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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도론-비쑷디막가
붓다고싸 지음/전재성 역주
2562.12.22~27
제 1권
계 행
戒 行
(Sila)
P 107
제 1장 계행
(silaniddesa)
[청정도론의 서문]
1. Ⅰ. [청정도론의 서문] 이와 같이 [1] 세존께서 설했다.
“지혜로운 사람은 계행에 정초하여
마음과 지혜를 닦는다.1)
열심히 노력하고 슬기로운 수행승이라면,
이 얽힌 매듭을 풀 수 있으리라.“2)
왜 이와 같이 말했는가? 세존께서 싸밧티3) 시에 계실 때 밤중에
한 하늘아들이 다가와서 자신의 의혹을 제거하고자 이와같은 질문을 했다.
“안으로 묶이고 밖으로 묶였으니
뭇삶들은 결박에 묶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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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ittaṁ paññañ ca bhāvayaṁ : 마음과 지혜로 되어 있는데, Srp.Ⅰ.50에 따르면, 선정과 지혜를 의미한다.
2) sīle patiṭṭhāya naro sapañño|cittaṁ paññañca bhāvayaṁ|ātāpi nipako bhikkhu|soimaṁ vijaṭaye jaṭan ti∥snk. 56/SN.Ⅰ. 14 ; Pet 44(45); Mil. 34; Uv. 6 : 8에도 나온다. Srp.Ⅰ.50에 따르면, 사람이 땅 위에 서서 잘 드는 날카로운 칼로 대나무가 엉킨 것을 잘라내듯, 수행승은 계행 위에 서서 집중의 돌로 잘 갈아진 통찰적 지혜라는 칼을 잡고, 정진의 힘에 의해 발휘된 실천적 지혜의 손으로, 갈애의 얽힌 매듭을 자르고 부수어 버린다.
3) Sāvatthī : 부처님 당시 꼬쌀라(Kosala) 국의 수도로 사위성(舍衛城)이라 한역한다. 네팔 국경지역에 놓여 있는 오늘날의 고락뿌르(Gorakhpur)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 도시의 이름은 성자 싸밧타(Sāvattha)가 살았던 데서 유래한다고도 하고, 상업도시이므로 대상(隊商)들이 만나서 ‘어떤 상품이 있는가(kim bhandan atthi)’라고 물으면 ‘싸밤 앗티(sabham atthi : 모든 것이 있다)’라고 대답한 데서 유래한다고도 한다. 부처님께서는 승원생활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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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따마여, 묻사오니.
누가 이 결박을 풀 수 있으리오?”4)
2. 그 의미는 간략히 이와 같다. 결박을 갈애의 그물을 지칭한다. 참으로 그것은 형상 등의 대상에 대하여 거듭해서 생겨나는 것이므로 결체5)의 의미에서 대나무의 우거진 숲 등에서 발견되는 덤불6)이라고 불리는 결박과 같다. 또한 그것은 자기의 소유, 타인의 소유, 자기의 신체, 타인의 신체, 내적 감역,7) 외적 감역8)과 관련해서 생겨나는 것이므로 이른바 내적 결박과 외적 결박9)으로 나뉜다. 이와 같이 생겨나는 그 결박에 뭇삶들은 묶인다. 예를 들어 대나무 우거진 숲 등에서 발견되는 나뭇가지 그물에 대나무 등이 묶이는 것처럼, 이와 같이 그 갈애의 그물에 일체중생이라고 불리는 뭇삶들은 결박되고, 계박되고 결체되었다는 의미이다. [2] 이와 같이 결박되는 까닭에, ‘고따마여, 묻사오니,’라는 것은 ‘그것에 관하여 제가 질문을 드립니다.’라는 뜻이다. 고따마는 세존을 성씨로 부른 것이고, ‘누가 이 결박을 풀 수 있으리오?’라는 것은 ‘이와 같이 삼계(삼계)10)에 묶여 있는 그 결박을 누가 풀 수 있으리오? 곧, 누가 풀 수 있을까?’라고 묻는 것이다.
3. 이와 같이 질문하자, 일체의 제법에서 장애를 여윈 앎의 행자인 천신들 가운데 천신, 제석천들 가운데 뛰어난 제석천11) 하느님들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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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antojaṭā bahijaṭā|jaṭāya jaṭitā pajā|taṁ taṁ gotama pucchāmi|ko imaṁ vijaṭaye jaṭan ti∥
5) saṁsibbana : 한역에서 결체(結締)라고 한다.
6) sākhājāla : 한역의 기망(技網)으로 가지-덤불을 의미한다.
7) ajjhattikāyatana : 한역의 육내처(六內處)를 말한다. 내적 감역은 시각(眼)의 감역, 청각(耳)의 감역, 후각(鼻)의 감역, 미각(舌)의 감역, 촉간(身)의 감역, 정신(意)의 감역을 말한다.
8) bāhirāyatana : 한역의 육외처(六外處)를 말한다. 외적 감역은 형상(色)의 감역, 소리(聲)의 감역, 냄새(香)의 감역, 맛(味)의 감역, 감촉(觸)의 감역, 사실(法)의 감역을 말한다.
9) antojaṭā bahijaṭā : 한역에서는 내박(內縛)과 외박(外縛)이라고 한다.
10) tisso dhātuyo : 한역의 삼계(三界)로 감각적 쾌락의 욕망계(欲界 : kamadhātu), 미세한 물질계(色界 : rūpadhātu), 비물질계(無色界 : arūpadhātu)를 말한다.
11) sakkānaṁ atisako : 제석천은 불교신화에서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계의 천상세계인 서른셋 신들의 하늘나라(Tāvatiṁsā devā : 三十三天=忉利天)의 지배자이다. 그러나 종종 신들의 제왕(devanam inda)이라고도 불린다. 여기서 제석천들이라고 언급한 것은 우주의 무수한 세계들에 존재하는 신들의 제왕들을 말한 것이다. 힌두신화의 인드라 신에서 유래했으나 힌두신화의 인드라 신과 동일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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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데 뛰어난 하느님, 네 가지 두려움 없음에 밝은 님,12) 열 가지 힘을 지닌 님,13) 덮개를 여읜 앎을 지닌 님, 널리 보는 눈을 지닌 님, 세존께서 그 의미에 응답하였다.
“지혜로운 사람은 계행에 정초하여
마음과 지혜를 닦는다.14)
열심히 노력하고, 슬기로운 수행승이라면,
이 얽힌 매듭을 풀 수 있으리라.”15)
4. 선인께서 설한 이 시로써
계행 등에서 비롯되는
모든 분야에서 그 의미를
이제 있는 그대로 밝히겠다.16)
승리자의 가르침에서
극히 어려운 출가를 얻었어도
계행 등을 포함하는
안온한, 바른 청정의 길은,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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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catuvesarajjavisarado : 무,. Ⅳ. 8
13) dasabaladharo : AN. X. 21, 22; M. 12
14) cittam pannan ca bhavayam : Srp. Ⅰ. 50에 따르면, 선정과 지혜를 의미한다.
15) sile patitthaya naro sapanno cittam pannanca bhavayam atapi nipako bhikkhu so imam vijataye jatan ti SN. Ⅰ. 13; Vism. 710(23 : 61);Pet 44(45); Mil. 34; Uv. 6 : 8; 《잡아함》(599, 大正2 · 160b)에도 나온다. Srp. I. 50에 따르면, 사람이 땅 위에 서서 잘 드는 날카로운 칼로 대나무가 엉킨 것을 잘라내듯, 수행승은 계행 위에 서서 집주의 돌로 잘 갈아진 통찰적 지혜라는 칼을 잡고, 정진의 힘에 의해 발휘된 실천적 지혜의 손으로, 갈애의 얽힘을 자르고 부수어 버린다.
16) imissa dani gathaya kathitaya mahesina vannayanto yathabhutam attam siladibhedanam Vism. 710(23 : 62)
17) sudullabham labhitvana pabbajjam jinasasane siladisangaham khemam ujummaggam visuddhiya Vism. 710(23 :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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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알기 어려우니,
세상에서 청정을 원하여
정진하고 명상하더라도
청정에 도달하지 못한다.18)
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지극히 청정하게 탐구된
마하비하라19) 사원에 거주자들의
설법의 방식에 의지하여20)
청정의 길을 시설하려 하니,
내가 지극한 마음으로 시설하면,
청정을 원하는 모든 님들도
지극한 마음으로 경청하기 바란다.21)
5. 이 가운데 청정이라는 것은 일체의 오점이 제거된 구경청정의 열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청정의 길이 즉, 비 Tnt 디막가 인 것이다. 길이라는 것은 도달의 방법을 말한다. 그 청정의 길을 내가 시설하겠다는 뜻이다.
6. 이 청정의 길은, 어떤 곳에서는 통찰22)로써 설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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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yathābhūtaṁ ajānanatā | suddhikamāpi ye idha | visuddhiṁ nādhigacchanti | vāyamantāpi yogino ǁ Vism. 710(23 : 62)
19) Mahāvihāra : 스리랑카의 왕도였던 아누라다뿌라(Anurādhapura) 시에 아쇼카 왕의 아들 마힌다 장로의 자문을 받아 데바남삐야띳사(Devānampiyatissa) 왕이 세운 사원으로 광대한 마하메가반나(Mahāmeghavana) 공원과 투빠라마(Thuparama) 사원과 마하툽빠(Mahathūpa) 탑묘를 포함하고 있다. 마하비하라 파의 본산이었다. 붓다고싸는 이 사원에서 『청정도론』과 삼장의 주석서를 집필했다.
20) tesaṁ pāmojjakaraṇaṁ | suvisuddhavinicchayaṁ | mahāvihāravāsīnaṁ | desanāna yanissitaṁ ǁ Vism. 710(23 : 62)
21) visuddhimaggaṁ bhāsissam | taṁ me sakkacca bhāsato | visuddhikāmā sabbepi | nisāmayatha sādhavo ti ǁ Vism. 710(23 : 63)
22) vipassanā : 한역의 지관(止觀)에서의 관(觀)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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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의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라고
지혜로 본다면,
괴로움에서 벗어나니
이것이야말로 청정의 길이다.“ 23)
어떤 곳에서는 [3] 선정과 지혜로써 설명된다.
“[지혜가 없는 자에게 선정이 없고
선정이 없는 자에게 지혜가 없다.]
선정과 지혜가 있으면,
참으로 그에게 열반이 현전한다.”24)
어떤 곳에서는 바른 행위(업)로써 설명된다.
“바른 행위, 밝은 지혜,
가르침, 계행과 올바른 생활로25)
사람은 청정해 진다.
가문이나 재산 때문이 아니다.”26)
어떤 곳에서는 계행으로써 설명된다.
“언제나 계행을 갖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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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sabbe saṅkhārā aniccā´ti | yadā pannāya passati | atha nibbindati dukkhe | esa maggo visuddhiyā ∥ Dhp. 227; Thag. 676에서 병행한다. Dhp. 277-279의 삼법인(三法印)을 모두 대변하는 시로서 언급된 것이다.
24) natthi jhānaṁ apaññassa | paññā natti ajhāyato | yamhi jhānam ca pannā ca | save nibbānasantike ∥ Dhp. 372; 괄호 [ ] 부분은 『청정도론』에서 생략되어 있으나, 역자는 복원하여 표기한 것이다.
25) kammam vijjā ca dhammo ca sīlaṁ jīvitaṁ ca uttamaṁ : Srp. I. 89에 의하면, 이 문장은 주격(nom)으로 연결되어 있다. 여기서 ‘kammaṁ’이 문제가 된다. Krs. I. 46은 ‘착한 뜻’으로 번역했으나 Ggs. I 52.는 ‘kammaṁ’은 sk. kāmya’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측하여 ‘올바른 행위’라고 번역했다. 그리고 여기서 올바른 생활이라고 번역한 단오는 ‘최상의 생활(jīvitaṁ uttamaṁ)’을 의역한 것이다.
26) kammaṁ vijjā ca dhammo ca | sīlaṁ jīvitamutamaṁ | etena massā sujjhanti | nagottena dhanena vā ∥ SN. I. 34; 이 시는 MN. Ⅲ. 262에도 《잡아함》(593 : 大正2·158c)과 병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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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를 지니고 삼매에 잘 들어
노력하며 정진하는 님이
건너기 어려운 거센 흐름27)을 건넌다.”28)
어떤 곳에서는 새김의 토대 등으로 설명된다.
“수행승들이여, 뭇삶을 청정하게 하고,29) 슬픔과 비탄을 뛰어넘게 하고,30) 고통과 근심을 소멸하게 하고,31) 바른 방도를32) 얻게 하고, 열반33)을 실현시키는 하나의 길34)이 있으니 곧, 네 가지 새김의 토대35)이다.”36) 네 가지 올바른 노력, 네 가지 신통변화의 기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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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oghā : Vism. 141의 주석을 보라.
28) sabbadā sīlasampanno | paññavā susamāhito | āraddhaviriyo pahitatto | oghaṁ tarati duttaraṁ ∥SN. I. 53; 《잡아함》(1316 : 大正2·361c)에서 병행한다.
29) sattānam visuddhiyā : 늪. 746에 따르면, ‘탐욕 등의 티끌에 의해서 탐욕·사탐(邪貪) 등의 오염으로 오염된 마음의 뭇삶을 깨끗하게 하기 위하여’라는 뜻이다.
30) sokapariddavānam samatikkamāya : Smv. 746에 따르면, 여덟 가지 고귀한 길(ariyo atthangiko maggo : 八正道)이다.
31) dukkhadomanassānaṁ atthaṅgamāya : Smv. 746에 따르면, ‘신체적 고통과 정신적 근심을 사라지게 하기 위하여’라는 뜻이다.
32) ñāya : ‘방법, 진리, 체계’인데. Srp. Ⅲ. 177에 따르면, 여덟 가지 고귀한 길(길(ariyo atthangiko maggo : 八正道)이다.
33) nibbāna : Pps. Ⅰ. 236에서는 열반을 ‘불이 꺼짐’이라는 의미 이외에 ‘탐욕(vāna)의 여윔’이라는 뜻으로도 해석하고 있다.
34) ekāyano ayam maggo : ‘에까야노 막노(ekāyano maggo)’란 ‘하나의 행선지로 통하는 길’을 말하는데 한역에서는 일승도(一乘道)라고 한다. PPtin. 3에서는 ‘단일한 길(the single way),’ WRtil. 3에서는 ‘유일한 길(der einzige Weg)’ 그리고 PPmol. 7에서도 ‘유일한 길(the only way)’이라고 번역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모두 해탈에 이르는 유일한 독점적인 길이라는 인상을 준다. Smv. Ⅲ. 743~744와 Psm. Ⅰ. 229~230에 따르면, 그것은 오로지 다섯 가지 분석 가운데 하나이다. Srp. Ⅲ. 177도 그 첫 번째 분석만을 따르고 있다: ‘수행승이여, 이것은 하나의 길인데, 이 길은 갈림길이 아니다.(ekamaggo ayaṁbhikkhave maggo na dvedhāpathabhūto)’ MN. I. 74에 나오는 ‘에까야노 막고(ekāyano maggo)’란 곧바로 행선지로 이르는 가장 가까운 길, 지름길을 말한다. 그러므로 대승불교 특히 『묘법연화경』(saddharmapuņḍarikasūtra)에서 말하는 일승(一乘 : ekayāna)이라는 것과는 다르다.
35) cattāro satipaṭṭhānā : 한역의 사녀처(사념처)를 말한다. Pps. I. 238, Smv. Ⅲ. 741~61과 Pts. Ⅱ.244~266에 의하면, 싸띠빳타나(satipaṭṭhāna)란 복합어는 싸디-우빳타나(sati-upaṭṭhāna)나 싸띠-빳타나(sati-paṭṭhāna)의 두 가지로 분석이 가능한데, 전자일 경우는 ‘생김의 생성’으로 새김의 장치에, 후자일 경우는 ‘새김의 토대’로 새김의 대상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복합어의 첫 부분인 싸띠(sati)는 원래 기억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빠알리니까야에서는 ‘현재와 관련된 주의(注意) 또는 마음챙김’이란 뜻으로 더 많이 쓰인다. 역자는 둘 다를 종합할 수 있는 ‘새김’이라는 뜻으로 번역한다. 실제로 기억을 통한 새김 없이는 마음챙김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참고로 Cdb. 1915에서 빅쿠 보디는 ‘새김의 토대’라는 입장을 취하는 주석가들과는 달리 그 범어 표현(sk. smṛtyupasthāna)과 빠알리어에서도 우빳티따싸띠(upaṭṭhitasati : SN. V. 331)라는 표현이 있으므로 ‘생김의 생성’이라는 입장을 취해서 번역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SN. V. 148에서는 네 가지 새김의 토대가 수행승의 풀뜯는 곳 또는 행경(gocara : 行俓)이라고 불린다.
청정도론-비쑷디막가
붓다고싸 지음/전재성 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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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가지 능력, 다섯 가지 힘, 일곱 가지 깨달음의 고리, 여덟 가지 고귀한 길37)에서도 이와 같은 방식이 유효하다. 위의 답변에서 그러나 청정의 길은 계행과 삼매와 지혜로써 설명된 것이다.
7. 그것에 대한 간략한 해설은 이와 같다. ‘계행에 정초하여’라는 것은 ‘계행에 입각하고’라는 뜻이다. 계행을 원만히 충족시킨 자만이 여기서 계행에 입각한 자이다. 그러므로 ‘계행을 원만히 충족시킴으로써 계행에 입각하고’라는 뜻을 지닌다. ‘사람’은 뭇삶을 뜻한다. ‘지혜를 갖춘 자’는 세 가지 원인에 의한 업생적 결생의 지혜38)로 지혜를 갖춘자이다. ‘마음과 지혜를 닦는다.’라는 것은 ‘삼매와 통찰을 닦는다.’는 뜻이니, 여기서 마음을 표제로 삼매가 서술된 것이고, 지혜를 명칭으로 통찰이 서술된 것이다. ‘열심히 노력하고’라는 것은 ‘정진력을 갖추어 노력하고’라는 뜻이고, 이 정진력은 오혐을 완전히 불태우기 때문에 ‘열심’이라고 하는 것이다. 열심히 노력하는 자는 그러한 의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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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ekāyano ayaṁ bhikkhave maggo sattānaṁ visuddhiyā – pa – nibbānassa sacchikiriyāya, yadidaṁ cattāro satipaṭṭānā’ti : DN.Ⅱ. 290; MN.Ⅰ.55;SN.V.141;《중아함》98(大正1·582b);《증일아함》(5 : 大正2568a);《잡아함》(607 : 大正2·171a)과 병행한다.
37) cattāro sammappadhānā, cattāro iddhipādā pañca indriyāni, pañcabalāni. satta sambojjhangā, ariyo aṭṭhangiko maggo : 네 가지 새김의 토대를 포함해서 서른 일곱 가지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수행법(三十七祖道品, 三十七菩提分法 : sattatiṁsa bodhipakkhiyā dhammā)을 말한다. 한역에서는 각각 사정근(四正勤), 사신족(四神足), 오근(五根), 오력(五力), 칠각지(七覺支), 팔정도(八聖道)라고 한다. 상세한 것은 이 책의 해제를 참조하라.
38) kammajatihetukapatisandhipaññā : 한역의 업생삼인결생혜(業生三因結生慧)를 말한다. 무탐(無貪), 무진(無瞋), 무치(無癡)의 세 가지 원인이 있는 선업의 과보로서 생겨난 이숙식(異熟識)인데, 존재지속의 고리(有分 : bhavaṅga)의 흐름 속으로 가라앉았다가 언제든지 그것에 조건 지어지고 항상 일치하는 존재지속의 고리의 계기를 통해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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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닌다. ‘지혜로운’이라는 것에서 지혜는 슬기를 말하는데, 그 지혜를 갖춘 것을 뜻한다. 이 말로서 지혜가 획득된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질물에 대한 답변에서 세 번 지혜가 언급되었다. 그 가운데 첫 번째 가 생득적 지혜,39) 두 번째가 통찰적 지혜,40) 세 번째가 일체의 해야할 일을 선도하는 예지적 지혜41)가 있다. 윤회의 두려움을 보는 까닭에, ‘수행승’인데, 그가 ‘그 결박을 풀 수 있으리라.’라는 것은 그가 그 계행과 그 마음을 표제로서 서술된 삼매와 세 가지 지혜로 열심히 노력함으로써 여섯 가지 원리를 갖춘 수행승은, [4] 예를 들어 남자가 땅 위에 서서 잘 드는 칼을 들어서 커다란 대나무 덤불을 잘라내는 것처럼, 이와 같이 계행의 땅에 입각해서 선정의 돌로 연마된 통찰의 지혜라는 칼을 정진력으로 책려된 예지적 지혜의 손으로 움켜잡고 일체의 자신의 상속 중에 생겨난 갈애의 결박을 풀고 절단하고 파괴해야 한다. 길의 찰나에 그는 결박을 벗어나고, 경지의 찰나에 그는 결박을 벗어난 자가 되어 신들을 포함한 세상에서 최상의 공양받을 만한 님이 된다. 그러므로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설한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계행에 정초하여
마음과 지혜를 닦는다.
열심히 노력하고, 슬기로운 수행승이라면,
이 얽힌 매듭을 풀 수 있으리라.”
8. 거기서 그는 지혜로 인해서43) 지혜를 갖춘 자라고 불리는데, 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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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jātipaññā : 한역의 생혜(生慧)라고 하는데, 일반적인 지혜로운 자를 지칭하는 경우의 생득적 지혜를 말한다.
40) vipassanāpaññā : 한역에서 관혜(觀慧)라고 하는데, 마음과 지혜를 닦아서 지칭하는 경우로 통찰적 지혜를 말한다.
41) pārihārikapaññā : 한역에서는 장래혜(將來慧)라고도 하는데, 정진과 지혜를 갖추는 경우의 후천적 지혜를 말한다.
42) Snk. 56 sīle patiṭṭhāya naro sapañño | cittaṁ paññañca bhāvayaṁ | ātāpi nipako bhikkhu | so imaṁ vijaṭaye jaṭan ti∥
43) paññāya : 생득적 지혜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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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해야 할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숙업의 힘으로 그에게 그것이 이미 성취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가 ‘열심히 노력하고 슬기로운 자’라는 것은 앞서 언급한 정진력으로 항상 정근하는 자,44) 지혜의 힘으로 올바로 알아차리는 자,45) 계행에 입각해서 마음과 지혜로 표현된 멈춤46)과 통찰을 닦는 자가 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세존께서는 여기서 계행과 삼매와 지혜의 관점에서 청정의 길을 밝힌 것이다.
9. 이상으로 ① 세 가지 배움,47) ② 세 측면의 훌륭한 교법,48) ③ 세 가지 명지49) 등의 토대, ④ 양극단의 회피와 중도의 실천, ⑤ 나쁜 존재의 운명50) 등을 뛰어넘는 방편, ⑥ 세 유형에 의한 오염51)의 버림, ⑦ 위범 등의 대치, ⑧ 세 가지 오염의 정화, ⑨ 흐름에 든 경지등의 원인을 밝힌 것이다.
10. 어떻게 그러한 것인가? 1) [세 가지 배움] 계행을 통해서 ‘보다 높은 계행에 대한 배움’, 삼매를 통해서 ‘보다 높은 마음에 대한 배움’ 지혜를 통해서 ‘보다 높은 지혜에 대한 배움’이 밝혀진 것이기 때문이다.52) 2) [세 측면의 훌륭한 교법] 계행을 통해서 교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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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sātaccakārin : 한역의 상근행자(常勤行者)를 말한다.
45) sampajānakārin : 한역의 정지행자(正知行者)를 말한다.
46) samatha : 한역의 지관(止觀)의 지(止)를 말한다.
47) tisso sikkhā : 한역의 삼학(三學) 즉, 계행(戒)과 삼매(定), 지혜(慧)를 말한다.
48) tividhakalyānam sāsanam : 한역의 삼종선교(三種善敎)를 말한다.
49) tevijja : 한역의 삼명(三明)을 말한다.
50) apāya : 한역의 악처(惡處)를 말한다.
51) kilesa : 한역은 예(穢) 도는 번뇌(煩惱)이다. 한역에서는 루(漏 : āsava)도 번뇌로 번역하는 경향이 있어 구별하기 위해 역자는 오염이라고 번역했다.
52) adhisīlasikkhā, adhicittasikkhā, adhipaññāsikkhā : Srp. I.27에 의하면, 계정혜[계 정 혜]에 대한 세 가지 배움(삼학 : tayo sikkhā)의 단계를 의미한다. 보다 높은 계행의 배움(增上戒學 : adhisīlasikkhā)을 통해서 ‘망상을 없애는 것’이고, 보다 높은 마음의 배움(增上心學 : adhicittasikkhā)을 통해서 ‘마음이 집중되는 것’이며, 보다 높은 지혜의 배움(增上慧學 : adhipaññāsikkhā)을 통해서 ‘훌륭한 마음’을 성취하는 것이다. Mrp. Ⅱ. 346에 따르면, 오계(五戒)에 비해서 십계(十戒)가 보다 높은 계행이고 십계에 비해서 네 가지 청정계행(四淨戒 : catupārisuddhisīla)이 보다 높은 계행이고,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계[欲戒]에 속한 마음에 비해 미세한 물질계[色戒]에 속한 마음이 보다 높은 마음이고, 미세한 물질계에 속한 마음보다 빗물질계[無色戒]의 마음이 보다 높은 마음이다. 보다 높은 지혜는 형성된 것들에 대한 통찰, 또는 궁극적으로 네 가지 거룩한 진리(四聖諦)에 대해서 잇는 그대로 아는 것, 마음에 의한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성취하는 것 등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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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의 훌륭한 측면이 밝게 드러난다. “착하고 건전한 교법의 처음은 무엇인가? 지극히 청정한 계행이다.”라는53) 말씀이나 “모든 죄악을 짓지 않고, 모든 착하고 건전한 것들을 성취하고,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 이것이 모든 깨달은 님의 가르침54)이다.”라는55) 말씀에서 계행이 교법의 처음이고 후회가 없는 것 등의 덕성을 가져오는 까닭에 그것이 교법의 처음으로서의 훌륭한 측면이다. 삼매를 통해서 교법의 중간의 훌륭한 측면이 밝게 드러난다. ‘모든 착하고 건전한 것들을 [5] 성취하고’라고 설한 것으로 삼매가 교법의 중간인데 그것도 신통의 종류 등의 덕성을 가져오는 것이기 때문에 훌륭한 측면인 것이다. 지혜를 깨끗이 하는 것, 이것이 모든 깨달은 님의 가르침이다”라는 말씀인 최상의 지혜로부터 지혜가 교법의 종극인데, 그것은 원하는 것이나 원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일여(일여)56)를 가져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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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ko cādi kusalānam dhammānam, silanca suvisuddhan ti : SN. V.143.165
54) sabbapāpassa akaraṇaṁ kusalassa upasampadā sacittapariyodapanaṁ etaṁ buddhāna sāsanaṁ : Dhp. Ⅲ. 237에 따르면, 모든 악하고 불건전한 것을 짓지 말고, 착하고 건전한 것을 짓고 지은 것을 계발하는 것, 즉 흐름에 든 길에서 거룩한 길로 향하는 것과, 자기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 즏 다섯 가지 장애를 극복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역자주 : 이 시에 대한 한역시에 얽힌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당나라 때 백거이(白居易) 같은 대시인도 불교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도림선사(道林禪師)를 찾아가 ‘부처님의 가르침의 대의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대림선사는 바로 이 법구경의 시를 대답으로 제시했다. 곧 , ‘제악막작(諸惡莫作) 중선봉행(衆善奉行) 자정기의(自淨基意) 시제불교(是諸佛敎)’라는 것이었다. 백거이는 “‘모든 제악을 짓지 말고 모든 착하고 건전한 것을 받을어 행하라.’는 말은 세 살 먹은 어린이이도 아는 말 아닙니까?”라고 물었으나 선사는 “세살 먹은 어린아이도 알 수 있으나 여든 살 먹은 노인도 행하기 어렵다.‘고 대답했다. 이 시는 부처님께서 자신의 가르침인 팔만대장경의 내용을 한마디로 압축한 것이다. 그 가운데, 일체의 악하고 불건전한 죄악을 짓지 않는 것을 다루고 있는 것이 율장(律藏)이고, 모든 착하고 건전한 것을 다루고 있는 것은 경장(經藏)이고,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을 다루고 있는 것이 논장(論藏)이다.
55) sabbapāpassa akaraṇaṁ | kusalassa upasampadā | sacittapariyodapanaṁ | etaṁ buddhāna sāsanaṁ ǁ Dhp. 183.
56) tādibhāva :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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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훌륭한 측면인 것이다. 그래서 이와 같이 설한 것이다.
“아주 단단한 바위덩이가
바람에 움직이지 않듯, 57)
이와 같이 현명한 님은
비난과 칭찬에 흔들리지 않58)는다.”59)
11. 3) [세 가지 명지의 토대] 마찬가지로 계행을 통해서 세 가지 명지의 토대가 밝게 드러난다. 계행의 구족을 통해서 세 가지 명지가 얻어지는 것이지 그것과 달리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삼매를 통해서 여섯 가지 곧바른 앎의 토대가 밝게 드러난다. 삼매의 구족을 통해서 여섯 가지 곧바른 앎이 얻어지는 것이지 그것과 달리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혜를 통해서 네 가지 분석적 앎60)의 토대가 밝게 드러난다. 지혜의 구족을 통해서 네 가지 분석적 앎이 얻어지는 것이지 그거소가 달리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4) [양극단의 회피와 중도의 실천] 그리고 계행을 통해서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탐닉하는 것이라고 불리는 극단의 회피가 밝게 드러나고, 삼매를 통해서 자신을 학대하는 고행에 탐닉하는 것이라고 불리는 극단의 회피가 밝게 드러나고, 지혜를 통해서 중도의 실천이 밝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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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tādibhāva :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57) selo yathā ekaghano vātena na samīrati : DhpA. Ⅱ. 148-149에 따르면, 균열이 없는 단단한 덩어리의 바위는 동풍 등의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다.
58) evaṁ nindāpasaṁsāsu na samiñjanti paṇḍitā : DhpA. Ⅱ. 149에 따르면, 이와 마찬가지로 현자도 일상적인 사람의 여덟 가지 양상 – 이득, 손해, 수치, 명예, 칭찬, 안란, 고통으로 인해서 만족하거나 불만족하거나 고양되거나 혐오하는 것 –을 극복하면, 비난에도 칭찬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59) selo yathā ekaghano ǀ vātena na samīrati ǀ evaṁ nindāpasaṁsāsu ǀ na saminñanti paṇḍitā ǁ Dhp. 81
60) cattāro paṭisambhidā : 한역의 사무애해(사무애해)인데, 상세한 것은 Vism. 440/14 : 21 이하를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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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5) [나쁜 존재의 운명을 뛰어넘는 방편] 마찬가지로 계행을 통해서 나쁜 존재의 운명을 뛰어넘는 방편이 밝게 드러나고, 삼매를 통해서 감각적 쾌락의 욕망계를 뛰어넘는 방편이 밝게 드러나고, 지혜를 통해서 일체의 존재를 뛰어넘는 방편이 밝게 드러난다. 6) [세 유형에 의한 오명의 버림] 마찬가지로 계행을 통해서 대치에 의한 끊어버림61)을 통한 오염의 버림이 밝게 드러나고, 삼매를 통해서 극복에 의한 끊어버림62)을 통한 오염의 버림이 밝게 드러나고, 지혜를 통해서 근절에 의한 끊어버림63)이 밝게 드러난다.
13. 7) [위범의 대치] 마찬가지로 오염에 대하여 계행을 통해서 위범의 대치가 밝게 드러나고, 삼매를 통해서 전박의 대치가 밝게 드러나고, 지혜를 통해서 경향의 대치가 밝게 드러난다.64) 8) [세 가지 오염의 정화] 그리고 [6] 계행을 통해서 악행에 의한 오염의 정화가 밝게 드러나고, 삼매를 통해서 갈애에 의한 오염의 정화가 밝게 드러나고, 지혜를 통해서 견해에 의한 오염의 정화가 밝게 드러난다.65)
14. 9) [흐름에 든 경지 등의 원인] 마찬가지로 계행을 통해서 흐름에 든 경지와 한번 돌아오는 경지의 원인이 밝게 드러나고, 삼매를 통해서 돌아오지 않는 경지의 원인이 밝게 드러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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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tadaṅgappahanā : 한역에서는 피분사단(彼分捨斷)이라고 한다. 무상에 대한 통찰을 통해 그것의 반대 관념인 영원 등에서 벗어나게 되는, 반대관념에 의한 끊어버림(對治)을 뜻한다.
62) vikkhambhanappahāna : 한역에서는 전복사단(鎭伏捨斷)이라고 한다. 팔성취(八成就)를 통한 극복에 의한 끊어버림을 뜻한다.
63) samucchedappahāna : 한역에서 정단사단(正斷捨斷)이라고 한다. 길의 닦음에 의한 끊어버림을 뜻한다.
64) tathā sīlena kilesānaṁ vītikkamapaṭipakkho pakāsito hoti, samādhinā pariyuṭṭhānapaṭipakkho, paññāya anusayapaṭipakkho Pps. Ⅲ. 144에 따르면, 오염(kilesa)은 세 가지 수준으로 구분된다. 위범(vitīkamma : 違犯)의 수준에서는 악하고 불건전한 신체적·언어적 행위를 유발한다. 전박(pariyuṭṭhāna : 纏縛)의 수준에서는 마음을 사로잡아 노예화한다. 경향(anusaya : 隨眠)의 존재지속의 고리의 수준에서는 마음에 성향으로 자리를 잡는다.
65) sīlena ca duccaritasamkilesavisodhanaṁ pakāsitaṁ hoti, samādhinā tanhāsamkilesa visodhanaṁ, paññāya diṭṭhisamkilesavisodhanaṁ : 세 가지 오염(三雜染 : Vism. 210/ 7 : 59)에 등장하는 악행에 의한 오염(不善雜染 : duccaritasaṅkilesa), 갈애에 의한 오염(愛雜染 : taṇhāsaṅkilesa), 견해에 의한 오염(見雜染 : diṭṭhisaṅkilesa)의 대치(對治)를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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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를 통해서 거룩한 경지의 원인이 밝게 드러난다. 무릇 흐름에 든 님은 계행을 원만히 닦은 님이고, 한번 돌아오는 님도 마찬가지이고, 돌아오지 않는 님은 삼매를 원만히 닦은 님이고, 거룩한 님은 지혜를 원만히 닦은 님이다.
15. 이상으로 세 가지 배움, 세 가지 훌륭한 가르침, 세 가지 명지 등의 토대 양극단의 회피와 중도의 실천 나쁜 존재의 운명 등을 뛰어넘는 방편, 세 유형에 의한 오염의 버림, 위범의 대치 세 가지 오염의 정화 흐름에 든 경지 등의 원인이라는 아홉 가지와, 기타의 이와 같은 세 가지 덕성66)이 밝혀지는 것이다.
[계행(첫 번째 청정)의 총설]
16. Ⅱ. [계행(첫 번째 청정)의 총설] 이와 같이 수많은 덕성을 포함하는 계행과 삼매와 지혜의 관점을 통해 청정의 길이 천명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청정의 길은 지극히 간략하게 설명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이요하기에는 충분치 않기 때문에 상세하게 설명하기 위해 우선 계행에 관하여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진다. (Ⅰ) 계행이란 어떠한 것인가? (Ⅱ) 계행은 어떠한 의미로 존재하는가? (Ⅲ) 계행의 특징 기능 현상 토대67)는 무엇인가? (Ⅳ) 계행에는 어떠한 공덕이 있는가? (Ⅴ) 계행에는 얼마나 많은 종류가 있는가? (Ⅵ) 무엇이 계행의 오염인가? (Ⅶ) 무엇이 계행의 정화인가? 그것에 대한 대답은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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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aññe ca evarūpā guṇattikā : ‘기타의 이와 같은 세 가지 덕성’이란 ‘세 가지 멀리 여윔(三遠離 : tayo vivekā), 세 가지 착하고 건전한 것의 뿌리(三善根 : tīṇi kusalāmulāni;無貪·無瞋·無癡), 세 가지 해탈문(三解脫門 : tīṇi vimokkhamukhāni : 無相, 無願, 空), 세 가지 번뇌를 여의는 능력(三[無漏]根 : tīṇi
[anāsava]-indriyāni : 未知當知根, 已知根, 具知根)’을 말한다.
67) lakkhanarasapaccupatthānapadattānāti : 한역에서는 상(相), 미(味), 기(起), 족처(足處)라고 한다. 남방 아비담마에서 사물을 정의할 때 반드시 이러한 네 가지 규정을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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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Ⅰ) ‘계행이란 어떠한 것인가?’ 그것은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삼가는 자, 또는 의무의 실천행을 수행하는 자의 의지로서의 계행등의 원리이다. 『빠띠쌈비다막가』68)에서 이와 같이 “계행이란 어떠한 것인가? ① 의지로서의 계행이 있다. ② 마음의 작용으로서의 계행이 있다. ③ 제어로서의 [7] 계행이 있다. ④ 불범으로서의 계행이 있다.”라고69) 설했다. 이 가운데 1) ‘의지로서의 계행’이라는 것은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등을 삼가는 자, 또는 의무의 실천행을 수행하는 자의 의지를 뜻한다. 2) ‘마음의 작용으로서의 계행’이라는 것은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삼가는 마음의 작용을 뜻한다. 그리고 1) ‘의지로서의 계행’에서 의지란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 등을 삼가는 등의 일곱 가지 행위의 길(七業道)70)을 지향하는 의지를 뜻한다. 2) ‘마음의 작용으로서의 계행’에서 마음의 작용이란 “탐욕을 버리고 탐욕을 여윈 마음으로 지낸다.”라는 등의 표현으로 설한 무탐(無貪) ·무진(無瞋)·올바른 견해의 원리를 뜻한다.
18. 3) ‘제어로서의 계행’에 관한 한, 여기 다섯 가지 제어로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즉, ⓐ 의무계율에 의한 제어, ⓑ 새김에 의한 제어, ⓒ 지혜에 의한 제어, ⓓ 인내에 의한 제어, ⓔ 정진에 의한 제어이다,71) (a) 그 가운데 “이 의무계율에 의한 제어를 갖추되 완전히 갖춘다.”72)라는 것이 ‘의무계율에 의한 제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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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Paṭisambhidāmagga : 한역으로 무애해도(無碍解道)를 뜻한다. 《쿳다까니까야》의 일종이다.
69) kiṁ sīlanti cetanā sīlam, cetasikaṁ sīlaṁ, saṁvaro sīlaṁ, avītikkamo sīlan’ti : Patis. I. 44. 한역에서는 사계(思戒), 심소계(心所戒), 율의계(律儀戒), 불범계(不犯戒)라고 한다.
70) sattakammapatha : 열 가지 착하고 건전한 행위의 길[十善業道 : dasa kuslakammapathā] - ① 불상생(不殺生) ② 불투도(不偸盜) ③ 불사음(不邪淫) ④ 불망어(不妄語) ⑤ 불양설(不兩舌) ⑥ 불기어(不綺語) ⑦ 불악구(不惡口) ⑧ 불탐(不貪) ⑨ 부진(不瞋) ⑩ 정견(正見) -에서 신체적인 세 가지 업과 언어적인 네 가지 업과 정신적인 세 가지 업 가운데 정신적인 세 가지 업을 제외한 것을 말한다.
71) pātimokkhasaṁvaro, satisaṁvaro, ñāṇasaṁvaro, khantisaṁvaro, vīriyasaṁvaroti : 한역에서는 각각 별해탈율의(別解脫律儀), 염율의(念律儀), 지율의(智律儀), 인율의(忍律儀), 정진율의(精進律儀)라고 한다.
72) iminā pātimokkhasaṁvarena upeto hoti samupeto ti : Vib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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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시각능력을 수호하여 시각능력의 제어에 도달한다.”73)라는 것은 ‘새김에 의한 제어’이다. (c ) 그리고 이와 같이 설한 것이 있다.
“ 세상에서 어떠한 흐름이든지
새김을 확립하는 것이74) 흐름을 막는 것이고,
그것을 제어하는 것이라고 나는 말한다.
흐름은 지혜로 인해75) 그쳐지는 것이다.“76)
이것은 ‘지혜에 의한 제어’이다. 필수자구에 대한 올바른 사용도 역시 여기에 포하된다. (d) 그런데 “추위와 더위를 참아낸다.”77)등의 표현으로 설한 것은 ‘인내에 의한 제어’를 뜻한다. (e) 그리고 “이미 생겨난 감각적 쾌학의 욕망에 매인 사유를 용인하지 않는다.”라는78) 등의 표현으로 설한 것은 ‘정진에 의한 제어’를 뜻한다. 생활의 청정도 역시 여기에 포함된다. 이와 같이 다섯 종류의 제어가 있는데, 악하고 불건전한 것을 두려워하는 모든 훌륭한 가문의 아들이 만나야 하는 사건에서의 삼감 등의 일체가 ‘제어로서의 계행’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4) 그리고 ‘불범으로서의 계행’이라는 것은 계행을 지키는데, 신체적으로나 언어적으로나 위범을 행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앞서 나온 “계행이란 어떠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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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rakkhati cakkhundriyam, cakkhundriye samvaram āpajjatī ti : DN. I. 70
74) sati : 새김에 대해서는 이 책의 해제 「중요한 번역술어의 해명」을 보라.
75) paññāya : Prj. Ⅱ. 586에 따르면, ‘물질 등에 대한 무상 등의 통찰을 포함하는 길에 대한 지혜로(rūpādisu pana aniccādipaṭivedhasādhikāya maggapaññāya)’라는 뜻이다.
76) Stn. 1035. yāni sotāni lokasmiṁ ǀ (ajitā ti bhagavā) sati tesaṁ nivāraṇam ǀ sotānam saṁvaraṁ brūmi ǀ paññāy’ete pithiyyare ǁ
77) khamo hoti sītassa uṇhassāti : MN. I. 10. ‘추위와 더위, 굶주림과 목마름, 등에·모기·바람·열기·뱀종류와의 접촉을 견디어내고, 잘못 표현되고 악의적으로 표현된 말을 견디어 낼 수 있고, 괴롭고 아프고 저리고 찌르고 불쾌하고 치명적인 신체적인 느낌이 생겨난 것을 참아낸다.’라고 시설하고 있다.
78) uppannaṁ kāmavitakkaṁ nādhivāsetī’ti : MN. I. 11. ‘이미 생겨난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매인 사유를 용인하지 않고 버리고 제거하고 끝내버리고 없애버리며, 이미 생겨난 분노에 매인 사유를 용인하지 않고 버리고 제거하고 끝내버리고 없애버리며, 이미 생겨난 폭력에 매인 사유를 용인하지 않고 버리고 제거하고 끝내버리고 없애버리며, 이미 생겨난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를 용인하지 않고 버리고 제거하고 끝내버리고 없애버린다.’라고 시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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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Ⅱ) 나머지 [8] 질문 가운데서 ‘계행에는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계행에는 계행의 의미가 있다. 무엇이 계행인가? 제어79)인데, 신체적인 활동 등을 잘 제어하여 혼란이 없게 하는 것을 뜻한다. 혹은 정초80)인데, 착하고 건전한 것들의 확립을 통해서 유지시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설하는 이 두 가지 의미는 언어의 특징을 아는 자들은 인정하는 것이다. 또한 다른 자들은81) “머리의 의미가 계행의 의미이고, 청량의 의미가 계행의 의미이다.”라는82) 등의 방식으로도 그 뜻을 해석한다.
20. (Ⅲ) ‘계행의 특징 기능 현상 토대는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그 가운데, 1) [특징]
여러 가지로 구분되더라도
그 특징은 덕행이다.
여러 가지로 구분되더라도,
형상의 특징은 가시성(가시성)인 것과 같다.83)
비록 청색·황색 등의 구분으로 여러 가지로 차별되더라도, 가시성의 특징을 뛰어넘지 못하므로, 형상의 감역의 특징은 가시성인 것과 마찬가지로, 이와 같이 덕행은 의지 등의 구분에 의해서 여러 가지로 차별되더라도, 제어와 정초의 상태를 뛰어넘지 못하므로, 덕행의 특징은 곧, 신체적 행위 등의 제어와 착하고 건전한 것들의 정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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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samādhāna : 한역에서는 정지(正持)라고 한다.
80) upadhāraṇa : 한역에서 확지(確持)라고 한다.
81) aññe pana : 다른 거룩한 님(阿羅漢)들을 말한다.
82) siraṭṭho sīlattho sītalaṭṭho sīlattho’ti : ‘머리의 의미’와 ‘청량의 의미’라는 것은 계행의 빠알리어 ‘씰라’에 대한 유사언어학적 해석이다. 『해탈도론』에서는 머리의 의미와 청량의 의미를 두의(頭義)와 냉의(冷義)라고 번역했다.
83) sīlanaṁ lakkhanaṁ tassa ǀ bhinnassāpi anekadhā ǀ sanidassanattaṁ rūpassa ǀ yathā bhinnassanekadhā 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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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2) [기능] 이와 같이 그 특징을 갖는 계행은
악계를 부수는 것과
죄악을 여의는 것이
작용과 성취의 의미로써
기능이라고 시설되어 왔다.84)
그러므로 그 계행이라는 것은 작용의 의미로서의 역할로 악계를 부수는 것을 기능으로 삼고, 성취의 의미로서의 역할로 죄악을 여의는 것을 기능으로 삼는다고 알아야 한다. 무릇 특징 등의 경우 가운데, 기능은 작용과 성취를 말하는 것이다.
22. 3) [현상] 4) [토대]
모든 식자들에 의해서
그 현상은 청정이고
부끄러움을 아는 것과 창피함을 아는 것은
그 토대라고 해석되어 왔다.85)
바로 [9] 그 계행은 신체적 청정 언어적 청정 정신적 청정이라고86) 하는 청정으로서 현상을 드러내고, 청정한 상태로 드러나 확고한 상태가 된다. 그리고 부끄러움을 알고 창피함을 아는 것은 식자들에 의해서 그 토대라고 설해졌는데, 그것은 가까운 원인이라는 뜻이다. 부끄러움을 알고 창피함을 알 때 계행이 생겨나서 존속한다. 부끄러움을 모르고 창피함을 모를 때 계행은 생겨나지 않고 존속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계행의 특징 기능 현상 토대를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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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dussīlyaviddhamsanatā ǀ anavajjaguṇo thatā ǀ kiccasampattiatthena ǀ raso nāma pavuccati ǁ
85) soceyyapaccupaṭṭhānam ǀ tayidaṁ tassa viññuhi ǀ ottappañca hirī ceva ǀ padaṭṭhānanti vaṇṇitaṁ ǁ
86) kāyasoceyyaṁ vacīsoceyyaṁ manosoceyyanti : AN. I. 271; Ⅲ. 118; DN. Ⅲ. 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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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Ⅳ) ‘계행에는 어떠한 공덕이 있는가?’ 후회 없음 등의 여러 가지 덕성이 있다. “아난다87)여, 착하고 건전한 계행에는 후회하지 않음의 공덕이 있다.”라고88) 설한 것이 그것이다. 또한 “장자들이여, 계행을 지키고 계행을 갖춘 자에게 이와 같은 다섯 가지 공덕이 있다. 다섯 가지란 무엇인가?
1) 장자들이여, 세상에 계행을 지키고 계행을 갖춘자는 커다란 재산을 획득한다. 장자들이여, 계행을 지키고 계행을 갖춘자에게 이와 같은 첫 번째 공덕이 있다.
2) 장자들이여, 세상에 계행을 지키고 계행을 갖춘 자는 선한 명성을 드날린다. 장자들이여, 계행을 지키고 계행을 갖춘 자에게 이와 같은 두 번째 공덕이 있다.
3) 장자들이여, 세상에 계행을 지키고 계행을 갖춘 자는 누구든지 왕족의 무리이든 바라문의 무리이든 장자의 무리이든 수행자의 무리이든 대중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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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Ānanda : AN. I. 24에 따르면, 부처님의 제자 수행승 가운데 ‘많이 배운 자 가운데 제일(多聞第一:bahussutānaṁ aggo)’이고, ‘새김 있는 님 가운데 제일(satimantānaṁ aggo)’이고, 행동거취가 분명한 님 가운데 제일(gatimantānaṁ aggo)’이고, ‘의지가 확고한 님 가운데 제일(dhitimantānaṁ aggo)’이고, ‘시중드는 님 가운데 제일(upaṭṭhākānaṁ aggo)’이었다. 그는 싸끼야무니 부처님의 사촌으로 같은 날에 태어났으며, 나중에 부처님의 시자가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싸끼야 족의 쑷도다나(Suddhodana) 왕의 형제인 아미또나다(Amitodana)였다. 아난다의 형제로는 이복형제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마하나마(Mahānāma), 아누룻다(Anuruddha)가 있었다. 그는 부처님의 법륜을 굴리기 시작한 이듬해에 싸끼야 족의 왕자 밧디야(Bhaddiya), 아누룻다, 바구(Bhagu), 낌빌라(Kimbila), 데바닷따와 함께 교단에 들어갔다. 그의 친교사(親敎師)는 벨랏타씨싸(Belaṭṭhasīsa)였고 뿐나만따니뿟따(Puṇṇa Mantāniputta)의 설법을 듣고 흐름에 든 님(豫流者 : sotāpaṇṇa)의 경지에 이르렀다. 깨달은 뒤 20년간 부처님에게는 시자가 없었다. 그러나 20년 뒤 모든 위대한 제자들이 부처님을 시봉하길 원했을 때 부처님은 말없이 앉아 있던 아난다를 시자로 택했다. 아난다는 가사나 필수자구나 잠자리를 마련하고 방문객을 맞거나 여행을 준비하는 등의 일을 맡기로 하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부재중에 한 설법을 자신에게 반복해 주길 요청해서 허락을 받았다. 그 후 25년간 아난다는 부처님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씻을 물을 준비하고 발을 씻어드리고 방청소를 하고 모든 곳으로 따라다녔다. 그는 언제나 스승의 손이 닿는 곳에 있다가 스승에게 필요한 것은 미리 알아서 조치했다. 밤에는 단단한 지팡이와 커다란 등불을 들고 부처님의 향실(香室 : Gandhakuṭi) 주변을 아홉 번이나 돌았다. 그 이유는 필요하면 부처님을 깨우고 때로는 주무시는 데 장애가 되는 요인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이후에 아라한의 경지를 얻어 칠엽굴(七葉窟 : Sattapaṇṇaguhā)에서 경전을 결집할 당시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때 아난다가 대부분의 경을 송출하여 후대에 대장경으로 남게 되었다.
88) avippaṭisāratthāni kho ānanda kusalāni sīlāni avippaṭhisārānisamsāni : AN.V.1; 《중아함》(42 : 대정1·485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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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하고, 수치스럽지 않게 대한다. 장자들이여, 계행을 지키고 계행을 갖춘 자에게 이와 같은 세 번째 공덕이 있다.
4) 장자들이여, 세상에 계행을 지키고 계행을 갖춘 자는 미혹이 없이 죽는다. 장자들이여, 계행을 지키고 계행을 갖춘 자에게 이와 같은 네 번째 공덕이 있다.
5) 장자들이여, 세상에 계행을 지키고 계행을 갖춘 자는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좋은 곳, 천상세계에89) 태어난다. 장자들이여, 계행을 지키고 계행을 갖춘 자에게 이와 같은 다섯 번째 공덕이 있다. 장자들이여, 계행을 지키고 계행을 갖춘 자에게 이러한 다섯 가지 공덕이 있다.”라고90) 설한 것과 같다. 그리고 “수행승들이여, 만약 수행승이 ‘나는 동료수행자들에게 사랑을 받고 마음에 들고 존중받고 공경 받고 싶다!’고 바란다면, 계행을 원만히 하고 안으로 마음의 멈춤을 이루고 선정을 버리지 말고 통찰을 갖추어 한가한 곳에서 지내는 자가 되라.”라고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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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sugatiṁ saggaṁ lokaṁ : 좋은 곳, 천상세계에는 신들의 세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존재도 포함된다.
90) pañcime gahapatayo ānisamsā sīlavato sīlasampadāya. katame pañca. idha gahapatayo sīlavā sīlasampanno appamādādhikaraṇaṁ mahantaṁ bhogakkhandhaṁ adhigacchati ayaṁ paṭhamo ānisaṁso sīlavato sīlasampadāya. puna caparaṁ gahapatayo sīlavato sīlasampannassa kalyāno kittisaddo abbhuggacchati, ayaṁ dutiyo ānisaṁso sīlavato sīlasampadāya. puna caparaṁ gahapatayo sīlavā sīlasampanno yaññadeva parisaṁ upasaṅkamati yadi khattiyaparisaṁ yadi brāhmaṇaparisaṁ yadi gahapatiparisaṁ yadi samaṇaparisaṁ, visārado upasaṅkamati amaṅkubhūto, ayaṁ tatiyo ānisaṁso sīlavato sīlasampadāya puna caparaṁ gahapatayo sīlavā sīlasampanno asammūḷho kālaṁ karoti, ayaṁ catuttho ānisaṁso sīlavato sīlasampadāya. puna caparaṁ gahapatayo sīlavā sīlasampanno kāyassa bhedā paraṁ maranā sugatiṁ saggaṁ lokaṁ upapajjati, ayaṁ pañcamo ānisaṁso sīlavato sīlasampadāyā’ti : DN. Ⅱ. 86; Vin. I. 227; Ud. 87; AN. Ⅲ. 253
91) ākaṅkheyya ce bhikkhave bhikkhu sabrahamacārīnaṁ piyo cassaṁ manāpo ca garuca bhāvanīyo ca’’ti. sīlesvevassa paripūrakārī ajjhattaṁ cetosamathamanuyutto anirāka tajjhāno vipassanāya samannāgato brūhetā suññāgārānaṁ : MN. I. 33; AN. Ⅴ. 131 ‘계행을 원만히 하고(sampannasīla)’로 시작하는 이 문장은 각 문단에서 반복되는데, 완전한 세 가지 배움(삼학)을 포함한다. ‘계행을 원만히 하는 것’은 보다 높은 윤리에 대한 수행(adhīsilasikkhā : 增上戒學)을, ‘안으로 마음의 멈춤을 유지하고 선정을 경시하지 않는 것’은 보다 높은 마음에 대한 수행(adhicittasikkhā : 增上心學)을, ‘통찰을 성취’하는 것은 보다 높은 지혜에 대한 수행(adhipaññāsikkhā : 增上慧學)을 뜻한다. 그리고 ‘한가한 곳에서 지내는 것’은 원의는 ‘텅 빈 집에서 지내는 것’이지만 역자가 ‘한가한 곳에서 지내는 것’은 원의는 ‘텅 빈 집에서 지내는 것’이지만 역자가 ‘한가한 곳’으로 의역한 것으로 멈춤과 통찰을 성취하기 위해 가는 것이므로 마지막 두 수행을 포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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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한 것 등의 표현에서 사랑받고 마음에 들게 되는 등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번뇌의 부숨에 이르는 여러 가지 계행의 공덕에 대해서 설했다. 이와 같이 후회 없음 등의 여러 가지 계행의 공덕이 있다.
24. 다시 [10] 또한,
훌륭한 가문의 아들에게
가르침에서 확립이 없다면,
그 계행의 공덕에 관해
누가 정의할 수 있겠는가?92)
강가 강도 야무나 강도 아니고
싸라부 강도 싸라쓰와띠 강도
또는 아찌라바띠 강도 마히 강도
이 모든 커다란 강도 아니다.93)
이 세상의 뭇삶의 더러움을
정화할 수 있다면,
계행의 물이 그 뭇삶의 더러움을
씻어낼 수 있을 뿐이다.94)
비구름을 몰고 오는 바람도,
황갈색 전단나무도 아니다.
진주목걸이도 수정도 아니다.
부드럽게 비추는 월광도 아니다.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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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sāsane kulaputtānaṁ ǀ patiṭṭhā natthi yaṁ vinā ǀ ānisaṁsaparicchedaṁ ǀ tassa sīlassa ko vade ǁ
93) na gaṅgā yamunā cāpi ǀ sarabhū vā sarasvatī ǀ niggagā vāciravatī ǀ mahī vāpi mahā nadī ǁ
94) Sakkuṇanti visodhetuṁ ǀ taṁ malaṁ idha pāṇinaṁ ǀ visodhayati sattānaṁ yaṁve sīlajalaṁ malaṁ ǁ
95) na taṁ sajaladā vātā ǀ na cāpi haricandanaṁ ǀ neva hārā na maṇayo ǀ na candakiraṇ aṅkurā 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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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뭇삶들에게
열뇌를 지멸한다면,
잘 수호되어 지극히 청량한,
고귀한 계행만이 그것을 지멸한다.96)
순풍에도 역풍에도
동일하게 향기를 뿜는
계행의 향기는
어디로든 스며드는 향기와 같다.97)
하늘로 올라가는 계단
혹은 열반의 도시에 드는 문으로서
계행과 동일한 것이
달리 어디에 있겠는가?98)
진주와 수정으로서
장엄한 제왕이라도
계행의 장식으로 장엄한
행자처럼 빛나지 못한다.99)
자기가 비난받는 등의 두려움을
모든 경우에 부수어버리니,
계행은 항상 계행을 지키는 자에게
명성과 안락이 생겨나게 한다.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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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samayantīdha sattānaṁ ǀ pariḷāhaṁ surakkhitaṁ ǀ yaṁ sameti idaṁ ariyaṁ ǀ sīlaṁ accantasītalaṁ ǁ
97) sīlagandhasamo gandho ǀ kuto nāma bhavissati ǀ yo samaṁ anuvāte ca ǀ paṭivāte ca vāyati ǁ
98) saggārohaṇasopānaṁ ǀ aññaṁ sīilasamam kuto ǀ dvāraṁ vā pana nibbāna ǀ naggarassa pavesane ǁ
99) sobhantevaṁ na rājano ǀ muttāmaṇivibhūsitā ǀ yathā sobhanti yatino ǀ sīlabhūsanabhūsitā ǁ
100) attānuvādādibhayaṁ ǀ viddhaṁsayati sabbaso ǀ janeti kittihāsañca ǀ sīla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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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덕성의 근본으로서
모든 죄악의 강력한 파괴자로서의
계행의 공덕에 대한 논의의 문이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101)
[계행의 분류]
25. (Ⅴ) 그리고 ‘계행에는 얼마나 많은 종류가 있는가?’라고 하면,
그것에 대한 답변은 아래와 같다. (1) [일분조] ① 우선 일체의 계행에는 덕행이라는 특징적 관점의 일개조가 있다. (2) ② [이분조(1)] 준수적·금지적 관점의 일개조가 있다. ③ [이분조(2)] 올바른 원만행·기반적 청정행의 관점의 이개조가 있다. ④ [이분조(3)] 삼감적 비삼감적 관점의 이개조가 있다. ⑤ [이분조(4)] 의지적·불의지적 관점의 이개조가 있다. ⑥ [이분조(4)] 한시적·종신적 관점의 이개조가 있다. ⑦ [이분조(6)] 유제약적·무제약적 관점의 이개조가 있다. ⑧ [이분조(7)] 세간적·출세간적 관점의 이개조가 있다. 102) (3) ⑨ [삼분조(1)] 저열한 것·[11] 중간적인 것·수승한 것의 관점의 삼개조가 있다. ⑩ [삼분조(2)] 자기동기적·세상동기적·진리동기적 관점의 삼개조가 있다. ⑪ [삼분조(3)] 집착적·탈집착적·안식적 관점의 삼개조가 있다. ⑫ [삼분조(4)] 청정적·부정적·의혹적 관점의 삼개조가 있다. ⑬ [삼분조(5)] 유학적·무학적·비학비무학적 관점의 삼개조가 있다.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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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guṇānaṁ mūlabhūtassa ǀ dosānaṁ balaghātino ǀ iti sīlassa viññeyyaṁ ānisaṁsakath āmukhanti ǁ
102) cārittavārittavasena duvidhaṁ. tathā ābhisamācārika, ādibrahmacariyakavasena, viratiavirattivasenna, nissitānissitavasena, kālapariyantāpāṇakoṭikavasena, sapariyantāp ariyantavasena, lokiyalokuttaravasena ca.
103) tividhaṁ hīna, majjhima, paṇītavasena. tathā attādhipateyya, lokādhipateyya dhammādhipateyyavasena, parāmatthā, parāmaṭṭha paṭippassaddhivasena, visuddhā, visuddha, vematikavasena, sekkhā, sekkha, navasekkhanāsekkhavasena 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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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분조(1)] 퇴행적·유지적·승진적·관통적 관점의 사개조가 있다. ⑮ [사분조(2)] 수행승·수행녀·미구족계자·재가신자의 관점의 사개조가 있다. ⑯ [사분조(3)] 천성적·관행적·여법적·숙인적 관점의 사개조가 있다. ⑰ [사분조(4) 계율수호적·감관제어적·생활청정적·필수자구의지적 관점의 사개조가 있다.104) (5) ⑱ [오분조(1)] 한정청정적 계행 등의 관점의 오개조가 있다. 『빠띠쌈비다막가』에 “다섯 가지 계행, 한정청정적 계행·무한청정적 계행·원만청정적 계행·무착청정적 계행·안식청정적 계행이 있다.”라고 언급되어 있다. ⑲ [오분조(2)] 또한 버림·여읨·의지 ·제어·불범의 관점의 오개조가 있다.
26. [종류의 유형] 1) [덕행] 일분조의 관점에서 그 의미는 이미 설한 덕행으로서의 계행의 일개조가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2) [준수적·금지적] 이분조의 첫 번째 관점에서, 세존께서 만들고 제정한 학습계율을 지키는 것으로 준수적 계행이 있고, ‘이것은 행해서는 안 된다.’라고 배척한 것을 행하지 않는 것으로 금지적 계행이 있다.106) 그 가운데 그것들의 어의는 이와 같다. 준수적이라는 것은 계행을 원만히 하는 것을 통해서 그 가운데 행작하고 동작하는 것을 뜻하고, 금지적이라는 것은 방지를 통해서 보호하고 수호하는 것을 뜻한다. 그 가운데 준수적인 것은 믿음에 기반한 정진을 통해서 성취되는 것이고, 금지적인 것은 믿음으로 성취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준수적 계행 금지적 계행의 이개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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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catubbidhaṁ hānabhāgiya, ṭhitibhāgiya, visesabhāgiya, nibbedhabhāgiyavasena. tathā bhikkhu, bhikkhunī, anupasampanna, gahaṭṭhasīlavasena, pakati, ācāra, dhammatā, pubbahetukasīlavasena, pātimokkhasaṁvara, indriyasaṁvara, ājīvapārisuddhi, passayasannissitasīlavasena ca.
105) pañcavidhaṁ pariyantapārisuddhisīlādivasena. vuttampi cetaṁ paṭisambhidāyaṁ “pañca sīlāni pariyantapārisuddhisīlaṁ apariyantapārisuddhisīlaṁ, paripuṇṇapārisuddhisīlaṁ, aparāmaṭṭhapārisuddhisīlaṁ, paṭippassaddhipārisuddhisīlan’ti, tathā pahānavera maṇicetanāsaṁvarāvītikkamavasena.
106) cārittasikkhāpada ··· vārittasikkhāpada : 한역에서는 작지계(作持戒), 지지계(止持戒)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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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3) [올바른 원망행 기반적 청정행] 이분조의 두 번째 관점에서, 올바른 원만행은 최상의 원만행을 뜻하는데, 올바른 원만행으로 바로 올바른 원만행의 계행이 있거나 혹은 올바른 원만행에 관하여 제정된 것으로 올바른 원만행의 계행이 있는데, 그것은 여덟 번째인 올바른 생계를 제외한 나머지 계행을 지칭하는 것이다.107) 그리고 청정한 삶의 길에서 기반이 되는 것으로 기반적 청정행의 계행이 있는데, 그것은 여덟 번째인 올바른 생계를 포함한 계행을 지칭하는 것이다.108) 이것은 수행의 앞 단계에서 정화되어야 하는 까닭에 길의 기반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전에 이미 그의 신체적 행위와 언어적 행위와 생활양식은 청정해졌다.”라고109) 설한 것이다. 혹은 사소하거나 아주 사소한 학습계율110)이라고 설한 것이 [12] 올바른 원만행이고 나머지가 기반적 청정행이다. 혹은 양-비방가 111)에 포함되는 것이 기반적 청정행이고, 칸다까112)의 의무에 포함되는 것이 올바른 원만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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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anhisamācāro eva ābhisamācārikaṁ. abhisamācāraṁ vā ārabbha paññattaṁ ābhisamācārikaṁ, ājivaaṭṭhamakato avasesasīlassetaṁ adhivacanaṁ : 세 가지 신체적인 행위(三身業) 네 가지 언어적 행위(四語業)의 일곱 가지 청정한 행위(七情淨業)에 여덟 번째 올바른 생계(正活命)를 포함하면, 그것을 여덟 가지 청정한 행위(八情淨業)라고 한다. 여기서 여덟 번째인 올바른 생계(ājīvaṭṭhamaka)를 제외하면 일곱 가지가 올바른 원만행의 계행이다. 한역에서는 등정행계(等征行戒)라고 한다.
108) maggabrahmacariyassa ādibhāvabhūtani ādibrahmacariyakam, ājīvatthāmakasīlassetaṁ adhivacanaṁ : 올바른 원만행의 계행에 여덟 번째인 올바른 생계(ājīvaṭṭhamaka)를 포함하면, 기반적 청정행의 계행이 된다. 한역에서는 초범행계(初梵行戒)라고 한다.
109) pubbeva kho panassa kāyakammaṁ vacīkammaṁ ājīvo suparisuddho hotī’ti : MN. Ⅲ. 289
110) sikkhapādani khuddānukhuddakāni : Mrp. Ⅱ. 348에 따르면, 사소한 계율은 승단추방죄(斷頭罪 : pārājika)를 제외한 학습계목을 말한다. 승단추방죄에 비해서 예를 들어, 승단잔류죄(僧殘罪 : Saṅghādisesā)는 사소한 것이고, 점점 가벼운 죄들은 예를 들어, 추악죄(추악죄 : Pārājika와 Sanghādisesā와 같은 중죄를 저지르려다 미수로 끝난 죄) 등은 더욱 사소한 것이 된다.
111) Ubhatovibhaṅga :한역에서는 『분별부』(分別部)라고 하며, 율장3권 『빅쿠비방가』와 율장4권 『빅쿠니비방가』를 말한다.
112) khandhaka : 우리말로 하자면 『다발부』인데, 한역에서는 『건도부』(健度部)라 하며, 율장1권 『마하박가』(Mahāvagga)와 율장2권 『쭐라박가』(Cūḷavagga)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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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수행승들이여, 참으로 수행승이 올바른 원만행의 원칙을 충족시키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기반적 청정행의 원칙을 충족시킨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다.”라고113) 설한 것이다. 이와 같이 올바른 원만행의 계행·기반적 청정행의 계행의 이개조가 있다.
28. 4) [삼감적·비삼감적] 이분조의 세 번째 관점에서, 살생 등을 삼가는 것으로 삼감적 계행이 있고, 의도 등으로 구성된 다른 것들로서 비삼감적 계행이 있다.115) 이와 같이 삼감적 계행·비삼감적 계행의 이개조가 있다.
29. 5) [의존적·비의존적] 이분조의 네 번째 관점에서, 의존에는 갈애에의 의존과 견해에의 의존의 두 가지가 있는데, 그 가운데, “는 이러한 계행을 통해 천신이나 하늘의 존재가 되리라.”라고116) 이와 같이 존재의 성취를 바라는 자에 의해서 유지되는 것으로 갈애에 의존적 계행이 있고, “계행에 의해서 청정해진다.”라고117) 이와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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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so vata bhikkhave bhikkhu ābhisamācārikaṁ dhammaṁ aparipūretvā ādibrahmacariyakaṁ dhammaṁ paripūressatī’ti netaṁ thānaṁ vijjatī’ti : AN. Ⅲ. 14, 역자의 《앙굿따라니까야》에서의 번역은 아래와 같다: ‘[동료수행자에 대하여 존중이 없고 공경이 없고 화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바르고 원만한 행위의 원칙을 충족시킨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다.] 바르고 원만한 행위의 원칙을 충족시키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학인의 규칙을 충족시킨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다.’ 여기서 보듯, ‘올바른 원만행의 원칙’은 ‘바르고 원만한 행위의 원칙’으로 번역했고, ‘기반적 청정행의 원칙(ādibrahmacariyakaṁ dhammaṁ)’은 원래 ‘학인의 원칙(sekhaṁ dhammaṁ)’이라고 되어 있다. ‘학인의 원칙’은 Lba. Ⅲ. 158에 따르면, 수행승이 식사하거나 가사를 갖추거나 거리를 유행하거나 재가자를 방문하는 등에 대란 학습계율을 말한다.
114) evaṁ ābhisamacārika-ādibrahmacariyakavasena duvidhaṁ : 한역에선는 등정행계(等正行戒)와 초범행계(初梵行戒)인데, 『해탈도론』에서는 미세게(微細戒)와 범행지초(梵行地初)라고 되어 있다.
115) viratisila ··· aviratisīla : 한역에서 이계(離戒), 불리계(不離戒)라고 한다. 역자는 삼감적 계행과 비삼감적 계행이라고 번역한다. 한문 용어가 아닌 우리말에 비(非)나 적(的)이란 한자를 붙여 삼감적, 비삼감적이라고 한 이유는 이적(離的), 불리적(不離的)이라고 번역하면 더욱 난해해지기 때문이다. 삼감적·비삼감적을 한문용어로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116) imināham sīlena devo vā bhavissāmi devaññataro vā’ti : AN. Ⅳ. 461
117) sīlena suddhī’ti : Dha. 183; Vibh. 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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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해의 청정을 통해서 유지되는 것으로 견해에 의존적 계행이 있다.
그리고 출세간적으로도 세간적으로도 그 출세간의 자량이 원인이 되는 것으로 비의존적 계행이 있다. 이와 같이 의존적 계행·비의존적 계행이 이개조가 있다.118)
30. 6) [한시적·종신적] 이분조의 다섯 번째 관점에서, 시간적으로 한정적으로 지키는 것으로 한시적 계행이 있고, 목숨이 있는 한 지켜서 유지시키는 것으로 종신적 계행이 있다. 이와 같이 한시적 계행 종신적 계행의 이개조가 있다.119)
31. 7) [유제약적·무제약적] 이분조의 여섯 번째 관점에서, 이득·명예·친척·지체·생명에 의해서 제한된 것으로 유제약적 계행이 있고, 그 반대로는 무제약적 계행이 있다. 이와 같이 유제약적 계행, 무제약적 계행이 이개조가 있다. 이와 같이 유제약적 계행, 무제약적 계행의 이개조가 있다. 『빠띠쌈비다막가』에서 이와 같이 “계행으로서 유제약적인 것은 어떠한 것인가? 계행으로서 이득에 제약적인 것이 있고, 계행으로서 명예에 제약적인 것이 있고, 계행으로서 친척에 제약적인 것이 있고, 계행으로서 지체에 제약적인 것이 있고, 계행으로서 생명에 제약적인 것이 있다. 계행으로서 이득에 제약적인 것은 어떠한 것인가? 여기 어떠한 자가 이득을 원인으로 이득을 조건으로 이득을 이유로 수용한 계행을 어기면, 이것이 [13] 계행으로서 이득에 제약적인 것이다.”라고120) 설했다. 이과 같은 방식으로 다른 것들도 상세히 설명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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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evaṁ nissitānissitavasen duvidhaṁ : 『해탈도론』에서는 의계(依戒)와 불의계(不依戒)라고 한다. 역자는 의지적(依止的) 계행과 불의지적(不依止的) 계행으로 번역한다.
119) kālapariyanta-āpāṇakoṭikavasena duvidhaṁ : 『해탈도론』에서는 시분계(時分戒)와 진형계(盡形戒)라고 한다. 역자는 한시적(限時的) 계행과 종신적(終身的) 계행이라고 번역한다.
120) katamaṁ taṁ sīlaṁ sapsriyantaṁ, atthi sīlaṁ lābhapariyantaṁ, atthi sīlaṁ yasapariyantam, atthi sīlaṁ natipariyantam, atthi sīlaṁ aṅgapariyantaṁ, atthi sīlaṁ, jīvitapariyantaṁ. katamaṁ taṁ sīlaṁ labhapariyantaṁ, idhekacco lābhahetu lābhapaccayā lābhakāranā yathāsamādinnaṁ sikkhāpadaṁ vītikkamati, idaṁ taṁ sīlaṁ lābhapariyantan ti : Paṭis. I.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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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약적인 것에 대한 설명은 이와 같이 “계행으로서 이득에 무제한 적인 것은 어떠한 것인가? 여기 어떠한 자가 이득을 원인으로 이득을 조건으로 이득을 이유로 수용한 계행을 어기려는 마음이 생겨나지 않는데, 어떻게 그가 어길 것인가! 이것이 계행으로서 이득에 무제약적인 것이다.”라고121) 설했다. 이처럼 유제약적 계행 무제약적 계행이 이개조가 있다.122)
32. 8) [세간적 출세간적] 이분조의 일곱 번째 관점에서, 일체의 번뇌가 있는 유루적인 것으로 세간적 계행이 있고, 번뇌를 여읜 무루적인 것으로 출세간적 계행이 있다. 이 가운데 세간적 계행은 수승한 존재로 이끌어 존재의 출리의 자량이 된다. 이와 같이 세존께서 “계율은 의미가 제어이고, 제어는 의미가 기쁨이고, 기쁨은 의미가 안온이고, 안온은 의미가 행복이고, 행복은 의미가 삼매이고, 삼매는 의미가 있는 그대로의 앎과 봄이고, 있는 그대로의 앎과 봄은 의미가 싫어하여 떠남이고, 싫어하여 떠남은 의미가 사라짐이고, 사라짐은 의미가 해탈이고, 해탈은 의미가 해탈에 대한 앎과 봄이고, 해탈에 대한 앎과 봄은 의미가 집착없이 완전한 열반에 드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계율의 논의가 있고, 그것을 위해 계율의 고찰이 있고, 그것을 위해 계율의 학습이 있고, 그것을 위해 계율의 청정이 있으니, 곧, 남김 없는 마음의 해탈이다.”라고123) 설한 것과 같다. 출세간적 계행은 존재의 여읨으로 이끌고 성찰에 관한 앎의 토대가 된다. 이와 같이 세간적 계행 출세간적 계행의 이개조가 있다.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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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katamaṁ taṁ sīlaṁ na lābhapariyantaṁ. idhekacco lābhahetu lābhapaccayā lābhakāraṇā yathāsamādinnaṁ sikkhāpadaṁ vītikkamāya cittampi na uppādeti, kiṁ so vītikkamissati, idaṁ taṁ sīlaṁ na lābhapariyantan’ti : Paṭis. I. 44
122) sapariyantāpariyantāvasena duvidhaṁ : 한역에서는 유제한(有制限)과 무제한(無制限)인데, 해탈도론에서는 유변계(有邊戒)와 무변계(無邊戒)라고 한다.
123) vinayo saṁvaratthāya, saṁvaro avippaṭisāratthāya, avippaṭisāro pāmojjatthāya, pāmojjaṁ pītatthāya, pīti passaddhatthāya, passaddhi sukhattāya, sukhaṁ samādhatthāya, samādhi yathādhūtañāṇadassanatthāya, yathādhūtañāṇadassanaṁ nibbidatthāya, nibbidā virāgatthāya, virāgo, vimuttatthāya, vimutti vimuttiñāṇadassanatthāya, vimuttiñāṇadassanaṁ, anupādāparinibbānatthāya, etadatthā kathā, etadatthā mantanā, etadatthā upanisā, etasatthaṁ sotāvadhānaṁ, yadidaṁ anupādācittassa vimokkho’ti : Vim. Ⅴ. 164
124) evaṁ lokiyalokuttaravasena : duvkdhaṁ : 한역에서는 세간계(世間戒)와 출세간계(出世間戒)라고 한다. 해탈도론에서는 세계(世戒)와 출세계(出世戒)라고 한다.
P134
33. 9) [저열 중간 수승] 삼분조의 첫 번째 관점에서, 저열한 의욕 마음 정진 탐구를 통해 일어난 것으로 저열한 계행이 있고, 중간적 의욕 마음 정진 탐구를 통해 일어난 것으로 중간적 계행이 있고, 수승한 의욕 마음 정진 탐구를 통해 일어난 것으로 수승한 계행이 있다. 혹은 명예를 바라고 지키는 것으로 저열한 계행이 있고, 공덕의 결과를 바라고 지키는 것으로 중간적 계행이 있고, 공덕의 결과를 바라고 지키는 것으로 중간적 계행이 있고,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이라는 고귀한 본성에 의존하여 지키는 것으로 수승한 계행이 있다. 혹은 “나는 계행을 갖추고 있지만, 이들 다른 수행승들은 파계자들로서 악한 성품을 지닌 자들이다.”라고125) 자기를 칭찬하고 타인을 경멸하는 것 등에 의해 오염되는 것으로 저열한 계행이 있고, 그러한 것에 오염 되지 않는 세간적인 계행으로 중간적 계행이 있고, 출세간적 계행으로 수승한 계행이 있다. 혹은 갈애를 통해서 존재를 향략하기 위해 일으키는 것으로 저열한 계행이 있고, 자신의 해탈을 위해 일으키는 것으로 중간적 계행이 있고, 일체 뭇삶의 해탈을 위해 일으키는 초월의 길에 의한 계행126)으로서 수승한 계행이 있다. 이와 같이 저열한 계행 중간적 계행 수승한 계행의 삼개조가 있다.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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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ahamasmi sīlasampanno, ime panaññe dhikkhū dussīlā pāpadhammā’ti : MN. I. 193
126) pāramitāsila : 한역의 바라밀계(波羅蜜戒)를 말한다. 상세한 것은 Vism. 324/9 : 124를 참조하라.
127) evaṁ hīnamajjhimapaṇītavasena tividhaṁ : 한역에서 일반적으로 열계(劣戒), 중계(中戒), 승계(勝戒)라고 한다. 해탈도론에서는 하계(下戒), 중계(中戒), 상계(上戒)라고 한다.
P 135
34. 10) [자기동기적·세상동기적·진리동기적] 삼분조의 두 번째 관점에서, 자기에게 부적합한 것을 버리기 원하고 자기를 중시하고 자기를 존중하는 것을 통해 [14] 일으키는 것으로 자기동기적 계행이 있고, 세상을 비난하는 것을 버리기 원하고 세상을 중시하고 세상을 존중하는 것을 통해 일으키는 것으로 세상동기적 계행이 있고, 광대한 진리를 섬기기 원하고 진리를 중시하고 진리를 존중하는 것을 통해 일으키는 것으로 진리동기적 계행이 있다. 이와 같이 자기동기적 계행·세상동기적 계행·진리동기적 계행의 삼개조가 있다.128)
35. 11) [집착적·탈집착적·안식적] 삼분조의 세 번째 관점에서, ‘의존적인 것’이라고 언급한129) 갈애와 견해에 취착되는 것으로 집착적 계행이 있고, 훌륭한 범부의 길에 자량이 되고 학인의 길과 상응하는 것으로 탈집착적 계행이 있고, 학인의 경지나 무학의 경지와 상응하는 것으로 안식적 계행이 있다. 이와 같이 집착적 계행·탈집착적 계행·안식적 계행의 삼개조가 있다.
36. 12) [청정적·부정적·의혹적] 삼분조의 네 번째 관점에서, 죄악을 범하지 않고 충족시키거나 또는 범했으나 참회하는 것으로 청정적 계행이 있고, 죄악을 범하고도 참회하지 않는 것으로 부정적 계행이 있고, 죄악의 대상·죄악의 죄목·범행의 유무죄에 대하여 의혹이 있는 것으로 의혹적 계행이 있다. 이 가운데 수행자는 부정적 계행을 정화하고, 의혹적인 범죄의 대상에 대하여 범행을 삼가고 의혹적 계행을 제거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그에게 평안이 생겨날 것이다. 이와 같이 청정적 계행 부정적 계행 의혹적 계행의 삼개조가 있다.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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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evaṁ attādhipateyya-lokādhipateyya-dhammādhipateyyavasena tivkdhaṁ : 한역에서는 아증상계(我增上戒), 세증상계(世增上戒), 법증상계(法增上戒)라고 한다. 『해탈도론』에서는 의신계(依身戒), 의세계(依世戒), 의법계(依法戒)라고 한다.
129) nissitanti vu ttam : Vism. 12/1 : 29를 참조하라.
130) evaṁ parāmaṭṭha-parāmaṭṭha-paṭippassaddhavasena tivkdhaṁ : 한역에서는 집취계(執取戒), 무집취계(無執取戒), 안식계(安息戒)이라고 한다. 『해탈도론』에서는 촉계(觸戒), 불촉계(不觸戒), 의계(猗戒)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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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13) [유학적·무학적·비학적무학적] 삼분조의 다섯 번째 관점에서, 네 가지 고귀한 길132)이나 세 가지 수행자의 경지133)와 일치하는 것으로 유학적 계행이 있고, 거룩한 님의 경지와 일치하는 것으로 무학적 계행이 있고, 그 나머지 것으로 비학비무학적 계행이 있다. 이와 같이 유학적 계행·무학적 계행·비학비무학적 계행의 삼개조가 있다.134)
38. 그런데 세상에서는 뭇삶들의 각각의 본성도 씰라(sīla) - 계행이라는 의미와 성품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 라고 하는데, 그와 관련해서 “이 사람은 낙천적 성품을 갖고 있다. 이 사람은 비관적 성품을 갖고 있다. 이 사람은 투쟁적 성품을 갖고 있다. 이 사람은 장엄적 성품을 갖고 있다.”라고135) 설하고 있다. 그 때문에 빠띠쌈비다막가에서 교설로써 “세 가지 성품, 착하고 건전한 성품·악하고 불건전한 성품·중립적인 성품이 있다.”라고도136) 설하고 있다. 이와 같이 착하고 건전한 성품 등의 세 가지가 있다. 그 가운데 악하고 불건전한 성품은 여기서 의도하는 계행의 특징 등과 하나도 합치하지 않는 까닭에, 여기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위에서 기술한 방식으로 세 가지 계행이 있다고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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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evaṁ visuddh-avisuddha-vematika-ādivasena tividhaṁ : 한역에서는 청정계(淸淨戒), 불청정계(不淸淨戒), 의혹계(疑惑戒)인데, 『해탈도론』에는 청정계(淸淨戒), 불청정계(不淸淨戒), 유의계(有疑戒)라고 되어 있다.
132) catu ariyamaggā : 한역의 사성도(四聖道)로 흐름에 드는 길(豫流道), 한번 돌아오는 길(一來道), 돌아오지 않는 길(不還道), 거룩한 길(阿羅漢道)을 말한다.
133) tisso sāmaññaphalā : 한역의 삼사문과(三沙門果)로 흐름에 드는 경지(豫流果), 한번 돌아오는 경지(一來果), 돌아오지 않는 경지(不還果)를 말한다.
134) evaṁ sekkha-asekkha-nevasekkhanāsekkha-vasena tivi dham : 일반적 한역에 일치하게 『해탈도론』에서도 학계(學戒), 무학계(無學戒), 비학비무학계(非學非無學戒)로 되어 있다.
135) avaṁ sukhasīlo, ayaṁ dukkhasīlo, ayaṁ kalahasīlo, ayaṁ maṇḍanasīlo’ti : Paṭis. I. 44 낙천적 성품, 비관적 성품, 투쟁적 성품, 장엄적 성품을 각각 한역에서는 낙계(樂戒), 고계(苦戒), 쟁계(諍戒), 장엄계(莊嚴戒)라고 한다.
136) tiṇi sīlāni, kusalasīlaṁ akusalasīlaṁ abyākatasīlaṁ ti : Paṭis. I. 44 착하고 건전한 성품, 악하고 불건전한 성품, 중립적인 성품을 각각 한역에서는 선계(善戒), 불선계(不善戒), 무기계(無記戒)라고 한다.
P 137
39. 14) [퇴행적·유지적·승진적·관통적] 사분조의 첫 번째 관점에서,
여기 악한 계행에 종사하고
유덕한 계행에 종사하지 않으니,
사건을 범해도
무지한 자는 잘못을 보지 못한다.137)
잘못된 [15] 사유가 많고
감관을 수호하지 않아
이와 같은 자에게
참으로 퇴행적 계행이 생겨난다.138)
그리고 여기 계행의
성취를 통해서 기뻐하여
명상수행에 매진하여도
그 의미를 만족시키지 못한다.139)
계행만으로 만족하지만,
더 나아가 노력하지 않는
그러한 수행승에게는
그 계행은 유지적 계행이다.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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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 yadha sevati dussīle ǀ sīlavante na sevati ǀ vatthuvītikkame dosaṁ ǀ na passati aviddasu ǁ
138) micchāsankappabahulo ǀ indriyāri na rakkhati. ǀ evarūpassa ve sīlaṁ ǀ jāyate hānabhāgiyaṁ ǁ
139) yo panattamano hoti ǀ sīlasampattiyā idha ǀ kammaṭṭhānānuyogamhi ǀ na uppādeti mānasaṁ ǁ
140) tuṭṭhassa sīlamattena ǀ aghaṭantassa uttari ǀ tassa taṁ ṭhitibhāgiyaṁ ǀ sīlaṁ bhavatibhikkhuno ǁ
P 138
그리고 계행을 구족하여
삼매를 위해 노력하는 자,
이러한 수행승에게
그 계행은 승진적 계행이다.141)
계행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싫어하여 떠남을 닦는 자
이러한 수행승에게
그 계행은 관통적 계행이다.142)
이와 같이 퇴행적·유지적·승진적·관통적 계행의 사개조가 있다.143)
40. 15) [수행승·수행녀·미구족계자·재가신자의 계행] 사분조의 두 번째 관점에서, 수행승들에 관해서 시설된 학습계율로서 수행녀들을 위해 시설된 것과 달리 수행승들이 지켜야 하는 것으로 수행승의 계행144)이 있고, 수행녀들에 관해서 시설된 학습계율로서 수행승들을 위해 시설된 것과는 달리 수행녀들이 지켜야 하는 것으로 수행녀의 계행145)이 있고, 사미와 시미니들을 위한 열 가지 계행146)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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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 sampannasīlo ghaṭati ǀ samadhatthaya yo pana ǀ visesabhāgiyaṁ sīlaṁ ǀ hoti etassagbhikkhuno ǁ
142) atuṭṭho sīlamattena ǀ nibbidaṁ yonuyuñjati ǀ hoti nibbedhabhāgiyaṁ ǀ sīlametassa bhikkhuno ti ǁ
143) evaṁ hānabhāgita-thitibhāgiya-visesabhāgiya-nibbedhabhāgiyavasena catubbidhaṁ : 한역에서는 퇴분계(退分戒), 주분계(住分戒), 승분계(勝分戒), 결택분계(決擇分戒)라고 한다. 『해탈도론』에는 퇴분계(退分戒), 주분계(住分戒), 승분계(勝分戒), 달분계(達分戒)로 되어 있다.
144) bhikkhusīla : 《빠알리율장》의 비구계는 227계이다.
145) bhikkhunīsīla : 《빠알리율장》의 비구니계는 311이다.
146) dasasīlāni : 십계(十戒)[1. 살아 있는 생명을 해치는 것을 삼가는 것(不殺生 : pāṇātipātā veramaṇī), 2. 주지 않는 것을 빼앗는 것을 삼가는 것(不偸盜 : adinnādānā veramaṇī), 3. 순결하지 못한 삶을 삼가는 것(不邪淫 : abrahmacariyā veramaṇī), 4. 거짓을 말하는 것을 삼가는 것(不妄語 : musāvādā veramaṇī), 5. 곡주나 과일주 등의 취기 있는 것에 취하는 것을 삼가는 것(不飮酒 : surāmerayamajjapamādaṭṭhānā veramaṇī), 6. 때아닌 때 먹는 것을 삼가는 것(不非時食戒 : vikālabhojanā veramaṇī), 7. 노래·춤·음악·연극 등을 보는 것을 삼가는 것(不得歌舞娼技及觀聽), 8. 꽃다발 향료 크림을 화장하고 장식하는 것을 삼가는 것(不得脂粉塗身 : mālāgandhavilepanadhāraṇamaṇḍanavibhūsanaṭṭhānā veramaṇī), 9. 높은 침대나 큰 침대에서 받는 것을 삼가는 것( 不得上高廣大床 : uccāsayanamahāsayanā veramaṇī), 10. 금은을 받는 것을 삼가는 것(不蓄金銀寶戒 : jātarūparajatapaṭiggahaṇā veramaṇ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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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구족계자의 계행이 있고, 재가여자신도와 재가남자신도를 위한 상시계율인 다섯 가지 학습계율,147) 용맹정진할 경우의 열 가지 학습계율,148) 포살시의 여덟 가지 학습계율149)로서 재가신자의 계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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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 pañcasilkkhāpadāni : 1. 살아 있는 생명을 해치는 것을 삼가는 것(不殺生 : pāṇātipātā veramaṇī), 2. 주지 않는 것을 빼앗는 것을 삼가는 것(不偸盜 : adinnādānā veramaṇī), 3. 순결하지 못한 삶을 삼가는 것(不邪淫 : abrahmacariyā veramaṇī), 4. 거짓을 말하는 것을 삼가는 것(不妄語 : musāvādā veramaṇī), 5. 곡주나 과일주 등의 취기 있는 것에 취하는 것을 삼가는 것(不飮酒 : surāmerayamajjapamādaṭṭhānā veramaṇī),
148) dasasikkhāpadāni : 사미와 사미니의 열 가지 계율(十戒)와 동일하다.
149) uposathaṅga : 여덟 가지 덕목을 갖춘 포살. 여덟 가지 재계를 갖춘 포살. 한역에서는 팔관재계(八關齋戒), 팔재개(八齋戒)라고 한다. AN. I. 205의 포살의 덕목에 대한 경(Uposathangsutta)에 상세히 등장한다. : 1. 거룩한 님은 목숨이 다하도록,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버리고,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삼가고, 몽둥이를 놓아버리고, 칼을 놓아버리고, 부끄러움을 알고, 자비심을 일으키고, 일체의 생명을 이롭게 하고 애민히 여긴다. 나도 바로 오늘 낮 오늘 밤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버리고,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삼가고, 몽둥이를 놓아버리고, 칼을 놓아버리고, 부끄러움을 알고, 자비심을 일으키고, 일체의 생명을 이롭게 하고 애민히 여기리라. 이러한 성품으로 나는 거룩한 님을 따르며, 포살을 지킬 것이다.(不殺生). 2. 거룩한 님은 목숨이 다하도록, 주지 않는 것을 빼앗는 것을 버리고, 주지 않는 것을 빼앗는 것을 삼가고, 주는 것만을 취하고, 주어진 것만을 바라고, 도둑질하지 않고, 청정한 마음을 지닌다. 나도 바로 오늘 낮 오늘 밤 주지 않는 것을 빼앗는 것을 버리고, 주지 않은 것을 빼앗는 것을 삼가고, 주는 것만을 취하고, 주어진 것만을 바라고, 도둑질하지 않고, 청정한 마음으로 지내리라. 이러한 모한 성품으로 나는 거룩한 님을 따르며, 포살을 지킬 것이다.(不偸盜). 3. 거룩한 님은 목숨이 다하도록 순결하지 못한 삶을 버리고, 순결한 삶을 살고, 멀리 여읨의 삶을 살고, 천한 행위인 성적 접촉을 삼간다. 나도 바로 오늘 낮 오늘 밤 순결하지 못한 삶을 버리고, 순결한 삶을 살고, 멀리 여읨의 삶을 살고, 천한 행위인 성적 접촉을 삼가리라. 이러한 성품으로 나는 거룩한 님을 따르며, 포살을 지킬 것이다.(不邪淫) 4. 거룩한 님은 목숨이 다하도록, 거짓말을 버리고, 거짓말을 삼가고, 진실을 말하고, 진실과 관련된 것, 사실인 것, 신뢰할 수 있는 것, 세상을 속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나도 바로 오늘 낮 오늘 밤 거짓말을 버리고, 거짓말을 삼가고, 진실을 말하고, 진실과 관련된 것, 사실인 것, 신뢰할 수 있는 것, 세상을 속이지 않는 것을 말하리라. 이러한 성품으로 나는 거룩한 님을 따르며, 포살을 지킬 것이다(不妄語). 5. 거룩한 님은 목숨이 다하도록, 곡주나 과일주 등 취하게 하는 것을 마시는 것을 버리고, 곡주나 과일주 등 취하게 하는 것을 마시는 것을 삼간다. 나도 바로 오늘 낮 오늘 밤 곡주나 과일주 등 취하게 하는 것을 마시는 것을 버리고 곡주나 과일주등 취하게 하는 것을 마시는 것을 삼가리라. 이러한 성품으로 나는 거룩한 님을 따르며, 포살을 지킬 것이다.(不飮酒). 6. 거룩한 님은 목숨이 다하도록, 하루 한 끼 식사를 하고 저녁은 들지 않고, 때 아닌 때 식사를 삼간다. 나도 바로 오늘 낮 오늘 밤 하루 한 끼 식사를 하고 저녁은 들지 않고, 때 아닌 때 식사를 삼가리라. 이러한 성품으로 나는 거룩한 님을 따르며, 포살을 지킬 것이다.(一食非時不食). 7. 거룩한 님은 목숨이 다하도록, 춤, 노래, 음악, 연극을 보거나 화환, 향기, 크림을 가지고 단장하고 치장하는 것을 삼간다. 나도 바로 오늘 낮 오늘 밤 춤, 노거나 화환, 향기, 크림을 가지고 단장하고 치장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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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수행승 수행녀 미구족계자 재가신자의 계행의 사개조가 있다.
41. 16) [천성적·관행적·여법적·숙인적] 사분조의 세 번째 관점에서, 웃따라꾸루151) 대륙의 사람들에게는 계행을 위범하지 않는 것으로 천성적 계행이 있고, 종족·지방·종파에게는 각각 규칙을 준수하는 것으로 관행적 계행이 있고,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여법이 있다. 보살이 모태에 들 때, 보살의 어머니에게는 남자들에 대한 감각적인 쾌락의 욕망을 수반하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으며, 또한 보살의 어머니는 오염된 마음을 지닌 어떠한 남자들에 의해서도 범접되지 않는다.”라고152) 설한 경에서 보살의 어머니의 계행처럼 여법적 계행이 있고, 마하깟싸빠 등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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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 삼가리라. 이러한 성품으로 나는 거룩한 님을 따르며, 포살을 지킬 것이다.(不得歌舞娼技及觀聽不得指粉塗身). 8. 거룩한 님은 목숨이 다하도록, 높은 침대, 큰 침대를 버리고 높은 침대, 큰 침대를 삼가고 낮은 침대 즉 안락의자나 풀로 엮은 깔개에서 잠을 청한다. 나도 바로 오늘 낮 오늘 밤 높은 침대, 큰 침대를 버리고 높은 침대, 큰 침대를 삼가고, 낮은 침대 즉 안락의자나 풀로 엮은 깔개에서 잠을 청하리라. 이러한 성품으로 나는 거룩한 님을 따르며, 포살을 지킬 것이다.(不得上高廣大床)
150) evam bhikkhu-bhikkhuni-anupasampanna-gahatthavasena catubbidham : 한역에서는 비구계(비구계), 비구니계(비구니계), 미구족계(미구족계), 백의계(백의계)라고 되어 있다.
151) Uttarakuru : 한역의 북구로주(북구로주 : uttarakuru)를 말한다. 이 북구로주에 사는 사람들은 본래 모두 선인(선인)들로서 계행을 어기지 않는다고 한다. 인도의 우주관에서 수미산왕과 수미산을 둘러싼 네 개의 대륙의 이름과 관계된 것이다. 동쪽의 뿝바비데하(pubbavimideha) 대륙은 동승신주(동승신주)라고 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남쪽의 잠부디빠(jambudipa)대륙은 염부제(염부제) 또는 남섬부주(남섬부주)라고 하고, 서쪽의 아빠라고야나(apanagoyana) 대륙은 서우화주(서우화주), 북쪽의 웃따라꾸루(uttarakuru) 대륙은 북구로주(북구로주)라고 한다.
152) dhammate esa ananda yada bodhisatto, matukucchim okkanto hoti na bodhisattamatu purisesu manasam uppajji kamagunupasamhitan’ti : DN. Ⅱ.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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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한 뭇삶들의 계행 또는 보살의 그때그때 태어날 때의 계행처럼 숙인적 계행이 있다. 이와 같이 천성적·관행적·여법적·숙인적 계행의 사개조가 있다.153)
[네 가지 청정계행(사정계)]
42. 17) [계율수호적·감관제어적·생활청정적·필수자구의지적]154) 사분조의 네 번째 관점에 관한 것이다. 세존께서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이 있는데, 의무계율에 의한 제어를 준수하고, 행실과 행경을 원만히 하여, 사소한 잘못에서 두려움을 보고 학습계율을 수용하여 배운다.”라고155) 설한 그 계행은 계율수호적 계행156)을 지칭한 것이다. 그리고 “① 시각으로 형상을 보지만157) 그 인상에 집착하지 않고 [16] 그 연상에 집착하지 않는다.158) 만약 시각능력을 제어하지 않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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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 evaṁ pakati-ācāra-dhammatā-pubbahetukavasena catubbidham : 한역에서는 자연계(自然戒), 관행계(慣行戒), 법성계(法性戒), 숙인계(宿因戒)라고 한다. 『해탈도론』에는 성계(性戒), 행계(行戒), 법지계(法志戒), 초인계(初因戒)라고 되어 있다.
154) pātimokkhasaṁvarasīla, indriyasaṁvarasīla, ājīvapārisuddhisīla, paccayasannissitasīla : 네 가지 청정계행(四淨戒 : catupārisuddhisīla)의 내용을 소개하는 것이다.
155) idha bhikkhu pātimokkhasaṁvarasaṁvuto viharati ācāragocarasampanno aṇumattesu vajjesu bhayadassāvī samādāya sikkhati sikkhāpadesū’ti : AN. Ⅱ. 22, 39; Vibh. 224; MN. Ⅲ. 2
156) pātimokkhasaṁvarasīla : 한역에서는 별해탈율의(別解脫律儀) 라고 하는데, 『해탈도론』에는 바라제목차위의계(波羅提木叉威儀戒)라고 되어 있다.
157) so cakkhunā rūpaṁ disvā : 역자가 시각으로 번역한 것은 눈(cakkhu)을 의미하는데, 눈의 종류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이 책(DN.Ⅱ.123)과 그 주석을 보라. Smv. 183에 따르면, 보편의 눈은 일체지지(一切知智 : sabbaññutanāna)를 말하고, 정안(淨眼)은 시각의식(視覺意識 cakkhuviññāṇa)을 지닌 것을 말하고 여기서 ‘시각으로 형상을 보고’에서 의미하는 시각은 정안을 말한다.
158) na nimittaggāhī hoti nānubyañjanaggāhī : 일반적으로 한역에서 니밋따(nimitta)는 상(相)이라고 번역되고 아누비얀자나(anuvyanana)는 수상(隨相)이라고 번역되는데, 썩 만족스러운 번역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남전(相應 Ⅳ. 168)에서는 니밋따를 총상(總相), 아누비얀자나는 별상(別相)이라고 했고 Krs. Ⅱ. 63에서는 니밋따를 외관(its outer view)이라고 했고, 아누비얀자나를 상세(its lesser details)라고 했다. Rbg. Ⅳ. 67에서는 니밋따는 표상(表象 : Vorstellung), 아누비얀자나는 연상(聯想 : Assoziation)이라고 번역했다. Cdb. 1193에서는 인상(sign)과 특징(feature)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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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과 근심, 그리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가 자신을 침범할 것이므로, 제어의 길을 따라서, 시각능력을 보호하고, 시각능력을 수호한다. 청각으로 소리를 듣지만.... 후각으로 냄새를 맡지만.... 미각으로 맛을 보지만... 촉각으로 감촉을 촉지하지만... 정신으로 사실을 인식하지만 그 인상에 집착하지 않고... 정신능력을 수호한다.”라고159) 설한 것은 감관제어적 계행160)을 지칭한 것이다. 그리고 생활의 원인 때문에 시설된 여섯 가지 학습계율을 어김으로서 ‘기만161) 요설 암시 비하 탐욕적 이득의 추구’162)등과 같은 악하고 불건전한 원리를 통해서 생겨나는 잘못된 생활을 삼가는 것”이라고 한 것이 생활청정의 계행163)이다. 그리고 “이치에 맞게 성찰하여 오로지 추위를 막아내고, 더위를 막아내고 등에 모기 바람 열기 뱀종류와의 접촉을 막아내거나 음부를 가리기 위하여 옷을 수용한다.”라는164) 등의 방식으로 설한 것은 성찰청정으로 네 가지 필수 자구를 수용하는 필수자구의지적 계행165)을 지칭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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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했다. 역자는 인상(印象)과 삼법인(三法印)이나 삼십이상(三十二相)에서의 특징(lakkhaṇa)과 구별하기 위해 특징을 피하고 연상(聯想)으로 번역한다. 인상 즉 니밋따는 주의력을 기울이지 않고 사실을 파악할 때 오염된 사유에 불을 지필 수 있는 대상의 가장 두드러지는 인상이다. 이를테면 여자가 있으면, 여자는 인상(니밋따 : nimitta)이다. 그리고 첫 지각의 접촉이 절제되지 않았을 때, 그 다음으로 주의를 붙잡아 두는 상세한 특징들 곧, 그녀의 손, 발, 미소, 웃음 이야기 등은 특징(아무비얀자나 : anuvyañjana)이다.
159) so cakkhunā rūpaṁ disvā na nimittaggāhī hoti nānubyañaggāhi, yatvādhikaraṇa menaṁ cakkhundriyaṁ asaṁvutaṁ viarantaṁ abhijjhādomanassā pāpakā akusalā dhammā anvāssaveyyuṁ, tassa saṁvarāya paṭipajjati, rakkhati
cakkhundriyaṁ, cakkhundriye saṁvaraṁ āpajjati. sotena saddaṁ sutvā – pa – ghānena gandhaṁ ghāyiyvā – pa – jivhāya rasaṁ sāyitvā – pa –kāyena phoṭṭhabbaṁ phusitvā – pa – manasādhammaṁ viññāya na nimittaggāhī – pa – manindriye saṁvaraṁ apajjati’ti : DN, I. 70; MN. I. 180, 269; Ⅲ. 2; SN. 104; AN. I. 113, Ⅱ. 39
160) indriyasamvarasīla : 한역의 근율의계(根律儀戒)를 말한다.
161) kuhakā : Smv. 91-92에 따르면, 세 가지 곧, 넌지시 말하기로 기만하는 것, 행주좌와(行住坐臥)의 위의(威儀)에 의존하여 기만하는 것, 욕심이 적은 것처럼 필수자구(資具)의 수용을 사칭하여 기만하는 것이
있다.
162) kuhakā ca honti lapakā ca nemittikā ca lābhena lābhaṁ nijjigiṁsanatāti : DN. I. 8; MN. Ⅱ. 75
163) ājīvapārisuddhisīla : 한역의 활명편정계(活命遍淨戒)를 말한다.
164) paṭisaṅkhā yoniso cīvaraṁ paṭisevati, yāvadeva sītassa ··· paṭighatāya ti : MN. I. 10; AN. Ⅲ. 388
P 143
[계율수호적 계행]
43. [1] [계율수호적 계행] “여기 수행승이 의무계율에 의한 제어를 준수하고 행실과 행경166)을 원만히 하고, 사소한 잘못에서 두려움을 보고 학습계율167)을 수용하여 배운다.”라고168) 설한 것에서 ‘여기’라는 것은 ‘교계(교계)에서’라는 뜻이다. ‘수행승’이라는 것은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기 때문에, 또는 조각난 천을 착용하는 것 때문에 그와 같은 통속적 명칭을 얻은 자로서 믿음으로 출가한 훌륭한 가문의 아들을 뜻한다. 여기서 ‘계율수호’ 즉, ‘의무계율에 의한 제어’라는 것은 이와 같다. 의무계율은 학습계율에 의한 계행을 뜻한다. 그것은 각자 수호하는 자를 해탈시키고 나쁜 존재의 운명 등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그러므로 자기 해탈적 수호라고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제어하는 것이 계율이다. 그것은 신체적·언어적으로 어김이 없는 것 즉 불범(不犯)을 지칭한다. 의무계율이야말로 제어이니, 의무계율제어이다. 그 계율수호를 준수하는 것은 각자의 해탈을 통해 수호를 받고, 거기에 다가가서, 그것을 비구한다는 뜻이고, ‘배운다’는 것은 ‘배워서 위의 자세를 취한다.’는 뜻이다.
44. ‘행실과 [17] 행경을 원만히 하고’라는 등의 뜻은 경에서 전해진대로 알아야 한다. ‘행실과 행경을 원만히 하고’라는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올바른 행실이 있고, 그릇된 행실이 있다는 것인데, 그릇된 행실이란 어떠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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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 paccayasannissitasīla : 한역의 자구의 지계(資具依止戒)를 말한다.
166) ācāragocara : 행실과 행경이란 올바른 행실과 사창가나 술집을 피하는 등의 탁발의 행동반경이나 명상주제(業處 : kammaṭṭhāa)를 의미한다.
167) sikkhapadāni : 학계(學戒 : silkkhapadāni)라고 하는 것인데, 의무계율을 포함하여 그 외에 의무계율에 소속되지 않는 사소한 계율을 추가하여 배워야할 계율 또는 실천하여야할 계율이라고 하는데, 현대적인 표현으로는 학습계율이 적당하다. 보다 상세한 것은 DN. Ⅲ. 78과 그 주석을 보라.
168) pātimokkhasaṁvarasaṁvuto viharati ācāragocarasampanno aṇumattesu vajjesubhayadassāvi samadaya sikkhati sikkhapādesu : DN. I.63; MN. I. 38 이 문구는 이하의 설명의 이해를 돕기 위해 Vism. 15/1 : 42의 인용문을 역자가 반복한 것이다.
P 144
신체적 위범, 언어적 위범, 신체 언어적 위범이 있는데, 그것들이 그릇된 행실이다. 곧, 일체의 악계가 그릇된 행실이다. 또는 여기 어떤 자가 대나무의 판매로, 혹은 잎사귀의 판매로, 꽃 열매 세분 치목의 판매로, 혹은 아첨으로, 혹은 사기169)로, 혹은 양육으로, 혹은 심부름으로 생계를 유지하거나, 이러이러한 부처님께서 비난하는 잘못된 생활로 삶을 영위한다면, 그것이 잘못된 행실이다. 그러면 올바른 행실은 어떠한 것인가? 신체적 불범, 언어적 불범, 신체 언어적 불범이 있는데, 이것이 올바른 행실이다. 곧, 일체의 계행에 의한 제어가 올바른 행실이다. 또는 여기 어떤 자가 대나무의 판매로, 혹은 사기로, 혹은 양육으로, 혹은 심부름으로 생계를 유지하거나, 이러이러한 부처님께서 비난하는 잘못된 생활로 삶을 영위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올바른 행실이다.
45. 그리고 ‘행경’에는 올바른 행경이 있고 그릇된 행경이 있다. 그 가운데 그릇된 행경이란 어떠한 것인가? 여기 어떠한 자가 기녀가 있는 곳이나, 과부, 나이든 처녀, 환관, 수행녀, 술집이 있는 곳을 드나들거나, 혹은 국왕이나 대신이나 이교도나 이교도의 제자에 대하여 재가자처럼 부적당한 교재로 사귀거나, 혹은 신심이 없고 청정한 믿음이 없고 솟아오르는 샘물이 되지 못하고,170) 수행승, 수행녀, 재가의 남자신도, 재가의 여자신도에 대하여 욕하고 비웃고, 그들의 이익을 원하지 않고 안녕을 원하지 않고 평안을 원하지 않고 멍에로부터의 안온171)을 원하지 않는 [18] 재가자와 사귀고 친하고 왕래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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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 muggasūpyatā : 콩이 반쯤 익은 수프처럼 반쯤의 진실만이 섞여 있는 함부로 지껄이는 말을 뜻한다.
170) anopānabhūtāni : 사람이 원하는 것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자를 비유한 것이다.
171) yogakkhema : 멍에로부터의 안온은 Srp. Ⅱ.164에 따르면, 고귀한 경지(阿羅漢果 : arrahatta)를 말한다. 벗어나야 할 네 가지 멍에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멍에(kāmayoga), 존재의 멍에(bhavayoga), 견해의 멍에(diṭṭḥiyoga), 무지의 멍에(anijjāyoga)를 말한다.
P 145
그것은 그릇된 행경이다. 그리고 올바른 행경은 어떠한 것인가? 여기 어떠한 자가 기녀가 있는 곳이나 과부, 나이든 처녀, 환관, 수행녀, 술집이 있는 곳을 드나들지 않고, 혹은 국왕이나 대신이나 이교도나 이교도의 제자에 대하여 재가자처럼 부적당한 교제로 사귀지 않고, 혹은 신심이 있고 청정한 믿음이 있고 솟아오르는 샘물이 되고,174) 수행승, 수행녀, 재가의 남자신도, 재가의 여자신도에 대하여 그들의 이익을 원하고 안녕을 원하고 평안을 원하고 멍에로부터의 안온을 원하는 재가자와 사귀고 친하고 왕래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행경이다. 이와 같이 그 올바른 행실과 그 올바른 행경을 갖추고, 올바로 갖추고, 구족하고, 완성했으므로 ‘행실과 행경을 원만히 하고’라고 한 것이다.
46. 또한 여기서 이와 같은 방식으로 행실과 행경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그릇된 행실에는 신체적인 것과 언어적인 것이 있다. 그 가운데 신체적인 그릇된 행실은 어떠한 것인가? 여기 어떤 자가 참모임에 가서 사려가 없이 장로 수행승들과 부딪히며 서고, 부딪히며 앉고, 앞에도 서고, 앞에도 앉고, 윗자리에 앉고, 머리에 터어번을 쓰고도 앉고, 서서도 [19] 말하고, 팔을 흔들면서도 말하고, 장로 수행승들이 신발없이 경행할 때 신발을 신고 경행하고, 낮은 경행처175)에서 경행할 때 높은 경행처에서 경행하고, 땅위에서 경행할 때 경행처에서 경행하고, 장로 수행승들을 침해하여 서고 침해하여 앉고, 신참수행승들에게 자리를 제공하지 않고, 욕실에서 장로 수행승들에게 묻지 않고 땔나무를 놓고 문을 잠그고, 목욕장에서 장로 수행승들과 부딪히며 들어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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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 opānabhūtani : 우물물을 자유롭게 사용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173) kāsāvapajjotāni : 공경하여 가사 옷을 빛나게 하는 것을 말한다.
174) iskvātapaṭivātani : 선풍(仙風)이 불게 한다는 것으로 집으로 드나드는 수행승이나 수행녀의 옷자락이나 신체의 동작에 의해서 생겨나 바람이 불게 하는 것 또는 그 때문에 나쁜 일이 제거되는 것을 뜻한다.
175) caṅkama : 좌선을 하다가 피곤하거나 졸리면, 일어서서 조용히 걷는 것을 경행(經行)이라고 하고, 경행하는 장소를 경행처(經行處)라고 한다. 선당(禪堂)의 부근에 있다.
P 146
앞서가며 들어가고, 부딪히며 목욕하고, 앞서 목욕하고, 부딪히며 나오고, 앞서가며 나오고, 마을길을 들어가면서도 장로 수행승들과 부딪히며 들어가고, 앞서가며 들어가고, 나오면서도 장로 수행승들과 앞서가며 서두르고, 가정주부나 소녀 등이 앉아 있는 양가의 깊숙한 가려진 내실이 있는 곳에 갑자기 들어가 아이들의 머리를 만진다면, 그러한 것은 신체적인 그릇된 행실이다.
47. 그리고 언어적인 그릇된 행실이란 어떠한 것인가? 여기 어떤 자가 참모임에 가서 사려가 없이 장로 수행승들에게 여쭈지도 않고 가르침을 논하고, 질문을 제기하고, 의무계율을 읊고, 서서 말하고, 팔을 흔들며 말하고, 마을길로 들어가서 아녀자나 소녀에게 이와 같이 “이러이러한 이르의 이러이러한 성을 지닌 자여, 오늘은 무엇인가, 죽인가, 부드러운 음식인가, 단단한 음식176)인가? 우리가 무엇을 마시고, 먹고, 삼킬까? 혹은 나에게 무엇을 줄 것인가?”라고 수다를 떤다면, 그것은 언어적인 그릇된 행실이다. 그런데 올바른 행실은 그러한 것과 반대인 것을 알아야 한다.
48. 또한 그리고 수행승이 존중할 줄 알고, 순종할 줄 알고, 부끄러움을 알고, 창피함을 알고, 윗옷과 아래옷을 잘 챙겨 입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고 물러가고, 앞뒤로 잘 살펴서 몸을 구부리고, 눈을 아래로 향하고 위의 자세를 갖추고, 감관의 문을 수호하고,177) 식사에 알맞은 분량을 알고, 깨어있음에 전념하고,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고, 욕망을 여의고, 만족하고, 용맹정진하고, 올바른 원만행을 행하는 자들을 섬기고 공경하면, 그것이 올바른 행실이다, 이와 같이 곧 올바른 행실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49. 다음으로 행경에는 토대행경 수호행경 정박행경178)의 세 가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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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 khadaniya : 사탕수수나 과일 등과 같은 비교적 단단한 음식을 뜻한다.
177) indritesu guttadvaro : 시각능력, 청각능력, 후각능력, 미각능력, 촉각능력, 정신능력의 문을 수호한다는 뜻이다.
P 147
(a) 그 가운데 어떠한 것이 토대행경인가? 열 가지 대화의 주체179)에 대한 덕성을 구비한 훌륭한 벗을 말한다. 그를 통해서 듣지 못한 것을 듣고, 이미 들은 것을 정화하고, 의혹을 끊고, 견해를 바로 세우고, 마음을 청정한 믿음으로 채우고, 혹은 그를 따라 배우면서, 신심을 성숙시키고 계행 배움 보시 지혜를 증진시키면, 이것을 토대행경이라고 한다.
50. (b) 어떠한 것이 수호행경인가? 여기 수행승이 마을길을 들어가 통로에 대하여 눈을 아래로 향하고 멍에만큼 앞을 보고, 잘 제어하며 걷고, 코끼리를 보지 않고, 말을 보지 않고, 전차를 보지 않고, 위를 보지 않고, 아래를 보지 않고, 사방과 사유를 쳐다보지 않으면, 그것을 수호행경이라고 한다.
51. (c) 어떠한 것이 정박행경인가? 마음을 정박시키는 네 가지 새김의 토대이다. 세존께서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에게 자신의 행경, 아바지의 영역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네 가지 새김의 토대이다.”라고181) 설했는데, 그것이 정박행경을 언급한 것이다. 이와 같이 이러한 올바른 행경을 갖추고, 올바로 갖추고, 구족하고, 완성했다. 그러므로 ‘행실과 행경을 원만히 하라’라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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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 upanissayagocaro, ārakkhagocaro, upanibandhagocaro : 한역에서는 각각 근의행경(近依行徑), 수호행경(守護行徑), 근박행경(近縛行徑)이라고 한다. 해탈도론에는 의(依), 수호(守護), 계박(繫縛)이라고 되어 있다.
179) dasakathāvatthu : 한역의 십론사(十論事)로 상세한 것은 Vism. 127/4 : 38의 주석을 참조하라. 해탈도론에서는 이것을 십처(十處)라고 번역하고 있다.
180) na hattiṁ olokento, na assaṁ, na rathaṁ, na pattiṁ : 고대 인도의 군대는 코끼리부대(hatthikāya : 象軍), 기마부대(assakāya : 馬軍), 전차부대(rathakāya : 車軍), 보병부대(pattikāya : 步軍)의 사군(caturangini senā : 四軍)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181) ko ca bhikkhave bhikkhuno gocarā sako pettiko visayo. yadidam cattāro satipaṭṭhāna’ti : SN. Ⅴ. 148
P 148
52. ‘사소한 [20] 잘못에서 두려움을 보고’라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범죄 중학죄182) 내지는 악하고 불건전한 마음을 일으킨 것 등의 사소한 잘못에 대하여 두려움을 보는 것이다. ‘학습계율을 받아 배운다.’라는 것은 무릇 학습계율에서 배워야 할 것들을 모두 받아서 배운다는 뜻이다. 그리고 여기서 ‘의무계율에 의한 제어’라는 것에 관한 한, 개인을 기반으로 한 가르침으로서 의무계율의 덕성을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행실과 행경을 원만히 하고’ 등의 일체는 일체의 계행의 실천을 통해서 완전성에 이르는 길을 보여 주기 위해 설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감관제어적 계행]
53. [2] [감관제어적 계행] 바로 그 다음에 “① 시각으로 형상을 보지만 그 인상에 집착하지 않고 그 연상에 집착하지 않는다. 만약 시각능력을 제어하지 않으면, 탐욕과 근심, 그리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가 자신을 침범할 것이므로 제어의 길을 따라서, 시각능력을 보호하고, 시각능력을 수호한다. ② 청각으로 소리를 듣지만 ··· ③ 후각으로 냄새를 맡지만 ··· ④ 미각으로 맛을 보지만 ⑤ 촉각으로 감촉을 촉지하지만 ⑥ 정신으로 사실을 인식하지만 그 인상에 집착하지 않고 정신능력을 수호한다.”라
는183) 등의 방식으로 설한 것으로 감관제어적 계행184)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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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sekhiya : 중학죄(衆學罪)는 빠알리어로 쎄키야(sekhiya)라고 한다. 한역에서는 중학(衆學) 또는 중학법(衆學法)이라고 한다. 75조 내지 107조(七十五條 – 一百七條 : 수행녀도 동일)이다. 이것은 복장과 식사와 의식 등의 행의작법(行儀作法)을 규정한 것으로 수효가 많고 항상 배워서 익혀야 할 것이므로 중학이라고 하고, 1조(一條)만이 아니라 다수의 개조(箇條)가 있어 중학이라고도 한다. 이 규정을 어겼을 때는 고의로 범한 경우에는 한 사람 앞에서 참회하고, 고의가 아닌 경우에는 마음속으로만 참회하면 된다. 이 죄에는 악작(惡作) 또는 돌길라(突吉羅)라고 한역되는 악작죄(惡作罪) 즉, 둑까따(dukkaṭa)와 그것과 구분되는 악설로 한역되는 악설죄(惡說罪) 즉 둡바씨따(dubbhāsita)가 있다.
183) so cakkhuna rūpam disvā na nimittaggāhi hoti nānubyañjanaggāhī, yatvādhikaraṇamenaṁ cakkhundriyaṁ asaṁnutaṁ viharantaṁ abhijjhādomanassā pāpakā akusalā dhammā anvāssaveyyuṁ, tassa saṁvarāya paṭipajjati, rakkhati cakkhundriyaṁ, cakkhundriye saṁvaraṁ āpajjati. sotena saddaṁ sutvā – pa – ghānena gandhaṁ ghāyitvā – pa –jivhāya rasaṁ sāyitvā – pa – kāyena phoṭṭhabbaṁ phusitvā – pa –manasādhammaṁ viññāya na nimittaggāhī – pa – manindriye sāṁvaraṁ apajiati’ti : 이하 설명의 이해를 돕기 위해 Vism. 15/1 : 42의 인용문을 역자가 반복한 것이다.
P 149
그 가운데 ‘그’라는 것은 계율수호적 계행이 확립된 수행승이다. ‘시각으로 형상을 보고’라는 것은 ‘형상을 보는 능력이 있는 도구로서 눈이라는 통속적 명칭을 얻은 시각의식으로 형상을 보고’라는 뜻이다. 그런데 옛 주석185)은 “시각은 마음의 활동이 없기 때문에 형상을 보지 못한다. 마음은 시각의 활동이 없기 때문에 형상을 보지 못한다. 그래서 감관의 문과 대상이 만날 때 시각감성186)을 물적 토대로 갖는 마음으로 형상을 보는 것이다.187) 그러나 ‘그는 활로 쏜다.’라는 등의 경우에서처럼 단지 수단을 지시하는 논법이 있는데,188) ‘시각의식으로 형상을 보고’라고 하는 것은 그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다.”라고189) 논했다.
54. ‘인상에 집착하지 않고’라는 것은 남녀의 인상이나 아름다움의 인상 등과 같은 오염의 토대가 되는 인상을 취하지 않고 단지 보자마자 멈추는 것이다. ‘연상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와 같다. 오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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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 indriyasamvarasīla : 한역에서는 근율의계(根律儀戒)라고 한다. 『해탈도론』에서는 수호근위의계(守護根威儀戒)라고 한다.
185) Porāṇā : 싱할리어로 된 빠알리장경에 대한 고주(古註)를 말한다.
186) cakkhupasāda : 한역에서는 안정(眼淨)이라고 한다. 시신경을 말하는 것으로 시각작용의 물적 토대를 의미한다.
187) cakkhu rūpaṁ na passati, acittakattā, cittaṁ na passati, acakkhukattā, dvārarammanasaṁghaṭṭe pana cakkhupasādavatthkena cittena passati : 『빠라맛타만주싸』에 의하면, 형상이 대상으로 시각감성에 들어오면, 사람은 ‘본다.’ ‘비추어 본다.’ 시각감성을 물적 토대로 갖는 의식은 형상을 빛의 도움을 받는 대상으로 지지하는 특별한 성질을 통해서 출현한다. 그러면 그것을 소유한 사람이 ‘본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비추어 본다.’라는 것은 형상을 고유한 본성에 따라 드러내어 본다는 뜻이다.
188) panesā ‘dhanunā vijjhati’ti-ādīsu viya sasamgharakathā nāma hoti : 여기서 단지 도움이 되는 수단을 제시하는 논법(sasambhārakathā)을 한역에서는 유자량론(有資糧論)이라고 한다. 이 문장의 의미는 ‘그는 화살을 쏜다.’라는 말 대신에 ‘그는 활을 쏜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단지 도움이 되는 수단을 제시하는 논법이라는 뜻이다.
189) cakkhu rūpaṁ na passati, acittakattā, cittaṁ na passati, acakkhukattā, dvārārammaṇasaṁghaṭṭe pana cakkhupasādavatthukena cittena passati. ¢disī panesā ‘dhanunā vijjhati’ti-ādisu viya sasamghārakathā nāma hoti, tasmā cakkhuviññāṇena rūpaṁ disvāti ayamevettha attho’ti : 싱할리어 고주(古註)로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P 150
다양한 부수적 특징이 드러나는 까닭에 연상이라고 통칭을 얻은 손이나 발이나 미소나 웃음이나 대화나 주시 등의 다양한 유형을 취하지 않는다.
55. 예를 들어, 쩨띠야빱바따190) 산에서 살던 장로 마하 띳싸191)처럼, 단지 그 가운데 여실한 것만을 취하는 것이다.192) 그 장로가 아누라다뿌라193) 시로 탁발하기 위해 오는데, 한 양가의 며느리가 남편과 다툰 뒤에 천녀처럼 아름답게 단장하고 치장하고 아침 일찍 아누라다뿌라 시를 나와서 친정집으로 가다가 아누라다뿌라 시로 탁발하기 위해 오는 그 장로를 보고 넋 나간 마음으로 크게 [21] 웃었다. 장로는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라고 쳐다보다가 그녀의 이빨에 대한 부정(不淨)을 지각하고는 거룩한 경지를 얻었다. 그래서 이와 같이 전해진다.
“그녀의 이빨을 보고
이전의 지각을 떠올려,
그 자리에 선 장로는
거룩한 경지를 얻었다.”194)
남편이 그녀를 뒤따라왔는데, 역시 장로를 보고 “존자여, 어떤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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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 Cetiyapabbata : 한역에서는 음사하여 지제산(支提山)이라고 한다. 스리랑카의 아누라다뿌라 시의 산의 이름으로 아쇼카왕의 아들 마힌다 장로에 의해서 처음 불교가 도입된 그 산에 쩨띠야빰바따(Cetiyapabbata) 사원이 들어섰다.
191) Mahā tissa : 쩨띠야빱바따 사원에서 주석했다. 그가 남편과 다툰 여인의 이빨을 보고 부정관을 닦은 일화는 이곳을 원천으로 한다.
192) yaṁ tattha bhūtaṁ, tadeva gaṇhāti : 서른 두 가지 신체의 형태에 대한 부정관(不淨觀)을 말한다.
193) Anurādhapura : Ppn. 84에 따르면, 고대 약 1500년간의 스리랑카의 수도였다. 왕빤두까바야(Paṇḍukābhaya : 394-307 BC.)가 이 도시를 건설하여 우빠띳싸가마(Upatissagāma)에서 이곳으로 천도하였고 악가보디(Aggabidhi Ⅳ : AD. 626-41)의 시대까지 유지되었다. 짧은 기간 후에 그것은 한 번 더 수도가 되었고 왕족들이 다른 곳으로 옮길 때까지 그렇게 지속되었으나, 마침내 AD. 11세기에 와서 버려졌다.
194) tassā dantaṭṭhikaṁ disvā ǀ pubbasaññaṁ anussari ǀ tattheva so ṭhito thero ǀ arahattaṁ apāpuni’ti ǁ
P 151
을 묻자 장로는 그에게 말했다.
“여인이나 남자가
단지 해골의 다발이
이 큰 길을 지나갔다.”195)
56. ‘만약 시각능력을 제어하지 않으면, 탐욕과 근심, 그리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가 자신을 침범할 것이므로’라는 것은 ‘시각능력을 제어하지 않는 것을 원인으로 새김의 문으로 시각능력을 제어하지 못하고 시각의 문을 개방하고 지내면, 그 탐욕 등의 상태가 그를 침해하고 결박할 것이다.’라는 뜻이다. ‘제어의 길을 따라서’라는 뜻은 그 시각능력을 새김의 문으로 시각능력을 제어하기 위해 실천하면, 그와 같은 실천을 통해 시각능력을 보호하고 시각능력을 제어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57. 그런데 그 경우에196) 시각능력에는 제어나 비제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시각감성에 의지하여 새김이나 망념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에 형상인 대상이 시야에 나타나면,197) 존재지속적의 고리198)가 두 번 일어나고 사라질 때 작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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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 nabhijānāmi itthī vā ǀ puriso vā ito gato ǀ apica aṭṭhisaṅghāṭo ǀ gacchate’sa mahāpathe’ti ǁ
196) tattha : 여기서부터 이하 Vism. 22의 9행까지의 24행은 Aṭs. 400과 병행하고, 여기서부터 이하 Vism. 22의 18행까지의 32행은 Pps 75와 병행한다.
197) apica yadā rūpārammaṇaṁ cakkhussa āpāthaṁ āgacchati : Vism. 458/14 : 114이하 등을 참조하라. 이 책의 부록 「표5:인식과정」을 참조하라.
198) bhavaṅga : 한역에서는 유분(有分)이라고한다. 이것에 대해 근대 아비담마 연구자들 사이에 심리학적으로 잠재의식이라고도 말하는 무의식상태와 일치한다고 생각하였는데, 최초로 『청정도론』을 영역한 PPtin. 25에서는 그것을 ‘잠재의식(subconsciousness)’라고 번역했고, 그 후 WRtil. 27에서도 ‘잠재의식(Unterbewusstsein)’을 따랐다. 그러나 원어를 살펴보면, ‘잠재’라든가 ‘의식’이라든가 하는 용어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불교철학적 인식에 근대 심리학적 용어를 무작위로 적용하는 것이 옳은가하는 문제를 파생시키자. PPmol .24에서는 ‘생의 연속체, 생명연속체 또는 생활연속체(the life-continuum)’라고 번역했는데, 깔루빠하나는 이 번역을 지지했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도 딜타이의 생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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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세계199)가 전향작용200)을 성취하면서 생겨나고 사라진다. 그 다음으로 시각의식이 관찰작용을, 그 다음으로 이숙적 정신세계가 영수작용201)을, 그 다음으로 이숙적 무인적 정신의식 세계202)가 조사작용203)을, 그 다음으로 작용적 무인적 정신의식 세계204)가 확정작용205)을 성취하면서 생겨나고 사라진다. 그 직후에는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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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나 후설의 현상학적 용어에 영향을 받은 흔적이 보인다. 역자는 이러한 번역상의 문제를 피하기 위해 CPmaës. 49에서의 불역인 존재-모드(le mode-existential)가 원어에 가깝게 번역한 것을 참고로 좀 더 술어의 어원에 가깝게 ‘존재지속의 고리’라고 번역했다. 『아비담마해설서』 I. 365에 따르면, 업에 의해서 생이 소멸된 후에 새로운 생을 잇는 결생식이 일어난 뒤에 존재지속의 고리가 연속해서 일어나지 못하면, 마음의 연속성은 끊어져 한 생으로 끝나므로, 생이 끊어지지 않도록 결생식이 일어난 뒤에 결생식과 동일한 이숙식의 연속인 존재지속의 고리가 연속적으로 일어나야 한다. 그 뒤의 마음의 생성과정에서도 새로운 무수한 인식과정이 생멸하는 사이에 존재지속의 고리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음의 연속이 끊어져서 마음에서 생겨난 물질과 업에서 생겨난 물질들 또한 끊어질 것이다. 이렇게 업의 여세가 남아 있는 한, 한 생에서 존재의 다발의 연속이 끊어지지 않도록 연결시키는 이숙적 마음이 일어나야 한다. 이 마음을 존재지소그이 고리라고 한다. 아비달마해설서 I. 435에 따르면, 존재지속의 고리는 꿈없는 깊은 수면과 같아 아무 것도 인식할 수 없다. 그러나 전생의 죽음 직전의 통각이 취한 인지된 업(kamma), 업의 인상(kammanimitta), 존재의 운명의 인상(gatinimitta) 가운데 하나를 대상으로 일어난다.
199) kiriyamanodhātu : 한역에서는 유작의계(唯作意戒)라고 한다. 작용적 정신세계라는 것은 착하고 건전한 것이나 악하고 불건전한 것에 해당하지 않는 윤리적으로 중립적인 것(無記)으로 이숙적인 것에 해당하지 않는 마음과 마음의 작용을 말한다.
200) āvajjanakicca : 한역에서는 전향작용(轉向作用)이라고 한다. 존재지속의 고리에서 의식활동에 들어가는 최초의 작용을 말한다. 또는 『아비담마해설서』 I. 366에 따르면, 새로운 대상이 들어날 때, ‘여보세요. 이것이 무엇입니까?’하는 것처럼 새로운 대상을 생각하는 것이 전향작용이다. 또는 존재지속의 고리가 연속적으로 흐를 때 새로운 대상이 나타나면, 존재지속의 고리가 멈추어지고, 정신활동이 대상으로 돌려지는 것이 전향작용이다. 이 전향작용은 [정신세계(意戒)에 속하는 것이지만] 시각 등의 다섯 감관의 문에서 일어나면 오문전향이라고 하고, 정신의 문 즉, 의문(意門)에서 일어나면 의문전향이라고 한다.
201) sampaṭicchanakicca : 한역에서는 영수작용(領收作用)이라고 한다. 인식의 대상을 받아들이는 작용을 말한다.
202) vipākāhetukamanoviññānadhātu : Vism. 452/14 : 81 이하를 참조하라.
203) santīraṇakicca : 한역에서는 추도작용(推度作用)이라고 한다. 영수된 대상을 조사하는 작용을 말한다.
204) kiriyāhetukamanoviññāṇadhātu : Vism. 452/14 : 81 이하를 참조하라.
205) voṭṭhabbanakicca : 한역에서 확정작용(確定作用)이라고 한다. 조사된 대상을 확정하는 작용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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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206)이 일어난다.207) 그 가운데에도 존재지속의 고리가 일어나는 때도 전향 등의 어떤 때도, 제어도 없고 비제어도 없다. 단지 통각의 찰나에 만약 악계나 망념이나 무지나 무인이나 해태가 일어나면, 비제어가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시각능력을 제어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와 같은 것이다.
58.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22] 그럴 때는 감관의 문도 수호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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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 javana : 한역의 해탈도론에서 속행(速行)이라고 번역한 것이다. 이 ‘자바나(javana)’에 대해서 리즈 데이비즈의 충고를 따른 것으로 보이는 뻬 마웅 띤(PPtin. 25)은 철학적 의미에서의 ‘통각(통각 : apperception)’이라는 용어를 『청정도론』에서 처음 사용했다. 그 후 니야나띨로까(WRtil. 27)는 ‘통각’이란 본래 윤리적 판단에 국한해서 사용되는 것이 아니므로 잘못된 번역이라고 비판하고 독역에서 심리학적 의미에서의 ‘충동 또는 자극’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후 그의 제자 니야나몰리(PPmol. 24)도 영역에서, 크리스쫑 마스(CPmaës. 50)도 불어 번역에서 같은 번역을 사용했다. ‘자바나’란 확정된 것에 대하여 선악의 심찰나를 일으키는 것이다. 이 ‘자바나’만이 업을 만들고 윤리적 행위를 가능하게 한다. 아마도 인식과정의 단계를 의미한다는 측면에서 단순한 속행이나 충동보다는 통각이라는 것이 훨씬 좋은 번역이라고 여겨진다. 통각이란 원래 서양철학에서 지각에 항상 동반하면서 다양한 지각들을 통일하는 의식을 말한다. 예컨대, 칸트에서 통각이란 감성적인 소여들을 하나의 의식 속에서 통일하는 의식을, 곧, 모든 경험에 수반하는 자기의식을 말한다. 여기서 역자는 ‘자바나’에 대하여 불교철학적 의미를 부여하여 감성적 소여를 윤리적으로 통일하는 계기로 새롭게 개념적 규정을 해서 ‘자바나’를 ‘통각’이라고 번역하면서 서양에서 처음 번역했던 용례를 살리고자 한다.
207) tattha kiñcāpi cakkhundriya saṁvaro vā asaṁvaro vānatthi. na hi cakkhupasādaṁnissāya sati vā muṭṭhasaccaṁ vā uppajjati. apica yadā rūpārammaṇaṁ cakkhussa āpāthaṁ āgacchati, tadā bhavaṅge dvikkhattuṁ uppajjitvā niruddhe kiriyamanodhātu āvajjanakiccaṁ sādhayamānā uppajjitvā nirujjhati. tato cakkhuviññāṇaṁ dassanakiccaṁ. tato vipākamanodhātu sampaṭicchanakiccaṁ. tato vipākāhetukamanoviññāṇadhātu santīraṇakiccaṁ. tato kiriyāhetukamanoviññāṇadhātu voṭṭhabbanakiccaṁ sādhayamānā uppajjitvā nirujjhati, tadanantaraṁ javanaṁ javati : 『빠라맛타만주싸』에는 ‘인식과정(vithicitta)’에 대한 다음과같은 단편적인 설명만이 있다 : ‘다섯 감관의 문에는 신체적·언어적 악행이라고 불리는 악계는 없다. 그러므로 악계의 제어는 마음의 문을 통해서 일어나고, 나머지 제어는 여섯 감관의 문을 통해서 일어난다. 망념 등은 그것들이 새김에 반대가 되는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인 까닭에 다섯 감관의 문에서 발생할 것이다. 그러나 다섯 감관의 문에서 통각(javana)들은 암시(viññatti)를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결코 신체적 ·언어적 위범을 구성하는 악계의 발생은 없다. 그리고 여기서 악계등을 비롯한 다섯 가지 비제어는 계행에 의한 제어 등의 다섯 가지 제어와는 반대되는 것으로 여기서 언급되었다.’ 인식과정에 대한 설명은 주석보다 오히려 『청정도론』 자체(Vism. 458/14 : 114 이하 등)가 더 상세하다. 이것에 대한 주석의 두 번째 언급은 Vism. 126/4 : 33과 주석을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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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고 존재지속의 고리도, 전향작용 등의 인식과정208)도 수호되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과 같은가? 예를 들어 도시의 사대문이 수호되지 않으면, 시내의 집집마다 문, 사랑방, 내실 등을 잘 지켜도, 시중의 일체의 재화가 수호되지 못하고 보호되지 못하고, 성문을 통해서 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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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 vithcitta : 한역에서는 노심(路心)이라고 한다. 의식활동을 하는 전향작용 내지는 선악을 일으키는 통각을 총칭하여 부르는 개념이다. 원래 ‘인식과정(vīthicitta)’이라는 용어는 『청정도론』에서 광범위하게 쓰이지만, 삼장에는 등장하지 않는 용어이다. 그러나 경전적 근거는 찾을 수 있다. MN.I.111에 다음과 같은 인식과정에 대한 설명이 있다. “벗들이여,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나고, 그 세 가지를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낀 것을 지각하고, 지각한 것을 사유하고, 사유한 것을 희론하고, 희론한 것을 토대로 과거, 미래, 현재에 걸쳐 시각에 의해서 인식되는 형상에서 희론에 오염된 지각과 관념이 일어난다.” 물론 이러한 설명은 여섯 감각과 관련하여 동일하게 서술된다. 그리고 MN. Ⅲ. 297에 다음과 같은 문답이 있다. “라훌라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시각접촉은 영원한가, 혹은 무상한가? 세존이시여, 무상합니다. 라훌라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시각접촉에서 어떠한 느낌, 어떠한 지각, 어떠한 형상, 어떠한 의식이 생겨나든지, 그것들은 영원한가, 혹은 무상한가? 세존이시여, 무상합니다.” 마찬가지로 여섯 감각에 대해서 동일한 문답이 전개된다. 그리고 MN.I.295에서는 싸리뿟다는 인식과정에서 정신의 역할을 좀 더 분명하게 논한다. “벗이여, 다섯 가지 감각능력, 즉 시각능력, 청각능력, 후각능력, 미각능력, 촉각능력은 각기 고유한 장, 각기 고유한 활동영역을 갖고 있어, 서로 다른 장이나 영역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벗이여, 다섯 가지 감각능력, 즉 시각능력, 청각능력, 후각능력, 미각능력, 촉각능력은 고유한 장, 고유한 활동영역을 갖고 있어, 서로 다른 장이나 영역을 경험하지 않지만, 정신이 그 의지처이고 정신이 그것들의 장과 활동영역을 경험합니다.” 경장에 바탕을 둔 이러한 인식고정은 논장에 반영되어 확장된다. ⅰ) 거기서 시각의식의 세계란 무엇인가?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의지조건으로, 그리고 작용적 정신세계[=오문전향]를 이거조건으로, 나머지 세 가지 비물질적 존재의 다발은 병발조건으로) 의식이 일어난다. ··· 그것이 시각의식의 세계이다. 거기서 정신의 세계란 무엇인가? 시각의식의 세계가 생겨났다가 사라지고 그 직후에 의식이 일어난다. ··· 그것은 수용의 형태에 있는, 적합한 (착하고 건전하거나 악하고 불건전한) 정신의 세계이다. [다른 네 가지 세계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언급된다.] 또는 그것은 의문전향의 유형에서 작용적 정신세계라고 여겨지는 정신적 대상에 대한 첫 번째 반응이다. 여기서 정신의식세계란 무엇인가? 시각의식이 생겨났다가 사라지고 그 다음에 정신세계가 일어난다. 결과적인 정신의 세계가 일어났다가 사라지면, 그 다음에는 이숙적 정신의식 세계가 조사작용으로 나타난다. 그 다음에는 작용적 정신의식세계가 확정작용으로 나타난다. 그것이 생겨났다가 사라지면, 그 다음에 의식이 나타난다. 그것은 통각작용으로 정신의식세계에 적합한 것이 된다. [다른 네 가지 세계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언급된다.] 존재지속의 고리의 정신과 정신적 대상을 조건으로 의식이 발생된다. ··· 그것은 (상기에서 언급한 오문전향에 따르는) 적합한 통각의 정신의식세계이다. (Vibh. 87-90; VibhA.81f).ⅱ) 보다 상세한 것은 『빠라맛타만주싸』보다 Vism. 458/14 : 114이하 등과 이 책의 부록 「표5 : 인식과정」을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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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 들어와 원하는 것을 자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와 같이 통각의 찰나에 악계 등이 일어날 때, 제어하지 않는 것이 있으면, 감관의 문도 수호되지 않고 존재지속의 고리·전향작용 등의 인식과정도 수호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때 계행 등이 일어날 때, 감관의 문도 수호되고, 존재 지속의 고리도, 전향 등의 인식과정도 수호된다. 무엇과 같은가? 예를 들어 도시의 사대문이 수호되면, 시내의 집집마다의 문 들을 지키지 않아도, 시중의 일체의 재화가 수호되고 보호되고, 성문이 닫혀졌기 때문에 도적들이 들어오지 못하는 것처럼, 이와 같이 통각의 찰나에 계행 등이 일어날 때, 제어하는 것이 있으면, 감관의 문도 수호되고 존재 지속의 고리·전향작용 등의 인식과정도 수호된다. 그러므로 ‘제어하는 것’은 통각의 찰나에 일어날지라도 시각능력을 제어하는 것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59. ‘청각으로 소리를 듣지만’ 등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와 같은 것을 간략하게 설하면, 형상 등에서 오염에 의해 결박되는 인상 등에 취학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것을 감관제어적 계행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생활청정의 계행]
60. [3] [생활청정의 계행] 이제 감관제어적 계행 직후에 “생활을 원인으로 시설된 여섯 가지 학습계율의 위범을 통해서 내지 ⓐ기만· ⓑ요설· ⓒ암시· ⓓ비하· ⓔ탐욕적 이익의 추구 등과 같은 악하고 불건전한 원리를 통해서 일어나는 삿된 생활에서 떠나는 것 그것이 생활청정적 계행이다.”라고209) 설한 생활청정적 계행210)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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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 yā pana ājivahetupaññattānaṁ channaṁ sikkhāpadānaṁ vitikkamassa, kuhanālapanā nemittakatā nippesikatā lābhena lābhaṁ nijigīsanatā’ti evamādinañca pāpadhammānaṁ vasena pavattā micchājīvā virati, idaṁ ājivapārisuddhisilaṁ : 이하 설명의 이해를 돕기 위해 Vism. 16/1 : 42의 구절을 역자가 반복한 것이다.
210) ājivapārisuddhisīla : 한역에서는 활명청정계(活命淸淨戒)인데, 해탈도론에서는 명청정계(命淸淨戒)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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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을 원인으로 시설된 여섯 가지 학습계율이라는 것은 아래와 같다. 생활 때문에, 생활을 원인으로, 악을 원하고, 욕망에 정복되어, 거짓되고, 진실하지 못한, 인간을 뛰어넘는 상태에 대해 사칭하면,211) 그것은 승단추방죄212)에 해당한다. 생활 때문에, 생활을 원인으로, “그대의 정사에 사는 그 수행승은 거룩한 님이다.”라고 말하면, 그것은 공언하는 자의 추악죄214)에 해당한다. 생활 때문에, 생활을 원인으로, 수행승이 수승한 음식을 병도 없는 자신을 위하여 요청하여 [23] 먹는다면, 속죄죄215)에 해당된다. 생활 때문에, 생활을 원인으로, 수행녀가 수승한 음식을 병도 없는 자신을 위하여 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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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 uttarimanussadhammam ullapati : 승단추방죄의 일종으로 한역에서는 상인법(上人法 : uttarimanussadhamma)이라고 한다. 인간을 뛰어넘는 상태에 대한 사칭이란 실제로 얻지 못한 선정이나 신통이나 길과 경지를 얻었다고 허위로 알리는 것을 말한다.
212) pārājika : 한역으로 음사하여 바라이(波羅夷)라고 하고 번역하여 단두죄(斷頭罪)라고 한다. 어원적으로 살펴보면, 빠리지까(pārājika)의 원래 의미는 패배죄(敗北罪)이다. 수행자로서 이 죄를 짓는 것은 수행에서의 승리자가 되지 못하고 패배자가 된다는 것으로 수행자에게는 가장 무서운 죄이다. 당연히 계율 가운데 가장 중죄를 구성하는 것으로 4조(四條)가 있다. 음행 투도 살인 인간을 뛰어넘는 상태(上人法 : uttarimanussadhamma)에 대한 사칭이다.
213) saṅghādisesa : 빠알리어로 쌍가디쎄싸(saṅghādisesa; Saṅgh.)라고 하고, 한역에서는 승찬(僧殘)이라고 하고 음사하여 승가바시사(僧伽婆尸沙)라고 한다. 승단추방죄에 다음 가는 무거운 죄로 수행승으로서의 목숨이 남아 있어 승단에 남아 있을 수 있는 죄 또는 처음부터 끝까지 승단이 갈마를 통해서 관여하는 죄를 말한다.
214) thullaccaya : 승단추방죄와 승단잔류죄와 같은 중죄를 범하려가다 미수로 끝난 죄를 말하는데, 빠알리어로 툴랏짜야(thullaccaya)라고 한다. 한역으로는 음사하여 투란차(偸蘭遮) 또는 투란죄(偸蘭罪)라고 하고 번역하여 방사죄(放使罪)라고 하지만, 추악죄(醜惡罪) 또는 미수죄(未遂罪)라고 번역할 수 있다.
215) pācittiya : 한역으로는 바일제(波逸提), 바일저가(波逸底迦), 바약치(波藥致), 바라일니가(波羅逸尼柯), 바라야질지가(波羅夜質肢迦), 바야제(波夜提)라고 하고, 번역하여 타(墮)라고 한다. 속죄가 필요한 죄인데, 속죄하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지는 죄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상실속죄죄인 사타(捨墮)와 속죄죄 내지 단순속죄죄인 단타(單墮)가 있다. 상실속죄죄는 앞에서 언급한 계율을 어긴 것과 관련된 재물을 내놓는 상실죄를 말한다. 그리고 속죄죄 내지 단순속죄죄에는 90조(九十條) 내기 92조(九十二條 : 수행녀는 141-210條)가 있는데, 이것은 버릴 재물이 필요없는 죄로 상대에게 사죄하고 참회하는 것이 필요한 망어(妄語)나 악구(惡口) 기타 가벼운 죄를 모아 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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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먹는다면, 고백죄216)에 해당한다. 생활 때문에, 생활을 원인으로, 스프나 쌀밥을 병도 없는 자신을 위하여 요청하여 먹는다면, 악작죄217)에 해당된다.’ 이와 같이 시설된 여섯 가지 학습계율이 있다. 이러한 여섯 가지 학습계율의 위법을 뜻하는 것이다.
61. (a) ‘기만’ 등에 관해서는 이와 같은 성전의 설명이 있다. “그 가운데 기만은 어떠한 것인가? 이득과 명예와 칭송에 집착하여 악을 원하고, 욕망에 정복된 자가 필수자구의 거절이라고 칭하거나, 넌지시 말하거나 위의 자세를 꾸미거나 추스르거나 차리거나, 눈ᄊᅠᆸ을 찌푸리거나, 얼굴을 찡그리며, 사기 협잡 속임수를 일삼는데, 이것을 기만이라고 한다.”218)
62. (b) “그 가운데 ‘요설’이란 어떠한 것인가? 이득과 명예와 칭송에 집착하여 악을 원하고, 욕망에 정복된 자가 타인들에게 수다를 떨거나, 장황하게 말하거나, 겉치레로 말하거나, 치켜세우거나, 극찬하거나, 못 박아 말하거나, 꼼짝할 수 없게 만들거나, 두각을 나타내거나, 호언하거나, 환심을 사거나, 비위를 맞추거나, 함부로 지껄이거나, 귀여워하거나 하는데, 그것이 요설이다.”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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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 pātidesaniya : 한역으로는 바라제사니(波羅提舍尼), 바라제제사니(波羅提提舍尼), 번역하여 향피회(向彼悔), 대타설(對他設), 또는 회과법(悔過法)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4조(四條 : 수행녀는 八條)가 있다. 주로 탁발음식의 수용에서 부적절한 경우 발생하는 죄이다. 이 죄를 범한 자는 다른 수행승에게 고백하고 참회해야 한다.
217) dukkaṭa : 한역으로 악작(惡作) 또는 돌길라(突吉羅)라고 한다. 중학죄(衆學罪 : sekhiya)의 일종으로 어겼을 때는 고의로 범한 경우에는 한 사람 앞에서 참회하고, 고의가 아닌 경우에는 마음속으로만 참회하면 된다.
218) tattha katamā kuhanā, lābhasakkāra-silokasannissitassa pāpicchassa icchāpakatassa yā paccaya-paṭisenvana-saṅkhātena vā sāmsmtajappitena vā iriyāpathassa vā aṭṭhapanā ṭhapanā saṇṭhapanā bhākuṭika bhākuṭiyam kuhanā kuhāyanā kuhitattam, ayamvuccati kuhanā : Vibh. 352
219) tattha katamā lapanā, lābhasakkārasilakasannissitassa pāpicchassa icchāpakatassa yā paresaṁ ālapanā lapana sallapana unnahana samunnahanaukkacana samukkacanā ukkacanā samukkācanā anuppiyabhāṇitā cāṭukamyatā muggasūpyatā pāribhaṭyatā, ayaṁ vuccati lapanā : Vibh. 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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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c) “그 가운데 ‘암시’란 어떠한 것인가? ‘이득과 명예와 칭송에 집착하여 악을 원하고, 욕망에 정복된 자가 타인들에게 신호하거나, 신호를 보내거나, 암시하거나, 암시를 보내거나, 넌지시 말하거나, 에둘러 말하는데, 이러한 것이 암시이다.”220)
64. (d) “그 가운데 ‘비하’라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이득과 명예와 칭송에 집착하여 악을 원하고, 욕망에 정복된 자가 타인들에게 욕설하거나, 얄보거나, 헐뜯거나, 비웃거나, 냉소하거나, 조소하거나, 조롱하거나, 모욕하거나, 나쁜 소문을 퍼뜨리거나, 등 뒤에서 험담하거나 하는데, 이러한 것이 비하이다.”221)
65. (e) “그 가운데 ‘탐욕적으로 이득을 추구하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이득과 명예와 칭송에 집착하여 악을 원하고, 욕망에 정복된 자가 여기서 얻은 물건을 저곳으로 가지고 가고, 저기서 얻은 물건을 여기로 가지고 와서 이와 같이 물건으로 물건을 찾거나, 구하거나, 추구하거나, 소망하거나, 희망하거나, 갈망하는데, 이러한 것이 탐욕적으로 이득을 추구하는 것이다.”222)
66. 이 성전의 의미는 이와 같이 알아야 한다. 먼저223) 기만224)의 해명에서 ‘이득과 명예와 칭송에 집착하여’라는 것은 ‘이득과 명예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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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 tattha katamā nemittikatā, lābhasakkārasilokasannissitassa pāpicchassa icchāpakatassa yaṁ paresaṁ nimittaṁ nimittakammaṁ obhāso abhāsakammaṁ sāmantajappā parikathā, ayaṁ vuccati nemittikatā : Vibh. 352
221) tattha katamā nippesikatā, lābhasakkārasiokasannissitassa pāpicchassa icchāpakatassa yā paresaṁ akkosanā vambhanā garahanā ukkhepanā samukkhepanā khipanā saṁkhipanā pāpanā sampāpanā avaṇṇahārikāl parapiṭṭhimaṁsikatā, ayaṁ vuccati nippesikatā : Vibh. 352
222) tattha katamā lābhena lābhaṁ nijigīsakkarasilokasannissito pāpiccho icchapākato ito laddhaṁ āmisaṁ amutra harati, amutra vā laddhaṁ āmisaṁ idha āharati. Yā evarūpā āmisena āmisassa eṭṭhi gaveṭṭhi pariyeṭṭhi esanā gavesanā pariyesanā ayaṁ vuccati lābhena lātaṁ nijigīsanatā’ti : Vibh. 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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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송에 집착하고 갈구하여’라는 뜻이다. ‘악을 원하여’라는 [24] 것은 ‘갖지 않은 덕성을 드러내길 원하여’라는 뜻이다. ‘욕망에 정복된 자가’라는 것은 ‘욕망에 패배하여 제압된 자가’라는 뜻이다. 그 다음에 필수자구의 거절이라고 칭하기, 넌지시 말하기, 위의 자세를 꾸미기의 세 가지 기마의 사례가 마하닛데사225)에 기술되어 있는 까닭에 그 세 가지를 표시하여 ‘필수자구의 거절이라고 칭하기’ 등과 같은 것이 비롯된 것이다.
67. 그 가운데 의복 등으로 초대를 받은 자가 그것들을 원하더라도 악을 원하여 거절하면, 그 재가의 장자들이 자기를 신심이 잘 확립된 자라고 알고 다시 그들이 “오, 존자께서는 욕망을 여의었고 어떠한 것도 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만약에 어떠한 조그마한 것이라도 받는다면, 우리에게 실로 큰 공덕이다.”라고 여러 가지 수단으로 수승한 의복 등을 가져오면, 호의를 베푸는 척하면서 받는다. 그래서 그 이후에도 수레에 쌓아서 가져오게 하는 악한 간계가 필수자구의 거절이라고 칭하는 기만의 사례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68. 마하닛데싸에서는 이와 같이 “필수자구의 거절이라고 칭하는 기만의 사례는 어떠한 것인가? 여기 어떤 재가의 장가가 의복, 탁발음식, 와좌구, 의약자구로 수행승을 초대하였는데, 그가 악을 원하고 욕망에 정복되어 의복, 탁발음식, 와좌구, 의약자구를 원하면서도 더욱 얻기 위하여 의복을 거절하고, 탁발음식을 거절하고, 와좌구를 거절하고, 의약자구를 거절한다. 그는 이와 같이 ‘수행자가 값비싼 옷으로 무엇하랴, 수행자는 묘지나 쓰레기더미나 시장통의 넝마를 주어서 외투를 만들어 착용하면 된다. 수행자가 값비싼 탁발음식으로 무엇하랴? 수행자는 이삭줍기로 모은 탁발음식으로 생활하면 된다. 수행자가 값비싼 처소로 무엇하랴, 수행자는 나무 밑이나 노천에서 살면 된다. 수행자가 값비싼 의약자구로 무엇하랴, 수행자는 소의 오줌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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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 Mahāniddesa : Nidd.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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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그러뜨린 오배자를 넣어 썩힌 진기약으로 약을 삼으면 된다.226) 그래서 거친 의복을 걸치고 거친 탁발음식을 먹고, [25] 거친 처소에서 지내고, 거친 의약자구를 사용하면, 그를 두고 그 장자들은 이와 같이 ‘이 수행자는 욕망을 여의고 만족하고 홀로 지내며, 교제하지 않고, 정진에 힘쓰는 두타행자이다.’라고 점점 더 의복과 탁발음식과 와좌구와 의약자구로 초대한다. 그는 이와 같이 말한다. ‘세 가지 현전을 통해서 믿음이 있는 선남자에게 많은 공덕이 생겨난다. 곧, 믿음의 현전을 통해서 믿음이 있는 선남자에게 많은 공덕이 생겨난다. 시물의 현전을 통해서 믿음이 있는 선남자에게 많은 공덕이 생겨난다. 수시자의 현전을 통해서 믿음이 있는 선남자에게 많은 공덕이 생겨난다. 그대들에게 믿음도 있고 시물도 있다. 그리고 나는 수시자이다. 만약에 내가 거절하면, 그대들에게 공덕은 거절될 것이다. 나는 시물이 필요 없지만, 그러나 나는 그대들을 애민히 여겨 받아들일 것이다. ‘그래서 많은 의복을 받고 많은 탁발음식을 받고 많은 처소를 받고 많은 필수약을 받는다. 이와 같이 눈살을 찌푸리고 얼굴을 찡그리며, 사기협잡속임수를 일삼으면, 그러한 것이 기만의 사례이다.“라고227) 설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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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 pūtimuttena vā hariṭakīkhaṇḍena vā osadhaṁ kareyyā’ti : 한역에서는 진기약(陳棄藥 : pūtimuttabhesajja) 이외에 부란약(腐爛藥), 황용탕(黃龍湯)이라고도 한다. 진기약은 소의 오줌에 미로발란 나무의 쓰디쓴 열매를 썩힌 것으로 치료제나 강화제로 쓰인다.
227) katamaṁ paccayapaṭisevanasaṅkhātaṃ kuhanavatthu. idha gahapatikā bhikkhuṃ nimantenti cīvara piṇḍapāta senāsana glāna paccaya bhesajjaparikkhārehi. so pāpiccho icchāpakato atthiko cīvara – pa – parikkhārānaṁ bhiyyokamyataṁ upādāya cīvaraṁ pacchakkhāti. piṇḍapātaṁ – pa – senasanaṁ. gilāna-paccayabhesajjaparikkhāraṁ paccakkhāti. so evamāha ‘kim samaṇassa mahagghena cīvarena, etaṁ sāruppaṁ yaṁ samaṇo susānā vā saṅkārakūṭa yā pāpaṇikā vā nantakāni uccinitvā saṅghātiṁ katvā bhāreyya. kimsamaṇassa mahagghena piṇḍapātea etaṁ sāruppaṁ yaṁ samaṇo uñchācariyāya piṇḍiyālopena jīvikaṁ kappeyya. kiṁ samaṇassa mahagghena, senāsanena, etaṁ sāruppaṁ yaṁsamaṇo rukkhamūliko vā assa abbhokāsiko vā. kiṁ samaṇassa mahagghena gilāna paccaya bhesajjaparikkhārena, etaṁ sāruppaṁ yaṁ samaṇo pūtimuttena vā hariṭakīkhaṇḍena vā osaghaṁ kareyyā’ti. tadupādāya lūkhaṁ cīvaraṁ dhāreti, lūkhaṁ piṇḍapataṁ paribhuñhjati, lūkhaṁ senāsanaṁ paṭisevati, lūkhaṁ gilānapaccayabhesajja parikkhāraṁ paṭiseva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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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그리고 악을 원하는 자가 인간을 뛰어넘는 상태에 얻은 것을 사칭하는 말로써 이리저리 속이는 것이 ‘넌지시 말하기라고 칭하는 기만의 사례’라는228)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어떠한 것이 넌지시 말하기라고 칭하는 기만의 사례인가? 여기 어떤 사람이 악을 원하고 욕망에 정복되어 존경을 받고자 의도하여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나를 존경할 것이다.’라고 고귀한 가르침에 의지해서 ‘이와 같은 의복을 착용한 수행자는 위대한 능력을 지닌 자이다.’라고 말하거나, ‘이러한 발우,동발, 수병, 여과기, 열쇠, 허리띠, 신발을 착용한 수행자는 위대한 능력을 지닌 자이다.’라고 말하거나, ‘이와 같은 친교사, 궤범사, 동일 한 화상을 친교사로 삼는 자, 동일한 궤범사를 스승으로 삼는 자, 벗, 지인, 동료, 친구를 갖는 수행자는 위대한 능력을 지닌 자이다.’ ‘이와 같은 정사, 편당(片堂), 궁전, 평옥, 산굴, 동혈, 초옥, 중각, 망루, 원실, 보물창고, 집회소, 가건물, [26] 나무 아래에 사는 수행자는 위대한 능력을 지닌 자이다.’라고 말하거나, 또는 ‘언제나 악한 추구에 사로잡혀 항상 눈살을 찌푸리며 기만을 일삼고 요설을 일삼고 교언으로 존경 받고자 하는 자가 ‘이 수행자는 이 정도로 지속하는 선정의 성취를 얻었다.’라고 흡사 자기가 심오하고, 비밀스럽고, 미묘하고, 은밀하고, 출세간적이고, 공(空)과 상응한 것을 얻은 것처럼 말한다. 이와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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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menaṁ gahapatikā evaṁ jānanti ‘ayaṁ samaṇo appiccho santuṭṭho pavivitto asaṁsaṭṭho āraddhaviriyo dhutavādo’ti. bhiyyo bhiyyo nimantenti civara – paparikkhārehi. so evamaha ‘tinnam sammukhibhāvā saddho kulaputto bahuṁ puññaṁ pasavati. saddhāya sammukhibhāvā saddho kulaputto bahuṁ puññaṁ pasavati. deyyadhammassa – pa – dakkhiṇeyyānaṁ sammukhībhāvā saddho kulaputto bahuṁ puññaṁpasavati. tumhākañcevāyaṁ saddhā atthi, deyyadhammo ca samvikkati, ahañca paṭiggāhako, sacehaṁ na paṭiggahessāmi,evaṁ tumhe puññena paribāhirā bhavissanti, na mayhaṁ iminā attho. apica. tumhākaṁyeva anukampāya paṭiggaṇhāmi’ti. tadupādāya bahumpi cīvaraṁ paṭiggaṇhāti. bahumpi piṅḍapātaṁ – pa – bhesajjaparikkhāraṁ paṭiggaṇhāti. yā evarūpā bhākuṭikā bhākuṭiyaṁ kuhanākuhāyanā kuhitattaṁ, idaṁ paccayapaṭisevanasaṅkhātaṁ kuhanavatthū’ti : Nidd. I. 224-225
228) sāmantajappanasaṅkhātaṁ kuhanavatthū’ti : 『해탈도론』에는 보자칭설(普自稱設)이라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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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살을 찌푸리고 얼굴을 찡그리며, 사기 협잡 속임수를 행하면, 그것이 넌지시 말하기라고 칭하는 기만의 사례이다.”라고229) 설한 것과 같다.
70. 그리고 악을 원하는 자가 존경받고자 하는 것을 의도하여 위의자 로서 속이는 것은 ‘위의자세에 입각한 기만의 사례’라는230)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위의자세라고 칭하는 기만의 사례란 어떠한 것인가? 여기 어떤 악을 원하고 욕망에 정복된 자가 존경을 받을 의행으로 이와 같이 하면 사람들이 ‘나를 존경할 것이다’라고 가는 것을 꾸미고, 서는 것을 꾸미고, 앉는 것을 꾸미고, 눕는 것을 꾸민다. 계산하여 가고, 계산하여 서고, 계산하여 앉고, 계산하여 눕는다. 삼매에 든 것처럼 가고, 삼매에 든 것처럼 서고, 삼매에 든 것처럼 앉고, 삼매에 든 것처럼 눕는다. 그리고 보여 주기 위해서 선정을 닦는다. 이와 같이 위의 자세를 꾸미거나 차리거나 추스르거나, 눈썹 찌푸리거나, 얼굴을 찡그리며, 사기·협작·속임수를 일삼는데, 이것이 기만의 사례이다.”라고231) 설한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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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 katamaṁ sāmantajappanasankhātaṁ kuhanavatthu. idhekacco pāpiccho icchāpakato sambhāvanādhippāyo ‘evaṁ maṁ jano sambhāvessatī’ti ariyadhammasannissitaṁ vācaṁ bhāsati ‘yo evarūpam cīvaraṁ dhāreti, so samaṇo mahesakkho’ti bhaṇati. ‘yo evarūpaṁ pattaṁ lohathālakaṁ. dhammakaraṇaṁ parissāvanaṁ kuñcikaṁ, kāyabandhanaṁ upāhanaṁ dhāreyi, so samaṇo mahesakkho’ti bhaṇati. yassa evarūpo upajjhāyo ācariyo samānupajjhāyako, samānācariyako mitto sandiṭṭho sambhatto sahāyo. yo evarūpe vihāre vasati aḍḍhayoge pāsade hammiye guhāyaṁ leṇe kuṭiyā kūṭāgāre aṭṭe māḷeuddaṇḍe upaṭṭhānasālāyaṁ maṇḍape rukkhamūle vasati, so samaṇo mahesakkto’ti bhaṇati. atha vā korajikakorajiko bhakutikabhakutiko kuhakakuhako lapakalapao mukhasambhāviko, avaṁ samaṇo imasaṁ evarūpānaṁ. santānam vihārasamāpattīnaṁ lābhi’ti tādisaṁ gambhīraṁ uḷhaṁ nipuṅaṁ paticchannaṁ lokuttaraṁ suññatāpaṭisaṁyuttaṁ kathaṁ kathesi, yā evarūpā bhākuṭikā bhākuṭiyaṁ kuhanā kuhāyanā kuhitattaṁ, idaṁsāmantajappanasankhataṁ kuhanavatthū’ti : Nidd. I. 224-225 편당(片堂 : aḍḍhayoga)에 대해서는 Vism. 34/1 : 95를 참조하라.
230) iriyāpathasannissitaṁ kuhanavatthū’ti : 『해탈도론』에는 가숙위의(假宿威儀)라고 되어 있다.
231) katamaṁ iriyāpathasankhatam kuhanavattu. idhekacco pāpiccho icchāpakato sambhāvanādhippāyo evam mam jano sambhāvessati’ti gamanam santhapeti, thānam sant hapeti, nisajjaṁ saṇṭhapetim, sayanaṁ saṇṭhapeti, paṇidhāya gacchati, paṇidhāya tiṭṭhati, paṇidhāya nisīdati, paṇidhāya seyyaṁ kappeti, samāhito viya gaccati, samāhito viyatiṭṭhati, nisīdati, seyyaṁ kappeti, āpāthakahjjhāyī ca hoti, yā evarūpā iriyāpathassa aṭṭhapanā ṭhapanā saṇṭhapanā bhākuṭikā bhākuṭiyaṁ kuhanā kuhāyanā kuhatattaṁ, idaṁ vuccati iriyāpathasaṅkhātaṁ kuhanavatthū’ti : Nidd. I. 225-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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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a) 그 가운데 ‘필수자구의 거절이라고 칭하기’라고 하는 것은 필수자구의 거절이라고 칭해지거나 필수자구의 거절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넌지시 말하기’란 ‘주제에 가깝게 말하기’를 뜻한다. 위의 자세는 네 가지 위의 자세232)를 뜻한다. ‘꾸미거나’라는 것은 처음 설비하거나 또는 고려하여 시설하는 것이다. ‘차리거나’라는 것은 확립의 종류를 말하는 것이다. ‘추스리거나’는 ‘잘 정돈하다. 편안하게 만들다.’라는 뜻이다. ‘눈살을 찌푸리거나’라는 것은 우월한 지위에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불손하게 얼굴을 수축하는 것을 말한다. 품행이 불손하게 하는 자가 눈살을 찌푸리는 자이고, 눈살을 찌푸리는 상태가 얼굴을 찡그리는 것이다. 사기는 속이는 일이다. 사기에 이르는 것이 협잡이다. 속이는 상태가 속임수인 것이다.
72. (b) ‘요설’의 해석에서 ‘수다를 떨기’233)라는 것은 정사에 들어온 사람들을 보고 “당신들은 어떠한 목적으로 왔는가? 당신들은 수행승들을 초대하려 하는가? 만약에 [27] 그렇다면 가라. 나는 나중에 발우를 챙겨서 따라가겠다.”라고 이와 같이 먼저 말하거나. 또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나는 띳싸인데, 왕이 나를 믿는다. 아무아무개 대신이 나를 믿는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자기소개를 말하는 요설이 ‘수다를 떨기’이다. ‘장황하게 말하기’라는 것은 물으면 위와 같은 방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겉치레로 말하기’라는 것은 재가의 장자들에게 인정 받지 못함을 두려워하여 거듭하여 친절하게 말하는 것이고, ‘치켜세우기’라는 것은 ‘대부호, 대선주, 대시주’ 등으로 치켜세워 말하는 것이다. ‘극찬하기’라는 것은 모든 면에서 치켜세워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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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 catuiriyāpatha ;행주좌와(行住坐臥)의 네 가지 위의자세(四威儀路)를 말한다.
233) ālapanā : 한역의 허담(虛談)인데, 『해탈도론』에서는 첨곡(諂曲)이라고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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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못 박아 말하기’라는 234) 것은 “재가신도들이여, 예전에 그대들은 이즈음에 새 것을 보시했다. 왜 이제는 하지 않는가?”라고 말하고 이와 같이 “존자여, 드릴 것입니다. 단지 기회를 얻지 못했을 뿐입니다.”라고 말할 때까지 거듭해서 설득해서 말하거나 엮어서 말하는 것이다. 또는 손에 사탕수수가 있는 것을 보고, “재가의 신도들이여, 어디서 구했는가?”라고 묻는다. “존자여, 사탕수수밭에서입니다.” “어찌 사탕수수는 맛있는가?” “존자여, 드셔보시면 알 것입니다.” 그러면, “재가의 신자들이여, 수행승이 사탕수수를 달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설득해서 엮어서 말하면, 그것이 못 박아 말하기이다. ‘꼼짝할 수 없게 만들기’라는 것은 모든 면에서 거듭해서 못 박아 말하는 것이다.
74. ‘두각을 나타내기’라는 것은 “이 가정은 오직 나만을 안다. 만약 거기서 사물이 생기면, 나에게만 준다.”라고 들어 올려 호언하고 환심을 사고 설명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뗄라깐다리까의 이야기235)를 들 수 있다. 모든 측면에서 거듭해서 호언하는 것이 두각을 나타내기 이다.
75. ‘환심을 사기’라는 것은 진리에 계합하거나 원리에 계합하거나를 고려하지 않고 거듭해서 기뻐하는 말을 하는 것이다. ‘비위를 맞추기’는 비하하여 자기 마음을 지극히 낮추어 행동하는 것이고, ‘함부로 지껄이기’라는 것은 콩수프와 같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콩을 삶을 때 어떤 부분은 삶아지지 않고, 어떤 부분은 삶아지는 것과 같다. 사람의 말이 어떤 부분은 진실이고 어떤 부분은 허위인 경우 그 사람은 콩수프와 같다고 한다. 함부로 지껄이는 것은 그와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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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 unnahanā’ti : 아첨, 설득, 못 박아 말하기, 구걸하기 등의 의미를 지닌다.
235) Telakandarikavatthu : Smh. 483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 두 명의 수행승이 한 마을에 들어가 휴게소에 앉아서 한 소녀를 불렀다. 그녀가 오자 한 수행승이 달느 수행승에게 물었다. “존자여, 이 낭자는 누구의 딸입니까?” “우리의 단월인 뗄라깐다리까의 딸입니다. 우리가 그녀의 모친의 집에 가서 그녀가 우리에게 버터기름을 줄 때 그녀는 그것을 단지 안에 넣어줍니다. 그녀도 모친처럼 단지 안에 넣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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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귀여워하기’라는 것은 ‘귀여워하는 상태’를 말한다. [28] 양가의 유모처럼 아이를 허리나 어깨에 올려 귀여워하며 키운다는 뜻이다. 그가 귀여워하는 행위가 귀여워하는 것이고 귀여워하는 상태가 귀여워하는 것이다.
77. (c) ‘암시’236)란 ‘신호주기’의 해석에서237) ‘신호’란 어떠한 것이든 타인에게 필수자구를 보시할 생각을 일으키게 하는 신체적 언어적 행위를 뜻한다. 신호주기는 먹을 것을 가지고 가는 것을 보고 “먹을 것을 얻었습니까?”라는 등의 방식으로 신호를 만드는 것이다. 암시란 필수자구와 관련하여 말하는 것이다. 암시행위란 목우자를 보고 “이 송아지는 젖을 먹는 송아지인가 버터우유를 먹는 송아지인가?”라고 묻고는 “존자여, 우유를 먹는 송아지입니다.”라고 말하면, “우유를 먹는 송아지는 아닐 거야, 우유를 먹는 송아지라면, 수행승들도 우유를 얻을 수 있을 텐데 말이다.”라는 등의 방식으로 그 아이들의 부모에게 알게 하여 우유의 보시 등을 하도록 암시를 주는 것이다.
78. ‘넌지시 말하기’라는 것은 주제에 가깝게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재가의 시봉을 받는 수행승의 이야기를 소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재가의 시봉을 받는 수행승이 음식을 먹고 싶어서 가정에 들어가 앉았다. 그를 보고 내키지 않았던 여주인이 “쌀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쌀을 가지러 이웃집에 갔다. 수행승도 내실에 들어가서 쳐다보고 문 뒤의 귀퉁이에 사탕수수, 그릇 속의 당밀과 광주리의 소금에 절여 꼬챙이에 꿴 물고기와 단지 속의 쌀과 항아리속의 버터기름을 보고 밖으로 나와 앉았다. 여주인도 “쌀을 얻지 못했니다.”라고 하면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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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6) nemittikata : 한역에서는 현상(현상)인데, 해탈도론에서는 시상(시상)이라고 번역했다.
237) nemittikataniddese : 원래 ‘암시의 해석에서’라는 말이지만 번역의 문맥상 첨가하여 만든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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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승은 이와 같이 “청신녀여, ‘오늘 탁발이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미리 전조를 보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존자여, 무슨 말입니까?” “문 뒤의 귀퉁이에 둔 사탕수수와 같은 뱀을 보았고, ‘그것을 때려잡아야지’라고 쳐다보다가 그릇 속에 둔 당밀 덩어리처럼 보이는 돌을 보았습니다. 흙덩어리로 뱀을 쳤는데, 광주리의 소금에 절여 꼬창이에 꿴 물고기와 같은 뱀의 후드를 보았습니다. 그것이 그 흙덩이를 물려고 하자 단지에 있는 쌀과 같은 이빨들을 보았습니다. 또한 그 뱀이 분노하자 항아리에 놓인 버터기름과 같은 입에서 나온 독이 섞인 침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수행자를 속일 수는 없다.”라고 생각하고 사탕수수를 [29] 주고 밥을 요리하고 버터기름과 당밀과 물고기와 함께 모든 것을 보시했다.
79. 이와 같이 주제에 가깝게 말하는 것이 ‘넌지시 말하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에둘러 말하기’라는 것은 가능한 한, 돌려서 말하는 것이다.
80. (d) '비하‘238)의 해석에서 ‘욕설하기’라는 것은 열 가지 화나게 한는 일239)을 뜻한다. ‘얕보기’라는 것은 경멸하여 말하는 것이고, ‘헐뜯기’라는 것은 “신심도 없고 청정한 믿음도 없다.”라는 방식으로 허물을 들추어내는 것이다. ‘비웃기’라는 것은 그것을 여기서 말하지 말라고 비웃는 것이다. 일체의 관점에서 토대를 제공하고 근거를 제공하면서 비웃는 것이 ‘냉소하기’이고, 또는 보시를 하지 않는 자를 두고 ‘오, 시주여!’라고 거론하는 것이 ‘비웃기’이고, “오, 대시주여!”라고 이와 같이 굉장하게 거론하는 것이 ‘냉소하기’이다. ‘조소하기’라는 것은 “자신의 씨앗을 먹는 자가 어떠한 삶을 살겠는가?”라고 비웃는 것이다. ‘조롱하기’라는 것은 “항상 모두에게 ‘없다.’라는 말을 보시하는 자를 두고 그대들이 보시하지 않는 자라고 말하는가?”라고 극도로 비웃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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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8) nippesikatā : 한역의 격마(激磨)인데, 해탈도론에서는 진마시상(瞋磨示相)이라고 되어 있다. 비하(卑下)라는 의미이다.
239) dasa akkosavatthu : 한역에서는 십노매사(十怒罵事)라고 한다. Smh. 340에 따르면, ‘이 도둑아, 바보야, 멍청이야, 낙타야, 황소야, 당나귀야, 지옥중생아, 짐승아, 구제불능자야, 천벌을 받을 놈아.’라고 열가지 욕설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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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모욕하기’라는 것은 인색한 것과 악한 평판에 대한 모욕을 뜻한다. 일체의 관점에서 모욕하는 것이 ‘모독하기’이다. ‘나쁜 소문을 퍼뜨리기’는 나쁜 소문을 두려워하여 이처럼 나에게 보시하겠지.‘라고 집에서 집으로 마을에서 마을로 지방에서 나쁜 소문을 나르는 것을 뜻한다. ’등 뒤에서 씹기‘라는 것은 앞에서는 달콤한 말을 하고 뒤에서는 악평을 하는 것이다. 얼굴을 정면으로 볼 수 없는 자가 뒤돌아서는 자의 등의 살을 물어뜯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등 뒤에서 씹기‘라고 한 것이다. 이러한 것이 ‘비하’라는 것인데, 마치 대나무 조각으로 고약을 긁어내듯, 남의 덕성을 빻고 부수어 자신의 이득을 추구하므로 ‘비하’라고 한 것이다.
82. (e)‘탐욕적으로 이득을 추구하기’240)의 해석에서 ‘추구하기’라는 것은 구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득이라는 것은 가정에서 얻은 것이다. 그곳은 그 가정에서라는 뜻이고, ‘찾기’는 욕구하는 것이고, ‘구하기’는 추적하는 것이고, ‘추구하기’는 거듭해서 추적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시작해서 얻고 [30] 얻은 탁발음식을 여기저기 양가의 자식들에게 주고 마침내 유미죽을 얻어 간 수행승의 이야기를 여기서 언급할 수 있다. ‘소망하고’는 ‘찾고’등과 동의어이다. 그러므로 ‘찾고’라는 것은 ‘소망하고’와 ‘구하고’는 ‘희망하고’와, ‘추구하고’는 ‘갈망하고’와 동의어이다. 이와 같이 여기에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기만 등의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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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 lābhena lābhaṁ nijjigīsanatā : 한역에서는 이리성리(以利成利)인데, 해탈도론에서는 이시망시(以施望施)라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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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이제 ‘이와 같은 모든 악한 원리’라는 것은 ‘여기 등의 말을 통해서’ 여기 어떤 존귀한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이 믿음으로 보시한 음식을 먹고 이와 같은 저열한 재주로서 잘못된 생활, 곧, 수족에 의한 점괘, 점상에 의한 점괘, 조짐에 의한 점괘, 해몽, 관상, 쥐가 갉아 먹은 못의 모양으로 치는 점, 화신에의 헌공, 국자를 사용하여 제사 지내는 헌공 등의 방식으로241) ‘하느님의 그물’에서242) 언급된 여러 가지 악한 원리를 포함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84. 이와 같이 이러한 생활의 원인 때문에 시설된 여섯 가지 학습계율을 어기는 것을 통해서 생겨난 잘못된 생활과 이러한 기만·요설·암시·비하·탐욕적 이득의 추구 등과 같은 악하고 불건전한 원리를 통해서 생겨나는 잘못된 생활을 삼가면, 그것이 생활청정적 계행이다. 여기서 단어의 의미는 이와 같다. 그것을 통해 그들이 살기 때문에 ‘생활’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필수자구를 추구하는 노력이다. 청정한 상태가 청정이고, 생활이 청정한 것이 생활청정이다.
[필수자구의지적 계행]
85. [4] [필수자구의지적 계행] 그 다음에 필수자구의지적 계행243)을 설했는데, 거기서 ‘이치에 맞게 성찰하여’라는 것은 ‘수단과 길을 통해 개별적으로 관찰하여 알고, 성찰하여’라는 뜻이다. 여기서 “이치에 맞게 성찰하여, 오로지 추위를 막고 더위를 막거나 등에·모기·바람·열기·뱀종류와의 접촉을 막거나 수치스러운 곳을 가리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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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 DN. I. 9 : ‘수족에 의한 점괘, 전조에 의한 점괘, 조짐에 의한 점괘, 해몽, 관상, 쥐가 갉아먹은 옷의 모양에 따라 치는 점괘, 불의 헌공, 국자의 헌공, 왕겨의 헌공, 쌀겨의 헌공, 쌀의 헌공, 버터의 헌공, 기름의 헌공, 입을 통한 헌공, 피의 헌공, 사지에 의한 점술, 집터에 의한 점술, 왕족을 위한 점술, 묘지의 주술, 정령에 대한 주술, 흙에 대한 주술, 뱀에 대한 주술, 독에 대한 주술, 전갈에 대한 주술, 쥐에 대한 주술, 흙에 대한 주술, 뱀에 대한 주술, 독에 대한 주술, 전갈에 대한 주술, 쥐에 대한 주술, 새에 의한 점술, 까마귀에 의한 점술, 수명의 판단, 화살을 막는 수호주술, 짐승의 울음소리에 의한 점술과 같은 저속한 지식으로 삿된 삶을 산다.
242) brahmajāle : DN. I. 1 하느님의 그물의 경(梵網經 : Brahmajālasutta)을 말한다.
243) paccayasannissitasīla : 한역에서는, 자구의지계(資具依止戒)인데, 『해탈도론』에서는 연수계(緣修戒) 또는 수행사사계(修行四事戒)라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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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복을 수용한다. 또는 이치에 맞게 성찰하여, 오락을 위한 것이 아니고, 도취를 위한 것이 아니고, 아름다워지기 위한 것이 아니고, 치장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이 몸을 지탱하고 건강을 지키고 상해를 방지하고 청정한 삶을 도와이루기 위해서, 이와 같이 ‘나는 예전의 고통을 끊고 새로운 고통을 일으키지 않고 건강하고 허물없이 평안하게 지내리라.’라고 생각하며 음식을 수용한다. 또는 이치에 맞게 성찰하여, 오로지 추위를 막고 더위를 막거나 등에·모기·바람·열기·뱀종류와의 접촉을 막거나 시절적 위험을 제거하거나 홀로 명상하기 위하여 처소244)를 수용한다. 또는 이치에 맞게 성찰하여, 오로지 이미 생겨난 질병의 고통을 막고 최상의 안온을 얻기 위하여 필수약품을 수용한다.”라는 표현으로245) 설한 성찰을 두고 ‘이치에 맞게 성찰하여’라고 한 것을 알아야 한다.
86. 여기서 ‘옷’이라는 것은 내의 등 가운데 어떠한 것이다. ‘수용한다.’라는 것은 사용하는 것인데, 입거나 걸친다는 뜻이다. ‘오로지’라는 것은 목적의 한계를 [31] 결정하기 위한 말이다. 수행자가 옷을 입는데 그 목적은 곧, 추위를 막아내는 것 등에 있지 그 이상은 아니다. ‘추위’는 자신의 세계의 부조화나 외부세계의 시절변화로 생겨난 어떤 추위를 뜻한다. ‘막고’라는 것은 ‘물리치고’라는 뜻이다. 몸에 고통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것을 제거하는 것이다. 몸이 추위에 공격받으면, 산란해진 마음 때문에 이치에 맞게 정진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추위를 막기 위해 옷을 입어야 한다.”라고 세존께서는 허락했다. 모든 경우에 이러한 방식이 적용된다. 여기서 단지 열기는 불로 인한 열기이다. 숲속의 불 등에서 생겨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87. ‘등에·모기·바람·열기·뱀종류와의 접촉’이라는 것은 여기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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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4) senāsana : ‘눕거나 앉는 처소’. 한역에서는 와좌구(臥座具)라고 한다. 때로는 숙박을 위한 방사까지 포함하여 주로 처소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245) sītassa paṭighātāyāti-ādinā nayena : MN. Ⅰ.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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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는 물어뜯는 파리인데, 눈먼 파리라고도 불린다. 모기는 그냥 모기이다. 바람이란 먼지 있는 바람과 먼지 없는 바람 등의 종류가 있다.
열기는 태양의 열기이다. 뱀종류는 무엇이든지 뱀 등과 같은 기어 다니는 긴 동물이다. 접촉에는 물림에 의한 접촉이나 닿음에 의한 접촉의 두 가지 접촉이 있다. 옷을 입고 앉아 있으면, 그것들이 괴롭히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경우들에 그것들을 막기 위해 옷을 입는다.
88. ‘오로지’라고 다시 말한 것은 그 불가피한 목적의 한계를 결정하여 보여 주기 위한 말이다. 왜냐하면, 수치스러운 곳을 가리는 것은 불가피한 목적을 나타낸 것이고, 다른 것들은 한시적인 목적이기 때문이다. ‘수치수러운 곳’은 각자의 음부를 뜻한다. 그 부분이 드러날 때 마다 수치심에 흔들리고 파괴된다. 수치심을 흔들기 때문에 수치스러운 곳이라고 하는 것이다. ‘수치스러운 곳을 가리기 위해’라는 것은 ‘수치스러운 곳을 덮기 위해’라는 뜻이다. ‘수치스러운 곳을 엄폐하기 위해’라고 읽기도 한다.
89. ‘탁발음식’이란 어떠한 것이든 음식으로서 수행승이 탁발할 때 어떠한 음식이든 발우에 떨어지면, 탁발음식이라고 불린다. 혹은 음식덩이가 떨어지면 탁발음식이다. 각각의 지역에서 얻은 탁발이 모인 것, 수집된 것을 말한다. ‘오락을 위한 것이 아니고’라는 것은 ‘마을 청년 등의 오락을 위해서’가 아니고 ‘놀이를 위해서가 아니고’라고 한 것이다. ‘도취를 위한 것이 아니고, 힘의 도취를 표시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남자의 도취를 위해서가 [32] 아니라는 것이다. ’아름다워지기 위한 것이 아니고‘라는 것은 궁녀나 기녀 등처럼 아름다워지고, 사지와 지체가 통통하게 살찌기 위해서가 아닌 것이라는 말이고, ’치장을 위한 것이 아니고‘라는 것은 연기자나 무용수 등처럼 치장하고, 청정한 피부와 안색을 표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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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 dava ··· mada ··· maṇḍana ··· vibhusana : 역자의 오락, 도취, 아름다움, 치장을 해탈도론은 흉험행(兇險行), 자고행(自高行), 장속(裝束), 장엄(莊嚴)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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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여기서 ‘오락을 위한 것이 아니고’라는 것은 어리석음의 토대를 버리기 위해 말한 것이다. ‘도취를 위한 것이 아니고’라는 것은 성냄의 토대를 버리기 위해 말한 것이다. ‘아름다워지기 위한 것이 아니고, 치장을 위한 것이 아니고’라는 것은 탐욕의 토대를 버리기 위해 말한 것이다. ‘오락을 위한 것도 아니고 도취를 위한 것도 아니고’라는 것은 자기에 대한 결박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 것이고, ‘아름다워지기 위한 것이 아니고, 치장을 위한 것도 아니고’라는 것은 타인에 대한 결박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네 가지를 통해서 이치에 맞지 않는 실천의 끊어버림과 감각적 쾌락의 향락에의 몰두의 끊어버림에 대하여 설한 대로 알 수 있다. ‘오로지’라는 것이 이미 언급한 것과 같다.
91. ‘이 몸을’이라는 것은 이 네 가지 광대한 존재의 물질적인 몸을 뜻한다. ‘지탱하고’라는 것은 ‘존속하기 위해서’이고, ‘건장을 지키고’라는 것은 ‘활동의 단절이 없게 하기 위해서 또는 오랜 시간 존속하기 위해서, 오래된 집의 주인이 집을 지탱하기 위해서, 수레의 주인이 수레의 축에 기름을 칠하듯, 몸을 지탱하고 부양하기 위해서 탁발음식을 수용하되, 오락을 위한 것도 아니고 치장을 위한 것도 아니고’라는 뜻이다. 또한 지탱이라고 하는 것은 이 명근(명근)247)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몸의 지탱을 위하고 부양을 위하고’라는 것은 이 신체적 명근을 활동시키기 위한 것이라고도 말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92. ‘상해를 방지하고’라고 했는데, 상해는 질병의 의미로 굶주림을 말한 것이다. 그것을 멈추기 위해서 탁발음식을 수용한다. 그것은 상처에 대한 도약과 같고, 더위와 추위에 대한 대책과 같다. ‘청정한 삶을 도와이루기 위해서’248)라는 것은 ‘일체의 가르침에 의한 청정한 삶과 길에 의한 청정한 삶을 도와이루기 위해서’249)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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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 jīvitindriya : Pps. Ⅱ. 350에 따르면, 살아 있는 몸의 물질적인 현상을 유지하고 활기를 불어넣는 생명력을 말한다.
248) brahmacariyānuggahāya : 해탈도론에서는 섭수범행(섭수범행)이라고 한다.
이것은 참으로 탁발음식의 수용의 조건이 되는 체력에 의지하여 세 가지 배움을 닦아서, 마치 사막을 건너고자 하는 자들이 아들의 고기250)를 사용하고, 강을 건너고자 하는 자들이 뗏목을 사용하고 바다를 건너고자 하는 자들이 배를 사용하듯, 존재의 사막을 건너기 위해서 실천하는 자라도 청정한 삶을 도와이루기 위해 수용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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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끊고 새로운 고통을 일으키지 않고’라는 것은251) 이러한 탁발음식의 수용을 통해서 [33] 예전의 굶주림의 고통을 물리치고, 아울러 새로운 고통도, 무절제한 식사 때문에 바라문들 가운데 어떤 자가 몸을 가누기 위해 손을 빌릴 정도이거나, 옷이 찢어질 정도이거나, 그 자리에서 넘어질 정도이거나, 입안의 음식을 까마귀가 쪼아 먹을 정도이거나, 먹은 것을 토할 정도로, 일으키지 않도록 병든 자가 약을 복용하듯, 수용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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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 sakalasāsanbrahmacariyassa ca maggabrahmacariyassa ca anuggahatthaṁ : 한역에서는, ‘전교범행(全敎梵行)과 도범행(道梵行)을 섭수(攝受)하기 위해서’라는 것인데, 전교범행은 도범행을 제외한 삼학(三學)에 포함되는 모든 가르침을 뜻한다.
250) puttamaṁsa : SN. Ⅱ. 97에서는 물질의 자양을 아들의 고기로서 비유했다. ‘수행승들이여, 물질의 자양이란 어떻게 여겨져야 되는가?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면, 두 사람의 부부가 적은 양식만을 가지고 황야의 길을 나섰는데, 그들에게는 사랑스럽고 귀한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수행승들이여, 그 두 사람의 부부가 황야를 지날 때 갖고 있던 적은 양식이 다 떨어져버렸는데도 그들은 아직 황야를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때 수행승들이여, 그 두 사람의 부부는 ‘우리들의 적은 양식이 다 떨어져버렸지만 아직 황야를 빠져나기지 못했다. 우리 모두가 죽지 않기 위해서는 귀한 아들을 죽여서 말린 고기나 꼬챙이에 꿴 고기를 만들어 아들의 고기를 먹으면서 황야를 빠져나가는 것이 어떨까?’라고 이와 같이 생각했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그 두 사람의 부부는 황야를 빠져나오기 위해 귀한 아들을 죽여서 말린 고기와 꼬챙이에 꿴 고기를 만들어 아들의 고기를 먹으면서 ‘외아들아, 어디에 있니? 외아들아, 어디에 있니?’라고 가슴을 후려쳤을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들은 놀이 삼아 자양을 먹을 수 있는가? 그들은 취해서 자양을 먹을 수 있는가? 그들은 진수성찬으로 자양을 먹을 수 있는가? 그들은 영양을 위해 자양을 먹을 수 있는가?” “세존이시여, 그럴 수 없습니다.”
251) purāṇañca vedanaṁ paṭihaṅkhāmi navañca vedanaṁ na uppādessāmīti : 『해탈도론』에서는 제선병불기신질(除先病不起新疾)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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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지금의 부적당하고 무절제한 식사에 의존하여 예전의 업을 조건으로 생겨났기 때문에 ‘예전의 고통’이라고 한다. 적당하고 절제 있는 식사로 그 조건을 없앰으로써 그 예전의 고통을 물리치겠다. 그리고 지금의 부적절한 식사의 행위가 집적되는 것에 의존하여 미래에 일어나는 까닭에 ‘새로운 고통’이라고 불리는데, 적절한 식사를 통해서 그 뿌리를 제거하여 새로운 고통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뜻이라고 이와 같이 여기서 보아야 한다. 이렇게 하여 적절한 식사를 도와 이루어서, 자기학대의 고행을 버리지만, 여법한 행복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94. ‘건강하고’라는 것은 절제 있는 식사를 수용하면 명근이 끊어지거나 위의 자세가 허물어질 위험이 없고, 필수자구에 의존하여 지내는 이 몸은 오랜 시간 지속하는 까닭에 ‘건강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만성병을 앓는 자가 그 필수자구를 수용하듯, 수용한다는 말이다. ‘허물없이 평안하게 지내리라.’라는 것은 부적당한 무절제한 식사를 수용하는 것을 삼감으로써 허물이 없어지고, 절제 있는 식사를 통해서 평안해진다는 말이다. 부적당한 무절제한 식사를 조건으로 불쾌 나태 하품 식자들의 비난 등의 허물이 없기 때문에 허물이 없어지고, 적당하고 절제 있는 식사를 조건으로 체력이 생겨남으로써 평안해지는 것이다. 혹은 원하는 만큼 배를 채우는 식사를 피하고, 바로 눕는 즐거움 옆으로 눕는 즐거움 수면의 즐거움을 버리기 때문에 허물이 없어지고, 네다섯 모금 덜 식사함으로써 네 가지 위의 자세를 조화롭게 취하기 때문에 ‘평안하게 지내리라.’라고 생각하면서 음식을 수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와 같이 설한 것이다.
“네다섯 모금 덜 먹고,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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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 cattaro panca alope abhutva : ThagA. Ⅲ. 99에 따르면, 네다섯 모금, 네다섯 주먹, 네다섯 조각을 덜 먹는다는 뜻이다. 맨손바닥에 음식을 퍼서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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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물을 마시면,
자신에 전념하는 수행승이
평안한 삶을 살기에 족하다.”253)
이렇게 해서 [34] 그 목적이 파악되었고 중도가 밝혀졌다고 알아야 한다,
95. ‘처소’라는 것은 침상과 좌구를 뜻한다. 정사에서든 편당254)에서든 눕는 곳은 침상이다. 어디서든 앉는 곳은 좌구이다. 그것을 하나로 하면, 처소하고 하는 것이다. ‘시절적 위험을 제거하거나 홀로 명상하기 위하여’라는 것은 시절도 위험하기 때문에 시절적 위험이라고 하는 것이다. 시절적 위험을 제거하고 홀로 명상에 들기 위해서인 것이다. 몸을 병들게 하고 마음을 산란하게 하는 부적당한 시절은 처소의 수용을 통해서 제거해야 한다. 그것을 제거하고 홀로 있는 것을 즐기기 위하여 말한 것이다. 그리고 물론 추위를 막기 위한 것 등으로 시절적 위험을 제거하는 것에 대해서는 의미 말한 것과 같다. 마치 옷을 수용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곳을 가리기 위한 불가피한 목적을 갖는 것이고, 다른 것은 한시적 목적으로 갖는 것이라고 말한 바와 같이, 여기서도 시절적 위험을 제거하는 것에 관하여 이와 같이 이러한 것을 말한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혹은 이미 설한 이러한 유형의 시절이 바로 그 시절이다. 그런데 위험에는 두 종류가 있다. 현현적 위험과 은폐적 위험은 탐욕과 성냄 등이다. 감관의 수호하지 못하거나 부적당한 물질등에 대한 관찰 등을 통해서 고통을 야기하지 않도록 처소에 대해서 이와 같이 알고 관찰하여 수용할 때 수행승은 이치에 맞게 성찰하여 처소를 시절적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 수용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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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 cattāro pañca āpope ǀ abhutvā udakaṁ pive ǀ alaṁ phāsuvihārāya ǀ pahitattassa bhikkhuno ǁ thag. 983; Mil. 407; Aṭs. 405. 싸리뿟다가 읊은 시이다.
254) aḍḍhayoga : 반쯤 지어진 집으로 한쪽 벽이 트인 집을 말하는데, 역자는 편당(片堂)이라고 번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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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의약자구’라는 것은 질별의 대치를 위한 것으로 치병을 위한 자구라는 뜻이다. 어떠한 것이든 적당한 의약을 지칭하는 것이다. 의사의 일이고 그에 의해서 허용된 것이므로 약이고, 환자의 자구가 약이므로 의약이다. 어떠한 것이든 환자에게 적당하고 의사에 의해서 허용된 기름꿀제호 등을 말한 것이다. ‘자구’라는 것은 ‘일곱 개의 성곽으로 잘 방비되었다.’라는255) 등에서 방비를 말하고 ‘계행은 수레의 장식이며, 선정은 차축이며,256) 정진은 바퀴이다.’라는257) 등에서 [35] 장식을 말한 것이다. ‘출가자가 출가생활에서 조달해야 할 자량’258) 등에서 자량을 뜻한다. 여기서 자구도 자량도 모두 적용된다. 환자를 치료하는 의약은 생활의 자구이고, 생활을 파괴하는 질병을 일으키는 것을 방지하고 보호하기 때문에 자량이다. 이와 같이 의약자구라는 것은 의약과 자구를 뜻한다. 그 의약자구는 어떠한 것이든 환자에게 적당하고 의사에 의해서 허용된 기름꿀제호 등으로 구성된 생활의 필수자구를 말한 것이다.
97. ‘이미 생겨난’이라는 것은 생겨난 것을 뜻하는데, 존재가 태어난 것이라는 뜻이다. ‘질병’이라는 것은 여기서 병든 상태이자 세계의 부조화인데, 그것으로 인한 나병, 종기, 종양 등이다. 병든 상태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질병이다. ‘고통’이라는 것은 괴로운 느낌으로 악하고 불건전한 것의 이숙으로서의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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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5) sattahai nagaraparikkhārehi suparikkhataṁ hotī’ti : AV, Ⅳ. 106
256) jhan`kkho : S rp. Ⅲ. 121에 따르면, 통찰을 수반하는 다섯 가지 선정의 고리를 통해서 선정으로 구성된 차축(vipassanāsampayuttānaṁ pañcannaṁ jhānaṅgānaṁ vasena jhāna-maya-akkho)을 말한다. Vism. 146 참조. 다섯 가지 선정의 고리로는 ① 사유(尋 : vitakka) ② 숙고(伺 : vicara) ③ 희열(喜 : piti) ④ 행복(樂 : sukha) ⑤ 심일경성(心一境性 : ekaggata)이 있다.
257) ratho sīlaparikkhāro ǀ jhanakkho cakkaviriyo ǁ SN. Ⅴ. 6
258) ye ca kho ime pabbajitena jīvitaparikkhārā samudānetabbā ‘ti : MN. I.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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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들 가운데 병든 상태의 느낌을 말한다. ‘최상의 안온을 얻기 위하여’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괴로움을 여의기 위해서’라는 뜻이다. 이와 같이 이것은, 요약하자면, 이치에 맞게 성찰하여 필수자구의 수용을 특징으로 하는 필수자구의지적 계행인 것을 알아야 한다. 언어적 의미로 여기서 옷 등은 그것을 조건으로 의지하여 사용하면서 뭇삶들이 살아가고 활동하는 까닭에 필수자구라고 부르는 것이며, 그러한 필수자구에 의지하는 것이 필수자구관계인 것이다.
[네 가지 청정계행의 성취방법]
98. [5] [네 가지 청정계행259]의 성취방법] [1. 계율수호적 계행의 성취] 이와 같이 이러한 네 종류의 계행 가운데 의무계율의 수호는 믿음으로 성취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학습계율을 시설하는 것은 제자의 범주를 넘어서는 것이고, 그것은 믿음으로 성취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학습계율의 시설에 대한 요청의 거부260)가 여기서 증거가 된다. 그러므로 시설한 대로 학습계율을 남김없이 믿음으로 받아들여, 목숨을 바쳐서라도 잘 성취해야 한다. 그래서 이와 같이 설한 것이다.
“청견조가 [36] 알을, 야쿠가 꼬리를
사랑하는 자식을, 하나뿐인 눈을 수호하듯,
그와 같이 계행을 수호하면서
항상 잘 예경받고 존중받는 자가 되라.”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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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9) Catupārisuddhi : 위에서 이미 언급한 네 가지 청정계(四淨戒 : catupārisuddhisīla) 즉, ① 계율수호적 계행(別解脫律儀戒 : pāṭimokkhasaṁvarasīla), ② 감관제어적 계행(根律儀戒 : indriyasaṁvarasīla), ③ 생활청정적 계행(活命編淨戒 : ājīvaparisuddhisīla), ④ 필수자구의지적 계행(資具依止戒 : paccayasannissitasīla)를 말한다.
260) sikkhāpadapaññattiyācanapaṭikkhepo : ‘싸리뿟따여, 여기 어떤 번뇌를 일으키는 조건들이 참모임 안에 나타날 때까지 스승은 제자들에게 학습계율을 시설하지 않고 의무계율을 부과하지 않는다. 싸리뿟따여, 여기 어떤 번뇌를 일으키는 조건들이 참모임 안에 나타날 때, 그때 스승은 번뇌를 일으키는 조건들을 몰아내기 위해 제자들어게 학습계율을 시설하고 의무계율을 부과한다.’(Vin. Ⅲ. 9-10)을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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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한 이와 같이 ‘빠하라다여, 이와 같이 내가 제자들을 위해 시설한 학습계율을 나의 제자들은 목숨을 바치더라도 침범하지 않는다.“”라고262) 설한 것이다.
99.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숲속에서 도적에 묶였던 장로의 이야기를 알 필요가 있다. 마하밧따니263) 숲속에서 장로를 도적들이 검은 넝쿨로 묶어 눕혀놓았다. 장로는 누운 채로 칠일 동안 통찰을 계발하여 돌아오지 않는 경지를 얻은 뒤에 거기서 죽어서 하느님의 세계에 태어났다. 땀바빤니디빠264) 섬에서는 또 다른 장로를 도적들이 악취가 나는 넝쿨로 묶어 눕혀놓았다. 그는 숲속에 불이 나자 넝쿨을 자르지 못했으나 통찰을 확립하여 동시적 해탈자265)로서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 디가니까야의 송출자266)인 장로 아바야267)가 오백 명의 수행승과 함께 와서 보고는 장로의 시신을 화장하고 탑묘를 만들게 했다. 그러므로 다른 믿음 있는 훌륭한 가문의 아들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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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 kikīva aṇḍaṁ camarīva vāladhiṁ ǀ piyaṁva putaṁ nayanaṁva ekakam tathevasīlaṁ anurakkhamānakā ǀ supesalā hotha sadā sagārava ‘ti : Smv. I. 58
262) evameva kho pahārāda yaṁ mayā sāvakānaṁ sikkhāpadaṁ paññattaṁ, taṁ mamasāvakā jivitahetupi nātikkamantī’ti : AN. Ⅳ. 201
263) Mahāvattani : 인도 본토의 Viñjhā의 삼림 또는 히말라야 주변의 숲을 말한다.
264) Tambapaṇṇidīpa : 한역은 동섭주(銅鍱洲)로 스리랑카[鍚蘭]의 옛 이름이다.
265) samasīsm : M rp. Ⅳ. 6-7에 따르면, ‘앞도 뒤도 아니고 동시에 얻는 자’라는 것은 두 결과를 동시에 얻는 자, 한역으로는 수등(首等), 수등자(首等者) 또는 재수자(齋首者), 채유정(齋有情)이라 번역하는 동시적 해탈자(rogasamasīsn), 느낌에 의한 동시적 해탈자(vedanasamasīsin), 자세에 의한 동시적 해탈자(iriyāpathasamasīsin)수명에 의한 동시적 해탈자(jivitasamasīsin)가 있다. 어떤 질병에 걸렸다가 질병이 치유와 더불어 번뇌의 소멸이 단번에 이루어지는 자를 느낌에 의한 동시적 해탈자라고 하고, 어떤 자세를 취하며 통찰하는 자가 자세의 종료와 더불어 번뇌의 소멸이 단번에 이루어지는 자를 자세에 의한 동시적 해탈자라고 하고, 그리고 앞도 뒤도 아니고 동시에 번뇌의 종식과 수명의 종식이 이루어지는 자를 수명에 의한 동시적 해탈자라고 한다. Nett. 247을 참조하라.
266) Dighabhanaka : 《디가니까야》를 모두 외우는 자로 그 주석서에도 통달한 자를 뜻한다.
267) Abhaya : 《디가니까야》의 송출자로서 스리랑카의 장로, 이곳이 그 출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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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계율을 정화하면서
목숨을 버릴지언정
세상의 수호자가 시설한
계행에 의한 제어를 파괴하지 말라.”268)
100. [2. 감관제어적 계행의 성취] 계율의 수호가 믿음으로 성취되듯, 감관의 제어는 새김으로 성취된다. 그것은 새김으로 실로 성취되는 것이며, 새김으로 감관이 확립되면, 탐욕 등이 침입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연소하고 작열하고 불꽃 튀는 뜨거운 쇠바늘로 시각기관을 차라리 지질지언정, 시각으로 인식되는 형상의 인상과 그 속성에 사로잡히지 말라.”라는269) 등의 방식으로 연소의 법문을 기억하여 형상 등의 대상에서 시각의 문 등의 활동을 통해 일어난 의식이, 탐욕 등으로 침해될 수 있는 인상 등을 취하는 것을, 새김을 잃지 않고 [37] 막아냄으로써, 감관의 제어를 잘 성취해야 한다.
101. 이와 같이 성취되지 않을 때는 계율수호적 계행도 나뭇가지 울타리를 치지 않은 곡물처럼, 지탱되지 못하고 오래 가지도 못한다.
문을 열어 놓은 마을이 적에게 해침을 받듯, 오염의 적에게 그는 해침을 받는다. 마치 지붕이 잘 이어지지 않은 집에 비가 새듯, 탐욕이 그의 마음에 스며든다. 그래서 이와 같이 설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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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8) pātimokkhaṁ visodhento ǀ appeva jīvitaṁ jahe ǀ paññattaṁ lokanāthena ǀ na bhinde sīlasamvaraṁ ǁ
269) varaṁ bhikkhave tattāya ayosalākāya ādittāya sampajjalitāya sajotibhūtāya cakkhundriyaṁ sampalimaṭṭhaṁ, na tveva cakkuviññeyyesu rūpesu anubyañjanaso nimittaggāho : Srp. Ⅲ. 4에 따르면, 인상은 ‘총체적으로 파악되는 것(saṁsandetvā gahaṇaṁ)’이고 속성은 ‘부분적으로 파악되는 것(vibhattigahaṇaṁ)’이다. 인상의 파악은 악어를 알아보는 것처럼 모든 것을 한꺼번에 보는 것이다. 그러나 속성의 파악은 손이나 발처럼 부분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통각(統覺 : javana) 가운데 일어난다. Ja. Ⅲ. 532는 수행승이 아름다움 때문에 정신 신체적 인상이나 속성에 매혹되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설하고 있다. 매혹되는 찰나에 타락해서 지옥에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옥에 떨어질지어정 차라리 감각적인 시각기관을 작열하고 불꽃이 튀는 뜨거운 쇠바늘로 지지는 것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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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상과 소리와 또한 맛에 대하여
향기와 감촉에 대하여 감관을 수호하라.
이 문들이 열려있어 수호되지 않으면
타인의 약탈자들이 마음을 침범하는 것과 같다.” 270)
“지붕이 잘못 이어진 집에
비가 스며들 듯,
닦여지지 않은 마음에271)
탐욕이 스며든다.”272)
102. 그러나 감관제어적 계행이 성취될 때, 계율수호적 계행도 나뭇가지 울타리에 잘 저장된 곡물처럼, 지탱되고 오래 간다. 또한 문을 잘 단속한 마을이 적에게 해침을 받지 않듯, 오염의 적에게 그는 해침을 받지 않는다. 마치 지붕이 잘 이어진 집에 비가 새지 않듯, 탐욕이 그의 마음에 스며들지 않는다. 그래서 이와 같이 설하기도 한다.
“형상과 소리와 또한 맛에 대하여
향기와 감촉에 대하여 감관을 수호하라.
이 문들이 닫혀있어 잘 수호되면,
타인의 약탈자들이 마을을 침범하지 못한다.”273)
“지붕이 잘 이어진 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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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0) rūpesu saddesu atho rasesu ǀ gandhesu phassesu ca rakkha indriyaṁ ǀ ete hi dvārāvivaṭā arakkhitā ǀ hananti gāmaṁva parassa hārino ǁ
271) abhāvitaṁ cittaṁ : DhpA. I. 122에 따르면, 멈춤(止 : samatha)과 통찰(觀 : vipassana)을 잘 닦지 않은 마음을 말한다. 잘못 지붕이 이어진 집 안에 비가 스며드는 것처럼, 탐욕(raga), 성냄(dosa), 어리석음(moha), 자만(māna) 등의 모든 번뇌는 닦이지 않은 마음에 스며든다.
272) yathāgāraṁ dugghannaṁ ǀ vuṭṭhi samativijihati ǀ evaṁ abhāvitaṁ cittaṁ ǀ rāgosamativillhati ǁ Dhp. 13; Thag. 133. 이 시의 인연담 즉, 부모님께서 싸밧티 시의 제따숲에 계실 때, 장로 난다와 관련된 이야기(Nandattheravatthu)에 대해서는 DhpA. I. 115-125를 참조하라.
273) rūpesu saddesu atho rasesu ǀ gandhesu phassesu phassesu ca rakkha indriyaṁ ǀ ete hi dvārā pihita susaṁvutā ǀ na hanti gāmaṁva parassa hārino ǁ
P 180
비가 스며들지 않듯이
잘 닦여진 마음에274)
탐욕이 스며들지 않는다.”275)
103. 그런데 이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가르침이다. 마음이라는 것은 신속하게 변화하는 것이다. 탐욕이 생겨나면 출가한지 오래지 않은 장로 방기싸276)처럼 [38] 부정(不淨)을 통한 정신활동으로 제거하고 감관제어를 성취해야 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출가한지 오래지 않아 장로 방기싸는 탁발을 하면서 한 여인을 보고 탐욕을 일으켰다. 그래서 장로 아난다에게 말했다.
[방기싸] “감각적 쾌락의 탐욕에 불타,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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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4) subhavitam cittam : DhpA. I. 122에 따르면, 멈춤(止 : samatha)과 통찰(觀 : vipassana)을 잘 닦여진 말한다. 지붕이 잘 이어진 집에 비가 스며들지 않는 것처럼 탐욕(raga), 성냄(dosa), 어리석음(moha), 자만(māna) 등의 모든 번뇌는 닦인 마음에는 스며들지 않는다.
275) yathāgaraṁ succhannaṁ ǀ vuṭṭhi na samativijjhati ǀ evaṁ subhāvitaṁ cittaṁ ǀ rāgo na samativijjhati ǁ Dhp. 14; thag. 134. 이 시의 인연담은 앞의 시와 동일하다.
276) Vaṅgīsa : 부처님의 제자 수행승 가운데 ‘변재가 있는 자 가운데 제일(paṭibhānavantānaṁ aggaṁ)’이다. Prj. Ⅱ. 344-347에 따르면, 방기싸는 바라문 가운데 태어났다. 그는 사라의 두개골 형상을 관찰하고 전생의 구 소유자의 윤회에 관해 알아맞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전 이도를 유행하며 많은 재물을 모았다. 부처님은 그에게 완전한 열반에 든 거룩한 분(阿羅漢)의 두개골을 보여 주고, 그의 윤회에 관해 알아낼 수 있는지를 실험했다. 방기싸는 물론 알아내지 못했다. 아라한은 윤회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방기싸는 부처님의 제자인 니그로다 깝빠(Nigrodhakappa)를 친교사로 하여 출가하여 피부-오개조(두발, 몸털, 손발톱, 이빨, 피부)에 대한 명상을 전수 받아 아라한의 경지에 오른다. 그리고 나서 부처님을 다시 방문하여 아름다운 비유와 은유로서 부처님을 찬양한다. 그래서 그는 시인(kāvyacitta, kāveyyamatta)으로서 이름을 떨친다. SN. I. 186에 방기싸가 욕정을 일어나는 것을 극복한 시들과 자신의 변재 때문에 마음이 교만해질까 스스로를 충고하는 시들이 나온다. thag. 1209-1279는 이 방기싸가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277) kāmarāgena ḍayhāmi : ThagA. Ⅲ. 192에 따르면, 이 시와 이하의 세 편의 시들(Thag. 1235-1237)은 이 시에서의 장로의 요청으로 존자 아난다가 대답한 것들이다. SN. I. 188에 따르면, 그 정황은 다음과 같다. : ‘한때 존자 아난다가 싸밧티 시의 제따바나 정사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있었다.
P 181
내 마음은 그 불에 삼켜졌으니,
오! 고따마의 제자여,278) 연민을 베풀어
탐욕을 끄는 법을 말해 주소서!”279)
[아난다] “지각의 전도280)를 통해서
그대의 마음이 불에 삼켜지니,
감각적 탐욕을 자극하는
아름다운 인상을281) 피하라.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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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존자 아난다가 아침 일찍 옷을 입고 발우와 가사를 수하고 탁발하기 위해 존자 방기싸를 수종사문(수종사문)으로 삼아 싸밧티 시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때 존자 방기싸에게 좋지 않은 생각이 일어나 욕정이 마음을 괴롭혔다. 그래서 존자 방기싸는 존자 아난다에게 시로 말했다.’ S rp. I. 271에 따르면, 그때가 존자 아난닥 왕궁으로 여인들의 초대를 받아 전법을 하러 갈 때였는데, 새로 참모임에 들어온 새내기 수행승 방기싸를 데리고 갔다. 방기싸는 치장한 아름다운 여인들을 보고는 욕정을 일으켰다.
278) Gotama : 여기서도 가우따마(sk. Gautama)란 뜻이다. 고따마의 제자인 아난다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난다를 성씨로써 부른다면, ‘고따마여’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279) kāmarāgena ḍayhāmi ǀ cittaṁ me pariḍayhati ǀ sādhu nibbāpanaṁ brūhi ǀ anukampāya gotamā ti ǁ SN. I. 188; thag. 1235
280) saññāvipariyesā : Kv. 306에서는 전도를 ‘지각에 의한 것(saññavipariyeso), 마음에 의한 것(cittavipariyeso), 견해에 의한 것(diṭṭhivipariyeso)’을 구분하고 있다. AN. Ⅱ. 52에서는 상락아정(常樂我淨)이 아닌 것을 상락아정으로 여기는 것을 전도라고 한다. MN. I. 507에 의하면, 불(火)에 닿으면 우리는 고통스럽지만, 감관의 조건이 달라진 문둥병 환자에게는 즐겁게 느껴진다. 그래서 문둥병 환자는 ‘즐겁다’라고 전도된 지각을 얻는다. (kuṭṭtthi aggismiṁ sukkhaṁ iti viparītasaññam paccalatha)’ 우리는 ‘괴롭고 무상하고 실체가 없는 것’을 ‘즐겁고 영원하고 실체가 있는 것’으로 여기는 지각의 전도를 일으키고 있다.
281) nimitta : 여기서 ‘즐겁고 영원하고 실체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인상은 선정의 준비단계에서 마음을 특정한 대상에 집중할 때의 그 대상이 되기도 한다. 시에서 아난다는 방기싸(Vaṅgīsa)에게 호감이 가지 않고 바라지 않는 대상을 선택하길 기대했다. 왜냐하면 호감이 가고 원하는 대상은 욕정을 불러일으켜서 그 욕정으로 인해 사유가 불붙기 때문이다. 마지막 목표는 네 번째 시에서처럼 인상을 여의는(animitta) 상태로 삼매에 들어가야 한다.
282) Snk. 721 saññāya vipariyesā ǀ cittaṁ te pariḍayhati ǀ nimittaṁ parivajjehi ǀ sudhaṁ ragūpāsaṁhitaṁ ǁ SN. I. 188; Thag. 1236
P 182
형성된 것들을 타자로 보고
괴로운 것으로 보고 자기롤 보지 말라,
커다란 감각적 탐욕의 불을 꺼서
결코 다시는 타오르지 않도록 하라.”283)
장로는 탐욕을 제거하고 탁발을 다녔다.
104. 또한 감관제어를 완성한 수행승은 꾸란다까284) 지방의 크나큰 동굴에 사는 장로 찟따굿따285)와 같고, 쪼라까마하비하라286) 정사에 사는 장로 마하 밋따287)와 같아야 한다.
105. 전하는 바에 의하면, 꾸란다까 지방의 크나큰 동굴에는 과거칠불의 출가에 대한 아름다운 벽화가 있었는데, 수많은 수행승들이 처소를 배회하면서 그 벽화를 보고 “존자여, 아름다운 벽화입니다.”라고 말했다. 장로는 “벗들이여, 나는 60년 이상 동굴에 살았지만, 벽화가 있다는 곳을 알지 못합니다. 오늘 지금 눈 있는 당신들 때문에 알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장로는 그곳에서 그만큼 오래 살았지만 눈을 위로 치켜뜨고 동굴을 쳐다본 적이 없었다. 동굴 앞에 크나큰 용수가 있었지만, 그것도 장로는 쳐다본 적이 없었다. 매년 지상에 꽃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그 나무가 개화한 것을 알았다.
106. 왕은 장로가 덕성을 구족한 것에 대해서 듣고 예경하기 위해 세 번 사신을 파견하였으나 장로는 가지 않았다. 그러자 왕은 그 마을의 288) 어린아이가 있는 여인들의 가슴을 묶고 봉인하였다. 그리고 “장로께서 오지 않으면, 어린아이들이 젓을 먹을 수 없습니다.”라고 전했다. 장로는 [39] 아이들을 애민히 여겨 마하가마 마을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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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3) Snk. 722 saṅkhāre parato passa ǀ dukkhato mā ca attato ǀ nibbāpeti mahārāgaṁ ǀ mā ḍayhittho pinappunaṁ ǁ SN. I. 188
284) kuraṇḍaka : 스리랑카의 동남부 지방이다. Vism. 38/1 : 105에 따르면, 이 지방의 동굴에는 과거칠불의 아름다운 벽화가 있었다.
285) Cittagutta : 꾸란다까 동굴에 살던 그는 과거칠불의 벽화가 있었음에도 그것을 본적이 없을 정도로 수행에 정진했다.
286) Corakamahāvihāta : 스리랑카의 사원으로 마하 밋따가 살던 곳이다. 이 사원 안에 꾸란다까 동굴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287) Mahā Mitta : 『청정도론』의 이곳에만 등장한다.
288) tasmiṁ gāme : 그 마을은 마하가마(Mahāgāma)라고 불렀는데, 스리랑카 동남부 로하나(Rohaṇa) 지방의 수도였다.
왕은 그 소식을 듣고 “자, 가서 장로를 모셔오라. 짐이 수계를 받겠다.”
라고 말하고 내궁으로 모신 뒤에 예경하고 공양을 대접한 뒤에 “존자여, 오늘은 시간이 없습니다. 내일 수계를 받겠습니다.”라고 알리고 장로의 발우를 받아서 조금 배웅하고 왕비와 함께 인사를 하고는 돌아갔다. 장로는 왕이 예경하든지 왕비가 예경하든지 “대왕이시여, 행복하소서.”라고 말했다. 이와 같이 칠일이 지나갔다.
P 183
107. 수행승들이 “존자여, 그대는 왕이 예경을 하든지 왕비가 예경하든지 ‘대왕이여, 행복하소서.’라고 말했습니까?”라고 묻자, 장로는 “벗들이여, 나는 왕이라고 왕비라고 차별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칠일이 지나자 “여기서 장로의 삶은 고통이구나.”라고 생각한 왕은 그를 돌려보냈다. 그는 꾸란다까 지방의 크나큰 동굴에 돌아와서 밤에 경행로에 올랐다. 용수에 살던 하늘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서 있었다. 그러자 그에게 명상주제가 지극히 정화되어 분명히 떠올랐다. 장로는 “오늘 나에게 명상주제289)가 얼마나 뚜렷한가!”라고 환희하며 밤의 중야에 이르자 온 산을 진동시키면서 거룩한 경지를 얻었다.
108. 그러므로 자신의 이익을 구하는 다른 훌륭한 가문의 아들도 이와 같이 해야 한다.
한적한 숲의 원숭이처럼,
숲속을 방황하는 사슴처럼,
두려워하는 어린아이처럼
불안한 눈으로 두리번거리지 말아야 한다.290)
두 눈을 아래로 뜨고
멍에의 길이만큼 앞으로 보라.
숲속에서 동탐하는
원숭이의 마음에 지배되지 말아야 한다.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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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9) kammaṭṭhāna : 한역에서는 업처(業處)라고 한다. 상세한 것은 이 책 제3장 이하를 참조하라.
290) makkaṭova araññamhi ǀ vane bhantamigo viya ǀ bālo viya ca utrasto ǀ na bhave lalalacano ǁ
291) adho khipeyya cakkhūni ǀ yugamattadaso siyā ǀ vanamakkaṭalolassa ǀ na cittassa vasaṁ vaje ǁ
P 184
109. 그리고 또한 마하밋따 장로의 어머니에게 악성종양이 생겨났다. 그녀의 딸도 수행녀들 가운데 출가했다. 그녀는 딸에게 “딸아, 오빠에게 가서 나의 병상을 알리고 약을 구해오라.”라고 말했다. 그녀는 가서 알렸다. 장로는 “나는 뿌리 약 등을 모아서 약을 제조할 줄 모른다. 그러나 네게 치료약을 말해 주겠다. ‘저는 출가한 이래로 탐욕을 수반하는 마음으로 감관을 부수고 이성의 형상292)을 바로본 적이 없습니다. 이러한 저의 진실한 말로 [40] 어머니께서 쾌차하길 바랍니다.’ 가서 이렇게 말씀드리고, 청신녀의 몸을 주물러 드려라.”라고 말했다. 그녀는 가서 그 취지를 알리고 그와 같이 조치했다. 그 찰나에 재가의 여신도의 종양은 물거품처럼 녹아서 사라졌다. 그녀는 일어나 “만약에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께서 아직 살아계신다면, 어찌 나의 아들과 같은 수행승의 머리를 그물무늬의 손으로293) 쓰다듬어 주지 않겠는가!”라고 환희의 말을 외쳤다.
110. 그래서 이와 같이 해야 한다.
이제 다른 훌륭한 가문의 아들도
가르침에 출가하여
밋따 장로가 그런 것처럼
탁월하게 감관을 제어해야 한다.294)
111. [3. 생활청정적 계행의 성취] 감관제어가 새김을 통해서 성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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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2) visabhāgarūpa : 장로가 남성이므로 이성(異性)의 형상은 여성의 형상을 뜻한다.
293) jālavicitrena hatthena : 망문(網紋)이 있는 손을 말한다. 부처님과 같은 위대한 사람이 지닌 서른두 가지 특징(三十二相) 가운데 하나이다.
294) kulaputtamāni aññopi ǀ pabbajitvāna sāsane ǀ mittattherova tiṭṭheyya ǀ vare indriy asaṁvare ǁ
P 185
될 수 있듯, 생활청정은 정진을 통해 성취될 수 있다. 그것은 실로 정진에 의한 성취인데, 바르게 열심히 정진하는 자가 잘못된 생활을 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적당한 삿된 추구를 버리고 정진으로 탁발행 등의 올바른 추구로써 그것을 성취할 수 있다. 청정을 일으키는 필수자구만을 구하고 불청정을 일으키는 것은 독사를 보듯 피해야 한다.
112. 그 가운데 두타행295)을 지키지 않는 자의 경우는 이와 같다.
참모임에서나 모임에서나296) 또는 그들의 설법 등의 덕성을 신뢰하는 재가자에게서나 얻은 필수자구는 실로 청정하게 얻은 것이고, 탁발행 등을 통해서 얻은 것은 아주 청정하게 얻은 것이다. 두타행을 지키는 자의 경우는 이와 같다. 탁발행 등으로부터나 두타행을 신뢰하는자에게서 두타행의 원칙에 맞게 얻은 것들은 청정하게 얻은 것이다. 혹은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썩힌 하리따끼297) 열매나 제호 꿀 기름 사탕의 네 가지 달콤한 약을 얻었을 때, “네 가지 달콤한 약은 다른 동류수행자들이 복용할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하라따끼의 열매 조각만을 복용한다면, 두타행을 지키는 자에게 어울리는 것이다. 그는 실로 최상의 고귀한 님의 계보에 드는 수행승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113. 그리고 옷 등의 필수자구가 있을 때 어떠한 수행승이라도 생활을 정화시킨다면, 옷이나 탁발음식에 대해서 신호 암시 넌지시 말하기를 통해서 알려서는 안 된다. 그러나 처소에 대해서는 신호 암시 넌지시 말하기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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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5) dhutaṅga : 한역의 두타지(頭陀支)를 말한다. 이 책 제2장을 참조하라.
296) saṁghato, gaṇato : 참모임 즉, 상가(saṁgha)는 4인 이상의 수행승을 말하고, 대중(gaṇa)은 2인이나 3인의 수행승을 말한다.
297) harītakī : 하리따까(harītaka = harīṭaka)라고도 하며 음사하여 하라륵(呵羅勒), 하리륵(呵利勒)이라고 하고, 가자(柯子), 오배자(五倍子)라고 한다. 이사아산 자두의 일종으로 미로발란(Myrobalan) 나무의 열매이다. 학명은 Teminalia citrina 이다.
P 186
114. 이 가운데 신호란 [41] 거처를 위해 토지의 준비 등을 할 때 “존자여,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라고 대답하거나 또는 이와 유사한 다른 신호를 주는 일이다. 암시라는 것은 “재가신도들이여, 그대들은 어디에 삽니까?”라고 묻고는 “존자여, 저택에 삽니다.”라고 대답하면, “재가신도들이여, 수행승들에게 저택은 불가합니다.”라고 말하거나 또는 이와 유사한 다른 표시를 주는 일이다. 넌지시 말하기란 “수행승들의 무리의 처소가 좁습니다.”라고 말하거나 또는 이와 유사하게 달리 넌지시 말하는 일이다.
115. 의약의 경우에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와 같이 의약을 얻었을 때 질병이 치유된 뒤에도 복용할 수 있는가 없는가? 여기에 대해서 율사(律師)들은 “세존께서 허락하신 것이므로 가능하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경사(經師)들은 “어떠한 죄악도 아니지만, 생활을 교란시킨다. 그러므로 불가하다.”라고 말한다.
116. 그러나 세존께서 허락했더라도 신호 암시 넌지시 말하기를 통해서 알리지 않고 욕망을 여읨 등의 덕성에만 의지하여, 목숨이 다하더라도 신호 암시 넌지시 말하기를 통해서 얻은 것은 제외하고, 그 밖에 얻은 필수자구만을 수용한다면, 그는 최상의 버리고 없애는 삶을 사는 자라고 할 수 있다.
117. 장로 싸리뿟따298)의 경우가 그 예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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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8) Sāriputta : AN. I. 23에 따르면, 부처님의 제자 수행승 가운데 ‘위대한 지혜를 지닌자 가운데 제일(mahāpaññānaṁ aggaṁ)’이다. Ppn. Ⅱ. 1108에 따르면, 고따마 붓다의 수제자로 지혜제일(Mahāpaññānaṁ aggaṁ)로 일컬어졌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우빠띳싸(Upatissa) 마을에서 태어났으므로 우빠띳싸라고도 불렸다. 그의 아버지는 바라문 방간따(vaṅgata)였고 어머니는 루빠싸리(Rūpasārī)였다. 싸리뿟따는 어머니 이름을 딴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는 날라까(Nālaka)였다. 그에게는 세명의 형제 쭌다(Cunda), 우빠쎄나(Upasena), 레바따(Revata)와 세명의 누이 짤라(Cālā), 우빠짤라(Rupacālā), 씨쑤빠짤라(Sisūpacālā)가 있었는데, 모두 출가하여 수행승이 되었다. 싸리뿟따는 수행승 앗싸지에게 인과법에 대한 두 줄의 시로 된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흐름에 든 님(須陀洹, 預流者 : Sotāpanna)’이 되었다. 그가 친구인 목갈라나에게 그 시를 들려주자 목라라나도 같은 경지에 오르게 되었다. 싸리뿟따는 목갈라나와 함께 벨루바나에 계신 부처님을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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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한때 멀리 여읨을 닦으면서 장로 마하 목갈라나299)와 함께 어떤 한적한 숲에서 지냈다. 그런데 어느 날 복통이 일어나 극심한 고통이 생겨났다. 장로 마하 목갈라나가 저녁 무렵 그 존자를 방문하러 가서 장로가 누워있는 것을 보고 상연을 물은 뒤에 “벗이여, 예전에 그대는 무엇으로 쾌차했습니까?”라고 물었다. 장로는 “벗이여, 내가 재가에 있을 때는 어머니께서 버터 꿀 사탕 등을 섞어서 순수한 우유죽을 만들어 주었는데, 그것으로 쾌차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존자는 “벗이여, 그런가. 만약에 나나 그대에게 공덕이 있다면, 적어도 내일까지 얻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118. 그런데 이러한 대화를 경행로의 모퉁이에 있던 나무 위에 살던 하늘 사람이 듣고, “내일 아침에 존자에게 죽이 생기게 하리라”라고 생각하고 장로의 단월300)의 집에 가서 [42] 맏아들의 몸속으로 들어가 고통을 일으켰다. 그리고 치료를 위해서 모여든 친지들에게 “만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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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전에 그들이 모시던 회의주의자인 스승 싼자야(Sañjaya)를 모시고 가려했으나 싼자야는 거절했다. 목갈라나는 불교교단에 출가한 지 칠일 만에 거룩한 님이 되었으나 싸리뿟따는 보름 후에 거룩한 님이 되었다. 부처님은 대중 앞에서 자주 주제만 제시하고 싸리뿟따가 대신 설법을 했다. 그래서 아난다가 ‘법의 창고(Dhammabhaṇḍāgārika)’라고 불린데 반해 그는 ‘법의 장군(Dhammasenāpati)’이라고 불렸다. 그는 아나타삔디까의 임종 때 설법을 하기도 했다.
299) Mahā Moggallāna : 부처님의 제자 수행승 가운데 ‘신통을 지닌 님 가운데 제일(iddhimantānaṁ aggaṁ)’이다. Ppn. Ⅱ. 541에 따르면, 그는 부처님의 주요 제자 가운데 싸리뿟따에 이어 두 번째 제자였다. 그는 싸리뿟따와 같은 날 라자가하 시 근처 꼴리따가마(Kolitagāma)에서 태어났다. 그들은 부처님보다 나이가 많았다. 목랄라나는 꼴리따(Kolita)라고 불렸다. 아버지는 마을의 장자였고, 어머니는 목갈리(Moggalī)였다. 목갈라나와 싸리뿟따의 집안은 7대에 걸쳐 친밀하게 교제해 오고 있는 친한 집안이었다. 싸리뿟다에게는 오백 대의 황금가마, 목갈라나에게는 오백 대의 마차가 있었다. 어느 날 두 친구는 광대놀이를 보러갔다가 무상함을 깨닫고 출가를 결심했다. 그들은 먼저 회의론자 싼자야(Sañjaya)의 제자가 되어 전 인도를 돌아다녔다. 그러다 어느 날 싸리뿟다가 라자가하 시에서 부처님의 제자 앗싸지(Assaji)를 만나 ‘모든 현상은 원인으로 말미암아 생겨난다.(ye dhammā hetuppabhavā)’는 말을 듣고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 싸리뿟따에게 동일한 말을 전해들은 목갈라나도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동료이자 싼자야의 제자 250명과 함께 벨루바나에서 부처님을 만나 모두 불교에 귀의했다.
300) upatthaka : 단월(檀越)은 항상 의복과 음식 등을 제공하는 신자를 말한다.
내일 장로에게 이와 같은 죽을 보시한다면, 내가 그에게서 떠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그대가 말하지 않아도, 저희들은 장로에게 상시로 탁발음식을 드립니다.”라고 말하고 그 다음 날 그와 같은 죽을 보시했다.
P 188
119. 아침에 장로 마하 목갈라나가 와서 “벗이여, 내가 탁발하러 갔다 올 테니 여기서 기다리라.”라고 말하고 마을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마중을 가서 장로의 발우를 받아 앞서 말한 것과 같은 종류의 죽을 채워서 드렸다. 장로가 떠나려 하자, 그들은 “존자여, 드십시오, 더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장로가 드시자 그들은 발우를 채워 드렸다. 장로는 가서 “벗이여 싸리뿟따여, 드십시오.”라고 내밀었다. 장로는 그것을 보고 “아주 맛있는 죽인데, 어떻게 얻었을까?”라고 생각하고 그것이 얻어진 동기를 보고 “벗이여 목갈라나여, 이 탁발음식은 먹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120. 존자 목갈라나도 “나와 같은 사람이 가져온 탁발음식을 먹지 않다니.”라고 마음도 일으키지 않고, 한 마디 말에 발우의 가장자리를 붙잡고 한쪽으로 엎어버렸다. 죽이 땅위에 쏟아지는 것과 동시에 장로의 질병이 사라졌는데, 그때부터 45년간 다시 생겨나지 않았다.
121. 그러자 그는 존자 마하 목갈라나에게 “벗이여, 언어적 암시 때문에 생겨난 죽(죽)은, 내장이 튀어나와 땅위에서 움직이더라도, 먹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라고301) 말했다. 그리고 이러한 감흥어린 시를 읊었다.
“언어적 암시의 영향으로
생겨난 달콤한 죽을
내가 만약에 먹었더라면,
나의 생활은 비난을 받았으리라.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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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 āvuso vacīviññattiṁ nissāya uppanna pāyāaso antesu nikkhamitvā bhūmiyaṁ carantesupi parigbhuñjituṁ ayuttarūpo’ti
302) vacīviññattivippharā ǀ uppannaṁ madhupāyasaṁ ǀ sace bhutto bhaveyyahaṁ ǀ sājīvo garahito mama ǁ
P 189
나의 생활은 비난을 받았으리라.302)
비록 나의 창자가
밖으로 나와 움직이더라도,
목숨을 버릴지언정
생활을 파괴하지 않으리.303)
나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삿되게 구하는 것을 나는 피한다.
깨달은 님께서 혐오하는
삿되게 구하는 것을 행하지 않으리.”304)
122. 여기서 찌라굼바305) [43] 사원에서 지내던, 망고를 먹었던 장로 암바바다까 마하 띳싸306)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관점에서 해야 한다.
믿음으로 출가한,
총명한 행자라면,
삿된 구함에 마음을 일으키지 말고
생활을 정화해야 한다.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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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3) yadipi me antaguṇaṁ ǀ nikkhamitvā bati care ǀ neva bhindreyyahaṁ ajivaṁ ǀ cajamanopi jivitaṁ ǁ Mil. 370
304) ārādhemi sakaṁ cittaṁ ǀ vivajjemi anesanaṁ nahaṁ buddhappaṭikuṭṭhaṁ ǀ kāhāmi ca anesanan ’ti
305) Ciragumba : Cīvaragumba, Cīragumba라고도 읽는다. 망고를 먹고 사는 장로 마하띠싸가 주석하던 사원이다.
306) Ambabhādaka Mahā Tissa : 『빠라맛타만주싸』에 의하면, 그는 기근이 들었을 때 여행을 했다. 음식을 먹지 못해 피곤하고 허약해졌다. 그는 열매로 뒤덮인 망고나무 아래에 누었다. 여기저기 많은 망고가 떨어졌다. 주인 없는 망고가 근처의 바닥에 떨어졌으나, 그것들을 집어서 줄 누군가가 없었기 때문에 먹지 못햇다. 그때 그보다 나이가 많은 한 재가신도가 그가 지친 것을 알고 그에게 망고즙을 마시도록 주었다. 그는 그를 등에 업고 집으로 데려갔다. 그때 그 장로는 그에게 설법(Vism. 46/1 : 133)을 했다. 그리고 그의 등위에 있을 대 앎과 봄을 통해서 길을 따라 거룩한 경지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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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4. 필수자구의지적 계행의 성취] 생활청정적 계행은 정진을 통해 성취해야 하듯, 필수자구적 계행은 지혜를 통해 성취해야한다. 그것은 참으로 지혜에 의한 성취이다. 지혜를 지닌 자가 필수자구에 대한 위험과 공덕을 볼 수 있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필수자구에 대한 탐욕을 버리고 여법하고 평등하게 얻어진 필수자구를 이미 설한 방식으로 지혜로써 성찰한 뒤에 수용하여 성취해야 한다.
124. 거기에는 필수자구를 획득할 때의 성찰과 수용할 때의 성찰의 두 종류가 있다. 획득할 때 세계를 통해서나 혐오를 통해서308) 관찰하고 주어진 의복 등을 그 다음에 수용하면 잘못이 없는 수용이다. 수용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125. 여기에 수용을 결정하는 이러한 판별론이 있다. 곧, 절도에 의한 수용, 차용에 의한 수용, 상속에 의한 수용, 주인에 의한 수용의 네 가지 수용이 있다. 그 가운데 계행을 지키지 않는 자가 참모임 가운데 버젓이 앉아서 수용하는 것을 절도에 희한 수용이라고 한다. 계행을 지키는 자가 성찰하지 않고 수용하는 것을 차용에 의한 수용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옷을 수용할 때마다 성찰해야한다. 음식덩어리는 한 모금 마다 성찰해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없으면, 식전 식후와 초야중야후야에 성찰해야 한다. 성찰하지 않고 날을 새면, 차용에 의한 수용이 되는 셈이다. 처소도 수용할 때마다 성찰해야 한다. 의약도 획득할 때와 수용할 때 새김을 조건으로 성찰해야 한다. 이와 같더라도 획득할 때 새김을 확립하고 수용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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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7) anesanāya cittampi ǀ ajanetvā vicakkhaṇo ǀ ājivaṁ parisodheyya ǀ saddhāpabbajito yatī’ti ǁ
308) dhātuvasena vā paṭikūlavasena vā : 세계에 대한 분석적 규명(世界差別想 : Vism. 347/11 : 27)이나 혐오적 지각(厭逆想 : Vism. 341/11 : 1)을 통해서 관찰한다는 뜻이다.
309) cattāro hi paribhogā theyyaparibhogo, inaparibhogo, dayajjaparibhogo, sāmiparibhogoti : 『해탈도론』에서는 도수용(盜受用), 부채수용(負債受用), 가수용(家受用), 주수용(主受用)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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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하지 않는다면, 그에게 잘못이 있다. 그러나 획득할 때 새김을 확립하지 않더라도 수용할 때 확립하면, 그에게 잘못이 없다.
126. 네 가지 청정이 있으니 곧, 1. 교계에 의한 청정, 2. 제어에 의한 청정, 3. 추구에 의한 청정, 4. 성찰에 의한 청정이다.310) (1) 그 가운데 교계에 의한 청정은 [44] 계율 수호적 계행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 교계를 통해서 청정해지기 때문에 교계에 의한 청정이라고 하는 것이다. (2) 제어에 의한 청정은 감관 제어적 계행을 지칭하는 것이다. “나는 다시는 이와 같이 하지 않겠다.”라고 마음의 결정에 의한 제어로만 청정해지는 까닭에 제어에 의한 청정이라고 하는 것이다. (3) 추구에 의한 청정은 생활 청정적 계행을 지칭하는 것이다. 삿된 추구를 버리고 여법하고 평등하게 필수자구를 얻은 자가 추구를 통해서 청정해지기 때문에 추구에 의한 청정이라고 하는 것이다. (4) 성찰에 의한 청정은 필수자구적의지적 계행이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성찰을 통해서 청정해지는 까닭에 성찰에 의한 청정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획득할 때 새김을 확립하지 않더라도 수용할 때 확립하면, 그에게 잘못이 없다”라고311) 하는 것이다.
127. (c ) 일곱 가지 학인들의 필수자구의 수용을 상속에 의한 수용이라고 한다. 그들은 세존의 아들이고, 그러므로 아버지가 수요한 필수자구의 상속자로서 필수자구를 수용한다. 그런데 그들은 세존의 필수자구를 수용하는 것인가? 혹은 재가자의 필수자구를 수용하는 것인가? 재가자가 보시했더라도 세존께서 허락한 것이므로 세존의 소유물이다. 그러므로 세존의 필수자구를 수용한다고 알아야 한다. 여기서 가르침의 상속에 대한 경312)이 그 증거가 된다. (d) 번뇌를 부순 자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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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 catubbidhā hi suddhi desanāsuddhi, saṁvarasuddhi, pariyeṭṭhisuddhi, paccavekkhaṇasuddhīti : 한역에서는 설시정(設示淨), 율의정(律儀淨), 편구정(遍求淨), 관찰정(觀察淨)이라고 한다.
311) paṭiggahaṇe pana satiṁ akatvā paribhoge karontassa anāpatti : Vism. 43/1 : 125
312) MN. I.12 :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나의 가르침의 상속자가 되어야 하며 재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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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을 주인에 의한 수용이라고 한다. 그들은 갈애의 노예상태를 뛰어 넘은 까닭에 주인으로서 수용하기 때문이다.
128. 이들 수용 가운데 주인에 의한 수용과 상속에 의한 수용이 모두에게313) 가능한 것이고, 차용에 의한 수용은 불가한 것이고, 절도에 의한 수용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계행을 지키는 자가 성찰한 것을 수용한다면, 그것은 차용에 의한 수용과는 반대가 되는 것이므로 차용에 의한 수용이 아니고 상속자에 의한 수용과는 반대가 되는 것이므로 차용에 의한 수용이 아니고 상속자에 의한 수용에 포함된다. 계행을 지키는 자도 이러한 배움을 갖추었기 때문에 학인이라고 불리기 때문이다.
129. 그런데 이들 수용 가운데 주인에 의한 수용이 최상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바라는 수행승은 앞서 말한 방식의 성찰로 성찰하여 수용함으로써 필수자구의지적 계행을 성취하여야 한다. 이와 같이 행하면 실로 해야 할 일을 행하는 것이다. 또한 이와 같이 설했다.
“지혜가 [45] 뛰어난 님의314) 제자는
바른 길로 잘 가신 님의 설법을 듣고,
탁발한 음식과 잠자리와 깔개
그리고 가사의 때를 씻을 물을315) 조심해서 사용하라.”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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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속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나는 연민의 마음에서 그대들에 대해 ‘어떻게 나의 제자들이 재물의 상속자가 아니라 가르침의 상속자가 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한다. 수행승들이여, 만약 그대들이 재물의 상속자가 되고 가르침의 상속자가 되지 않는다면, 그대들은 그것 때문에 ‘스승의 제자들은 재물의 상속자이지 가르침의 상속자가 아니다.’라고 평가할 것이고 나도 역시 그것 때문에 ‘스승의 제자들은 재물의 상속자이지 가름침의 상속자가 아니다.’라고 평가할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의 나의 가르침의 상속자가 되고 재물의 상속자가 되지 않는다면, 그대들은 그것 때문에 ‘스승의 제자들은 가르침의 상속자이지 재물의 상속자가 아니다.’라고 평가될 것이고, 나도 역시 그것 때문에 ‘스승의 제자들은 가르침의 상속자이지 재물의 상속자가 아니다.’라고 평가할 것이다. 그러므로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나의 가르침의 상속자가 되어야 하며, 재물의 상속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나는 연민의 마음에서 그대들에 대해 ‘어떻게 나의 제자들이 재물의 상속자가 아니라 가르침의 상속자가 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한다.”
313) sabbesaṁ : ‘범부나 성인 모두에게’라는 뜻이다.
314) varapañña : Prj. Ⅱ. 375에 따르면, 부처님을 말한다.
315) āpañ saṅghāṭirajūpavāhanaṁ : Prj. Ⅱ. 375에서는 윗옷의 때를 제거하기 위한 물이라고 정의하고 때를 제거하는 네 가지 조건에 관하여 나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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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승은 탁발한 음식과 잠자리와 깔개
그리고 가사를 세탁할 물,
이러한 것들로 인해, 더럽혀지는 일이 없다.
마치 연꽃잎에 구르는 물방울처럼.”3017)
“타인의 연민으로 바른 때 얻었으니,
단단하거나 부드러운 음식과 맛에 관해
항상 새김을 확립하여 적량을 알아야 한다.
상처에 도약을 바르는 것처럼.”318)
“사막에서 아들의 고기처럼,
차축에 기름츨 치듯,
연명을 위하여 미혹되지 않고
이처럼 음식을 섭취해야 한다.”319)
130. 이 필수자구의지적 계행의 성취와 관련하여 장로 마하 쌍가락키따320)의 조카인 사미 쌍가락키따321)의 이야기를 해야겠다. 그는 올바로 성찰하여 음식을 수용했다. 그는 이와 같이 말했다.
“잘 식은 죽을 먹는데,
나에게 친교사가 말했다.
‘사미여, 지각이 없이
혀를 태우지 말라..’라고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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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 piṇḍaṁ vihāraṁ sayanāsanañ ca ǀ āpañ ca saṅghātirajūpavāhanaṁ ǀ sutvāna dhammaṁ sugatena desitaṁ ǀ saṅkhāya seve varapaññasāvako ǁ Stn. 391.
317) tasmā hi piṇḍe sayanāsane ca ǀ āpe ca saṁghāṭirajūpavāhane ǀ etesu dhammesuanūpalitto ǀ bhikkhu yathā pakkhare vāribindū ǁ Stn. 392.
318) kālena laddhā parato anuggahā ǀ khajjesu bhojjesu ca ǀ sāyanesu ca ǀ mattaṁso jaññā satatām upaṭṭhito ǀ vaṇassa ālepanarūhane yathā ǁ
319) kantāre puttamaṁsaṁva ǀ akkhassabbhañjanaṁ yathā ǀ evaṁ āhāre āhāram ǀ yāpanatthamamucchito’ti ǁ 아들의 고기에 대해서는 Mil. 367; SN. Ⅱ. 98 참조하라.
320) Mahā Saṁgharakkhite : Vism. 47/1 : 135를 참조하라.
321) Saṁgharakkhita : 마하 쌍가락키따(Vism. 47/1 : 135)의 조카로 50세에 거룩한 경지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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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교사의 말을 듣고
그 때 외경323)을 얻었으니,
그 자리에 앉아서
거룩한 경지를 얻었다.324)
십오야의 밝은 달처럼
사유가 원만해진 나는
일체의 번뇌를 부수었으니,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325)
그러므로 [46] 다른 자도
괴로움의 멸진을 바란다면,
이치에 맞게 성찰하여
필수자구들을 수용해야 한다.”326)
이와 같이 계율수호적 계행 등의 사개조가 있다.
[한정청정적 등의 계행]
131. 18) [한정청정적 무한청정적 원망청정적 무착청정적 안식청정적 계행] 오분조의 첫 번째에서 미구족계자의 계행 등을 통해서 그 의미를 알아야 한다. 그것은 빠띠쌈비다막가 가운데 이와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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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2) upajjhāya maṁ bhuñjamānaṁ ǀ sāilkūraṁ sunibbutaṁ ǀ mā heva tvaṁ sāmaṇera ǀ jīvhaṁ jhāpesi asaññato ǁ
323) saṁvega : 세 가지 사실의 특징(三法印) 즉, 무상하고(無常), 괴롭고(苦), 실체가 없는(無我)에 대한 외경(畏敬)을 말한다.
324) upajjhāyassa vaco sutvā ǀ saṁvegamalabhiṁ tadā ǀ ekāsane nisīditvā ǀ arahattaṁ apāpuniṁ ǁ
325) sohaṁ paripuṇṇasaṅkappo ǀ cando pannaraso yathā ǀ sabbāsavaparikkhiṇo, natthidāni punabbhavo’ti ǁ
326) tasmā aññopi dukkhassa ǀ patthayanto parikkhayaṁ ǀ yoniso paccavekkhitvā ǀ paṭisevetha paccaye’ti 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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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정청정적 계행327)이란 어떠한 것인가? 미구족계자의 제한적 학습계율이 있는데, 그것이 한정청정적 계행이다. 무한청정적 계행328)이란 어떠한 것인가? 미구족계자의 무제한적 학습계율이 있는데, 그것이 무한청정적 계행이다. 원만청정적 계행329)이란 어떠한 것인가? 착하고 건전한 가르침에 적응하여 학인으로 끝나는 단계330)까지 원만하게 성취하여 선한 범부들이 신명을 고려하지 않고 목숨을 바칠 수 있는 학습계율이 있는데, 그것이 원만청정적 계행이다. 무착청정적 계행331)이란 어떠한 것인가? 일곱 학인들의 학습계율이 있는데, 그것이 무착청정적 계행이다. 안식청정적 계행332)이란 어떠한 것인가? 여개의 제자인 번뇌를 부순 님들, 홀로 깨달은 님들, 이렇게 오신 님들, 거룩한 님들,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들의 학습계율이 있는데, 그것이 안식청정적 계행이다.”라고333) 언급되어 있다.
132. 그 가운데 미구족계자의 계행은 숫자상에 제한이 있는 까닭에 한정청정적 계행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족계자의 계행은 이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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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7) pariyantapārisuddhisīla : 한역에서는 제한편정계(制限遍淨戒)라고 한다.
328) apariyantapārisuddhisīla : 한역에서는 무제한정계(無制限淨戒)라고 한다.
329) paripuṇṇapārisuddhisīla : 한역에서는 원만편정계(圓滿篇淨戒)라고 한다.
330) sekkhapariyante : 부처님의 혈통에 든 님(gotrabhu : 種姓者)의 단계로 ‘네 쌍으로 여덟이 되는 참사람[四雙八輩]이 되기 직전의 참사람의 반열에 입문한 자의 단계를 말하는데, 그는 선정이나 출세간적인 길에 들기 전의 감각적 쾌락의 욕망계의 마지막 의식단계를 지니고 있는데, 열반을 대상으로 하는 최초의 마음을 지닌 자로서 그 사람부터 부처님에 이르기까지도 참사람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331) aparāmaṭṭhapārisuddhisīla : 한역에서는 무집취편정계(無執取篇淨戒)라고 한다.
332) paṭippassaddhipārisuddhisīla : 한역에서는 안식편징계(安息篇淨戒)라고 한다.
333) katamaṁ pariyantapārisuddisīlaṁ. anupasampannānaṁ pariyantasikkhāpadānaṁ, idaṁ pariyantapārisuddhisīlaṁ. katamaṁapariyantapārisuddhisīlaṁ. upasampannānaṁ āpariyantasikkhāpadānaṁ, idam apariyantapārisuddhisīlaṁ. katamaṁ paripuṇṇapārisuddhisīlaṁ puthujjanakalyāṇakanaṁ kusaladhamme yuttānaṁ sekkhapariyante paripūr akārinam kāye ca jīvite ca anapekkhānaṁ pariccattajīvitānaṁ, idam paripuṇṇapārisuddhisīlaṁ. katamaṁ aparāmaṭṭhapārisuddhisīlaṁ. sattannaṁ sekkhānaṁ, idaṁ aparāmaṭṭhapātisuddhisīlaṁ. katamaṁ paṭippassaddhiparisuddhisīlaṁ, tathāgatasāvakānaṁ khīn āsavānaṁ passekabuddhānaṁ tathāgatānaṁ aratantānaṁ dammāsambuddhānaṁ idam paṭippassaddhipārisuddhisīlan’ti : Patis. I. 4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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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천 하고도 또한,
백팔십 꼬디와
오백만 하고도 또한,
삼만육천이 있다.334)
이들 제어의 계율들은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께서 설했고,
율장 가운데서는335) 생략을 통해
학습계율로 시설되었다.336)
이와 같이 계율은 숫자상에 제한이 있어도 그가 남김없이 수용하는 까닭에 그리고 [47] 이득 명성 친척 신체 생명으로 제한을 보이지 않는 까닭에, 무한청정적 계행이라고 할 수 있다.
133. 찌라굼바 지방에서 살았던 암바바다까 마하 띳싸337) 장로의 계행과 같다. 예를 들어, 그 존자는 이와 같았기 때문이다.
“건강한 사지를 위해 재물을 버려야 하고,
목숨을 수호한다면 사지를 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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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4) nava koṭisahassāni ǀ asītisatakoṭiyo ǀ paññāsasatasahassāni ǀ charrṁsā ca punāpare ǁ 여기서 구지(俱胝 : koṭi)는 일 꼬띠(koṭi)는 일천만 또는 억(億)의 단위로 번역하지만, 상세한 것은 Vism. 302/9 : 26의 아승지의 주석을 보라. ‘많다’는 의미에서 억(億)이라고 한 것이다. 『빠라맛타만주싸』뿐만 아니라 기타의 제 번역에서도 이 시의 숫자에 대해서는 별다른 주석이 없다. 역자의 생각으로는 구족계자의 계행은 『빅쿠비방가』와 『빅쿠니비방가』의 모든 학습계율의 실제적 적용에서의 생략된 법수적 변수를 합한 것인데, 그것은 실제 의무계율의 숫자보다 훨씬 많아 무한수에 가깝다. 다른 말로 하자면, 범계(犯戒)의 간계는 무한한 번뇌만큼이나 많으므로 그것들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무한수의 계율이 필요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335) vinayasaṁnare : 직역하면 율장(律藏)의 율의(律儀)라는 뜻인데, 『빠라맛타만주싸』에 의하면, 율장을 의미한다.
336) ete saṁvaravinayā ǀ sambuddhena pakāsitā ǀ peyyālamukhtna niddiṭṭhā ǀ sikkhā vinayasaṁvare’ti ǁ
337) Ambabhādaka Mahā Tissa : Vism. 43(1 : 122)의 주석을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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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지와 재물과 목숨 그 일체를
가르침을 새기는 사람은 응당 버려야 한다.”338)
이러한 참사람의 새김을 버리지 않고 목숨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학습계율을 어기지 않고 무한청정적 계행에 의지하여 재가신도의 등에 업혀 거룩한 경지를 얻었다. 그는 이와 같이 설했다.
“아버지도 아니고 어머니도 아니고
친지도 아니고 친척도 아니다.
계행을 지닌 자인 까닭에 그대를 위해
이와 같이 해야 할 일을 행하는 것이다.339)
외경을 일으켜서
이치에 맞게 사유하니
그대의 등에 업혀 있으면서
거룩한 경지를 얻었다.”340)
134. (c) 선한 범부들의 계행은 구족계자가 된 이래로 아주 청정한 순종의 수정처럼, 잘 단조된 황금처럼, 지극히 청정하기 때문에 마음이 일어나더라도 더러움을 여의어 거룩한 경지의 토대가 된다. 그러므로 원만청정적 계행이라고 불린다.
135. 그것은 장로 마하 쌍가락키따341)의 조카인 장로 쌍가락키따342)의 계행과 같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장로 마하 쌍가락키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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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8) dhanaṁ caje aṅgavarassa hetu ǀ aṅgaṁ caje jīvitaṁ rakkhamāno ǀ aṅgaṁ ghanaṁ jīvitañcāpi sabbaṁ ǀ caje naro dhammamanussaranto’ti ǁ
339) na pitā napi te mātā ǀ na ñāti napi bandhavo ǀ karote’tādisaṁ kiccaṁ ǀ sīlavantassakāraṇā ǁ
340) saṁvegaṁ janayitvāna ǀ sammasitvāna yoniso ǀ tassa piṭṭhigato santo ǀ arahattam apāpuni’ti ǁ
341) Mahā Saṁgharakkhita : 『청정도론』의 이곳에만 등장하는 인물로 여기에 그에 대한 이야기가 있듯이 법랍 육십세가 넘어서 임종의 찰나에 출세간의 원리를 깨우친 장로이다. Vism. 45/1 : 130에 등장하는 인물과는 동명이인이다.
342) Saṁgharakkhita : Vism. 45/1 : 130의 사미 쌍가락키따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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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랍 60세가 넘어서 임종의 침상에 눕자, 수행승들의 무리가 출세간의 원리를 증득했는지를 물었다. 장로는 “나에게 출세간의 원리는 없다.” 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를 시중들던 어린 수행승이 말했다. “존자여, 존자께서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고 사방 열두 요자나343)에서부터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존자께서 범부로 임종한다면, 많은 삶들이 실망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벗이여, 나는 미륵세존을 친견하겠다.’라고344) 통찰을 확립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48] 나를 일으켜 앉히고 기회를 달라.” 그는 장로를 일으켜 앉히고 밖으로 나갔다. 장로는 그가 나가는 거소가 동시에 거룩한 경지를 얻어 손가락을 튕겨 신호를 보냈다. 수행승들의 무리가 모여서 “존자여, 이처럼 임종의 찰나에 출세간의 원리를 얻었으니 어려운 일을 하셨습니다.”라고 말했다. “벗들이여, 이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내가 그대들에게 어려운 일을 알려주겠다. 벗들이여, 출가한 이래로 나는 새김을 잃고 알아채지 못하고 행한 나의 행위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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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3) yojana : 한역에서는 유순(由旬)이라고 한다. 길이의 단위로 학자마다 정확하지 않고, 학자마다 다르다. 약 3 내지 12마일 정도에 해당한다.
344) metteyyaṁ bhagavantaṁ passissāmī’ti : 미륵부처님의 출현에 대해서는 《디가니까야》의 「전륜왕 사자후의 경」에 나와 있다. : “수행승들이여, 인간의 수명이 팔만 살이 될 때, 마치 현세에서 세상에 거룩한 님, 올바로 깨달은 님, 명지와 덕행을 갖춘 님,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 세상을 아는 님, 위없이 높으신 님, 사람을 길들이는 님, 신들과 인간의 스승이신 님, 깨달은 님, 세상의 존귀한 님이 출현하듯, 미륵이라는 이름의 세존,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 명지와 덕행을 갖춘 님,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 세상을 아는 님, 위없이 높으신 님, 사람을 길들이는 님, 신들과 인간의 스승이신 님, 깨달은 님, 세상의 존귀한 님께서 세상에 출현한 것이다. 그는, 마치 내가 신들의 세계, 악마들의 세계, 하느님들의 세계,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의 세계에서 스스로 곧바로 알고 깨달아 설법하듯, 신들의 세계, 악마들의 세계, 하느님들의 세계,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그리고 왕등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의 세계에서 스스로 곧바로 알고 깨달아 설법할 것이다. 그는, 마치 내가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마지막도 훌륭한, 내용을 갖추고 형식이 완성된 가르침을 설하고, 지극히 원만하고 오로지 청정한 거룩한 삶을 실현하듯,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마지막도 훌륭한, 내용을 갖추고 형식이 완성된 가르침을 설하고, 지극히 원만하고 오로지 청정한 거룩한 삶을 실현할 것이다. 그는 마치 내가 현세에서 수 백의 수행승의 무리에 둘러싸이 듯, 수 만의 수행승의 무리에 둘러싸일 것이다.”(DN. Ⅲ.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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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그의 조카도 법랍 50세가 되자 이와 같이 거룩한 경지를 얻었다.
“만약 배움이 작고
계행도 잘 지키지 못하면
계행으로나 배움으로나
그 두 가지로 사람들은 그를 비난한다.345)
비록 배움이 적더라도
계행을 잘 지키면
배움이 결여되었더라도
사람들은 계행 때문에 그를 칭찬한다.346)
배움이 많더라도
계행을 잘 지키지 못하면
배움을 성취하였더라도
사람들은 계행 때문에 그를 비난한다.347)
배움이 많으면서도
계행을 잘 지키면
계행으로나 배움으로나
그 두 가지로 사람들은 그를 칭찬한다.348)
많이 배우고 가르침을 기억하고
지혜를 갖춘 잠부강의 금349)처럼 청정하고 빛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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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5) appassuto’pi ce hoti ǀ silesu asamahito ǀ ubhayena nam garahanti ǀ silato ca sutena ca ǁ AN. Ⅱ. 7
346) appassutopi ce hoti ǀ silesu susamahito ǀ silato nam pasamsanti ǀ nassa sampajjate sutam ǁ AN.Ⅱ. 7
347) bahussutopi ce hoti ǀ silesu asamahito ǀ silato nam garahanti ǀ tassa sampajjate sutam ǁ AN.Ⅱ. 7
348) bahussutppi ce hoti ǀ silesu susamahito ǀ ubhayena nam pasamsanti ǀ silato ca sutena ca ǁ AN.Ⅱ. 7
349) jambonada : 한역의 염부단금(閻浮檀金)이다. 잠부 강에서 생산되는 황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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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를 누가 비난할 수 있으랴.350)
신들도 그를 찬탄하고 하느님도 찬탄351)한다.”352)
137. (d) 그런데 삿된 견해를 통해서 취착되지 않은 학인의 계행, 혹은 탐욕을 통해서 취착되지 않는 범부의 계행이기 때문에 무착청정적 계행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장로 꾸뚬비아뿟따 띳싸353)의 계행과 같다. 그 존자는 그와 같은 계행에 의지하여 거룩한 경지를 얻기 위하여 원적에게 말했다.
“내 두 다리를 부러뜨리고,
나는 그대들에게 알린다.
‘내가 탐욕을 지닌 채 죽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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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0) nekkhaṁ jambonadasseva ko taṁ ninditumarahati : DhpA. Ⅲ. 329에 따르면, 허물없는 삶을 살고 총명하고 지혜와 계행을 잘 갖춘 자 즉, 금에 흠이 없어, 금세공사가 두드리고 닦으면 빛나는 황금주화와 같은 자를 누가 비난할 수 있으랴?
351) devā'pi naṁ pasaṁsanti brahmunā'pi pasaṁsito : DhpA. Ⅲ. 329에 따르면, 신들도 현자들도 그 수행승을 칭찬하고, 그뿐 아니라 백천 세계를 지배하는 하느님(梵天)들도 그를 칭찬한다.
352) bahussutaṁ dhammagharaṁ ǀ sappaññaṁ buddhasavakaṁ ǀ nekkhaṁ jambonarasseva ǀ ko taṁ ninditumarahati ǀ devapi naṁ pasamsanti ǀ brahmunapi pasamsito’ti ǁ AN.Ⅱ. 7; Dhp. 230
353) Kuṭumbiyaputta Tissa : JA. I. 316에 따르면, 그는 싸밧티 시에서 29명의 도반들과 함께 제따바나 승원으로 가서 부처님께 공양을 드리고 설법을 들은 후에 모두 수행승이 되었다. 그리고 5년간 스승 밑에서 공부한 뒤에 명상주제를 받고는 홀로 멀리 떠나 수행을 닦았다. 숲으로 가는 도중에 그는 수행에 대한 결심이 부족해서 되돌아 왔다. 다른 자들은 안거가 지나 거룩한 경지를 얻자, 자신들의 성취를 부처님에게 알렸고, 부처님께서는 그들을 칭찬했다. 그는 여기에 자극을 받아 수행을 결심하고 그들을 따라 숲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두타행을 시작하면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선 채로 잠을 잤는데, 밤중에 넘어져서 대퇴골을 부러뜨렸다. 이 사고로 다른 수행승들의 출발을 지연시켰다. 부처님은 이 이야기를 듣고 띳싸의 터무니 없는 열정을 꾸짖고 바라나 자따까(Varaṇa Jātaka : No. 71)를 설했다. 보살은 한때 딱까씰라(Takkasīla) 시에서 오백명의 바라문 학인의 스승이었다. 어느 날 보살은 학인들에게 땔감을 구하러 보냈는데, 그들 중 한 학인은 게을러서 잠을 자고 있었다. 도반들이 그를 깨우자 나무에 올라가 푸른 나뭇가지를 잘랐다. 그런데 한 큰 나뭇가지가 그의 눈을 때려서 부상을 입었다. 다음 날 학인들이 먼 마을에 초대를 받아 하녀가 출발 전에 아침 일찍 죽을 끓이려고 했으나 게으른 학인이 수집한 푸른 땔감 때문에 불이 붙지 않았다. 학인들은 제시간에 출발할 수 없어 여행을 포기해야 했다. 그는 이 가르침을 듣고 반성하여 마침내 거룩한 경지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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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혹스럽다 부끄럽도다.’라고354)
이와 같이 [49] 생각하고
이치에 맞게 사유하여
태양이 떠올라 비출 때,
나는 거룩한 경지를 얻었다.”355)
138. 어떤 대장로가 중병이 들어 손수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신의 대소변에 뒤섞여 뒹굴었다. 그것을 보고 한 젊은 수행승이 “아, 생명현상은 괴롭구나!”라고 말했다. 대장로가 그에게 “벗이여, 지금 죽으면 나는 천상세계에 태어날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조금의 의심도 없다. 그러나 이 계행을 파하고 얻은 복락이라는 것은 배움을 버리고 얻은 재가의 상태와 동일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계행과 더불어 죽을 것이다.”라고 알리고 그 자리에 누워서 자신의 질병을 성찰하여 거룩한 경지를 얻은 후에, 수행승들의 무리에서 이러한 시로써 가르침을 설했다.
“어떤 질병에 걸려서 그 병으로
심하게 괴로워하고 고통을 받아
나의 이 육신은 빠르게 초췌해진다.
마치 뜨거운 흙먼지속의 꽃처럼.356)
고귀하게 여기나 혐오적이고
청정하다고 여기나 부정한 것이라,
여러 사체로 가득 차 있지만,
눈먼 자에게는 고귀하게 보이다.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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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4) ubho pādāni bhinditvā ǀ saññapessāmi vo ahaṁ ǀ aṭṭiyāmi harāyāmi ǀ sarāgamaranaṁ ahan’ti ǁ Pps. I. 233
355) evāhaṁ cintayitvāna ǀ sammasitvāna yoniso ǀ sampatte aruṇggamhi ǀ arahattaṁ apāpuṇin’ti ǁ Pps. I. 233
356) phuṭṭhassa me aññatarena byādhinā ǀ rogena bāḷhaṁ dukhitassa ruppato ǀ parisussati khippamidaṁ kalevaraṁ.ǀ pupphaṁ yatha pamsini atape kataṁ ǁ JA. Ⅱ. 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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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구나. 이 병들어 부패한 몸
악취나고 부정하고 병들기 마련이나,
방일하고 혼미한 뭇삶들은
좋은 곳에 태어나는 길을 버린다.”358)
139. (e) 거룩한 님 등의 계행은 일체의 열뇌를 안식시키므로 청정한 까닭에 안식청정적 계행인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한정청정적 계행 등의 오개조가 있다.
[버림 등의 계행]
140. 19) [버림 삼감 의도 제어불범의 계행] 오분조의 두 번째 계행에서 살아 있는 것을 죽이는 것 등의 버림 등에서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빠띠쌈비다막가에 이와 같이 “다섯 가지 계행이 있는데,
1.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버림이 계행이고, 삼감이 계행이고, 그 의지가 계행이고, 그 제어가 계행이고, 그 불범이 계행이다.
2. 주지 않는 것을 빼앗는 것을 버림이 계행이고, 삼감이 계행이고, 그 의지가 계행이고, 그 제어가 계행이고, 그 불범이 계행이다.
3.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범하는 것을 버림이 계행이고, 삼감이 계행이고, 그 의지가 계행이고, 그 제어가 계행이고, 그 불범이 계행이다.
4. 거짓말을 하는 것을 버림이 계행이고, 삼감이 계행이고, 그 의지가 계행이고, 그 제어가 계행이고, 그 불범이 계행이다.
5. 이갈질하는 것을 버림이 계행이고, 삼감이 계행이고, 그 의지가 계행이고, 그 제어가 계행이고, 그 불범이 계행이다.
6. 욕지거리하는 것을 버림이 계행이고, 삼감이 계행이고, 그 의지가 계행이고, 그 제어가 계행이고, 그 불범이 계행이다.
7. 꾸며대는 말을 하는 것을 버림이 계행이고, 삼감이 계행이고, 그 의지가 계행이고, 그 제어가 계행이고, 그 불범이 계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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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7) ajaññaṁ jaññasaṅkhātaṁ ǀ asuciṁ sucisammataṁ ǀ nānākuṇapaparipūraṁ ǀ jaññarūpaṁ apassato ǁ JA. Ⅱ. 437
358) dhiratthu taṁ āturaṁ pūtikāyaṁ ǀ duggandhiyaṁ asuci byādhidhammaṁ ǀ yatthappamattā adhimucchitā pajā ǀ hāpenti maggaṁ sugatūpapattivā’ti ǁ JA. Ⅱ. 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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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버림이 [50] 계행이고, 삼감이 계행이고, 그 의지가 계행이고, 그 제어가 계행이고, 그 불범이 계행이다.
9. 분노를 버림이 계행이고, 삼감이 계행이고, 그 의지가 계행이고, 그 제어가 계행이고, 그 불범이 계행이다.
10. 잘못된 견해를 버림이 계행이고, 삼감이 계행이고, 그 의지가 계행이고, 그 제어가 계행이고, 그 불범이 계행이다.
11. 무탐으로 탐욕을 버림이 계행이고, 삼감이 계행이고, 그 의지가 계행이고, 그 제어가 계행이고, 그 불범이 계행이다.
12. 무진으로 분노를 버림이 계행이고, 삼감이 계행이고, 그 의지가 계행이고, 그 제어가 계행이고, 그 불범이 계행이다.
13. 빛의 지각으로 해태와 혼침을 버림이 계행이고, 삼감이 계행이고, 그 의지가 계행이고, 그 제어가 계행이고, 그 불범이 계행이다.
14. 산란의 여읨으로 흥분을 버림이 계행이고, 삼감이 계행이고, 그 의지가 계행이고, 그 제어가 계행이고, 그 불범이 계행이다.
15. 탐구로 의심을 버림이 계행이고, 삼감이 계행이고, 그 의지가 계행이고, 그 제어가 계행이고, 그 불범이 계행이다.
16. 지혜로 무명을 버림이 계행이고, 삼감이 계행이고, 그 의지가 계행이고, 그 제어가 계행이고, 그 불범이 계행이다.
17. 희열로 불쾌를 버림이 계행이고, 삼감이 계행이고, 그 의지가 계행이고, 그 제어가 계행이고, 그 불범이 계행이다.
18. 첫 번째 선정으로 장애를 버림이 계행이고, 삼감이 계행이고, 그 의지가 계행이고, 그 제어가 계행이고, 그 불범이 계행이다.
19. 두 번째 선정으로 사유와 숙고를 버림이 계행이고, 삼감이 계행이고, 그 의지가 계행이고, 그 제어가 계행이고, 그 불범이 계행이다.
20. 세 번째 선정으로 희열을 버림 버림이 계행이고, 삼감이 계행이고, 그 의지가 계행이고, 그 제어가 계행이고, 그 불범이 계행이다.
21. 네 번째 선정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을 버림이 계행이고, 삼감이 계행이고, 그 의지가 계행이고, 그 제어가 계행이고, 그 불범이 계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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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무한공간의 세계의 성취로 물질의 지각·저촉의 지각·다양성의 지각을 버림이 계행이고, 삼감이 계행이고, 그 의지가 계행이고, 그 제어가 계행이고, 그 불범이 계행이다.
23. 무한의식의 세계의 성취로 무한공간의 세계의 지각을 버림이 계행이고, 삼감이 계행이고, 그 의지가 계행이고, 그 제어가 계행이고, 그 불범이 계행이다.
24. 무소유의 세계의 성취로 무한의식의 세계의 지각을 버림이 계행이고, 삼감이 계행이고, 그 의지가 계행이고, 그 제어가 계행이고, 그 불범이 계행이다.
25. 지각이 있는 것도 지각이 없는 것도 아닌 세계의 성취로 무소유의 세계의 지각을 버림이 계행이고, 삼감이 계행이고, 그 의지가 계행이고, 그 제어가 계행이고, 그 불범이 계행이다.
26. 무상에 대한 관찰로 영원의 지각을 버림이 계행이고, 삼감이 계행이고, 그 의지가 계행이고, 그 제어가 계행이고, 그 불범이 계행이다.
27. 괴로움에 대한 관찰로 즐거움의 지각을 버림이 계행이고, 삼감이 계행이고, 그 의지가 계행이고, 그 제어가 계행이고, 그 불범이 계행이다.
28. 실체가 없는 것(無我)에 대한 관찰로 실체(自我)의 지각을 버림이 계행이고, 삼감이 계행이고, 그 의지가 계행이고, 그 제어가 계행이고, 그 불범이 계행이다.
29. 싫어하여 떠남에 대한 관찰로 환희의 버림이 계행이고, 삼감이 계행이고, 그 의지가 계행이고, 그 제어가 계행이고, 그 불범이 계행이다.
30. 사라짐에 대한 관찰로 탐욕의 버림이 계행이고, 삼감이 계행이고, 그 의지가 계행이고, 그 제어가 계행이고, 그 불범이 계행이다.
31. 소멸에 대한 관찰로 발생의 버림이 계행이고, 삼감이 계행이고, 그 의지가 계행이고, 그 제어가 계행이고, 그 불범이 계행이다.
32. 완전히 버림에 대한 관찰로 취득의 버림이 계행이고, 삼감이 계행이고, 그 의지가 계행이고, 그 제어가 계행이고, 그 불범이 계행이다.
33. 부서짐에 대한 관찰로 밀집에 대한 지각359)의 버림이 계행이고, 삼감이 계행이고, 그 의지가 계행이고, 그 제어가 계행이고, 그 불범이 계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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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괴멸에 대한 관찰로 도모360)의 버림이 계행이고, 삼감이 계행이고, 그 의지가 계행이고, 그 제어가 계행이고, 그 불범이 계행이다.
35. 변화에 대한 관찰로 항상의 지각의 버림이 계행이고, 삼감이 계행이고, 그 의지가 계행이고, 그 제어가 계행이고, 그 불범이 계행이다.
36. 인상의 여읨에 대한 관찰로 인상의 버림이 계행이고, 삼감이 계행이고, 그 의지가 계행이고, 그 제어가 계행이고, 그 불범이 계행이다.
37. 바램의 여읨에 대한 관찰로 바램의 버림이 계행이고, 삼감이 계행이고, 그 의지가 계행이고, 그 제어가 계행이고, 그 불범이 계행이다.
38. 있음의 여읨(空)에 대한 관찰로 집착의 경향의 버림이 계행이고, 삼감이 계행이고, 그 의지가 계행이고, 그 제어가 계행이고, 그 불범이 계행이다.
39. 보다 높은 지혜의 원리에 의한 통찰의 실체에 대한 고집의 버림이 계행이고, 삼감이 계행이고, 그 의지가 계행이고, 그 제어가 계행이고, 그 불범이 계행이다.
40. 있는 그대로의 앎과 봄으로 우치에 의한 집착의 경향의 버림이 계행이고, 삼감이 계행이고, 그 의지가 계행이고, 그 제어가 계행이고, 그 불범이 계행이다.
41. 위험에 대한 관찰로 애착의 경향의 버림이 계행이고, 삼감이 계행이고, 그 의지가 계행이고, 그 제어가 계행이고, 그 불범이 계행이다.
42. 성찰에 대한 관찰로 무성찰의 버림이 계행이고, 삼감이 계행이고, 그 의지가 계행이고, 그 제어가 계행이고, 그 불범이 계행이다.
43. 환멸에 대한 관찰로 결합의 경향의 버림이 계행이고, 삼감이 계행이고, 그 의지가 계행이고, 그 제어가 계행이고, 그 불범이 계행이다.
44. 흐름에 드는 길로 사견과 함께 작용하는 오염의 버림이 계행이고, 삼감이 계행이고, 그 의지가 계행이고, 그 제어가 계행이고, 그 불범이 계행이다.
45. 한번 돌아오는 길로 거친 오염의 버림이 계행이고, 삼감이 계행이고, 그 의지가 계행이고, 그 제어가 계행이고, 그 불범이 계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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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돌아오지 않는 길로 미세한 오염의 버림이 계행이고, 삼감이 계행이고, 그 의지가 계행이고, 그 제어가 계행이고, 그 불범이 계행이다.
47. 거룩한 길로 일체의 오염의 버림이 계행이고, 삼감이 계행이고, 그 의지가 계행이고, 그 제어가 계행이고, 그 불범이 계행이다. 이러한 계행들은 마음의 후회를 일으키지 않고, 희열로 이끌고, 기쁨으로 이끌고, 안온으로 이끌고, 만족으로 이끌로, 수습으로 이끌고, 닦음으로 이끌고, 익힘으로 이끌고, 장엄으로 이끌고, 자량으로 이끌고, 권속으로 이끌고, 원만으로 이끌고, 싫어하여 떠남으로 이끌고, 사라짐으로 이끌고, 소멸로 이끌고, 적정으로 이끌고, 곧바른 앎으로 이끌고, 완전한 깨달음으로 이끌고, 열반으로 이끈다.”361)라고 언급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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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1) pañca sīlāni pāṇātipātassa pahānaṁ sīlaṁ, veramaṇī sīlaṁ, cetanāsilaṁ, saṁvarosīlaṁ, avītikkamo sīlaṁ. … adinnādānassa … kāmesumicchācārassa … musāvādassa … pisuṇāya vācāya. pharusāya vācāya … samphappalāpassa … abhijjhāya … byāpādassa … micchādiṭṭhuyā … nekkhammena kāmacchandassa … abyapādena byāpādassa … ālokasaññāya thinamiddhassa … avikkhepena uddhaccassa … dhammavavatthānena vicikicchāya … ñāṇena avijjāya … pāmijjena aratiyā … paṭhamena jhānena nīvaraṇānam … dutryena jhānena vitakkavicāranaṁ. tatiyena jhānena pītiya … catutthena jhānena sukhadukkhanaṁ … ākāsānañcāyatanasamāpattiyā rūpasaññaya paṭighasaññāya nānattasaññāva … viññāṇañcāyatanasamāpattiyā ākāsanañcāyatanasaññāya … ākiñcaññāya tanasamapattiyā viññāṇañcāyatanasaññāya …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samāpattiyā ākincaññāyatanasaññāya … aniccānupassanāya niccasaññāya … dukkhānupassanāya sukhasaññāya … anattānupassanāya attasaññāya … nibbidānupassanāya nandiyā … virāgānūpassanāya rāgassa … nirodhānupassanāya samudayassa … paṭinissaggānupassanāya ādānassa … khayānupassanāya ghanasaññāya … vayānupassanāya āyūhanassa … vipariṇāmanupassanāya dhuvasaññāya … animittānupassanāya nimittassa … appaṇihitanupassanāya paṇidhiyā … suññatānupassanāya abhinivesassa … adhipaññadham mavipassanāya sarādānābhinivesassa. yathābhūtañāṇadassanena sammohābhinivesassa … ādīnavānupassanāya ālayābhinivesassa … patisankhānupassanāya appaṭisaṅkhāya … vivaṭṭanānupassanāya saññogābhinivesassa … sotāpattimaggena diṭṭhekaṭṭhānaṁ kilesānam … sakadāgāmimaggena oḷārikānaṁ kilesānam … anāgāmimaggena aṇusahagatānam kilesānam … anahattamaggena sabbakilesanaṁ pahānaṁ sīlaṁ, veramanī, cetanā, samvaro, avītikkamo sīlām. evarūpāni sīlāni cittassa avippaṭisārāya saṁvattanti, pāmojjāya saṁvattanti, pītiyā saṁvattanti, passaddhiyā saṁvattanti, somanassāyasaṁvattanti, āsevanāya saṁvattanti, bhāvanāva saṁvattanti, bahulīkammāya saṁvattanti, alaṅkārāya samvattanti, parikkhārāya saṁvattanti, pāripūriyā saṁvattanti, ekantanibbidāya virāgāya nirodhāya upasamāya abhiññāya sambodhāya nibbānāya saṁvattantī‘ti : Patis. I. 4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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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버림이라는 것은 이미 상술한 종류의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 등이 생겨나지 않도록 하는 것 이외에는 어떠한 것도 없다는 것을 지칭한다. 또한 각각의 버림은 각각의 착하고 건전한 원리를 확립시키는 의미에서 [51] 확지362)가 되고 동요 없는 작용을 통해서 정지363)가 된다. 그러므로 앞서 기술한 대로 확지와 정지라고 칭하는 계행의 의미를 통해서 계행이라고 하는 것이다. 다른 네 가지 원리들은, 각각 삼감을 통해서, 각각 제어를 통해서, 그 양자와 관계된 의지를 통해서, 각각을 범하지 않는 자의 불범을 통해서, 마음을 원인으로 생겨나는 현존364)과 관련하여 언급한 것이다. 그런데 그들 계행의 의미는 앞에서 설명한 것과 동일하다. 이와 같이 버림에 의한 계행등의 오개조가 있다.
142. 이상으로 ‘(Ⅰ) 계행이란 어떠한 것인가? (Ⅱ) 계행에는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 (Ⅲ) 계행의 특징·기능·현상·토대는 무엇인가? (Ⅳ) 계행에는 어떠한 공덕이 있는가? (Ⅴ) 계행에는 얼마나 많은 종류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끝났다.
[계행의 오염과 정화]
143. 이제 (Ⅵ) ‘무엇이 계행의 오염인가?’ (Ⅶ) ‘무엇이 계행의 정화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한다. 그것에 대해서 파손 등의 상태가 계행의 오염이고, 불파손 등의 상태가 계행의 청정이다. 그런데 그 파손 등의 상태에는 ① 이득·명성 등의 원인으로 하는 계행의 파괴와 ② 일곱가지 성적 교섭의 굴레365)가 포함된다. 곧, 1) 옷깃이 잘린 옷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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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2) upadhāraṇa : 한역에서 확지(確持)라고 한다.
363) samādana : 한역에서 정지(正持)라고 한다.
364) sabbhāva : sabbhāna는 어원적으로 ‘satbhāva(現在)’이며, 고유한 본성을 의미하는 ‘sabhava(自性)’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미즈노고겐(남청1권 92)은 ‘자성(自性)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365) sattavidhamethunasaṁyoga : 한역하면, 칠종음상응(七種婬相應)이다. AN. Ⅳ. 54-56에 나오며 다음 패러그래프 즉, Vism. 51/1 : 144이하에 상세히 그 내용이 인용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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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가지 죄악의 다발366)의 처음이나 끝에서 학습계율을 파괴하는 자의 계행은 ‘파손’367)이라고 불린다. 또한 중간이 찢어진 옷처럼, 일곱 가지 죄악의 다발의 중간에 있는 학습계율이 찢어진 자의 계행은 ‘균열’368)이라고 불린다. 그리고 흑색이나 적색 등의 어느 쪽의 몸색깔을 지닌 황소가 그 등이나 배에 다른 색이 생겨난 것처럼, 차례로 두 세 개의 학습계율을 부순 자의 계행은 ‘오점’369)이라고 불린다. 곳곳에 다른 색깔의 반점으로 얼룩진 황소처럼, 곳곳에서 학습계율을 부순 자의 계행은 ‘오점’369)이라고 불린다. 곳곳에 다른 색깔의 반점으로 얼룩진 황소처럼, 곳곳에서 학습계율을 부순 자의 계행은 ‘얼룩’370)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이득 등의 원인에 의한 계행의 파괴로 파손 등의 상태가 성립하는 것이다.
144. 2) 그리고 일곱 가지 성적 교섭의 굴레를 통한 것은 이와 같다. 세존께서 이처럼 설한 것과 같다.371)
(1) “바라문이여, 세상에 어떤 수행자나 성직자가 완전히 청정한 삶을 선언하였음에도 여인과 함께 서로 [52] 교합할 뿐만 아니라 여인의 맛사지·지압·세욕·안마를 즐기면, 그는 그것에 유혹되고 그것을 욕망하고 마침내 쾌락에 빠집니다. 바라문이여, 이것이야말로 청정한 삶이 파괴되고 균열되고 오점되고 얼룩지는 것입니다. 바라문이여, 이것을 성적 교섭의 굴레에 묶인, 청정하지 못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라 합니다. 그러한 삶을 통해서는 태어남·늙음·죽음·슬픔·비탄·고통·불만·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나는 말합니다.”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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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6) satta āpsttikkhandhā : 승단추방죄(pākājika), 승단잔류죄(saṅghādisesa), 속죄죄(pācittiya), 고백죄(pāṭidesaniya), 악작죄(dukkaṭa)를 다섯 가지 죄의 다발 곧, 오편죄(오편죄 : panca apattikkhandha)라 하며, 다른 분류로 미수죄인 추악죄를 추가하고, 악작죄의 일종인 악설죄를 추가하여 승단추방죄(pākājika), 승단잔류죄(saṅghādisesa), 속죄죄(pācittiya), 고백죄(pāṭidesaniya), 악작죄(dukkaṭa) 악설죄(dubbhāsita)를 일곱 가지 죄의 다발 곧 칠취죄(七聚罪 : satta āpattikkhandhā)라고 한다.
367) khanda : 한역에서는 훼괴(毁壞)라고 한다.
368) ckidda : 한역에서는 절단(切斷)이라고 한다.
369) sabala : 한역에서는 포점(褒點)이라고 한다.
370) kammasa : 한역에서는 잡색(雜色)이라고 한다.
371) vuttanhi bhagavata : AN. Ⅳ. 5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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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 (2) “바라문이여, 또한 세상에 어떤 수행자나 성직자가 완전히 청정한 삶을 선언하여 여인과 함께 서로 교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여인의 맛사지·지압·세욕·안마를 즐기지 않지만, 그러나 여인과 함께 농담하고, 희롱하고, 유희합니다. 그는 그것에 유혹되고 그것을 욕망하고 마침내 쾌락에 빠집니다. 바라문이여, 이것이야말로 청정한 삶이 파괴되고 균열되고 오점되고 얼룩지는 것입니다. 바라문이여, 이것을 성적 교섭의 굴레에 묶인, 청정하지 못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삶을 통해서는 태어남·늙음·죽음·슬픔·비탄·고통·불만·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나는 말합니다.”373)
146. (3) “바라문이여, 또한 세상에 어떤 수행자나 성직자가 완전히 청정한 삶을 선언하여 여인과 함께 서로 교합하지 않고, 여인의 맛사지·지압·세욕·안마를 즐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여인과 함께 농담하고, 희롱하고, 유희하지도 않더라도, 여인의 눈을 자신의 눈으로 관찰하고 응시합니다. 그는 그것에 유혹되고 그것을 욕망하고 마침내 쾌락에 빠집니다. 바라문이여, 이것이야말로 청정한 삶이 파손되고 균열되고 오점되고 얼룩지는 것입니다. 바라문이여, 이것을 성적 교섭의 굴레에 묶인, 청정하지 못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삶을 통해서는 태어남·늙음·죽음·슬픔·비탄·고통·불만·절망에서 벗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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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2) idha brāhmaṇa ekacco samaṇo vā brāhmaṇo vā sammā brahmacāri patijānamānona heva kho mātugāmena saddhiṁ dvayaṁ dvayasamāpattiṁ samāpajjati, apica kho mātugāmassa ucchādanaṁ parimaddanaṁ nhāpanaṁ sambāhanaṁ sādiyati, so tadassādeti, taṁ nikāmeti, tena ca vittiṁ āpajjati, idampi kho brāhmaṇa brahmacariyassa khaṇḍampi chiddampi sabalampi kammāsampi. ayaṁ vuccati brāhmaṇa aparisuddhaṁ brahmacariyaṁ carati saṁyutto methunena saṁyogena, na parimuccati jātivā. jarāya maraṇe na – pa – na parimuccati dukkhasmāti vadāmi : AN. Ⅵ. 54.
373) puna caparaṁ brahmaṇa idhekacco samaṇo vā – pa – paṭijānamāno na khomātugāmena saddhiṁ dvayaṁ dvayasamāpattiṁ samāpajjati. napi mātugāmassa ucchādanaṁ – pa – sādiyati. apica kho mātugāmena saddhiṁ saddhiṁ sañjagghati saṁkilāti samkelayati, so tadassādeti – pa – na parimuccati – pa – na parimuccati dukkhasmāti vadāmi : AN. Ⅵ. 55
P 210
지 못하고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나는 말합니다.”374)
147. (4) “바라문이여, 또한 세상에 어떤 수행자나 성직자가 완전히 청정한 삶을 선언하여 여인과 함께 서로 교합하지 않고, 여인의 맛사지·지압·세욕·안마를 즐기지 않고, 여인과 함께 농담하고, 희롱하고, 유희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여인의 눈을 자신의 눈으로 관찰하고 응시하지 않더라도, 담장 너머나 성벽 너머 들려오는, 웃거나 이야기하거나 노래하거나 우는 여인의 소리를 듣습니다. 그는 그것에 유혹되고 그것을 욕망하고 마침내 쾌락에 빠집니다. 바라문이여, 이것이야말로 청정한 삶이 파손되고 균열되고 오점되고 얼룩지는 것입니다. 바라문이여, 이것을 성적 교섭의 굴레에 묶인, 청정하지 못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삶을 통해서는 태어남·늙음·죽음·슬픔·비탄·고통·불만·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나는 말합니다.”375)
148. (5) “바라문이여, 또한 세상에 어떤 수행자나 성직자가 완전히 청정한 삶을 선언하여 여인과 함께 서로 교합하지 않고, 여인의 맛사지·지압·세욕·안마를 즐기지 않고, 여인과 함께 농담하고, 희롱하고, 유희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여인의 눈을 자신의 눈으로 관찰하고 응시하지 않더라도, 담장 너머나 성벽 너머 들려오는, 웃거나 이야기하거나 노래하거나 우는 여인의 소리를 듣지 않더라도, 예전에 여인과 함께 웃고, 이야기하고, 유희했던 기억을 떠올립니다. 그는 그것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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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4) puna caparaṁ brahmaṇa idhekacco samaṇo vā – pa – na heva kho mātugāmenasaddhiṁ dvayaṁ dvayasamāpattiṁ samāpajjati. napi mātugāmassa ucchādanaṁ – pa – sādiyati. napi mātugāmena saddhiṁ saddhiṁ sañjagghati saṁkiḷāti saṁkilāti saṁkelāyarti. apica kho mātugāmassa cakkhunā cakkhuṁ upanijjhāyati pekkhati, so tadassādeti – pa – na parimuccati dukkhasmāti vadāmi : AN. Ⅵ. 55
375) puna caparaṁ brahmaṇa idhekacco samaṇo vā – pa – na heva kho mātugāmenasaddhim. napi mātugāmassa. napi mātugāmena. napi matugamassa – pa – pekkhati. Apica kho mātugāmassa saddaṁ suṇāti tiokuṭṭa vā hasantiyā vā bhaṇantiyā vā gāyantiyā va rodantiyā vā, so tadassādeti – pa –dukkhasmāti vadami : AN. Ⅳ. 55
P 211
유혹되고 그것을 욕망하고 마침내 쾌락에 빠집니다. 바라문이여, 이것이야말로 청정한 삶이 파손되고 균열되고 오점되고 얼룩지는 것입니다. 바라문이여, 이것을 성적 교섭의 굴레에 묶인, 청정하지 못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삶을 통해서는 태어남·늙음·죽음·슬픔·비탄·고통·불만·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나는 말합니다.”376)
149. (6) “바라문이여, 또한 세상에 어떤 수행자나 성직자가 완전히 청정한 삶을 선언하여 여인과 함께 서로 교합하지 않고, 여인의 맛사지·지압·세욕·안마를 즐기지 않고, 여인과 함께 농담하고, 희롱하고, 유희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여인의 눈을 자신의 눈으로 관찰하고 응시하지 않더라도, 담장 너머나 성벽 너머 들려오는, 웃거나 이야기하거나 노래하거나 우는 여인의 소리를 듣지 않더라도, 예전에 여인과 함께 웃고, 이야기하고, 유희했던 기억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장자나 장가의 아들의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대상을 갖추고 구비하여 즐기는 것을 봅니다. 그는 그것에 유혹되고 그것을 욕망하고 마침내 쾌락에 빠집니다. 바라문이여, 이것이야말로 청정한 삶이 파손되고 균열되고 오점되고 얼룩지는 것입니다. 바라문이여, 이것을 성적 교섭의 굴레에 묶인, 청정하지 못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삶을 통해서는 태어남·늙음·죽음·슬픔·비탄·고통·불만·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나는 말합니다.”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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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6) puna caparaṁ brahmaṇa idhekacco samaṇo vā – pa – na heva kho mātugāmenasaddhim. napi mātugāmassa. napi mātugāmena. napi mātugāmassa – pa – rodantiyā vā, apica kho yānissa tāni pubbe mātugāmena saddhiṁ hasitalapitakīḷitāni, tāni anussarati, so tadassādeti – pa – dukkhasmāti vadāmi : AN. Ⅳ. 55
377) puna caparaṁ brahmaṇa idhekacco samaṇo vā – pa – na heva kho mātugāmena – pa – napi mātugāmassa – pa – napi yānissa tāni pubbe mātugāmena saddhiṁ hasitala pitakīḷitāni, tāni anussarati, apica kho passati gahapatiṁ vā gahapatiputtaṁ vā pañcahi kāmaguṇehi samappitaṁ samaṇgībhūtaṁ paricārayamānaṁ, so tadassādeti – padukkhasmāti vadāmi : AN. Ⅳ. 55
P 212
150. (7) “바라문이여, 또한 세상에 어떤 수행자나 성직자가 완전히 청정한 삶을 선언하여 여인과 함께 서로 교합하지 않고, 여인의 맛사지·지압·세욕·안마를 즐기지 않고, 여인과 함께 농담하고, 희롱하고, 유희하지도 않고, 여인의 눈을 자신의 눈으로 관찰하고 응시하지 않으며, 담장 너머나 성벽 너머 들려오는, 웃거나 이야기하거나 노래하거나 우는 여인의 소리를 듣지 않고, 예전에 여인과 함께 웃고, 이야기하고, 유희했던 기억을 [53] 떠올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장자나 장자의 아들이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대상을 갖추고 구비하여 즐기는 것을 보지 않더라도, 어떤 신들의 무리가 되는 것을 서원하여 ‘이러한 규범이나 금기나 고행이나 청정한 삶을 통해서 천신이나 천상계의 한 존재가 되겠다.’라고 청정한 삶을 산다면, 그는 그것에 유혹되고 그것을 욕망하고 마침내 쾌락에 빠집니다. 바라문이여, 이것이야말로 청정한 삶이 파손되고 균열되고 오점되고 얼룩지는 것입니다. 바라문이여, 이것을 성적 교섭의 굴레에 묶인, 청정하지 못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삶을 통해서는 태어남·늙음·죽음·슬픔·비탄·고통·불만·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나는 말합니다.”378)
151. 이와 같이 파손 등의 상태는 이득 등을 원인으로 하는 파괴와 일곱 가지 성적 교섭의 굴레에 포함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청정] 파손되지 않는 것 등의 상태는 일체 학습계율을 파괴하지 않는 것으로 파괴되어 참회되어야 할 것379)을 참회하는 것으로 일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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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8) puna caparaṁ brahmaṇa idhekacco samaṇo vā – pa – na heva kho mātugāmena – pa – napi passati gahapatiṁ vā paparicārayamānaṁ. apica kho aññataram devanikāyaṁ paṇidhāya brahmacariyaṁ carati ‘imināhaṁ sīlena vā vatena vā tapena vā brahmacariyena vā devo vā bhavissāmi devaññataro vā’ti. so tadassādeti, taṁ nikāmeti, tena ca vittiṁ āpajjati. idampi kho brāhmaṇa brahmacariyassa khaṇḍampichiddampi sabalampi kammāsampi. ayaṁ vuccati brāhmaṇa aparisuddhaṁ brahmacariyaṁ carati saṁyutto methnuena saṁyogena, na parimuccati jātiyā. jarāya maraṇena – pa – na parimuccati dukkhasmāti vadāmi’ti : AN. Ⅳ. 55-56
P 213
가지 성적 교섭의 굴레의 상태가 아닌 것으로 다시 또한 ‘분노. 원한, 위선, 열뇌, 질투, 간탐, 환술, 기만, 완고, 격정, 자만, 교만, 도취, 방일380) 등의 악하고 불건전한 원리를 일으키지 않는 것으로 욕망을 여의고 만족하고 버리고 없애는 삶을 사는 등의 덕성을 일으키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152. 곧, 이득 등을 위해서 파괴하지 않거나, 방일의 허물로 인해서 파괴되어도 참회하거나, 성적 교섭의 굴레나 분노, 원한 등의 악하고 불건전한 원리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그것들을 일체 파손되지 않고 균열되지 않고 오점이 없고 얼룩이 없는 것들이라고 한다. 이러한 계행들은 자유의 상태를 가져오기 때문에 ‘자유로워지는 것’이고 양식 있는 자들의 칭찬을 받기 때문에 ‘양식 있는 자들이 칭찬하는 것’이고, 갈애와 견해 등에 의해서 취착되지 않기 때문에 ‘집착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고. 근접삼매381)나 근본삼매382)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삼매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파손되지 않는 것’ 등이 ‘청정’인 것을 알 수 있다.
153. 그리고 이 청정은 다음의 두 가지 유형, 계행을 파괴하는 것에서 위험을 보고 계행을 성취하는 것에서 공덕을 보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 가운데, [54] “수행승들이여, 계행을 지키지 않고 계행을 어긴 자에게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위험이 있다.”라는383)등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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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9) bhinnānañca sappaṭikammānaṁ : 승단잔류죄 이하의 학습계율을 말한다.
380) kodho upanāho makkho paḷāso issā macchariyaṁ māyā sātheyyaṁ thambho sārambho māno atimāno mado pamādo’ti : 『해탈도론』에는 분(忿)·뇌(惱)·복(覆)·열(熱)·간(慳)·질(嫉)·환(幻)·첨(諂)·한(恨)·경(競)·만(慢)·증상만(增上慢)·오만(傲慢)·방일(放逸)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381) upacārasamādhi : 한역에서는 근행정(近行定) 또는 근분정(近分定)이라고 한다. 상세한 설명은 VIsm. 126/4 : 32를 보라.
382) appanāsamādhi : 한역에서는 근본정(根本定)이라고 한다. 상세한 설명은 Vism. 126/4 : 32를 보라.
383) pañcime bhikkhave ādinavā dussīlassa sīlavipattiyā’ti : AN. Ⅱ. 252 계행을 지키지 않는 자의 다섯 가지 위험은 아래와 같다. :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계행을 지키지 않고
경의 표현을 통해서 계행을 지키지 않는 것의 위험을 알아야 한다.
P 214
154. 또한 계행이 악한 사람은 계행이 악하기 때문에 신들과 인간이 기뻐하지 않고, 동료수행자에게 가르침을 받지 못하고, 계행이 나쁜자가 비난받을 때 괴로워하고, 계행을 지키는 자가 칭찬 받을 때 후회한다. 그가 견해에 따라 행하는 자들에게는 오랜 세월 괴로운 곳(苦處)의 고통을 겪기 때문에 고통에서 떠날 수 없다. 시물이 주어지더라도 받는, 그들에게 커다란 과보를 만들지 않기 때문에, 시물은 가치가 없다. 여러 해 쌓인 분뇨구덩이처럼 청정해지기 어렵다. 화장터의 타다 남은 장작처럼 출가한 재가의 양자에게 소외된다.384) 수행승이라고 선언하더라도 수행승이 아니니, 마치 소들을 뒤따르는 당나귀와 같다. 모두가 원적인 것처럼 항상 두려워한다. 죽은 시체처럼 함께 살 수가 없다. 배움 등의 덕성을 지녔더라도, 동료수행자들의 존경을 받을 수가 없으니, 바라문들이 대하는 화장장의 불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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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행을 어긴 자는 방일을 원인으로 크나큰 재산의 손실을 경험한다. 수행승들이여, 계행을 지키지 않고 계행을 어긴 자에게 이와 같은 첫 번째 위험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계행을 지키지 않고 계행을 어진 자는 악한 명성을 드날린다. 수행승들이여, 계행을 지키지 않고 계행을 어긴 자에게 이와 같은 두 번째 위험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계행을 지키지 않고 계행을 어긴 자는 누구든지 왕족의 무리이든 바라문의 무리이든 장자의 무리이든 수행자의 무리이든 대중들에게 당당하지 못하고 수치스럽게 대한다. 수행승들이여, 계행을 지키지 않고 계행을 어긴 자에게 이와 같은 세 번째 위험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계행을 지키지 않고 계행을 어긴 자는 미혹되게 죽는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계행을 지키지 않고 계행을 어긴 자에게 이와 같은 네 번째 위험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계행을 지키지 않고 계행을 어긴 자는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떨어진다. 수행승들이여, 계행을 지키지 않고 계행을 어긴 자에게 이와 같은 다섯 번째 위험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계행을 지키지 않고 계행을 어긴 자에게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위험이 있다.
384) chavālātamiva ubhato paribāhito : It. 89-90에 화장터에 타다 남은 장작더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비유가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출가한 훌륭한 아들이 탐욕스럽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자극되고, 마음에 분노가 넘치고, 정신적으로 사유가 타락하고, 새김이 마비되고, 올바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올바로 집중하지 못하고, 마음이 산란해지고, 감각능력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마치 쇠똥을 가운데 바르고, 양쪽 끝이 타다 남은 태워진 화장용 장작더미는 마을에서 목재로 사용할 수 없고 숲에서도 목재로 사용할 수 없는 것처럼,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사람은 재가자로서의 즐거움도 누리지 못하고, 수행자의 목적도 성취할 수 없다고 나는 말한다.”
수승한 것을 증득할 수 없으니, 장님이 형상을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P 215
정법에 희망이 없으니, 짠달라385)의 아들이 왕위에 오를 수 없는 것과 같다. ‘나는 행복하다.’고 생각하더라도 고통스러우니, 불더미의 비유의 대한 법문386)에서 설한 괴로움을 받는 자와 같다.
155. 곧,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대상을 수용하고 예배받고 공경 받는 것 등의 유혹에 사로잡힌 마음을 지닌 계행이 악한 자들은 그 조건을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심열이 생겨나고, 뜨거운 피를 토해낼 정도의 극심한 고통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 주면서 모든 측면에서 업보를 분명히 보고 계시는 세존께서 설한 거싱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저 크나큰 불더미가 연소하고 작열하고 불꽃 튀는 것을 보았는가?’ ‘세존이시여, 그렇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저 연소하고 작열하고 불꽃 튀는 크나큰 불더미를 포용하여 곁에 앉거나 곁에 눕는것과, 부드럽고 아름다운 수족을 지닌 왕족의 소녀나 바라문의 소녀나 장자의 소녀를 포용하여 곁에 앉거나 곁에 눕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더 나은가?’ ‘세존이시여, 당연히 부드럽고 아름다운 수족을 지닌 왕족의 소녀나 바라문의 소녀나 장자의 소녀를 포옹하여 곁에 앉거나 곁에 눕는 것이 더 낫습니다. [55] 저 연소하고 작열하고 불꽃 튀는 크나큰 불더미를 포옹하여 곁에 앉거나 곁에 눕는 것은 괴로운 것입니다.”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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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5) caṇḍāla : 한역에서는 전다라(전陀羅)로 불가촉천민을 말한다.
386) Aggikkhandhapariyāy : Aggikkhandhopamasutta : AN. Ⅳ. 127-130
387) passatha no tumhe bhikkhave amuṁ mahantaṁ aggikkhandhaṁ ādittaṁ sampajjailtaṁ sajotibhūtan’ti. evaṁ bhanteti. taṁ kiṁ maññatha bhikkhave, katamaṁ nu kho varaṁ yaṁ amuṁ mahantaṁ aggikkhandhaṁ ādittaṁ sampajjailtaṁ sajotibhutaṁ āliṅgetvā upanisīdeyya vā upanipajjeyya vā, yaṁ khattiyakaññaṁ vā brāhmaṇakaññaṁ vā gahapatikaññaṁ vā mudutalunahatthapādaṁ āilngetvā upanisīdeyya vā upanipajjey vā vāti. etadeva bhantc varaṁ yaṁ khattiyakaññaṁ vā – pa – upanipajjeyya vā. dukkhaṁ hetaṁ bhante yaṁ amuṁ mahantaṁ aggikkhandhaṁ – pa – upanipajjeyya vāti : AN. Ⅳ. 128
P 216
156. “‘수행승들이여, 나는 그대들에게 알린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그대들에게 선언한다. 계행을 지키지 않고, 악한 성품을 지녔고, 부정하고, 의심스러운 행동을 하고, 감추는 일을 하고, 수행자가 아니면서 수행자인 체하고, 청정한 삶을 살지 않으면서 청정한 삶을 사는 체하고, 안으로 부패하고 오염되고 혼탁한 자에게는, 부드럽고 아름다운 수족을 지닌 왕족의 소녀나 바라문의 소녀나 장자의 소녀를 포용하여 곁에 앉거나 곁에 눕는 것보다, 저 연소하고 작열하고 불꽃 튀는 크나 큰 불더미를 포옹하여 곁에 앉거나 곁에 눕는 것이 더 낫다. 저 연소하고 작열하고 불꽃 튀는 크나큰 불더미를 포용하여 곁에 앉거나 곁에 눕는 것은 괴로운 것이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그로 인해서 그가 죽음에 이르거나 죽을 정도의 고통을 맛보지만, 그러나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계행을 지키지 않고, 악한 성품을 지녔고, 부정하고, 의심스러운 행동을 하고, 감추는 일을 하고, 수행자가 아니면서 수행자인 체하고, 청정한 삶을 살지 않으면서 청정한 삶을 사는 체하고, 안으로 부패하고 오염되고 혼탁한 자가 부드럽고 아름다운 수족을 지닌 왕족의 소녀와 바라문의 소녀나 장자의 소녀를 포옹하여 곁에 앉거나 곁에 눕는다면, 그것은 그에게 오랜 세월 불익과 고통을 초래하고, 그는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난다.’”388)
157. 이와 같이 불더미의 비유로써 여자와 관계된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수용에 따른 괴로움을 보여주고 이와 같은 방편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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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8) ārocayāmi vo bhikkhave, paṭivedayāmi vo bhikkhave, yathā etadeva tassa varaṁ dussīlassa pāpadhammassa asicisankassarasamācārassa paṭicchannakammantassa assamaṇassa samaṇapatiññassa abrahmacārissa brahmacāripaṭiññassa antopūtikassa avassutassa kasabujātassa yaṁ amuṁ mahantaṁ aggpkkhandhaṁ – pa – upanipajjeyya vā, taṁ kissa hetu, tatonidānaṁ hi so dhikkhave maraṇaṁ vā nigaccheyya maraṇamattaṁ vā dukkhaṁ, na tveva tappaccayā kāyassa bhedā paraṁ maraṇā apāyaṁ duggatiṁ vinipātaṁ nirayaṁ upapajjeyyāti : AN. Ⅳ. 129
P 217
설한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힘센 사람이 강한 노끈을 두 다리에 걸고 이리저리 마찰하여, 그 노끈이 외피를 자르며, 외피를 자르고 내피를 자르며, 내피를 자르고 살을 자르며, 살을 자르고 힘줄을 자르며, 힘줄을 자르고 뼈를 자르며, 뼈를 자르고 골수에 도달하여 멈추는 것과, 부유한 왕족들이나 부유한 바라문들이나 부유한 장자들의 안사를 즐겨 받는 것 가운데 어떠한 것이 더 나은가?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힘센 사람이 날카롭고 기름칠해진 창으로 가슴을 찌르는 것과, 부유한 왕족들이나 부유한 바라문들이나 부유한 장자들의 합장을 즐겨 받는 것 가운데 어떠한 것이 더 나은가?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힘센 사람이 달구어지고 연소하고 작열하고 불꽃 튀는 철판으로 몸을 둘러싸는 것과, 부유한 왕족들이나 부유한 바라문들이나 부유한 장자들의 믿음으로 보시한 옷을 즐겨 받는 것 가운데 어떠한 것이 더 나은가?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힘센 [56] 사람이 달구어지고 연소하고 작열하고 불꽃 튀는 쇠못으로 입을 열게 하고 달구이지고 연소하고 작열하고 불꽃 튀는 쇠구슬을 입에 던져서 그것이 입술도 태구고, 입도 태우고, 혀도 태우고, 목구멍도 태우고, 위도 태우고, 장과 장간막을 지나서 몸 아래로 빠져나오는 것과, 부유한 왕족들이나 부유한 바라문들이나 부유한 장자들의 믿음으로 보시한 탁발음식을 즐겨 받는 것 가운데 어떠한 것이 더 나은가?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힘센 사람이 머리를 붙잡거나 어깨를 붙잡아 달구어지고 연소하고 작열하고 불꽃 튀는 쇠침상이나 쇠의자에 앉히거나 눕히는 것과, 부유한 왕족들이나, 부유한 바라문들이나, 부유한 장자들의 믿음으로 보시한 침대와 의자를 즐겨 받는 것 가운데 어떠한 것이 더 나은가?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힘센 사람이 발로 위로 머리를 아래로 붙잡아 달구어지고 연소하고 작열하고 불꽃 튀는 쇠솥에 던지면, 그때 몸이 부풀어 오르고 삶아져서 한번은 오르고 한번은 내려가고 한번은 옆으로 움직이는 것과,
P 218
부유한 왕족들이나 부유한 바라문들이나 부유한 장자들의 믿음으로 보시한 처소를 즐겨 받는 것 가운데 어떠한 것이 더 나은 것인가?”389) 이들 강한 노끈, 날카로운 창, 철판, 쇠구슬, 쇠침상, 쇠의자, 쇠솥의 비유로 예경받는 것, 합장을 받는 것, 옷·음식·침상·의자·승원의 수용 때문에 생겨나는 괴로움을 보이신 것이다.
158.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불더미에 싸인 괴로움 보다도
더욱 극심한 괴로움의 과보가 있으니,
감각적 쾌락의 즐거움을 버리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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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9) taṁ kiṁ maññatha bhikkhave, katamaṁ nu varaṁ yaṁ balavā puriso daḷhāya vāḷarajjuyā ubho jaṅghā veṭhetvā ghaṁseyya, sā chaviṁ chindeyya, chaviṁ chetvā cammaṁ chindeyya, cammaṁ chetvā maṁsaṁ chindeyya, maṁsaṁ chetvā nhāruṁ chindeyya, nhāruṁ chetvā aṭṭhiṁ chindeyya, aṭṭhiṁ chetvā aṭṭhimiñjaṁ āhacca tiṭṭhey ya, yaṁ vā khattiyamahāsālānaṁ vā brāhmaṇamahāsālānaṁ vā gahapatimahāsālānaṁ yā abhivādanaṁ sādiyeyyā’ti ca. taṁ kiṁ maññatha bhikkhave, katamaṁ nu kho varaṁ yaṁ balavā puriso tiṇhāya sattiyā teladhotāya paccorasmiṁ pahareyya, yaṁ vā khattiyamahāsālānaṁ vā brāhmaṇamahāsālānaṁ vā gahapatimahāsālānaṁ vā añjalikammaṁ sādiyeyyā’ti ca. taṁ kiṁ maññatha bhikkhave, katamaṁ nu kho varaṁ yaṁ balavā piriso tattena ayopaṭṭena ādittena sampajjalitena sajotibhūtena kāyaṁ sampaliveṭheyya, yaṁ vā khattiyamahāsālānaṁ vā brāhmaṇahāsālānaṁ vā gahapatimahāsālānaṁ vā saddhādeyyaṁ cīvaraṁ paribhuñjeyyā’ti ca. taṁ maññatha bhikkhave, katamaṁ nu kho varaṁ yaṁ balavā puriso tattena ayosaṅkunā ādittena sampajjalitena sajotibhūtena mukhaṁ vikhaṁ vivaritvā tattaṁ lohaguḷaṁ ādittaṁ sampajjalitaṁ sajotibhūtaṁ mukhe pakkhipeyya, taṁ tassa oṭṭhampi ḍaheyya, mukhampi. jivkampi. kaṇṭhampi. udarampi ḍaheyya, antampi antagunampi ādāya adhobhāgami nikkhameyya, yaṁ vā khattiva. brāhmana. gahapatimahāsālānaṁ vā saddhādeyyaṁ piṇḍapātaṁ paribhuñjeyyā’ti ca. taṁ kiṁ maññatha bhikkhave, katamaṁ nu kho varaṁ yaṁ balavā puriso sīse vā gahetvā khandhe vā gahetvā tattaṁ ayomañcaṁ vā ayopīthaṁ vā ādittaṁ sampajjalitaṁ sajotibhūtaṁ abhinisīdāpeyya vā abhinipajjāpeyya vā, yaṁ vā khattiya. brāhmaṇa. gahapatimahāsālānaṁ vā saddhādeyyaṁ mañcapiṭhaṁ paribhiñjeyyā’ti ca. taṁ kiṁ maññatha bhikkhave, katamaṁ nu kho varaṁ yaṁ balavā puriso uddhaṁpāsaṁ adhosiraṁ gahetvā tattāya ayokumbhiyā pakkhipeyya ādittāya sampajjalitāya sajotibhūtāya, so tattha pheṇuddehakaṁ paccamāno sakimpi uddhaṁ gaccheyya, sakimpi adho gaccheyya, sakimpi tiriyaṁ gaccheyya, yaṁ vā khattiya. brāhmaṇa. gahapatimahāsālānaṁ vā saddhādeyyaṁ vihāraṁ paribhuñjeyyā’ti cāti : AN. Ⅳ. 131-134
P 219
파계자에게 어디에 즐거움이 있으랴!390)
예경받는 것을 즐길 때
강한 노끈으로 마찰하는 고통보다,
더욱 더 고통을 받는
파계자에게 어찌 즐거움이 있으랴?391)
신도들의 [57] 합장을 즐길 때
그것으로 인해 창으로 찌르는 고통보다,
더욱 더 고통스러운
파계자에게 어찌 즐거움이 있으랴!392)
지옥에서 불타는 쇠구슬을
오래 경험해야만 하는,
제어되지 않은 자가
어찌 옷의 수용을 즐길 수 있으랴!393)
계행이 없는 자에게는
맛있는 음식도 하랄라 맹독394)과 같다.
그 때문에 오랜 세월
불타는 뜨거운 철환을 삼켜야 한다.395)
파계자에게 침상과 의자의 수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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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0) aggikkhandhāliṅgandukkhā- ǀ dhikadukkhakaṭukaphalaṁ ǀ avijahato kāmasukkhaṁ ǀ sukhaṁ kuto bhinnasīlassa. ǁ
391) abhivādanasādiyane ǀ kiṁ nāma sukhaṁ vipannasīlassa. ǀ daḷhavāḷarajjughaṁsana ǀ dukkhādhikadukkhabhāgissa ǁ
392) saddhānamañjalikamma- ǀ sādiyane kiṁ sukhaṁ asīlassa ǀ sattippahāradukkhādhi ǀ mattadukkhassa yaṁtetu ǁ
393) cīvaraparibhogasukhaṁ ǀ kiṁ nāma asaṁyatassa ǀ yena ciraṁ anubhavitabbo ǀ niraye jalita-ayopaṭṭasamphasso ǁ
394) halāhalavisa : 하랄라는 일종의 나무인데, 그 뿌리가 맹독성을 지니고 있다.
395) madhuropi piṇḍapāto ǀ halāhalavisūpamo asīlassa ǀ ādittā gilitabbā ayo- ǀ guḷā yena cirarattaṁ ǁ
P 220
즐거움이라고 생각하더라도 괴로움이다.
불타는 쇠침상과 쇠의자가
오래도록 그를 괴롭힐 것이리.396)
신자가 보시한 정사에서
계행이 악하면, 어찌 체류의 즐거움이 있으랴!
그 때문에 뜨거운
쇠솥 가운데 지내야 한다.397)
의심하는 습관이 있고, 오물이 생겨나고,
번뇌가 있고, 악하고
안이 부패했다고 꾸짖으면서
세상의 스승께서 설한 것이다.398)
제어되지 않은 자,
수행자의 옷을 입었을 뿐 수행자가 아닌 자
자신을 파낸 부패한 자의
목숨을 부끄러워할지라.399)
이 세상에서 장엄을 원하는 자가
오물이나 시체를 피하듯,
고요한 계행자가 파계자를 피하니
그의 목숨은 어떠한 것인가?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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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6) sukhasammatopi dukkho ǀ asīlino mañcapiṭhaparibhogo ǀ yaṁ bādhissanti ciraṁ ǀ jalita-ayomañcapiṭhāni ǁ
397) dussīlassa vihāre ǀ saddhādeyyamhi kā nivāsarati ǀ jalitesu nivasitabbaṁ ǀ yenaayokumbhimajjhesu ǁ
398) saṅkasarasamācāro ǀ kasambujāto avassuto pāpo ǀ antopūti’ti ca yaṁ ǀ nindantoāha lokagaru ǁ
399) dhī jīvitaṁ asaññatassa ǀ tassa samaṇajanavesadhārissa ǀ assamaṇassa upahataṁ ǀ khatamattānaṁ vahantassa ǁ
400) gūthaṁ viya kuṇapaṁ viya ǀ maṇḍanakāmā vivajjayantīdha ǀ yaṁ nāma sīlavanto ǀ santo kiṁ jīvitaṁ tassa. ǁ
P 221
두려움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했으나
모든 증득의 즐거움을 벗어났으니,
천상의 문은 굳게 닫혀 있고
괴로운 곳을 향한 길로 올라섰구나.401)
연민하는 자에게 연민의 대상이 되는 자는
계행이 악한 자이니 그 이외에
다른 누가 연민의 대상일 수 있으리?
계행이 악한 자에게는 실로 많은 허물이 있다.402)
이와 같은 종류의 성찰을 통해서 계행을 파괴하는 것에서 위험을 보고, (b) 앞서 말한 것과는 반대로 계행을 성취하는 자는 공덕을 본다.
159. 그리고 또한 알아햐 한다.
아주 [58] 티끌이 없는 계행을 지니면
그가 발우와 가사를 수하는 것은
청정한 믿음을 주는 것이며
그의 출가는 결실이 있는 것이다.403)
청정한 계행을 지킨다면
수행승의 마음에는
태양에 어둠이 잠입하지 못하듯,
자책 등의 두려움이 잠입하지 못한다.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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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1) sabbabhayehi amutto ǀ mutto sabbehi adhigamasukhehi ǀ supihitasaggadvāro ǀ apayamaggaṁ samārulho ǁ
402) karuṇāya vatthubhūto ǀ kāruṇikajanassa nāma ko añño ǀ dussīlasamo dussīlatāya ǀ iti bahuvkdhā dosā‘ti ǁ
403) tassa pāsādikaṁ hoti ǀ pattacīvaradhāraṇaṁ ǀ pabbajjā saphalā tassa ǀ yassa sīlaṁ sunimmalaṁ ǁ
404) attānuvādādibhayaṁ ǀ suddhasīlassa bhikkhuno ǀ andhakāraṁ viya raviṁ ǀ hadayaṁ nāvagāhat ǁ
P 222
계행의 성취로 인해서 수행승은
고행의 숲에서 빛나니,
광명의 성취에 의해서
달이 허공에서 빛나는 것과 같다.405)
계행을 지닌 수행승의
몸의 향기조차
천신들에게 기쁨을 만드니
계행의 향기는 말해 무엇하리요.406)
모든 향기의 종류 가운데
성취에서 탁월하니,
계행의 향기는 장애 없이
일체의 방향으로 퍼져나간다.407)
계행을 지닌 자에게
행한 것은 적더라도 큰 과보가 있으니,
계행을 지닌 자가 되면,
공양과 공경의 그릇이 되는 것이다.408)
현세의 번뇌가
계행을 지닌 자를 괴롭히지 못하고
계행을 지닌 자가 되면,
미래세의 고통의 뿌리를 근절한다.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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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5) sīlasampattiyā bhikkhu ǀ sobhamāno tapovane ǀ pabhāsampattiyā cando ǀ gaganeviya sobhati ǁ
406) kāyagandhopi pāmojjaṁ ǀ sīlavantassa bhikkhuno. ǀ karoti api devānaṁ ǀ sīlagandhe kathāva kā ǁ
407) sabbesaṁ gandhajātānnaṁ ǀ sapattiṁ abhibhuyyati ǀ avighātī disā sabbā ǀ sīlagandho pavāyati ǁ
408) appakāpi katā kārā ǀ sīlavante mahapphalā ǀ hontī’ti sīlavā hoti ǀ pūjāsakkāsābhājanaṁ ǁ
409) sīlavantaṁ na bādhanti ǀ āsavā ditthadhammikā ǀ samnarāvikadukkhānaṁ ǀ mūlaṁ khanati sīlavā ǁ
P 223
인간의 성취이든
천상의 영화이든
계행을 갖춘 자가 원한다면,
결코 얻기 어려운 것은 아니다.410)
그러나 궁극적으로 평온이
열반의 성취이니,
계행을 성취한 자의 마음은
오직 그곳으로만 달려간다.411)
일체 성취의 뿌리인
계행 가운데
무수한 유형의 공덕이 있다고
슬기로운 자는 분명히 판별해야 한다.412)
160. 이와 같이 분명히 아는 자에게는 계행의 파괴를 두려워하고 계행의 성취로 기우는 의도가 생겨난다. 그러므로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러한 계행의 파괴의 위험과 계행의 성취의 공덕을 보고 지그한 외경으로 계행을 청정하게 해야 한다.
161. 이상으로 ‘계행에 정초한 지혜로운 사람은’이라는 시로써 계행 삼매 지혜의 제목으로 설한 청정도론에서 계행에 대한 논의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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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0) yā manussesu sampatti ǀ yā ca devesu sampadā. ǀ na sā sampannasīlassa ǀ icchatohoti dullabhā ǁ
411) accantasantā pana yā ǀ ayaṁ nibbānasampadā ǀ mano sampannasīlassa ǀ tamevaanudhāvati ǁ
412) sabbasampattimuttimūlamhi ǀ sīlamhi iti paṇḍito ǀ anekākāravokāraṁ ǀ ānisaṁsaṁ vibhāvateti ǁ
이로써
선량한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지은
청정도론에서
계행이라고 불리는
제 1장이 끝났다.
선다향(禪茶香) 사경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