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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주의 코뮤니스트 정치원칙에 관한 질문 1
Q 이른바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입장은?
A 소련을 포함하여 이른바 ‘사회주의’ 국가의 생산양식은 자본주의와 다르지 않았다. 공식적으로는 사유재산이 존재하지 않았지만, 노동자들은 생산 및 분배 수단에 대한 관리와 사회 전체의 관리에 대한 권한이 없었다. 다시 말해 관료주의 엘리트가 국가 부르주아지의 역할을 했는데, 생산과 생활을 마치 하나의 기생체처럼 통제하며 사치와 특권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를 착취했다.
하지만, 코뮤니스트 사회는 '좋은' 지도자가 있는 국가자본주의가 아니다. 코뮤니즘은 노동계급을 대신해 결정을 내리는데 반대할 뿐만 아니라, 노동계급을 억압하는 모든 국가 개념에 반대하는 대중투쟁으로부터 발생한다. 코뮤니즘은 현재의 부르주아 민주주의보다 훨씬 '공정'하고 '평등'할 뿐만 아니라 인민의 의지를 직접 표현한다. 코뮤니즘은 생산이 소수의 이윤을 위해 조직되는 것이 아니라 전 인류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생산되는 사회이다. 코뮤니즘은 특정 계급의 생산수단 지배력의 폐지를 의미한다. 따라서 코뮤니즘은 모든 형태의 착취에서 노동계급이 해방되는 것을 의미하며, 이 해방은 노동계급 자신의 과업일 수밖에 없다. 사회적 부를 유일하게 창조하는 노동계급은 모든 계급을 폐지함으로써 자신을 해방할 수 있으며, 코뮤니스트혁명은 먼저 모든 종류의 착취와 억압을 폐지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최초이자 유일하게 권력을 장악한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혁명은 1928년 스탈린주의 반(反)혁명 이전에 이미 패배했다. 러시아혁명의 타락은 세계 계급 운동의 패배와 그에 따른 스탈린주의 반혁명에 대한 노동계급의 투쟁을 방어하지 못하게 되면서 비롯되었다. 스탈린주의는 볼셰비키혁명의 당연한 결과가 아니라 반대로 혁명을 향한 모든 노력과 희망과의 전면적 단절이었다. 스탈린은 노동계급의 해방 대신에 잔인한 당 독재를 발전시켰다. 코뮤니즘 대신에, 특히 국가자본주의의 잔혹한 변종이 발전했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반인 상품생산과 임금노동이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전면적으로 국가가 통제하는 강제노동은 '사회주의 업적'으로 포장되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국가의 수중에 집중된 생산수단을 처분할 권한이 없는 임금노동자로 남았다. 특히, 퇴행하는 국가가 문제로 작용하였기 때문에 러시아에서 스탈린주의가 승리할 수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에서 등장한 '혼합경제'의 특정 요소를 기대했다. 여기에서도 국유화된 산업은 '인민의 재산'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것은 주로 독특한 맥락에서 전개된 극히 예외적인 자본주의적 구성체였다.
스탈린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에 심각한 패배를 안겼던 다양한 민족주의 운동뿐만 아니라 쿠바나 중국과 같은 일련의 국가 모델이 되었다. 지배 형태와 정치 경향에서 스탈린주의는 민족주의와 국가자본주의 강령을 토대로 행동했다. 그것은 국가가 프롤레타리아트를 복종하게 하고, 테러를 자행하며, 혁명을 포기하게 하고, 다수의 코뮤니스트를 학살하고, 민족주의와 반(反)유대주의를 조장하고, 여성에 적대적인 성도덕 전파하고, 임금노동을 미화하면서 완전히 반동적 성격을 드러냈다. 스탈린주의는 다소 퇴보한 '사회주의 실험'이 아니라, 반대로 혁명의 무덤을 파는 자들, 특히 반(反)코뮤니즘의 음흉한 변종이었다. 이것은 우리가 퇴치해야 할 유령이다.
Q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당 독재인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인가?
A 파리코뮨의 경험은 노동계급이 부르주아 국가기구와 제도를 장악할 수 없다는 것과 자신의 목적을 위해 그것을 활용할 수 없다는 것을 오래전에 보여주었다. 부르주아 국가는 계급을 초월해 존재하는 기구가 아니라 자본의 지배를 유지하고 방어하기 위한 억압과 지배 기구이다. 자본주의 체제를 철폐하기 위해서는 먼저 전 세계에 걸쳐 노동계급이 권력을 장악해야 하며, 전 세계에 걸쳐 자본주의 국가기구를 완전히 파괴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자기 조직화 기구로 대체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형식은 역사적으로 노동자평의회와 프롤레타리아 총회의 연합으로 나타났다. 평의회는 사회주의 이론가들의 추상적인 발명품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투쟁과 봉기의 과정에서 만들어졌고, 평의회의 혁명성은 수백만 명이 자기 삶의 수준을 스스로 통제하고 자기 계급의 조직을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평의회는 대의제와 수동성에 기반을 둔 부르주아 민주주의와는 대조적으로 자발적 활동을 기반으로 한다. 평의회는 계급 전체를 망라하여 조직되고, 계급 안에서 선출되며 언제나 소환할 수 있는 직접민주주의에 기초한다. 하지만 역사의 경험은 가장 완벽한 평의회 민주주의라도 그것만으로 코뮤니스트혁명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도 가르쳐 주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 장악에 앞서 국제주의 코뮤니스트는 부르주아 국가를 파괴하기 위한 방향을 제시해야 하며, 코뮤니스트 사회로의 이행기에 전 세계적인 규모로 자본주의 상품생산의 종말을 준비하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위해 투쟁해야 한다.
이러한 코뮤니스트혁명 과정에서 당은 평의회 내부에서 활동하지만, 당이 노동계급 전체의 조직인 평의회를 대신할 수 없다. 당은 권력을 갖는 것이 아니라 평의회 안에서 코뮤니스트 강령을 위해 활동하고 투쟁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이른바 사회주의 체제로 거짓 선전되었던 스탈린주의 국가의 당 독재와 같이 혁명당이 프롤레타리아트에 명령을 내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직 평의회로 구성된 전체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정치권력을 갖는다. 오직 프롤레타리아트만이 혁명을 실현하고, 모든 권력을 갖는 것이 우리의 강령이며, 진정한 민주주의이며,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다.
Q 국유화는 사회주의적 조치의 일환인가?
A 사회주의와 국가주의를 동일시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는 부르주아 개혁주의를 신비화할 뿐 아니라 트로츠키주의가 스탈린주의 일탈과 러시아 사회와 그 생산구조에 반대하면서도 그것을 부적절하게 비판하는 데에서 기인한다. 반대로 맑스주의에 따르면 국가기구는 지배계급의 권력 도구, 즉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부르주아 권력의 도구이기 때문에 파괴해야 한다.
산업에 대한 사적 소유가 아닌 국가 소유는 생산에 대한 사회적 관계의 본질을 바꾸지 않는다. 경제에 대한 국가적 개입과 통제는 자본주의 경제의 근본 법칙의 균열을 나타내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전체 역사적 발전의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결과이다. 이러한 개입은 생산수단의 개별 사유재산에 대한 법적 형태를 제거하는 수준까지 밀어붙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자본주의 생산 체제의 근간, 즉 노동이 생산하는 잉여가치의 전유를 통한 인간 노동의 착취를 제거하지 않고 발생하며, 오히려 착취를 강화한다.
Q ‘민족해방투쟁’을 지지하는가?
A 전쟁 기간이든, 평화 기간이든 부르주아지는 노동자가 자신을 ‘조국’과 동일시하도록 노력한다. 대대로 노동자는 ‘일자리’를 잃을 위험에 처해있고, 더 열심히 일하지 않는다면 일자리를 잃는다는 말을 들어왔다. 전쟁 기간에도 정확히 똑같은 메시지가 전 세계 노동자에게 강요된다. 부르주아지는 노동자에 ‘국가의 이익을 위해’ 전쟁터에서 살육할 것과 상대방 노동계급을 학살할 것을 요청한다. ‘
’민족’이라는 관념은 부르주아 지배를 결정적으로 지탱하게 해준다. 민족은 자본주의 체제의 계급적 특징을 위장하며 마치 기존 질서가 ‘국민’ 공동이익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게 한다. 민족주의는 항상 프롤레타리아트가 자국 부르주아지에 항복하도록 이끈다. 제국주의 시대에 특정한 ‘민족 발전 가능성’ 및 ‘이루지 못한 민주주의 과업’이라는 개념은 허구이며 모든 의미에서 반동적이다.
국제주의 코뮤니스트는 이른바 ‘민족해방투쟁’을 절대 지지하지 않는다. 반면에 국제주의를 포기한 세력 대부분은 이러한 민족해방투쟁이 억압에 반대하기 때문에 반(反)제국주의적이라고 주장한다. 그 주장은 많은 나라에서 억압당하는 소수가 있으므로 사실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소수가 자신의 지배계급 또는 부르주아지 일부와 동일시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노동계급에 민족해방운동에 참여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그들을 자본주의 도살장으로 유인하는 것이다. 이러한 투쟁은 반(反)제국주의 투쟁과 같지 않다. 민족주의 운동은 단지 군사력을 발전시키기 위해 제국주의 강대국에서 후원자와 지지자를 찾는데 의존한다. 성공적인 ‘독립투쟁’ 이후 새롭게 ‘해방된 국가’조차 세계 경제를 형성한 제국주의 질서의 네트워크에서 철수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어떤 국가도 세계시장에서 자본주의 경쟁의 요구를 벗어나 독립적으로 발전할 수 없다. 우리는 맑스가 특정 독립투쟁을 지지했다거나 레닌이 민족자결권을 옹호했다고 끝없이 주장하는 이들에게 그러한 기계적 '맑스주의'는 맑스주의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대답한다. 맑스는 자본주의 초창기일 때, 노동계급, 새로운 기술, 기계가 탄생하던 시기에 글을 썼다. 이러한 배경에서 맑스와 엥겔스는 봉건적, 전(前)자본주의적 구조에 대한 승리를 앞당길 수 있다고 믿었던 민족운동을 지지했다. 자본주의 상승기에는 독립적인 자본주의 국가를 형성하고, 이를 통해 미래에 자본주의 무덤을 파게 될 노동계급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쇠퇴기, 제국주의 시대에는 '민족독립'을 위한 전략이 좁은 범위에서 압박을 받는다. 이 사실을 가장 잘 이해한 사람은 레닌이 아니라 (제국주의 기원에 대한 잘못된 분석에도 불구하고) 로자 룩셈부르크였다. 20세기 초 이후 자본주의의 발전은 민족문제에 관한 룩셈부르크의 입장이 옳았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레닌은 식민 국가의 정치투쟁이 제국주의 열강을 뿌리까지 뒤흔들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 탈식민지화가 진행되면서 이러한 희망은 실현되지 않았다. 탈식민지화는 경제 권력 구조에 거의 변화를 주지 않았다. 많은 경우, 구(舊)식민지는 미국이 구식민 강대국들을 상대로 승리하면서 제국주의 사이 세력 다툼의 결과로 독립하였다.
주변국의 부르주아지는 때때로 제국주의 서열에서 약자의 위치에 있을 수 있다. 그들은 온갖 종류의 '반제국주의' 수사와 사회적 선동에 의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세계자본주의가 노동계급을 지배하는 필수 구성요소라는 사실을 바꾸지는 못한다. 이런 이유로 이른바 '민족해방운동'은 부르주아 분파의 이익을 대변하고 노동계급에 대한 제국주의 사이 대결 구도의 일부로 작용한다. '민족해방' 또는 '민족자결권'에 대한 모든 이론과 구호는 계급 안에서 민족주의 균열을 조장하고 프롤레타리아트를 부르주아 통제 아래 두는 데 목적이 있다.
오늘날 반(反)제국주의는 자본주의 체제 전체에 대항하는 것을 의미한다.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은 오직 계급적 자율성에 기초하여 해방을 위해 투쟁할 수 있다. 따라서 국제주의 코뮤니스트로서 우리는 '민족', '국가' 또는 '민족'과의 연대를 거부하고, 오직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인간 존재와 그들의 투쟁, 사회적 대립만을 인정한다. 노동계급이 제국주의 전쟁과 착취체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 민족주의를 비롯한 모든 지배 이데올로기를 거부하고 노동계급 공동의 이해관계를 위해 민족과 국경을 넘어 자본주의 체제 전복을 향해 투쟁하는 것이다.
Q 국제주의 코뮤니스트가 선거에 참여하지 않는 이유
A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르주아지는 생산수단을 소유하기 때문에 사실상 모든 권력(경제, 정치, 군사적)을 갖는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현재의 정치 체제를 부르주아 민주주의라고 부르는데, 그 뿌리는 '부르주아지의 독재'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선거는 단지 부르주아지의 손에 있는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한 정치의 꼭두각시 인형극에 불과하다. 그들은 부르주아 독재 체제를 주권자(국민)의 명령으로 포장하고, 동시에 그것을 ‘민주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선거는 부르주아지의 (의회/대통령제) 민주주의가 착취당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주인을 선출할 자유를 양보하는 행위이다. 그들이 우파든 좌파든 기껏해야 부르주아지의 이해관계를 방어하고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해줄 세력/사람 중에서 선출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선거에 참여하는 것은 이러한 민주적 신비화를 지지하고, 부르주아지가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독재를 돕는 것이다.
노동계급은 4년, 5년마다 주기적으로 벌어지는 부르주아지 의회/대통령 선거의 사기극에 맞서 계급적 입장에서 선거 거부를 다시 제기해야 한다. 이것은 분명히 무관심과 정치적 개인주의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 현장과 거리에서 계급투쟁을 재개하고 혁명당 건설에 참여하기 위해서이다.
대통령 선출/의회 다수파 장악을 통한 정권장악은 결코 임금노동의 착취를 폐지하지 못하며, 지속할 것으로 생각하는 ‘권리’마저 유지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오직 계급투쟁의 확산만이 자본이 조금이나마 노동자에게 일부를 양보할 수 있게 한다. 프롤레타리아혁명만이 착취 없는 사회를 실현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 수 있다.
Q 파시즘과 반(反)파시즘 인민전선에 대하여
A 파시즘은 1차 세계대전 이후 계급 운동 강화에 대해 부르주아지가 대응하는 방식의 하나로 나타났다. 역사적으로 파시즘은 급진화된 소부르주아 운동으로 전개되었는데, 이들은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이 위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위기로 자신의 존재가 위협받는다고 느꼈다. 파시즘은 전투적 행동과 공격적 민족주의, 반(反)유대주의, 사회적 선동이 혼합된 기괴한 선전을 통해 이러한 범위 밖에서도 대중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부르주아지 일부를 움직여 파시스트 운동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활용한 것은 반동적 절충주의 강령이라기보다는 노동자 운동 조직에 대한 테러였다.
파시즘은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에서 노동계급의 혁명적 투쟁이 체제의 토대를 위협하는 상황에서 경제의 부흥이라는 이름으로 협동조합주의나 중앙집권적 조직에 맞는 권위적 통치 형태였다. 파시즘은 노동계급의 투쟁을 뿌리째 뽑고, 모든 반대 시도를 분쇄하며, 사회 모든 영역을 국가 통제에 종속시킴으로써, 특히 자본 독재의 권위적 형태임을 입증했다.
파시즘의 야만적 범죄 행위는 위기와 전쟁의 제국주의 순환에서 자본주의가 얼마나 비인간적으로 잔혹한지를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이런 이유로, 부르주아지의 일부 도덕주의자가 파시즘을 반(反)부르주아 반란 또는 부르주아 사회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기꺼이 표현하려고 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해할 수 없는 홀로코스트 공포에 비추어 볼 때, 그러한 주장은 언뜻 그럴듯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런데도 파시즘과 민주주의 사이 공생 관계를 숨길 신비화는 남아 있다. 의심할 여지 없이, 파시스트는 인종주의를 심화하고 확대했다. 그러나 인종주의도, 반유대주의도, 민족주의도 파시스트만의 발명품은 아니며, 반대로 자본주의 사회의 필수적인 요소이다. 파시스트는 자본주의 밖에 서 있지 않으며 자본주의 지배질서에 반대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지배자가 일상적으로 퍼뜨리는 원망과 이데올로기를 손에 들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것을 강화한다. 이러한 이유로 국제주의 코뮤니스트는 다른 모든 형태의 부르주아 지배와 마찬가지로 파시즘과 투쟁한다.
파시스트의 출현과 그들의 공격에 맞선 노동계급의 저항이 필요하다. 그러한 투쟁은 명확한 계급 기반에서 시작할 때만 승리할 수 있다. 파시즘에 대한 저항은 모든 형태의 부르주아 지배를 파괴하기 위한 포괄적인 반(反)자본주의 투쟁의 일부이어야 한다. 우리는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캠페인과 다양한 반(反)파시스트 동맹에 대한 모든 참여를 거부한다. 이들은 노동계급을 ‘민주적’이지만, 여전히 부르주아 국가 굴레에 묶는 것을 목표로 하는 반동적인 막다른 골목을 나타낸다. 반(反)파시즘 전체 논리는 ‘민주주의’ 국가를 덜 나쁜 것으로 방어함으로써 파시즘에 저항하는 것이다. 민주주의 수호라는 개념은 계급 중립적 실체로서 국가라는 신화를 받아들이고, 순종하며, 결국 굴복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것은 부르주아 국가를 강화하고 국가권력에 복종하며 자기 활동에 대한 모든 가능성이 박탈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이것은 프롤레타리아트를 국가에 속박하고 억압에 무방비 상태로 넘겨주는 것 이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반파시즘이 효과적이라고 주장하는 곳에서는 항상 실패한다. 국가가 최고의 반파시스트라고 자처하는 환상 속에서 또는 ‘반파시스트 연합’이라는 이름으로 혁명을 포기한다면, 국가를 혁명적으로 전복하려는 모든 시도는 재앙으로 빠지게 된다. 반파시즘은 국가를 미화하는 이념이자, 혁명을 포기하는 실용적인 경로로서, 파시즘과 마찬가지로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공격이다.
국제주의 코뮤니스트로서 우리는 파시즘과 거리낌 없이 싸우며, 동시에 어떤 형태의 부르주아 권력과도 싸운다. 역사적으로 파시즘은 계급투쟁과 코뮤니스트 운동에 대한 대응으로 나타났다. 그것의 뿌리는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부르주아 권력 내부에서 낱낱이 드러난다. 그들은 필요하거나 기회가 있을 때, 실제로 반동적 민낯을 드러내기 위해 민주주의 가면을 벗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반(反)파시즘 연합을 위해 부르주아 권력과 동맹을 맺는 것이 잘못된 것이며, 심각한 패배로 이어진다고 믿는 이유이다. 사실, 모든 파시스트 정권의 지지 기반을 구성하는 것은 부르주아지 자체이다. 대신 우리는 ‘아래로부터의 계급 단결’, 즉 모든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을 방어하고 부르주아 권력에 대적하기 위한 프롤레타리아트 연합을 지지해왔다.
파괴적 발전을 위한 자본주의의 힘에 비추어 인류 앞에 서 있는 대안은 ‘민주주의냐 파시즘이냐’가 아니라 ‘코뮤니즘이냐 야만이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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