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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하회마을 답사(2) -충효당 마을편
▣ 일시 ; 2011.09.25.
▣ 청천일칠산우회
▣ 촬영, 올린이 ; 이재익
- 참석자 명단 (33명) -
(5명) ; 곽동형, 권기원, 권녕순, 권정수, 김기식,
(7명) ; 김성봉 내외, 김용택 내외, 김종태, 류진태, 민성기,
(6명) ; 박명찬, 배종복, 배영학 내외, 신명식, 안범두,
(5명) ; 양경석, 유병용, 이근영, 이남수, 이상훈,
(6명) ; 이승학 내외, 이재익, 임종성, 정용우 정주호,
(4명) ; 조정래,박상길, 배창근, 권중국(*첫참가)
1. 맨드라미꽃
2. 화회에서 안동으로 가는 대중교통 버스 시간표
3. 하회 장터 입구
안동 명물 간 고등어 이야기 (1)
안동의 대명사가 된 ‘주식회사 안동 간고등어’는 명성을 얻고 있다.
- 소금에 절였으면서도, 알맞은 간, 바다에서 금방 잡아 올린 것처럼 전혀 손색없는 신선도를 유지.
- 전라도의 소금배가 낙동강의 안동 포구에 당도했다.
- 동해에서 잡힌 고등어는 부상들의 지게에 얹혀 영덕의 강구항에서 출발하여 황장재와 가랫재를 넘어 안동에 도착하면서 전라도의 소금 배와 절묘한 만남으로 안동 고유의 염장문화(鹽藏文化)가 발달하였다.
4. 화회 장터 입구
안동 명물 간 고등어이야기 (2)
간잡이 명장 이동삼(李東三· ‘안동 간고등어’ 공장장)씨.
- 바닷물과 똑같은 염도의 간물에 침수하여 핏자국의 흔적을 지우게 되는데, 더불어 자반의 육질도 단단하게 굳어진다. 그 다음에 ‘염장 지르기’를 한다. 염장은 40여 년간 그의 손짐작에서 좌우되어 왔다.
- 염장 지르기를 마친 간고등어는 24시간의 숙성 과정에서 육질이 깊어도 질기거나 팍팍하지 않게 단맛을 내고 비린내를 가시게 한다. 그 숙성온도가 차마 공개할 수 없는 ‘안동 간고등어’만의 전문비법이다.
- 롱아일랜드에 있는 미국 지사까지 달려가 시연을 한다
5. 화회장터 입구
6. 화회마을 매표장에서 대기중
[참고] 하회별신놀이 가면과 가면극
-하회탈은 국보 121호, 하회탈 박물관은 사설이다.
-고려 중엽 안동 하회마을 총각 허도령이 신탁을 받아 목욕재계하고 조성한 것이라는 전설이 있다. 탈놀이는 민중연극형태로 발전하여 대사를 빌려 양반이나 파계승을 풍자한다.
7. 화회마을 장터 입구에서
-전설 ; 노총각 허도령이 이웃집 처녀를 사모했는데, 꿈에 12개의 탈을 완성하여 그 탈을 쓰고 굿을 하면 소원을 이룬다고 계시하여 11개 까지 완성하고 12개째를 제작하는 도중에 허도령을 사모하던 안씨 처녀가 궁금하여 담을 넘어 문구멍으로 보자 마자 허도령은 피를 토하고 죽었다는 전설이 있다
-탈춤(가면극)은 서민의 냉철한 사회비판의 눈초리를 가차 없이 휘둘러 참을 수 없는 것을 참고, 겪을 수 없는 일들을 겪으면서 살아가야만 했던 조선시대 밑바닥 사람들의 이지러진 웃음과 눈물이 얼룩진 모습들을 우리는 이 탈들의 눈웃음을 통해 실감할 수 있다. 소망과 시름, 울분과 익살이 함께 겹쳐 야릇한 웃음인 것이다.
8. 배영학 회장 부부
9. 하회장터에서
10. 북촌댁 화경당 안내문 ; 화경당 화(和)는 부모를 섬기고, 경(敬)은 임금을 선긴다는 뜻이다.
11. 북촌 ; 서애 14대손 류도성이 건립. 사랑채 현판은 한석봉 글 씨, 생활공간을 신분과 남녀를 완연히 구분했고, 특히 조상을 모시는 사당의 공간을 따로 마련했다. 큰 사랑인 '북촌유거' 는 철종 때 명필 김성근의 글씨이다.
12. 양진당은 풍산 류씨 족보 창시자 류영의 호이다. 듣기
13. 배움의 자세가 진지하다.
14. 권녕순이가 선생님같네.
15. 문화유산 해설사의 설명에 흠뻑 빠지는 모두 친구들
16. 빈골목
17. 권정수 친구 오랫만에 왔네요.
18. 영국에서 오래 생활하신 배영학 청천 17기동기 회장님 이렇게 부부 동반하여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19. 굴뚝
20. 가을 볕도 좋고, 오늘 문화답사는 양경석 회장이 버스한대를 마련해 주어서 즐겁고 유익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21. 모과나무집
22. 자 삼신당으로 가 봅시다.
23. 삼신당에서 김용택 부부
24. 다녀간 사람들의 소망을 기록하여 붙여둔 소망지 울타리.
25. 소망지
26. 고려말 유종혜가 입향하면서 심었다고 하니 수령이 600년을 넘었다.
27. 시종 진지한 친구들 모습
28. 문화해설사 말이 좀 빨랐죠.
29. 김성봉 내외의 간절한 기도를 받아주소서.
30. 하회 별신굿 놀이가 시작된 곳이라고 한다.
31. 김종태 친구
32. 양진당은 보물 306호, 풍산 류씨의 대종택으로 하회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양진당은 풍산 류씨 족보 창시자 류영의 호이고, 임암 고택은 겸암과 서애의 부친 류중길의 호이다.
33.
34.
35. 통지유종, 회자유원 ;
후손들은 거술러 올라가면 윗대 뿌리가 되는 종가가 있고, 모임에는 원래 연유가 있는 법이다.
-'통지유종' 은 용비어천가에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램에 흔들려도 꺼덕없고 꽃이 좋고 열매가 잘 열린다' 는 표현과 맥이 닿는다. 조상을 숭배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회지유종' 전통있는 모임의 역사를 존중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풀이 ; 이재익)
36. 충효당 영묘각 보물 414호, 서애 류성룡의 종택이며, 남촌을 대표한다. 충효당 현판은 미수 허목의 친필이고, 현재 52칸이 남아 있다. 사랑채 뒤편에 조그마한 서애 류성룡 불천위(영원히 제사를 지냄)가 모셔진 사당이 있다.
37.
충효당 처진 소나무
◇ 청빈 검소한 재상 류성룡
류성룡(1542~1607)의 본관은 풍산(豊山). 자 이현(而見). 호 서애(西厓). 시호 문충(文忠). 의성 출생. 이황(李滉)의 문인. 풍원부원군 작호. 66세에 亡. 안동의 병산서원(屛山書院), 호계서원(虎溪書院) 등에서 제향(祭享)된다.
왜란직전 일본에 사신의 파견을 건의하였고, 이순신(李舜臣),권율(權慄) 등의 명장을 추천·등용케 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전후 도체찰사로 군무를 총괄, 왜란중 4도도체찰사, 훈련도감제조, 영의정 등으로 왜란을 극복하는데 공헌하였다. 한때 인생무상을 느끼고 낙동강 서쪽 언덕에 집을 짓고 제자를 가르치려하여 호를 서애라 하였다. 퇴계에게서 배울 때 "이사람은 하늘이 낸 사람이다." 라고 영리함을 칭찬받았다. 25세에 대과에 합격하였다.
피난길의 선조는 개성에서 영의정 이산해를 파면·귀양보내고, 류성룡을 영의정에 임명하였으나 반대파가 들고 일어나 당일로 파면되고 국사는 계속 보았다. 평안 관서 삼남 도체찰사가 되어 군무 총괄, 명군 접대, 군량 보급, 외교 군무 민정에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였다.
38. 영모각(永慕閣 ; 영원히 추모하는 집) 현판은 박대통령 글씨
명군의 내분이 일어나자 선조는 류성룡을 북경에 파견하여 해명하려 하였으나, 류성룡이 명의 내분에 끼어드는 것이 체통안서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가지 않았다. 그런 연유로 삭탈관작되어 고향 하회마을로 돌아갔다.(57세)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바둑을 둘 줄 모르는 선조에게 대국을 요청하자 그는 우산에 구멍을 뚫어 훈수함으로써 이여송을 무릎 꿇게 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질만큼 바둑의 애호가였다. 이창호와 맞대결하였던 류시훈은 류성룡의 14세손이라고 한다.
39. 서세 400주년 표석, 류성룡 선생이 세상을 떠난지 400주년이 되는 해의 추모행사로 세운 표석
40. 충효당의 건물 일부
41. 총효당 표지석
서애 유성룡(西涯 柳成龍)은 저서로 서애집, 징비록(懲毖錄)등을 남겼다. 제자 정경세가 동문에게 스승을 도와드리자고한 편지를 통해서 청렴하게 살았던 모습이 들어난다.
河上傳家只墨庄 兒孫蔬糲 不充賜 (하상전가지묵장 아손소여 불충사)
如何將相 三千日 倂欠成都八百桑 (여하장상 삼천일 병흠성도 팔백상)
낙동강변 유서깊은 이 집에는 오직 장서 뿐 채소죽도 아이들에게 재대로 주지 못하는 구나.
장상 10년에 어찌하여 제갈량이 남겼던 뽕나무 800그루의 미련도 없었을까?
청렴한 제갈량도 후손을 위해서 뽕나무 800그루를 남겼지만, 류성룡은 그것마저도 남기지 않았다.
*庄(장) : 전장 장(莊)의 속자/ 糲(려) : 매조미쌀/ / 倂(병) : 나란히, 물리칠, 다툴, 아우를/ 欠(흠) :
42. 충효당 이라는 상형문자 현판
43. 문, 三陽
44.
45. 충효당 대문 입구 마당
서애 유성룡과 그의 형 겸암 류운용에 의해 가문이 크게 일어난 이 풍산 류씨의 하회마을에는 지금 서애 종택인 충효당과 겸암 종택인 양진당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고 북촌댁, 남촌댁 빈연정사, 원지정사 등 중요 민속자료로 지정된 건물이 많아 한옥의 특징과 아름다움을 살필 수 있는 곳이다. 전기줄은 모두 지하로 묻어 놓았다.
46. 배영학 회장
47. 담연재(澹然齋) 앞에서
담연재(澹然齋)는 ´맑고 편안한 마음으로 학문을 익히면 지혜와 뜻이 널리 퍼진다´라는 뜻을 가진 류시원씨의 본가다.
담연재라는 이름은 류시원씨의 아버지 故류선우씨가 고심 끝에 지은 이름. 경복궁을 복원한 인간문화재 도편수 신응수 선생과 그의 스승인 고(故)이광규옹과 함께 수십 년에 걸쳐 철저한 고증으로 지었다.
48. 담연재 앞에서.
이곳은 관리와 보존의 어려움으로 일반에게 공개되는 것이 어려웠다. 이에 따라 일부 VIP 등에만 공개돼 오다, 이후 류씨의 일본 팬들을 위해 제한적으로 숙박을 허락해 왔으나, 점차 내국인에게도 공개할 수 있게 됐다.
49. 담연재(澹然齋) 대문앞에서
흔히 구멍이 나있는 곳에 담연재라 씌어서 착각하는데, 이집 자체를 담연제라고 한다. 이 구명은 옛날에는 가난한 지나가는 선비들을 위하여 노잣돈을 꺼내 갈 수있게 베풀었던 것이다. 그래서 보통사람 손은 들어가지 않고 공부만 열심한 선비의 작고 연약한 손만 들어 가게 되어 있다. 지금은 우체통으로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