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자료는 민속학자, 시인, 문인, 그리고 지역 구전자료 등을 모아서 편집한 자료임을 알려 드립니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를 찾아서
우리나라의 현대적 대중문화의 효시는 누구일까? 라는 자문이 일기 시작한다. 예전에는 많은 이들이 서구문화로부터 우리 대중문화예술의 원류를 찾고자 했다. 그러나 현재의 대중문화예술은 서구에서 파생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민중예술을 통해서 발전해온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 대중문화의 원류를 찾는 중심점에는 항상 사당패가 자리잡는다. 그리고 바우덕이라는 유일무이한 여자 꼭두쇠가 사당패를 대표한다. 즉 바우덕이는 우리나라의 대중문화를 개척한 인물로서 연예의 효시가 되는 것이다.
조선 후기 신재효에 의하여 재정립된 판소리는 우리 음악의 중요한 부분이었으나 민중을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담당하지 못하였다. 연예로 발전시킬 수 있는 개성 있는 인물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판소리 연희 자체의 형식과 참여에 있어 제한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외에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전승된 궁중음악인 아악이 있지만 종묘제례에 쓰이는 것일 뿐 대중문화와 연관을 지을 수 없었다.
그러나 사당패 중에서도 안성남사당패에는 바우덕이라는 특별한 영혼과 능력을 갖춘 개성 있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탁월한 능력으로 경복궁 중건에 동원되어 사기가 떨어진 많은 공역자들과 백성들에게 신명의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이렇게 하여 엄청난 규모의 경복궁 중건사업은 잘 마무리될 수 있었다.
아마 바우덕이가 없었다면 흥선대원군은 경복궁을 중도에 포기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바우덕이가 공연을 할 때는 얼마나 신명이 났던 지 공역자들은 등짐에 짐도 지지 않고 분주히 뛰어다니며 ‘얼쑤 얼쑤’ 흥을 어우르기만 했다는 일화로 미루어 볼 때 당시의 감흥과 신명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당시의 이 사건은 매우 큰 충격이었다. 민중이라는 개념도 없었고 대중이라는 개념도 없었던 시기에, 대중문화 특히 연예의 힘인 스타가 탄생한 것이다. 이러한 공로에 보답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은 바우덕이가 이끈 천민 집단인 안성남사당패에 당상관 정삼품의 벼슬을 내려 주었는데, 이것이 바로 안성남사당패 영기(令旗)에 걸어준 옥관자였다.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유랑 천민집단이 당상관의 고관 벼슬을 받은 것도 그러려니와 일개 놀이패에 벼슬을 내린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정삼품을 받은 사당패 깃발을 앞세우고 가면 전국의 모든 사당패가 절을 드렸다(영기를 숙여서 예의를 표시함-旗拜)고 하는데 당상관에 대한 예우의 사정을 미루어 볼 때 이 또한 사실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전국 공연단체 중에서 대장 역할을 담당한 바우덕이가 이끄는 안성 남사당패는 전국 어디에서건 공연이 가능한 최초의 전국구 공연단체가 되었다고 하겠다.
그리고 또한 이 때부터 바우덕이가 이끌던 안성남사당패는 “바우덕이”라는 인물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바우덕이가 왔다” “바우덕이다”로 불렸다고 하는데 이러한 이름의 대중화는 우리나라 문화에는 없었던 현상이었다. 바우덕이의 천부적인 예술적 능력과 스타 기질이 이러한 유행어를 파생시킨 것이다.
대중예술의 특징 특히 연예의 특징은 스타가 있다는 것이다. 스타는 이름으로 불린다. 스타는 관중을 몰고 다닌다. 스타는 관중과 대중을 실망시키는 일이 없다. 바우덕이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스타로서 인정을 받는다. “남사당패”가 왔다가 아니라 “바우덕이”가 왔다는 그 시점이 바로 우리나라 연예가 시작된 것이며 민중에게 사랑과 동경의 대상이 형성된 일대 사건이라 할 것이다.
바우덕이는 안성 청룡사 옆 골짜기인 불당골에서 지냈다고 한다. 혹은 청룡사에서 숙식했다는 주장도 있다. 여하튼 “안성 청룡 바우덕이…”로 시작하는 바우덕이 속요에도 나와 있지만 바우덕이와 안성 청룡사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다.
당시 전국의 사찰들은 재정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는데, 청룡사에서는 사당패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고 바우덕이패는 공연을 하면서 먹거리며 현금을 조달해 주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상호 공생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바우덕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안성 청룡사를 꼭 찾아보아야 한다. 청룡사는 큰 사찰은 아니지만 매우 아름다운 대웅전으로 유명하다.
청룡사 대웅전은 아름다움 자체만으로도 꼭 찾아보아야 할 가치가 있다. 사방 기둥을 모두 구불구불 휘어진 자연목으로 사용했는데 그 균형미와 굴곡의 아름다움이 보는 이의 눈을 붙잡는 건축물이다. 자연미 넘치는 건축계획과 치밀한 배치작업으로 만들어낸 작품이라고 판단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대웅전은 축대며 모든 것이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해서 서로 잘 어울린다.
그리고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바우덕이의 민중 연예예술의 극치와 청룡사 대웅전의 자연적이며 서민적인 아름다움은 상호 비교되며 연관성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이러한 연관성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이렇게 아름다운 건물을 본 적이 있는가! 그러면 청룡사 대웅전의 꾸미지 않고 다듬지 않은 자연적인 건축물은 어디에서 발생한 것일까?
이러한 생각을 거슬러 올라가면 청룡사를 중창한 나옹선사에 이르게 된다.
나옹선사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풍류시를 남긴 분이다. 스님의 이름은 잘 몰라도 시를 들어보기만 하면 “아! 그것!”이구나 할 만큼 매우 유명한 시 한 편 읊어보고 떠나보자.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
탐욕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 놓고 / 물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세월은 나를 보고 덧없다 하지 않고 / 우주는 나를 보고 곳없다 하지 않네
번뇌도 벗어 놓고 욕심도 벗어 놓고 / 강같이 구름 같이 말없이 가라 하네
…나옹선사의 “청산은 나를 보고”…
참으로 깨끗하고 아름다운 시다. 때로는 한 없는 양보와 배려의 미덕을, 때로는 모든 것을 잊고자 하는 해탈의 이념을, 때로는 자연을 벗 삼고자 하는 많은 유랑인과 천민들 그리고 한을 품고 떠도는 이들의 마음을 표현해주는 시라고 하겠다. 아마도 나옹선사의 자연과 함께하는 싯귀가 전해져서 청룡사는 손댐이 적고 탐욕됨이 없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대웅전을 가꿀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한 나옹선사의 선과 풍류, 청룡사의 자연스러움과 대중성은 사찰의 전통으로 자리잡았을 것이다. 이러한 사연들이 전통으로 내려오면서 자연스럽게 바우덕이를 불러들여 본거지로 삼아 활동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우리나라 최고 최후의 불멸의 예술혼을 꽃피울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다고 생각해본다.
안성남사당패의 본거지였던 불당골은 청룡사 옆 골짜기에 있다. 바우덕이는 이곳에서 나무에 줄 걸어 놓고 줄타기 연습하고 아니리 사설하며, 풍물놀이, 잽이놀이, 버나놀이, 죽을판 살판을 다 수습해서 전국 최고의 기량으로 유일무이한 남사당패 여자 꼭두쇠가 되었으며 대중 연예의 기틀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바우덕이가 최고의 기예가 있다고 해서 호의호식하며 지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대접 받기도 어려웠던 천민이었던 터라 매우 힘든 생활을 해야 했다. 그리고 꼭두쇠라고 하였지만, 인기몰이를 할 수 있는 기예가 출중한 여자라는 특성을 살리면 돈벌이가 더 쉬워질 것이라는 일치된 의견에 따라 꼭두쇠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여느 꼭두쇠와 달리 바우덕이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남사당패 식구들을 부양해야만 한다는 강한 책임감을 느꼈을 것이다.
결국 바우덕이의 희생 속에 많은 식구들이 끼니를 이어갔다. 따라서 매일같이 힘든 줄타기에 아니리 사설에 풍물놀이를 하다 보니 21살 되던 해에는 폐병이 돋아서 피를 토하며 죽는 날 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이 기간 동안에 바우덕이는 평소 바우덕이를 흠모하던 30세 연상의 남자에게서 지극한 간호를 받았지만 결국 23세의 꽃다운 나이에 요절하였다. 바우덕이를 간호하던 기둥서방은 바우덕이의 죽음을 슬퍼하여 물가 바위 위에 않아 십수일을 울었다고 한다. 이 때의 그 발자국이 바위에 새겨져서 남았으므로 후세 사람들은 이 바위를 울음바위라고 불렀다.
소리도 팔고, 치맛속 흰 살도 팔고, 때로는 양반네에게 몸도 팔았지만 한 번도 사당패를 떠나지 않고 대중예술을 이끌며 가족을 부양했던 바우덕이의 연예와 슬픔과 파란만장한 삶은 지금도 전설로, 실화로 구전되어 오고 있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소고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치마만 들어도 돈 쏟아진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줄 위에 오르니 돈 쏟아진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바람처럼 떠나를 가네.
이 속요는 바우덕이의 연예와 풍류를 짐작 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노래 속에 “바우덕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렇게 이름이 단체의 명칭으로 굳어지고 공연활동을 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바로 연예의 출발점이라고 하겠다.
최초의 전국구 스타, 연예계를 탄생시킨 장본인이었다.
또한 “안성 청룡 바우덕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청룡사와 안성이라는 명칭을 분명히 사용하고 있다. 여기에서 안성은 옛 3남의 교통요지로서 전국 최고의 장시를 펼쳤던 그 장소라고 하겠다. 이것은 바우덕이가 연예활동을 펼칠 수 있는 밑거름이 되기도 한다. 사람이 많이 모이고 연중 상업이 번성한 이곳이야말로 바우덕이가 명성을 쌓아서 전국에 진출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 황석영은 소설 ‘장길산’에서 ‘묘옥’이라는 여인을 등장시켜 바우덕이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데, 이 배경은 3남의 요충인 안성 장터와 이 장터를 배경으로 전국 공연을 떠나는 안성 청룡 남사당패였다. 내용을 잠깐 보고 떠나보자.
안성은 삼남의 육로가 합치는 지점에 있는 대 도회요 위로 수원, 과천에 닿고 아래로는 천안 청주에 통하며, 서쪽으로 해로가 뚫렸는데 아산 앞바다를 거쳐서 물길이 진위 양성 평택 안성에 닿으니 사통팔달이다. 실로 삼남과 경기의 장꾼들이라면 안성을 제집 드나들 듯 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청룡사가 있는 사당골에는 사당패 3대가 모여 있었는데 그 수가 근 50명에 이르고 있었다.
…황석영의 장길산 中에서…
여기에서 묘옥은 장길산의 연인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악랄하고 냉혹한 남사당패 꼭두쇠였던 고달근이패에서 어렵게 생활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역시 재색이 출중한 인물로 그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바우덕이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고 하겠다.
시인 김윤배는 그의 시 ‘여사당 바우덕이’에서 구한말의 실존인물 이었던 재색 겸비의 여사당 바우덕이의 일생을 시로 풀어 쓰고 있다. 여기에서는 애비가 동학군에 가담했다가 효수당한 뒤 안성 난전을 떠돌던 어린 바우덕이가 서운산 청룡사 사당패에 가담한다. 사당패에서 땅에 금 긋고 줄타기부터 배운 바우덕이는 타고난 미색과 총기로 사당패의 상징적 존재가 되고 게다가 어린 눈으로 부친의 처참한 죽음을 목격한 그녀는 부친의 유지를 제 노래에 실어 풀어냄으로써 상민들의 한을 대변한다.
안성 난장 물화 많고 사람 많아
은근짜 다방모리 화랑유녀 웃음 질펀하고
거간꾼 장돌뱅이 싸움질로 날 저무는
홍청거리는 난장마당 가을걷이 끝낸 장마당
풍성한 인심 돋우어 펼치는 안성 청룡 남사당패 풍성한 놀이판……
뜬쇠 상쇠 바우덕이 신들린 쇠가락
상것들 얼쑤얼쑤 신명 부르고
뜬쇠 어름산이 바우덕이 시원스런 아니리 사설
상것들 응어리진 마음 풀어내리고
뜬쇠 덧뵈기쇠 바우덕이 불길 일으켜 타오르는 세상
김윤배의 여사당 바우덕이
바우덕이의 무덤은 청룡사 아랫 골짜기 냇가 옆에 위치해 있다. 청룡사 아래 청룡저수지를 지나 내려오다가 첫번째 골짜기가 바라보이는 냇가 양지편 바위 위에 보이는 무덤이 바우덕이가 묻힌 곳이다.
당시에는 천민이라 상여를 쓸 수 없었고 돌림병이 된다는 폐병에 걸려서 요절한 터라 장사 지내주는 이도 없었다고 한다. 바우덕이의 죽음을 슬퍼하며 식음을 전폐하고 울던 기둥서방이 바우덕이의 주검을 수습해서 물가에 묻어 달라는 바우덕이의 유언에 따라 청룡사 골짜기 중 물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골짜기 언저리에 묻었다고 한다. (더 아래로 내려가면 큰 하천이 나오지만 아래쪽에는 평민 이상의 사람들이 살고 있으므로 묻을 장소를 허락해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기둥서방도 설움에 울고 식음을 전폐하다가 며칠 후 세상을 떴다고 한다. 바우덕이가 눈을 감은 때가 겨울이었는데 무척이나 꽁꽁 얼어붙은 추운 날씨에 땅이 파지지 않자 주검 위해 흙을 모아다 덮었다고 하였다. 이 후 100년이 넘게 흐른 후에 그 위치를 탐문하여 찾아가니 땅을 파지 않고 흙을 모아다 덮어씌운 무덤을 찾을 수 있었고 이곳을 잘 추스려서 바우덕이묘를 만들어 주었다.
안성남사당풍물놀이보존회에서 바우덕이 묘에 묘비를 세워 주었다.
여기 이 자리는 그 유명한 사당 바우덕이라는 여인이 묻힌 묘가 있는 곳이다.
바우덕이는 조선말기에 안성시 서운면 청룡리 불당골에서 염불, 소고춤, 줄타기 등 온갖 사당 기예를 익혀 뛰어난 기량으로 유명하였고, 세상에 나가 판놀음을 벌이니 그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겠다.
불당골은 조선 초기부터 사당패의 본거지로 유명하였다.
을축년(고종 2년 1865년) 흥선대원군이 팔도 장정들을 동원하여 경복궁을 중수할 적에 안성 바우덕이가 유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불러들여 판놀음을 벌이니 장정들의 위로에 큰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위에서 옥관자를 내리었으므로 그의 영기(令旗)를 세상에서 이르기를 「옥관자 받은 이」라 하여 우러러 봤다.”
안성시 서운면 청룡리 산1번지 『바우덕이 묘비 안내문』 中
무덤 위에 앉아 어름산이 줄타기에 오르기 전에 사설가락 뽑기 위해 마시던 막걸리 한 잔 부어 주면 좋을 듯 싶다. 자 이제 안성 청룡리 불당골과 바우덕이 가 묻힌 물 맑은 골짜기를 뒤로 할 때가 된 것 같다.
지금 안성 청룡 바우덕이가 이끌던 남사당은 안성남사당풍물놀이 보존회를 이어안성시립남사당바우덕이풍물단이 계승하여 발전시키고 있다. 지금은 무형문화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곳에서 안성가락을 배우러 오고 있다. “덩-따-쿵-따” 안성가락은 웃다리 가락 중 최고로 화려하고 경쾌한 가락이라고 하며, 무한한 변화를 줄 수 있으며 누구나 어깨를 들썩이게 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제 “덩-따-쿵-따” 안성가락의 참 멋을 즐기고 기예를 만나러 안성남사당 전수관으로 떠나보자.
남사당 전수관은 보개면 복평리에 있다. 이곳 복평리는 바우덕이가 활동하던 시기에 많은 무속인들이 춤을 연마하던 곳으로서 많은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남사당전수관에서는 매주 토요일 오후 6시 30분에 남사당놀이 상설공연이 있으니 시간을 맞추어 출발하면 좋을 것이다. 전국 최고수준의 기예와 가락을 느낄 수 있으며 바우덕이에 대한 생각도 다른 방향으로 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그리고 악기를 다룰 줄 안다면 그곳에서 단원들과 함께 10분 정도 휘몰이에 들어가는 것도 좋을 것이다. 북이나 징은 어느 정도 칠 줄 알면, 시립풍물단원들의 지도를 잠깐만 받아도 쉽게 따라갈 수 있을 것이다.
옆에는 건물을 거꾸로 설계하여 지은 “마노 아트센터”가 자리잡고 있다. 노천 카페에서 프랑스식의 맛 있는 요리와 함께 와인의 깊은 맛을 즐길 수 있다. 물론 저녁이면 저렴한 바비큐식을 즐길 수 있으니 저녁시간에 맞추면 좋을 것이다.
이제 바우덕이 안성 남사당의 신명나는 가락을 뒤로 하고 청산과 창공이 어우러진 한적한 곳! 죽주산성 산책길을 걸어보자. 자 떠나자. 죽주산성으로….
죽주산성은 고구려→통일신라→후삼국→고려→조선으로 이어지면서 항상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만들어낸 유서 깊은 산성이다. 국내 다른 산성과 달리 잘 보전되었으면서도 다른 어느 성 보다도 자연미가 그대로 살아 있는 훌륭한 산성이라고 하겠다.
후삼국 때 일찍이 태봉을 건국한 궁예가 이곳 죽주산성에 은거하던 도적들을 물리치고 권력의 기초를 닦았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물론 인근에 있는 칠장사에서 궁예의 어머니가 피난하여 기거했다는 사실과도 일맥 상통한다고 하겠다.
또한 고려의 태조 왕건이 궁예의 신임을 받을 수 있었던 첫 원정길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돌아갔던 그 길이 역시 죽주산성이 위치한 죽산이었던 것을 본다면 이곳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장소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고려에서는 태조 왕건의 국찰로서 이곳에 봉업사를 지었으며 고려시대 가장 규모가 큰 사찰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불교가 가장 융성한 시기였을 때 국찰이었다는 것을 본다면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사찰이었다고 할 것이다.
죽주산성 아래에 봉업사지와 국보인 5층석탑이 내려다 보인다. 주변에는 미륵불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탑과 불상이 많이 있다.
죽주산성은 장중하게 쌓아 올린 성벽이 거의 모두 온전하게 보전되어 있어 성벽을 걸어보면 좋을 듯 싶다. 따스한 햇살이 데워 놓은 바위의 열기가 앉아서 쉬는 나그네의 발걸음을 묶어 놓는 곳이다. 그리고 멀리 바라보이는 들판이며 거칠 것 없이 뻗어 보이는 풍경들을 바라보자면 그 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한 방에 날려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참으로 편안하면서도 지루하지 않은 그런 산성이므로 누구에게나 꼭 한 번 걸어보기를 권유하고 싶은 산성이다. 가을에는 가을대로 따스한 햇살과 황금들판이 아름답게 내려다 보인다. 날 저무는 해를 바라보며 따스한 성 위에 앉아 사색하기에도 참으로 좋다.
나옹선사의 “청산은 나를 보고…”라는 시가 절로 나온다.
황금들판에 펼쳐지는 붉은 저녁 노을을 바라보고 있자니 벌써 해는 지고 이제 진정 하산할 시간인가 보다. 산성 아래 미륵당 미륵부처님께 잠깐 인사 드린 후 산성 진입로 앞에 있는 아시아에서 최고 규모의 찜질방인 ‘건강나라’에 들러 준비된 저녁을 들고 피곤해진 몸이나 풀어볼까 한다.
피곤한 몸 옥찜질방에다 뉘여 놓고 땀이나 흠뻑 흘리면 가뿐할 것이다.
자! 떠나자! 안성 청룡 바우덕이를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