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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허해] 위(威)는 기세(氣勢)가 사람을 억압(抑壓)하여 사람들이 경외(敬畏)하는 것이고, 덕(德)은 은택(恩澤)을 사람에게 베풀어서 사람들이 애앙(愛仰)하는 것이다. 위(威)와 덕(德)은 대비(對比)되면서, 위(威)는 진(瞋)과 가깝고, 덕(德)은 진(瞋)과 서로 다르다. 덕(德)은 능히 거두어주고 위(威)는 능히 항복을 받으니 서로 대(對)가 된다. 진(瞋)은 마주 대하기 어렵고 위(威)는 범(犯)하기 어려우므로 서로 가깝고, 진(瞋)은 능히 괴롭히며 해(害)하고 덕(德)은 능히 자제(慈濟)하므로 서로 다르다. 소위 위덕자재(威德自在)는 자(慈)·위(威)가 병행(幷行)하고 살(殺)·활(活)이 때를 따라 자재(自在)함이 마치 왕(王)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청정혜(淸淨慧)‘보살’을 이어서 위덕(威德)‘보살’이 질문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앞서 청정혜‘보살’은 ‘미륵보살’의 전애성자(轉愛成慈)를 인(因)하여 질문하시어 「중생으로 하여금 치(痴)를 바꾸어 혜(慧)를 이루게 한 것」이었는데, 지금 위덕(威德)‘보살’은 청정혜‘보살’의 전치성혜(轉痴成慧)를 이어서 질문하시어 「중생으로 하여금 진(瞋)을 바꾸어서 위(威)를 이루게 한 것」이니, 비(悲)와 지(智)가 상도(相導)하고 자(慈)와 위(威)가 병행(並行)한 연후(然後)에 자재(自在)하다고 한다. 자재(自在)라고 한 것은 마음이 넓고 몸이 넉넉하여 경안(輕安)하고 창적(暢適)하며, 위험(危險)에 처(處)하여도 탄연(坦然)하여 근심이 없는 것을 말한다. 사람이 경안(輕安)을 능히 얻지 못하고 근심이 있는 것은 삼독(三毒)인 탐(貪)·진(瞋)·치(痴)가 그 원인인데, 그 중에서 성내는 진(瞋)이 특히 심(甚)하다. 진(瞋)은 감정(感情)을 거슬리면 일어나고, 경계(境界)를 대(對)하면 생기는데, 자신을 뇌해(惱害)할 뿐 아니라 또한 남도 뇌해(惱害)한다. 정신을 상(傷)하고 복덕(福德)을 패(敗)하며 재물을 손(損)하고 중생을 해(害)함이 모두 진(瞋)으로 말미암으니, 이리하여 진(瞋)은 위(威)를 잃게하고 덕(德)을 멸(滅)하여, 편안(便安)한 자재(自在)를 능히 얻지 못하게 한다. 위덕(威德)‘보살’은 신심(身心)이 공(空)과 같고 자타(自他)의 모습이 멸(滅)함을 요지(了知)하므로, 항상 거슬리는 역경계(逆境界)와 기분 좋은 순경계(順境界)중에도 역순(逆順)이 뇌해(惱害)하지 못한다. 악마와 외도가 위덕(威德)‘보살’의 이름을 듣거나 모습을 보면 간담(肝膽)이 서늘하고 혼(魂)이 빠지며, 또한 모든 사람들은 위덕(威德)‘보살’을 경모(敬慕)하고 애앙(愛仰)하여 모두가 교화(敎化)를 따르니, 이것은 위덕(威德)이 자재(自在)하기 때문이다. 종성(種性)과 방편(方便)으로써 질문한 것은, 그 뜻이 사람으로 하여금 진(瞋)을 바꾸어서 위(威)를 이루고 또 같이 경안(輕安)을 얻어서 자재(自在)함을 이루게 하려는데 있다. 부처님이 삼관(三觀)을 보이시고, 관관(觀觀)마다 모두 「경안(輕安)을 내발(內發)한다」고 말씀하시며, 다시 결(結)하여 이르시기를 「자타(自他) 신심(身心)이 능히 미치지 못할 바이다」 하신 것은, 이것이 중생(衆生)으로 하여금 마음을 비우고, 모습을 잊고, 스스로 능히 진(瞋)을 바꾸어서 안(安)에 취(就)하여 위덕(威德)을 이루도록 하신 것이다. ‘미륵보살’과 청정혜(淸淨慧)‘보살’, 청정혜‘보살’과 위덕(威德)‘보살’이, 서로 서로 이어서 발양(發揚)하는 순서가 이와 같다.
송(頌)하여 이르되,
수순(隨順)하는 방편(方便)이 무량(無量)하지만,
정(靜)·환(幻)·선(禪) 삼관(三觀)이 대강(大綱)이로다.
삼관(三觀)의 취지(趣旨)가 다르다 하지마라.
천도(千途)가 다 고향(故鄕)으로 돌아 가구나.
[경] 이에 위덕자재(威德自在)‘보살’이 대중 가운데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 발에 정례(頂禮)하시고 오른쪽으로 삼잡(三匝)을 돌고는, 꿇어앉아서 차수(叉手)하고 부처님께 사뢰었다.
“대비(大悲)하신 세존(世尊)이시여. 널리 저희들을 위하여 이와 같이 각성(覺性)을 수순(隨順)함을 분별(分別)하시여, 모든 ‘보살’로 하여금 마음 광명(光明)을 깨닫게 하셨으니, 부처님의 원음(圓音)을 듣고서, 닦고 익히지 않고도 좋은 이익(利益)을 얻었습니다.
세존(世尊)이시여. 비유하건대, 큰 성(城)에 밖으로 통하는 성문(城門)이 네 개 있으면 여러 지방(地方)에서 오는 사람들이 한 길로만 오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일체 ‘보살’이 불국(佛國)을 장엄(莊嚴)하며 및 ‘보리’를 이루는 것도 한 개의 방편(方便)만이 아닙니다.
원컨대, 세존(世尊)이시여. 널리 저희들을 위하여 일체 방편(方便)과 점차(漸次)와 아울러 수행인이 모두 몇 종류(種類)가 있는지 설명하여 주시어서, 이 모임의 모든 ‘보살’과 말세 중생(衆生)들 중에서 대승(大乘)을 구(求)하는 자(者)로 하여금 속히 개오(開悟)함을 얻어 여래(如來)의 대적멸해(大寂滅海)에서 유희(遊戱)하게 하여주십시오.”
이 말씀을 마치시고 오체(五體)를 투지(投地)하면서, 이렇게 세 번 청(請)하기를 마치고, 다시 시작하려 하시거늘,
於是(어시)威德自在菩薩(위덕자재보살)在大衆中(재대중중)卽從座起(즉종좌기)頂禮佛足(정례불족)右繞三匝(우요삼잡)長跪叉手(장궤차수)而白佛言(이백불언) 大悲世尊(대비세존)廣爲我等(광위아등)分別如是隨順覺性(분별여시수순각성)令諸菩薩(영제보살)覺心光明(각심광명)「我等(아등)」承佛圓音(승불원음)不因修習(불인수습)而得善利(이득선리) 世尊(세존)譬如大城(비여대성)外有四門(외유사문)隨方來者(수방래자)非止一路(비지일로)一切菩薩(일체보살)莊嚴佛國(장엄불국)及成菩提(급성보리) 非一方便(비일방편)惟願世尊(유원세존)廣爲我等(광위아등)宣說(선설)一切方便漸次(일체방편점차)幷修行人(병수행인)總有幾種(총유기종)令此會菩薩(영차회보살)及末世衆生求大乘者(급말세중생구대승자)速得開悟(속득개오)遊戱如來大寂滅海(유희여래대적멸해) 作是語已(작시어이)五體投地(오체투지)如是三請(여시삼청)終而復始(종이복시)
[함허해] 각성(覺性)이 청정(淸淨)하여 밝고 영명(靈明)하며, 광명(光明)이 내외(內外)에 통(通)하고 과거·현재·미래를 조철(照徹)하므로, 심광명(心光明)이라 한다. 사상(四相)이 어둡게 덮어서 심광(心光)이 나타나지 못하고, 반드시 모습이 다 없어져야 비로소 명현(明顯)을 얻는데, 이제 부처님이 개시(開示)하시어 분명하게 밝히시므로, 이렇게 「대중(大衆)이 마음의 광명(光明)을 깨달았다」. 모습이 다 없어지고 광명이 나타나는 것은 그 뜻이 심원(深遠)하여 반드시 수습(修習)을 거쳐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대중(大衆)이 한번 개시(開始)함을 듣고서 밝혀냈으므로, 그래서 경사(慶事)라고 여겨서 「좋은 이익을 얻었습니다」라고 말한다. 수행인(修行人)의 종성(種性)과 방편점차(方便漸次)는 앞에서 이미 밝혔으나 대중이 근기(根機)가 둔(鈍)하여 알지 못하므로, 비유(比喩)를 들어 설명해 주시기를 청(請)하여 개오(開悟)를 얻도록 하였다. 「대적멸해(大寂滅海)」 또는 「대원각해(大圓覺海)」라고 부르는데, 중생(衆生)과 부처가 일원(一源)임을 대원각해(大圓覺海)라 이르고 수증(修證)이 구경(究竟)임을 대적멸해(大寂滅海)라 이른다. 「대원각해(大圓覺海)」는 체(体)가 두루하고 용(用)이 두루함을 말함이요, 「대적멸해(大寂滅海)」는 모습이 적(寂)하고 미혹(迷惑)이 멸(滅)한 것을 말한다.
[감산직해] 위덕자재(威德自在)‘보살’이 설법(說法) 듣는 것을 스스로 경축하고 찬탄한다. 부처님의 원음(圓音)을 듣고, 대지(大智)로 가르친 광명(光明)이 흘러서 대중의 마음을 씻어주고, 신력(神力)을 더하여 무명(無明)을 조파(照破)하자, 제각기 「자심(自心)의 광명(光明)」이 당장에 나타났다. 이것을 두고 「닦고 익히지 않고도, 좋은 이익을 얻었다.」고 한다.
「세존(世尊)이시여. 비유하건대, 큰 성(城)」 이하(以下)는, 입문(入門)하는 「방편(方便)」을 청(請)하여 수행(修行)을 물었다. 앞에서는 증득(證得)한 것의 차별(差別)만 말했고, 능히 수증(修證)하는 수행(修行)을 말하지는 않았으므로, 이제 특별히 입문(入門)하는 방편(方便)을 청(請)했다. 「성(城)」은 원각(圓覺)에, 「문(門)」은 들어가는 길에 비유했다. 「방편(方便)」이란 수증(修證)에 들어가는 수행(修行)으로, <능엄경>의 이른바 「최초(最初) 방편(方便)」이니, 방(方)에 따라 편(便)을 취하는 것으로, 바로 수행(修行)을 시작(始作)하는 공부(工夫)이다. 처음에는 「원조(圓照)」라는 이자(二字)로 성불(成佛)의 인지(因地)를 삼았으므로, 앞에서 「허공꽃인 줄 분명히 알면 곧 윤전(輪轉)이 없다」거나, 「환(幻)인 줄 알면 여의니, 방편(方便)을 쓰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는 원수(圓修) 돈오(頓悟)이므로 방편(方便)을 빌리지 않으니, 상상근(上上根)의 수행이었다. 여기서는 중하(中下)의 근기(根機)를 위하여 「점차(漸次)」를 청하였으니, 그 뜻은 삼관(三觀)의 문(門)을 열어 보이고자 함에 있다. 뒤에 나오는 단복(單複)으로 원수(圓修)하는 25륜(輪)의 수행(修行) 방법이 모두 「점차(漸次)」이다.
[경] 저때에 세존(世尊)께서 위덕자재(威德自在)‘보살’에게 이르시되,
“착하고 착하다. 선남자(善男子)야. 너희들이 이에 능히 모든 ‘보살’과 말세 중생을 위하여, 여래(如來)에게 이와 같은 방편(方便)을 묻는구나. 마땅히 너희들을 위하여 설명하리니, 이제 자세히 들어라.”
때에 위덕자재(威德自在)‘보살’이 가르침을 받들어 환희하고 대중들과 같이 조용히 듣더라.
爾時(이시)世尊(세존)告威德自在菩薩言(고위덕자재보살언) 善哉善哉(선재선재)善男子(선남자)汝等(여등)乃能爲諸菩薩(내능위제보살)及末世衆生(급말세중생)問於如來如是方便(문어여래여시방편)汝今諦聽(여금체청)當爲汝說(당위여설) 時(시)威德自在菩薩(위덕자재보살)奉敎歡喜(봉교환희)及諸大衆(급제대중)黙然而聽(묵연이청)
[함허해] 널리 중생(衆生)으로 하여금 「관(觀)」을 의지하여 「각(覺)을 수순(隨順)하게 하여」 함께 자재(自在)의 영역(領域)에 도달하게 하는 것이 또한 부처님의 본회(本懷)이므로, 칭찬하고, 설법(說法)을 허락하신 것이다.
[경] “선남자(善男子)야. 위없는 묘각(妙覺)이 시방(十方)에 두루하여 여래(如來)를 출생하나니, 일체법(一切法)과 더불어 동체(同體)로 평등(平等)하여 저 수행(修行)에 실로 둘이 없다.
방편(方便)으로 수순(隨順)하는 것은 그 수(數)가 무량(無量)하지만, 그 돌아가는 곳을 따라서 두렷이 거두면, 근성(根性)에 따라서 차별(差別)이 세 종류(種類)가 있다.
善男子(선남자)無上妙覺(무상묘각)徧諸十方(변저시방)出生如來(출생여래)與一切法(여일체법)同體平等(동체평등)於諸修行(어저수행)實無有二(실무유이) 方便隨順(방편수순)其數無量(기수무량)圓攝所歸(원섭소귀)循性差別(순성차별)當有三種(당유삼종)
[함허해] 「삼관(三觀)」이 각성(覺性)을 수순(隨順)하는 「방편(方便)」임을 밝히고자, 먼저 일(一)이 무량(無量)이 되고 무량(無量)이 삼(三)에 두렷이 정리가 됨을 밝힌다. 대저 「각(覺)이 시방(十方)에 두루하여 불법(佛法)을 출생(出生)하므로」, 소유(所有)의 「불법(佛法)이 당체(當體)가 평등(平等)하니」, 그러므로 「수행(修行)에 다문(多門)이 있으나, 실로 무이(無二)이다」. 실제(實際)는 무이(無二)이나 방편(方便)은 무량(無量)인데, 「방편(方便)이 비록 무량(無量)하나, 삼(三)에 원섭(圓攝)된다」.
[감산직해] 법성(法性)이 「원만(圓滿)」하여 본래 미혹과 깨달음이 없고, 「평등(平等)하여 무이(無二)」임을 보였다. 다만 일진(一眞)에 계합(契合)하면 여러 수행(修行)을 빌리지 않으니, 「저 수행(修行)에 실로 둘이 없다」고 했다.
「방편(方便)으로 수순(隨順)하는」 이하(以下)는, 수증(修證)에 들어가는 문(門)을 말했다. 각성(覺性)은 일체 제법(諸法)에 두루하므로, 모든 법(法)이 모두 수증(修證)에 들어가는 문(門)이다. 다만 「근기(根機)에 따라 원섭(圓攝)하면」, 그 절요(節要)가 없을 수 없으므로, 삼문(三門)이 있다. 이 삼문(三門)이 바로 <능엄경>의 삼관(三觀)인, 공(空)·가(假)·중(中)이다. <능엄경>과 <원각경>이 열거한 세 가지의 명칭이 같으니, 범어(梵語)로는 ‘사마타’ㆍ‘삼마발제’ㆍ‘선나’가 그것이다. 고석(古釋)에 따르면 ‘사마타’는 지(止)로 번역하되 적정(寂靜)이 모습이고, 뜻은 공관(空觀)에 해당된다. ‘삼마발제’는 등지(等至)나 등지(等持)로 번역하고 환화(幻化)가 모습이고, 뜻은 가관(假觀)에 해당된다. 또 ‘선나’는 정려(靜慮)로 번역하되 적정(寂靜)과 환화(幻化)를 여의고, 적멸(寂滅)이 모습이고, 뜻은 중관(中觀)에 해당된다. 수증(修證)에 삼관(三觀)이 필수적인 것은 여래장심(如來藏心)이 삼제(三諦)의 이(理)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공(空)·불공(不空)·공불공(空不空)인 「삼관(三觀)으로」 각각 일제(一諦)를 비추고, 일심(一心)을 「원섭(圓攝)하므로」 원조(圓照)라고 한다. 한마음이 원조(圓照)하면 돈(頓)이 되고, 삼관(三觀)이 차제로 각각 비추면 점(漸)이 된다. 그러나 실은 본래 “셋이다, 하나다” 하는 차제(次第)의 차별(差別)이 없다. 다음 글에서 저절로 밝혀진다.
[경] 선남자(善男子)야. 만일 ‘보살’이 정원각(淨圓覺)을 깨치고 나서, 깨끗한 각심(覺心)으로, ‘고요함[靜]’을 취하여 수행(修行)을 삼으면, 모든 생각을 맑힘으로 말미암아 식심(識心)이 번거로이 움직임을 깨닫는다. 정혜(靜慧)가 발생하면, 신심(身心) 객진(客塵)이 이로부터 영원히 소멸(消滅)하면서,
문득 안으로 적정경안(寂靜輕安)을 능히 발(發)한다.
적정(寂靜)하기 때문에 시방세계 모든 여래(如來)의 마음이 그 중에 나타나는 것이, 마치 거울 가운데 영상(影像)과 같다. 이 방편(方便)은 ‘사마타’(奢摩他)라고 부른다.
善男子(선남자)若諸菩薩(약제보살)悟淨圓覺(오정원각)以淨覺心(이정각심)取靜爲行(취정위행) 由澄諸念(유징제념)覺識煩動(각식번동)靜慧發生(정혜발생)身心客塵(신심객진)從此永滅(종차영멸)便能內發寂靜輕安(변능내발적정경안) 由寂靜故(유적정고)十方世界(시방세계)諸如來心(제여래심)於中(어중)顯現(현현)如鏡中像(여경중상)
此方便者(차방편자)名奢摩他(명사마타)
[함허해] 앞에서는 일(一)이 무량(無量)이 되고 무량(無量)이 삼(三)에 섭(攝)함을 밝혔고, 지금은 바로 삼관(三觀)을 밝힌다. 이미 원각(圓覺)이 본래 청정(淸淨)하여 모든 산동(散動)이 없음을 오(悟)하면, 또한 마땅히 산(散)을 섭(攝)하고 「정(靜)을 취(取)하여 수행(修行)을 삼는다」. 그렇지 않으면 전심(全心)이 망(妄)인 고로 능히 망식(妄識)의 번동(煩動)함을 조료(照了)하지 못한다. 섭산(攝散)하여 귀정(歸靜)하면 진심(眞心)이 독로(獨露)하여 「망식(妄識)의 번동(煩動)을 분명(分明)하게 각지(覺知)하고」, 식심(識心)이 부동(不動)하고 「정혜(淨慧)가 발생(發生)하여, 신심(身心) 객진(客塵)이 이로 부터 영멸(永滅)하므로, 적정경안(寂靜輕安)이 이에 현전(現前)한다」. 진(塵)이 없어지고 광(光)이 생(生)하며, 동(動)이 쉬고 정(靜)이 현(現)함을 인(因)하여 「불심(佛心)이 그 중에 나타난다」. 마치 때가 낀 거울이 많은 명경(明鏡)을 대(對)하였으나 진구(塵垢)가 있어서 여러 명경(明鏡)의 광명(光明)을 능히 수용(受用)하지 못하다가, 진구(塵垢)가 다 없어지면 이 거울의 광(光)이 모든 거울에 분현(分現)하고, 여러 경광(鏡光)이 이 거울에 동현(同現)해서, 광광(光光)이 호조(互照)하여 원융무애(圓融無碍)하니, 이것이 제일(第一) ‘사마타’관(觀)이다. ‘사마타’(奢摩他)는 적정(寂靜)을 말한다.
[감산직해] 먼저 수행(修行)의 근본(根本)을 말한다. 깨달은 뒤에야 성수(性修)라고 부르지, 미혹(迷惑)한 채로 수행하는 것은 성수(性修)가 아니다. ‘보살’의 수행은 요컨대 먼저 본유(本有)하는 정원(淨圓)한 진심(眞心)을 깨닫고, 이 불생불멸(不生不滅)하는 진심(眞心)을 의지하여 관행(觀行)을 안립(安立)하고서, 오랜 겁(劫)의 무명(無明) 습기(習氣)를 깨끗하게 치유(治癒)하는 것이다. 이처럼 수행(修行)하여야 성품에 걸맞게 수행하는 성수(性修)이다.
「깨끗한 각심으로」 이하(以下)는, 이른바 공관(空觀)의 행상(行相)을 보였다. 발각(發覺)한 초심(初心)이 ‘고요함’인 정(靜)을 머리로 삼는다. 아직 깨닫지 못했을 때는 망상(妄想)이 어지럽게 움직이나, 이제 마음을 깨치면 깨달은 바 각심(覺心)으로 관조(觀照)를 일으켜 부동(不動)인 심체(心體)를 반관(返觀)하므로 「고요함을 취하여 수행(修行)을 삼는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망상(妄想)이 없어지면 ‘아뢰야’식(識) 가운데서 습기(習氣)가 생멸(生滅)하는 모습을 보게 되므로, 「모든 생각을 맑히므로 말미암아, 식심(識心)이 번거로이 움직임을 깨닫는다」고 한다. 오랫동안 관찰하면 자심(自心) 광명(光明)이 홀연히 발현(發現)하므로 「정혜(靜慧)가 발생한다」고 하며, 심광(心光)이 한번 발현하면 「신심(身心)」인 환망(幻妄)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어서 「객진(客塵)」과 같은 줄을 문득 알아차린다. 이리하여 「안으로 신심(身心)을 벗어나므로 영원히 소멸(消滅)한다.」고 한다. 이것이 최초(最初)의 공부(工夫)로, 일념(一念)에 무생(無生)을 돈증(頓證)한다.
「문득 안으로 적정경안(寂靜輕安)」 이하(以下)는, 관(觀)에 들어간 효험(效驗)을 보인다. 원각(圓覺) 묘심(妙心)이 환망(幻妄)인 신심(身心)과 무명(無明)에 덮이어 차단되는데, 이제 「신심(身心)」을 벗어나고 무명(無明)의 무거운 짐이 사라지므로, 「안으로 적정경안(寂靜輕安)을 능히 발(發)한다」고 한다. 이에 도달하면 시방(十方)세계가 확연(廓然)해지며 본유(本有)인 법신(法身)이 드러나므로, 「시방(十方)세계 모든 여래(如來)의 마음이 그 가운데에 나타나는 것이, 마치 거울 가운데 영상(影像)과 같다.」고 한다. 이른바 「모든 부처님 법신(法身)이 아성(我性)에 들어왔고, 아심(我心)이 다시 여래(如來)와 같이 합한다.」하니, 이것이 <능엄경>에서 이른바 「반류(返流)하여 전일(全一)하고, 육근(六根)을 쓰지 않으니, 시방(十方) 국토가 교연(皎然) 청정(淸淨)한 것이, 비유하건대 유리병 속에 밝은 달을 매단 것 같고, 나아가 일체 여래(如來)의 밀원(密圓) 정묘(淨妙)가 모두 그 가운데 나타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는 원교(圓敎)로 무명(無明)을 돈파(頓破)하는 모습이다.
끝으로 방편(方便)의 이름을 말했다. ‘사마타’는 지(止)라 번역하고, 적정(寂靜)을 뜻한다. 인지(因地)에서는 지(止)라 하고, 과지(果地)에서는 정(定)이라 하니, 뜻이 이른바 공관(空觀)에 해당된다.
[경] 선남자(善男子)야. 만일 ‘보살’이 정원각(淨圓覺)을 깨치고 나서, 깨끗한 각심(覺心)으로, 심성(心性)과 근진(根塵)이 모두 환화(幻化)에서 인(因)한 것인 줄 지각(知覺)하면,
곧 모든 환(幻)을 일으켜서 환자(幻者)를 제거하고, 모든 환(幻)을 변화(變化)하여 환중(幻衆)을 개오(開悟)시키는데, 환(幻)을 일으키기 때문에 문득 안으로 대비경안(大悲輕安)을 능히 발한다.
일체 ‘보살’이 이렇게 수행(修行)을 일으켜 점차(漸次)로 증진(增進)하되, 저 환(幻)을 관(觀)하는 자(者)는 환(幻)과 같지 않고, 환(幻)과 같지 않은 관(觀)도 모두 환(幻)이므로, 환상(幻相)을 영원히 여읜다. 이 모든 ‘보살’의 원묘(圓妙)한 수행(修行)은 흙이 싹을 기르는 것과 같다.
이 방편(方便)은 ‘삼마발제’(三摩鉢提)라고 부른다.
善男子(선남자)若諸菩薩(약제보살)悟淨圓覺(오정원각)以淨覺心(이정각심)知覺心性(지각심성)及與根塵(급여근진)皆因幻化(개인환화) 卽起諸幻(즉기제환)以除幻者(이제환자)變化諸幻(변화제환)而開幻衆(이개환중)由起幻故(유기환고)便能內發大悲輕安(변능내발대비경안) 一切菩薩(일체보살)從此起行(종차기행)漸次增進(점차증진)彼觀幻者(피관환자)非同幻故(비동환고)非同幻觀(비동환관)皆是幻故(개시환고)幻相(환상)永離(영리)
是諸菩薩(시제보살)所圓妙行(소원묘행)如土長苗(여토장묘)
此方便者(차방변자)名三摩鉢提(명삼마발제)
[함허해] 이미 원각(圓覺)을 깨달아 진정(眞淨)한 묘명(妙明)이 본래 전도(顚倒)가 아닌데, 곧 「환지(幻智)를 일으켜서 미도(迷倒)를 제거하고, 환(幻)같은 방편(方便)을 변화하여 미(迷)한 무리들을 개시(開示)한다」. 이미 환지(幻智)로써 스스로 미도(迷倒)를 제거하고, 또 환방(幻方)으로써 군미(群迷)를 개각(開覺)하면 「대비경안(大悲經安)이 이에 현전(現前)하니」, 이와 같이 「수행(修行)을 일으켜서 점차(漸次)로 증진(增進)한다」. 증진(增進)하더라도, 관환(觀幻)하여 기행(起行)함이 만일 환(幻)과 같다면 비록 증진코자 하나 이루지 못하겠지만, 「환(幻)과 같지 않으므로」 능히 증진(增進)한다. 다만 미도(迷倒)만 환(幻)이 아니라, 「관지(觀智)도 필경(畢竟)에 또한 환(幻)이므로, 이것까지도 영원히 여의어야」, 묘행(妙行)이 이에 원만(圓滿)하다. ‘보살’의 묘행(妙行)이 이미 정관(靜觀)을 인하여 환(幻)을 제거해 정(靜)을 얻고, 다시 환관(幻觀)을 인하여 정상(靜相)도 또한 여읜다. 이와 같이 점진(漸進)함이 「저 곡식의 싹이 흙을 인하여 장양(長養)함과 같으니」, 이것이 ‘삼마발제’의 관(觀)이다. 소위 ‘삼마발제’란 것은 변화(變化)를 말함이니, 앞의 ‘사마타’는 색(色)이 곧 공(空)인줄 관(觀)하여 망(妄)을 버리고 진(眞)에 돌아감이요, 이 ‘삼마발제’는 공(空)이 곧 색(色)인줄 관(觀)하여 비(悲)를 일으켜 물(物)을 교화한다. 「심성(心性)과 근진(根塵)이 모두 환화(幻化)에서 인(因)한 것인 줄 알아서, 곧 모든 환지(幻智)를 일으켜서 환자(幻者)를 제거한다」는 것은, 곧 앞의 ‘사마타’의 「모든 생각을 맑히는 것을 말미암아 식심(識心)이 번거로이 움직임을 깨닫는다. 정혜(靜慧)가 발생하면, 신심(身心) 객진(客塵)이 이로부터 영원히 소멸한다」는 문장을 이은 것이고, 다만 「모든 환(幻)을 변화하여 환중(幻衆)을 개오(開悟)시킨다」는 구절이 홀로 이 ‘삼마발제’에 해당한다. 「저 환(幻)을 관(觀)하는 자(者)는 환(幻)과 같지 않다」는 것은, 다시 앞의 ‘사마타’의 「모든 생각을 맑히는 것을 말미암아 식심(識心)이 번거로이 움직임을 깨닫는다」는 문장을 이었다. 즉, 만일 생각을 맑히지 않으면 신심(身心)이 온전히 환화(幻化)와 같으므로 식(識)의 번동(煩動)을 능히 깨닫지 못하거니와, 모든 생각을 맑히면 「환화(幻化)와 같지 않으므로」 식(識)의 번동(煩動)을 능히 깨달아서 따라가지 않으니, 아래의 ‘선나’에서 소위 「환화(幻化)를 취(取)하지 않는다」 한 것이 곧 차문(此文)을 이었다. 「환(幻)과 같지 않은 관(觀)도 모두 이 환(幻)인 고로 환상(幻相)을 영원히 여읜다」는 것이 이 ‘삼마발제’에 해당한다. 비록 신심(身心)이 환화(幻化)임을 관(觀)하여 정관(靜觀)을 이루지만, 정관(靜觀)도 필경에 모두 이 환(幻)이므로, 「정상(靜相)도 영원히 여의어야 바야흐로 환관(幻觀)을 이룬다.」고 말한 것이다. 소위 「환상(幻相)을 영원히 여읜다」란 것은 정상(靜相)도 또한 여읨을 말함이니, 아래에서 이른바 「정상(靜相)을 취(取)하지 않는다」함이 곧 이 뜻을 이어받은 것이다. 환관(幻觀)이 앞의 정관(靜觀)을 인(因)하여 이루어지므로, 문세(文勢)가 이와 같다.
[감산직해] 이것은 이른바 가관(假觀)의 행상(行相)을 제시했다. 「심성(心性)」은 식(識)이다. 깨달은 바인 정원각심(淨圓覺心)으로 지조(智照)를 일으켜, 저 식(識)과 근(根)과 진(塵)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고 「무명(無明)이 변현(變現)한 것」인 줄을 조견(照見)하여, 비록 유(有)이나 성품이 항상 스스로 공(空)하므로, 「모두 환화(幻化)에서 인(因)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환화(幻化)」란 지말무명(枝末無明)을 가리킨다. 이미 자기의 식(識)과 근진(根塵)이 모두 환화(幻化)임을 알고 있으므로, 모든 중생을 일일이 환화(幻化)와 같이 보니, 「곧 모든 환(幻)을 일으켜서, 환자(幻者)를 제거한다」고 했다. 「모든 환(幻)」은 환지(幻智)를 말하고, 「환자(幻者)」는 근본무명(根本無明)을 말한다. 즉 여환(如幻)인 시각(始覺)의 지혜(智慧)로 근본무명(根本無明)을 돈파(頓破)한다. 「변화(變化)한다」등(等)은, 무명(無明)을 제거하면 자연히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업용(業用)이 있으므로, 「모든 환(幻)을 변화(變化)하여 환중(幻衆)을 개오(開悟)시킨다」고 했다. 널리 중생을 제도(濟度)하는 불사(佛事)를 짓거나, 십계(十界)에 몸을 나투거나, 널리 일체(一切)에 감응(感應)하는 것들이 바로 「진(眞)에서 나와 가(假)를 건져내는」 행상(行相)이다. 「환(幻)을 일으키기 때문에」 등등(等等)은, 이미 진여(眞如)를 증득(證得)하여 진여(眞如)에서 중생을 이롭게 하는 사업(事業)을 일으켜서, 동체대비(同體大悲)로 중생을 널리 교화하지만, 「중생(衆生)의 모습」을 취(取)하지 않는다. 따라서 「대비경안(大悲輕安)을 능히 발(發)한다.」고 한다.
「일체 ‘보살’이 이렇게」 이하(以下)는, 관행(觀行)이 「증진(增進)」하는 모습을 말했다. 자성(自性)을 증득(證得)했으나 아직 원만(圓滿)하지 못하고, 무명(無明)을 아직 깨끗하게 없애지 못하여, 점점 깊이 들어가므로 「점차(漸次)」라 한다. 주객(主客)을 잊지 않았으므로, 먼저 객관(客觀)인 경계(境界)를 털어버려도, 주관(主觀)인 지혜(智慧)가 아직 남아 있으므로, 「저 환(幻)을 관(觀)하는 자(者)는 환(幻)과 같지 않다.」고 했다. 「저 환(幻)을 관(觀)하는 자(者)」에서 「관(觀)」은 주관(主觀)인 지혜(智慧)이고, 「환(幻)」은 객관(客觀)인 경계(境界)인데, 진지(眞智)만 홀로 존재하므로 「환(幻)과 같지 않다.」는 것이다. 객관(客觀)이 이미 허망(虛妄)하니, 주관(主觀)도 또한 없어지는데, 만일 주관(主觀)인 능관(能觀)이 남아 있다면, 환(幻)을 여읜 것이 아니므로, 「환(幻)과 같지 않은 관(觀)도 모두 환(幻)이다」고 했다. 이에 주객(主客)과 능소(能所)를 둘 다 잊고, 경계(境界)와 지혜(智慧)가 함께 끊어지면, 오직 하나인 진심(眞心)이므로, 「환상(幻相)을 영원히 여읜다.」고 했다.
「이 모든 ‘보살’의」 이하(以下)는, 증진(增進)하는 모습을 비유한 것이다. ‘보살’의 관행(觀行)으로 경(境)과 지(智)를 모두 잊고, 일진(一眞)이 독립(獨立)하면, 법신(法身)이라는 진지(眞地)의 흙에 지혜의 종자(種子)인 영묘(靈苗)라는 싹이 점점 증장(增長)한다. 「흙」은 법신(法身)인 진지(眞地)에 비유하고, 「싹」은 본각(本覺)인 진여(眞如) 종자(種子)와 같고, 관지(觀智)가 점점 밝아지는 것은 「싹이 자라는 것」과 같다.
끝으로 관(觀)의 이름을 말한다. 범어(梵語)인 ‘삼마발제’는 등지(等至)나 등지(等持)로 번역하니, 성인(聖人)의 지위(地位)에 능히 도달(到達)하게 되기 때문이다.
[경] 선남자(善男子)야. 만일 ‘보살’이 정원각(淨圓覺)을 깨치고 나서, 깨끗한 각심으로, 환화(幻化)와 정상(靜相)을 취하지 않는다.
신심(身心)이 모두 괘애(罣礙)가 되는 줄을 요지(了知)하고, 지각명(知覺明)이 없어, 모든 장애(障礙)를 의지하지 아니하므로, 영원히 유애(有礙)와 무애(無礙)의 경계를 초과(超過)한다.
수용(受用)하는 세계(世界)와 신심(身心)이 서로 티끌 세상에 있는 것이, 마치 종고(鐘鼓) 소리가 밖으로 울려나가는 것과 같으니, 번뇌(煩惱)와 ‘열반’이 서로 장애(障礙)가 되지 않으므로, 문득 안으로 적멸경안(寂滅輕安)을 능히 발한다. 묘각(妙覺)을 수순(隨順)하는 적멸(寂滅)의 경계(境界)는 자타(自他)나 신심(身心)으로 능히 미치지 못하니, 중생(衆生)과 수명(壽命)이 모두 부상(浮想)과 같다.
이 방편(方便)은 ‘선나(禪那)’라고 부른다.
善男子(선남자)若諸菩薩(약제보살)悟淨圓覺(오정원각)以淨覺心(이정각심) 不取幻化(불취환화)及諸淨相(급제정상)了知(요지)身心(신심)皆爲罣礙(개위괘애)無知覺明(무지각명)不依諸礙(불의제애)永得超過礙無礙境(영득초과애무애경)受用世界(수용세계)及與身心(급여신심)相在塵域(상재진역)如器中鍠聲(여기중굉성)出于外(출우외)煩惱涅槃(번뇌열반)不相留礙(부상류애)
便能內發寂滅輕安(변능내발적멸경안) 妙覺隨順(묘각수순)寂滅境界(적멸경계)自他身心(자타신심)所不能及(소불능급)衆生壽命(중생수명)皆爲浮想(개위부상) 此方便者(차방편자)는 名爲禪那(명위선나)이니라
[함허해] 이미 원각(圓覺)이 공(空)도 아니고 가(假)도 아니로되, 공(空)에 사무치고 가(假)에 사무침을 깨달으면, 성상(性相)과 진망(眞妄) 등(等)의 모든 상대(相對)를 취(取)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는다. 각(覺)은 가(假)가 아니므로 「환화(幻化)를 취(取)하지 않으며」, 또 공(空)이 아니므로 「정상(靜相)을 취(取)하지 않는다」. 즉, 각(覺)은 가(假)가 아니므로 「신심(身心)이 모두 괘애(罣碍)가 되는 줄 요지(了知)한다」하며, 또 공(空)이 아니므로 「지각(知覺)이 없는 명(明)」이다. 「신심(身心)이 모두 괘애(罣礙)가 되는 줄을 요지(了知)하고」는 신심(身心)이 장애(障礙)가 됨을 관(觀)하여 성공(性空)을 요달(了達)함이요, 「지각(知覺)이 없는 명(明)」은 이미 성공(性空)을 요달하고서 다시 각공지견(覺空之見)을 두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능관(能觀)이 월(月)과 같아서 명(明)을 잊지 못한다.
소위 「환화(幻化)를 취하지 않는다」함은, 앞에 나온 환관(幻觀)의 「모든 환지(幻智)를 일으켜서 환자(幻者)를 제거한다」는 제환(除幻)을 이었고, 「신심(身心)이 모두 괘애(罣礙)가 되는 줄을 요지(了知)하고」는 앞에 나온 「심성(心性)과 근진(根塵)이 모두 환화(幻化)로 인한 것인 줄 지각(知覺)한다」를 이었고, 「지각(知覺)이 없는 명(明)」은 앞의 「환상(幻相)을 영원히 여읜다」를 이었다.
「환화(幻化)와 정상(靜相)을 취(取)하지 않는다」는 행(行)의 증상(增上)으로 말한 것이요, 「신심(身心)이 모두 괘애(罣碍)가 되는 줄 요지(了知)한다」와 「지각(知覺)이 없는 명(明)」이라 함은 지(知)의 증상(增上)으로 말한 것이다.
앞에서는 지(知)가 먼저고 행(行)이 뒤이니, 이르되 「심성(心性)과 근진(根塵)이 모두 환화(幻化)로 인(因)한 줄 지각(知覺)하고, 곧 모든 환지(幻智)를 일으켜서 환(幻)된 것을 제거(除去)한다」하고는, 다시 이르되 「환(幻)과 같지 않은 관(觀)도 모두 이 환(幻)인 고로 환상(幻相)을 영원히 여읜다」하시니, 이것은 진수(進修)하는 순서이다.
지금은, 먼저 「환화(幻化)와 정상(靜相)을 취(取)하지 않은」 후에 바야흐로 「신심(身心)이 모두 괘애(罣碍)가 되는 줄 요지(了知)한다」. 또 「지각(知覺)이 없는 명(明)」이라 하시니, 행(行)이 먼저요 지(知)는 뒤이니, 후(後)를 들어 전(前)을 표(標)한다. 다만 이것은 전(前)을 이었을 뿐이지, 그 전후(前後)를 논(論)하는 것이 아니다. 「환화(幻化)와 정상(靜相)을 취(取)하지 않는다」고 한 후에, 「신심(身心)의 괘애(罣碍)를 요지(了知)한다」거나 「지각(知覺)이 없는 명(明)」이라 한다면 이치(理致)가 맞지 않다.
「모든 장애(障礙)를 의지(依支)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만 신심(身心)의 환화(幻化)만 장애(障礙)될 뿐 아니라 정관(靜觀)과 공견(空見)도 또한 장애(障礙)이므로 모두 다 의지(依支)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원히 유애(有礙)와 무애(無礙)의 경계를 초과(超過)한다」란 것은 유애(有礙)는 곧 신심(身心)의 환화(幻化)요 무애(無礙)는 곧 정관(靜觀)과 공견(空見)이니, 「영원히 초과한다」고 한 것은 신심(身心)의 환화(幻化)와 정관(靜觀)·공견(空見)의 경(境)을 모두 초과(超過)한다는 것이다. 「의지(依支)하지 않는다」등(等)은 상(上)의 「취(取)하지 않는다」등(等)의 문(文)을 결(結)한 것으로 다른 뜻이 없다. 대개 각성(覺性)이 본래 가(假)가 아닌 줄 아는 고로 환화(幻化)에 체(滯)하지 않고 정관(靜觀)을 이루며, 또 각성(覺性)이 본래 공(空)이 아닌 줄 아는 고로 정관(靜觀)에 체(滯)하지 않고 환관(幻觀)을 이룬다. 한편 각성(覺性)이 공(空)이지만 가(假)에 사무친 줄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정관(靜觀)에 체(滯)하지 않되 또한 환화(幻化)와 같으니, 곧 「세계(世界)와 신심(身心)이 서로 티끌 세상에 있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또 각성(覺性)이 가(假)이지만 공(空)에 사무친 줄을 알고 있기 때문에, 환관(幻觀)에 체(滯)하지 않되 또한 정상(靜相)과 같으니, 마치 「종고(鐘鼓) 소리가 밖으로 울려나가는 것과 같다」고 한 것이다. 소위 「수용(受用)하는 세계(世界)와」 등(等)은 앞의 환관(幻觀)에 있던 「모든 환(幻)을 변화(變化)하여」라는 문(文)을 이었다. 오직 「종고(鐘鼓) 소리가 밖으로 울려나가는 것과 같다」는 말이 홀로 이 ‘선나’(禪那)에 해당한다. 이 제삼관문(第三觀門)은 정관(靜觀)에 체(滯)하지 않고서 환화(幻化)와 같으므로, 「번뇌(煩惱)가 장애(障礙)되지 않는 것」이요, 환관(幻觀)에 체(滯)하지 않고서 정상(靜相)과 같으므로 「‘열반’도 장애(障礙)가 되지 않는 것」이니, 「번뇌(煩惱)와 ‘열반’이 서로 장애(障礙)가 되지 않으므로, 적멸경안(寂滅經安)이 현전(現前)한다」. 「적(寂)」은 적정(寂靜)의 적(寂)이요, 「멸(滅)」은 환멸(幻滅)의 멸(滅)이다. 앞에는 정관(靜觀)을 이루되 다시 정상(靜相)을 취(取)하지 않더니, 지금은 정상(靜相)을 취(取)하지 않되 도리어 정상(靜相)과 같다. 앞에는 환화(幻化)를 멸(滅)하고서 도리어 환화(幻化)와 같더니, 지금은 환화(幻化)와 같되 도리어 환화(幻化)를 멸(滅)한다. 그래서 이른바 「적(寂)」은 도리어 적정(寂靜)의 적(寂)과 같고, 이른바 「멸(滅)」은 도리어 환멸(幻滅)의 멸(滅)과 같다고 한다.
삼관(三觀)에서 각각(各各) 「경안(輕安)」이라고 말함은 그 까닭이 무엇인가? 「환화(幻化)가 멸(滅)하지 않으면」 시끄러운 곳에 처(處)하여 요동(揺動)하며 신심(身心)이 추중(麁重)하므로 안한(安閑)을 얻지 못하지만, 「환화(幻化)가 영멸(永滅)한다면」 한결같이 적정(寂靜)한 것에 명합(冥合)하여 신심(身心)이 경청(輕淸)하므로 바야흐로 안한(安閑)을 얻으니 이것이 이른바 「적정경안(寂靜輕安)」이다. 비록 환(幻)을 여의어 정(靜)하나, 만일 정관(靜觀)에 체(滯)하여서 비(悲)를 일으켜 물(物)을 화도(化度)하지 않으면, 지견(知見)이 편국(偏局)하여 신심(身心)도 또한 경안(輕安)하지 못하다. 「환(幻)을 능히 여의어」 곧 정(靜)하되, 정관(靜觀)에도 체(滯)하지 아니하여서 비(悲)를 일으켜 물(物)을 화도(化度)한다면, 지견(知見)이 원만(圓滿)하여 신심(身心)이 경안(輕安)을 얻으니, 이것이 이른바 「대비경안(大悲輕安)」이다. 만일 정관(靜觀)에 체(滯)하지 않으나 또한 정상(靜相)과 같지 않고, 이미 환화(幻化)와 같으나 또한 환화(幻化)를 멸(滅)하지 않는다면, 「지견(知見)이 자재(自在)하지 못하므로」 신심(身心)도 또한 경안(輕安)하지 못하다. 이미 정관(靜觀)에 체(滯)하지 않되 또한 정상(靜相)과 같고, 이미 환화(幻化)와 같되 또한 환상(幻相)을 멸(滅)한다면, 「지견(知見)이 비로소 자재(自在)하므로」 신심(身心)이 경안(輕安)을 얻으니, 이것이 이른바 「적멸경안(寂滅輕安)」으로 「묘각(妙覺)에 수순(隨順)하는 경계(境界)」이다. 이 경계는 모습이 모두 없어지고, 혹(惑)이 모두 멸(滅)하여, 안한(安閑)하며 정정(淨靜)하고 묘담(妙湛)하며 원명(圓明)하여, 자타신심(自他身心)과 아인(我人)등 사상(四相)이 능히 미칠 바가 아니다. 자타(自他)가 있는 줄 보아서 증애(憎愛)에 빠지면, 신심(身心)이 추중(麁重)하여 경안(輕安)하지 못하므로 능히 적멸(寂滅)의 경계(境界)에 미치지 못한다. 사상(四相)이 저 경계(境界)에서는, 마치 부운(浮雲)이 허공에 있는 것과 같아서, 서로 교섭(交涉)할 분(分)이 없으니, 이것이 이 ‘선나’(禪那)의 관(觀)이다. 소위 ‘선나’(禪那)란 것은 적멸(寂滅)을 말한 것이다.
[감산직해] 이것은 이른바 중관(中觀)의 행상(行相)을 제시했다. 소위 깨달은 바 정원각심(淨圓覺心)으로 관행을 건립(建立)하되, 중도(中道) 일심(一心)을 직관(直觀)한다. 밖으로 경계(境界)를 잊으므로 「환화(幻化)를 취하지 않는다」고 하고, 안으로 지혜(智慧)를 잊으므로 「정상(靜相)을 취하지 않는다」고 한다. 경계(境界)와 지혜(智慧)를 함께 잊으면 신심(身心)이 적멸하니, 모든 장애(障礙)가 없으므로, 「요지(了知)한다」고 한다. 「지각명(知覺明)」은 근본무명(根本無明)을 가리키는데, 주객(主客)을 이미 잊으면 능소(能所)가 없으니, 무명(無明)이 깨끗이 없어져서, 「지각명(知覺明)이 없다」고 한다. 경(境)과 지(智)가 구공(俱空)하므로 「모든 장애(障礙)를 의지하지 아니한다」고 했다. 경계(境界)를 여의므로 「유애(有碍)를 초월한다」하고, 지혜(智慧)를 여의므로 「무애(無礙)를 초월한다」하고, 필경(畢竟)에 적멸(寂滅)하므로 「영원히 초과(超過)한다」고 했다. 「굉(鍠)」은 종(鐘)소리니 비록 체질(體質)이 있으나 그 소리가 멀리까지 퍼지는데 장애(障礙)가 없다. 크기는 작지만 소리는 큰 것으로, 「장애(障礙)가 있는 곳에서 능히 무애(無礙)하다」는 특성(特性)을 밝히셨다. 즉 심(心)과 경(境)을 잊지 못하면 「신심(身心)과 세계(世界)」가 장애(障礙)가 되지만, 이제 법신(法身)을 깨치고 보니, 환망(幻妄)인 「심신(心身)과 세계(世界)」가 법신(法身)에 장애가 되지 않으므로, 「수용(受用)하는 세계(世界)와 신심(身心)이 서로 티끌 세상에 있는 것이, 마치 종고(鐘鼓) 소리가 밖으로 울려나가는 것 같다」고 했다. 이는 법신(法身)은 장애(障礙)에서 벗어난 것임을 비유한 것이다. 번뇌(煩惱)는 생사(生死)하는 법(法)이니 신심(身心)과 세계(世界)이고, ‘열반’은 이지(理智)이니 유일(唯一)한 진심(眞心)이므로, 「생사(生死)와 ‘열반’은 서로 장애(障礙)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문득 안으로 적멸경안(寂滅輕安)을 능히 발(發)한다」 이하(以下)는, 관행(觀行)이 이익을 이루는 모습을 말했다. 생멸(生滅)이 이미 소멸하면 적멸(寂滅)이 현전(現前)하고, 삼덕(三德)을 원만하게 증득하면 ‘열반’이 항상 즐겁기에 「적멸경안(寂滅輕安)」을 말했다. 마음마음으로 묘각(妙覺)의 적멸(寂滅)에 수순(隨順)하므로 「자타(自他)나 신심(身心)으로 능히 미치지 못하니, 중생(衆生)과 수명(壽命)이 모두 부상(浮想)과 같다.」고 했다. 이것은 이장(二障)을 영원히 끊고 이사(二死)를 영원히 잊는 것이니, 소위 구경일심(究竟一心)을 극증(極證)한 것이다.
[경] 선남자(善男子)야. 이 삼법문(三法門)이 모두 원각(圓覺)에 친근(親近)하게 수순(隨順)하는 것이니, 시방(十方)의 여래(如來)께서 이것을 인(因)하여 성불(成佛)하셨으며, 시방(十方) ‘보살’의 여러 가지 방편(方便)들의 같고 다른 일체가 모두 이러한 삼종(三種) 사업(事業)을 의지(依支)하니, 만일 원증(圓證)을 얻으면 곧 원각(圓覺)을 이룬다.
선남자(善男子)야. 가령 어떤 사람이 성도(聖道)를 닦아 백천(百千) 만억(萬億) ‘아라한’과 벽지불(辟支佛)의 과위(果位)를 교화하여 성취(成就)하게 하여도, 어떤 사람이 이 원각(圓覺)의 무애법문(無礙法門)을 듣고 ‘찰나’동안 수순(隨順)하여 닦아 익히는 것만 같지 못하다.
善男子(선남자)此三法門(차삼법문)皆是圓覺親近隨順(개시원각친근수순) 十方如來(시방여래)因此成佛(인차성불)十方菩薩(시방보살)種種方便一切同異(종종방편일체동이)皆依如是三種事業(개의여시삼종사업)若得圓證(약득원증)卽成圓覺(즉성원각) 善男子(선남자)假使有人(가사유인)修於聖道(수어성도)敎化成就百千萬億阿羅漢辟支佛果(교화성취백천만억아라한벽지불과)不如有人(불여유인)聞此圓覺無礙法門(문차원각무애법문)一刹那頃(일찰나경)隨順修習(수순수습)
[함허해] 삼관(三觀)이 전전(前前)은 후후(後後)를 거두지 못하지만, 후후(後後)는 반드시 전전(前前)을 거둔다. 전전(前前)이 후후(後後)를 거두지 못하므로, 제일관(第一觀)중에 제이관(第二觀)의 뜻을 말하지 않았으며, 제이관(第二觀)중에 제삼관(第三觀)의 뜻을 말하지 않았다. 후후(後後)가 반드시 전전(前前)을 거두므로, 제이관(第二觀)중에서 제일관(第一觀)인 정관(靜觀)의 문(文)을 이어서 관의(觀義)를 설명했고, 제삼관(第三觀)중에도 또한 먼저 정(靜)·환(幻) 이관(二觀)의 문(文)을 이어서 관의(觀義)를 설명했다. 이 삼법문(三法門)이 「모두 원각(圓覺)을 수순(隨順)하는 방편(方便)으로, 시방(十方)의 여래(如來)께서 이를 인(因)해 성도(成道)하시고, 시방(十方) ‘보살’이 이를 의지하여 수증(修證)하시니」, 만일 이 삼관(三觀)에서 일행(一行)만 편수(偏修)하면 능히 진수순(眞隨順)을 이루지 못한다. 모름지기 통수(通修)하고 원증(圓證)한 연후(然後)에 비로소 진수순(眞隨順)이 되니, 원각(圓覺)의 묘경(妙境)에 도달하고자 하면 반드시 이 문(門)을 따라 들어가야 한다. 만일 이 문을 따라 들어가면 저 묘경(妙境)에 나갈 때에 장애(障礙)될 것이 없으므로 「무애법문(無碍法門)」이라고 하니, 「누구든지 이를 듣고 잠시(暫時)라도 능히 수습(修習)한다면, 그 공(功)이 천억(千億)의 이승(二乘)을 성취(成就)하게 하는 것보다 월등(越等)하다」.
[감산직해] 이것은 방편(方便)의 점차(漸次)를 총결(總結)했다. 「이 ‘세 가지 법문’은 원각(圓覺)에 수순(隨順)하고 친근(親近)하는 방편(方便)이니, 곧 여래(如來)의 인지(因地)요, 여러 ‘보살’의 만행(萬行)이다」. 혹 점차(漸次)가 있고 혹 편원(偏圓)이 있지만, 모두 이 ‘세 가지 사업’에 의지한다. 단복(單複)과 원수(圓修)가 있지만, 「만일 일념(一念)에 원증(圓證)하면 곧 원각(圓覺)을 이룬다」.
「선남자야. 가령, 어떤 사람이」 이하(以下)는, 수행(修行)의 뛰어남을 말했다. 편원(偏圓)으로 수습(修習)하는 것이 날로 달로 많아져서 가르침에 이승(二乘)이 많으니, 잠시(暫時)라도 이 법문(法門)을 듣는 것만 같지 못하다. 이 법문은 성불(成佛)하는 정인(正因)이기 때문이다.
[경] 저 때에 세존(世尊)께서 거듭 이 뜻을 베풀고자 게송(偈頌)을 설하여 말씀하신다.
爾時(이시)世尊(세존)欲重宣此義(욕중선차의)而說偈言(이설게언)
위덕(威德)아 위없는 본바탕 모두가 수효가 여래(如來)가 세 가지 적정(寂靜)인 거울로 여환(如幻)인 새싹이 ‘선나’는 그릇의 세 가지 모두 다 시방(十方)의 그 모든 이렇게 삼사(三事)를 구경(究竟)의 |
응당 알아라. 대각심(大覺心)에는 이상(二相)이 없되, 방편(方便)을 따라 한량(限量)이 없다. 개시(開示)하시니 종류(種類)가 있다. ‘사마타’관(觀)은 상(像)비춤 같고, ‘삼마발제’는 자람과 같고, 오직 적멸(寂滅)해 소리와 같다. 묘(妙)한 법문(法門)이 각(覺)에 수순(隨順)해. 모든 여래(如來)와 대(大)‘보살’까지 도(道)를 이룬다. 원증(圓證)하므로 ‘열반’이로다. |
威德汝當知(위덕여당지) 無上大覺心(무상대각심) 本際無二相(본제무이상) 隨順諸方便(수순제방편) 其數卽無量(기수즉무량) 如來總開示(여래총개시) 便有三種類(변유삼종류) 寂靜奢摩他(적정사마타) 如鏡照諸像(여경조제상) 如幻三摩提(여환삼마제) 如苗漸增長(여묘점증장) 禪那唯寂滅(선나유적멸) 如彼器中鍠(여피기중굉) 三種妙法門(삼종묘법문) 皆是覺隨順(개시각수순) 十方諸如來(십방제여래) 及諸大菩薩(급제대보살) 因此得成道(인차득성도) 三事圓證故(삼사원증고) 名究竟涅槃(명구경열반) |
[함허해] 각(覺)은 본래 무이(無二)이나, 방편(方便)은 무량(無量)하며, 무량(無量)한 방편(方便)을 「삼관(三觀)으로 능히 거둘 수 있다」. 정관(靜觀)은 정명(淨明)한 거울과 같고, 환관(幻觀)은 묘(苗)의 증장(增長)과 같고, 선관(禪觀)은 그릇 속의 소리와 같다. 이 세 가지 법문(法門)이 비록 심천(深淺)이 있으나, 모두 원각(圓覺)에 수순(隨順)한다. 부처님과 ‘보살’이 이로써 도(道)를 성취(成就)하시니, 세 가지 관(觀)이 모두 다 원증(圓證)이므로 대‘열반’(大涅槃)이라 부른다.
[감산직해] 세 가지 관행(觀行)과 그 행상(行相)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