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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호세아7장1~16절
제목 : 숨길 수 없는 죄악, 피할 수 없는 심판,
어제는 하나님이 바라시는 인애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진실로 돌아만 가면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시고,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시고, 우리를 살리시고, 우리를 일으키시고, 이른비와 늦은 비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인애를 알고 하나님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호세아의 뛰어난 비유입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를 진단하면서,
세 가지 비유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세가지 비유는 달궈진 화덕과 어리석은 비둘기와 속이는 활입니다.
이스라엘은 ‘달궈진 화덕’처럼 모반이 끊이지 않고,
‘어리석은 비둘기’처럼 강대국과의 동맹에 매달리고,
그리고 ‘속이는 활’처럼 또다시 하나님을 외면합니다.
1. 하나님의 치료를 거부하다(1~2절).
우리 몸이 아파서 병원에 의사를 찾아가서 치료를 받으려고 하면 아픈 증세를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자꾸 속이거나 거짓말을 하면 의사도 도와주기 어렵습니다. 물론 요즘은 의학이 워낙 발달해서 대충 이야기를 듣고 종합검사를 해보면 어느 곳이 문제가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병원까지 와놓고서도 의사에게 아프지 않다고 말하고 한사코 아픈 곳을 보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지금 상태가 심각한데도 여유를 가지고 엉뚱한 소리만 말하면 의사도 어디가 아픈지 정확하게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죄 문제는 더 심각합니다.
어떤 죄에 깊이 빠져 있으면서도 일단 다른 사람들이 모르고 있으면 얼마든지 감출 수 있기 때문에 말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습니다.
특히 어떤 문제를 가지고 어려움을 호소하더라도 정말 중요한 부분은 빼놓고 엉뚱한 것만 가지고 말을 합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는 큰 문제가 없는 것 같은데 이미 그 사람의 속은 너무 타버려서 고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어버린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솔직하게 모든 것을 다 밝혔으면 설사 징계를 당하고 고통을 받는다 하더라도 다시 일어날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죄를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의 양심은 완전히 시커멓게 타버려서 고칠 수가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1) 내가 이스라엘을 치료하려 할 때에 에브라임의 죄와 사마리아의 악이 드러났습니다(1절).
“[1] 내가 이스라엘을 치료하려 할 때에 에브라임의 죄와 사마리아의 악이 드러나도다 그들은 거짓을 행하며 안으로 들어가 도둑질하고 밖으로 떼 지어 노략질하며”
내가 이스라엘을 치료하려 할 때에. - 여기서 하나님의 '치료'(라파)는 형벌을 뜻하지 않고 죄악을 회개시키기 위한 예언자들의 책망과 훈계를 가리킵니다.
이는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이 오직 하나님께만 달려 있으며, 예언자들의 책망을 통한 회개에 치료의 가능성이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에브라임의 죄와 사마리아의 악. - 에브라임은 북이스라엘을 상징하고, 사마리아는 그 나라의 수도로서 도덕적 부패의 중요한 장소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들의 죄악은 하나님의 치료를 거부하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의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온갖 악행들이 열거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남을 속이고 기만하는 거짓말로서 사기와 거짓 증언 등을 내포합니다.
실제로 그들은 도적질과 약탈을 일삼음으로써 십계명을 위반했습니다(출 20:15).
2) 모든 악을 기억하였음을 그들이 마음에 생각하지 않았습니다(2절)
“[2] 내가 모든 악을 기억하였음을 그들이 마음에 생각하지 아니하거니와 이제 그들의 행위가 그들을 에워싸고 내 얼굴 앞에 있도다”
내가 모든 악을 기억하였음을 그들이 마음에 생각하지 아니하거니와.
이스라엘의 더 악한 죄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악을 기억하여 형벌을 내리신다는 엄연한 사실을 마음으로부터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는 의미입니다(롬1:28).
*롬1: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그들의 행위가 그들을 에워싸고. - 이스라엘의 죄악 된 행위가 너무나 많고 커서 회개를 불가능하게 할 정도임을 묘사하는 내용입니다.
이처럼 사방에 둘러싸인 그들의 죄악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부끄러움이 없이 악행을 일삼는 뻔뻔함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저지른 이스라엘의 죄악이 결코 숨기우지 못할 것임을 암시합니다.
곧 그들의 죄악은 하나님 앞에서 밝히 드러나고 있다는 것입니다(시 90:8).
*시90:8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2. 음모와 모반이 끊이지 않다(3~7절).-과자 만든 자들에게 달궈진 화덕이야기.
1) 그 거짓말로 지도자들을 기쁘게 합니다(3절).
“[3] 그들이 그 악으로 왕을, 그 거짓말로 지도자들을 기쁘게 하도다”
악한 군주와 방백들의 죄가 주위에 있는 자들의 악행과 더불어 특별히 언급되고 있습니다.
왕과 방백들은 백성들의 폭력과 방종을 즐거워하였으며,
백성들은 거짓 아첨과 부도덕한 행위로 그들을 기쁘게 하였습니다.
이는 통치자들의 욕망과 이권에 빌붙어 사는 백성들이,
우상 숭배와 부정부패를 칭찬하며 따랐을 뿐만 아니라,
온갖 비난과 중상모략으로 자기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에만 급급했음을 보여줍니다.
2) 과자 만드는 자에 의해 달궈진 화덕과 같도다(4절).
“[4] 그들은 다 간음하는 자라 과자 만드는 자에 의해 달궈진 화덕과 같도다 그가 반죽을 뭉침으로 발효되기까지만 불 일으키기를 그칠 뿐이니라”
그들은 다 간음하는 자라. -여기서 '그들은' 왕, 방백, 백성 모두를 가리킵니다.
'간음하다'는 하나님을 배반한 영적 행음이든지(Keil) 아니면,
문자적인 의미대로 육체적 음란이든지 간에,
하나님 보시기에 마땅히 형벌 받을 죄악을 의미합니다.
과자 만드는 자에 의해 달궈진 화덕과 같도다. -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치 과자 만드는 자에 의해 뜨겁게 달구어진 화덕과 같이 음란하고(5:4) 더러운 욕심으로 불일듯함을 의미합니다.
그가 반죽을 뭉침으로 발효되기까지만 불 일으키기를 그칠 뿐이니라.
이는 과자 만드는 자가 반죽된 밀가루 반죽이 발효되기까지 잠깐 쉬는 것처럼 백성들의 악한 생각과 음욕이 일시적으로 멈추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잠시 동안이며, 오히려 발효된 반죽을 굽기 위해 충분히 달구어진 화덕처럼 그들의 욕망은 더욱 뜨겁게 불타오릅니다.
즉, 더 뜨겁고 완전한 욕망을 채우기 위한 준비로서의 휴식일 뿐입니다.
3) 왕은 오만한 자들과 더불어 악수합니다(5절).
“[5] 우리 왕의 날에 지도자들은 술의 뜨거움으로 병이 나며 왕은 오만한 자들과 더불어 악수하는도다”
우리 왕의 날. -왕의 생일이거나 왕이 즉위하는 대관식 날을 가리킵니다. 또는 왕이 중심이 되는 특별한 축제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술의 '뜨거움'(헤마)은 술로 인하여 얻게 되는 열이나 독을 뜻합니다.
연회에서 베풀어지는 술의 유혹은 방탕과 방종을 뛰어넘어 병까지 나게 할 정도였습니다.
이는 술병 뒤에 숨어 있는 악한 계략 때문입니다.
즉 방백들이 정치적 반역을 꾀하려고 왕을 술 취하게 만드는 것입니다(KJV). 이것은 아마도 네 명의 이스라엘 왕이 계속적인 반역으로 살해된 사건을 암시하는 듯합니다(왕하15:10,14,25,30).
왕하15:10 “야베스의 아들 살룸이 그를(느밧의 아들 여로보암) 반역하여 백성 앞에서 쳐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14]가디의 아들 므나헴이 디르사에서부터 사마리아로 올라가서 야베스의 아들 살룸을 거기에서 쳐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25]그 장관 르말랴의 아들 베가가 반역하여 사마리아 왕궁 호위소에서 왕과 아르곱과 아리에를 죽이되 길르앗 사람 오십 명과 더불어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었더라[30]웃시야의 아들 요담 제이십년에 엘라의 아들 호세아가 반역하여 르말랴의 아들 베가를 쳐서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왕은 오만한 자들과 더불어 악수하는도다. - '오만한 자들'은 원래 '리츠'에서 파생된 단어로 이웃을 경멸하거나 죄와 심판을 비웃고 조롱하는 자들을 의미합니다(잠14:9;19:28).
*잠14:9 “미련한 자는 죄를 심상히 여겨도 정직한 자 중에는 은혜가 있느니라”
*잠19:28 “망령된 증인은 정의를 업신여기고 악인의 입은 죄악을 삼키느니라”
여기서는 오만한 자들은 거짓 방백들을 가리킵니다.
왕은 어리석게도 술에 흠뻑 취하여 방탕에 빠지고 간교한 속셈을 가진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 스스로 위험에 빠집니다.
4) 그들의 마음은 간교하여 화덕 같으니 아침에 피우는 불꽃같습니다(6절)
“[6] 그들이 가까이 올 때에 그들의 마음은 간교하여 화덕 같으니 그들의 분노는 밤새도록 자고 아침에 피우는 불꽃 같도다”
음모자들의 악한 마음이 과자 굽는 화덕을 예비하는 것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과자 만드는 자가 밤새도록 자고 아침에 피우는 불과 같이 뜨겁습니다. 이는 음모자들이 자기들의 탐욕과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악한 계교를 꾸미는 것을 암시합니다.
즉, 그들은 욕정과 분노가 섞인 교묘한 책략을 적당한 기회가 올 때까지 감추었다가 때가 되면 아침에 화덕을 달구는 것처럼 분명하게 드러낸다는 의미입니다.
5) 그들이 다 화덕 같이 뜨거워져서 그 재판장들을 삼킵니다(7절).
“[7] 그들이 다 화덕 같이 뜨거워져서 그 재판장들을 삼키며 그들의 왕들을 다 엎드러지게 하며 그들 중에는 내게 부르짖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그들이 다 화덕 같이 뜨거워져서 그 재판장들을 삼키며 그들의 왕들을 다 엎드러지게 하며. - 음모자들의 탐욕과 욕정은 화덕같이 뜨겁게 달구어져 이제 살인과 폭력을 계략대로 일삼습니다.
왕들을 엎드러지게 하는 이 장면은 아마 여로보암 2세 이후의 반역과 시해 사건을 암시하는 듯합니다.
당시에 스가랴는 살룸에 의해, 살룸은 므나헴에 의해, 므나헴의 아들 브가히야는 베가에 의해, 그리고 베가는 호세아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왕하 15:10,14,25,30).
이처럼 피와 폭력으로 물든 왕정 반란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질서와 무정부 상태 속에서 혼란과 타락을 경험하게 하였습니다.
한편, '재판장들'은 백성들을 통치하는 왕과 방백들을 가리킵니다(13:10).
그들 중에는 내게 부르짖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이와 같이 나라가 비참한 상황에 빠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왕과 방백들을 포함한 뭇 백성들은 전능자 여호와께 구원과 도움을 호소하지 않을 만큼 무지와 무감각 속에서 헤매고 있었습니다.
3. 외세를 의지하다(8~12절).
1) 뒤집지 않은 전병(8~10절)
(1) 뒤집지 않은 전병이로다(8절)
“[8] 에브라임이 여러 민족 가운데에 혼합되니 그는 곧 뒤집지 않은 전병이로다”
북왕국의 '혼합'은 이방 민족의 풍습과 사고 방식을 배운 것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이교도의 우상을 받아들여 하나님 대신에 섬기고,
또한 나라가 위험에 처했을 때 하나님이 아닌 이방 민족의 힘을 의지하여 그들과 정치적 동맹을 맺음으로 열방과 섞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열방과의 혼합은 거룩한 백성으로 선택받은 이스라엘의 참모습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 한 분과 언약을 맺고 그분을 섬기며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방 민족의 풍습을 따르고 우상을 숭배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였습니다.
그것은 뒤집지 않은 '전병'(우가, 떡 조각, 겔 4:12)과 같았습니다.
즉 한쪽 면은 새까맣게 타고 다른 쪽은 뒤집지 않아 밀가루 반죽 그대로 있는 떡 조각처럼 아무 쓸 데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이 없는-차지도 덥지도 않는-신앙은 가증할 뿐입니다.
이처럼 뒤집지 않은 전병과 같은 혼합주의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은 모순과 외식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원래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었으나(레 20:26), 열방과 섞여서 그 행위를 배우고 그 우상들을 섬김으로써 더럽혀졌던 것입니다(시 106:35-39).
(2) 백발이 무성할지라도 알지 못하는 도다(9절).
“[9] 이방인들이 그의 힘을 삼켰으나 알지 못하고 백발이 무성할지라도 알지 못하는도다”
이방인들이 그의 힘을 삼켰으나. - 이는 이방 나라에 의해 침입을 당하고 재산과 인명을 상실하여 국력이 파괴된 전쟁의 현실을 반영합니다.
이스라엘은 아람 왕 하사엘(왕하 10:32,33)과 벤하닷(왕하 13:7), 그리고 앗수르 왕 불(왕하 15:19) 곧 디글랏 빌레셀(왕하 15:29)의 공격으로 수많은 피해를 당하였습니다.
특히 므나헴은 앗수르의 침략을 모면하기 위해 은 일천 달란트의 조공을 바침으로써 국가 재정을 소모하였습니다(왕하 15:19,20).
백발이 무성할지라. - 이는 연륜의 경험보다는 힘의 노쇠함과 죽을 때가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즉, 이스라엘은 이방인의 침입으로 인해 과도한 재정을 소비하고 정치적 주권을 상실함으로써 곧 멸망당하게 될 것임을 시사합니다(왕하 17:3 참조).
알지 못하는도다. - 이스라엘은 자신의 나라가 주권을 빼앗기고 땅이 황폐됨으로써 멸망하리라는 것을 알지 못할 정도로 무지하였습니다.
더욱이 그 멸망의 원인과 치유책에 대해서는 전혀 알 지 못하였습니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국력의 쇠퇴와 멸망의 원인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이켰다면 그들은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멸망의 전조를 깨닫지 못하고 완전한 심판의 길로 치닫습니다.
(3) 이스라엘의 교만은 그 얼굴에 드러났습니다(10절).
“[10] 이스라엘의 교만은 그 얼굴에 드러났나니 그들이 이 모든 일을 당하여도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구하지 아니하도다”
이스라엘의 교만은 그 얼굴에 드러났나니 - 이에 대해서는 5:5 주석을 참조하라.
백성들의 무지와 교만은 온갖 재난과 황폐함을 겪으면서도 여호와께 돌이키지 않는 완고함으로 이어집니다.
그들은 오히려 국가의 불행과 재앙을 모면하기 위하여
이방 나라들과 동맹을 맺을 뿐 여호와를 의지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이스라엘의 무지와 완고함은 결국 북왕국의 파멸을 초래하는 원인이 됩니다.
이처럼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름을 받았으나 오히려 이방을 의지하고 범죄하는 자는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어리석은 비둘기 같이(11~12절)
(1) 에브라임은 어리석은 비둘기 같이 지혜가 없어서 애굽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앗수르로 가는도다(11절).
어리석은 비둘기 같이 지혜가 없어서. - 이스라엘의 지혜 없음이 어리석은 비둘기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비둘기의 어리석음은 먹이를 찾다가 쳐놓은 그물을 보지 못하거나 의심하지 않고서 그 안으로 곧장 날아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에브라임이 앗수르나 애굽에 도움을 청하러 갈 때 그것이 곧 자신을 해치는 행위임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Kimchi).
애굽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앗수르로 가는도다. - 이는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압박받을 당시 앗수르의 우호를 얻기 위해 노력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애굽으로부터 도움을 얻어 앗수르를 대적해보려고 시도한 것을 언급하는 것입니다(Hengstenberg, Keil).
이것은 호세아 왕이 앗수르에게 조공을 바치다가 그만두고,
애굽과 제휴한 사건을 암시합니다(왕하 17:3,4).
에브라임은 구원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을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앗수르나 애굽 모두 자신들을 해치려는 적이라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정도로 어리석었습니다.
(2) 나의 그물을 그 위에 쳐서 공중의 새처럼 떨어뜨리게 합니다(12절).
“[12] 그들이 갈 때에 내가 나의 그물을 그 위에 쳐서 공중의 새처럼 떨어뜨리고 전에 그 회중에 들려 준 대로 그들을 징계하리라”
이스라엘 방백들이 앗수르나 애굽 같은 이방 민족에게 구원을 요청하러 갈 때에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그물을 그들 위에 쳐서 공중의 새처럼 떨어뜨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유를 잃고 이방 민족에게 포로로 끌려갈 것임을 암시합니다(겔 12:13;17:20).
결국 이스라엘의 멸망은 이방 나라가 아니라,
그들을 징계하시는 여호와의 그물(욥19:6)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전에 그 회중에 들려 준 대로 그들을 징계하리라. - 이는 이스라엘 회중에게 선언되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으로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하여 선포되었습니다(레 26:14-46;신 28:15-68).
그것은 갑자기 임하는 덫과 같지 않고 각 시대마다 계속적으로 반복되었던 말씀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변명의 여지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그들은 율법을 무시하고 선지자들의 경고를 거역함으로써
여호와의 징계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4. 재앙을 선포하다(13~16절)
1) 내가 그들을 건져 주려 하나 그들이 나를 거슬러 거짓을 말합니다(13절)
“[13] 화 있을진저 그들이 나를 떠나 그릇 갔음이니라 패망할진저 그들이 내게 범죄하였음이니라 내가 그들을 건져 주려 하나 그들이 나를 거슬러 거짓을 말하고”
화 있을진저...범죄하였음이니라. - '화있을진저'에 해당하는 '오이'는 절
망적인 상태를 강하게 탄식하는 감탄사로서 임박한 징계를 표현합니다.
그리고 '패망할 진저'의 '쇼드'는 파멸을 예고하는 감탄사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두 개의 감탄문은 이스라엘 위에 반드시 내려질 확실한 파멸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파멸의 이유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범죄 하였기 때문입니다.
'떠나다'의 '나다드'는 '도망하다', '배회하다'등의 뜻으로 새가 보금자리를 벗어나 길을 잃고 정처 없이 헤매는 것을 의미합니다(사 16:2).
이는 곧 여호와를 반역하고 이방 민족의 틈바구니에서 구원을 얻어보려는 북왕국의 어리석음을 말합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언약을 파기하는 중대한 범죄 행위였습니다(8:1).
내가 그들을 건져 주려 하나 - '그들을 구속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나를 거슬러 거짓을 말하고. - 이는 백성들이 여호와의 구속을 믿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분의 본질적인 신성과 능력을 부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그들은 여호와께 도움을 구하기는 커녕 이방 신들에게 분향함으로써 거짓을 행하였습니다(렘 44:8).
더욱이 여호와는 자기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다는 생각까지 하였습니다(렘 14:9).
2) 성심으로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며 나를 거역합니다(7:14절)
“[14] 성심으로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며 오직 침상에서 슬피 부르짖으며 곡식과 새 포도주로 말미암아 모이며 나를 거역하는도다”
성심으로...부르짖으며. - 그들은 혹 입술로는 여호와를 불렀을지 모르나 마음으로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인간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었으며,
그것마저도 진실이 없는 헛된 마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들은 진정한 구원을 위하여 여호와를 부르지 않았습니다(사 29:13).
다만 침상에서 슬피 부르짖을 뿐이었습니다.
그것을 구원을 위한 부르짖음(자아크)이 아니라, 자기들에게 닥친 불행과 재난 속에서 낙심 가운데 슬퍼하며 울부짖는 것(얄랄)에 불과하였습니다.
이러한 부르짖음은 신앙의 증거가 되지 않으며 단지 불신앙과 절망의 표현일 뿐입니다(J.Given).
곡식과 새 포도주를 인하여 모이며. - '모이다'의 '구르'는 종종 '가다드' 곧 '베다'라는 의미로 취해져 왔습니다.
이것은 주로 몸에 상처를 내는 자해 행위와 연관되었습니다.
즉 곡식과 포도주를 위하여 자기의 살을 베는 것(They gash them selves, LXX, RSV, JB, NEB)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에서 엄격히 금지한 행위로서(레 19:28) 우상 종교의 타락한 의식이었습니다(렘 41:5;47:5).
많은 학자들은 이 견해를 지지하고 있습니다(Cheyne, Smith).
만일 이 견해가 옳다면 본 구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종교적으로 우상 숭배에 흠뻑 빠져 있음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단순히 그들이 모이는(they assemble themselves, KJV)것으로 해석하는 학자들도 많습니다.
즉, 그들의 모임의 목적이 반역하기 위하여(Rashi),
먹고 마시기 위하여(Keil),
또는 성읍으로 입하된 밀과 포도주를 사기 위하여(Kimchi),
아니면 우상에게 행진하기 위하여(Henderson, Rosenmuller)등 여러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어쨌든 본 구절은 곡식과 포도주, 곧 물질적인 것에 대한 탐욕으로 인해 백성들이 모여서 싸우는 모습을 상기시킵니다.
그들은 여호와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배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의 흥분된 모임은 단지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나를 거역하는도다 -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사는 모두 여호와를 떠나고(수르) 그를 반역하는(사라르)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파멸과 죽음의 심판뿐입니다(신 32:41,42).
3) 내가 그들 팔을 연습시켜 힘 있게 하였으나 그들은 내게 대하여 악을
꾀하는 도다(15절)
내가 그들 팔을 연습시켜 힘 있게 하였으나. - '연습시키다'의 '야사르'는 '징계하다','벌하다','교훈하다' 등의 뜻으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여러 가지 시험과 징계로써 가르치셨음을 뜻합니다.
여호와는 저희 팔을 연습시킴으로써 팔의 힘이 어디서, 어떻게 오는 것인가를 교훈하셨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힘을 부여하시고 적과 싸워 이기도록 하셨습니다.
이는 과거에 이스라엘의 군사적인 성공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왕하 14:25-28).
이처럼 여호와께서는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며 손가락을 가르쳐 치게 하신다'(시 18:34;144:1).
그들은 내게 대하여 악을 꾀하는 도다. -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여호와께 대하여 악을 꾀합니다.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를 세워 경배할 뿐만 아니라(L.Wood), 애굽과 앗수르에게 도움을 요청함으로써 여호와를 반역합니다(W.Harper).
그것은 이미 계획된 음모와 같이 시행되기 때문에 더욱 악한 것이었습니다.
4) 그들은 돌아오나 높으신 자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니 속이는 활과 같습니다(16절).
“[16] 그들은 돌아오나 높으신 자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니 속이는 활과 같으며 그들의 지도자들은 그 혀의 거친 말로 말미암아 칼에 엎드러지리니 이것이 애굽 땅에서 조롱거리가 되리라”
그들은 돌아오나 높으신 자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니. - 본 구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도리어 바알과 같이 허무한 것으로 돌아섰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속이는 활과 같으며 - 이는 과녁에서 빗나가는 화살을 가리키는 것으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율법에서 벗어나 거짓 우상과 이방 민족을 의지하는 상태를 비유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신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시 78:57).
그들의 지도자들은 그 혀의 거친 말로 말미암아 칼에 엎드러지리. - 간사한 방백들은 백성들을 유혹하고 이방 민족에게 아첨과 거짓을 말하지만 곧 그들의 칼에 쓰러질 것입니다.
'거친 말'의 '자암'은 원래 '분노', '진노' 등을 뜻하나, 여기서는 저주와 관련된 폭력적인 언어나 도전 행위를 의미합니다.
즉, 그들은 이방 민족에게 동맹을 청하기 위해 자신의 나라와 자신들의 신이신 여호와를 비난하며 저주한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그들은 오히려 이방인의 칼에 멸망하게 됩니다.
애굽 땅에서 조롱거리가 되리라. - 이는 그들이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애굽인들의 칼에 망하게 되기 때문은 아니다(Keil).
실제로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합니다(B.C. 722).
따라서 이것은 그들이 애굽을 믿고 애굽으로 도망하여 도움을 요청할 때에 그곳에서 오히려 애굽의 조롱거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어리석음을 단적으로 증명해 줍니다.
하나님을 반역하고 앗수르와 애굽에게 구원을 바랐던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그물에 파멸 당할 뿐만 아니라, 혹시나 의지했던 애굽에서도 그들의 조롱거리가 됨으로써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만천하에 드러냅니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이 고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병은 더 드러나고 증상은 더욱 악화됩니다(1,2절).
그리고도 이스라엘은 ‘치료’를 거부한 채 ‘치부’를 감추려고만 합니다.
다가오시는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더 멀리 도망갑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심판자가 아니라 구원자요, 진심으로 회개하면 그분이 용서 못하실 죄가 없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나와 하나님에 대해 하나님보다 내가 더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교만이고 무지인지 잊지 맙시다.
2)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은 반역에 반역, 모반에 모반을 거듭하며 큰 혼란을 겪습니다(3~7절).
‘달궈진 화덕처럼’앞에서는 충성을 맹세하면서 뒤로는 배신과 음모가 끊이지 않습니다.
음모자들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묻는 자도 없고, 인애와 정의가 사라진 전쟁터 같은 상황 때문에 부르짖는 자도 없습니다.
타인의 희생을 밟고 얻은 지위나 부요는 ‘성공’이 아니라 ‘불의’입니다.
그리고 불의가 제때 심판을 당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들키지 않은 죄라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아직 집행되지 않은, 유예된 심판일 뿐입니다.
3) 열강을 의지하여 국력 신장을 도모한 이스라엘의 시도는 실패로 끝납니다(8~12절).
거룩한 나라를 포기하고 거대한 나라를 꿈꾸더니 ‘뒤집지 않은 전병’처럼 나라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도 선민이라는 지위만은 영향을 받지 않으리라 여겼을 것입니다.
동맹이 가져다준 비극적인 결과도, 혹독한 대가도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이제 저울질하는 삶을 그만두고, 모든 것을 잃고서야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어리석은 선택을 되풀이하지 맙시다.
4) ‘속이는 활’처럼 하나님께로 돌아가지도 않더니 이제는 건져주시려는 그분의 손길마저 뿌리칩니다(13~16절).
자기를 방어하고 변호하며 거짓과 거역으로 일관합니다.
하나님을 바알처럼 믿고 ‘하나님의 부재’보다 ‘풍요의 부재’를 더 두려워 합니다.
그들은 하지 말라고 한 일을 계속하면서도 멸망 아닌 다른 길이 기다릴 거라는 헛된 기대를 품고 괜찮을 거라고 자신을 끊임없이 설득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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