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꿈.
외로웠다. 꿈을 꾸는 내내 외로움에 견딜 수 없어 앨리스의 시간여행 속으로 빨려가는 것 같은 어지러움을 느꼈다.
눈을 떴을 때 레이캬비크를 떠올렸다.
“아이슬란드, 벽난로의 따듯한 온기가 채워진 어느 시골집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할머니가 되었을 너와 그 옆집에서 소를 키우는 할아버지로 살고 싶다.” 라고 말하던 너. 어느 날 너의 메신져 닉네임에 ‘레이캬비크’로 변경된 것을 보았다.
아이슬란드의 삶을 동경하며 ‘언젠가 아이슬란드에서 살고 싶다.’ 의 상상을 시작한 것은 뷔요크의 천진난만한 웃음과 거침없음에 매료되었던 시절, 시규어로스의 한 뮤직비디오를 보았기 때문이다. 무거운 구름, 해가 가려진 회색빛 하늘, 짙은 올리브색 언덕 위로 스웨터와 점퍼, 털모자와 털장갑을 낀 사람들이 삼삼오오 어딘가로 걸어간다. 뮤직 비디오는 오랜 시간 사람들이 공연장에 모여드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흐린 날씨의 무거운 구름 탓에 대낮인지 해가 질 무렵인지 알 수가 없어 공연시간이 아마도 <저녁시간> 쯤으로 지정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를 자아낸다. 공연 외에 다른 일정 같은 것은 없는, 누구나 한번쯤 소망해 봤을 빡빡하지 않은 일상이 거기 있을 것 같았다. 거꾸로 흘러가는 폭포수와 바람, 지고 피는 꽃, 지고 뜨는 볕과 별 - 흥미롭게도 영상 속 사람들은 시간을 따라 흘러가는데, 풍경은 시간을 거슬러 흘러간다. 시규어로스의 공명된 소리들마저 어느 시간대를 잡아 엿가락처럼 쭉 늘려 아마 내가 그곳에 있었다면 다른 차원을 경험할 수 있었으리라는 착각마저 가능하게 만드는 뮤직비디오였다. 나는 그 뮤직비디오를 그에게 추천했다.
레이캬비크. 그와는 뜸하게 연락을 주고 받았었다. 생일과 같은 특별한 일이 생길 때 연락을 주고 받는 사이도 아니었고, 너무 외롭다거나 너무 지루할 때 연락을 하는 사이도 아니었다. 문득 어떤 노래를 듣다가 그 친구와 같이 듣고 싶다는 마음이 들거나, 어떤 소설책을 읽다가 한 등장인물이 그를 떠올리게 하거나 하는 이유가 서로의 연락을 이어갈 수 있던 이유라면 이유였다.
어느 날, 밤 11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이었다. 레이캬비크에게 전화가 와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거의 6개월 만이었다. 소소한 대화 중 불쑥 내가 꺼낸 말은 “걷고 싶다.”였다. 밤이 되면 걷고 싶었다. 고시원을 떠나 혼자 산지 몇 해가 넘어갔지만 온전히 혼자인 채로 익숙해지지 않는 밤의 불안은 늘 불면과 함께였다. 차라리 해가 뜰 때까지, 몸이 피곤해질 때까지 걷다가 지쳐 잠드는 편이 나았다. 나는 낮보다 밤이 북적이는 동네로 이사를 갔다. 술에 취해 친구의 부축을 받아 비틀거리며 걷는 행인, 막 해장을 마치고 학교수업 들으러 가는 학생들 무리, 군복차림의 몰려오는 졸음을 견디고 있는 군인들, 클럽복장으로 라면집에서 나오는 젊은 남녀들....건대입구역의 먹자골목 중심부에 살며 뜬 눈으로 매일 마주하는 평화로운 아침 풍경이었다. 나는 건대입구역 한 옥탑방에서 혼자 살고 있었고, 그는 의정부 녹양동의 한 아파트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다.
“걷고 싶다.”
“걸을까?.”
“진짜? 그래!.”
밤 11시에 나누는 대화로는 장난이라고 생각하니 대답이 너무 쉬웠다. 두번 묻는 일도 없이 통화는 끊겼다. 전화를 끊고 더는 미룰 수 없는 밀린 재택 알바를 꾸역꾸역 하고 있었다. 자정을 넘긴, 12시 반이 다 되어서 레이캬비크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건대입구역인데, 나올래?”
“진짜?”
쌀쌀해지는 가을 무렵이었기에 스웨터와 스카프를 두르고 손바닥만한 작은 크로스백 안에 열쇠와 동전지갑과 스카이 휴대폰, 아이팟클래식, 이어폰을 챙겨 나갔다. 문을 닫으려다가 눈에 띈 미놀타 자동카메라를 손에 집어들고 문 밖을 나섰다. 멀리서 수줍게 웃는 레이캬비크의 얼굴을 보니 어쩐지 들뜬 기분이 들었다.
걷는 동안 무슨 이야길 나눴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별 기억할만한 이야기가 없는 이야기를 나눴을 것이다. 걷다가 벤치에 앉아 이어폰을 한쪽씩 꽂고 아이팟에 들어있는, 그 때 자주 듣던 노래를 몇 곡 들었다.
<저 달은 하이얀
빛을 뿜어내고 있다지만
나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이 밤을 견뎌내리
또 다른 나를
찾아 헤매이던 괴로움을
이젠 잊어야지 잊어야지
흐려진 기도일 뿐
그대를 가리운 황토빛 가운
그대 살결 한결 같은 숨결
나 아직 이리도 선명한데
내 사랑을 모두 쏟아버릴 수 있나
그대를 가리운 황토빛 가운
그대 살결 한결 같은 숨결
내 눈을 가리운 먼지 같은
그런 사랑 두번 다시 하지 않으리
저 달은 하이얀
빛을 뿜어내고 있다지만
나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이 밤을 견뎌내리
그대는 아는가
사랑은 머물지 않는다네
아득히 멀어져 저 멀리 돌아가 버린 걸
향월가_라벤타나>
함께 걷는 밤길은 아늑하고 포근했다. 피곤한 줄을 모르고 걸었다. 한참을 걷다보니 종로타워가 저 멀리 보였다. 나는 근처의 ‘카타르시스’라는 이름의 포장마차를 안다. 사진을 좋아하는 사장님 덕분에 평소 사진클럽 사람들과 출사를 마치면 그곳에 들러 사장님과 함께 술한잔 기울이며 사진이야기를 곧잘 나누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카타르시스’에 도달했을 때 시계는 아침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시간, 몇몇 출근길을 서두르는 사람들을 앞서 보내고 느릿한 발걸음으로 포장마차에 들어갔다.
“라면 두개 주세요.”
라면을 기다리는 동안 카메라를 탁자 위에 놓고 레이캬비크를 향해 셔터를 눌렀다. 아직도 웃고 있는 얼굴에 셔터가 누르고 싶었다.
계란이 풀린 탱탱하게 설익은 라면이 나와 젓가락으로 면을 집어 후루룩 입 속에 넣었다. 안성탕면인가? 아직도 그 때의 라면 맛이 기억난다. 라면을 먹고 포장마차를 나오니 푸르슴하게 번지는 아침의 여명 때문인지 라면으로 몸이 뎁혀져서인지 나른한 기운이 돌았다. 레이캬비크는 이제 서초동으로 출근해야 한다고 했다. 지하철역에서 인사를 하고 열차를 탄 뒤 각자의 목적지로 향했다. 돌아오는 길에 마음이 한껏 충만해짐을 느꼈다. 연인과 나눌 수 없던 그런 충만함이 레이캬비크와의 관계에는 존재했다. 그도 그랬을까?
브레이크가 없는 20대였기에 기분 좋은 일에 꽂히면 계속 그것을 하고 싶고 더 많이 경험하고 싶은 마음이 따르기 마련이었다. 그 날의 기억은 특별하지 않은 듯한 특별한 경험을 만들어 주었고, 더 자주 그런 경험을 욕망할 수도 있었을 법 한데, 나와 레이캬비크는 그렇지 않았다. 여전히 연락은 뜸했고, 특별한 만남을 계획하지도 않았다. 관심받기를 원하고 연인에게 집착하며 관계를 망치기 일쑤였던 서툰 나의 20대에게 적당한 무심함이 서로를 존중하는 하나의 방법일 수 있음을 배운 것도 아마 이런 시간을 겪었기 때문 아니었을까.
어느 날, 레이캬비크로부터 이메일을 한 통 받았다. 그 무렵 내키는대로 일년에 한번이든 두번이든 손편지를 주고 받던 시기였기에 이메일은 뜻밖의 연락망이었다. 메일 안에는 유튜브 링크 하나와, 그 밑으로 간결한 문장 하나가 있었다.
https://youtu.be/mKs3bybeTO8
“넌 너무 집착이 없어..”
순간,
‘아...... ‘
그 짧은 문장 하나에 담긴 마음을 너무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집착을 무서울만큼 잘 아는 사람이었다. 상대에게도 폭력적인데 나 자신에게는 더 폭력적인 집착에 대해서. 내가 만난 사람 누구도 그런 집착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나 자신만큼은 간절히 원했던 것이었으므로 ‘집착이 없는 사람에게 바라는 집착’ 그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레이캬비크는 집착 같은 것은 좋아하지 않는 건강한 사람이라고 굳게 믿었었다. 단 한번도 행색과 내색을 하지 않던 그가, 내게 집착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이메일과 함께 그는 사라졌다. 연락처는 없는 번호가 되었고 카톡과 페이스북, 그 어디서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해외에 나와 외국인 노동자로 일하며 살고 있었으므로 그를 더 찾아볼 여력이 없었다. 그가 사라지기 몇 개월 전 오랫동안 회계사로 일하던 회사를 관두고 이탈리아에서 시간을 보낸 흔적만 찾았을 뿐이다.
연락이 닿지 않은지 5년이 훌쩍 넘어가지만 아쉬움이나 걱정보다도 언젠가 불쑥 아무렇지 않게 연락이 되고, 또다시 뜸한 소식을 주고 받으며 안부를 전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어딘가 있다. 사라진 그를 찾기 보다는 그가 보낸 링크의 노래를 들으며 함께 늙어가는 상상을 하며 그를 궁금해한다. 그는 여전히 내 곁에 있는 존재이다. 물론 내가 곁에 있는 사람들을 떠올릴 때 가끔 타인에겐 성립되지 않는 법칙으로 곁에 있는 존재를 정의한다는 것을 안다. ‘곁에 있다’ 는 것이 꼭 몸이 멀어졌다고 해서 곁에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 거리와 상관없이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자신의 좌표와 다른 공간에 뿌리내린 타인의 좌표를 명확히 이해하는 것이 바탕이 된 관계라면 함께 축적된 경험의 밀도에 따라 곁에 있을수도 있고 아무리 가까이서 매일 부딪히며 사는 관계여도 곁에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 존재도 있기 마련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어젯밤 꿈엔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 내가 있었다. 여러 공간을 드나들며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마다 외로워서 미칠 지경이었다. 학교에선 뒷자리에 앉은 한 남학생에게 왜 내 짝에게만 잘해주고 나한테는 못되게하냐고 항의하자 내 짝인 여자애로부터 “제발, 나도 사랑받고 싶어.”라고 내 귀에 속삭이며 자신을 옹호하던 남학생의 지지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간절함을 느꼈다. 꿈속 다른 공간에서 술한잔 함께 할 사람을 찾고 있는데 모두가 나를 제쳐놓고 둘둘삼삼 자신들만의 저녁 약속을 잡아 나가 왕따를 당하는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화도나고 짜증이 나 울고 헤매기를 반복하다 깨니 어지러움을 느꼈다.
눈을 뜨자마자 레이캬비크를 떠올렸다. 정말 우리가 ‘함께’ 늙어간다는 말, 성립되는 생각일까? 지금 멀어진 것은 물리적 거리의 범주일까? 마음의 거리인걸까? 그저 환상에 지나지 않는 관계인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