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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차 (8.19), 월, 춘천동부교회 김한호 담임목사외 33명은 유럽 종교개혁지 5개국 탐방을 위해 2019.8.19.12:00 인천국제공항에서 아시아나 항공기를 타고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을 향하여 이륙하였다. 11시간 10분을 날아간 아시아나 항공기는 같은날 16:27분에 독일 프랑크 푸르트 공항에 무사히 착륙하였다, 우리일행은 입국수속을 마치고 공항에서 현지 가이드 최진호씨를 만나 체코 출신 운전기사의 리무진 버스에 탑승 약 10분을 달려서 아이젠나흐 (Eisenach)에 도착해서 독일식당 Augustiner에서 현지식으로 저녁을 먹고는 숙소인 시외곽에 있는 펜타 하우스 호텔에 짐을 풀었다.
2일차 (8.20), 화, 06:30분에 호텔식당에서 양식으로 아침을 먹고 우리 일행은 08:20에 버스에 탑승 아침 경건의 시간을 갖고 에르푸르트로 이동 게으르게 교회에 들렸다.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10대를 그 교회에서 성가대 대원으로 보냈다고 한다.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바흐도 이 교회 출신이다. 에르푸르트 주택가 골목을 지나면서 가이드는 프랑스 루이 14세는 목욕을 싫어하고 두려워했으며 몸에서 악취가 나기로 유명했다고 한다. 의사의 처방으로 치아를 일부러 뺐다고 한다. 독일의 괴테도 이불 빨래도 자주 안했다고 한다. 그래서 몸에서 악취가 풍겼다고 한다. 중세는 화장실이 없었고 잘 사는 사람들은 집안에다 요강을 두고 살았다고 한다. 용변을 보고는 2층집 창문을 열고 밖으로 내던졌다고 한다. 길거리에서 냄새가 났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불편을 끼쳤다고 한다. 고로, 귀족 남자들을 위해 하이힐이 처음 나왔고 향수를 몸에 바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버스에 탑승, 바르트부르크(Wartburg)성으로 향하였다. 이 성은 루터가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10개월간 숨어지내면서 유배생활을 했던 곳으로 루터는 여기서 쉬지않고 고대 그리스어(히브리어)를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루터가 성경번역 작업을 했던 방에는 나무 책상과 의자만 놓여있었다. 루터는 번역 작업중 악마가 나타나 방해하므로 쓰고 있던 잉크 병을 집어던졌다고 한다. 루터기념관에서 루터 초상화가 있는 우편엽서 6장을 샀다.
점심은 독일식당 Werser에서 돈가스를 먹었다. 루터는 20대에 에르푸르트(Erfurt)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사제서품을 받고 에르푸르트 수도원 사제가 되어 처음 미사를 드렸는데 거기는 얀 후스에게 사형을 내려 죽게 한 요하네스 검사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그런데 얀 후스(Jan Hus,1372~1415.7.6)는 루터보다 100년 전에 종교개혁을 하다가 순교를 당하였다. 후스는 죽기 전에, 자신의 이름이 거위(goose)를 뜻하는 것에 빗대, 지금 당신들은 거위 한 마리를 태워 죽이지만 백년 뒤 백조가 나타나리라는 예언 같은 유언을 남겼다. 그런데 실제로 루터는 인지하지 못했지만 후스의 예언대로 100년 후에 바로 그 교회, 후스를 죽인 검사가 묻혀있는 바로 그 에르푸르트 수도원 교회에서 루터는 신부가 되어 처음 미사를 드렸으니 루터의 종교개혁은 배후에서 하나님이 하신 것이 분명하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는데 도와 준 사람이 많지만 그 중에 가장 중요한 3명이 있는데 멜랑히톤(1497~1560), 작센의 선제후(프리드리히), 그리고 루터의 아내 카타리나 폰 보라(Katharina von Bora,1499~1552)라고 한다. 루터의 장점은 웅변가이고 설교가인데 성격은 급하고 불같았다고 한다. 우리의 짐을 Best Western 호텔에 풀고 저녁은 인근 독일 식당에서 독일식 전통음식을 먹었다.
3일차 (8.21), 수, 호텔식당에서 아침을 양식으로 먹었다. 어제 바르트부르크성에서 산 우편엽서 6장을 부쳐 달라고 프런트데스크에 맡겼다. 루터는 비텐베르크성에서 30년동안 살면서 성서학 박사학위를 받고 결혼도하고 6명의 자식을 두었다고 한다. 일행 중 여자 교인 한명이 춘천에 있는 남편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급히 가이드와 같이 프랑크푸르트 공항으로 떠났다. 고로 탐방인원은 33명이 되었다. 루터가 1520년 교황청으로부터 받은 파문장을 불태운 후 참나무를 심었다는 현장, 지금은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으로 참나무 102그루가 심어져 있었다. 루터가 파문장을 불태웠다는 장소도 걸어가서 보았다.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붙혔다는 비텐베르크 교회정문에도 걸어가서 보고 단체사진도 찍었다. 비텐베르크 교회 탐방 중 들은 얘기인데 독일 교인들은 한국교회 젊은이들이 독일 교회를 방문하는 걸 부러워한다고 들었다. 루터는 비텐베르크에서 살면서 설교를 3천번 넘게 하였다고 한다. 루터의 무덤이 있는 슬로스 교회에는 루터와 멜랑히톤의 무덤이 있고, 루터의 종교개혁과 관계 없는 황제의 무덤도 있었다. 루터의 아내 카타리나는 루터가 죽자 자식들을 데리고 수도원을 나와 홀로 일을 하며 독립적인 생활을 꾸려나갔다고 한다. 생활력이 강한 지혜로운 여자였다.
11:30에 비텐베르크 교회 앞 독일 식당에서 현지식으로 점심을 먹었다. 체코 가이드 정주영씨를 만나고 우리 일행은 버스로 프라하를 향하였다. 17:20분에 프라하에 도착, 프라하 시내에서 화약탑과 까를교를 답사하였다. 18:00경에 현지 체코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밤 9시경에 Mama Shelter 호텔에 투숙하였다.
4일차 (8.22), 목, 호텔식당에서 양식으로 아침을 먹고 08:30에 버스에서 경건의 시간을 갖고 프라하성(대통령궁과 비투스성)으로 이동 관람하다, 프라하성은 지대가 높아 프라하 시내가 잘 내려다 보였다. 전차를 타고 3블록 시내로 내려가서 내리고 걸어서 카를교를 건넜다. 10:15에 베들레헴 교회를 들르다. 이 교회는 얀 후스의 종교개혁 첫번째 교회고 얀후스가 설교했던 교회다. 그는 종교개혁의 선구자다. 얀후스의 일대기가 교회 벽에 그려져 있었는데 그의 설교와 화형장면을 보고 가슴이 뭉쿨하였다. 11시 10분 전에 급히 걸어서 프라하시 광장 시계탑이 있는 곳으로 가서 11시 정각에 시계탑에서 종 치는 걸 관람하였다. 단 몇 초간이었다. 수 많은 사람들이 별 것 아닌데 운집하였다. 남이 가니까 나도 무조건 간다. 이런게 군중 심리인가 보다.
1415년 7월 6일 콘스탄틴 공의회는 친 얀 후스를 소환해 놓고 네가 종교개혁에 할말이 있으면 지금 여기서 말할 수 있다고 해놓고는 대주교는 얀 후스가 말하거나 질문 할 수 있는 기회도 전혀 주지않고 사형을 시켰다고 한다. 그래서 1차 종교전쟁이 일어났다. 프라하 광장에는 27명의 순교한 기독교인들의 처형 장소가 도로 보도 위에 표시되어 있었다.
11:25 현지 한국 식당에서 점심에 밥과 두부찌게를 먹었다. 오랜만에 밥을 먹으니 속이 편안했다. 일행은 12:45 버스를 타고 1시간 30분을 달려서 타보르에 도착하였다. 타보르에는 후스 기념박물관과 카타콤베가 있다. 타보르는 인구가 적은 시골인데 산 정상에 성과 집들이 지어져 있다. 오후 2:30에 산정상에 있는 드보락 호텔에 먼저 도착하여 체크인을 하고 후스 박물관 탐방에 나섰다. 당시 종교전쟁 후 가톨릭에서는 후스의 흔적들을 모두 지워버렸고 전시된 물건들은 추정해서 만들어 놓은 것들이라고 한다. 가톨릭측에서 300년간 체코를 지배하였으니 후스의 흔적을 전부 불살라버리고 왜곡시켜 놓았다고 한다. 거기에 갑자기 얀시지과 장군이 등장하는데 그 역시 개신교도로서 종교전쟁에서 세번 싸워서 세번 이겼는데 관대한 장군으로 소개되고 있다. 체코와 합스부르크가의 역사를 모르고 가이드의 설명만을 들으니까 끝나고 나면 바로 잊어버리기 일쑤다. 박물관 밑에 있는 당시 개신교인들이 숨어 지냈던 지하동굴 카타콤베에 안전모를 쓰고 현지 체코인 직원의 안내로 둘러 보았다.
얀 후스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사제 서품을 받고 신부가 되어 까를 대학교 학장이 되었다. 후스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사회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면죄부에 대해 가톨릭에 비판적이었다. 후스파 사람들은 믿음을 지키고 전쟁을 하기 위해서 프라하에서 빠져나와서 타보르 산 위에다 성을 지었다고 한다. 저녁식사는 타보르 광장에 있는 현지 식당에서 먹고 드보락 호텔에서 일박
5일차 (8.23), 금. 아침 07시에 호텔식당에서 양식으로 아침을 먹었다. 8시 버스 탑승, 오늘은 내가 경건의 시간 담당이다. 8월 23일 탐방 5일차 아침 경건회,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딤후 2:10-12절, 그러므로 내가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다음은 기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금번 유럽 종교개혁지 탐방 목적은, 기독교의 복음은 명확하게 전달되어야 한다는 것과 성령은 성경을 통해서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희들은 하나님 알기에 무지했고 하나님 앞에 교만한 죄인들입니다. 하나님 아는 일에 뱀처럼 지혜롭고 비들기 같이 순결하지도 못했습니다. 저희들은 에스겔 골짜기에 마른뼈들입니다. 저희 믿음을 긍휼히 여기시고 모세와 욥과 같은 온유 겸손한 마음을 내리어 주시옵소서!
간구하옵기는 금번 탐방을 통하여 마른뼈들에게 생기를 불어 넣어 주시옵소서! 위기를 기회로 삼을 수 있도록 은혜 내리어 주시옵소서. 안전 안전 오늘 탐방 일정도 전부 주님께 맡기오니 주관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우리 일행을 태운 버스는 타보르 시를 벗어나 고속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1시간 30분 걸려 체스키크롬노프에 09:40분에 도착, 성내로 들어갔다. 이건 요새다. 체코의 체스키크롬느프 성은 한 다리를 사이에 두고 10명으로도 천명을 방어할 수 있게 건축되었지만 전쟁은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성내를 둘러보고 점심은 강변에서 체코 현지식을 먹었다. 관광기념품점에서 손자 손녀들을 위한 선물을 샀다. 1시간 동안 광장 주변 관광거리를 거닐었다. 12:55분에 체스키크롬노프에서 정주영 가이드와 헤어지고, 우리 일행은 같은 버스로 오스트리아를 행하여 달렸다. 오후 4시 넘어 잘츠부르크에 진입, 정은미(여) 가이드를 만났다. 잘츠는 소금이라는 뜻, 잘츠부르크에서 소금이 많이 났다고 한다.. 그녀의 안내로 잘츠부르크의 미라벨 궁전을 들러보고 모자라트 생가, 모자라트 거리, 잘츠부르크 대성당을 둘러보고 15분 걸어가서 저녁은 중국 식당에서 중국음식을 먹었다. 19:40분에 버스를 타고 10분 걸려서 Austria Trend 호텔에 도착했다.
6일차 (8.24), 토, 아침은 호텔식당에서 양식으로 먹고 08:30분에 찰츠캄머굿으로 향하다. 찰즈캄머굿 하면 소금이 저장된 좋은 곳이란 뜻이다. 사실 오스트리아 영토는 73%가 산지인데 알프스 산맥은 1억5천만년전에 바다가 솟아 올라와서 육지가 되었다고 한다. 오스트리아에는 76개 호수가 있는데, 네번째 호수가 있는 상트길겐(St.Gilgen)이라는 작은 시골 마을에 도착하였다.
11:30분에 현지 식당에서 돈가스로 점심을 먹고 정은미 가이드와 헤어지고, 12:15분에 버스는 인스부르크를 향하여 달렸다. 3시간 이상을 달렸는데 버스 차창 밖의 풍경은 푸른 나무와 목초지로 가득 찼다. 15:30에 인스부르크에 도착, 양경자(여) 가이드를 만났다. 1시간 가량 시내 투어, 인스부르크는 동계올림픽을 세번이나 개최하였다. 양경자 가이드가 약속시간보다 16분 늦게 도착하자 체코 출신 버스기사가 양경자씨에게 화를 냈다.
우리 일행은 16:45분에 버스를 타고 스위스 취리히로 달렸다. 저녁 8시경에 취리히 공항 부근에서 현지 가이드 용수해(여)씨를 만났다. 바로 식당으로 직행하여 현지식으로 저녁을 먹고 버스로 30분 달려 밤 9시에 Meierhof 호텔에 도착했다. 용수해씨는 스위스에서 좋은 점은 물과 교육제도라고 한다.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과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스위스를 방문하고 이 교육제도를 자국에 적용하려고 했지만 국민의식 수준이 따라주지 못해서 못한다고 들었다. 1850년경에 취리히시의 개신교는 천주교에 비해 90% 정도였는데 지금은 역전되어 천주교가 개신교보다 조금 많은 34%, 개신교는 32% 정도라고 한다. 지금 스위스 사회 분위기는 말이 종교지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한다. 그런 말을 들으니 우울하다. Meierhof 호텔에서 일박
7일차 (8.25), 주, 오늘은 취리히에서 맞는 주일이라 06:00시에 호텔식당에서 양식으로 아침을 먹고 07:00시에 호텔 1층 회의실에서 황수영 목사의 사회와 김한호 담임목사의 말씀과 축도로 8월25일 주일예배를 간단히 드렸다.
08:00시에 우리 일행은 취리히에서 버스로 3시간 반이나 달려서 제네바에 도착하였다. 스위스는 14개 대학이 있는데 초등학교 때부터 인성교육을 한다고 한다. 대학은 적성상 필요한 사람만 가는데 대학까지 무료라고 한다. 초등학교는 8년제, 중학교 3년(정확히 진로를 결정 과정이라 부름), 고등학교는 4년과정으로 운영되고 있다. 스위스는 주정부에서 해당 교회에 목사나 신부를 파견한다고 하며, 월급과 집을 준다고 한다. 직장에서는 종교 얘기는 거의 없고 상호 친해 질려면 종교, 정치, 얘기를 안하는 게 좋다고 한다. 이혼율이 50%가 넘는다고 한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어떤 본보기나 모델 없이 각자의 의지나 신념으로 살아가는 사회다. 스위스는 중세기 때는 너무 못살아서 프랑스에 용병도 보냈고 18~19세기 초에는 남미로 이주까지 보냈다고 한다. 그랬던 스위스가 지금 잘 살 수 있었던 건 정직과 직업정신과 성실 덕분이라고 한다.
11:30분에 제네바시에 도착, 중국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유명한 제네바 대학 운동장으로 갔다. 거기에는 유럽 종교개혁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대리석 돌로 만든 거대한 기념비가 있다. 기념비 중앙에 종교개혁가 4명이 서있는데 왼쪽부터 파렐, 칼빈, 베제, 녹스의 순서였다. 그리고 기념비에는 라틴어로 POST TENEBRA LUX (어둠 뒤에 빛이 있으라) 라고 적혀 있었다. 칼빈은 프랑스 출신 종교개혁가인데 스위스에 25년간 살면서 신앙고백문을 작성하므로써 종교개혁을 완성하였다고 한다. 칼빈에게는 죽기 4년전에야 스위스 시민권이 주어졌다.
우리 일행은 걸어서 칼빈이 설교했던 칼빈교회(피에르 사원)을 가 보았다. 외형은 큰 성당 모습이지만 내부에있는 가톨릭 장식물을 다 떼어내고 오직 말씀만 전하기 위해서, 설교대와 칼빈의 나무 의자만 있었다. 칼빈이 성경공부를 시킨 방에서 우리 일행 33명은 서서 합심 기도하고 “내 영혼이 은총 입어” 라는 찬송가를 부르고 그 교회를 나왔다. 칼빈은 1536년 스위스에서 유렵의 종교개혁을 완성 시켰다. 지금 스위스에서는 기독교가 살아움직이는 게 아니고 다만 문화적으로만 존재한다는 가이드의 설명에 기독교 역사는 반복한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 일행은 13:18분에 버스로 제네바에서 샤모니로 향하였다. 샤모니는 프랑스 땅이다. 스위스에서 프랑스 국경으로 넘어가는데 검문소가 있었는데 직원 한 사람이 나와 서 있었다. 우리 운전기사가 가서 신고를 하고 나와 버스는 몽블랑을 향하여 계속 달렸다. 1시간 30분 걸려서 샤모니에 도착하였다. 샤모니는 해발 1035m의 작은 마을이고 거기서부터 몽블랑 정상에 올라가는 것이다. 샤모니 지상에서 케이블카를 타면 첫번째 기착지 2000m 산에 도달하여 내리고 케이블카를 바꿔타면 2525m 몽블랑 정상에 도착한다. 산정상에서 30여분간 아래로 주변 경치를 바라보다가 15:50분에 역순으로 하산하기 시작해 출발 지점에 도착하였다. 샤모니는 1924년에 제1회 동계올림픽이 개최되었던 곳인데 세계 최고의 산악인들이 모이는 곳이라고 한다.
여기서 제네바 시내로 가서 한국식당에서 육개장으로 저녁을 먹고 제네바시 주변 레만호로 가서 호수와 꽃시계 공원을 구경하고 18:45분에 제네바 Best Western 호텔에 짐을 풀었다. 체코 출신 운전기사는 여기서 우리와 헤어졌다. 이탈리아인 운전기사가 버스를 몰고 제네바로 와서 내일 우리 일행을 태우고 이탈리아 밀라노로 가기 위해서 여기서 하루 밤을 잔다고 들었다.
8일차 (8.26), 월, 호텔식당에서 양식으로 아침을 먹고 가이드의 인도로 07:35분에 스위스 제네바에서 이탈리아인이 운전하는 버스로 이탈리아 밀라노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324km 거리다. 13:00에 밀라노시에 진입하여 임성경 가이드를 만났다.
14:25에 이탈리아 식당에서 현지식으로 점심을 먹고 출발하였다. 이탈리아 밀라노는 유럽 10개 도시 중에 들어가는 도시라고 한다. 그만큼 살기 좋은 곳이리라. 이탈리아가 현재 잘 살 수 있는 것은 장인정신(가내공업)과 농업 3모작을 할 수 있고 관광산업이라고 한다. 15:00에 스포르체코성에 가서 밀라노의 두오모 성당, 빅토리아 2세 갤러리, 라스칼라 극장을 둘러보았다. 17:27분에 이탈리아 식당에서 피자를 저녁으로 먹고 Cosmo Palace 호텔에서 일박.
9일차 (8.27), 화, 07:00에 호텔식당에서 양식으로 아침을 먹고 08:00시에 버스를 타고 피란체를 향하여 달렸다. 오늘은 피렌체에서 4시간 정도 들려서 관람을 하고 다시 버스를 타고 3시간을 달려서 로마까지 가서 저녁을 먹는다. 이탈리아는 소련의 체르노빌 사고 때문에 핵원전이 없는 나라라고 한다. 지금까지도 기형아가 태어난다고 한다. 그래서 국가 전기사용량의 70~80%를 외국에서 수입해 사용한다고 한다. 화력발전도 없다.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가로등이 없다. 밀라노에서 피렌체까지 버스로 달리는데 차창 밖으로 내다보니 모두가 평야지대다. 이탈리아에서는 세금을 안낸 물건을 샀다가 경찰에 적발되면 몇 십배의 벌금을 문다고 한다. 실제로 한국 관광객이 공원에서 한 이동상인으로부터 셀카를 샀다가 경찰에게 적발되어 3600유로(한화 500만원)을 카드로 결제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탈리아는 비도 많이 오고 태양이 많이 내리쬐어 땅도 비옥해서 농업국가 라고 한다. 피렌체에는 메디치 라는 가문이 있었는데 그 가문이 예술인들에게 많은 투자를 함으로써 르네쌍스가 이탈리아에서 최초로 일어나게 되었다. 피렌체는 5백년된 도시다. 피렌체 언덕에 올라 시내를 바라보니 옛날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도시를 옛날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서 도시차량진입 허가제를 시행한다고 한다. 만약 모르고 시내로 들어갔다가는 10배의 벌금을 물린다고 한다. 실제로 승용차의 경우 50만원 벌금을 문다고 한다. 이탈리아의 밀라노 피렌체 로마 모두가 수백년 된 역사적인 도시다. 5백년전 피렌치 인구가 5천명이었는데 피렌체 가문에서 예술인들에게 투자를 하니까 나중에 거기서 천명의 천재가 나왔다고 한다.
12:43에 현지 이탈리아 식당에서 스파게티로 점심을 먹고, 13:35분에 피렌체 두오모 성당, 단테 생가를 탐방했다. 우리 33명 일행 중 장로 한분이 가방을 등에 매고 서서 가이드의 설명을 듣다가 가방에 넣어둔 현금 2백만원이 든 지갑을 소매치기 당했다. 목격자에 의하면 젊은 여자가 혼잡한 틈을 타서 파고 들더니 번개 같이 가방에서 지갑을 빼갔다고 한다. 독일에서부터 가이드들이 귀가 따가웁도록 소매치기를 조심하라고 신신 당부를 했었다. 이탈리아는 의료선진국이라고 한다. 비록 죽을 범인이라도 사고를 당하면 일단 수술을 해서 생명을 살려놓고 죄를 묻는 다고 한다. 그리고 먹는 것을 가지고 누가 장난을 치면 국가에서 엄벌을 하기 때문에 부정식품이 없다고 한다. 17:50분에 한인 식당에 들러 제육볶음과 된장찌게로 저녁을 먹고 Ergife 호텔애 투숙했다.
10일차 (8.28), 수, 오늘은 다른 때와 달리 06:00시에 호텔식당에서 양식으로 아침을 먹고 호텔에 짐을 놔두고, 07:40분에 버스를 타고 남쪽 나폴리 소렌토를 향하여 달렸다. 나폴리는 현재 마약 천국이라고 한다. 무솔리니가 마피아 소탕을 위해 시칠리아로 쳐들어가니까 마피아가 이탈리아 전역으로 파고 들었다는 것이다. 영국은 마약 때문에 세계 10대 가지 말아야 할 곳으로 나폴리를 뽑았다고 한다. 12:00에 폼페이 도착, 250년전에 한 농부가 땅을 파다가 거대한 기둥이 발견된게 지금도 발굴이 계속 되고 있고 그로 인하여 폼페이는 인류 고고학의 보고가 되었다. AD 79년에 폼페이 도시에 화산이 81~700m까지 깎여 나갔다고 한다. 화산폭발의 징후가 나타났는데도 사람들은 화산 폭발을 보지 못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산 정상에서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기 시작하니까 누가 산 꼭대기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알았다고 한다. 그걸 보고 눈이 온다고 말했다고, 그들의 단어에는 화산이 없었기 때문이다. 손톱만큼한 화산 분출물들이 집으로 날아와 2~3m씩 쌓였다고 한다. 집으로 간 사람들은 지붕이 내려앉고 문을 열 수가 없었다고, 전체 화산 분출물이 도시에 내려 5~6m 씩 검은 구름비가 내려서 얼음처럼 굳어버렸다고 한다. 아침에 분출하기 시작해 저녁에는 도시가 매몰되어 폼페이 최후의 날이 되었다. 과거에 있었던 모든 것이 현재 폼페이 도시 속에 잠들어 있다.
이탈리아는 대리석이 많이 나기로 유명하다. 미켈란젤로가 대리석으로 조각품을 만들었다. 또 이탈리아는 오래 사는 올리브 나무가 많다고 한다. 대리석과 올리브가 많은 것도 이탈리아가 잘 사는 이유가 된다.
12:18에 VISVUSO 라는 이탈리아 현지 식당에서 스파게티로 점심을 먹고, 13:00에 소렌토를 향하여 달렸다. 언덕에서 사진을 찍고 휴식을 취한 후에 14:00에 나폴리를 거쳐 로마로 향하였다. 나폴리는 지저분했다. 마피아가 나폴리 쓰레기 산업을 장악해 쓰레기를 아무 땅에다가 묻기 때문이란다. 그럼에도 전 세계 사람들이 쏘렌토로 오는 이유는 노래 칸초네의 본 고장이기 때문이다. 16:15분에 휴게소에서 버스 운전기사를 위해 15분간 체류 하였다. 내일은 바티칸을 탐방하고 한국으로 돌아간다. 어제는 로마를 북쪽에서 입성 했는데 오늘은 남쪽에서 입성하게 됐다.
18:40시에 로마입성 전에 금강산이란 한국 식당에서 육개장으로 저녁을 먹고 19:30에 ERGIFE 호텔로 돌아왔다.
11일차 (8.29), 목, 탐방 마지막 날, 06:00에 기상과 동시에 식사를 하고 08:00에 버스를 타고 08:10에 바티칸 시국(State of the Vatican City)에 도착하였다. 세계에서 가장 작은 독립국이다. 바티칸 입장을 위해서는 입장권이 필요했다. 정문은 이탈리아와 세계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로 붐볐다. 바티칸은 로마 시내의 작은 국가로 영토 0.44㎢에 인구 800명 정도, 교황을 원수로 하는 전세계 10~15억 가톨릭 신자들의 총본부다. 1929년 2월 11일 무소리니와 교황이 협상을 통해 현재의 영토로 인정을 한 것이다. 바티칸은 베드로 대성당과 시스티나 성당, 라파엘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베드로 대성당은 세계 제일의 성당으로 4세기에 지어 16세기 초부터 개축했고 공사비를 마련하느라고 성직매매와 불법으로 면죄부를 판매해 충당한 것으로 유명하다. 또 공사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희생이 되었을까. 그로 인하여 유럽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체코의 얀 후스는 교황을 비난 면죄부를 거부하다가 화형을 당하였으나 그로부터 100년후 1517년에 마틴 루터는 종교개혁에 성공하였다. 바티칸에서 유명한 세가지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 삐에타 상, 라오콘 상이라고 한다. 우리 일행은 각자 흩어져서 탐방을 마치고 10:30분에 광장 오벨리스크상 앞에서 모였다,
11:00에 로마시내 현지 식당에서 마카로니로 점심을 먹었다. 일행은 두 시간 가량 걸어서 트레비 분수대를 보고, 콜로세움을 보고, 14:10에 버스에 탑승, 그 유명한 말로만 듣던 로마 카타콤베(catacomb)로 향하였다. 카타콤베는 아파트 같은 생활 공간이 아니고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피하기 위해 잠깐 잠깐 숨어서 지낸 곳이었다. 카타콤베가 50개가 발견되었지만 현재 3개만 개방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정말로 오랫동안 어마어마한 지하동굴을 팠다는 것이다.
15:00에 사도 바울 참수터 주차장에 도착, 걸어서 베드로 십자가형 교회와 사도 바울 참수터 교회를 둘러보고 참수터교회 한 복판에서 남자교인들은 사진을 찍었다. 현재의 바티칸 성당을 짓기 위해 면죄부를 팔아서 천정을 황금으로 도배한 웅장하고 화려한 베드로 성당과 시니스타 성당을 탐방하고 나서 바로 베드로 십자가형 교회와 사도 바울 참수터 교회를 답사하니까 가톨릭과 개신교가 서로 자꾸 비교가 된다. 16:14에 우리 일행은 사도 바울 참수터 교회에서 5분간 걸어 나와서 버스를 탑승, 로마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으로 향하였다. 우리 일행은 이탈리아 로마 공항에서의 출국수속을 마치고, 19:40분에 아시아나 항공기를 탑승하니 인천국제공항을 향하여 힘차게 이륙하였다. 아시아나 항공기는 11시간 15분을 비행하여 2019년 8월 30일. 금, 13:55분에 인천국제공항에 무사히 착륙하였고 우리 일행은 입국수속을 마치고 여행사에서 마련해준 버스를 타고 춘천을 향하여 달려서 17:40분경 33명 전원 건강하게 춘천동부교회에 도착하였다. 상황종료.
①이번 유럽 종교개혁지 5개국 탐방에서 스위스의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이 빠져서 아쉬웠다. 16세기 당시 츠빙글리는 전통에 호소하는 가톨릭의 오류와 성령에 호소하는 급진주의자들의 오류에서 벗어나는 길은 철저한 성경 연구 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성경을 모르고 하는 기도와 봉사는 가짜 믿음이라고 주장했다. 가짜 믿음은 가짜 돈과 같다. 백번 맞는 말이다.
② 분명 16세기 제네바와 21세기 한국은 시간도 공간도 다르다.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칼빈이 남긴 소중한 유산들로부터 근본 원리를 찾아내어 그것을 우리의 상황 가운데 적용시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칼빈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개혁된 한국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③ 멜랑히톤은 루터의 장례식 설교에서 기독교의 복음을 명확하게 전달한 사람은 이사야, 세례 요한, 사도 바울, 어거스틴, 그리고 루터 라고 말했다. 생각할수록 고차원적인 통찰력이다. 성경을 안다고 신학자라고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르네쌍스나 종교개혁이나 비판정신에서 나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④ 2017년 10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독일 출신 루터大 이말테 (60-본명 말테 리노) 교수는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한목협) 수련회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정신과 한국 개신교 현실에 대해 발표하였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이 교수는 “지금 한국 개신교회는, 루터 시대 천주교회와 닮았다”라고 하면서, 한국교회의 위기와 희망을 역설했다고 한다.
⑤ 교회에서, 조심해야 할 사람 3 가지는, 1) 가장 오래된 고참교인, 2) 헌금을 제일 많이 하는 사람, 3) 활동적인 사람이라고 한다.
탐방 후기를 쓰면서 루터가 베드로 대성당 계단을 오르면서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는 말을 깨닫고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는 바로 그 계단과 바울이 로마 옥에서 4편의 서신을 썼는데 바로 그 감옥을 못보고 돌아왔다는 걸 깨달았다.
⑥ 12일간의 유럽 종교개혁지 탐방을 마치고 춘천에 도착해 집에 와서 내 우편함을 보니 8.21에 내가 독일 비텐베르크 Best Western 호텔에 건네준 우편엽서가 내 우편함 속에 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