 확인되고 있다. 그 후로는 세세(世世)가 실전하여 전하여지지 않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자손이 무전하고 우여곡절이 있어 처음 족보에 누락되었다가 갑인대동보에 추가 등재하였으며 경기묘지편찬위원회와 대종회 총회의 결의로 위패를 경기묘(景基廟)에 배향하기로 한 것이다.
3세 휘 윤위(允位) :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 윤위
전해오는 보첩에 7세 면성군 문오(文晤)의 고조부가 되신다 하였으니 명종(明宗 1170-1197)고려 무신정변(武臣政變)시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이다.
공은 잠영세가(簪纓世家) 자제(子弟)로서 일찍부터 영예를 한몸에 지니고 그 재간과 도량(度量)이 크고 또 지략(智略)이 많았기로 당시 사대부(士大夫)로부터 추앙과 존경을 받았다. 당시 나라가 외침을 자주 받았고 내적으로는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켜 무신정권이 수립되고 기강(紀綱)이 흔들려 어려울 때 조정대신들이 모두 가로되 가위(可謂) 박윤위(朴允位)가 크게 쓸만한 인물이며 겸하여 장수(將帥)로서 지간(才幹)이 있다 하거늘 왕이 이에 발탁하여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으로 삼았다. 조당(朝堂)에서도 극히 영예(榮譽)로운 선발(選拔)이라 하였다.
4세 휘 유(蕤) : 통의대부 좌우위대장군 지병부사(通議大夫 左右衛大將軍 知兵部事) 유
족보에는 상장군(上將軍) 유(儒)라 기록하고 있으나 근년에 발굴된 밀직부사(密直副使) 부(琈)의 3녀 무안군부인박씨 묘지명(墓誌銘)에 의하면 유(儒)는 유(蕤)의 오자(誤字)로서 글자가 잘못 표기된 것이며 묘지(墓誌)에 기록된 대표 관직명은 통의대부(通議大夫) 좌우위대장군(左右衛大將軍) 지병부사(知兵部事) 유(蕤)이다. 고려 고종(高宗)왕 4년(1217)에 거란 침략당시 정주분도장군(定州分道將軍)이었다고 고려사(高麗史)에는 기록하고 있다. 그 후 대장군(大將軍)으로 승급하고 병부(兵部)의 지사(知事)까지 관직에 오르셨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족보에 복야공(僕射公)의 2대손으로 상장군(上將軍)이라 기록하고 있는 것은 오록(誤錄)임이 밝혀졌다. 㽔(?)
5세 휘 성기(成器) : 조산대부 병부시랑 금오위섭장군(朝散大夫 兵部侍郎 金吾衛攝將軍) 성기
공은 품성이 영리하고 풍체가 당당하고 지략이 심오하며 여러 대의 벌열(閥閱 옛날 조상의 공적을 기록하여 왼쪽 기둥에 벌 오른쪽에 열이라 하여 달아둔 서찰)의 융성한 가문의 촉망받던 자손으로 검교대장군 윤위(允位)의 손자로 할아버지 풍모를 닮았다고 한다. 몽고(元나라)와의 장기간 전쟁으로 나라가 위태로울 때 고종(高宗)이 특별히 발탁하여 대사마(大司馬)와 금오위섭장군(金吾衛攝將軍)을 삼았다. 족보에 기록되어 있는 상장군 밀직부사는 오록(誤錄)이다.
6세 휘 구(璆) : 금자광록대부 수사공 상서좌복야(金紫光祿大夫 守司空 尙書左僕射) 구
관직이 금자광록대부 수사공 상서좌복야에 오르셨다.
고려사에 의하면 충렬왕 원년(1274년) 갑술(甲戌) 11월 정해(丁亥)일에 박구(朴璆)로 수사공(守司空) 좌복야(左僕射)를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고려사(高麗史) 기록에는 충렬왕이 좌복야 구(璆)의 집에 들러 묵었다고 하였으니 충렬왕과는 각별한 군신(君臣) 관계로 가까운 측근이었다.
6세 휘 부(琈) : 봉익대부 밀직부사 군부판서 상장군(奉翊大夫 密直副使 軍簿判書 上將軍) 부
공은 총명영달(聰明英達) 지예(才藝)가 범상(凡常)하고 경서(經書)와 사기(史記)에 능(能)하여 문한(文翰)이 높았다고 한다. 고려후기)高麗後期 원종(元宗) 충렬왕(忠烈王) 양대(兩代)의 문신(文臣)이다. 고려사에는 원종(元宗)11년(1270) 삼별초난 때 나주부사(羅州副使)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관직 경력으로는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 예의정랑(禮儀正郎) 삼사판관(三司判官)에 이어 사예사성을 거쳐 보문관 응교 및 제학을 역임하고 밀직부사(密直副使) 군부판서(軍簿判書)를 지내셨다.
갑술보(甲戌譜) 고증(考證)에 삼별초 난 때 나주부사(羅州副使) 부는 연대(年代)가 맞지 않아 우리 후손이 아닌 동성명(同姓名) 제3자(第三者)라고 한 것은 잘못한 고증이며 무안군부인박씨 묘지(墓誌)가 발견됨으로써 입사초년(入仕初年)에 나주부사(羅州副使)였음이 증명되었다. 배위(配位)는 협계부인신씨(陜溪郡夫人鮮氏) 이다.
7세 휘 문연(文衍) ; 정의대부 공부상서(正義大夫 工部尙書) 문연
공은 밀직부사(密直副使) 부(琈)의 3남 3녀의 장자(長子)로 태어나 밀직부사(密直副使)의 형님되시는 수사공(守司空)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구(璆)의 사손(嗣孫)으로 출계(出系)하였으며 벼슬이 공부상서(工部尙書)에 이르렀다.
부군의 후손들이 무안박씨 개성파(開城派)이다.
7세 휘 문오(文晤) : 삼중대광 문하시랑동중서 문하평장사 면성부원군(三重大匡 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綿城府院君) 문오
공은 밀직부사 부(琈)의 3남3녀의 자녀중 차남으로 태어나셨다. 조부는 병부시랑(兵部侍郎) 금오위섭장군(金吾衛攝將軍) 성기(成器)이며 증조부 좌우위대장군병부지사(左右衛大將軍兵部知事) 유(蕤)이시다. 대대로 이어오는 명문세가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英名하여 후일 나라에 크게 쓰일 재목으로 촉망받았다.
고려는 몽고(元나라)의 침략을 받아 고종이 강화도(江華島)에 천도(遷都)하여 30년여 항쟁하였으나 강화도를 제외한 전 국토가 유린당하고 항쟁(抗爭)에 실패하여 원종(元宗)이 몽고와 강화한 이후 1270년 개경(開京)으로 환궁(還宮)하였다.
공은 충렬왕(忠烈王)때에 충량과(忠良科) 문과에 급제하여 조정에 나아갔다. 전쟁의 후유증으로 국가의 사직이 풍전등화(風前燈火)같은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했을 때 조정에 나간 공은 나라를 위하여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하겠다는 결심으로 양장노고하며 모든 정사를 실행함에 있어 전전긍긍하며 빙상에 임하는 것 같이 혼신을 다하였다. 충렬왕 16년에 원나라의 반군 합단적(哈丹賊)의 침략으로 국난을 맞으매 그들의 침략을 몰아내고 누란의 위기에서 사직(社稷)을 안정시켰다. 공훈으로 광국공신(匡國功臣) 면성군(綿城君)으로 책봉되었다. 벼슬이 문하시랑(門下侍郞) 동중서(同中書)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에 이르렀다. 호는 면남(綿南)이며 시호(諡號)는 문정(文靖)이다. 만년에 관향인 무안으로 퇴거하여서는 정자를 지어 편액(扁額)을 유산정(遊山亭)이라 하고 정자 아래에 연못을 파서 생선지(生鮮池)라 이름 짓고 한가로이 여생을 보내셨는데 유산정 동편아래 면남정사(綿南精舍)를 지어 송시독서(誦詩讀書)하며 후진 양성에 심혈을 기울이셨다. 유산정은 세구년심(世久年深)하여 훼손되어 폐허가 되었는데 1897년 고종기묘(高宗己卯)에 후손들의 성의와 사간(司諫) 기종(淇鍾)의 혈성으로 중건하여 사간공이 중건기(重建記)를 지었고 1898년 무술(戊戌)에 유적비(遺蹟碑)를 세웠는데 참판(參判) 최익현(崔益鉉) 선생이 비명(碑銘)을 지었다. 면남정사(綿南精舍)는 멸실된지 수백년여년 만에 지방자치부 무안군(務安郡)의 지원과 무안종회(務安宗會)가 주관하여 각종파(各宗派)의 성금으로 2012년 착공하여 2013년 준공하였다. 부군의 후손들이 번연(蕃衍)하여 무안박씨의 대종(大宗)을 이루고 있으며 20여 종가(宗家)로 분파(分派)하여 종파(宗派)를 이루고 있다.
배위(配位)는 국대부인(國大夫人) 김씨(金氏)이다.
7세 휘 문정(文正) : 은청광록대부 호부상서(銀靑光祿大夫 戶部尙書) 문정
공은 밀직부사(密直副使) 부(琈)의 3남3녀의 자녀중 3남으로 태어나셨다. 명문세가의 후예답게 효우심덕(孝友心德)하고 나라위한 충절(忠節)이 출중하셨다 한다.
충렬왕조에서 문과에 급제하여 입사(入仕)하셨으며 사직(社稷)이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했을 때 충절을 다하여 임금을 보좌하니 그 벼슬이 호부상서(戶部尙書)에 이르렀다. 부군의 자손들이 번성하여 홍산파(鴻山派) 당진파(唐津派)로 대종(大宗)을 이루고 있다.
8세 휘 윤류(允鏐) : 중산대부 군부사 총랑(中散大夫 軍簿司 総郞) 윤류
면성부원군 문오(文晤)의 오남중 다섯째이다. 공의 성품이 온화하고 도량이 넓으며 총명하여 장래 동량지신(棟樑之臣)이 될 재목이라 하여 조야(朝野)에서 천거(薦擧)로 봉직랑(奉直郎)에 제수(除授)받고 판도(版圖 戶部) 정랑(正郎)을 거쳐 군부사(軍簿司 兵部) 총랑(摠郞)을 역임하였다.
배위(配位)는 여흥군부인(驪興郡夫人) 민씨(閔氏)이다.
9세 휘 天茂 : 正順大夫 判宗簿寺事 천무
처음 족보인 갑술보에는 누락되었다. 또 다른 지평문중의 보첩에 천무(天茂)공의 기록을 근거로 혼맥(婚脈)을 조사한 결과 판서 의룡(義龍)의 부친으로 확인되어 정묘보 할 때 추가로 등재한 것이다.
공의 여서(女壻) 고성인(固城人) 충정공이희필(忠靖公李希泌)의 족보에 빙무(聘父)가 무안인(務安人)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 천무(天茂)라 기록하고 있으며 배 상산김씨(商山金氏) 족보에도 대제학(大提學) 출(築) 여서(女壻)에 무안인(務安人) 판사 박천무(朴天茂)라 기록하고 있다. 우리 무안박씨 가장보의 자손록에 천무공(天茂公)이 누락된 것은 보첩이 온전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배위(配位)는 상산군부인(商山郡夫人) 김씨(金氏)이다.
공은 군부사(軍簿司) 총랑(総郞) 윤류(允鏐)의 장자(長子)이며 벼슬이 종부시(宗簿寺) 판사(判事)에 이르렀다. 고려 관제 변천사를 보면 문종(文宗)때에 전중성(殿中省)이었다가 충선왕 때 종부시(宗簿寺)로 바뀌어 왕족과 종친귀족의 족보를 관장하는 관아이다.
10세 휘 의룡(義龍) : 보국숭록대부 영중추부사 호병형조 판서(輔國崇祿大夫 領中樞府事 戶兵刑曹 判書) 의룡
공은 자품(資品)이 영수(英秀)하고 기량이 크고 원대(遠大)하였으며 경서(經書)와 사기(史記)에 밝으며 지략(智略)이 특출하니 당시의 여론이 임금을 보좌할 수 있는 큰 재목이라 일컬었다.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에 급제하여 1388년(禑王 12년)에 의주목사(義州牧使)가 되었다.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개국한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와는 포의지교(布衣之交)인 옛 친구로서 개국하는데 공을 세워 개국정사수충갈성(開國定社輸忠竭誠) 입공정책(入空定策) 공신록에 등록되고 공신록권(功臣錄卷)을 받았다.
호는 풍정(楓亭)이며 벼슬은 호조(戶曹) 병조(兵曹) 형조(刑曹) 삼판서(三判書)를 역임하시고 이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나셨다. 특별히 태조가 친필로 개국정사수충입공(開國定社輸忠入功)이란 여덟자를 써서 하사 하였다. 만년에 증조부 면성군(綿城君)의 유촉지인 무안의 유산정(遊山亭)과 생선지(生鮮池)에서 고기 노는 것을 보면서 그 절개를 사랑하는 시구(詩句)를 음영(吟詠)하며 사시다가 고종명(考終命)하셨다.
묘소는 나주 흑룡동에 있다하나 실전이다.
서기 1778년 정조 무술(戊戌)에 많은 선비들이 사당을 세우고 병산사(柄山祠)라 편액(扁額)하여 향사(亨祀)한다. 왕조실록을 살펴보면 개국공신록에 등록된 박의룡(朴義龍)등 39인에게 단서철권(丹書鐵券)을 하사하고 대대로 국록을 받게 하고 죄를 지으면 용서해주고 병이 들면 의원과 약을 보내어 구호해 주고 사망하면 빈소에 필히 가서 깊이 위로해주고 부의도 특별히 후이 하여 장례까지 하라 하였고 당대(當代) 임금이 지난 뒤에도 다 후손에게로 계승하라 하였다.
배위(配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함창김씨(咸昌金氏)이다.
11세 휘 강(綱) : 가선대부 형조참판(嘉善大夫 刑曹參判) 강
공은 성품이 도량이 넓고 충신(忠信)하고 청렴하며 온화하였으며 세가(勢家)의 부귀(富貴)를 표내지 않고 현우(賢愚)와 귀천(貴賤)을 막론하고 겸손하게 대하였다 한다. 개국공신 풍정(楓亭)공의 적장자(嫡長子)로서 특전으로 선용(選用)되어 순천부사(順天府使)와 광주 안주목사에 이어 내직(內職)으로는 병조(兵曹) 예조(禮曹) 형조(刑曹) 참의(參議)와 참판(參判)을 역임하셨다.
배위(配位)는 정부인(貞夫人) 흥양조씨(興陽趙氏)이다.
12세 휘 형(亨) : 가선대부 호조참판(嘉善大夫 戶曹參判) 형
공은 개국공신(開國功臣) 풍정공(楓亭公)의 적장손자(嫡長孫子)로 관직 선용(選用)의 특전을 마다하고 벼슬에 뜻을 두지 낳고 은거 자적(自適)하며 사시다가 음직(蔭職)으로 낭청(郞廳)에 잠시 계시었고 신선(神仙)고을이라 하는 단양지사(丹陽郡知事 지금의 군수)에 은전(恩典)으로 제수되었다. 증직(贈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셨다.
배위(配位)는 증정부인(贈貞夫人) 파평윤씨(坡平尹氏)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