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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히브리서5장11~6장8절
제목 : 장성한 자로 자라가라
본문은 신앙생활을 오래 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씀에 관심이 없고,
성장하려는 열심히 부족한 자들에게 완전한 데로 나아가라고 권면합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도 타락한 자들을 향한 심판을 경고합니다.
1. 영적 어린아이(11~14절).
“[11]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12]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13]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14]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1)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11절).
“[11]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 - '둔하므로'는 '듣는 것에 무관심한' 혹은 '이해력이 부족한'을 뜻합니다.
혹자는 본절을 앞 문단의 결말로 보아 '듣는 것이 둔하다'는 말은 9절에서 언급된 '자기를 순종하는' 즉 그리스도께 대한 철저한 복종을 요구하는 저자의 말을 수신자들이 충분히 깨닫지 못함을 시사한다고 주장합니다.
2)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12절)
“[12]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는 수신자들이 그리스도인이 된 지 오래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본절은 수신자들의 신앙이 성숙되어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만큼(롬2:2;벧전3:15) 신앙의 연조가 오래되었으나 여전히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상태에 머물러 있음을 암시합니다.
말씀의 초보 - 이것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의 기초적인 진리를 시사하는 것으로, 본절은 수신자들이 이러한 기초적인 지식도 결핍되어서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받아야 함을 나타냅니다.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 '젖'과 '단단한 음식'은 헬라 윤리학에서 기원을 찾아볼 수 있는 비유로서, 헬라 윤리학에서는 아직 기초단계에 있는 자들을 '우유를 필요로 하는 어린아이'에 비유하며 성숙한 단계에 이른자들을 '단단한 음식을 즐기는 어른'에 비유합니다(고전3:1-3).
저자는 본비유를 통해서 수신자들이 오랜 신앙의 연륜에 걸맞는 성장을 이루지 못한 사실을 안타까이 여겨 그들을 책망하며 권면하고 있습니다.
3) 젖을 먹는 자마다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입니다(13절)
“[13]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저자는 본절에서 '젖을 먹는 자'에 대해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어린아이 - '유아'를 의미하는 것으로 올바른 언어를 구사하거나 정상적인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 능력이 결핍된 상태나 옳은 것을 분별하는 도덕적인 기준이나 '의'에 관향 원리에 대해 알지 못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 -'의의 말씀'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신자들의 올바른 삶으로서의 '의'를 의미하며,
둘째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가 신자들의 '의'가 된다는 측면에서의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의미합니다.
젖을 먹는 자들은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영위해야 하는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합니다.
4)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선악을 분별하는 자입니다(14절)
“[14]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단단한 식물'은 문맥상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에 대한 말씀으로(7:1-10:18)
초신자들과 같이 어린아이에 해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납득하기 어려운 진리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진리를 이해하는 자에 대해 저자는 본절에서 두 가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장성한 자 - 이것은 앞절에서 언급된 '어린아이'에 비해(고전3:1;13:11) 상대적으로 온전한 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단단한 식물'을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자를시사합니다.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
'지각'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이스데테리아'는 스토아 학파(Stoics)에서 '감각 기관'을 가리키던 말로 본절에서는 도덕적인 분별력을 넘어 영적인 분별 기능을 뜻합니다.
단단한 식물을 먹는 자는 훈련과 진리를 통해 성숙한 영적 분별력을 소유하게 되며 그 분별력을 통해서 선악을 분별하여 범죄치 않으며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됩니다.
2. 완전한 데로 나아가라(1~3절).
“[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3]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1)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라(1절)
“[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 저자는 5:11-14에서 언급한 신앙상의 권면 즉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 것'을 계속 권고합니다.
그는 본절에서 더 이상 독자들을 젖을 먹는 어린아이(5:13)로 취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도의 초보'의 내용은 본절 하반절과 2절에 세개의 쌍으로 된 6가지 항목으로 상술되고 있습니다.
본서의 수신자들이 유대인 공동체였기에 '그리스도 도의 초보'의 내용은 유대교 관습과 연관된 것이었습니다.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 '죽은 행실'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입니다.
(1)혹자는 생명을 주지 못하는 구약 시대 율법의 제사 의식을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9:10).
(2)혹자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인간들의 실제적인 모든 악행을 가리킨다고 주장합니다.
두 가지 해석이 모두 가능하나 다음에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후자가 더 타당합니다.
또한 죽을 수밖에 없던 지난날의 행실을 뉘우치고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행위인 '회개'는 세례 요한이나(마3:2), 예수 그리스도(막1:15) 그리고 그의 제자들(행2:38)의 가르침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었습니다.
한편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 이상의 것으로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함을 시사합니다.
이러한 믿음은 참된 신앙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로서 구약성경 전체를 통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창15:6;합2:4).
2)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2절)
“[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세례들과 안수와 - '세례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밥티스몬'은 기독교의 '세례'(밥티스마)를 의미하지 않고(롬6:4;엡4:5;골2:12) 유대교의 일반적인 정결 예식을 의미합니다(레11-15장).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죄 씻음을 받은 표징(表徵)을 세례로 볼 것인가 아니면 유대인들의 정결 의식으로 볼 것인가에 대하여 논란이 많았으며(요3:25;행19:1-5) 처음 믿는 개종자들은 이'세례들'에 관한 교훈에 접하게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편 '안수'는 구약시대부터 널리 시행되던 관습이었습니다(민8:10;신34:9). 신약시대에도 새로운 개종자(행8:17)나 전도 사역자(딤전4:14)에게 종종 안수를 시행하기도 하였습니다(행8:17-19).
본절의 '안수'는 주로 개종자들에게 행하여 성령의 은사를 받도록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 - 이것은 '그리스도 도의 초보'에 관한 마지막 세번째 쌍으로서 미래에 관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주제는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의 중대 관심사인 종말론적 교리입니다. 이러한 교리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책임적 존재로서 마지막 때에 회계해야 함을 시사합니다.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 '완전'의 헬라어 '텔레이오테타'는 '성숙'이라는 의미로 공동체내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인격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개종한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그러한 문제에 집착하지 말고 삶 속에서 하나님의 사역과 권한에 순종하기를 권면합니다.
3)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3절)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은 '참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 조건문으로서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때 가능함을 시사합니다.
한편 '이것'이 가리키는 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1)혹자는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2)혹자는 '완전한 데 나아가는 것'(2절)을 가리킨다고 주장합니다.
두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합니다, 왜냐하면 전자의 것은 이미 버리라고 저자가 권면했기 때문입니다(1절).
그리스도인들이 완전 곧 성숙으로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1,7절).
3. 배교에 대한 경고(4~6절).
“[4]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1)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4절)
한 번 빛을 받고 - 저자는 4-8절의 내용을 통해 자신의 믿음을 성숙시키지 못하고 헛된 교훈에 미혹된 배도자의 결말에 대해 경고합니다.
본절과 다음절은 개종자들의 첫 신앙 체험을 기술한 것으로 그 표현이 추상적이어서 구체적으로 해석하기에 다소 난점이 있습니다.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 '하늘의 은사'에 대해서는 두가지 견해가 있습다. (1)혹자는 '성찬'(聖餐)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맛보고'의 헬라어 '규사메누스'가 문자적으로 '음식을 맛보다'라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2)혹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선물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본절의 '하나님의 은사'는 어느 한 가지로 규정하기 어렵고 다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귀한 선물 중의 하나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 '참예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토쿠스'는 '참여하다', '교제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을 체험한 것을 가리킵니다.
2)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5절)
'선한 말씀을 맛보았다'는 말은 하나님 말씀의 귀중한 가치를 깨달았다는 의미인 듯합니다.
한편 '내세의 능력'은 미래적인 것으로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장차 올 세계의 능력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현재에도 신앙의 공동체 안에서 실현되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4-5절에 걸쳐 진술된 영적인 체험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누구든지 체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사(恩賜)입니다.
3)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습니다(6절)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
'타락한 자들'의 헬라어 '파라페손타스'는 '한쪽으로 떨어져 나가다'라는 의미의 동사 '파라피프토'의 부정과거 능동태 분사입니다.
'파라페손타스'는 4,5절에서 언급한 영적 체험을 받아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좋은 은사를 체험하였다가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간 자를 가리킵니다.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다는 본절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1)본절은 다시 용서함을 받지 못한다든가 구원받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저자가 뜻하는 바는 '다시 회개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회개'는 회개하는 자가 자신의 삶 전체의 방향을 전환시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결코 반복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일회적인 것이다. 따라서 본절은 타락한 자들이 일회적인 회개를 다시 반복할 수 없음을 시사합니다.
(2)저자는 구약시대에서와 마찬가지로 알고 지은 고의적으로 배도한 본절의 '타락한 자들'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타락하여 다시 회개할 수 없는 자임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갖습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스타우룬타스'에서 '다시'로 번역된 접두사 '아나'는 '다시'라는 의미가 아니라 '위에'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타락한 자들이 예수를 두 번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단순히 '십자가 위에 못박아'라는 의미로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자들이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던 자들과 다를 것이 없음을 시사합니다.
4. 좋은 열매를 맺으라(7~8절).
“[7]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8]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1) 그리스도인의 장성함에 대한 비유입니다(7절)
“[7]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개역 성경에는 '가르'('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이 '가르'는 본절과 다음절이 앞서 언급한 내용에 대한 근거가 됨을 시사합니다.
본절은 그리스도인의 장성함에 대한 비유로 사5:1 이하의'포도원의 노래'와 내용 면에서 유사합니다.
'땅'은 그리스도인들을 비유한 것이며(마13:18-23),
'비'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감화 등을 비유한 것입니다(사44:3;55:10). 밭을 가는 자가 열심을 다해 밭을 갈았을 때 밭이 그에 맞는 소출을 내면 밭을 가는 농부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배도하지 아니하고 성숙한 신앙으로 발전해 나아갈 때 은혜를 베푸시고 돌보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2) 배교자에 대한 비유입니다(8절)
“[8]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가시와 엉겅퀴'는 창 3:17, 18의 내용과 연관됩니다.
창세기에서 가시와 엉겅퀴는 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해 야기된 저주의 산물 이었습니다.
본절에서 '가시와 엉겅퀴를 낸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고 배도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것의 '마지막' 즉 결과는 불사름을 당하는 것입니다.
'불사름'의 헬라어 '카우신은 마지막 심판 때의 엄격함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그 불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을 소멸하는 도구가 됩니다(10:27;12:29).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열매를 따라 복과 저주를 내리십니다(7,8절).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여 하나님이 쓰시기에 좋은 열매를 맺는 자들에게는 복을 주시지만, 말씀을 받고도 악한 삶의 열매를 맺는 자들에게는 심판을 내리실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묵상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말씀을 순종하여 삶에서 선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좋은 설교를 듣고, 말씀을 날마다 묵상하는 행위 자체가 자신을 선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지 않음을 기억하십시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선악을 분별하는 장성한 자로 자라가야 합니다(11~14절).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은 신앙 성장에 관심이 없었기에 말씀을 배우고 열매 맺는 일에 게을렀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연수가 오래되어도, 여전히 어린아이와 같은 수준에 머물러있었습니다.
성장은 말씀에 대한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말씀을 살아내는 순종의 경험으로 일어납니다.
나는 스스로 좋은 음식과 나쁜 음식을 구별하고,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장성한 그리스도인 입니까?
아니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성경을 이해할 수 있는 영적 어린아이 입니까?
2) 말씀의 초보에서 벗어나 장성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가야 합니다(6:1~3절).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끊임없이 자라가야 하며, 성장을 멈춰도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열매 없는 교회와 성도들은 세상에 참된 영향력을 미칠 수 없습니다.
내게는 영적 성장에 대한 기대와 열심뿐 아니라 구체적인 노력과 훈련이 뒷받침되고 있습니까?
3) 성장을 멈추면 타락이 시작됩니다(6:4~6절).
세례와 성찬과 성령의 은사,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경험한 것이 우리 구원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경험을 하고도 타락하여 하나님을 저버린다면, 다시 회개할 기회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효력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배교 행위입니다.
내 신앙 상태를 점검해보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