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예레미야애가3장55~66절
제목 : 예전처럼 구원하소서
시인은 하나님이 과거에 자신으 기도를 들어주신 것을 회상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때와 같은 고난의 상황에 있으니 자신을 구원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또한 원수들의 행위를 듣고 보신 하나님이 그들의 행위대로 보응해주시길 시인은 기도합니다.
시인은 주께서 자신의 기도를 듣고 계신다고 확신하며, 예전처럼 자신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해 달라고 호소합니다.
1. 예전처럼 구원하소서(55~58절)
“[55] ○여호와여 내가 심히 깊은 구덩이에서 주의 이름을 불렀나이다 [56] 주께서 이미 나의 음성을 들으셨사오니 이제 나의 탄식과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가리지 마옵소서 [57] 내가 주께 아뢴 날에 주께서 내게 가까이 하여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나이다 [58] 주여 주께서 내 심령의 원통함을 풀어 주셨고 내 생명을 속량하셨나이다”
1) 과거에도 자신이 가장 깊은 구덩이에 빠져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음을 기억합니다(55절).
“[55] ○여호와여 내가 심히 깊은 구덩이에서 주의 이름을 불렀나이다”
심히 깊은 구덩이. – 스스로 빠져 나올 수 없을 정도의 심각한 재난이나 깊은 고뇌를 말합니다.
이는 마치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시 22 :1)라고 절규했던 다윗의 그것에 비견될 수 있겠습니다.
이렇듯 심한 환난 속에서도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자 여호와께 매어 달렸다는 데서 선지자의 위대한 신앙의 일면을 보게 됩니다.
2) 시인은 주님의 자기의 음성을 들었다고 합니다(56절).
“[56] 주께서 이미 나의 음성을 들으셨사오니 이제 나의 탄식과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가리지 마옵소서”
본절은 원문 해석상 다소 애매한 면이 있으며 대체로 다음 세 가지로 번역됩니다.
(1) "내 음성을 들으소서...주의 귀를 가리우지 마소서"(Hillers).
(2)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귀를 가리우지 마소서." 이는 본절의 '나의 음성' 곧 간구 내용이 바로 하반절 내용이라고 보는 견해로서 대다수 영역 성경에서 취한 번역 이다.
(3)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사오니...귀를 가리우지 마소서." 이는 선지자가 과거에 경험했던 하나님의 구원에 근거하여 현재 소원을 피력하고 있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한글 개역 성경은 이를 따랐습니다.
3) 시인은 자신이 여호와를 불렀을 때 여호와가 자신에게 가까이 오셨다고 말합니다(57절).
“[57] 내가 주께 아뢴 날에 주께서 내게 가까이 하여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나이다”
이것은 과거에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셨다는 사실을 재차 강조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때 시인이 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두려워하지 말라’였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표현은 예레미야애가 전체에서 유일하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입니다.
이 말은 여호와가 본격적으로 돕기에 앞서 곤경에 처한 사람을 안심시키기 위해 들려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레미야에게 선지자의 소명을 재확인시킬 때도 이 말씀이 들려졌습니다(렘1:8).
하나님은 두려워하는 자, 상처 입은 자를 위로하시는 분입니다.
시인도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있고 그런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려 합니다.
본절 이하에는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는 저자의 믿음이 돋보입니다.
이러한 확신은 하나님이 당신께 간구하는 신실한 자녀들의 기도를 반드시 응답해주신다고 하는 믿음에 근거한 것입니다(사 58:9; 65:24, Harrison).
4) 여호와가 자신의 변호사가 되어 자신을 위해 싸워주셨다고 고백합니다(58절).
“[58] 주여 주께서 내 심령의 원통함을 풀어 주셨고 내 생명을 속량하셨나이다”
시인은 여호와가 자신의 변호사가 되셔서 자신을 위해 싸워주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자신의 생명의 구속자라고 말합니다.
내 생명을 속량하셨나이다. - 여기서 하나님은 '고엘'로 묘사됩니다(룻 3:6-13 주제 강해, "'기업무를 자'의 구속사적 의미" 참조).
‘속량하다’로 번역된 동사 가알은 사람이나 물건을 대신 사주는 것을 뜻합니다.
보통 ‘구속하다’로 번역됩니다.
예수가 자신의 피로 우리의 생명을 사셨기 때문에 그는 우리의 구속자이십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의 변호사로 사건을 맡아 자신을 구원해주신 구속자라고 고백합니다.
즉 시인은 현재 자신이 살아있는 것이 하나님의 구속하심 때문이라고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현재의 상황을 기도하기에 앞서서 과거에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고 구원하신 것에 의지하여 하나님의 현재적 구원을 기대합니다.
2. 주목하여 보소서(59~63절)
“[59] 여호와여 나의 억울함을 보셨사오니 나를 위하여 원통함을 풀어주옵소서 [60] 그들이 내게 보복하며 나를 모해함을 주께서 다 보셨나이다 [61] 여호와여 그들이 나를 비방하며 나를 모해하는 모든 것 [62] 곧 일어나 나를 치는 자들의 입술에서 나오는 것들과 종일 나를 모해하는 것들을 들으셨나이다 [63] 그들이 앉으나 서나 나를 조롱하여 노래하는 것을 주목하여 보옵소서”
1) 하나님이 그동안 자신이 당한 고난이나 모함을 보셨다고 하면서 여호와께 이것을 심판해달라고 요청합니다(59절).
“[59] 여호와여 나의 억울함을 보셨사오니 나를 위하여 원통함을 풀어주옵소서”
하나님의 공의가 속히 시행됨으로 말미암아 모든 환난과 고통이 사라지게 되기를 간구하는 내용이다.
시인은 여호와를 세상의 재판장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정의를 실현해달라고 요청합니다.
2) 시인이 왜 하나님께 이런 요청을 하는지 그 이유입니다(60절)
“[60] 그들이 내게 보복하며 나를 모해함을 주께서 다 보셨나이다”
하나님은 원수들의 보복과 그들의 악한 생각들을 모두 보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악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안 계시고 자신들이 왕이며 재판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생각대로 남을 판단하고 재판하고 권력을 행사합니다.
또한 악을 몰래 저지르는 사람은 아무도 자신의 악한 생각을 알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시인은 하나님이 분명히 하늘에 계시며 모든 것을 보고 계신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겪는 불의한 상황과 억울한 고난 속에서도 시인은 결코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의 개입을 요청하며 기다립니다.
정작 유다 백성이 환난에 처한 것도 하나님의 공의로 말미암았지마, 유다를 멸망시킨 바벧론 역시 동일한 공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택한 백성에게 있어 하나님의 긍휼(32절)과 공의는 불가분적 관련성을 지니고 있다 하겠습니다.
3) 시인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들으셨다고 고백합니다(61~62절).
“[61] 여호와여 그들이 나를 비방하며 나를 모해하는 모든 것 [62] 곧 일어나 나를 치는 자들의 입술에서 나오는 것들과 종일 나를 모해하는 것들을 들으셨나이다”
하나님이 들으신 것은 시인을 향한 원수들의 비방과 모든 나쁜 생각과 대항자의 입술과 반복되는 노래(힉가욘)입니다.
여기서 대항자의 입술은 시인을 공격하는 자의 말이란 의미입니다.
즉, 말로 시인을 공격하고 욕하고 모함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원수들은 시인에 대한 비방을 하루 종일 끊임없이 합니다.
시인은 이 모든 말을 하나님이 들으셨다고 확신합니다.
4) 시인은 다시 원수들의 앉고 서는 것을 자세히 봐 달라고 요청합니다(63절).
“[63] 그들이 앉으나 서나 나를 조롱하여 노래하는 것을 주목하여 보옵소서”
그리고 자신은 그들의 돌림노래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시인은 원수들의 말에 대해 두 절을 더 할에합니다.
몸이 당하는 고난도 힘들지만 원수들의 말에 의한 공격이 시인에게는 더 힘들고 참기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자신이 돌림 노래라는 말 속에 시인의 참담한 심정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인격 모독적인 말과 욕설에 의해 인정은 메마르고 사회는 날로 각박해집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말을 하나님이 듣고 계신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악한 말을 죄로 여기시기 때문에 항상 말조심을 해야 합니다.
앉으나 서나 - 이는 '항상', 혹은 '매사에'라는 뜻을 나타내는 히브리의 관용적 표현입니다(신 6:7 참조, Hillers).
3. 보응하고 멸하소서(64~66절)
“[64] 여호와여 주께서 그들의 손이 행한 대로 그들에게 보응하사 [65] 그들에게 거만한 마음을 주시고 그들에게 저주를 내리소서 [66] 주께서 진노로 그들을 뒤쫓으사 여호와의 하늘 아래에서 멸하소서”
1) 시인은 그들의 손이 행한 대로 보응해 달라고 합니다(64절).
“[64] 여호와여 주께서 그들의 손이 행한 대로 그들에게 보응하사”
"여자 같은 멸망할 바밸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은 자가 유복하리로다"고 노래한 시 137:8을 연상하게 하는 구절로서, 이 역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촉구하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시인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사상이 나타납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원칙은 과도한 보복이나 형벌을 막기 위한 처벌의 원칙입니다.
시인은 그들이 말로 범죄하면 그에 상응하는 벌을, 행동으로 범죄하였으면 또한 그에 상응하는 벌을 내려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적 보복과는 다른 것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이루어지길 원하는 것입니다.
2) 그들에게 거만한 마음을 주시고 저주를 내려달라 하십니다(65절)
“[65] 그들에게 거만한 마음을 주시고 그들에게 저주를 내리소서”
그들에게 거만한 마음, 즉 둔한 마음을 주라고 요청하는데, 이것은 회개할 기회를 갖지 못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에게 내려진 저주입니다.
죄에서 회개하지 못하면 결국 심판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3) 시인은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진노로 그들을 끝까지 추격하여 진멸해달라고 요청합니다(66절).
“[66] 주께서 진노로 그들을 뒤쫓으사 여호와의 하늘 아래에서 멸하소서”
이것은 예레미야애가 3:43의 상황과 반대됩니다.
즉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을 쫓고 죽이신 것처럼, 자신의 원수들도 그렇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공의와 은혜를 기반으로 하여 하나님이 현재 고난의 상황에 깊이 개입해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여호와의 하늘 아래에서 멸하소서. – 이는 매우 강조적인 의미를 나타냅니다.
이를 단지 '지상에서 멸하시리이다'로 번역하면 그 의미를 경감시키게 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하늘 아래'라는 표현 속에는 하늘의 심판관 되시는 여호와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멸절될 것이라고 하는 뜻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Calvin).
말씀을 맺겠습니다.
선지자는 ‘멸절되었다’고 할 만큼 삶의 막다른 골짜기에서도 ‘두려워 말라’고 응답해주셨던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다시 자신의 탄식과 부르짖음에 귀를 열어다라고 간구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기도를 들으실 뿐 아니라 그 백성을 향해 대적들이 비방하고 하루 온종일 모해하려고 하는 말들을 다 들으시고, 마음속 음모까지도 아십니다.
그리고 근거 없는 비방으로 당한 고난과 그 진실을 나보다 주님이 더 잘 아십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행한 대로 보응하실 것을 확신합니다.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나의 행위는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어떤 평가를 받을 것인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애가는 기도의 책입니다.
슬픔과 고통이 가득한 애가는 주께서 우리에게 선물하신 기도의 언어들입니다.
마음을 담아 간절히 기도할 때, 주께서 귀를 기울이실 것입니다.
고통 중에 애가의 언어로 주께 기도합시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시인은 비록 지금 주님이 침묵하시고 진노의 구름으로 자신을 가리셨지만, 자기 백성의 절절한 탄원을 듣고 처참한 고난의 현장을 보고 계심을 확신합니다.
‘옛 경험’이 그를 굳은 신뢰로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지나온 삶에서 경험했던 크고 작은 주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기억하면, 어떤 고난과 위기에도 부서지지 않을 바위 같은 믿음이 생깁니다.
나의 마음에 새겨진 주님의 특별한 은총은 무엇입니까?
2)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가까이 오셔서 위로하십니다(57절).
사방에 적과 약탈자뿐이고, 만나는 사람마다 조롱하며 업신여길 때, 우리가 바라고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분은 하늘 아버지뿐입니다.
비천한 처지가 되어 사랑하는 자도, 친구도 떠날 지라도, 주님은 끝까지 곁에 계시며 위로하시고 “샬롬”을 주십니다.
나는 주님께 가까이 머물며 날마다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찾습니까?
혹 너무 멀어져 그분의 존재조차 잊고 살지는 않습니까?
3) 억울한 자, 억압당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공의로운 재판관이십니다(58,59절).
악한자의 흉계에서 약한 자를 구하시고, 그의 권리를 회복하십니다.
예나 지금이나 지위와 돈을 권력으로 삼아 약자를 핍박하는 자들은 반듯이 주님의 정의롭고 공평한 재판정에 서야 할 것입니다.
나는 어느 편에 서 있습니까?
나보다 못났다고 업신여기거나 함부로 대하지 맙시다.
혹 억압당하고 있다면, 내 편에 서서 변호하시는 주님이 계심을 기억하며 당당히 맛섭시다.
나(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시인은 하나님의 대적자들의 ‘말’과 ‘행위’을 모두 듣고 보셨으니 이제 그들의 행실대로 벌을 내려달라고 요청합니다(60~66절).
개인적인 복수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와 공평을 실현하시라는 요청입니다.
잘잘못을 가리지 않고, 잘못한 일을 합당하게 처벌하지 않고, 무조건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의 방식이 아닙니다.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범법과 악행을 은혜와 용서라는 ‘미명’으로 덮어버리지 맙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