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태사 홍공 묘표(高麗太師洪公墓表)
公諱殷悅姓洪氏實爲我南陽洪氏之鼻祖也 其先譜佚無徵而世
傳唐遣才子八人往敎高句麗其一即洪氏來泊于 唐串之銀樹浦 居焉
공의 휘(諱)는 은열(殷悅)이요 성은 홍씨(洪氏)로서 실로 우리 남양
홍씨(南陽洪氏)의 시조이시다. 공의 선대는 족보(族譜)에는 기록이
없고 세전하기를 당나라에서 八學士를 보내 고구려에,미개한 백성을
교화 해 주도록 하였는데 그 중 한 분이 홍씨(洪氏)이다.
당곶(唐串; 唐城) 은수포에 정박하시어 그 곳에서 사시었다.
唐串後改爲南陽府 公蓋其後也 公之事蹟不見於麗史及家乘
而謹按譜牒公佐高麗太祖有翊戴功賜匡翼效節獻襄定難弘濟
亮采保乂經濟功臣之號官爲三重大匡太師
당곶(唐串)은 후일에 남양부로 개칭 되었다.공은,대개 그,후손이시다
공의 사적(事蹟)은 고려사와 가승(家乘)에는 기록이 없으나 삼가,
보첩을 살펴보면 공이 고려 태조(太祖)를 보좌하여 왕으로 추대하는
일에 공로가,있으므로 광익,효절,헌양,정난,홍제,분용,보예,경제공신의
훈호를,받으셨고,벼슬은 삼중대광(三重大匡) 태사(太師)까지,되시었다
世代久遠其德業功烈有不可考而于今可見者獨勳號耳即
此以推公之豊功盛烈개可想也 始公墓宅譜牒記在於兔山
而失不知處
세대(世代)가 오래인지라 그 덕업(德業)과 공적은 자세히 상고,할,
수가 없으나 지금까지도 가히 알수 있는 것은 다만 18자 훈호
(勳號)뿐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공의 위대하신 공훈은 가히 상상
할 수 있는 것이다. 처음 공의 묘소는 보첩(譜牒)에 기록 되기를
토산(兔山)에 있다 고만 하고 그 장소는 알지 못하였다.
兔山縣東二十里吹笛峯上有一古葬故老相傳謂洪政丞墓而
無誌刻可徵 崇禎紀元後再戊申秋山低居後裔禹相得短碣於
墓傍沙汰處士上下剝而中段存
그런데 토산현(兔山縣) 동쪽 20리 쯤에 있는 취적봉에 한,고총이
있었는데 고로(故老)들이 서로 전하여 이르되 홍정승(洪政丞)의,묘라
일컬어 왔다. 그러나 묘비와,지석에 새겨진 것이 없으니 증빙할,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숭정 기원 후 둘째번 무신(1728)년 가을에 그,
산 밑에 살고 잇는 후손 우상(禹相)이 그 묘소 곁에 사태(沙汰) 난
곳에서 부서진 석비(石碑) 조각을 얻었는데 그 상,하는 결손 되어
없어지고 중단(中段)만이 남아 있었다.
初行有獻襄定難弘五字第二行有公諱殷悅字五字第三行有寅
十月十七五字第四行有笛峯丙坐壬五字刻劃宛然遂走告于京
中諸宗後孫禹鼎尙賓等극往省審則墓貌雖비而墓址甚壯傍近
無他塚坐向與碣面所書相符知爲公墓無疑也
그 첫줄에 헌양,정난,홍,(獻襄定難弘) 다섯 글자가 있고 둘째 줄에
공,휘,은열,자(公諱殷悅字) 다섯 글자가 있고 셋째 줄에는,인,시월,
십칠(寅十月十七) 다섯자가 있고 넷째 줄에는 적봉병좌임(笛峯丙
坐壬) 다섯자가 있어 새겨진 자획이 분명한지라 드디어 서울에,사는
모든 종중에 연락하자 후손 우정(禹鼎) 상빈(尙賓)등이 달려가서
살펴본즉 묘의 모양은 무너졌으나 묘의 기초는 심히 웅장하여,그
근방에는 타인의 묘가 없고 묘의 좌향이 비조각에 명각(銘刻)한
것과 같이 서로 부합되어 있는지라 이것이 공의 묘로서 의심할,바
없음을 알게 되었다.
翌年春改築塋域今又樹石記蹟以爲永久圖 嗚呼公之墓湮沒
者不知幾百年破碣遺刻復發於斷瓏之間不爲他 人得而必得
於後裔之手
이듬해 봄에 묘소 영역(塋域)을 개축하고 비석을 세워 그 사적을
기록하여 영구히 보존토록 한 것이다.
참으로 감격 할 일이로다. 공의 묘를 실전한지 몇 백년이 지나도록
알지 못 하다가 부서진 비조각과 각자(刻字)가 무너진 언덕에서,다시
발견되었으나,타인이,얻어내지,않고,바로,후손의,손에,얻어진바,되었다
上下皆剝而獨存其諱字비堂封復固요牧遠跡此始公德業之盛
神明黙佑以致此也 其亦奇矣前數年公孫僕射公墓在晉州者亦
因斷碑之發於田中而得焉
비석 위 아래가 모두 결손되었으나 그 휘자가 남아 있어 봉분으로
하여금,다시,옛모습을,되찾았음으로,미화,작업을,하여,나무꾼과,목동이
자취를 멀리하게 되었으니 이런일은 자못 공의 덕업이 위대한 것을
신명(神明)이 살펴 준 것이다. 이 일이 있기 수년 전에 진주(晉州)에 있는
공의 손자 복야공(僕射公)의 묘 또한 부서진 비(碑)조각이 밭 가운데서
발견됨으로 인하여 묘를 찾게 되었다.
兩墓之顯時同而事又同豈不尤異也 哉夫人金交金氏沙餐元甫
公南之女公墓改封時見壙內方廣似是부葬也
태사공 복야공 두,분의 실묘 발견이 때가,같고 찾은일이 또한,같으니
어찌 더욱 기이하지 않으리요
공의,부인,금교김씨(金交金氏)는,사찬,벼슬을,한,원보(元甫)공,남(南)의
따님이신데 공의 묘를 개봉축할 때 그 광중(壙中)의 광대(廣大)함을 보아
합장(合葬) 한 것 같았다.
男太府卿東周太府卿男右僕射毅正甫陟副正戶蘭右僕射男
太子詹事灝奉御복詹事男軍器監事德升尙書德成德威軍器
監事男上柱國忠平公灌忠平公男尙書至柔
공의 아드님은 태부경 동주(東周)요 태부경의 아드님은 우복야
의(毅)와 정보 척(陟)과 부정호 난(蘭)이시고 우복야공의,아드님은
태자첨사 호(灝)와 봉어 복이시고 첨사공의 아드님은 군기감사
덕승(德升)과 상서 덕성(德成),덕위(德威)이시고 군기감사의,아드님은
상주국,충평공,관(灌)이시고,충평공의,아들은,상서,지유(至柔)이시다.
此外後孫繁衍潟大歷麗代入本朝名臣碩輔指不勝루而有難盡
錄就其中官位名德最著者記焉 斯胤僕射縉尙書裔翰林學士奎
匡定公子藩忠正公戎莊簡公敬良順公澍左使彦博文正公彦猷
南陽君彦修判中樞承纘侍中承祚尙書云遂益山君徵唐城君
師範師禹知密直復琪判書海唐城尉漢判書師錫莊襄公約
判中樞元哲唐城府院君逸童大提學達孫左相敬孫守同知成均
이 외에도 후손들이 번성하고 고려조를 거쳐 조선조에 들어와서
명신(名臣)과,석보(碩輔;어질고,착한,신하)를,다,꼽을수가,없어,기록 하기,
어려우나,그,중에서,벼슬과,덕망이 높은분들을 기록하면 9세손 사윤(斯胤)은,
복야,진(縉)은상서,예(裔)는,한림학사,규(奎)는,광정공, 자번(子藩)은,충정공,
융(戎)은장간공,경(敬)은,양순공,주(澍)는,좌사, 언박(彦博)은,문정공 언유(彦猷)는
남양군 언수(彦修)는 판중추 승찬 (承纘)은 시중,승조(承祚)는,상서,운수(云遂)는,
익산군 징(徵)은,당성군 사범(師範),사우(師禹)는,지밀직,복기(復琪)는,판서,해(海)는,
당성위 한(漢)은,판서,사석(師錫)은,장양공,약(約)은,판중추,원철(元哲)은, 당성부원군
,일동(逸童)은,대제학,달손(達孫)은,좌상,경손(敬孫)은 수동지 성균
貴孫判書應左相興大憲常唐陽尉景霖判書春卿春年監司天民
都承旨聖民判中樞文貞公瑞鳳領相文靖公湜大憲思斅行
判決事命元命一監司命耈忠烈公命亨義烈公命夏領相文簡公
友敬唐原尉得一위處厚處尹監司處大知中樞處亮貞靖公重普
右相琢左尹得箕益平尉得禹監司受헌行判書受疇都承旨禹寧
監司禹傳參判禹瑞大諫啓迪大憲國朝塗莘之家及名公巨卿非
公外裔者鮮而此不能盡錄焉
二十六世孫 領議政 致中 謹述
前副正 禹鼎 謹書
二十七世孫 生員 啓宇 謹書 八分
귀손(貴孫)은 판서 응(應)은 좌상 흥(興)은 대사헌 상(常)은,당양위
경림(景霖)은,판서,춘경(春卿),춘년(春年)은,감사,천민(天民)은,도승지
성민(聖民)은,판중추,문정공,서봉(瑞鳳)은,영상,문정공,식(湜)은대사헌
사효(思斅)는 행,판결사 명원(命元),명일(命一)은 감사 명구(命耈)는
충열공 명형(命亨)은 의열공 명하(命夏)는 영상,문간공 우경(友敬)은
당원위 득일(得一) 위, 처우(處厚),처윤(處尹)은 감사 처대(處大)는
지중추 처양(處亮)은 정정공 중보(重普)는 우상 탁(琢)은 좌윤,득기
(得箕)는 익평위 득우(得禹)는 감사 수헌은 행판서 수주(受疇)는
도승지 우녕(禹寧)은 감사 우전(禹傳)은 참판 우서(禹瑞)는 대사간
계적(啓迪)은 대사헌 이시다.
조선조 왕가와 인척간 되신 분 또는 명공(名公) 거경(巨卿)중 공의
외손 되는 자 많으나 여기에 일일이 다 기록할 수 없다.
26세손 영의정 치중 근술
전부정 우정 근서
27세손 생원 계우 근서 팔분체
자료제공 ; 남양홍씨 문정공파 문헌록
근 역 ; 태사공 후 손 홍 석 환 (1979년 7월)
작 성 ; 양천서원 보존회 전 총무부장 홍 현 표 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