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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후는 만주 귀족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전란으로 인하여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많은 고생을 하였다. 그리하여 어릴 때부터 황궁에 들어가 부귀영화를 누릴 것을 고대하였다. 그러다가 17살에 수녀(궁녀)로 뽑히어 황궁에 들어갔고 후에는 제7대 함풍황제의 황귀비로 되었고 제8대 동치황제의 생모로 되었고 제9대 광서황제의 이모로 되었던 것이다.
제7대 함풍황제는 아들이 하나밖에 없었는데 바로 서태후와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함풍황제가 죽은후 서태후가 낳은 6살난 아들이 황제로 되면서 서태후는 황비에서 황태후로 되었다. (그리하여 28세부터 수렴청정하기 시작하였는데 중국을 통치한 시간이 거의 48년이나 된다. 서태후의 이름은 나라씨였는데 황제의 황후가 동쪽채에 살았기에 동태후, 황비로 있던 나라씨가 서쪽채에 살았기에 서태후라고 부르게 되었다.)
청나라는 만주족이 건립한 나라였고. 만주족은 8기제도를 실시하였는데 상3기, 하5기로 나누는데 서태후의 가정은 상3기에 속했다. 귀족 집안이었다. 17살에 황궁에 들어간 서태후는 황제의 총애를 받기 위해 일년동안 노력하였다. 그러던 어느 하루 그는 황제의 내시들에게 부탁하여 황제가 산책할 무렵 준비하고 있던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서태후는 노래를 잘 불렀는데 황태후로 된 후부터 매일 경극을 보았고 중국의 경극발전에 아주 큰 기여를 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산보를 하던 황제가 은은한 노래소리를 따라 찾아가보니 웬 이쁘장하게 생긴 여인이 사색에 잠겨 노래를 불렀는데 이때로부터 서태후를 알게 되었고 (황궁에 궁녀, 황비가 너무 많기 때문에 황제의 눈에 들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그리고 왕자를 출산했다. 역사에 의하면 함풍황제 생전에 서태후는 그렇게 총애를 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서태후가 48년이나 중국을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은 서태후가 함풍황제의 유일한 아들을 낳아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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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 영국군이 중국을 침략 했을때 함풍황제는 열하로 도망가 병들어 죽고 말았다.(중국의 황제들과 우리나라의 왕들은 주색을 너무 즐긴 까닭인지 수명이 다 길지 못하다.) 결국에는 동태후가 제1태후 서태후가 제2태후였고. 동태후는 동치황제의 양모였고 서태후는 동치황제의 생모였다. 즉위한 동치황제의 나이는 겨우 여섯살밖에 되지 않았기에 두 태후가 수렴청정하기 시작하였는데 또한 두 사람의 태도는 완전히 달랐다. 서태후는 야심가였으며 정치에 흥취를 가졌고 동태후는 정치에 흥미가 없었던 것이다. 인자하고 사리 밝은 동태후때문에 서태후는 대신들한테도 환심을 살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이때 부터 서태후는 동태후를 미워하게 되고, 6살에 즉위한 동치황제가 17살이 되자 결혼하고 두 태후의 수렴청정을 끝내기로 결정했지만, 동치황제 자신도 생모인 서태후의 성격을 닮아서인지 폭주가이고 성격도 날카로왔다. 그 후 생모인 서태후는 항상 정치만 관심하고 무슨일이나 보고를 받기를 원했고 아들의 주관되로 결정을 못하게 하다보니 충돌이 많았고 동태후는 조용했다.
그러니 동치황제는 차츰 생모인 서태후를 멀리하고 동태후를 가까이하게 되었다. 그리고 황후를 택할때도 동치황제는 양모인 동태후가 좋아하는 여인을 황후로 맞았고, 이런 일들로 서태후는 동태후 때문에 자기와 친아들사이의 관계도 벌어진다고 동태후를 눈에 든 가시처럼 생각했다.
결국 동태후는 서태후에 의해 살해되고 모순의 충돌이 어디서 일어났는가 하면 어느해 추석날 동태후, 서태후는 궁중에 사람들을 거느리고 함풍황제의 릉에 제사 지내러 갔다. 제사 지낼때 동태후는 서태후더러 한발자욱 뒤에 서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함풍황제 생전에 동태후는 중궁태후(제1황후)고 서태후는 황비였기 때문이었다.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수치를 당했다고 생각한 서태후는 동태후를 죽이려고 결심하였다. 황궁에 돌아온 서태후는 아무리 생각해도 분이 사라지지 않았지만 반면에 한가지 무서운 생각이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함풍황제가 죽기전에 동태후한테 준 밀서였다.
서태후의 됨됨이를 알고 있는 함풍황제는 서태후가 자기아들이 황제로 되었다 하여 동태후를 무시하면 이 밀서의 내용대로 서태후를 죽여 버리라는 것이었다. 이 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마침 동태후가 감기로 앓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서태후는 한가지 꾀가 생각났다. 동태후의 병이 나은 후 서태후는 동태후를 보러갔다. 동태후는 서태후의 팔에 감긴 붕대를 보고 도대체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다. 이때라고 생각한 서태후는 나오지 않는 눈물을 흘리면서
"언니가 몸져 눕자 너무 안타까워 점을 쳤더니 그 점쟁이가 하는 말이 중약에 사람 피를 타서 먹으면 곧 나아질 거라고 해서 내피를 중약에 넣어 언니한테 대접했더니 과연 언니의 병이 나아졌다고 했다. 원래부터 마음이 약한 동태후는 이 말에 감동되여 눈물을 흘리며 동생이 이토록 나를 생각하는데 무엇으로 보답하겠는가 하면서 함풍황제가 준 밀서를 꺼내어 불에 태워 버렸다.
그후부터 서태후의 태도는 180도로 틀려졌는데 동태후는 후회하였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한번은 서태후가 몸져 누웠다. 동태후는 서태후를 보러 몇번 다녀왔는데 서태후의 태도는 웬 일인지 친절해졌다. 그러던 어느날 몸져누운 서태후가 동태후한데 전병을 보내왔는데 동태후는 그 전병을 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던 것이다. 동태후가 죽었다는 소식이 궁중에 전해지자 많은 사람들은 소식이 잘못되지 않았는가 의심하였다. 무엇때문인가 동태후는 몇 일 앓지도 않고 동태후가 죽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 동치황제가 황후를 택할때 자기 의도대로 하지 않았다하여 황제와 황후의 접촉을 자주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동치황제의 황후를 핍박했다.
이에 너무나도 실망한 동치황제는 타락하기
시작했는데 밤이면 변복을 하고 몰래 기생집을 드나들었다고 한다. 얼마 후 병(天花)들어 죽고 말았다. 아들이 죽자 서태후는 자기가 계속 수렴청정하기 위하여 남편을 핍박해 죽였다는 죄명으로 동치황제의 황후를 죽인다. 그리고 또 3살밖에 안되는 광서황제를 자리에 올려놓고 수렴청정을 계속한다 (광서황제는 서태후의 여동생과 서태후의 시동생이 낳은 아들이다.)
후에 광서황제가 19살이되자 서태후와 정치상 충돌이 있었고 서태후는 보수파의 대표로서 실권을 장악하였다. 광서황제는 유심파인 강유희, 양계초, 담사동 등 사람들의 지지하에 유심파에 의해 군정 실권을 잡으려 하였고 개혁을 하려 하였다, 이리하여 1898년에 "유심변법"을 실시하였는데 이를 무술변법이라고 하였다. 허나 103일만에 변법은 서태후에 의해 진압되었고 담사동 등 개혁파는 살해되었고 강유희, 양계초 등은 외국으로 망명하였으며 광서황제는 요즘의 가택연금으로 생활했다. 광서황제가 갇혀 있던 곳은 여름에는 이화원의 옥판당이었고 겨울에는 중남해의 영대였다. 광서황제는 10년간 같혀 있었으며 1908년 서태후가 죽기 하루전에 서태후에 의해 살해되었다.
서태후는 극히 부와 타락한 생활을 하였는데 예를 들면 한 식탁은 먹는 것이고 한 테이블은 상상만 하는 것이었다. 서태후의 한끼 식사는 주식이 60가지 점심(짝은 빵)이 30가지 각종 산해진미가 128가지였다. 서태후의 하루 식사비는 백은으로 3kg 들었는데 그 당시 이돈으로 5000kg의 쌀을 살 수 있었으며 만명의 농민이 하루를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옷만 해도 3000여 상자가 있었는데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바꿔입는 사치꾼이었고, 또한 아주 거짓투성이었는데 자기의 존엄을 위하여 줄곧 이화원에 전화 설치하는 것을 동의하지 않았다 서태후의 말에 의하면 전화하는 사람이 무릎꿇고 전화하는지 앉아서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궁녀, 내시, 대신들은 서태후를 무척 무서워 했는데 광서황제의 아버지는 광서황제를 황제로 올려놓는다는 말에 기뻐하질 못하고 무서워서 부들부들 떨었다고 한다. 그리고 내시들이 사태후의 머리를 빗겨 주었는데 머리카락 하나만 떨어져도 목이 달아난다고 했다. (정상적 사람이 하루에 머리카락 50개 빠지는건 정상)그래서 이련영이라는 내시는 머리를 빗을 때면 소매가 넓은 옷을 입고 빗었는데 서태후의 빠진 머리카락이 모두 소매 안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서태후는 빠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서태후는 아주 잔혹했는데 한 내시의 일기에 의하면 한번은 한 늙은 내시가 실수를 범했다 해서 인분을 억지로 먹였다고 한다. 서태후 자신은 매일 저녁 애기 엄마의 젖을 먹는데 매일 저녁 두 애기 엄마는 목욕을 한 후 몸에 붉은 천을 감는데 젖만 내놓고 다 감싸고 서태후가 침대에 눕고 젖먹이는 애기엄마는 무릎을 꿇고 젖을 먹도록 했다. 중국에 여인들이 남자한데 쎈양하는 풍습이 아마도 서태후한데서 전해졌는가 본다.
서태후의 생애에 가장 유감스러웠던 것은 자금성의 정문인 오문의 중간문으로 들어가 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 뜻인 즉 서태후가 비록 48년이나 중국을 통치했지만 황제도 아니었고 황후도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오문의 중간문은 황제만 드나들 수 있으며 황제의 결혼식 날 황후의 가마만이 들어갈 수 있는 문이다
이화원(颐和园, Summer Palace)
이화원(颐和园)은 북경 서북쪽에 자리 잡고 있는 황실의 정원으로, 여름궁전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다. 중국의 역대 제왕들은 모두 서산(西山)의 아름다움을 좋아했다. 평생 강남(양자강 이남 지역)을 사랑했던 청나라 건륭 황제는 비록 강남의 풍경과 정원을 북경에 옮겨오지는 못 했지만 무미건조한 북경을 아름답게 바꾸었다.
그는 15년의 세월을 들여 이화원을 지었다. 290만㎡의 아름답고 방대한 이 조경림을 “청의원(清漪园)”으로 불렀다. 그러나 1860년,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의 공격으로 인해 이화원은 원래의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폐허만 남게 되었다. 1888년 서태후는 해군에 할당된 군사자금 3000만 냥의 은화를 이용하여 폐허가 된 “청의원(清漪园)” 위에 이화원(颐和园)을 재건한다. 12년 후, 8국 연합군이 다시 북경을 공격하여 이화원은 또 한 번 비극을 맞이한다. 그러나 서태후는 주저하지 않고 다시 거액의 돈을 들여 복구를 하였다.
① 곤명호(昆明湖)
이화원의 아름다움은 “곤명호(昆明湖)”에서 절정을 이룬다. 천천히 다리를 건너 곤명호 주변을 걷노라면 수양버들이 얼굴을 스치는 것이 ‘杨柳岸晓风残月(양류안효풍잔월-수양버들 드리운 언덕에 새벽바람 불어오고, 희미한 달빛이 남았구나)’라는 시 구절이 절로 튀어나온다. 곽여정(廓如亭), 지춘정(知春亭), 봉황돈(凤凰墩), 청안방(清晏舫)은 이러한 시적 풍경을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옮겨놓고 있다. 삼국지 속 이야기 같은 다양한 그림이 그려진 천 미터에 달하는 긴 회랑을 걷고 있으면 어느 순간 그림 속 주인공이 된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다.
② 만수산(萬壽山)
만약 곤명호만 있고 만수산(萬壽山)이 없었더라면, 이화원은 오늘날처럼 산색과 물빛이 어우러진 분위기를 만들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만수산은 60m 높이이다. 위엄 있는 자태 속에 호화스러움이 가득한 모습이다. 만수산 입구에는 배운문(排雲門)이 관광객을 환영한다. 입장권을 사고 산으로 올라가면, 배운전(排雲殿)과 덕휘전(德辉殿), 불향각(佛香閣), 지혜해(知慧海)가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다. 산세에 기대어 건물을 지은 장인들의 솜씨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건물들을 따라 한번 돌고 나면 또 다른 전경이 펼쳐진다. 한걸음 올라갈 때마다 눈앞의 곤명호는 매번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기에 사람들은 이 절경에 매료된다.
③ 소주 거리(蘇州河)
만약 관광객이 적은 때라면 만수산 뒷산의 솔숲 구불구불한 오솔길을 따라가도 좋다. 산기슭 아래로 옛 강남의 대표도시 소주(蘇州)의 운하 모습을 복원해둔 “소주하(苏州河)”가 기다리고 있다. 중국의 남방문화를 북경에서도 감상할 수 있도록 복원되어 있다. 굽이굽이 흘러 바람과 벗하여 술 한 잔 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이다. 이곳에 오면 서태후가 왜 두 차례에 걸쳐 이화원을 복원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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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진 몇장으로 다 표현할 수는 없겠지만, 그 아름다움이 눈에 아른거려 몇번이고 다시 찾아갔었던 추억이 있는곳^^
소주거리는 기억이 안나는데요....중국적인 내음이 물씬풍기는 그곳을 못보았다니.......휴~아쉬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