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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의 근원이 된 아브라함의 믿음의 세 가지 비결.
1. 시작하는 단계
전부터 여러 차례 저희 교우들과 지인에게 짓궂은 질문을 하곤 하는데 그 중의 하나가 이런 질문입니다.
*** 집사님 믿음의 정의를 내릴 때 믿음이 “있다 없다”라는 표현이 성서적입니까? 아니면 믿음이 “많다 적다”가 성서적입니까? 한 50%는 있다 없다가 맞는다고 하고 그 반대쯤 되는 사람이 많다 적다가 맞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있다 없다가 맞지만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는 많다 적다가 맞는 표현입니다 마태복음 6장 30절에 “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는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아끼시거늘 하물며 너희 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적은 자와 많은 자의 차이를 아는 방법 중에 하나는 그 사람의 내면세계가 점점 풍성하게 바뀌어 졌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사상 관점 가치관이 과거와는 전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해 짐을 의미합니다. 오늘 그렇게 점점 믿음이 발전된 사람 중의 사표가 되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믿음이 어떻게 발전 및 증가가 되고 그 결과가 아브라함이 축복의 중심이 되었음을 공부해 봅시다.
2.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이유
1) 믿음을 풍부하게 발전시키는 법을 알았다.
창세기 12: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 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
창세기 이야기의 영웅 아브라함의 등장이다.
성경은 소설이나 수필이 아니다. 소설이나 수필 등은 자세히 읽지 않아도 줄거리만 알면 재미가 있지만 성경은 그렇지 않다.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내가” 라는 단어가 4번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은 본인이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한다. “ 바벨에서 흩어진 후 또 다시 우상 숭배가 보편화 되자 마침내 주께서는 완고한 범법자들은 그들의 악한 길을 따르도록 내버려 두시고 셈 계통의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후대를 위하여 당신의 율법의 보존자로 삼으셨다” (빛을 전한 사람들 상 102)고 기록했다. 또 그를 선택한 이유가 “우상숭배는 사방에서 그를 유혹하였으나 허사였다. 신실치 못한 자들 가운데서도 신실하며 만연하고 있는 배교에도 부패하지 않은 채 그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끝까지 고수하였다”(상동)라고 적고 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는 권력자 우선이나 부자 혹은 외모나 능력을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시편14장 2절과 53장 2절에 동일한 성경구절이 반복된다. “여호와께서는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 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누구든지 어느 때에든지 직접 택하신다. 직접 택하시는 자를 히브리서에서 영감된 저자 바울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히브리서 11장 3절 “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라고 선택된 기준이 그의 순종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또 그의 다른 책 야고보서 2장 22절에서는 아브라함과 같은 참된 순종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라고. ?
아브라함은 엘리야가 디셉에서 아모스가 드고아에서 베드로가 바닷가에서 크롬웰이 농장에서 루터가 수도원에서 화잇여사가 기도회에서 부름을 받았듯이 갈대아 우르의 그의 우상이 만연한 집에서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다.
아브라함의 순종하여 행함이 어떻게 그의 믿음을 온전케 할까
Christinaty Today에서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전통적으로 사람의 신념과 태도가 행동을 결정한다고 믿어왔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행위를 바꾸기를 바란다면, 그들의 심령과 마음을 바꾸는 것이 훨씬 더 쉽다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이 행동으로 나타날 뿐 아니라 행동이 생각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스도를 높이라 p139.
미국의 저명한 신문 칼럼니스트이자 목회자인 Jorge W Craine은 남편에 대한 적개심이 가득차서 그의 사무실에 상담 온 한 아내와의 대화 내용이다.
“ 저는 이혼하고 싶을 뿐만 아니라 앙갚음 하고 싶습니다. 이혼하기 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내게 준만큼 그에게 상처를 되갚아 주고 싶습니다.”
크레인 박사는 기발한 제안을 했다. “오늘부터 집에 가셔서 당신이 참으로 남편을 사랑하는 양 행동하십시오. 당신에게 남편이 얼마나 소중한지 자세히 말해 주십시오 . 또 남편의 장점을 일일이 말하십시오. 가능한 한 사려 깊고 친절하고 관대한 것처럼 행하십시오. 그를 기쁘게 하고 그를 즐겁게 해 주시기 위해 어떤 노력도 아끼지 마십시오. 그가 당신이 그를 사랑한다고 믿게 만드십시오. 그에게 당신의 영원한 사랑에 대하여, 그리고 당신이 그가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확신 시킨 후에, 폭탄을 터뜨리는 것입니다. 이혼하겠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러면 참으로 큰 상처를 입힐 것입니다.”
그 여성은 복수할 일념으로 미소 지으면서 탄성을 질렀다.
“멋져요 멋진 계획입니다. 그가 정말 기겁하겠는데요?” 그리고 그는 열정을 다해 복수의 일념으로 진짜 그런 것처럼 가정하면서. 두 달 동안 그렇게 이를 악물었다.
두 달 후에 크레인은 그에게 전화했다. “왜 안 오시는 것이지요. 이제 이혼할 준비가 되었지요. 이혼수속을 밟도록 서류먼져 준비하시구요....”
말이 맺기 전에 “이혼이라구요?” “안 돼요. 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제가 남편을 참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발견했거든요?”
그의 행동이 그를 변화시켰다. 동작이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사랑할 능력은 열렬한 약속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주 반복되는 행동을 통해 확고하게 된다.
도대체 어떤 일이 이 여인에게 일어난 것인가? 정말 남편을 미워했다. 그러나 사랑하는 척 하면서 온갖 서비스를 다했다 .그러나 이것이 화근이 되었다. 행동이 마음과 행동 사이에 괴리를 줄였고, 행동은 느낌이 없기 때문에 이 경우에 거북한 느낌을 들게 되는 것은 마음이다. 평화를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마음이나 행동 둘 중의 하나는 자신의 입장을 포기해야 했기 때문에 마음이 포기한 것이다.
과학자들이 밝혀 낸 사실은 이런 경우에 마음은 변함없는 행동에 자신을 적용시키며 그렇게 하여 거북하고 불편한 상황을 종료시킨다는 것이다. 마음과 행동이 싸우면 항상 행동이 이긴다. 이것이 참으로 좋은 소식(Good News) 아닌가?
우리 행동으로 우리 마음을 바꿀 수 있다. 그러므로 느낌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면 의지를 투입하여 바로 행동에 옳기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믿음과 행함의 관계에서도 진리이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은 있다 없다가 아니라 많다 적다가 맞는 것이다. 믿음이 적더라도 행동(순종)할 때 그 순종을 통해서 믿음이 강화된다. 아브라함의 강화된 믿음은 더 많은 순종을 생산했다. 회오리바람이 회전하면서 점점 더 세력이 강화되는 것처럼 믿음과 행함도 오가면서 서로를 강화시켜준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관계가 바르게 된 아브라함은 행함이 날로 증가되어 드디어 행함의 대가 즉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본 훼퍼가 “ 오로지 믿는 자만이 순종하며 순종하는 자만이 믿는다.” 라고 말한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는 아브라함처럼 즉시 행동하기 시작해야 한다. 즉시 성경을 읽기 시작하고 즉시 사랑을 베풀기 시작하고 즉시 기를 시작해야 한다. 가라 했을 때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갔다. 애급으로 지시하자 즉시 애급으로 갔으며 이삭을 바치라고 했을 때 역시 그리하였다. 아브라함은 행동의 사람이 되었고 때로는 주저하였지만 그 행동 덕분에 마음이 따라갔고 공고화된 신앙이 뒤따라 갔다.
“마음은 명상하도록 훈련을 받은 주제를 점차로 닮아 간다. 그것이 마음의 법칙이다.” (부조 596)
“친숙한 것의 특징에 따라서 마음은 편협하게 되든지 확장 되든지 하는 것이 마음의 법칙이다.”(R&H 1888.7.17) 이런 식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동행했으며 믿음의 대가가 되었다.
2)광야 생활의 방법을 체득했다
창세기 12장 4-5 ‘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의 나이 75세였더라 .. 얻은 사람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히브리서11:9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며”
“아브라함에게 임한 시험은 가벼운 것이 아니었고 그에게 요구된 희생도 작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고향에 친족과 모든 것이 강한 줄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부르심에 순종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약속의 땅에 관하여 묻지도 않았다. 곧 토지가 비옥하고 기후가 건강에 적합한지 그리고 그 지방은 유쾌한 환경을 제공하며 재물을 쌓을 기회를 줄 것인지 묻지 않았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음으로 그는 순종해야 했다.” (부조 상 103) 그런데 그곳은 실제로 비옥하지도 건강 좋지도 않았다. “아브라함이 남쪽으로 계속해서 여행을 하고 있었는데 그의 믿음은 다시 시험을 당하였다. 하늘은 비를 내리지 않고 시냇물은 골짜기에서 흐르기를 그치고 들의 풀은 시들어졌다. 양 떼들과 가축 떼들은 목초를 얻지 못하였고 기근이 온 장막을 위협하였다. 그때 아브라함은 섭리의 인도를 의심하지 않았을까? 고난이 연속될 때 부조가 어떻게 할 것인지를 주위사람들과 하늘은 열심히 주시하고 있었다. ... 그는 열심히 기도하며 어떻게 그의 백성과 양떼의 생명을 보존할는지를 생각하였으나, 환경이 하나님의 말씀 즉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라는 말씀에 대한 그의 믿음을 흔들리도록 허용하지 않았다” (상동 105-106)
그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닌 광야 생활을 하고 있다. “광야”라는 히브리 원어(MDBR)즉 Midbar는 그 어원이 하나님의 “말씀” (DBR) 즉 Dabar와 어원이 동일하다. 마치 한국말 사람과 살다 혹은 삶이 “살”이라는 동일한 어원에서 왔듯이 동일한 근원에서 유래한다. 광야는 즉 말씀이요 말씀은 즉 광야라는 뜻이다. 말씀과 떨어진 호사스럽고 이방신이 가득한 바로의 궁궐에서 40년간 세상 학문에 찌들은 모세가 그 잔상을 바꾸고 생각과 마음을 바꾸기 위해 광야 즉 말씀의 40년이 필요했고.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의 450년의 습관과 결별하기 위해 40년 광야의 훈련이 필요했고. 말씀의 승리 후에 다른 말씀의 결핍에 처한 엘리야는 고통의 40일 호렙 광야의 모진 풍파를 겪었고, 사도바울도 그 잘난 세상 학문과의 결별을 위해 미디안 광야의 명상을 경험해야 했고. 말씀에 정통하고 말씀의 주인이신 예수님조차도 말씀의 시련으로 인해 광야에서 40일을 주리셨으며 역사 이래 가장 위대하고 영성 있는 선지자라고 칭송 받던 침례요한은 광야에서 아예 자신이 먹고 자고 살아서 “광야의 외치는 자”가 되지 않았는가? 광야는 믿음의 중심이요 말씀의 중심이다. 디지털 시대에 사는 우리는 말씀(광야)의 조용하고 단순하고 느린 것에 얼마나 힘들어 하는가? 빠른 전개의 극에 익숙하고 손가락의 움직임으로 모든 것을 이루는 이때에 명상, 생각 느긋함 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제 것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 얼마나 우리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처럼 보이는가? 그러나 부조는 그것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축복의 중심에 섰다.
3). 예배 생활을 실천했다.
창세기 12장 7-9절 “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위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니”
cf: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기서 잠깐 성경을 깊이 숙고해 보자. 저자는 “여호와께 단을 쌓고” 라고 표현하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라고 표현했을까 아니면 그냥 “단을 쌓고”라고
표현해도 앞뒤 문맥 상 어색하지 않은데도 말이다.
이 성경구절은 참으로 의미 심장 하다. 이 구절의 기원은 창세기 4장 16,17절과 26절에서
기인한 다. 창세기 4장 16절에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가인이 성을 쌓고”
원래 가인은 아벨을 죽이고 나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살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땅에서 피하여
유리하는 자”(창 4:12)가 되는 것이 유일한 살길이었으나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스르며 “여호와 앞을 떠나”(창4:16) 에덴동편 놋 땅에 거하면서 도리어 에덴동산이 빤히
내려다 보이는 곳에 “성을 쌓”(창 4:17)았다
그런데 이 성구와 대구되는 성구가 창세기 4장 26절에 나온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비로소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마지막 구절
“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를 유의해 보자 앞 구절의 “여호와 앞을 떠나” 와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는 대구체(對句體)이다.
히브리어로 제단(祭壇)은 MZBK(Mizbeka)로 읽으며 “죽음이라(원 뜻은 죽음을 가지고)
불리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MZ은 죽음이라는 뜻이고 K는 원래 단독으로 쓰일 때는
KR(Kara)로 쓴다. 그 앞에 B는 전치사로서 Be 하면 “가지고” 라는 뜻이고 그 반대는 De 이며
“빼고” 라는 뜻이 된다 창4:16절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는 본래의 뜻은 “Be Kara
Yahwe” 즉 “여호와의 이름을 가지고 불렀다” 리며 “여호와 앞을 떠나” 라는 뜻은 "De
Kara Yahwe" 즉 “여호와의 이름을 빼고 불렀다“ 라는 의미이다 .
창세기 12장 7절에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는다는 원 뜻은 여호와의 이름을 가지고 단을
쌓는다는 의미이다. 가인이 여호와의 이름을 빼고 여호와를 위한 단 대신 자신을 위한 성을
쌓은 뒤 인류는 그 뒤에 자신들을 위하여 바벨탑을 쌓고 하나님을 배반하였다 반대로 하나님의
편에 선 자들은 자신을 위한 탑이 아닌 하나님을 위한 단을 쌓는 일이 엄청난 신앙의 행위로
받아들여졌다
히브리 인에게 Be kara Yahwe(여호와의 이름을 가지고= 여호와를 위하여)는 엄청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라는 표현은 성경에 12번 반복되는데 하나 같이 기라성 같은
신앙의 사표들이 하나님께 복종하는 행위와 서약을 할 때 반복된다.
창8:20에 노아는 홍수가 끝난 뒤 감사하는 마음으로“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를 드렸더니”본문의 아브라함이 창 12:7.8에 “여호와의 이름으로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했고 신16:21“여호와의 이름으로 단을 쌓은 단 곁에 아무 나무로든지 아세라
상을 세우지 말고” 신 27:5 “여호와의 이름으로 단 곧 돌단을 쌓되 그것에 철기를 대지
말지어다” 삿6:24,26 “기드온이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 샬롬이라
하였더라” 삼상 14:35 “사울이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으니 이는 그가 여호와를 위하여
처음 단을 쌓았음이라” 삼하24:25 “(다윗이) 그 곳에서 단을 쌓고” 왕상 9:25“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쌓은 단 위에 해마다 세 번씩 번제와 감사제를 드리고” 왕상 18:32(엘리야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단을 쌓고 ..도랑을 만들고” 대상 21:18(선지자 갓을 통하여
다윗에게 명령하면서)“오르남의 타작마당에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으라” 대상 21:26(이에 다윗이)“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에스라 3:2(스룹바벨)“이스라엘 하나님의 단을 만들고”
“하나님의 벗 아브라함은 우리에게 훌륭한 모본을 보여 주었다 그의 생애는 예배의 생애였다. 그는 장막을 치는 곳마다 그 근처에 단을 세우고 장막에 유하는 모든 사람을 불러 조석으로 희생제물을 드렸다. 그의 장막이 옮겨갈 떼에도 그의 제단은 남았다. 후에 유랑하는 가나안 사람 중에는 아브라함에게서 진리의 교훈을 배운 사람이 있었다. 이들은 이 제단이 있는 곳에 왔을 때는 언제든지 저들 앞에 지나간 사람이 누군지 알고, 그곳에 장막을 칠 때는 제단을 수리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 하였다” (부상 105)
아브라함은 예배는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는 시간이었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오는 것이다. 찾아오고 만나고 대화하고 소원을
아뢸 때 제일로 좋아 하신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제일 좋아 하시는 일을 하였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5. 결론
창세기 22장 17.18절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이삭이 흉년이 들었을 때 창 26:3,-5 “이 땅에 유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
내가 네 아비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
“부모들의 생각과 감정은 아이들에게 물려줄 유전적 기질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절제생활 171) 반대로 “부모들의 방종을 통하여 그들의 동물적 정욕을
강화시켰다. . 부모들의 품성의 특징이 그 자녀들에게 전달되었고 .. 뇌의 힘은 약화되었고
기억력은 결함이 있게 된다...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그들의 정욕적인 성향에 인을 찍었기
때문에 부보들의 죄가 자녀들에게 보응될 것이다.” (증언2 p.391)
아브라함은 성실과 인내로 마음이 약해졌을 때는 행동으로서, 행동이 부족할 때는 하나님께
마음을 부르짖으며 믿음을 발전시켰으며 광야 생활의 모짐 속에서 말씀을 자신의 것으로
승화 시켰고 매일의 제단을 통해서 믿음의 거장으로 자랐다. 아브라함이 그렇다면 우리도
그럴 수 있다. 매일의 예배와 말씀의 적용과 믿음의 계발을 끊임없이 함으로서 최고의
반열에 올랐다. 오늘 하루도 그렇게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