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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건축 우보만리 한옥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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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스크랩 서울성곽 동대문-광희문-장충체육관 답사기
우보만리 추천 0 조회 151 12.05.10 21:4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성곽 동대문-광희문-장충체육관 구간 답사기

 

답사는 동대문역 6번 출구  ‘이스턴 호텔’ 앞에서 시작한다.

 

흥인문(興仁門 ; 동대문)은 낙산구간 답사 때 이미 설명하여 생략함.

필자의 글 ‘서울성곽 낙산구간 답사기’‘서울성곽 낙산구간 답사자료’ 참고.

 

 

기동차

 

이스턴 호텔 뒤는 옛날 기동차가 출발하던 곳이다.

(전차 차고는 이스턴 호텔 길 건너 서쪽 지금 동대문 종합시장 자리다.)

 

기동차는 1960년 대 중반에 없어졌으니 40 대는 잘 모를 테지만

5~60 대 이상 서울에서 자란 사람은 기억할 것이다.

 

 

 

 

사진:이스턴 호텔 뒤로 벋은 길은 옛날 기동차 길이었다.

 

 

기동차는 전차와 비슷하게 생겼으나 전차(電車)는 전기로 가지만

기동차의 동력원은 내연기관이었다. 연료는 디젤이란 설도 있으나 휘발유가 맞을 것이다.

1932년 개통했으니 2차 대전, 해방,  6.25를 거쳐 필자 어릴 때 이미 고물로

달릴 때 매연이 매캐하게 품어져 나왔다.

 

전차는 도심에서 말쑥한 학생과 직장인들이 주로 탔으나,

기동차는 채소나 여러 가지 농산물 보퉁이를 이고지고 서울로 팔러 오거나

돌아가는 괴죄죄한 아줌마들로 북적거렸으니 자리 없으면 바닥에도 앉았다.

 

노선은 동대문에서 창신동-왕십리 지나 한양대, 뚝섬까지 가는데,

뚝섬 못 미처 레일이 갈려 몇 편성은 다시 광나루 까지 갔다.

 

동대문에서 출발 한 기동차는 청계천을 따라 펼쳐 진 창신동 하꼬방(판자집)

가운데를 가로 질렀다. 기동차 레일 폭 1,067mm인 협궤(狹軌)였으니

다니는 길도 넓지가 않고 오늘 날 기준으로 보면 그냥 비좁은 골목이었다.

 

창신동을 지난 기동차는 검정다리 (지금 고산자교 근처?)에서 청계천을 건너

왕십리로 가는데 한양대를 지나면 밭에 뿌린 똥 냄새가 코를 찔렀다.

뚝방을 지나 뚝섬 유원지(지금 서울의 숲과 영동대교 사이 강변)로 들어서면

미루나무가 우거져 맴맴 매미소리가 시끄럽고 모래사장이 펼쳐졌다.

 

 

 사진: 뚝섬유원지. 1956년 한영수 작품

 

 

물이 맑기는 광나루였다.

 

뚝섬-광나루 노선은 지금 지하철 2호선 구간과 개략적으로 비슷할 것이다.

다만 그 때는 끝없이 펼쳐진 밭 가운데를 지나간 것이 달랐다.

기동차 종점 워커힐 쪽은 절벽이라 수영하기 곤란하지만, 광나루 다리 건너

천호동에서 강가로 내려서면 모래밭이 하얗게 펼쳐지고 강물은 맑디 맑았다.

 

당시 뚝섬과 광나루는 서울시민들이 애용하는 해수욕장이었다.

(바다 아니고 뚝섬, 광나루에서 물놀이 하는 것도 해수욕이라고 했다)

 

 

 사진: 뚝섬 유원지 1956년 한영수 ; 아이들이 발가벗고 논다.

 

당시 필자 해수욕복은 엉성한 니트 직에 검은 물 들인 것이었다.

오늘 날은 아프리카 난민이라도 입을까 말까 한 조악한 품질이지만

당시는 애들이 해수욕복 한 장 걸쳤다는 것 자체로 괜찮은 것이었다.

 

이렇게 전차가 시내 노선이라면 기동차는 교외선으로 채소 등

농산물을 도심으로 공급하고, 도심에서 해수욕장 가는 교외선이었다.

 

 

 

 

동문조도(東門祖道)

 

이제 동대문 밖과 기동차 길을 18세기 겸재 정선의 그림으로 본다.

 

 

동문조도(東門祖道)

영조22년 (1746) 경 , 모시에 엷은 채색,  22.0 x 26.7 cm

 

 

가까이 동대문에서 오간수문으로 이어지는 성곽이 있다.

동대문 왼쪽으로 낙산, 그 너머 암산인 창신동 동망봉, 다시 안암산,

오른 쪽으로 금호동 산인 응봉이 있고, 멀리 중앙에 용마산이 우뚝하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대가 가지고 온 관우신앙으로 생긴 여러 관우묘 중

동관우묘-동묘는 흥인문 밖으로 길 떠나는 사람 배웅하는 만남의 광장이었다.

단종비 송씨는 동묘 옆 영도교-영미다리에서 단종을 영이별하고

동망봉 아래 청룡사-정업원에서 일생을 보냈다.

 

동묘의 묘(廟)는 묘(墓)와 달리 Temple 이란 뜻이다.

지금 (11월 9일 까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삼국지 이야기 전시회를 하는데

동묘에 있던 벽화도 있다. 삼국지 좋아하는 사람은 가 볼만 하다.

 

 

 

오간수문(五間水門)

 

이스턴 호텔에서 동대문 운동장 쪽으로 잠깐 걸으면 청계천이 나온다.

청계천 이쪽 부분에 다섯 칸 수문-오간수문(五間水門)이 있었다.

 

 

 사진:수문상친림관역도(水門上親臨觀役圖)

 

1760년 경진년 개천(開川-청계천)을 대대적으로 준천(濬川)할 때

영조대왕이 다섯 칸 수문에 친림(親臨)한 광경이다.

다리 위 막차(幕次) 중앙 빈 자리가 대왕이니 옛날 어진(御眞) 빼고는

감히 임금의 모습을 그리지 못 하여 저렇게 처리하였다.

 

왼쪽으로 흥인문 지붕 일부와 옹성이 보인다.

다섯 칸 홍예에 쇠창살 문이 걸려 있고 돌에는 거북이가 새겨져 있다.

개천 바닥에 일꾼들이 소를 끌거나 가래질로 흙을 퍼낸다.

 

 

청계천을 복원했어도 오간수 다리는 되살리지 못했다.

동대문 시장 앞 그 많은 교통량을 옛 다리로 처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대신 옛 다리 흔적을 만들어 놓고 길에 그림을 그려 놓은 것이다.

 

 사진: 오간수다리 옛터에 있는  소공원 안에 옛 다리 돌. 붉은 색 낙서 같은 그림은 옛 다리 표시다.

 

 

 

 사진: 옛 오간수문-청계천변 타일에서

 

 

 

동대문 디자인플라자& 파크 공사현장

 

 

 

 

오간수문 지나 동대문 운동장 자리에 디자인 플라자 터파기가 한참이다.

옛 성곽은 여기를 지나갔다.

 

 

 

이간수문(二間水門)

 

옛날 지도를 보면 오간수문 남쪽에 따로 이간수문(二間水門)이 있었다.

 

 

사진: 수선전도 중 이간수문(二間水門)

 

수선전도에서 보면 청계천 본류는 오간수문을 통해서 성벽을 나가고,

아마 남산 장충단 공원에서 나오는 물길은 따로 이간수문으로 나가,

두 물이 영도교(永渡橋-영미다리, 단종과 비(妃) 송씨가 영이별 했다는

다리로 동묘 아래에 있음) 못 미처 합수(合水) 하고 있다.

 

이 두 칸 수문 이간수문(二間水門)의 정확한 위치가 궁금했는데 얼마 전

뉴스에 디자인플라자 터파기 하다가 이간수문 흔적을 발견했다고 한다.

 

 

 

 

…..옛 동대문야구장 터에서 이간수문(二間水門)이 발견됐다.

서울 남산에서 흘러나오는 물길을 조절하던 문이다.….

남산에서 흘러내려온 물은 서울 도성 남쪽을 지나 흥인지문과

광희문 사이에 설치된 수문을 통해 성 밖으로 흘러 청계천으로 유입됐다.

다시 중랑천을 따라 한강으로 들어갔다.

 

이간수문은 문 윗면을 타원형(아치형태) 곡선으로 조성한 홍예식 수문이다.

이간수문 윗면의 돌 일부는 떨어져 나간 상태다. ..연합뉴스

 

그런데 이간수문 및 성벽 발굴성과가 서울시에서는 꺼림직한 모양이다.

‘동대문 디자인플라자& 파크’ 신축에 한참 열 올리는데 뭐가 자꾸 발견되어

공사를 중지하고 성곽을 복원해야 한다는 둥 하면 큰 일이기 때문이다.

 

동대문 운동장을 빙 돌아 한양공고 앞에서 광희문 쪽으로 길을 건넌다.

한양공고는 한양대학교 전신인 소화(昭和)공과학원이 있던 곳이다.

한 번 더 길을 건너야 광희문이나, 건너기 전 돌 축대를 잠깐 살펴 본다.

 

 

 

 

사진 : 광희문 길 건너 편. 공중전화 부스 뒤에 성벽흔적이 보인다.

 

필자 어렸을 때 자주 다니던 곳인데 이것이 성벽 잔해(殘骸) 인줄은

최근 성벽 답사 다니면서 알았다.

 

 

광희문(光熙門)

 

 

 

광희문(光熙門)은 도성 여덟 문- 사대문 사소문 중 남소문(南小門)으로 .

보통 수구문(水口門), 시구문(屍口門)이라고 불렀다.

 

수구문은 말이 안 되는 것이 저래 가지고 물이 어떻게 나가나?

아마 근처에 있는 이간수문(二間水門)과 혼동했을 것이다.

 

구한말-일제 초 상여가 모든 문으로 나갈 수 있다는 공고가 난 적이 있다.

바꾸어 말하면 그 이전에는 나가는 문이 따로 있었다는 뜻이다.

서울에서 상여 나가는 문은 이 광희문과 소의문(서소문)이었다.

 

혼동이 되었던 말던 필자 어릴 때는 시구문 또는 수구문이라 불렀다.

문루는 없고 돌로 된 구멍-홍예(虹霓-아치)만 있었는데 그 앞에

온갖 쓰레기가 다 버려져 있었다. 또 수채에 바람 빠진 흰 고무풍선

나중에 알고 보니 콘돔이 둥둥 떠 다닐 정도로 매춘부들 까지 있었다.

창녀 버글거리기는 기동차 길을 따라 창신동 하꼬방 동네였지만.

 

 

 

사진: 19세기 말 이사벨라 비숍이 찍은 광희문

 

문의 격(格)이 군왕(君王)이 다닐 문이 아니었다.

그러나 1636년 12월 14일 인조는 숭례문을 나가 강화도로 가려다

청나라 군대가 이미 녹번동, 홍제동 까지 왔다는 탐졸(探卒)의 보고를 받는다.

이에 급히 남한산성으로 대가(大駕)를 돌리는데 격을 따질 형편이 아니어

광희문으로 나가 한양대 옆 살곶이 다리를 지나 송파나루에서 강을 건넜다.

 

 

 

신당동 성곽흔적

 

광희문에서 장충체육관 앞까지 성벽은 사라졌지만

그 흔적은 골목 여기저기 남아 있다.

 

 

 

사진: 계단을 내려가다 문뜩 고개를 드니 건너편에 성곽흔적이 보인다.

 

 

 

 

사진: 골목 입구에서 안을 살피니 성곽 돌이 보인다.

가공방식으로 보아 숙종 때 돌이다.

 

 

 

 

사진: 빌라 주차장 사이로 흘깃 보이는 축대도 실은 옛 성곽돌이다.

 

이제 답사는 장충동 으리으리한 저택들 옆을 따라 갈 수 밖에 없는데

성벽은 그 집들 가운데를 질러 갔을 것이다.

 

 

 

 

 

 

 

위 사진의 집은 필자 어릴 때 돈병철(이병철) 집이라고 했는데

아마 아직도 삼성가 소유일 것이다.

성곽은 저 집 마당 가운데를 지나갔을 것이다.

 

 

 

이병철 집을 지나면 동호로 큰길이 나오고  길 건너 장충체육관 옆으로

성곽이 다시 시작되는 것이 보인다.

 

 

  

사진 : 성곽흔적-장충체육관 옆

 

 

동대문에서 장충체육관 앞까지 답사루트를 구글에 표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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