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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문종실록 7권, 문종 1년 4월 20일 무자 2번째기사 1451년 명 경태(景泰) 2년
윤대하고 경연에 나아가 《대학연의》를 강하다
정사(政事)를 보고, 윤대(輪對)하고, 경연(經筵)에 나아가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講)하였다. 검토관(檢討官) 하위지(河緯地)가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위징(魏徵)430) 을 대우한 두 가지 일을 논하기를,
"태종이 전에는 언박(彦博)을 시켜서 안험(按驗)431) 하였으니, 매우 명철(明哲)하였습니다. 그 후에 참소(譖訴)를 받아서 혼인(婚姻)을 파하고, 비석(碑石)을 엎어 버렸으니 후군집(侯君集) 등을 천거한 것, 또는 저수량(褚遂良)432) 에게 간초(諫草)를 보였다는 것을 의중(意中)에 두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도 모르겠다."
하였다. 하위지(河緯地)가 말하기를,
"무릇 사람이 천거할 즈음에 우연히 과실이 있는 것이니 이를 노할 것까지는 없다면 차라리 간초(諫草)를 보인 것으로 노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뒷날에 태종(太宗)이 말하기를, ‘위징(魏徵)이 매양 조정에서 나를 욕보였으니, 모름지기 이 촌 늙은이를 죽이리라.’ 하였으니, 욕하는 말치고는 깊이 그를 미워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것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위징의 성품이 본디 곧으니, 비록 실제로 간초를 보였더라도 책망할 것은 없다."
하였다. 하위지가 말하기를,
"옛사람에는 간초를 불살라서 비록 자손이라도 볼 수 없게 한 사람이 있었으니, 위징이 간초를 보인 것은 역시 과실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무방하였다. 비록 간초를 불사르는 아름다움 만은 못하나, 어찌 큰 과실이겠는가?"
하였다. 하위지가 말하기를,
"태종이 참으로 간초를 보인 것으로 노하였다면 어진 임금이 아닙니다. 이제 두 가지 일을 보면 명철(明哲)함과 암우(暗愚)함이 매우 분간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태종은 어진 임금인데, 어찌 그 일로 가벼이 평의(評議)하겠는가?"
하였다. 하위지가 말하기를,
"대저 임금은 흔히 잘못을 문식(文飾)433) 합니다. 태종이 요동(遼東)을 쳐서 그리 크게 패한 것이 아니니, 잘못을 문식할 수 있을 듯한데도 뉘우치는 말을 하였으니, 이것이 그를 어진 임금이라 하는 까닭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좋은 말이다."
하였다. 하위지가 또 말하기를,
"하삼도(下三道)의 절제사(節制使)는 일이 없는 데에 있으면서 오히려 절제사(節制使)의 녹(祿)을 받는데, 평안도 절제사는 방수(防戍)의 중한 곳에 있는데도, 도리어 아록(衙祿)을 받으니, 참으로 흠결이 있는 법전(法典)입니다. 세종(世宗)께서 일찍이 명하여 함길도 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 김윤수(金允壽)와 평안도 도절제사 김효성(金孝誠)에게 절제사의 녹을 주게 하셨음은 어찌 이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청컨대 항규(恒規)434) 로 삼아서 주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우대하여 받아들였다.
【태백산사고본】 4책 7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6책 378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왕실-국왕(國王) / 정론-정론(政論) / 재정(財政)
[註 430]위징(魏徵) : 당나라 태종(太宗) 때 명신.
[註 431]안험(按驗) : 자세히 살펴서 증거를 세움.
[註 432]저수량(褚遂良) : 당나라 초기의 명신.
[註 433]문식(文飾) : 일의 실속은 없이 겉만 그럴듯이 꾸밈.
[註 434]항규(恒規) : 상례(常例).
55.문종실록 7권, 문종 1년 4월 24일 임진 5번째기사 1451년 명 경태(景泰) 2년
수령의 배사 및 체임하여 돌아올 때에도 모두 인견하도록 하다
승정원(承政院)에 전교(傳敎)하기를,
"수령(守令)의 배사(拜辭)460) 에는 내가 다 인견(引見)하나, 그 체임(遞任)하여 돌아오는 자에게는 인견하는 법이 없다. 대신(大臣)은 내가 특별히 알현을 허락하거니와 체임하여 돌아오는 수령도 모두 다 인견하는 것이 어떠한가? 집현전(集賢殿)으로 하여금 옛 제도를 상고하여 아뢰게 하라."
하니, 직전(直殿) 하위지(河緯地)가 아뢰기를,
"옛 제도에는 없으나 외방으로부터 체임하여 돌아오는 자에게 알현을 허락하여 지방의 실정을 물어보심은 참으로 영전(令典)이 되는데, 어찌 반드시 옛일이 있고 없음을 상고하여야만 하겠습니까?"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책 7권 18장 B면【국편영인본】 6책 379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인사-임면(任免)
[註 460]배사(拜辭) : 사조(辭朝)할 때에 임금을 배알함.
56.문종실록 7권, 문종 1년 5월 7일 갑진 1번째기사 1451년 명 경태(景泰) 2년
경연에서 하위지가 요역·공물의 폐단을 아뢰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講)하다가, ‘여름의 무더운 비와 겨울의 추위에 서민(庶民)이 원망한다.’라는 데에 이르러, 임금이 위연(喟然)히 탄식하고 말하기를,
"오직 옛적에만 그러할 뿐 아니라, 오늘날의 일도 역시 이러하다. 어루만져 편안하게 하는 방책을 시행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백성이 혜택을 받지 못하니, 어떻게 닦아서 백성에게 실덕(實德)을 베풀 것인가?"
하니, 검토관(檢討官) 하위지(河緯地)가 대답하기를,
"무릇 백성의 요역(徭役)·부렴(賦斂)531) 이 다 전지(田地)에서 나오므로, 사민(四民) 중에서 오직 농민이 가장 노고(勞苦)하니, 참으로 긍휼(矜恤)할 만합니다. 일푼(一分)을 덜어 주어 일푼의 은혜를 받게 함이 마땅합니다. 한(漢)나라의 문제(文帝)가 해내(海內)를 풍족하게 만든 것은 능히 번요(煩擾)하지 못하게 하였을 뿐인데, 근년에 민간의 요역이 번중(煩重)하니, 신은 이를 아뢰기를 청합니다. 민생(民生)이 오로지 의창(義倉)532) 만을 바라고 있는데, 오늘날의 수령(守令)은 다 수렴(收斂)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때맞추어 흩어 주지 않으므로, 백성이 이를 매우 답답히 여기니, 청컨대 때에 미쳐서 염산(斂散)하여 민명(民命)을 살리게 하소서. 옛사람이 이르기를, ‘풍년이 흉년만 못하다.’ 하였거니와, 지금 곡식이 조금 풍년 들면 문득 성 쌓는 일을 일으켜서 식량을 가지고 왕래하여 걸핏하면 몇 달을 지내게 되므로 백성이 매우 노곤하니, 청컨대 이제부터는 비록 풍년을 당하더라도, 한 해를 넘겨서 성을 쌓아 백성의 부담을 쉬게 하소서. 하삼도(下三道)의 각 고을에서 공납(貢納)하는 건장록(乾獐鹿)533) 은 일찍이 이미 과반(過半)을 견면(蠲免)534) 하였으나, 노루·사슴이 날로 드물어져 가므로, 생산되지 않는 고을에서는 민간에서 구하니, 그 폐단이 작지 않습니다. 청컨대 생산되지 않는 곳을 다시 살펴서 강무장(講武場)에서 잡은 노루·사슴으로 대신하여 민폐를 덜게 하소서. 민생의 휴척(休戚)535) 은 실로 수령의 어질고 어질지 못함에 달려 있습니다. 평안도에는 근래 적의 성식(聲息)으로 말미암아 무재(武才)가 있는 자를 뽑아서 수령으로 삼았는데, 그 사람이 다만 적을 방어하는 것만을 일삼고 도리어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분수 밖의 일로 여겨서 어루만지고 편안하게 하는 데 있어서 마땅함을 잃어 백성이 편히 살지 못합니다. 이로움을 좇고 해로움을 피하는 것은 백성의 상정(常情)이며, 평안도의 경계가 중국과 잇닿아 동팔참(東八站) 땅에 백성이 퍼져 살므로, 몰래 저 편을 좇기가 어렵지 않으니, 참으로 염려됩니다. 청컨대 전최(殿最)536) 의 즈음에 호구(戶口)의 많고 적음과 전야(田野)의 거칠고 열림을 살펴서 승출(陞黜)537) 한다면, 모두 백성을 편안하게 하기에 힘써 스스로 승선(承宣)538) 의 책임을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또 《의례(儀禮)》 17편(篇)은 곧 《예기(禮記)》의 정경(正經)이고, 예기는 곧 의례의 전(傳)539) 입니다. 의례에는 그 일을 싣고 예기에는 그 뜻을 풀이하였는데, 지금 다만 예기를 쓰고의례를 쓰지 않는 것은 곧 말단을 취하고 근본을 버리는 것입니다. 예학(禮學)을 쓰지 않는다면 그만이지만, 폐기할 수 없다면 의례(儀禮)를 아울러 쓰는 것이 마땅합니다. 예기와 함께 강독(講讀)하고 과장(科場)에서 아울러 쓰는 것이 마땅합니다. 다만 의례는 사람들이 드물게 가지고 있으니, 청컨대 널리 펴서 한결같이 예기와 함께 강독(講讀)하고 과장(科場)에서 아울러 시험하게 하소서."
하므로, 임금이 가상히 받아들이고 말하기를,
"나도 공물(貢物)의 폐단을 알아서, 이미 유사(有司)로 하여금 마련[磨勘]하게 하였으나, 지금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 그 포석(脯腊)540) 따위도 이미 수를 줄였는데, 다시 줄이고자 한다. 북방의 방어가 가장 긴요하니, 무재를 뽑아서 수령으로 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반드시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자를 가려서 쓰는 것이고, 오로지 무부(武夫)를 쓰는 것은 아니다. 양계(兩界)의 수령을 조치할 방책은 이미 의논하게 하였지만, 내가 다시 상량(商量)하겠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책 7권 30장 B면【국편영인본】 6책 386면
【분류】
구휼(救恤) / 출판(出版) / 행정(行政) / 군사-관방(關防) / 재정-공물(貢物) / 인사-선발(選拔) / 왕실(王室) / 정론(政論)
[註 531]부렴(賦斂) : 조세 따위를 매겨서 거둠.
[註 532]의창(義倉) : 평상시에 곡식을 저장하여 두었다가 흉년이나 비상시에 이것으로 빈민을 구제하던 제도.
[註 533]건장록(乾獐鹿) : 말린 노루와 사슴.
[註 534]견면(蠲免) : 면제.
[註 535]휴척(休戚) : 안락과 근심 걱정.
[註 536]전최(殿最) : 관찰사가 각 고을 수령의 실적을 조사하여 중앙에 보고하던 일로서 성적을 고사(考査)할 때 상(上)을 최(最), 하(下)를 전(殿)이라 하여 매년 6월 15일과 12월 15일 두 차례에 걸쳐 시행하였음.
[註 537]승출(陞黜) : 올리고 내림.
[註 538]승선(承宣) : 왕명을 받음.
[註 539]전(傳) : 정경(正經)의 해석.
[註 540]포석(脯腊) : 말린 고기.
57.문종실록 8권, 문종 1년 6월 16일 계미 1번째기사 1451년 명 경태(景泰) 2년
검토관 하위지가 공신의 죄를 경중에 따라 처벌할 것을 청하다
정사를 보고,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검토관(檢討官) 하위지(河緯地)가 아뢰기를,
"공신(功臣)으로서 죄가 있는 자는 혹 아주 놓아 줄 수 없으면 으레 다 부처(付處)합니다. 그러나, 장(杖) 8, 90대의 죄는 다른 사람에게는 속(贖)하게 하되 공신에게는 부처하는데, 부처(付處)는 세월의 한(限)이 없으므로, 혹 해[年]가 오래 되어도 돌아오지 못하는 자가 있어, 몇 해를 유리(流離)하는 괴로움이 속(贖)을 거두는 데에 비하여 아주 심하니, 이는 공신이 받는 죄가 도리어 무거운 것이 됩니다. 죄의 경중(輕重)에 따라 부처(付處)의 기일을 정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부처(付處)는 스스로 원하는 데에 따라서 보내므로 죄주는 것이 아니다. 만약 기일을 한정하여 도년(徒年)의 예와 같이 한다면, 이는 죄주는 것이 된다. 부처된 자에 과연 혹 해가 오래 되어도 석방되지 못한 자가 있으나, 그런 뜻은 승정원(承政院)이 이미 안다."
하였다. 하위지가 다시 아뢰기를,
"국가가 양색 백정(兩色白丁)742) 으로 하여금 평민(平民)과 섞여 살게 하니, 후환(後患)이 염려됩니다. 그러나, 백정(白丁)과 평민(平民)은 서로 혼인하지 않고 각각 스스로 구별하므로, 태평한 때에는 진실로 염려할 만한 것이 없으나, 만약에 변고(變故)가 있게 되면, 반드시 떼로 모여서 난(亂)을 일으킬 것이니, 예전에 홍적(紅賊)743) ·왜구(倭寇) 때의 일을 보면 알 수 있거니와, 마땅히 그 법을 더욱 밝혀서 평민(平民)과 혼인하게 하여야 합니다. 또, 우리 나라의 길의 원근(遠近)과 산천(山川)의 험이(險易)를 적인(敵人)으로 하여금 알게 하지 않는 것이 참으로 원려(遠慮)744) 가 됩니다. 국가가 왜객(倭客)745) 을 늘 한 길로만 왕래하게 하면 각 고을에서 영송(迎送)하는 폐해가 적지 않다고 생각하여 일찍이 세 길을 정하였는데, 그 지대(支待)하는 폐해로 말하면 조금 적어지겠으나, 참으로 적에게 보일 것이 아니니, 마땅히 한 길로 왕래하여 두루 보지 말게 하여야 합니다. 만약 한 길에서 영송하는 폐해가 심하다고 생각한다면 그 잡역(雜役)을 덜어 주는 것이 옳습니다."
하니, 임금이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다.
【태백산사고본】 4책 8권 14장 A면【국편영인본】 6책 401면
【분류】
사법-법제(法制) / 신분-천인(賤人) / 외교-왜(倭) / 왕실-경연(經筵)
[註 742]양색 백정(兩色白丁) : 조선조 때 호적(戶籍)에 편입하여 정착시켰던 화척(禾尺)과 재인(才人)의 신백정(新白丁)을 말함.
[註 743]홍적(紅賊) : 홍건적(紅巾賊).
[註 744]원려(遠慮) : 앞일을 헤아리는 깊은 생각.
[註 745]왜객(倭客) : 일본의 사자(使者).
58.문종실록 8권, 문종 1년 6월 16일 계미 2번째기사 1451년 명 경태(景泰) 2년
상기내에 습악하는 조목에 대해 의논하게 하다
승정원(承政院)에 전교(傳敎)하기를,
"가을철의 습악(習樂)은 대신(大臣)의 의논이 이미 정해졌으나, 하위지(河緯地)가 삼년(三年)746) 안에는 습악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제 소유(小儒)의 말을 들어서 가벼이 고치는 것은 미편(未便)한데 경 등의 뜻에는 어떻게 여겨지는가?"
하니, 우승지(右承旨) 이숭지(李崇之), 우부승지(右副承旨) 강맹경(姜孟卿), 동부승지(同副承旨) 민건(閔騫) 등이,
"합주(合奏)로 습악하는 것이라면 진실로 옳지 않으나, 이제 독조(獨調)로 익히는 것은 환락(歡樂)이 아니고 다만 잊지 않고자 하는 것일 따름입니다. 더구나, 중국 사신(使臣)이 온다면 기년(期年)이 이미 지나서일 것이니, 〈음악을〉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익히지 않으려면, 모름지기 여러 대신에게 의논하여야 합니다."
하니, 명하여 정부(政府)에 의논하여 아뢰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책 8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6책 401면
【분류】
예술-음악(音樂) / 왕실-의식(儀式)
[註 746]삼년(三年) : 3년의 상기(喪期).
59.문종실록 9권, 문종 1년 8월 22일 정해 2번째기사 1451년 명 경태(景泰) 2년
예조 참판 정척 등에게 부묘의를 교정하게 하다
예조 참판(禮曹參判) 정척(鄭陟)·봉상 소윤(奉常少尹) 민경(閔瓊)·직집현전(直集賢殿) 하위지(河緯地)에게 명하여 부묘의(祔廟儀)1100) 를 교정(校定)1101) 하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5책 9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6책 424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출판-서책(書冊)
[註 1100]부묘의(祔廟儀) : 3년상이 끝난 임금이나 왕비(王妃)의 신주(神主)를 종묘(宗廟)에 옮길 때의 의식(儀式).
[註 1101]교정(校定) : 비교하여 정함.
60. 문종실록 9권, 문종 1년 9월 30일 을축 3번째기사 1451년 명 경태(景泰) 2년
상의원 앞에 집을 새로 짓는 일을 멈추게 하다
이달에 상의원(尙衣院) 문 밖에 길쪽에다 큰 집 10여 영(楹)1376) 을 지으니, 직집 현전(直集賢殿) 하위지(河緯地)가 입대(入對)1377) 하는 일로 인하여 아뢰기를,
"근래에 긴요치 않은 토목(土木)의 역사가 많습니다. 상의원 앞에 새로 짓는 집 같은 것은 긴요치 않은 것일까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도 처음에는 알지 못하였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5책 9권 50장 A면【국편영인본】 6책 441면
【분류】
건설-건축(建築)
[註 1376]영(楹) : 기둥.
[註 1377]입대(入對) : 궁궐에 들어가 임금을 대하여 정사를 아뢰거나 강론(講論)하던 일. 소대(召對).
61.문종실록 10권, 문종 1년 10월 1일 병인 1번째기사 1451년 명 경태(景泰) 2년
휘덕전에 나아가 삭제를 행하다
임금이 휘덕전(輝德殿)에 나아가 삭제(朔祭)를 행하였다. 판승문원사(判承文院事) 황보공(皇甫恭)이 일찍이 직집현전(直集賢殿) 하위지(河緯地)와 말하기를,
"자주 집례(執禮)가 되어 전작(奠爵)할 때 우러러보면, 성상께서 눈물 흘리는 것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하였는데, 이번 제사에 하위지가 대축(大祝)1378) 이 되어 임금을 보니, 이미 헌작(獻爵)하고 물러나 꿇어앉을 때에도 깨닫지 못하고 상복(喪服)의 옷 소매를 들어서 눈물 닦는 것이 그와 같았다. 외정(外庭)에서는 알지 못하는 자가 많았다.
【태백산사고본】 5책 10권 1장 A면【국편영인본】 6책 442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註 1378]대축(大祝) : 종묘(宗廟)나 문묘(文廟)의 제향(祭享)에 축문(祝文)을 읽는 사람.
62.문종실록 10권, 문종 1년 10월 15일 경진 3번째기사 1451년 명 경태(景泰) 2년
직집현전 하위지를 일본국 사신의 선위 별감으로 삼다
직집현전(直集賢殿) 하위지(河緯地)를 일본국(日本國) 사신의 선위 별감(宣慰別監)1440) 으로 삼았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아뢰기를,
"이전에는 일본국 사신이 오면 모두 선위사(宣慰使)를 보냈던 것을 저들이 이미 다 아는데, 이제 별감(別監)이라 호칭한다면 저들은 반드시 낮은 관직이라 여길 것입니다. 지금 하위지는 직책이 3품이 아닌 까닭에 별감이라 호칭하니, 다시 의논하여 시행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하위지는 비록 4품이지만 사(使)라고 부르도록 하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5책 10권 9장 A면【국편영인본】 6책 446면
【분류】
외교-왜(倭) / 인사-임면(任免)
[註 1440]선위 별감(宣慰別監) : 일본과 여진(女眞)의 사신(使臣)이 올 때 보내는 영접사(迎接使)로서 3품 이하인 사람을 말함.
63.문종실록 10권, 문종 1년 10월 24일 기축 2번째기사 1451년 명 경태(景泰) 2년
임금이 진설을 새로 정하고 의주를 편찬하여 대신에게 보여주다
임금이 일찍이 진설(陣設)을 새로 정하고, 승패(勝敗)와 용겁(勇怯)의 형세를 첨부하여 의주(儀注)를 편찬하여 내어서 대신에게 보여 주면서 산삭(刪削)과 윤색(潤色)을 더하게 하니, 좌찬성(左贊成) 김종서(金宗瑞)가 아뢰기를,
"직집현전(直集賢殿) 하위지(河緯地)로 하여금 교정(校正)하게 하소서."
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하위지를 인견(引見)하고 친히 재정(裁定)을 더하였다. 이어서 유시(諭示)하기를,
"내가 병서(兵書)를 알지 못하나, 그러나 이른바, ‘많은 것 다스리기를 적은 것 다스리듯 한다.’는 것은 분수(分數)가 그것이고, ‘많은 것과 싸우기를 적은 것과 싸우듯 한다.’는 것은 형명(形名)1477) 이 그것이다. 이것이 바로 병가(兵家)의 대절(大節)1478) 인데, 지금 편찬하여 설명한 것도 이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였다. 그 뒤로 또 하위지와 권남(權擥)·정종(鄭種)·김유선(金有銑)·홍윤성(洪允成) 등에게 명하여 다시 교정을 더하게 하여 여러 날 만에 정하니, 김종서의 의논을 많이 채택하고, 수양 대군 【임금의 휘(諱).】 이 실제로 이 일을 관장하였다.
【태백산사고본】 5책 10권 14장 A면【국편영인본】 6책 448면
【분류】
군사-병법(兵法) / 출판-서책(書冊)
[註 1477]형명(形名) : 기(旗)와 북을 울려서 여러 가지 군대의 행동을 호령하던 옛날 군대의 신호법.
[註 1478]대절(大節) : 죽기를 한하고 지키는 절개.
64.문종실록 12권, 문종 2년 2월 6일 경오 5번째기사 1452년 명 경태(景泰) 3년
직집현전 하위지가 경상도로 떠나면서 하직하니 임금이 인견하다
일본국(日本國) 사신(使臣)의 선위사(宣慰使)인 직집현전(直集賢殿) 하위지(河緯地)가 경상도(慶尙道)를 향해 떠나면서 하직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말하기를,
"이웃 나라와 교제하는 것은 큰 일이다. 흔단(釁端)이 발생하기가 쉬우니, 이웃 나라 사신을 대접할 적에는 모름지기 후하게 하면서 정직하게 해야 한다. 위에서는 매양 후하게 대접하려고 하는데도 유사(有司)가 상시로 재억(裁抑)을 가(加)하게 되니, 후일의 폐단이 발생할까 염려된다. 폐단이 생길 일은 진실로 하기가 어렵겠지마는, 무릇 모든 지대(支待)는 될 수 있는 한 후한 데로 따르도록 하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6책 12권 4장 B면【국편영인본】 6책 461면
【분류】
외교-왜(倭)
65.문종실록 13권, 문종 2년 5월 6일 무술 3번째기사 1452년 명 경태(景泰) 3년
일본 사신이 전하에게 먼저 배례하고 승하전에 배례하기를 원하다
일본(日本) 사신(使臣)이 감호관(監護官) 하위지(河緯地)에게 이르기를,
"전일에 비록 유지(諭旨)를 받았지마는, 그러나 전하(殿下)에게 먼저 배례(拜禮)하고 다음에 승하전(昇遐殿)671) 에 배례(拜禮)하는 것이 곧 우리 국왕(國王)의 명령입니다."
하니, 하위지가 대답하기를,
"전하(殿下)께서 명령이 계시기를, ‘내가 차마 선왕(先王)보다 먼저 배례(拜禮)를 받을 수가 없다.’고 하시니, 유사(有司)672) 에서 어찌 감히 다시 아뢰겠습니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6책 13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6책 491면
【분류】
외교-왜(倭)
[註 671]승하전(昇遐殿) : 승하(昇遐)한 전하(殿下). 즉 세종(世宗)을 이름.
[註 672]유사(有司) : 책임을 맡은 관원.
66.문종실록 13권, 문종 2년 5월 7일 기해 1번째기사 1452년 명 경태(景泰) 3년
예조에서 회례사를 사신과 함께 일본으로 보내기를 원하다
예조(禮曹)에서 하위지(河緯地)로 하여금 일본(日本) 사신(使臣)에게 묻기를,
"국가에서 회례사(回禮使)를 보내려고 하는데, 마땅히 사자(使者)와 더불어 같은 때에 함께 갈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사자(使者)가 말하기를,
"우리 국왕(國王)은 나이 어려서 능히 일을 결단하지 못하여 정사가 국왕(國王)의 어머니에게서 나오게 되므로, 마침내 관령(管領)과 더불어 불만(不滿)스럽게 지냅니다. 또 가을철에 풍기(風氣)가 순조롭지 못하여 배가 가기에 어려움이 있으니, 만약 예물(禮物)로써 우리 무리에게 붙여 보낸다면 우리 나라에서도 또한 기뻐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 이미 부묘(祔廟)하는 일은 지났으므로, 문소전(文昭殿)의 망제(望祭)에 견주어 진향(進香)을 겸해 행하려고 하니, 사자(使者)가 말을 변경하여 말하기를,
"진향은 국왕의 명령이 아니므로 우리들이 사례(私禮)를 행하려고 했습니다."
하였다. 의정부에서 감호관(監護官)으로 하여금 이를 중지시키기를,
"만약 국왕(國王)의 명령이 아니면 사례(私禮)는 행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그제야 중지하였다.
【태백산사고본】 6책 13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6책 491면
【분류】
외교-왜(倭)
67.문종실록 13권, 부록 편수관 명단
부록 / 편수관 명단
경태(景泰) 5년001) 갑술 4월에 춘추관(春秋館)에서 왕명(王命)을 받아서 찬술(撰述)하기 시작하여, 경태 6년002) 을해 11월에 마쳤습니다.
찬수관(纂修官) 【전후(前後)의 관직을 아울러 기록한다.】
영관사(領館事)
수충 위사 협찬 정란 동덕 좌익 공신(輸忠衛社協贊靖難同德佐翼功臣) 대광 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영경연예문관서운관사(領經筵藝文館書雲觀事) 세자 사(世子師) 하동 부원군(河東府院君) 신(臣) 정인지(鄭麟趾)
지관사(知館事)
추충 좌익 공신 숭정 대부(推忠佐翼功臣崇政大夫)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 집현전 대제학(集賢殿大提學) 세자 좌빈객(世子左賓客) 겸 판이조사(判吏曹事) 봉원군(蓬原君) 신(臣) 정창손(鄭昌孫)
수충 위사 협찬 정란 좌익 공신(輸忠衛社協贊靖難佐翼功臣) 숭정 대부(崇政大夫) 병조 판서(兵曹判書) 집현전 대제학(集賢殿大提學) 겸 성균 대사성(成均大司成) 세자 이사(世子貳師) 한성군(韓城君) 신(臣) 이계전(李季甸)
정헌대부 예조판서 지경연사(正憲大夫禮曹判書知經筵事) 신(臣) 김조(金銚)
동지관사(同知館事)
수충 위사 협찬 정란 공신(輸忠衛社協贊靖難功臣) 가선 대부(嘉善大夫)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집현전 제학(集賢殿提學)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영성군(寧城君) 신(臣) 최항(崔恒)
가선 대부(嘉善大夫) 예조 참판(禮曹參判) 세자 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 신(臣) 하위지(河緯地)
편수관(編修官)
통정 대부(通政大夫) 이조 참의(吏曹參議) 신(臣) 어효첨(魚孝瞻)
통정 대부(通政大夫) 집현전 부제학 지제교(集賢殿副提學知製敎) 경연 시강관(經筵侍講官) 신(臣) 송처관(宋處寬)
기주관(記注官)
절충 장군(折衝將軍) 의흥 시위사 상호군(義興侍衛司上護軍) 신(臣) 권기(權技)
통정 대부(通政大夫) 집현전 직제학 지제교(集賢殿直提學知製敎) 경연시독관(經筵侍讀官) 신(臣) 이석형(李石亨)
통정 대부(通政大夫) 행 지승문원사(行知承文院事) 신(臣) 김득례(金得禮)
통정 대부(通政大夫) 행 직예문관(行直藝文館) 신(臣) 이비(李棐)
중직 대부(中直大夫)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 신(臣) 안지귀(安知歸)
중직 대부(中直大夫) 사헌 집의(司憲執義) 신(臣) 이예(李芮)
중직 대부(中直大夫) 성균사성지제교(成均司成知製敎) 겸 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 신(臣) 유성원(柳誠源)
중직 대부(中直大夫) 행 직집현전 지제교(行直集賢殿知製敎) 경연 검토관(經筵檢討官) 신(臣) 양성지(梁誠之)
중훈 대부(中訓大夫) 집현전 직제학 지제교(集賢殿直提學知製敎) 경연시독관(經筵侍讀官) 신(臣) 김지경(金之慶)
봉정 대부(奉正大夫) 행 종부 소윤(行宗簿少尹) 신(臣) 장계증(張繼曾)
봉정 대부(奉正大夫) 행 종부 소윤(行宗簿少尹) 신(臣) 강로(姜老)
봉열 대부(奉列大夫) 직 집현전 지제교(直集賢殿知製敎) 세자 좌필선(世子左弼善) 겸 좌중호(左中護) 신(臣) 이승소(李承召)
조산 대부(朝散大夫) 집현전 응교 지제교(集賢殿應敎知製敎) 경연 검토관(經筵檢討官) 겸 부지승문원사(副知承文院事) 신(臣) 조근(趙瑾)
조산 대부(朝散大夫) 행 집현전 교리 지제교(行集賢殿校理知製敎) 경연 부검토관(經筵副檢討官) 신(臣) 홍응(洪應)
조산 대부(朝散大夫) 행 교서 교리(行校書校理) 겸 승문원 교리(承文院校理) 신(臣) 성희(成熺)
조봉 대부(朝奉大夫) 수 부지통례문사(守副知通禮門事) 신(臣) 김명중(金命中)
조봉 대부(朝奉大夫) 집현전 응교 지제교(集賢殿應敎知製敎) 경연 검토관(經筵檢討官) 신(臣) 이극감(李克堪)
조봉 대부(朝奉大夫) 행 성균 직강(行成均直講) 신(臣) 이함장(李諴長)
통선랑(通善郞) 행 집현전 부교리 지제교(行集賢殿副校理知製敎) 경연 부검토관(經筵副檢討官) 신(臣) 서강(徐岡)
통선랑(通善郞) 행 이조 좌랑(行吏曹佐郞) 신(臣) 김필(金㻶)
통선랑(通善郞) 행 이조 좌랑(行吏曹佐郞) 신(臣) 김덕원(金德源)
기사관(記事官)
통선랑(通善郞) 행 예조 좌랑(行禮曹佐郞) 신(臣) 이계전(李季專)
봉직랑(奉直郞) 행 공조 좌랑(行工曹佐郞) 신(臣) 이익(李翊)
봉직랑(奉直郞) 행 승문원 부교리(行承文院副校理) 신(臣) 강미수(姜眉壽)
봉직랑(奉直郞) 행 훈련 주부(行訓鍊注簿) 신(臣) 유자문(柳子文)
승의랑(承議郞) 성균 주부(成均注簿) 겸 동부 유학 교수관(東部儒學敎授官) 신(臣) 이유의(李由義)
승의랑(承議郞) 성균 주부(成均注簿) 겸 서부 유학 교수관(西部儒學敎授官) 신(臣) 안중후(安重厚)
선교랑(宣敎郞) 수 성균 주부(守成均注簿) 겸 동부 유학 교수관(東部儒學敎授官) 신(臣) 박찬조(朴纘祖)
승훈랑(承訓郞) 행 예문 봉교(行藝文奉敎) 신(臣) 윤자영(尹子濚)
선무랑(宣務郞) 행 예문 봉교(行藝文奉敎) 신(臣) 이제림(李悌林)
선무랑(宣務郞) 행 예문 봉교(行藝文奉敎) 신(臣) 최한보(崔漢輔)
선무랑(宣務郞) 행 예문 봉교(行藝文奉敎) 신(臣) 민정(閔貞)
선교랑(宣敎郞) 행 예문 봉교(行藝文奉敎) 신(臣) 권이경(權以經)
선교랑(宣敎郞) 행 예문 대교(行藝文待敎) 신(臣) 이문환(李文煥)
계공랑(啓功郞) 행 예문 대교(行藝文待敎) 신(臣) 유질(柳輊)
무공랑(務功郞) 행 예문 검열(行藝文檢閱) 신(臣) 김겸광(金謙光)
통사랑(通仕郞) 행 예문 검열(行藝文檢閱) 신(臣) 안신손(安信孫)
계공랑(啓功郞) 행 예문 검열(行藝文檢閱) 신(臣) 김이용(金利用)
계공랑(啓功郞) 행 예문 검열(行藝文檢閱) 신(臣) 김영견(金永堅)
통사랑(通仕郞) 행 예문 검열(行藝文檢閱) 신(臣) 윤민(尹慜)
【태백산사고본】 6책 13권 34장 A면【국편영인본】 6책 497면
【분류】
역사-편사(編史)
[註 001]경태(景泰) 5년 : 1454 단종 2년.
[註 002]경태 6년 : 1455 세조 원년.
68.단종실록 4권, 단종 즉위년 10월 15일 계묘 3번째기사 1452년 명 경태(景泰) 3년
일본국 사자가 대장경의 탈권(脫卷)을 보완해 줄 것을 청하다
일본국 사자(使者) 정천(定泉)의 호송관(護送官) 하위지(河緯地)가 예조(禮曹)에 치서(馳書)하기를,
"지난 윤(閏) 9월 14일에 웅천(熊川)에 도착하여 서계(書契)719) 을 곧 객관(客館)에 보내었습니다. 그는 사사로이 청한 물건은 적게 주고 또 《대반야경(大般若經)》을 주지 않는다 하여 심히 못마땅해 하였습니다. 그러나 감히 억지를 쓰지는 않고 다만 《대장경(大藏經)》 탈질(脫帙) 1백 13권을 억지로 청하여 말하기를, ‘모름지기 가까운 고을에 있는 경문(經文)으로 충당해 달라’ 하였습니다. 신이 답하기를, ‘일찍이 귀국(貴國)과 여러 섬의 추장(酋長)이 잇달아서 구해 갔기 때문에 지금은 전질(全帙)이 없어서 구해 주기 어렵다.’ 하였으나, 정천은 믿고서 듣지 않고 위로연을 베푸는 날에 이르러서도 오히려 연회에 나오지 않고 말하기를, ‘만약 청구한 것을 얻지 못하면 몇 달이라도 계속 머무를 것이며, 끝내 연회에 참석할 리가 없다.’ 하였습니다. 신이 되풀이하여 타일렀습니다만 모두 듣지 않습니다. 만약 이 일을 칭탁하여 돌아가지 않는다면 장차 어떻게 처리하겠습니까?"
하니, 예조에서 의정부에 보고하여 아뢰기를,
"중 각종(覺宗)을 보내어 우리 나라에서 간행한 《대장경》을 찾아서 탈권(脫卷)을 보완(補完)해 주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태백산사고본】 2책 4권 6장 A면【국편영인본】 6책 549면
【분류】
외교-왜(倭) / 사상-불교(佛敎) / 출판-인쇄(印刷)
[註 719]서계(書契) : 왜(倭)의 사신이나 야인의 사신이 가지고 오던 신임장(信任狀). 왜 사신의 서계는 대마 도주가 발행하였는데, 그 안에는 사신 일행의 수, 조선에서 머무르는 포구(浦口), 체류 일자 등을 명기하였음.
69.단종실록 5권, 단종 1년 3월 15일 임신 1번째기사 1453년 명 경태(景泰) 4년
이인손·기건·김승규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인손(李仁孫)을 한성부 윤(漢城府尹)으로, 기건(奇虔)을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으로, 김승규(金承珪)에게는 품계(品階)를 더하여 중훈 대부(中訓大夫)로 하여 전농윤(典農尹)으로, 황보석(皇甫錫)에게는 품계를 더하여 조산 대부(朝散大夫)로 하여 사복 소윤(司僕少尹)으로, 하위지(河緯地)를 사헌 집의(司憲執義)로, 유규(柳規)와 조계팽(趙季砰)을 장령(掌令)으로, 강진(康晉)을 한성 소윤(漢城少尹)으로, 홍일동(洪逸童)에게는 품계를 더하여 봉직 대부(奉直大夫)로 하여 선공 판관(繕工判官)으로, 유성원(柳誠源)을 사헌 지평으로, 평안도 도사(平安道都事) 조충손(趙衷孫)에게는 품계를 더하여 통덕 대부(通德大夫)로 삼았다. 이날 헌부의 관리들은 산릉 도감의 일 때문에 모두 좌천(左遷)되었다. 허후(許詡)는 황보인(皇甫仁)과 김종서의 뜻에 아부(阿附)하여 김승규와 황보석을 세조(世祖)를 수행하였던 공(功)으로 논(論)하고 아울러 홍일동도 계청하여 자급을 더하여 주었으며, 조충손은 이용(李瑢)의 청으로 자급을 더하였다. 강진이 파직되던 때 사림(士林)이 분해하지 않는 이가 없더니 소윤(少尹)을 제수받음에 미치자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스스로 공론(公論)이 있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책 5권 25장 A면【국편영인본】 6책 572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70.단종실록 6권, 단종 1년 4월 20일 정미 2번째기사 1453년 명 경태(景泰) 4년
홍달손·성삼문에게 관직을 제수하고 하위지 등 10여인에게 각각 한 자급을 더하여 주다
홍달손(洪達孫)을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 성삼문(成三問), 사헌 집의(司憲執義) 하위지(河緯地) 등 10여인은 《병요(兵要)》를 수찬(修撰)한 공으로써 각각 한 자급(資級)을 더하여 주었다. 이보다 앞서 세조가 장차 북경에 나아갈 적에 자급을 더 주도록 청하니, 임금이 의정부에 의논하였는데 정부에서 이를 저지하였다. 세조가 이미 돌아와서 사람들에게 자급을 더해 주는 것이 외람된 것을 보고, 이에 말하기를,
"쌀 한 섬을 수송하고 나무 한 그루를 옮기는 자도 오히려 또 자급을 올려 주었는데 《병요(兵要)》를 수찬한 자를 어찌 그 아래에 두는가?"
하니, 허후(許詡)가 듣고 강맹경(姜孟卿)과 의논하여 아뢰니 이러한 명령이 있었던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2책 6권 6장 B면【국편영인본】 6책 581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 출판-서책(書冊)
71.단종실록 6권, 단종 1년 4월 21일 무신 2번째기사 1453년 명 경태(景泰) 4년
유성원이 수양 대군의 종사관에게 상을 준 것과 조충손에게 자품을 더한 것의 불가함을 아뢰다
지평(持平) 유성원(柳誠源)이 본부(本府)의 의논을 가지고 아뢰기를,
"수양 대군의 종사관(從事官)은 조금도 상을 줄 만한 공로가 없으며, 조충손(趙衷孫)이 안평 대군을 구료한 것은 당연히 해야 할 바인데도 아울러 자품(資品)을 더하여 준 것은 매우 옳지 않습니다. 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地)·이개(李塏) 등이 《병요(兵要)》를 수찬(修撰)한 공으로써 각각 한 자급을 올려 주었으나, 이것도 또한 작은 일이니 반드시 관직을 상(賞)으로 줄 필요가 없습니다. 청컨대 아울러 고쳐 바로잡으소서."
하니, 임금이 전지(傳旨)하기를,
"종사관(從事官)과 조충손(趙衷孫)의 일은 너희들이 비록 여러번 청하였지만, 그러나, 이미 대신과 숙의(熟議)하여 이를 시행한 것이고, 또 《병요(兵要)》의 글자를 베껴 쓴 사람들에게 이미 자급을 더하였는데, 그 수찬한 사람도 또한 대신과 의논하여 상을 준 것이다."
하였다. 유성원이 다시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태백산사고본】 2책 6권 7장 A면【국편영인본】 6책 581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 정론(政論) / 출판-서책(書冊)
72.단종실록 6권, 단종 1년 4월 22일 기유 1번째기사 1453년 명 경태(景泰) 4년
하위지가 자신은 상을 받을 만한 공이 없음을 아뢰다
집의(執義) 하위지(河緯地)가 아뢰기를,
"《병요(兵要)》·병서(兵書)를 수찬한 사람들에게 모두 가자(加資)하도록 명하였는데, 신도 또한 이에 참여하였으나, 신은 이 책에 진실로 상을 받을 만한 공(功)이 없습니다. 집현전(集賢殿)은 본래 책을 만드는 곳이요, 〈서적을〉 고열(考閱)하는 것이 그 직분(職分)입니다. 그윽이 듣건대, 수양 대군(首陽大君)이 가자(加資)하도록 논하여 아뢰었다고 하나, 대저 상작(賞爵)이란 국가의 공기(公器)이니 가볍게 시행할 수가 없는데, 하물며 ‘일체 사사로운 일은 아뢸 수가 없다.’고 이미 교지(敎旨)가 있는데, 종실에서는 이를 계속하여 아뢰어서 사사로운 은혜를 베푸는 것은 심히 부당합니다. 청컨대 이러한 명을 거두소서."
하니, 전지하기를,
"이 책은 바로 문종(文宗)께서 친히 지으신 책이니, 참여하여 도운 사람은 그 공을 상줄 만하고 또 글자를 베껴 쓴 사람도 또한 이미 가자(加資)한 까닭에 대신과 더불어 의논하여 이를 제수(除授)한 것이다."
하니, 하위지(河緯地)가 다시 아뢰기를,
"비록 전례가 있다고 하지만 종실에서 사사로이 아뢰어서 가자(加資)하는 것은 미편합니다. 신이 직사에 나가는 것은 의리에 불가하니, 청컨대 모름지기 고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하위지가 물러가서 상소하기를,
"이달 20일에 신을 중직 대부(中直大夫)272) 로 삼는다고 하비(下批)273) 하였으나 그 사유를 알지 못하여서 감히 사은하지 못하다가, 곧 들으니 수양 대군(首陽大君)이 《병요(兵要)》로 수찬한 공(功)을 논하여 아뢴 때문이라 하니, 황공하고 놀라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윽이 생각건대, 그때에 《병요》를 수찬하는 데 종사한 자는 모두 기록할 만한 공이 없으며, 신은 더욱 수고한 것이 없고, 또 종친의 아룀으로 인하여 보람되게 특별한 은혜를 받는 것은 의리에 크게 옳지 않습니다. 신은 이러한 뜻을 가지고 내리신 명령을 거두도록 애걸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여,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의 지극함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대저 작명(爵命)은 국가의 공기(公器)이고 인주(人主)의 큰 권한입니다. 공기이기 때문에 인주가 가볍게 시행할 수 없으며, 큰 권한이기 때문에 인신(人臣)이 감히 가볍게 의논하지 못하니 그 지험하기가 이와 같으므로 이로써 오히려 좌우 근신에 연줄을 대어서 사문(私門)이 저자와 같다는 백성들의 탄식이 있음을 막는데, 하물며 아랫사람이 가볍게 의논하는데도 금방(禁防)하지 아니하거나 위에서 가볍게 시행하는데도 무겁게 여기지 아니하고, 먼저 그 금방을 없앤다면 폐단은 장차 어떻게 되겠습니까? 세종 대왕(世宗大王)께서는 일찍이 작명(爵命)을 무겁게 여겨서 비록 한 자급(資級)이라도 일찍이 가볍게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제조관(提調官)에서 낭청(郞廳)을 추천하여 쓰는 데도 오히려 금방이 있었으나 은혜와 권세가 아랫사람으로 옮겨 갈까 두려워하였으니, 그 후세(後世)를 위하여 염려하심이 원대하였습니다. 또 인재를 천거하여 올리는 것은 대신의 직분이나 옛날의 어린 대신들도 오히려 마땅한 사람 알기를 두려워하고 그 은혜가 자기에게서 나올까 두려워하였습니다. 더구나 종실의 존장(尊長)으로서 이와 같은 짓을 감히 행하여 공공연히 사람을 추천하여 올린다면 은혜가 누구에게서 나오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종실(宗室)의 처신하는 도리가 크게 어그러졌습니다. 근일에 가자(加資)한 자는 경연(經筵)에서 시종한 사람들이 많고, 신과 같은 자는 공로가 없고 또한 대간(臺諫)의 직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시종(侍從)하는 관헌도 종친에게 사사로이 지우(知遇)를 받는 것은 진실로 대체에 어그러짐이 있는데, 하물며 대헌(臺憲)의 규탄(糾彈)하는 자리에 있으면서 감히 우매함을 무릅쓰고 직사에 나아가는 것은 더욱 크게 불가한 것입니다. 비록 스스로 아깝게 여긴다한들 이에 조종을 욕먹이는 것이 얼마이겠습니까? 성상의 하교에서 비록 말씀하시기를, ‘이미 대신에게 의논하였다.’ 하시지만, 그러나 일에는 불가(不可)한 것이 있는데, 대신이 참여하여 알고 있으면서도 서둘러 급히 고쳐서 바로잡지 않는 것은 부당하며, 성상의 하교에서는 비록 말씀하시기를, ‘가서 너의 직사에 나아가라.’ 하시나 사체(事體)가 이와 같으니, 신이 의리상 교지(敎旨)를 받들 수 없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상감께서 유의하여 확연히 굳건한 용단을 내려서 즉시 내리신 명령을 거두시고 공도(公道)를 밝히고 공선(公選)을 엄하게 하여서 요행을 바라는 문(門)을 막으소서."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책 6권 7장 A면【국편영인본】 6책 581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 왕실-종친(宗親) / 출판(出版) / 정론(政論)
[註 272]중직 대부(中直大夫) : 문관의 종3품 품계.
[註 273]하비(下批) : 삼망을 갖추지 않고 한 사람만 적어 올려서 임금이 임명하던 일.
73.단종실록 6권, 단종 1년 4월 24일 신해 1번째기사 1453년 명 경태(景泰) 4년
나홍서가 하위지의 자급을 더하는 일이 사사로운 은혜가 아님을 아뢰다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 나홍서(羅洪緖)를 불러서 하위지(河緯地)의 상소를 주어서 당상에서 의논하였다. 나홍서가 와서 아뢰기를,
"《병요(兵要)》·병서(兵書)의 글자를 옮기어 쓴 사람도 모두 자급(資級)을 더하였는데, 이제 수양 대군(首陽大君)이 문종조(文宗朝)에 있어서 어명을 받고 찬집(撰集)하였기 때문에 공도(公道)로써 이를 아뢴 것이요, 사사로운 은혜가 아닙니다. 또 세종조(世宗朝)에 송만달(宋萬達)이 온양 군사(溫陽郡事)가 되었을 때 왕자가 온천[溫井]에서 목욕하여 병이 나으니 특별히 송만달에게 자품을 더하여 주었는데, 이제 조충손(趙衷孫)에게 자품을 더하여 준 것도 바로 그러한 예입니다. 수양 대군(首陽大君)의 수종관(隨從官)에게 자품을 더한 일에 대하여서는,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는 그들의 아들도 또한 이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감히 의의(擬議)277) 하지 못하였고, 그 나머지는 모두 말하기를, ‘이미 시행되었으니 다시 고칠 수가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책 6권 9장 A면【국편영인본】 6책 582면
【분류】
군사-병법(兵法) / 정론(政論) / 인사-관리(管理) / 출판(出版) / 왕실-종친(宗親)
[註 277]의의(擬議) : 의정부나 육조에서 중신들이 모여 관서(官署)에서 보고한 사목(事目)이나 임금이 의논하도록 명한 일에 대하여 그 가부를 의논하던 일. 의논한 내용을 임금에게 보고하면 임금이 이에 근거하여 재결(裁決)하였음
74.단종실록 6권, 단종 1년 4월 24일 신해 5번째기사 1453년 명 경태(景泰) 4년
하위지가 자신에게 가자한 일의 부당함을 이유로 사직하다
우승지(右承旨) 노숙동(盧叔仝)이 경연(經筵)의 주강(晝講)에서 세조(世祖)의 말을 가지고 아뢰니, 임금이 집의(執義) 하위지(河緯地)와 지평(持平) 유성원(柳誠源)을 부르도록 명령하였는데 유성원이 먼저 이르니, 세조의 말을 전하고 또 말하기를,
"종사관(從事官)에게 자품(資品)을 더하여 주는 것은 수양 대군(首陽大君)이 아뢰었기 때문이 아니고, 내가 만리의 먼 길을 무사히 따라갔다가 돌아왔기 때문에 기뻐서 자품을 더하여 준 것이다."
하였다. 하위지가 뒤따라 이르러 아뢰기를,
"비록 전례(前例)가 있다 하지만 종친이 아뢰어서 자품(資品)을 올려 주었고, 또 공로도 없으니, 청컨대, 이 명령을 거두소서."
하니, 전지하기를,
"이미 대신과 더불어 의논하여서 한 것이니 다시 고칠 수 없다."
하였다. 하위지가 물러가서 또 소장(疏章)을 올리어 사직(辭職)하면서 말하기를,
"신은 종친이 아뢰었기 때문에 가자(加資)를 특별히 받았으니, 대체에 어그러짐이 있는 까닭에 소장을 올리어 사면(辭免)하기를 빌었는데, 곧 명하여 출사(出仕)하게 하셨으나, 그러나 헌사(憲司)는 보통 관원의 예가 아니니 뻔뻔스러운 얼굴로 직사에 나아가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하고, 이어서 아뢰기를,
"헌부(憲府)는 본래 규탄(糾彈)하는 곳이니, 자신의 몸이 바른 다음에야 다른 사람을 바로잡을 수가 있습니다. 종친의 아룀 때문에 부당한 직을 받았으니, 신이 비록 죄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감히 직사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니 의정부에 내려서 이를 의논하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책 6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6책 583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 왕실-종친(宗親) / 왕실-경연(經筵) / 정론(政論)
75.단종실록 6권, 단종 1년 4월 25일 임자 1번째기사 1453년 명 경태(景泰) 4년
하위지를 불러 사장을 돌려주다
집의(執義) 하위지(河緯地)를 불러서 사장(辭狀)을 돌려주니, 하위지가 아뢰기를,
"작명(爵命)은 작은 일이 아니데, 신도 또한 보통 관원이 아니니, 비록 성상께서 출사하라고 명하시더라도 직사에 나갈 수 없습니다. 만약 명령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어찌 5, 6일에 이르도록 아직도 사은(謝恩)하지 않고 이와 같이 번독(煩瀆)하여 청하겠습니까? 신이 이미 세 번 청하였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였으니, 원컨대, 성상의 앞에 이르러서 모조리 품은 생각을 진달한 다음에 스스로 처신할 곳을 정하겠습니다."
하니, 전지하기를,
"내가 이미 너의 뜻을 알고 있다. 또 이미 대신과 숙의(熟議)하였으니, 혐의하지 말고 직사에 나아가라."
하였다. 하위지가 다시 아뢰기를,
"무릇 공사에 잘못된 자는 피혐(避嫌)287) 하는데, 이제 신은 피혐하는 것이 아니고, 마땅히 받지 않아야 할 명을 받았기 때문에 감히 직사에 나아가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비록 소원(疏遠)한 신하라도 진실로 품은 생각이 있으면 마땅히 아뢰지 아니할 수 없는데, 신이 비록 무사(無似)288) 하지만 외람되이 이목(耳目)의 직임을 차지하고 있으니, 한 번 성상의 앞에 이르러서 품은 생각을 두루 아뢰려고 하는데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까? 언관(言官)의 직책에 있는 자가 비록 군상(君上)의 과실을 간(諫)하더라도, 진실로 세 번 간해서 듣지 아니하면 즉 가버리는데, 하물며 신의 작명의 일은 이미 세 번 사면하기를 빌었으나 윤허를 입지 못한 경우이겠습니까? 옛사람이 이르기를, ‘임금을 섬기되 잗달으면 이것은 욕이 된다.’ 하였으니, 이제 다시 성총(聖聰)을 번거롭게 할 수 없으니, 〈신은〉 반드시 친히 품은 생각을 진달하여서 그 거취를 결정하고자 합니다. 이제 종친의 청으로 인하여 특별히 중직 대부(中直大夫)289) 를 더하여 주시니 중훈 대부(中訓大夫)290) 가 되지 않았다면 감당할 수 있으나 중직 대부는 그 직임(職任)을 감당할 수가 없으니, 진실로 중훈 대부·중직 대부가 집의(執義)와 동일한 줄로 알 뿐인데, 돌아보건대, 대체에 누(累)가 되므로 폐단이 장차 작지 않을 것입니다. 대저 작명은 국가의 큰 공기인데, 진실로 그 작명을 가볍게 한다면 이것은 그 나라를 가볍게 하는 것이요, 조종께서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얻은 국가를 성상께서 진실로 마땅히 가볍게 할 수 없으며, 대신도 또한 이와 같이 가볍게 의논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전지하기를,
"나는 오늘 목구멍에 작은 통증이 있어서, 곧 경연(經筵)을 정지하겠으므로, 인견(引見)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내가 너의 뜻을 모조리 아니, 다시 말할 것이 없다. 가서 너의 직사에 나아가라."
하였다. 하위지가 아뢰기를,
"감히 직사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청컨대 사제(私第)에 돌아가서, 성상의 옥체가 회복되기를 기다렸다가 친히 품은 생각을 아뢰겠습니다."
하니, 전지하기를,
"이 뜻을 정부 대신에게 알리겠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책 6권 11장 A면【국편영인본】 6책 583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 왕실-종친(宗親) / 정론(政論)
[註 287]피혐(避嫌) : 혐의가 있을 때 자리를 피하는 것.
[註 288]무사(無似) : 현인을 닮지 않음. 자기를 낮추는 말.
[註 289]중직 대부(中直大夫) : 문관 정3품 품계.
[註 290]중훈 대부(中訓大夫) : 문관 종3품 품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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