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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시에는 모두 28개의 선정비가 세워져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춘천의 역사와 문화유적’,1997년 刊 참조)
대부분 조선시대에 강원도관찰사 춘천부사 등 높은 직에 있던 관리들입니다. 이들 선정비는 남산면 광판리의 서인원
선정비, 서면 덕두원리의 민태호선정비, 신북읍 율문리의 김대근선정비를 제외하고 소양로 1가 소양정 입구에 모아
놓은 비석군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비석들은 조선시대 지방관들의 선정(善政)을 기려 세운 것이나 유독 대표적인 친일파의 거두 이범익을 기리는
선정비가 포함돼 있어 눈길을 끕니다. 이 비는 1934년 3월 세워졌는데, 비석 후면에 일제의 연호인 ‘昭和’를 쪼아낸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후면 글자 : 昭和九年三月 日建)
이범익은 1929년 11월 강원도지사로 승진해 부임한 이래 1935년 2월 충남도지사로 영전하기까지 5년 3개월동안
춘천에서 근무했으니 선정비는 강원도지사 말년에 건립됐습니다.
비 전면에 새긴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德高鳳峀 덕고봉수
江原道知事李公範益永世不忘碑 강원도지사이공범익영세불망비
惠深昭江
※峀(수) : 산굴, 산봉우리
덕성이 봉의산 처럼 높고
은혜가 소양강 처럼 깊다
누구의 선정비인지 모르게 이름을 쪼아내 심하게 마멸된 비가 두 개 더 있습니다.
하나는 ‘觀察使□公□□永世不忘碑’로 성과 이름을 모두 없앴습니다. 다른 하나는 ‘□□□□□□永世不忘碑’로 여섯
글자를 쪼아 버렸습니다. 미루어 보아 이 역시 이범익이나 또 다른 친일인사의 공덕을 기리는 선정비로 추정됩니다.
1934년 3월 세운 선정비의 뒷면의 일본천황의 연호인 ‘昭和’ 두글자를 없앤 자는 이범익의 후손임에 틀림없습니다.
선조의 공덕을 없애기는 아쉬워 일제 치하라는 부끄러운 글자를 대신 가리려 한 건지도 모릅니다.
최근 정선군지역에 있는 이범익 영세불망비를 둘러싸고 현 위치에 보존하되 그 친일행적을 알리는 안내판을
설치하려는 노력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카페 회원들께서는 소양로 1가 비석군 가운데 있는 이범익 선정비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댓글로 의견을 달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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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이범익 ( 李範益 )
민족구분 한국인
본관지 1) 全州
출전 1) 관원이력 1책, 22
생년월일 1) 1883-10-15
2) 1883-10-15
3) 1883-11-00
2) 1883-11-00
출전 1) 관원이력 1책, 22
2) 관원이력 40책, 850
3) 인사흥신, 533
2) 조선공로자, 39
출신지 1) 忠淸北道 丹陽郡 丹陽面(원적)
2) 忠淸北道 丹陽郡 丹陽面 下坊里(원적)
3) 忠淸北道 丹陽郡
출전 1) 인사흥신, 533
2) 기념표창자, 667
3) 조선의 인물과 사업, 177
현주소 1) 漢城 北署 觀光坊 大安洞契 古里井洞 第36(45)統 第4戶
2) 漢城 北署 大安洞 第36統 4戶
3) 江原道 春川郡 春川邑 官舍
4) 忠淸南道 大田知事 官舍
5) 忠淸南道 大田府 官舍
출전 1) 관원이력 1책, 22
2) 관원이력 40책, 850
3) 인사흥신, 533
4) 조선공로자, 39
5) 조선의 인물과 사업, 177
가족관계 부 1) 李瑗夏(관리)
출전 1) 인사흥신, 533
가족관계 배우자 1) 洪順子(1884년 12월생, 洪承五의 딸)
출전 1) 인사흥신, 533
가족관계 자녀 1) 李興鍾(양자, 1911년 8월생, 中央佛敎專門學校 졸업)
출전 1) 인사흥신, 533
가족관계 기타 1) 李範觀(동생, 忠淸北道 鎭川郡守로 재직 중)
출전 1) 인사흥신, 533
현직업 1) 관료(도지사)
출전 1) 조선의 인물과 사업, 177
학력 1) 1890년 修學家塾
1898년 9월 入學外國語學校
1902년 12월 外國語學校 日語普通科 卒業
2) 外國語學校 졸업
출전 1) 관원이력 1책, 22
2) 인사흥신, 533
경력및활동 1) 1903년 5월 28일 任 外國語學校 敎官 敍判任六等
1904년 2월 普光學校 敎師
1904년 6월 學部事務見習
1905년 9월 27일 命 日本國陸軍省 陸軍通譯
1905년 10월 27일 入學 明治大學 法學科 校外生
1906년 3월 29일 任度支部繙譯官補 敍判任官七級
1906년 5월 16일 辭 普光學校 敎師
1906년 5월 28일 依免度支部繙譯官補
1906년 10월 23일 敦明義塾 講師
1907년 3월 5일 任度支部建築所技師 敍奏任官四等七級
1907년 3월 8일 依免日本國陸軍省陸軍通譯
1907년 6월 15일 依免度支部建築所技師
1907년 6월 26일 任農商工部書記官 敍奏任官四等七級
1907년 8월 1일 囑托京城博覽會顧問
1907년 9월 6일 陞六品 進封 皇后時擧冊案執事
1907년 9월 17일 囑托平壤磚業所事務
1907년 9월 25일 囑托京城博覽會審査官
1907년 현재 農商工部 書記官 六品
2) 1903년 5월 28일 任外國語學校 副敎官 判任六等
1905년 3월 29일 轉任度支部繙譯官 補判任七級
1905년 5월 28일 依願免本官
1906년 3월 5일 任度支部建築所技師 奏任四等七級
1906년 6월 15일 依願免本官
1906년 6월 26일 任農商工部書記官 奏任四等七級
3) 1920년 9월에 家督을 상속받음
1903년 外國語學校 부교관
1904년 9월 陸軍通譯
1907년 6월 農商工部 서기관
1908년 1월 農商工部 秘書官
1908년 6월 內部 書記官 겸 秘書官
1912년 10월 江原道 春川郡守
1921년 2월 朝鮮總督府 道事務官으로 승진
1924년 黃海道 內務部長
1927년 6월 慶尙南道 參與官
1929년 11월 江原道 知事로 임명되어 1935년에 이름
러일전쟁 때의 공로로, 1908년 2월 공로금 80원을 하사받은 적이 있음
從4位 勳3等
4) 忠淸南道 知事
從4位 勳3等
1911年 7月 31日 任 朝鮮總督府 屬 內務部 勤務
1912年 10月 14日 任 朝鮮總督府 郡守 敍 高等官 7等 江原道 春川郡 在勤. 12月 28日 敍 從7位
1914年 12月 22日 陞敍 高等官 6等
1915年 3月 20日 敍 正7位. 11月 10日 大禮記念章 授與
1919年 10月 27日 陞敍 高等官 5等. 12月 20日 敍 從6位
1920年 6月 25日 敍 勳4等 授 瑞寶章
1921年 2月 12日 任 朝鮮總督府 事務官 敍 高等官 5等 內務局 勤務
1922年 3月 31日 陞敍 高等官 4等. 5月 10日 敍 正6位
1924年 10月 30日 陞敍 高等官 3等. 12月 25日 任 朝鮮總督府 道事務官 敍 高等官 3等
1925年 1月 31日 敍 從5位
1927年 6月 2日 任 慶尙南道 參與官 敍 高等官 3等
1928年 6月 25日 敍 勳3等 授 瑞寶章. 11月 16日 大禮記念章 授與
1929年 1月 21日 陞敍 高等官 2等. 3月 1日 敍 正5位. 11月 28日 任 江原道 知事 敍 高等官 2等
1931年 9月 30日 陞敍 高等官 1等
1932年 4月 1日 敍 從4位
5) 1903년 外國語學校 副敎官
1904년 9월 陸軍 통역
1907년 6월 農商工部 書記官
1908년 1월 農商工部 秘書官, 1908년 6월 內部 書記官 겸 秘書官
1912년 10월 江原道 春川郡守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慶尙南道 金海, 慶尙北道 達城, 醴泉, 漆谷 등 각 군의 郡守를 역임함
1921년 2월 朝鮮總督府 事務官으로 자리를 옮겼고, 1924년 10월 黃海道 內務部長으로 발탁됨
1927년 6월 慶尙南道 參與官
1929년 11월 江原道 知事로 승진하고, 1935년 2월 忠淸南道 知事로 영전하여 1935년 현재에 이름
6) 26세에 內部 書記官 겸 秘書官으로 활약함
1912년 江原道 春川郡守에 임명되었고 慶尙南道 金海郡守, 慶尙北道 達城郡守, 慶尙北道 醴泉郡守, 慶尙北道 漆谷郡守 등을
역임함
1921년 2월 朝鮮總督府 事務官으로 승진했고, 1924년 10월 黃海道 內務部長으로 영전함
이후 慶尙南道 參與官, 江原道 知事를 거쳐 1935년 2월 忠淸南道 知事에 발탁되어 1936년 1월 현재에 이름
출전 1) 관원이력 1책, 22
2) 관원이력 40책, 850
3) 인사흥신, 533
4) 기념표창자, 667
5) 조선공로자, 39
6) 조선의 인물과 사업, 177
인물평외모 1) 가득찬 패기를 안에 숨기고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기가 살아나지 못할 형상이며, 조선인 관리 가운데
가장 활동적인 인물로, 어느 것에 대해서도 확고한 의견을 가지고 있음
쉽게 타협하지 않고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충분히 검토함
항상 당당한 논리를 펼치며, 결코 적당히 일을 처리하지는 않음
머리도 예리하고 배짱도 있어서 어느 곳에 나가도 어떤 사람을 만나도 의논을 올리고 지시할 수 있는 균형잡힌 자신감을
가지고 있음
黃海道 內務部長 시절에는 지방 유지와 크게 격론을 벌였던 일도 있음
경상남도 參與官이 되고 나서는 조금은 날이 무디어졌음
産業部長으로서 분투할 때는, 그가 없었더라면 .... 이라고 생각될 때도 많았음
江原道 知事로서도 그 명민한 두뇌는 십분 발휘되어 대단한 수완을 보임
때문에 중간 중간에 온화해졌다고 하는 평판이 나왔던 것임
예리한 머리로 계획하고 배짱을 가지고 열렬히 실행하기 때문에 십분 효과를 발휘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임
경상남북도에서는 각지에서 군수가 되었던 적도 있었음
당시에는 젊기도 했지만 넘칠 정도의 원기와 패기가 있었기 때문에 감독관청을 꼼짝 못하게 하는 일도 많았으며, 그것이
연마되어 수완있는 知事로 평판을 얻기에 이르게 된 것임
출전 1) 조선공로자, 39
참고문헌 대한제국관원이력서
조선인사흥신록
조선총독부시정25주년기념표창자명감
조선공로자명감
조선의 인물과 사업-호남편 제1집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한국 근현대인물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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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익(李範益)
이범익(李範益, 일본식 이름: 淸原範益, 1883년 음력 10월 15일 ~ ?)은 대한제국과 일제 강점기의 관료이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 생 애
충청북도 단양군에서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한학을 배우다가 1898년에 관립한성외국어학교에 입학하였고, 1902년에 이
학교 일어과를 졸업하였다. 학교 졸업 후 판임관 6등인 모교의 교관으로 임용되었다.
곧 러일 전쟁이 발발하고 일본 제국의 승리로 끝나면서 일본어에 능통한 조선인의 쓰임새가 많아졌다. 이범익은 러일 전쟁 때
통역으로 일본군을 도왔고, 공을 인정받아 일본 육군 통역으로 일본에 머물면서 메이지 대학 교외생으로 법학 공부를 했다.
이후 한일 병합 조약으로 대한제국이 소멸할 때까지 탁지부와 농상공부, 내부에서 근무하였다.
내부 서기관을 맡고 있다가 조선총독부 체제가 출범하면서 내무부 지방국 소속으로 이동하였고, 1912년에는 강원도 춘천군
군수로 발탁되었다. 이후 경상북도 달성군과 예천군 군수를 거치며 경북 지방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을 겸임하였고,
1921년에는 총독부 사무관으로 승진하였다.
총독부 내무국에서 사무관으로 근무하다가 1924년에 황해도 내무부장으로 발령받았다. 이후로도 승진을 거듭하여 1927년에
경상남도 참여관이 되었고, 1929년에는 강원도 지사, 1935년에는 충청남도 지사가 되었다.
이범익은 중추원 참의로 발탁된 것은 물론, 중일 전쟁 발발 직후인 1937년에 만주국 고위 관료로 임용되어 조선인이 많은
간도 지역을 담당하는 간도성장을 맡았을 정도로 일본 제국의 신임을 받았다. 간도성장으로 재직하면서 간도특설대를
설치하는 등, 일제 강점기 말기에 만주 지역의 항일 운동을 탄압하는 활동을 총괄했다.
러일 전쟁 때의 공로로 은사금을 받은 바 있고, 1915년 다이쇼대례기념장, 1928년 쇼와대례기념장을 수여 받은 것을 비롯하여
일본 정부로부터 여러 차례 훈장을 받았다. 충남지사이던 1935년에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어 있다.[1][2] 1936년을 기준으로 종4위 훈2등에 서위되어 있었다.
"조선인 관리 가운데 가장 활동적인 인물"이며 자신감과 주관이 뚜렷하다는 총독부의 평가가 남아 있다. 젊은 시절에는 특히
투지가 왕성하여 당당한 논리를 펼치면서 다른 사람과 격론을 벌이는 일이 잦았고, 군수 시절부터 이런 모습을 인정받았다.
참여관과 도지사가 된 뒤로는 다소 온화해졌다. 광복 이후에 소비에트 연방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것으로 추정된다.
◆ 사 후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의 중추원, 도지사, 도 참여관, 총독부 사무관의 4개 분야에 수록되었고,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의 중추원과 관료, 해외 부문에 포함되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명단에는 총독부 군수를 지낸 동생
이범관도 들어 있다.[출처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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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익은 강원도지사 시절 관동명덕회(關東明德會)의 총재를 맡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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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익, 이해승 등 특위 경기분국서 문초”
동아일보 1949년 2월 19일자 기사 : 반민특위경기도사무분국에서는 18일 시흥군 군포 역전에 있는 전 강원, 충남도지사이었
으며 간도 省長을 한 李範益(63)을 소환문초중이며 일방 고양군 은평면에 거주하는 전국내부대신 李載純의 양손인 후작
李海昇 (60)을 21일 상오 10시까지 출두하라는 호출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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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기사>
3.1절 94돌, ‘친일파 이범익 단죄비문’ 세운다
소셜미디어프레스바이플 2013.02.12 18:15:31
3.1절 94돌을 맞이하여 ‘친일파 이범익 친일 단죄비문’을 세운다. 이범익은 강원도지사를 지냈으며 이후 만주국 간도로 넘어가
간도성장을 지냈다. 간도성장 재임 시 독립군 때려잡는 '간도특설대'를 만든 인물로 조선인으로서는 만주국의 최고 권력을
누린 대표적 친일파이다.
이범익이 강원도지사로 재임 시 당시 정선군수 김택림(친일파)이 '도지사 이범익 영세불망비'를 세웠고, 그 비석은 지금까지
존재했다. 이에 정선문화연대는 그 비석을 가루로 만들어 땅에 묻기보다는 친일 교육 현장과 친일 연구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정선 시민과 함께 ‘친일 단죄비문’을 3.1절 94돌을 맞아 세운다.
세월이 흘러 이 비석이 먼지가 될 때까지 식민지 백성으로 살았던 그 시대를 곱씹으며 이범익과 김택림의 친일 행각을
기억하고 또 기억했으면 좋겠다.
때 / 2013년 3월 1일 오전 11시
곳 / 정선 아라리촌 비석군
주최 / 참된 세상을 여는 정선문화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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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에세이-24] 정선 아라리촌 친일파 이범익 '공적비' 논란
[정운현의 역사 에세이] 2011/12/05 21:10 정운현
지역을 다니다 보면 옛 지방관아(현 군청이나 시청)나 향교, 서원 인근에 공적비, 송덕비, 선정비 등의 이름이 새겨진 옛
비석들을 줄지어 선 모습을 더러 보실 수 있습니다. 이 비석들은 조선시대 지방관들의 선정(善政)을 기려 세운 것이 대다수이나
더러는 일제 때 군수를 지낸 사람들의 것도 있습니다. 일전에 충남 옥천엘 들렀다가 구(舊)읍내 육영수 여사 생가 앞에 비석이
줄지어 서 있는 걸 본 적이 있는데, 그곳에도 일제 때 군수를 지낸 자의 공적비가 몇 있었던 걸로 기억됩니다. 또 근년에 충남
금산엘 갔다가 금산향교 구경을 간 적이 있는데, 그곳에도 이런 종류의 비석들이 향교 정문 좌우로 줄지어 서 있더군요. 그
몇을 살펴봤더니 일제 때 군수를 지낸 사람들의 선정비였습니다.
충남 금산 읍내 금산향교 정문 좌우로 줄지어 선 비석들
며칠 전, 강원도 정선·영월 등지에서 지역문화운동을 펼치고 있는 강기희(정선문화연대 대표) 선생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강 대표는 소설가이자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도 활동하면서 강원도 지역소식을 전해주곤 하는 분입니다.
서로 안부를 나눈 다음 강 대표는 근황을 전해주다가 재미있는 얘기를 하나 들려주었습니다. 정선의 대표적 관광지인
‘정선아라리촌’에 유명한 친일파의 공적비가 서 있다며 지역시민들과 함께 안내판 건립 등 문제의 공적비 제대로 알리기
운동을 펼치고 있노라고 했습니다. 강 대표는 이 공적비가 일제 때 친일파였던 정선군수가 세운 것이어서 더더욱 문제라고
했습니다. 듣고 보니 그냥 방치해둘 사안이 아니다 싶어 이곳 ‘역사 에세이’ 코너에서 한번 다뤄보겠노라고 했습니다.
정선아라리촌에 있는 문제의 ‘공적비’는 친일파 이범익(李範益, 창씨명 淸原範益, 1883~?)의 것입니다. 이범익은 일제 때
국내는 물론 만주 지역에서 거물 친일파로 활동한 자입니다. 이 공적비는 이범익이 강원도지사 재직 당시 그의 휘하에 있던
정선군수 김택림(金澤林, 창씨명 金光博, 1888~?)이 소화7년(1932년)에 세운 것으로, 1970년대 초반까지는 정선군청 내 마당에
세워져 있었으나 군청 건물을 증축하는 과정에서 정선읍내 비석거리가 있던 우전거리로 이전되었습니다. 그 후 다시 정선
남산 밑, 비봉산 입구 등으로 전전하다가 2008년 정선아라리촌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이 비석은 정선의 충신
윤칠봉의 추모비 등 10여 기와 함께 서 있는데 그 가운데 크기도 가장 클뿐더러 비석의 재질도 최상급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문제의 비석에 대해 한번 살펴볼까요? 강 대표가 보내온 비석 사진과 비문 소개자료에 따르면, 앞면에는 세로로
‘강원도지사 이범익 각하 영세불망비(江原道知事 李範益閣下 永世不忘碑)’라고 새겨져 있는데, ‘불망비(不忘碑)’라는 이름을
단 비석은 다른 곳에도 적잖이 있습니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 대통령을 상징하던 ‘각하’라는 호칭은 일제 때는 도지사급
(고등관 2등 이상) 이상의 고관에게 붙였습니다. 비석 뒷면에는 도지사 시절 이범익의 공적을 극찬한 4언 율시가 새겨져
있습니다. 만약 이런 식으로 공적비를 세울 요량이라면 국회에서 예산 따서 지역구에 다리 놔준 국회의원 모두 공적비를
세워줘야 할 것입니다. 결국 김택림이 세운 이범익 공적비는 다분히 아부용이라고 하겠습니다. 참고로, 비문 제1연 결(結)의
‘이후(李侯)’는 이범익을 말하며, 전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峽絶東郡 環者皆山 협절동군 환자개산
康莊莫通 懋遷極艱 강장막통 무천극간
惟我李侯 何暮東藩 유아이후 하모동번
矜民勞苦 眷愛頻煩 긍민노고 권애빈번
東遷五丁 始達九逵 동천오정 시달구규
以鎰十萬 助給其資 이일십만 조급기자
便宜吾民 從見富殷 편의오민 종견부은
萬口皆碑 永頌厚恩 마구개비 영송후은
깊은 산골짜기 동군이라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사방팔방 막혔으니 힘써 교역하기 심히 어렵네
우리 이후시여, 이 고을에 어찌 이리도 늦었는고!
백성 위해 노고하며 사랑으로 돌보기를 다하셨네
동쪽으로 오력사를 파견하여 사통팔달 뚫리었고
십만 일 거금으로 밑천 들여 자본으로 도와주었네
우리 백성 편의하니 이로부터 넉넉하고 풍성해져
많은 사람 칭찬하니 두터운 은혜 영원히 칭송하네
이범익의 영세불망비(사진-강기희 제공)
비문 내용으로 미루어 보면 이 비석이 세워진 그해(1932년)에 이범익이 정선에 다녀간 것으로 보입니다. 정선지역 향토사
자료에 따르면, 정선의 동쪽, 즉 지금의 화암면인 '동면' 지역은 일제 당시 일본인들이 운영하던 금광이 있던 곳입니다. 현재
화암동굴로 관광명소가 된 이곳에는 '천포광산'이 있었는데, 이 금광은 당시 조선에서 5대 금광 중 하나로 불렸습니다. 광산이
있던 이곳은 정선에서 전기가 가장 먼저 들어왔는데 이는 금광 때문이었습니다. 추정컨대 이범익은 강원도지사 재직 시절(1929~1935) 일본인들의 채금작업을 지원하기 위해 금광 인근까지 신작로를 개설하거나 또 기타 부대시설을 지원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때 든 비용이 ‘십만원’이었고, 이를 고맙게 여긴 당시 정선군수 김택림이 문제의 공적비를 세운 셈입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문제의 비석과 관련된 정선군수 김택림과 강원도지사 이범익의 일제하 친일행적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평남 평양 출신의 김택림은 16세 되던 해인 1904년 평남 중화군 사립 일어학교 특별과를 졸업한 후 평양감리서 통역을 거쳐
관리로 진출했습니다. 평남, 강원도 일대 군청 서기 등을 지낸 그는 1930년 군수로 승진해 강원도 정선군수에 임명돼 만 3년간
재직했습니다. 군수 재직 중 그는 ‘훈6등 서보장’을 받았으며, 퇴임 후에는 김화상사(金化商事) 감사역, 김화군소작위원회
예비위원, 김화수리조합 간부 등을 지냈습니다. 군수 출신임에도 이례적으로 그는 1936년 강원도 통천군 순령면장에 임명되
었는데, 이듬해 중일전쟁이 터지자 군수품 공출, 군사원호, 국방헌금품 모집 등 전쟁지원 업무를 적극 수행하였습니다. 그는
또 태평양전쟁 발발 후인 1943년 3월 강원도 통천군민들이 모금하여 구입한 애국기 ‘통천호’ 헌납식 때 통천군수와 함께
헌납대표로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군수 출신 가운데는 친일행위가 구체적이며, 적극적인 인물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음은 이범익. 이범익은 수많은 친일파 가운데 1등급에 드는 거물입니다. 그가 일제(만주국 포함) 때 역임한 대표적 직함
몇을 소개하면, 중추원 참의·도지사·만주국 참의부 참의·간도성 성장(省長) 등으로 이는 엔간한 친일파라도 하나 맡기도 어려운
고위직이랄 수 있습니다. 중추원 참의 하나 빼고는 모두 막강한 권한을 가진 자리였으며, 특히 그는 국내와 만주에서도 요직을
맡았던 몇 안 되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해방 후 반민특위에서 ‘기소유예’로 풀려났습니다.
이범익은 반민특위가 활동을 개시한 지 두 달만인 1949년 3월 반민특위 경기도조사부에 의해 체포돼 조사를 받았으나
반민특위가 문을 닫기 직전인 8월에 기소유예로 풀려나 면죄부를 받은 셈입니다. 그의 생몰연대에서 사망연도가 없는 것은
그가 한국전쟁 때 납북됐기 때문입니다. 오욕으로 얼룩진 그의 삶을 추적해 보겠습니다.
1883년 충북 단양 출신인 이범익은 1903년 4월 관립 일어학교를 졸업했는데, 그의 공적비를 세운 정선군수 김택림과 출발이
비슷한 셈입니다. 이후 외국어학교 부교관으로 근무하던 중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1904년 8월 경성병참사령부 통역을
시작으로 1907년 3월까지 한국주차군사령부에서 통역으로 종군하였습니다. 이같은 공로로 그는 1908년 일본 정부로부터
은사금 80원을 받았습니다. 이후 그는 대한제국 내각에 들어가 번역관을 지내다가 1912년 군수로 승진해 강원도 춘천군수로
첫 발령을 받았습니다. 이후 경북 여러 곳에서 군수를 지낸 후 1921년 사무관으로 승진해 조선총독부 내무국 내무부장을 거쳐 1927년 경남 참여관으로 옮겼습니다. 1929년 강원도지사(고등관 2등)에 임명돼 6년간 근무했는데, 바로 이 때 문제의 공적비가
세워졌습니다.
이범익
이후로도 그는 탄탄대로를 걸으며 승승장구하였습니다. 강원도지사를 물러난 후 곧바로 충남도지사(고등관 1등) 전임된 그는
2년 뒤인 1937년 2월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 참의(칙임관 대우)에 임명되어 그해 7월까지 재직했습니다. 당시 총독은
미나미 지로(南次郞)였는데, 관동군 사령관 출신인 미나미는 시정방침의 하나로 ‘선만일여(鮮滿一如)’, ‘조선과 만주는
하나’라는 기치를 내걸고 만주지역에 큰 관심을 두고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이범익은 그해 8월 금산 군수 출신의 김창영
(金昌永, 일제말기 경북도지사 역임) 등과 함께 만주로 전입하여 만주국 국무원 촉탁(간임관 대우)에 임명되었고, 다시 11월
간임관(簡任官, 조선의 칙임관에 해당함) 1등의 만주국 간도성 성장(省長)에 임명되었습니다. 조선인으로서 만주국 성장을
지낸 사람은 그가 유일합니다.(유홍순은 간도성 차장을 지냄)
간도성은 동북3성 가운데 하나로 조선인들이 대거 거주하던 곳이어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간도성장 재임
시절인 1938년 그는 간도 일대의 조선인 항일부대를 섬멸하기 위해 만주국군 내에 특수부대 조직을 제안했는데, 이 부대가
바로 백선엽 등이 근무했던 소위 ‘간도특설대’입니다. 일제 패망 때까지 간도 지역에서 활동한 간도특설대는 동북항일연군과
팔로군에 대한 100여 차례의 공격은 물론 민간인에 대한 강간·약탈·고문 등으로 악명을 떨쳤습니다. 이범익은 간도지역 항일
무장 세력에 대한 귀순공작 등을 목적으로 1940년 10월 만주국 수도 신경(新京)에서 발족한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
(東南地區特別工作後援會)’의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특무공작에도 깊이 관여하였습니다. 당시 그와 함께 간도에 파견되었던
김창영은 동북항일연군 소속 김일성(金日成)부대에 귀순공작을 펴 큰 타격을 입히기도 했습니다.
또 이범익은 1942년 2월 조선인의 근로보국(勤勞報國)을 내용으로 하는 ‘국민개로운동(國民皆勞運動)’을 제안하였으며, 그해
5월 일제가 조선에서의 징병제 실시를 결정하자 만주지역 친일지인 <만선일보>에 징병제 실시를 환영하는 담화를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일제 패망 두 달 전인 1945년 6월 만주국 참의부 참의를 사임한 그는 만주로 건너간 지 8년 만에 조선으로 귀국하였
으며
귀국 직후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습니다. 20세 때 일어학교 졸업한 후 러일전쟁 때 일본군 통역으로 친일의 길에 들어선 그는
만 41년간을 친일로 일관했습니다. 바로 이런 자를 칭송하는 비석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에 버젓이 서 있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정선 아라리촌에 있는 비석들로 왼쪽 끝이 이범익의 공적비임(사진-강기희 제공)
그러나 정선군청은 여태 이렇다 할 입장표명도 하지 않은 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고 합니다. 얼핏 생각하면 이 비석을
철거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철거만이 능사는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치욕의 역사를 길이 남겨
후세에 역사 교훈의 증거자료로 삼는 것도 의미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정선문화연대측은 최근 성명을 통해 "비석을 철거하자는
여론이 높지만 친일파의 흔적을 없애 그들에게 면죄부를 주느니 아픈 역사이지만 도려내기 보다는 품기로 했다"며 이범익의
공적비 옆에 그의 친일반민족 행적을 알리는 안내판 건립 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강 대표에 따르면, 12월 중순경 안내판을
세울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로써 친일파가 세운 친일파 공적비는 이제 오욕의 역사를 증언하는 역사교육의 산 자료로 길이
활용될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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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참 어려운 이야기네요.
제 개인적인 견해로는 친일이고 싸잡는것 보다는 잘못한 조목을 명확하게 기록해서
잘못된 선정비 임을 후대에 알리는 것이 좋을까 합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없애는 것은 손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동의합니다.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행정가, 특히 강원도와 같은 지방에서는 일제시대의 경력이 암암리에 인맥을 통해 존숭되는 분위기가 이어오면서 이런 선정비도 버젓이 여느 선정비가 있는 비석군에 온존되었다고 봅니다. 나도 <춘천의 근대풍경 3제>에서 등선폭기념비를 주해하며 인물 주석을 달았지만, 특히 만주국에 가서 독립군을 공격한 행위는 절대로 반민족적인 죄로서 용서할 수 없다고 봅니다. 친일인명사전에서도 그렇게 규정했고요. 언론에 환기하여 자꾸 지적하고 그 자리에 가만두어서는 안 된다는 여론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간도특설대는 바로 박정희 같은 장교가 몸담았던 일제의 선봉부대였지요.
전에 원주감영을 관람하다가 선정비군에 명문이 모두 쪼아져 지워진 비석을 보았습니다만.. 그렇게 해놓으니 단죄해야할 대상이 누구인지도 없게 되고 말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쪼아버리더라도 이름자를 확인할 수 있게 하든가 가능하다면 단죄 대상의 비석을 거꾸로 세우는 것은 어떨지.... 그렇게 한다면 단죄의 의미도 부여하고, 주위 선정을 베푸신 다른 분들께도 누가 되지 않을 듯 싶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