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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아모스5장18~27절
제목 : 잘못된 환상, 잘못된 예배
어제는 아모스가 이스라엘을 향한 애가를 부르면서도 ‘하나님을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이스라엘이 살 수 있는 방법을 언급하고, 이스라엘에 대한 잘 못된 신앙을 버리고 선을 구하고 선을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잘못된 환상과 잘못된 예배”에 대하여 묵상하고자 합니다.
잘못된 신학은 잘못된 신앙을 낳습니다.
아모스는 여호와의 날에 대한 이스라엘의 잘못된 환상을 깨뜨리고,
정의와 공의가 배제된 예배의 문제점을 지적합니다.
1. 여호와의 날에 대한 오해(18~20절)
1) 여호와의 날은 어둠이요 빛이 아니라고 합니다(18절).
“[18]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냐 그 날은 어둠이요 빛이 아니라”
본절을 통해 아모스 당시에 유행했던 신학 사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날'은 선지자들에 의해 자주선포된 종말론적 개념입니다.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모든 대적을 물리치고, 절대적인 주권을 발휘하여,
세상을 통치하시며 심판하실 것임을 복합적으로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분명히 여호와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날이 오면 여호와께서 자기들을 위해 모든 원수를 물리치시고,
자기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우실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모스는 이러한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 놓습니다.
즉, '여호와의 날'은 어두움과 절망의 날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포는 여호와의 날을 유일한 도피처로 생각하고 있던 자들에게
더 큰 위험을 예상하게 하고, 절망을 안겨다 주었을 것입니다.
2) 여호와의 날에는 전혀 예상치 못한 현상이 나타날 것입니다(19절).
“[19]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은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
본절은 앞 구절을 부연 설명하는 것으로 여호와의 날에는 전혀 예상치 못한 현상이 나타날 것임을 비유로 설명합니다.
여호와의 날에 대해 매우 안일하게 생각하다가 급기야 돌이킬 수 없는 형편에 빠지고 말 것이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춥니다.
3) 아모스의 선포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어두움의 절망으로 잠식되고 맙니다(20절).
“[20] 여호와의 날은 빛 없는 어둠이 아니며 빛남 없는 캄캄함이 아니냐”
반어적 의문법을 사용하여 18절 하반절의 내용을 반복합니다.
여기서는 특별히 여호와의 날이 어둡다는 사실에 집중합니다.
이제껏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날을 소망하며 살았지만,
아모스의 선포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어두움의 절망으로 잠식되고 맙니다.
2. 형식적인 예배에 대한 경고(21~24절)
1) 참 신앙을 흉내 내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21절).
“[21]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앞 구절에서는 추상적인 표현을 사용한 반면,
본절 부터는 매우 구체적인 사례를 들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합니다.
'너희 절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게이켐'은 보통 이스라엘의 3대절기를 가리킵니다(출 23:14,17; 34:23; 신 16:16,17).
*이스라엘의 3대 절기인 무교절, 오순절, 장막절(18,22절;23:14-17)의 때를 말합니다.
(1) 무교절 (유월절), (2) 칠칠절 (맥추절, 오순절),(3) 수장절 (초막절, 장막절).
*출23:14,17 “[14]너는 매년 세 번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15]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아빕월의 정한 때에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이는 그 달에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빈 손으로 내 앞에 나오지 말지니라[16]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말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17]네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께 보일지니라”
모세 율법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진 절기를 미워하신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선을 추구하면 공의를 세우는 일이지(14,15절),
그럴 듯한 종교적인 행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 1:16,17; 66:2-4; 렘 6:19,20; 7:1-15, 21-23; 호 6:6; 미 6:6-8).
*사1:16,17 “[16]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17]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18]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19]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20]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지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사66:2~4 “[2]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3]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이 하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이 하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이 하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행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4]나 또한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듣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며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라 하시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중요하게 생각하던 절기를
악과 버금가는 것으로 평가합니다.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 율법에 기록된 의식들을 아무리 판에 박힌 듯이 문자적으로 정확하게 준수했더라도, 그런 노력은 무위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종교 행사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겸손함을 가지고 있었다기보다는
참신앙을 흉내내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열심히 의식을 지키던 행위는
도리어 불순종을 나타내는 행위였던 것입니다.
2)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받지 아니할 것입니다(22절).
“[22]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번제'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올로트'는 완전히 태워서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그리고 '소제'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민호테이켐'은 일반적으로 하나님께 선물로 바치는 제물을 가리키는 것입니다(창 4:3-5; 민 16:15; 삼상 26:19).
특별히 여기서는 '번제'와 병행적으로 사용되어 번제물에 첨가하여 드리는 곡식 제물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번제'와 '소제'는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총체적인 제물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화목제'(쉘렘)를 여호와께 드린 후에는 그 제물의 일부를 제물을 바친 자와 그 가족, 그리고 친구들이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화목제가 살진 송아지로 드려진 것은 그만큼 그들이 풍성한 음식으로 화목을 추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완벽하게 제사 의식은 행했지만, 제사의 참된 정신을 구현하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 곧 내적이고 본질적인 것이지,
외형적이고 가식적인 것이 아닙니다(시 51:16,17).
*시51:16,17 “[16]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17]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3) 노랫소리와 비파 소리도 듣지 않겠다고 하십니다(23절).
“[23]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 솔로몬 성전 건축 이후에 희생 제물과 더불어 찬양대의 찬양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일부가 되었습니다(대상 16:41,42; 23:5; 25:1ff).
그들은 나팔이나 제금 등의 악기도 사용하였습니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 '비파'는 일련의 예배 의식에 사용되는 중요한 악기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6:5;삼상10:5;시71:22;사 14:11).
당시 이스라엘이 겉으로 화려한 예배를 많이 치르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실속이 없고,
아무런 가치가 없었으므로 결국 이를 그만두라고 명하십니다.
이처럼 아무리 멋진 예술로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해도,
본질이 없는 찬양은 결코 용납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마음과 영이 담겨 있는 찬양을 원하십니다.
4)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24절).
“[24]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본절에 의하면, 백성들의 잘못된 예배는 공의와 정의의 결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공의'와 '정의'는 하나님의 심판을 가리키기도 하지만(사 10:22),
아모스는 인간 사회에 구현되어야 할 원리로 보았습니다(7,15절; 6:12).
*5:7,15 “[7]정의를 쓴 쑥으로 바꾸며 공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15]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정의를 세울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불쌍히 여기시리라”
즉, 사회 질서와 관계있는 것으로 율법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이 사회구조 속에서 구현되고 정직하게 이웃을 대할 때에야 비로소 그 예배가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것으로 인정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편, '흐르게 할지어다'는 굽이치는 강물처럼 격렬하게 흐르게 하라는 명령형입니다(BDB).
그러므로 공의와 정의가 적극적이고도 계속적으로 흘러야만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제사가 의미있고 가치 있음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예배는 거룩하게 드리는 것 같지만 세상에 나가 삶은 엉망인 삶을 봅니다. 삶도 거룩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3. 예고된 심판(25~27절)
1) 이스라엘 족속들은 완전한 섬김의 태도를 취하지 못했습니다(25절).
“[25]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희생과 소제물을 내게 드렸느냐”
'사십 년 동안'이라는 표현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후에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광야에 있었던 40여 년의 기간을 말합니다.
이 기간 동안 그들은 광야에 있었지만, 부지런히 하나님께 제물을 바쳤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민 18:8-10).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킨 목적도 바로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출 3:18; 8:27).
*출3:18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사흘길쯤 광야로 가도록 허락하소서 하라”출8:27 “우리가 사흘길쯤 광야로 들어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되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대로 하려 하나이다”
하지만 반어적이고도 의아해하는 듯한 의문문을 사용하여 그들의 섬김이 과연 쓸모있었는지 되묻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항상 인도하셨지만, 이스라엘은 줄곧 배도의 길을 갔었고, 완전한 섬김의 태도를 취하지 못했습니다.
2) 너희 우상들과 너희가 너희를 위하여 만든 신들의 별 형상을 지고 가리라(26절).
“[26] 너희가 너희 왕 식굿과 기윤과 너희 우상들과 너희가 너희를 위하여 만든 신들의 별 형상을 지고 가리라”
본절이 개역 성경에서는 미래의 예언으로 간주되었지만, 과거에 있었던 이스라엘의 타락상으로 보기도 하고(KJV,NASB),
이스라엘의 현재 상태로 보기도 합니다(JB.NEB).
이스라엘 백성이 비록 여호와께 희생을 드렸지만,
불순종으로 하나님께 대한 제사를 소홀히 함으로,
우상 숭배로 기울어지고 말았던 사실을 지적합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스데반의 설교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하늘의 군대를 섬겼다고 합니다.
이 하늘의 군대가 별의 신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면, 그들이 섬기던 이런 유의 우상이 당시 메소포타미아에서 유입되었을 것입니다(행 7:42,43).
*행7:42,43 “[42]하나님이 외면하사 그들을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 두셨으니 이는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 바 이스라엘의 집이여 너희가 광야에서 사십 년간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43]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으로 옮기리라 함과 같으니라”
2) 너희를 다메섹 밖으로 사로잡혀 가게 하리라(27절)
“[27] 내가 너희를 다메섹 밖으로 사로잡혀 가게 하리라 그의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이라 불리우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사로 잡혀 가게 하리라'. 이는 매우 강한 어투로 이스라엘 백성이 필연코 잡혀가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한편,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다메섹 밖으로'라는 표현 대신 '바벧론 밖에'라고 인용하였습니다(행 7:4).
아마도 스데반은 아브라함의 조상들이 그의 고향 바벧론(갈대아 지방)에서 우상을 섬겼던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아브라함의 신앙이나 언약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과거로 돌아갔으며 이방인과 같은 취급을 당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부각 시키는 것으로 보입니다(E.B.Pusey).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섬기는 본질에 대해 망각하고 급기야 그토록 멸시하던 이방인 취급을 당하게 될 것을 예고받습니다.
이는 만군의 하나님이라 일컫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에 대해서는 4:13의 주석을 참조하라.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여호와의 날’에 대한 잘못된 희망과 환상을 깨뜨리십니다(18~20절)
아모스는 아스라엘에게 그날은 구원의 빛이 아니라, 심판의 암혹이 임하는 날이라고 선포합니다.
사자를 피해 도망가다가 예기치 않게 곰을 만나거나, 집안에서 방심하다 뱀에 물린 사람처럼 여호와의 날을 자신들을 위한 구원의 날로 확신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화가 임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편에 서서 대적들을 물리치시는 ‘여호와 날’이란 애초에 잘못된 신학적 신념일 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은 죄도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당연한 구원이란 없습니다.
내가 듣고 싶은 대로 말씀을 해석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제대로 들을 수 없습니다.
구원도 축복도 너무 당연하게 여기는 경향이 내게는 없습니까?
2) 사랑과 공의를 잃어버린 자들의 예배를 받지 않으십니다(21~24절).
그들이 지키는 절기와 모이는 성화를 미워하고 멸시하십니다.
부정한 손으로 드리는 그들의 제물과 기도와 찬양을 아무리 간절하게 많이 드리더라도 받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예배의 본질과 정신이 사라진 화려한 예배당과 웅장한 찬양에 감동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먼저 죄에서 돌아서서 깨끗해지고 율법의 요구에 따라 정의를 구하고 약자들을 선재하고 그들 편에 설 때 주님은 우리 예배를 받으실 것입니다.
예배당 문만 드나들 뿐 주님의 뜻을 찿고 구하지 않는 이스라엘의 모습이 오늘 우리 신앙의 현주소는 아닌지요?
3) 광야 시절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드릴 제물이 없었지만 하나님은 이것을 전혀 문제 삼지 않으셨습니다(25~27절).
하지만 풍요의 땅 가난안에서는, 제물은 넘쳤지만 언약 의무에 소흘한 채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습니다.
풍요와 번영 때문에, 그 오랜 사랑을 잊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변절한 이스라엘은 결국 그들이 섬긴 우상과 함께 멸망할 것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언제든 도움이 안 되면 폐기처분 할 수 있는 우상 중 하나였을 뿐입니다.
숱한 예배와 예물은 드려도 인생의 주인이 바뀌지 않았다면 나는 아직 신자도, 예배자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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