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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마가복음3장1~19절
제목 : 생명을 구하시는 예수님
오늘 본문은 어제 이어 안식일 논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주시(注視)에도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십니다.
적대감이 커짐과 동시에 예수님께서 하신 큰일을 듣고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세워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함께 감당하게 하십니다.
1.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시다(1~6절)
1) 한쪽 손 마른 사람이 회당에 있었습니다(1절)
“[1]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본 구절은 1:21, 39에서와 같이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가셨음을 평범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어떤 안식일에 만난 특별한 사건이 이야기되고 있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눅 4:16 주석 참조).
한 편 손 마른 사람이 누가는 힘의 상징인 그의 오른 손이 마른 것이라 표현함으로써(눅 6:6) 그 처지가 절박했던 사실을 더욱 세밀히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혹자는 이것을 중풍병이라 보기도 합니다(Donald W. Burdick).
어쨌든 말라비틀어진 이 손은 결국 그의 삶의 위축과 장애 상태가 얼마나 심각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외경 히브리 복음서(Hebraerevangelium)에는 이 병자가 미장이로서 손으로 생계를 꾸려 나가는 사람이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보자 자신이 수치스럽게 구걸하지 않도록 자신의 병을 치료해 줄 것을 호소했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병자의 처지가 그렇게 다급한것으로묘사 되있지는 않습니다.
단지 마가는 본문을 통해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안식일 개념이 과연 어떠
한 것인가에 대해서 더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을 뿐입니다.
2) 사람들이 예수님을 고발하려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 가 주시하고 있습니다(2절)
“[2]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마가는 여기에서 예수님을 고발하려하는 자를 “사람들이”라고 막연하게 말하고 있지만 평행 구절인 눅6:7에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다고 합니다.
지난 번 안식일 논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예수님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분의 제자들에게 있었으므로 큰 충돌이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가 안식일 규정을 직접 파기하기 직전 상황에 있었으므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온 촉각을 곤두세우고 예수님의 행동 거지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마가는 예수의 허물을 찾으려고 눈에 빛을 내고 있던 그들의 목적 의식에 대해 '송사하려 하여'라는 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마12:10;눅6:7).
이는 결국 그 적대자들이 예수님을 고발하기로 이미 작정하고 있었음을보여 줍니다.
사실 그 당시 회당은 지방 법정 역할까지도 수행하던 곳이었다는 점에서(마12:10) 예수님의 회당 안(內) 치유 사역은 어쩌면 상당히 불리한 일이었습니다.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사람들이 예수에 대한 고소거리를 찾기 위해 계속적으로 예수 주변에 머물면서 적의에 찬 눈으로 면밀(綿密)히 바라보고 있었음을 나타내 줍니다(눅 14:1;20:20).
사실 당시 안식일 규정에는 매우 세밀한 조항까지 만들어 가며 안식일 준수를 강조하고 있던 터였습니다.
한 가지 실례로써 어떤 사람 위에 집이 무너질 경우 생명이 위협을 받으므
로 구조의 대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 밑에 깔린 자가 이미 죽은 것이 판명되면 안식일이 끝날 때까지 그 구조 작업이 연기되어야만 했을 정도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 '손 마른 자'는 긴급한 생명 구조가 필요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예수의 치유 사역은 부당한 것으로 정죄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 시는가 엿보거늘'이란 말씀으로 보아 바리새인들이 예수께서 기적을 베푸실 능력을 가 지셨음을 깨닫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들의 관심은 '할 수 있는가'에 있지 않고 '할 것인가'에 있었습니다.
3) 예수님께서는 손 마른 사람을 한 가운데 일어서라 하십니다(3절)
“[3]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예수님께서는 마치 적대자들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이 병자에게
'한가운데 일어서라'고 요구하십니다.
이 요구는 안식일의 참의미를 주위에 앉은 모든 사람들에게 깨우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실로 안식일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권능에 찬 창조 사역을 기리고,
또 참 평안과 안식을 누리는 거룩한 날입니다(창 2:2;출 16:23;20:8-11).
예수님은 당신의 적대자들이 가만히 엿보던 비겁함과는 대조적으로 그 손 마른 자를 일으켜서 한 가운데 나가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초월적인 권능을 공개적으로 제시하심으로써
당신이야말로 참된 의원이요 오실 메시야이심을 강력히 내비치셨습니다.
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안식일에 선과 악,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중 어느 것이 옳으냐고 질문합니다(4절)
“[4]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이 같은 예수님의 질문은 근본적으로 인간에게 무엇이 요청되는가에 대한 필요성의 원칙에 입각한 것입니다(Donald W. Burdick).
실로 인간에게 궁극적으로 유익을 제공하고 생명을 보존하게 하는 일은
그것이 곧 최상의 선(Summum bonum)이요,
타인의 필요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더 나아가 법조문에 얽매여 자신의 무관심을 합리화하는 것은 그것이 곧 악(惡)인 것입니다.
실로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돕는 선한 행위를 생명을 구하는 것과 동일하게 여기심으로써안식일에 그러한 일들이 허락될 수 있다고 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생명을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악하다고 간주하심으로써 적대자들의 견해를 훨씬 넘어서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같은 노력은 왜곡된 진리를 바로잡고,
인생들에게 궁극적인 구원을 허락하시기 위한 신적(神的)인 사랑의 행위인 것입니다.
저희가 잠잠하거늘 이는 예수님의 적대자들이 아무런 답변을 하지 못한 채 계속 머뭇거리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욥 5:16;시 63:11;행 4:14;딛 2:8;벧전 2:15).
실로 그들은 자신들이 지닌 형식주의적 율법관에도 자신이 없었을 뿐 아니라 참 진리에 대해서도 자신이 없는 무기력한 종교인들이었던 것입니다.
5) 예수님께서는 이 완고함을 목도하시고 “탄식하사” 노하시고 그 손을 고쳐 주었습니다(5절)
“[5]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그들의 마음의 완악(頑惡)함을 탄식하사 - 여기서 '완악함'(포로세이)이란
예수님께서는 이 완고함을 목도하시고 “탄식”하셨습니다.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 여기 '노하심으로'란 마치 이글거리는 눈으로 보듯이 매우 분노하신 상태를 암시합니다.
마가는 전혀 숨김없이 예수님의 감정을 그대로 표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10:14).
이 '분노'는 곧 부정과 부패에 대한 정의의 분노 곧 의분(義憤)으로서 이것은 인간의 도덕적 기본 덕목이요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과 조화를 이룹니다.
실로 예수님은 당신의 적대자들이 지닌 그릇된 마음, 죄악에 가득 찬 눈길에 분노를 터뜨리셨지만 그 영혼에 대해서는 한없는 사랑으로 근심해 주셨 던 것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의 분노의 대상이 주위 많은 사람들이었음을 간접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시고자 하셨습니다(4절).
그리하여 병자에게 명령하셨고 그 병자는 즉시 순종함으로써 완전한 회복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오직 '말씀'으로 그 능력을 행사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곧 당신께서 친히 태초에 온 우주를 창조하실 때의 그 능력과 동일한 능력을 지닌 것입니다(요1:1-3).
따라서 예수님의 그 말씀 한마디는 그 어떤 비뚤어지고 파괴된 것이라 할지라도 능히 원래의 모습으로 온전케 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능력은 예수님의 명령에 오직 순종으로,
오직 신앙으로 대답하는 자에게만 창조 원형으로의 완전함을 제공합니다.
6)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 하였습니다(6절)
“[6]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병고침의 결과는 놀람도 환호도 아니고 오히려 적대감을 증대시켰을 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제 헤롯당과 함께 손을 잡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의논했습니다.
헤롯당은 종교적 집단이기보다 해롯가문에 정치적으로 봉사하는 정치적 당파였습니다.
즉 헤롯당은갈릴리를 관할하던 헤롯 안디바를 중심으로 하여 헤롯 왕가의 부흥을 꾀한 집단으로서 사회, 종교적 기존 질서와 법률의 고수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Grant, Taylor).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로마 제국의 지배에 긍정적 입장을 취하고 있었던 소위 민족적으로 비애국적 집단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철저한 애국주의자들인 바리새인들은 외세를 철저히 배격하는
보수주의자들인 관계로, 헤롯당과는 평소에도 원수처럼 지내던 사이로서 양자간의 동맹(同盟)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놀라웁게도 자신들의 기득권과 기존 질서를 와해시킬 위험성이 다분한 예수 제거에 있어서만은 생각이 일치함으로써 참으로 어색한 동맹 관계를 맺게 된 것입니다.
특히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갈릴리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갈릴리를 관할하던 헤롯 안디바 추종자들과의 제휴를 필연적인 것으로 생각했던 듯합니다.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 바리새인들은 조금 전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것'에 대한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을 안식일 파기자(破棄者)로 단죄하고(출 31:14)'어떻게 죽일꼬'하는 사악한 답변을 세속적 집단(헤롯당)과 함께 진지하게 의논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종교와 정치가 결합할 때 생겨나는 필연적인 발상입니다.
예수님의 적대 세력은 노골적으로 예수님을 처형키 위한 계획에 박차를 가하게 됩니다.
2. 많은 사람이 몰려들다(7~12절)
1)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예수님과 제자들을 따랐습니다(7절)
“[7]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따르며”
왜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로 물러가셨는가?
마가는 그 이유에 대하여 특별히 언급하고 있지 않으나 마12:15에 헬라어
'그누스'('아시고', 즉 예수께서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음모에 대하여 아시고)라는 말이 사용된 것을 볼 때 예수님께서 계셨던 곳(가버나움)에서 떠나신 이유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자신을 잡아 죽이기로 결정한 것을 아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즉 죽음의 순간이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바다 어느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셨던 것입니다(6:31, 46;7:24, 31;9:2;10:1;14:32).
그러나 거기서 예수님께서는 또 다시 무리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2) 예수님의 하신 큰 일을 듣고 온 사방에 모여 들었습니다(8절)
“[8]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 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많은 무리가 그가 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오는지라”
예수님께서 몰려들었던 무리들은 가버나움 근방에서뿐 아니라
남쪽 지방(예루살렘, 이두매), 동쪽 지방(요단강 건너편),
북서쪽 지방(두로와 시돈) 등 온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마가가 여러 지방 이름을 여기서 언급 한 것은
팔레스틴 전역에서 무리들이 예수께 나아왔음을 암시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에는 예수님께서 직접 활동하시지 않은 유일한 지역이 언급되어 있는데, 이두매 곧 헤브론 남쪽 지역입니다.
그의 하신 큰 일을 듣고 - 실로 예수님께 모여든 무리들은 예수님의 신비한 사역을 수없이 들어왔으며 그 소문으로 인해 마음이 움직였던 것입니다.
복음의 소문은 인습의 장벽과 지역의 장벽을 넘고 또 인간의 의지를 움직이는 능력이 있습니다(롬 10:15-18;히4:12).
한편 이때 예수님께 모여든 무리들은 어느 한정된 시점에 급히 모여 들었다기보다 오히려 꾸준히 오래도록 지속적으로 모여들었다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3) 예수님께서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작은 배를 대기하도록 하였습니다(9절)
“[9] 예수께서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작은 배를 대기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니”
오직 마가만이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신 이유를 상세하게설명하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신 목적은 무리들에게 밀리는 것을 면키 위함이었습니다.
실로 예수님을 향하여 육신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아우성치는 무리들, 그들은 아마도 예수님께 접촉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회복될 것으로만 여겼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같이 1차원적인 무리들의 심성에도 구애치 않으시고,
당신의 복음을전하셨을 뿐 아니라 그들의 필요도 만족시켜 주셨습니다(마 4:23).
즉 예수님은 무리들의 생각과 기대를 초월하여 역사하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한편 마가는 예수님께서 무리를 가르치기 위하여 본문과 같은 이러한 방법을 취하신 것을 말하지 않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주 이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마 14:22;요 6:15-25).
작은 배를 대기하도록 - 먼저 '작은 배'란 몇 명밖에 탈 수 없는 조그마한 보트를 가리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필요로 하실 때, 언제든지 움직일 준비를 갖추고 그 준비한 배를 해변 가까이 놓아두었을 것입니다.
특별히 그들이 어부 출신이었다는 사실에서 그들의 능수능란한 준비 작업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4)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님을 만지고자 하여 몰려 왔습니다(10절)
“[10]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몰려왔음이더라”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 당시에 무리들은 예수님을 만지는 행위를 통하여 병고침을 받으려고 너도나도 그를 만지고자 밀어댔습니다.
마치 그 무리들은 예수님을 기적을 행하는 자라고 밖에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은혜를 베풀어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마 9:20-22;14:34-36;눅 6:19).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 예수님께서는 그 병의 원인이 어떠하든 간에 그 모든 소원하는 자들에게 치유의 용서를 베푸셨습니다.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님을 만지고자 몰려 들었습니다.
5) 귀신들은 예수가 누구인지 알았습니다(11절)
“[11]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여기서 예수님은 또다시 귀신들린 자들과 마주칩니다(1:23, 24, 34).
그 무리들은 몰랐다고 하더라도 귀신들은 예수가 누구인지 알았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1:1 주석 참조).
즉 예수님의 메시야성을 알고 소리친 귀신들의 외침은 '자신들을 해치지 말라는 쓸데없는 호소'(Wessel)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한편 귀신들이 예수님을 알아 보았다는 이 사실은 다음 두 가지 관점에서 중요합니다.
첫째, 당시 사람들은 아직 깨닫지 못하였어도 영적 존재인 귀신들이 예수를
알아 보았으니 예수는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1:24;마 8:29;눅 4:41;행 19:15).
둘째, 그러나 귀신들이 예수님을 알았다고 해서 그들이 구원받았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단의 수하(手下)로서 끊임없이 성도들과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장차 멸망의 심판을 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마 25:41;계 20:10).
6) 예수님이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십니다(12절)
“[12]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아직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 드러내야 할 때가 오지도 않았고, 귀신들이 자신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귀신들의 외침을 저지하였던 것입니다(1:43 주석 참조).
3. 열두 제자를 세우시다(13~19절)
1)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13절)
산에 오르사 - 누가는 이때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신 이유를 기도하려 오르셨다고 (눅 6:12) 하였습니다.
자기의 원하는 자들 -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외적 조건이나 그들각자의 열정적인 자원 의사에 따라 당신의 12제자를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오직 당신의 권위와 뜻과 계획에 따라 그들을 선택하여 부르신 것입니다.
이는 예정교리, 선택 교리의 근간이 되는 말씀으로서 하나님의 소명은 오로지 원하시는 그분의 의지에 따라 되어 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주권적인 소명에는 인간의 절대적이고 즉각적인 동의가 요청되기는 하나 그것은 부차적인 조건에 불과합니다.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 눅 6:12에는 제자들을 부르시기 전에 예수님께서 밤새도록 기도하셨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기도를 통해, 즉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해 해결하셨습니다(14:32).
한편 예수님의 부름에 대해 제자들은 어떤 주저 없이 즉각적으로 순응하였습니다(1:18, 20;2:14).
이제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기의 모든 관심과 소망을 접어두고 오직 예수님의 삶과 뜻을 절대 헌신의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2) 열 둘을 세워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하며 귀신을 내 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셨습니다(14,15절)
“[14]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15]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 '열 둘'이라는 숫자가 신학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특히 '열 둘'은 임의적인 숫자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것이 분명합니다(마 19:28;눅 22:30).
그런 점에서 그들 12명의 제자들은 새 이스라엘의 보좌에 오를 12족장과 같은 영광을 얻었음이 분명합니다(계 21:14, 15).
한편 마가는 이 선택된 제자들을 대개 '열 둘'이라 칭한데 비해
마태는 '열두 사도'(마10:2) 또는 '열두 제자'(마10:1;11:1;20:17)로 표현하였습니다.
여하튼 마가는 이 '열 둘'이라는 칭호를 통해 그들을 단순히 예수님을 좇는 무리들과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세우셨으니'(에포이에센)란 직역하면
'만드셨으니'로서 이를 근거로 본 구절을 '창조하셨으니'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즉 이 12제자 선택은 예수님의 구속사적 관점에서 새로운 역사적 실체의 탄생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입니다(Taylor, Grant).
물론 나름대로 의미있는 번역이기는 하지만 본 구절은 단순히 열 둘을
'임명하셨으니'로 번역하여 예수님께서 12제자를 공식적으로 임명하셨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
열 두 제자가 세워진 목적은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자기와 함께 있게하시고',
둘째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세째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목적이었습니다.
실로 그 열 두 제자들은 하나님의 아들과 가장 가까운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했습니다.
즉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살고 그와 대화하며 그에게 배워야 했습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대부분의 시간을 그의 제자들을 훈련시키는데 할애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훈련은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보냄을 받아야 했습니다(6:7).
즉 그들은 보냄 받은 자, 곧 '사도'(아포스톨로스)로서의 사명을 온전히 수행해야 했습니다.
또한 제자들의 사역은 복음을 전하며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이었습니다.
이 귀신 축출은 원래 예수님께서 지니신 권능으로서(1:26) 이제 사단의 왕국을 몰아내고 당신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부름받은 제자들에게 부여(附與)되고 있는 것입니다(마 10:8).
이렇듯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일과 귀신을 쫓는 일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구원은 사단과 그의 일당들을 멸하시고 당신과 구원받은 자들과의 다함없는 교제를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3) 열두 명의 제자를 세웁니다(16~19절).
“[16]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17]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18]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나인 시몬이며[19]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이 열 둘을 세우셨으니. 신약성경에서 제자들의 명단이 기록된 데는 본문 이외에 세 곳이 더 있습니다(마 10:2-4;눅 6:14-16;행 1:13).
여기에 나타나 있는 12제자의 이름들은 대부분 네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첫번째 부분은 베드로가 예외 없이 맨 앞에 등장하고 있으며,
두번째 부분에서는 빌립이,
세번째 부분에서는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가 다른 제자들 앞에 등장하고 마지막 부분에는 유다의 이름이 등장합니다(사도행전에는 그가 이미 자살한 것으로 묘사되어 그 이름이 생략됨).
한편 마가는 각자의 이름 앞에 접속사 '카이'('그리고')를 삽입하여 연결시킴으로써 이러한 네 부분의 구별에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인상입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마 10:2-4 주석 및 강해 그리고 본장 13-19절의 주제 강해를 참조하라).
(1)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베드로(반석)란 별명을 얻은 시몬이 맨 처음에 언급됩니다(마16:18).
여기서 '베드로'란 이름은 헬라명이며,
요1:42에 나오듯이 '게바'는 아람명으로서 그 의미는 '반석'입니다.
이는 그의 성품의 강직성(强直性)에서라기보다 교회사적 의미에서 그가 수행해 가야 할 사명과 연관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가의 복음서에는 어떤 점에서 시몬이 반석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았는지는 분명치 않았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도 베드로가 비록 굳건하지 못하고 연약한 인물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가 미래에 사역하게 될 교회에서 큰 일꾼으로 일할 수 있는 잠재력을 보았기 때문에 그러한 별명을 붙여 주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실로 그는 예수님은 생전에는 과격하고 또 비겁한 좌충 우돌형의 미성숙한 인격자에 불과했으나 예수님의 부활과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부터 초대 교회의 기초석으로서의 탁월한 사명을 완수한 반석같은 일꾼이었습니다(행 2:14).
한편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그의 역할을 두드러지게 강조하였습니다.
그의 역할은 첫 제자로 부름을 받은 데서 시작하여 무덤에서 천사의 위탁(委託)을 받는데까지 이릅니다(16:7).
한편 위에서 보듯이 그가 문자적으로 반석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친히 목격하고(고전 15:5) 그분에게서 사명을 새롭게 부여 받은 후(요 21장) 오순절 성령 강림을 체험하고서부터일 것입니다(행 2장).
어쨌든 그는 열 두 제자 가운데, 그리고 위에 서술한 그들의 과제(14, 15절)에 있어서 모범적인 위치를 점하게 됩니다.
(2) 우레의 아들-“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17]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요한보다 야고보가 항상 먼저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야고보가 요한의 형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야고보는 사도들 중에 제일 먼저 순교를 당했기 때문에(행 12:2) 그의 형제 요한보다 큰 업적을 이룰 수는 없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어부 세베대의 아들이었는데,
세베대는 사업이 번창하여 삯꾼들을 고용할 정도였으며(1:20),
그의 부인 또한 예수님의 사역을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마 27:55, 56;눅 8:3).
열 두 제자 중 오직 요한만이 십자가 곁에서 있을 수 있었던 것이나,
세배대의 가족이 대제사장의 집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요18:15, 16)은, 아마도 세배대의 집이 부유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살로메로 추정되는데(15:40;16:1),
예수님을 섬기는 그녀의 동기가 순수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마 20:20, 21).
한편, 이들이 얻은 이름은 '보아너게'라는 이름으로 헬라어로는 '보아네르게스'라고 하는데, 이것은 마가복음에만 나타나는 이들 형제의 별명입니다.
이 단어의 어근(語根)은 분명치 않으나 히브리어 '브네 레게쉬'('우뢰처럼 쉴새없이 시끄럽게 하는 아들들')에서 온 것 같습니다.
이 이름이 붙여지게 된 것은 분명하지 않지만 아마도 그들의 성급하고도 직선적인 성격 때문에(9:38;10:35-37;눅 9:54) 얻게 된 듯합니다.
(3)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나인 시몬이며(18절)
① 안드레 - '남자다운'이라는 의미를 가진 안드레는 베드로의 형제로서(요 1:40, 41) 갈릴리 바닷가의 벳새다 출신의 어부였다(1:16-18;마 4:18-18;요 1:44).
그는 세례 요한의 제자가 되었다가(요 1:35, 40)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즉시 그를 따르게 됩니다(마4:19, 20).
세례 요한을 따르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좇은 안드레의 행동은 세례 요한에
대한 배반이 아니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진리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앞서 증거하는 진리였기에 스승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진리에로의 발전이며 본래 추구하던 진리를 좇은 것이었습니다.
한편, 안드레가 베드로를 인도하고도 이름의 기록은 베드로가 항상 앞서는데(요 1:44), 그는 이에 대해 하등의 시기심이나 불만을 갖지 않았습니다.
안드레는 함께 동역하는 아량을 가진 형제애의 진수를 보여 주며 지극히 개인적이고 체험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② 빌립 - '말(馬)을 사랑하는 자'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빌립은 갈릴리 벳새다 출신(요1:44-51;12:21)으로 안드레와 나다나엘의 친구였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발견되어 제자에의 부르심을 받은 즉시로 그를 따르게 됩니다(요 1:43, 44).
그는 예수님을 만난 후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그를 주께로 인도합니다(요 1:45, 46).
그리고 그는12사도로 부름을 받은 후에 오병이어(요 6:8-13)의 기적에 앞서서 주께 시험을 받습니다(요 6:1-7).
그후 예루살렘 입성때 헬라인들을 예수께 인도하는 매개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요12:20-22).
또한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 아버지(하나님)를 보여 달라고 주께 요청하기도 했습니다(요 14:7-12).
전승에 의하면 히에라 폴리스에서 순교했다고 합니다.
③ 바돌로매 - '톨마이의 아들'(Son of Tolmai)이라는 뜻이며,
이 이름은 아버지의 이름을 딴 것이기 때문에 아마 개인적인 다른 이름이 따로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요 1:46에 등장한 나다나엘(Nathanael)과 동일 인물이 아닌가 하는데, 그럴만한 적절한 이유는
(1) 나다나엘은 12제자들과 깊은 연관성이 있기 때문이며(요 21:2),
(2) 빌립이 그를 찾아서 예수님께 인도했기 때문입니다(요 1:43-46).
(3) 공관 복음에서 빌립과 바돌로매는 사도들의 명단에 항상 함께 열거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의출생지가 역시 갈릴리의 가나(Cana)라는 것은 같은 결론을 뒷받침합니다.
만일 사실이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물'을 의미하는 나다나엘이란 이름은,
베드로를 지칭하는 시몬(Simon)이란 이름과 바요나(Bar-Jona)란 의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바돌로매와 깊은연관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교회의 한 전승에 따르면 그는 애굽, 인도, 아르메니아 등지에서 선교 사역을 펼치다가 끝내 순교했다고 전합니다.
④마태 - 그는 분명 레위와 이명 동인(異名同人)이로서(2:14) 마가는 이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다.
한편 마 10:3에서 마태는 사도들의 명단에 있는 자신의 이름 앞에 '세리'라는 형용어구를 덧붙입니다.
즉 그는 자기 스스로 자신이 옛날에 온 백성으로부터 비난받아 마땅한 죄인이었음을 결코 숨김없이 드러내 놓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용서 받은 죄인의 떳떳함이요, 일꾼 된 자의 진실과 겸손입니다.
한편 마태라는 말은 '여호와의 선물'이라는 의미의 '맛다디아'(Mattathias)의 준말로서, 헬라어로는 '데오도르'(Theodore)가 됩니다(Gesenius).
⑤ 도마 - 도마는 '디두모'(요 21:2)라고도 불리우는데,
디두모는 아람어로 '쌍둥이'를 의미합니다.
그는 그의 이름 때문에 알려지기도 했지만 또한 그의 용기(요11:16)나
그의 의미 깊은 고백(요 20:28)으로써 더 알려졌습니다.
실로 그는 의심하는 자의 대명사인 동시에(요 20:25), 예수님을 가장 합리적이고 진지하게 알기를 소원했던 이성적인 신앙인의 대명사이기도 합니다.
어떤 전승에 의하면 그는 인도에 선교사로 가서 일하다가 그곳에서 순교했다고 합니다.
⑥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구별하기 위해 흔히 '작은 야고보'로도 불리어졌습니다(15:40;마 27:56).
이는 아마도 세배대의 아들 곧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 보다 그가 늦게 부름 받았거나 나이가 연소하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일 것입니다.
한편 야고보의 아버지 알패오는 글로바(Cleophas)와 동일인인 것으로 추정되며(15:40;요 19:25), 그의 부인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사도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와 친 자매간으로 여겨집니다(Jerome).
⑦ 다대오 - 어떤 사본에는(Diatessaron Version) '렙바이오스'와
'다대오'가 함께 불려지고 있습니다(Origen).
이 다대오는 아마도 누가복음의 명단에 나와 있는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그의 본명이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눅 6:16;행1:13).
한편 '렙바이오스'와 '다대오'는 어휘상 유사성을 갖고 있습니다.
즉 '렙바이오스'는 '심장 깊은 곳', '다대오'는 '가슴'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이러한 이름은 아마 그를 배신자 유다와 구별하기 위해서 붙여진 것 같습니다.
⑧가나안인 시몬 - 시몬은 '열심당'(the Zealot)이라 불리어졌습니다.
이러한 별칭은 단지 그의 종교적인 열성을 묘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가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받기 전에 광적인 국수주의자 그룹인 셀롯당(열심당)의 일원임을 밝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욱 좋습니다.
열심당은 팔레스틴을 점령하고 있던 로마에 폭력으로 대항하여 싸웠던 유대인들의 애굽 집단이었습니다.
⑨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19절)
가룟 유다 - 유다의 성은 '가룟'(Iscariot)이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은 아마 '가룟(Karioth)이라 불리우는 지방에서 온 사람'을 의미하는 것일 것입니다.
가룟(Karioth) 지방은 헤브론에서 남쪽으로 약 3km 떨어져 있는 '케리옷 헤즈론'(Kerioth Hezron) 지방(수 15:25)이거나 모압 땅 케리옷(Kerioth) 지방과 동일시 될 수 있습니다(렘 48:24).
따라서 그는 12제자 중 유일하게 남쪽 출신의 제자였다고 보겠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성경에 나타나기 이전의 생애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알 수 없습니다.
성경에는 단지 제자들의 돈궤를 맡아 회계(會計)를 보고 베다니에서의 향유 사건을 시작으로 하여 예수님을 배반하고 자살하는 것으로만 유다의 생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 주께서 당신의 제자들로 선택하신 12명의 사람들은 교회 역사에 있어서 지대한 공헌을 했던 복음의 밑거름들이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4명은 어부였고,
또 한 명은 사람들의 미움을 사던 세리요,
또 한 사람은 과격한 독립 운동을 벌이던 열심당원이었습니다.
나머지 6명 제자들에 대해서는 사실상 아무것도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그 열 두 제자들은 모두 평범한 인물들이었습니다.
즉 그들 가운데는 설교가도, 성경에 대한 전문가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의 교회를 세우고 그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게 하였던 사람들이 바로 이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12 사도의 명단을 대할 때마다 그들의 위대성이나 탁월한
봉사에 주목하기에 앞서 무엇보다 그들을 사용하셔서 교회를 세우고 세계 복음화를 주도해 가시는 예수님의 초월적인 권능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반대자들의 살해 음모를 아시면서도 선을 행하는 일과 생명을 살리는 일을 멈추지 않으시는 분입니다(1~6절).
예수님은 늘 아는 대로, 믿는 대로 행하십니다.
사람들의 안식과 회복, 생명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십니다.
우리가 그 분의 제자라면 우리도 선을 행하고 생명을 살리는 일을 선택하고, 양심에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2) 바리새인과 헤롯당의 살해 음모가 있자, 잠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십니다(7~12절).
아직은 하나님의 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곳까지 몰려와 주님을 에워싸고 밀치자, 작은 배를 준비토록 하십니다.
효과적으로 가르치고, 질서 있게 병자들을 고치시기 위함입니다(4:1).
예수님은 나설 때와 물러설 때를 아시고, 일하심에 있어 지혜와 명철로 행하십니다.
메시야에 대한 군중들의 설익은 기대가 초래할 심각한 오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때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와 순전함을 구합니다.
3) 열두 명의 제자를 세우십니다(13~19절).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보내셔서 전도도 하고,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주십니다.
보잘것없고 약한 자들이지만, 곧 부활의 권세로 일하는 새 언약의 일꾼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복음의 일꾼으로 성장하는 일은 주님과 함께 동행하면서 주님을 배우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바리새인은 표적을 보고도 주님을 환영하지 않습니다(2,4~6절).
악한 눈으로 주시하고 합당한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습니다.
악을 행하는 것과 생명을 죽이는 것에 대한 판단력이 마비되었기에 버젓이 헤롯당과 함께 예수를 죽일 공모를 벌입니다.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라비틀어져 있어 시급한 치료가 필요합니다.
말씀에 비춰 늘 마음을 새롭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 마음도 굳어지고 마비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