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評論 >
詩 朗 誦 에 관 한 一 考
鄭 得 福
詩란 한마디로 말하면 문학의 한 장르로 詩作品을 일컫는다고 하겠다.
이 시를 藝術的 感動의 內實이라고 할 수 있는 詩情 내지 詩的要素를 일컫는다.
詩는 言語의 일정한 울림, 리듬, 하모니 등의 음악적 요소와 언어에 의한 이미지. 視覺등 繪畵的 要素에 의해 독자의 감각이나 감정에 호소하고 또는 상상력을 자극하여 깊은 감명을 던져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文學作品의 一種으로 거기에서는 언어의 情動的인 機能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言語의 配列과 構成이 요구된다.
시를 언제부터 낭송을 하였느냐 하는 문제는 시가 언제부터 우리에게 있었느냐 하느냐? 로부터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麗玉이 지었다는 <??引>이 첫 詩로서 알려졌는데 여옥이 공후를 타면서 노래를 읊으니 듣는 사람치고 누구 하나 눈물을 흘리고 울음에 목메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이를 지은 때를 韓致奫(한치윤)의 <海東繹史>에 조선은 한나라 때 樂浪郡 朝鮮縣일 것이다. 라 하였다.
< 公無渡河
公竟渡河
墮河而死
公將奈何 >.
= 님하 가람 건느지 마소.
그예 님이 건너시네.
물에 들어 ?오시니.
어져 님을 어이하리. =
鷺山 李殷相 飜譯
또한 조선시대의 가사로부터 최남선의 <해에서 소년에게 >의 신시로부터 김소월의 < 진달래 >등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시작품이 낭송되어왔다고 하겠다.
처음에는 시를 낭송하여 듣는 대상이 독자로 생각된다. 작가가 독자에게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독자에게 잘 전달할 수가 있기를 바랬으며 독자는 작가의 생활과 사상을 읽고 듣고 말하기를 알려고 하였을 것이다.
그러하므로 시낭송회는 독자를 상대로 하여 있어 왔다고 하겠다.
1970년- 80년대까지만 하여도 시인들의 시낭송회는 독자를 상대로 하여 시낭송회 발표회가 있다고 신문, 라디오 등 메스콤에 알리어져 많은 독자들이 시작품을 낭송하는 시인들과 함께 자리를 같이 하고 동인들 이외의 초대시인들도 특별히 초청하여 독자들에게 문학의 시야를 넓히고 시를 읊조리며 토의와 질문을 통하여 고유한 우리나라의 역사와 전통 그리고 풍습 등을 통한 생활상과 민족성을 기리는 작품 그리고 현실에 대한 부대낌 등 우리가 현실세계에 처해 있는 존재자로서의 값어치, 그 역할을 논하고 개진하며 작품으로 승화시켜 우리의 얼을 되살리려고 하는 작가와 독자의 거리를 문학의 향취로 가득하게 하였으나 그러나 요즈음의 문학작품(시낭송)회는 약간의 변질이 아니라 어느새 시낭송회는 시인들만의 작품을 읽는 데에만 그치는 풍토가 되어져 왔다고 생각된다.
당시 1981년 6월 27일부터 1984년 9월 29일까지 매주 토요일 오후 3시에 충무로 <설파> 까페에서 <詩人會議> 동인들이 주최하고 <文學藝術社>와 까페<설파>가 공동으로 후원하는 < 土曜日 午後와 詩 > 詩朗誦會를 갖은바 詩人會議同人으로는 姜桂淳, 金鍾元, 朴利道, 朴貞姬, 故成權永, 申世薰, 故劉庚煥, 故李 石, 李愚碩, 李濬英, 李 炭, 張潤宇, 故鄭孔采, 鄭得福, 趙東植, 許 洧 등 16명으로 자신들의 발표는 물론 그 주일의 招待作家(시인 등)들을 반드시 招請하였으니 文壇의 거의 有名詩人들은 모두가 참여하였으며 시인과 독자들의 文學의 香臭를 共有하는 場으로 文學의 熱氣가 후끈하게 달아오르곤 하였다.
또한 독자들의 모임인 < 秋實會文學同人>들의 활발한 저변 활동으로 참여와 정진 그리고 끊임없는 노력으로 文人으로 登壇한 강준규, 김명섭, 김혜순, 문일상, 백준찬, 임종숙, 정공량, 정명섭, 최창균 등이 배출되어 百花爛漫의 氣慨를 더 높혔으니 < 詩人會議同人會 >와 < 秋實文學同人會 >가 작가와 독자의 一心으로 渾然一體가 되었으니 시낭송회의 큰 意義 나타내었다고 생각하니 우리 문학사나 시낭송회의 발전에 一劃을 뚜렷하게 足跡을 남겼으니 너무나 뜻이 깊다고 하겠다.
이렇게 매회 시낭송회마다 많은 독자들이 가득하게 자리를 같이 하였으니 문학의 전도사 역할을 크게 자리하였다고 하겠다.
시낭송은 그야말로 시작품에 대한 작가의 독특한 詩心을 독자에게 작가의 詩世界를 소리의 감성과 마음의 감정을 濾過없이 傳達함으로서 작가(시인)의 소리(읊조림)를 직접 듣는다는데 독자와의 만남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이다.
근간의 시낭송회는 거개가 시인들만이 모이어 (그렇지 않은 곳은 몇 군데 밖에 없음) 읽고 낭송이 아닌 토의나 질문, 그리고 의견, 사상, 철학, 세계관 등등을 빠뜨리고 몇 수 십 명의 시인(?)들이 읽고 독자는 한 사람도 없이 다음 차례로 읽기만 한다는 것은 아예 시낭송회가 아니라 詩 讀書會라고 하는 것이 나을 듯 하다.
詩朗誦會는 시에 대한 작가와 독자의 질의와 시에 대한 인생과 생활과 사상과 예술을 추구하는 그 무엇인가를 접하고 생각하고 깨eke게 하는 場(장소)이 되여야 한다고 믿는다.
어떻게 하면 작가의 작품 세계를 독자에게 전달하느냐? 에 있는 것이므로 낭송을 통하여 그 작품을 대하게 하는 독자의 진지한 立地를 형성하여 주어야 하는 것이 시인의 한 가지 목표가 될 수 있다고 하겠다.
독자가 없는 시낭송회는 갖지 말아야 한다. 시낭송회라고 이름 붙여서는 아니 된다.
앞으로는 시인과 독자를 생각하는 낭송회가 곳곳에서 열리어 문화예술의 향취인 詩香(文香)이 가득히 넘치는 詩情이 함께하는 자리를 시낭송회에서 독자로 하여금 누리게 하여야 한다.
시낭송회는 다른 文學分野에서는 없는 시만이 가지고 있는 特異性을 附與 받고 있다고 하겠다.
소설이나, 희곡이나, 수필이나, 평론이나 등 다른 분야의 영역에서는 낭송이라고 하지 않고 읽는다고 하는 것에서만 보아도 시와 다른 文學分野의 차이점을 克明하게 알 수가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시란 읽기 쉽고 기억하기 쉬우며 그 내용이 풍부하고 그 修辭는 아름다워야 한다.
詩情이 넘쳐 나야 한다는 것이다.
人間의 心性을 생활속에서 울리게 하며, 생각의 깊이를 깨달게 하는 詩心이 가득한 작품을 작가는 독자들에게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文字(言語)로 전달하지 못하는 시인 작가들의 생생한 숨소리를 시낭송을 통하여 독자가 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작품의 발생과 완성의 과정을 듣는 기회도 아울러 들을 수 있는 시간이어야 한다.
詩의 誕生은 시인으로부터 創作되는 過程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독자로 하여금 우주관과, 세계관, 인생관, 생활관, 역사관을 관찰할 수 있고 앞으로의 자기 세계를 啓發하고 開發하여 나가는데 삶에 있어서의 정신적인 지혜의 羅針盤 役割을 提示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시낭송에 있어서는 작품의 質과 길이(낭송에 알맞은 작품)에도 작가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려 독자로 하여금 듣고 보고 느끼며 무엇인가 삶의 지식을 담아 생활의 윤택함을 지니게 하여야 한다.
이러한 要素들을 제공하여 주는 것이 독자가 혼자 끙끙대며 學究에 열중한 것 이외의 創作法을 익히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시낭송회는 아주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이다.
메마른 땅에 단비를 뿌리듯이 사람들의 어지러운 생활 속에 인간의 眞.善.美를 추구하며 행복한 인간의 心性을 기루어 내는데 詩人의 役割이 중요함을 일깨워 주어야 하며 시인은 이 일을 게을리 말아야 한다.
끝으로 나의 拙詩 한 편(22字로 된 짧은 作品)을 소개하며 요즈음 시인들의 모임에서 시낭송소회를 갖는 풍토를 저허(두려워하다)하여 이 글을 쓰는 까닭이라 하겠다.
< 시 >
歲 月
鄭 得 福
바람
불고
물
흐르고
꽃
피고
새
울면
세월
따라
인생
간다.
Come To My Bedside, My Darl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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