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방은 차근차근히 짐을 챙긴다. 예식 때 신고 들어갈 희고 납작한 가죽신은 여행용 가죽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흰 장갑과 분첩을 손가방에 넣고 빽을 딱- 소리가 나게 닫았다. 전면에 박혀 있는 은행잎 무늬의 희고 검은 구슬을 섬섬옥수로 쓰다듬는다.
이렇게 이쁜 걸 어떻게 뺏겨! 큰 오빠가 일본서 사다 준 명품이다. 요것을 차지하지 못해 별 심술을 다 놓았지만 이것만은 절대로 뺏기지 않을 테야.
그녀는 입을 오므리면서 여기저기 어수선한 짐들을 둘러보며 손수건을 찾는다. 일주일 전부터 밤을 새워 만든 것이 팔십 여나문 장이다. 예단은 미리 마차에 실려 시댁으로 갔지만 부려야 할 아랫것들이 있다면 손수건으로 입막음을 하리라. 오십 장은 여자들 것이고 나머지 삼십여 장은 서방님 것이다. 여자 것에는 봉선화, 국화, 목단, 그리고 매화를 수놓았다. 그리고 서방님 것에는 소나무 사슴 거북 잉어 등의 무늬를 놓았던 것이다.
옥양목을 규격만큼 잘라 씨줄과 날줄을 서너 개씩 뽑아 가장자리 멋을 내고 그 안에 수를 놓은 것이다. 두 번이나 잿물을 넣어 삶아 그런지 옥양목은 백옥 같이 희다. 딱 한 번 대면한 서방님의 얼굴이 수틀 위에 자꾸 어리는 것은 무슨 조화일까. 자신의 양 볼에 홍조가 떠오른 것을 모른 채 수방은 밤을 새워 수를 놓고 놓았던 것이다.
첫 대면 하는 날 흴끗 본 신랑의 얼굴은 정말 옥양목보다 더 희었다. 중국서 공부를 하다가 들어왔다는데 신학문을 한 사람이라 그런지 시골사람에게서는 한 번도 구경 못 한 격이 다른 분위기를 느꼈던 것이다. 코까지 너무 높아 날카로워 보이기까지 하는 신랑의 얼굴이 자꾸 눈앞을 어른거리면서 그 날카롭고 격이 다른 분위기 때문에 꺼려지고 또한 그 분위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에 파문이 조금씩 이는 것을 수방 자신도 감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매화가 수 놓인 손수건을 하나 집어 손가방에 넣었다. 서울이란 어떤 곳일까? 남대문집 때문에 적지 않게 서울 나드리야 안 해 본 것은 아니지만 이웃을 사귀어 본 일이 없잖은가. 어머니와 할머니 혹은 언니들과 화신백화점을 드나들기는 했지만 서울 살림을 알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인심은 어떨까? 서울사람은 깍쟁이라는 말이 괜히 나도는 것은 아닐텐데......대체 누대에 걸쳐 불천지위를 받은 조상이 네 분씩이나 계신 종가라는데 그 대단한 가도와 법통을 어찌 받들 수 있을까? 대체 서방님은 신학문을 하지도 않은 나를 왜 선택했을까?
무거운 마음을 지우려고 그녀는 다시 짐을 챙기던 손을 놀려 널브러져 있던 손수건을 집어 차곡차곡 개킨다. 두 언니의 썩 행복하지 않은 결혼생활 때문에 정말 정신대가 난리를 치지 않았으면 끝내는 결심대로 독식으로 늙었을 텐데......
바로 그때 안채와 사랑채를 오가며 일손을 진두지휘 하는 어머니의 음성과 종종거리는 발검음 소리가 들려왔다. 체구는 작지만 참 여걸이다, 우리 어머니! 그 많은 농사를, 그 많은 누에를, 그 많은 식속들과 살림을 구멍 내지 않고 무리 없이 관리하시다니. 시할머니까지 어른들 봉양하랴, 집안의 대소사며 생활의 규모가 이만저만인가. 그러나 모든 것이 물 흐르듯이 흐르는 것을 보면 참 대단한 인물이야. 그녀는 늘 어머니가 존경스럽다는 생각을 해오고 있지만 이제 내일이면 서울에서 예식을 올리고 며 칠 후면 시작되는 막중한 시집살이가 코앞에 다가오자 더더욱 실감이 나는 것이다. 나도 그만한 역할을 해낼 수 있을까.
수방은 싸던 짐들을 휘이이 둘러본다. 아직도 다 실어가지 못한 짐들이 마루에 쌓여 있었다. 석 자짜리 호두나무 장이 다섯 짝이요, 양쪽으로 서랍이 세 개씩 여섯 개인 빼닫이와 단스, 쌍으로 된 오우크 장식장에다 부엌에 둘 차단스다. 그리고 사방 일 미터가 조금 못 되는 약장이 시댁으로 실려 갈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에 시부모님 드릴 두 쪽짜리 머리병풍, 옷가지를 개켜 넣은 고리짝이 열두 개, 신혼여행 길에 들어야 할 가죽으로 된 큰 여행 가방 하나와 작은 핸드빽이다.
그녀는 고리짝 중에서 하나를 열고 연두저고리와 다홍치마를 빼어냈다. 어디 있든지 찾기 어려울까 봐 관례벗김은 따로 빼어 가죽가방에 넣어야 맘이 편할 것 같다. 짐을 다 정리하려면 여러 날이 걸릴 테니 여행에서 바로 돌아와 입어야 할 것을 따로 챙기는 것이다.
수방이 재봉틀에 앉은지 계절이 어언 네 번이나 바뀌었다. 그동안 손수 만든 저고리와 치마가 백 벌은 되고도 남는 것 같다. 풀빛 양단에 모본단 두루마기, 오렌지색, 쥐색, 밤색, 흰색 숙고사, 남색 숙고사, 자미사와 관사로는 깨끼를 지었다. 안동포, 백당목에 신식 조셋또와 호박단과 뉴똥도 있고 한산 모시가 빠질 수 있으랴! 옷감의 종류만 해도 헤아릴 수가 없다. 구하기도 어려운 한산 모시는 세필을 더 준비했다. 원래 부농이지만 수방이 태어나고는 가산이 불일 듯 일어나 큰 부자가 되게 한 딸이라고 어르신들이 맘껏 혼수를 베푸셨던 것이다.
바느질을 도와주던 모퉁이 명돌 어멈과 기성 어멈은 물론 드나드는 아랫것들의 부러움은 그렇다 치고 바로 위 언니, 원술의 심술은 끝내 비켜갈 수 없을 거야. 그런 생각을 하는 그녀의 얼굴에 수심이 깃든다.
복둥이 따님이라고 이렇게 원 없이 혼수를 해주시니 작은 애기씨는 얼마나 좋으실까?
여기저기서 찬사가 들리는 것도 마음이 무겁기는 마찬가지다. 나라를 빼앗기고 시국이 말이 아닌데 어쩐 일로 나만이 이렇게 복을 누려도 되는 것일까. 일본 놈들은 점점 더 기세를 올리니 언제 밀정이 낭인을 끌고 들이닥칠지 몰라! 정신대로 끌려가느니 어른들 말씀을 듣는 게 낫겠지?
<다음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