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 김좌진 (白冶 金佐鎭)
조국 독립의 길을 찾아 만주로
김좌진(金佐鎭, 1889~1930)의 이름을 듣는 사람은 우선 청산리전투를 지휘한 ‘장군’이라고 연상하게 될 것이다. 그는 분명히 만주 일대에서 홍범도등과 함께 일본군과 맞서 싸워 승리를 장식한 독립투사의 한 사람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라의 독립을 찾기 위해 때로는 외교로, 때로는 실력배양으로, 때로는 파괴와 암살로 투쟁을 벌였는데, 그는 당당히 군사로 맞서 전투를 벌인 투사였던 것이다.
그가 부하에게 암살을 당했다는 사실을 두고 많은 사람은 안타까워하면서도 그 궁금증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의 죽음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보는 것도 뜻이 있을 것이다.
그는 안동김씨인 김형규(金衡圭)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김형규는 홍성 일대에서 이름을 떨치던 부자였다. 그는 2천 석의 추수를 하고 종 30여 명을 거느린 지주였다. 그가 살고 있는 공주, 홍성 등지는 안동김씨들이 많이 사는 집성촌이었다. 김형규와 10촌이 되는 김옥균이 서울의 이름 있는 안동김씨의 양자로 들어갔을 적에는 정치권력과도 가까운 듯했고 김옥균이 끝내 역적으로 몰려 죽을 적에는 집안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기도 했지만, 비교적 이런 고비를 무사히 넘기고 부호로서 어렵지 않게 살고 있었다.
그러나 김좌진이 열 살 적에 그의 아버지가 죽었다. 김좌진은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면서 서당을 다니며 글을 익혔다. 그러나 그는 어릴 적부터 하라는 공부보다는 무협소설을 열심히 탐독했고, 병정놀이에 정신을 팔았다. 글을 조금 익혀서는 《육도삼략》같은 병서를 읽는 데에만 열중했다.
그의 어머니의 남다른 부탁을 받은 서당 선생은 그의 행동을 못마땅해 했다. 김좌진이 서당에 다닐 적인 1896년 어느 날, 김석범(金錫範)이라는 청년이 고향마을에 찾아왔다. 김석범은 개화 청년으로 정부의 단발령이 내려지자, 머리를 깎아 하이칼라를 하고 고향을 찾아왔다. 시골에서는 하나의 구경거리가 될 만했다.
소년 김좌진은 청년 김석범으로부터 일본이 나라를 그르치고 있다는 이야기, 서울에는 친일파들이 날뛴다는 사정,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는 얘기 따위를 들었다. 소년 김좌진은 가슴이 뛰었고 무엇인가 자신도 이런 일을 해야겠다고 느꼈다. 그는 어릴 때부터 귀가 따갑도록 조상인 김상용 할아버지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오랑캐 놈들에게 핍박을 받다가 치욕을 못 이겨 자살한 영웅담과 나라를 구제하려다가 역적으로 몰려 죽은 김옥균의 일들을 들어온 터가 아닌가?
열여섯 살이 되던 해, 그는 살림을 떠맡은 가장이 되었다. 아버지가 없는 가정에 그의 형이 큰집의 양자로 나가 어린 그가 집안 살림을 떠맡은 것이다. 이때 김좌진은 소작인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고 종들을 풀어 주었으며, 더군다나 재산을 털어 고향마을에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설립했다. 그는 김석범을 통해 나라 사랑하는 길을 배웠고 이를 실천에 옮겨 열아홉 살까지 이렇게 지냈다. 조금 과장된 이야기도 섞여 있겠으나 통이 큰 청년의 기질을 보여 주는 행동이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일본은 이 나라의 외교권을 박탈해 빈 껍데기로 만들었다. 청년 김좌진은 분연히 서울로 뛰어올라왔다. 그는 노백린(盧伯麟), 안창호(安昌浩) 등 독립지사를 만나 〈한성신보〉의 간부로 활약하기도 하고 청년학우회의 일을 보기도 하면서 종로 관철동에 이창양행(怡昌洋行)이라는 상점을 차렸다.
이 상점은 말할 것도 없이 독립지사들의 아지트가 되었고 이 상점에서 얻은 돈은 독립자금으로 나갔으며, 이 상점의 골방은 독립지사들의 연락장소가 되었다. 그는 틈틈이 무기구입 자금을 얻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다.
그 목표액 10만 원 중에 부족한 5만 원을 채우려고 일가인 김종근을 찾아갔다. 부호인 김종근은 군자금을 내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위험한 인물로 따돌렸다. 그는 김종근을 위협하여 군자금을 받아내려다가 강도미수죄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스물세 살의 김좌진은 이때 처음 서대문형무소에 2년가량 갇히는 몸이 되었다.
감옥에서 나온 뒤 일제경찰은 그를 요시찰 인물로 지목해 일동 일정을 따라다니며 살폈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항일운동에 열을 올렸다. 경찰은 걸핏하면 그를 잡아갔다. 어느 날 그는 경찰에 쫓기는 몸이 되었다. 골목을 누비고 담을 넘던 그는 계동의 어느 자그마한 기생집(궁녀 출신이라고도 함) 안방으로 숨어들었다. 그 집의 젊은 여주인은 경찰이 가택수색을 할 적에 그를 잘 숨겨주었다. 그 뒤 그는 이 집에 머물면서 경찰의 눈을 피했다.
이렇게 여러 날 지내는 동안, 그 집 주인 계월(桂月)은 그가 무슨 일을 하다가 쫓기는 몸이 되었는지를 알았다. 그녀는 김좌진의 훤칠하고 씩씩한 용모와 건장한 남성미에 반했던 것 같다. 아무튼 두 남녀는 정분이 맺어졌는데, 뒤에 이 사랑얘기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고, 그 결실로 바로 ‘두한(斗漢)’이라는 아들을 두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랑놀이에만 빠져 있을 수는 없어 스물아홉 살의 열혈청년 김좌진은 계동을 빠져나와 매서운 겨울바람을 헤치며 북만주로 망명의 길을 떠났다. 나라를 잃고 허허벌판 만주에서 조국광복의 꿈을 이루기 위해 더욱 고되고 더욱 바쁘게 움직였다. 그는 이곳에서 독립운동단체인 군정사(軍政司)에 가입, 서일, 여준, 유동열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김규식, 나중소, 이범석 등과 함께 군대를 개편하여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해 총사령관에 취임하고, 군사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 양성에 힘을 쏟았다.
청산리대첩의 빛나는 승리
북만주의 한국 독립군 양성을 일제 군부가 눈감고 넘길 리가 없었다. 일본군은 독립군 토벌작전계획을 세웠다. 이 첩보는 독립군에 정확하게 날아들었다. 독립군은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고 따라서 국내의 지원도 그 전보다 훨씬 많아지고 있는 현실에서 사기가 고양되고 훈련도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일본군대는 먼저 두만강을 넘어와 도문 봉오동(당시는 화룡현) 골짜기에 주둔한 홍범도 부대를 공격했다가 커다란 손실을 입었다. 그 뒤 홍범도 부대는 백두산 밑 어랑촌으로 이동했다. 한편 김좌진이 이끄는 독립군도 행동을 같이하여 길림성 산악지대인 백두산 청산리에 도착했다. 일본군의 포위망은 점점 압축되고 있었다. 독립군은 이곳 백운평 숲 속에서 숨을 죽이고 적의 접근을 기다렸다. 일본군은 협곡으로 기어들고 있었다. 이때 권총소리를 신호로 독립군은 일제히 포화를 퍼부어댔다. 갑자기 습격을 당한 일본군은 처음에는 응전했지만 세에 밀려 후퇴하면서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 독립군은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일본군 전위부대를 여지없이 물리친 뒤 이동해 천수평(泉水坪)에 주둔한 일본군과 맞붙었다. 이때에도 큰 승리를 거두었다.
반대 방향인 어랑촌 전방에서는 독립군이 일본군 3개 여단에게 포위되어 공격을 받고 있다가 홍범도 부대의 지원에 힘입어 공동으로 일본군을 격파했다. 만 4일 동안 10여 차례의 접전을 벌인 끝에 독립군 희생자는 100여 명에 달했지만 일본군 2천여 명을 살상했다. 독립군은 낡은 무기뿐이었고 숫자도 일본군의 10분의 1 정도의 열세였지만 일본군 사단병력의 주력부대를 여지없이 격파한 것이다.
이 전투는 홍범도 부대와 함께 연합전선을 편 것으로, ‘청산리대첩’이라는 이름으로 독립투쟁사에서 빛을 내고 있는 것이다. 사실 청산리에서만 전투를 벌인 것이 아니어서 이 이름이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다. 이 전투에서 적의 총탄이 날아와 김좌진의 전투모를 날려버렸다고 한다. 그 총알이 몇 센티미터만 아래로 날아왔다면 그의 목숨은 어떻게 되었을까? 김좌진은 그때 마침 흙이 패인 곳에 서 있었다고 한다.
김좌진은 독립군을 재정비한 뒤 백두산 밀림지대로 이동하여 일본군의 보복전에 대비했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해인 1921년 봄에 들어, 일본군은 대대적인 보복작전을 펼쳤다. 독립군은 열악한 조건에서 일단 맞서 싸우기보다 후퇴를 해 다음 기회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청산리대첩에서 보인 독립군 대장으로서의 늠름한 기상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모습이다. 동상은 1983년 충남 홍성에 세워졌다.

부하의 총탄에 쓰러지다
독립군 연합부대는 러시아령 연해주 밀림지대로 이동했는데, 일본군과 비밀타협을 본 혁명 러시아의 지방군대는 독립군을 여러 구실을 붙여 탄압했다. 끝내 본의 아니게 독립군 일부 병력이 러시아군과 전투를 벌이는 바람에 다시 쫓기는 처지가 되었다. 나라를 잃은 독립군의 피맺힌 서러움이었다. 김좌진은 흑하사변(黑河事變)이라고 불리는 이런 고난을 당한 뒤 천신만고 끝에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만주로 돌아온 김좌진은 망명지에서 장녀를 잃는 슬픔을 겪기도 했지만, 군사학교를 세워 다시 독립군 양성에 주력하고 분열되어 있는 독립단체를 규합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상해 임시정부로부터 군무총장과 국무위원에 임명되기도 했지만 모두 사양하고 만주의 동포들을 묶는 일에만 열중했다. 그는 이윽고 한족연합회(韓族聯合會)를 조직해 그 주석에 취임하면서 동포의 자치운동에 열중했다.
당시 만주 동포들 사이에는 분열의 조짐이 있었고, 독립노선에도 많은 이견을 보이고 있었다. 이때 그는 영안현 산시역 부근에 정미소를 차려 생계를 해결하고 독립자금을 염출했다. 그는 장구한 계획을 세워 독립투쟁을 해나가려 했지만 젊은 청년들 사이에는 그의 미온적인 노선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분위기도 깔려 있었다. 특히 그에게는 자금을 유용한다거니 일제와 타협(간첩설도 있음)하고 있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었다. 떠도는 말에 따르면 청산리전투에서 전장터가 아닌 산 위에 올라가 가족을 데리고 구경했다는 말도 있고, 일본 밀정과 만나 밀담을 나누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한다.
1930년, 정미소로 두 한인 청년이 찾아왔다. 과거의 부하였던 두 청년은 그에게 권총을 쏘았다.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활약했던 지도자가 마흔두 살 장년의 나이로 옛 부하에게 암살을 당하는 비극이 벌어진 것이다. 이 암살사건은 독립투쟁 노선에서 빚어진 이견과 오해에서 저질러졌으며, 이는 동포의 분열상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김좌진은 망명지에서 비극적 종말을 마쳤고, 만주의 동포들은 큰 지도자를 잃는 슬픔을 겪었다. 후미진 갈뫼마을에서 출발한 그의 장정은 먼 이국땅에서 끝이 났다
<-이상 이이화 인물사 이야기에서 발췌함>
■참고: 백야 장군의 생애에서 가장 애처롭고 안타까움은 장군의 가족사가 깔끔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정실인 오숙근 여사와의 후손이 "있느냐? 없느냐? 누구냐? 어디서 사느냐?"가 정리되지 아니한 채 장군께서 활동하시던 중에 태어났다는 김OO에 대해서만 알려져 있습니다. 필자는 이 부분을 명확히 하고자 만주벌판을 다 헤매며 조사하고 취재했습니다. 만주벌판의 여러 영웅 가운데 특히 민족의 영웅으로 잘 알려진 백야의 명예와 직결될 뿐 만 아니라 역사를 바로 아는 국민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장군의 가족사는 명확하게 정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독자 여러분의 좋은 의견과 제보를 기다립니다. -홍화평 전재진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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