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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원문보기 글쓴이: 배종찬
옥산서원과 독락당을 답사한 우리 일행은 양동마을로 향했다. 우리나라에서 반촌의 옛 모습을 가장 온전히 보존하고 있다는 평가를 듣는 곳이 경주 양동마을이다. 전통건축의 권위자인 김봉렬 박사는 경주 양동 마을을 ‘조선시대 평창동’이라 말한다. 현재 서울의 평창동은 고급스러운 단독 주택이 밀집한 곳이다. 김 박사의 설명에 따르면, 서울 평창동에는 1970~80년대에 솜씨 좋은 건축가들이 자신의 개성과 실력을 맘껏 발휘하여 지은 집이 많이 있다. 이러한 평창동과 양동마을이 같다는 것은, 양동 마을의 주택들이 획일적이지 않고, 각기 독자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빼어난 건축물이라는 찬사이다. 양동마을에 빼어난 건축물을 들어서게 된 이유는 『김봉렬의 한국건축 이야기』 2권에 잘 설명되어 있다. 월성손씨와 여강이씨는 인척 관계였고 한마을에 살았으니 서로 협력하는 관계이기도 하였지만, 강렬한 경쟁의식이 있었다. 학문의 성취와 과거 급제자 수, 경제력 등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는데, 여기에 더하여 집짓기 경쟁도 벌어졌다. 두 집안이 자기 가문의 자존심을 걸고 집짓기 경쟁에 나서면서, 양동마을은 질적인 면에서 최고 수준의 주택을 다수 보유하게 되었다.
심수정에서 본 향단과 관가정
양동마을 첫 번째 답사지는 설천정사(雪川精舍)였다. 안내문을 읽어보니, 정사가 세워진 이곳은 회재의 셋째 손자인 설천정(雪川亭) 이의활(李宜活)이 강학하던 자리라 한다. 후대의 유림이 설천정의 학덕을 추모하여 세웠다고 전한다. 이의활은 문과에 급제하여 함경도사 등을 지냈는데, 이이첨의 전횡 때문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다. 인조반정 후에는 다시 흥해 군수를 지냈는데, 목민(牧民)에 힘을 쓰다가 병을 얻어 순직하였다고 전한다.
다음으로 간 곳은 영귀정(詠歸亭)이었다. 영귀정은 원래 회재 선생이 세운 정자로 몇 차례 중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곳도 수운정(水雲亭)처럼 출입은 뒤편을 통하게 되어 있다. 이 교수님은 논어에 나오는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 쐬고 노래를 부르면서 돌아오겠다.’는 고사를 들어 ‘詠歸亭’이 가진 의미를 설명하였다. 수운정이나 설천정사, 그리고 이곳 영귀정까지 거의 모든 건물이 정성스럽게 관리되는 것을 보면서, 명문가의 저력을 느낀다.
영귀정 현판
물봉에서 뒤돌아 본 영귀정
영귀정을 답사한 후 산등성이를 따라 내려오니, 관가정(觀稼亭)이 보였다. 관가정은 양동마을 건축물 중에서 향단과 함께 탁 트이는 전망을 가진 곳이다. 양동 마을 입구에서 골짜기를 보고 섰을 때, 보면 왼쪽에 물봉이라는 봉우리가 있는데, 관가정은 그 산기슭에 있다. 김봉렬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관가정은 담장이나 대문이 없었다. 왜냐하면, 양동마을 입구에서 관가정에 이르는 길 양쪽에는 외거노비들의 살림집인 ‘가랍집’들이 있어 외부인의 출입을 감시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대문과 담장은 1980년대 후반에 고택 관리의 필요 때문에 세운 것이다. 그런데 대문은 관가정의 정면 중심축에 있어 전망을 방해하고 있다.’
집 앞의 안내문을 보니, ‘관가정(觀稼亭)’은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보는 정자라 한다. ‘가(稼)’의 뜻을 옥편에서 찾아보니, ‘심다’, ‘익은 벼 이삭’, ‘베지 아니한 벼’라고 나온다. 넓은 안강평야의 주인이었던 이 집의 주인은 관가정에서 익어가는 벼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심오한 철학적 의미가 담겨있는 것은 아니지만, ‘풍요한 수확을 기대하는 집 주인의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는 현판’이란 생각이 든다.
관가정은 400년간 월성손씨 대종가였다. 마당에 잡초 하나 자라지 않은 정도로 관리되고 있었으나, 주인이 없는 관계로 건물 위로 오르지 못하고 마당에서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사랑 대청이나 안채도 구경하고 싶었는데, 많이 아쉬웠다. 관가정 왼편에는 수백 년이 되었음 직한 향나무가 용트림하는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어서 또 하나의 볼거리를 주었다.
관가정의 모습
관가정 옆의 향나무
관가정을 본 후 향단으로 갔으나 대문이 잠겨있었다. 교수님을 따라 건너편 심수정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다가 잔치국수를 파는 식당을 보았는데, 수분 공급이 절실하였던 우리 일행은 별다른 이견 없이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시원한 국물과 적당히 익은 김치를 맛있게 먹었다.
식사 후 심수정(心水亭)으로 갔으나 대문이 잠겨있었다. 담장 밖에서 발꿈치를 들어가면서 안을 살펴보았다. 우선 휘어진 대들보가 눈에 띄고, 화려한 익공이 보인다. 이곳의 고택에서 많이 보이는 화려한 익공이나 대공 등은 양동마을 주택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것은 물론 경제력과도 관련이 많을 것이다. 양동마을의 고택들은 마루에는 먼지 하나 없고 마당에는 잡초 하나 없이 관리가 잘되고 있었지만, 아쉬운 점은 외부인은 볼 수 없도록 굳게 문을 닫아 놓았다는 점이다. 실제로 일상생활을 하는 마을 주민 입장에서는 관광객에게 살림집을 개방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살림집은 제외하는 것은 이해되지만, 사람이 거처하지 않는 곳도 문을 잠가놓은 곳이 많았다. 입장료가 싼 것도 아닌데 야박하다는 생각이 든다. 여강이씨들의 서당인 강학당(講學堂) 앞의 나무 그늘 밑에서 잠시 쉬었다. 건너편의 푸른 언덕에는 관가정과 향단을 비롯한 양동마을의 고택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여기에서 이 교수님께 양동마을의 주요 건물에 대해서 간단한 설명을 들었다.
심수정 함허루의 처마와 익공 부분
연꽃이 핀 논을 지나 무첨당(無忝堂)으로 향했다. 무첨당은 회재 선생의 손자인 이의윤(李宜潤)(1564~1597)의 호이다. 무첨당의 아버지는 수암(守巖) 이응인(李應仁)인데, 회재 선생이 부인과의 사이에 아들이 없어 양자로 들어와 가문을 계승하였다. 무첨당은 수암 선생이 낳은 오형제 중의 맏아들이니, 회재 선생의 장손이 된다. 이에 따라 무첨당은 여강이씨 종가를 뜻하는 당호(堂號)로 사용되었다. 무첨당에는 귀중한 현판이 많은데, 조철제 선생이 지은 『또 다른 경주를 만나다』에 이에 대한 풀이가 잘 되어 있다. 이를 요약하여 옮기면 다음과 같다.
‘이 집의 당호인 무첨당은 『詩經』에 있는 ‘無忝爾所生: 너를 낳아주신 부모님께 욕됨이 없게 하라’에서 나왔다. 훌륭한 조상을 둔 후손의 자긍심과 함께 빛나는 전통을 계승하려는 의지를 읽을 수 있는 당호라고 생각된다. ‘左海琴書’라는 흥선대원군의 글씨도 있다. ‘左海’는 우리나라이고, ‘琴書’는 세속을 떠나 거문고를 타고 책을 읽으면서 시름을 잊는다는 뜻이다. 흥선대원군 특유의 고집과 괴걸한 書氣를 잘 드러낸 걸작이다.
‘蒼山世居’에서 창산은 ‘雪蒼山’을 뜻하므로, 풀이하면 ‘설창산 자락에서 대를 이어가며 사는 집’이라는 의미가 된다. 즉 무첨당을 일컫는 말이다. ‘勿厓書屋’은 청나라 학자인 용방 조광의 글씨이다. ‘勿厓’는 ‘勿峰’을 뜻하는데, 물봉은 설창산의 다른 이름이다.
무첨당을 찾았을 때, 주인은 계시지 않았다. 대청마루에 올라가고 싶은데, 조심스럽다. 마루 끝에 엉덩이를 걸치고 살펴보는데, 계자난간이 눈에 들어온다. 평범한 모습이 아니다. 상당히 공을 들여서 조각한 모습인데,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무첨당의 모습
무첨당 현판
흥선대원군의 글씨 - 좌해금서
물애서옥
무첨당 누마루의 화려한 계자 난간
무첨당을 본 일행은 경산서당(景山書堂)으로 향했다. 인터넷 두산백과를 보니,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장손인 무첨당(無忝堂) 이의윤(李宜潤)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사당이라 한다. 1970년 안계댐 공사 때문에 현재의 자리로 다시 옮겨 왔다고 한다. 서당이라 이름은 붙였지만, 서원의 모습이다. 이선당(二善堂)이란 이름을 붙인 강당 오른편을 보니. 경산서당석채례집사분정(景山書堂釋菜禮執事分定)이 붙어있다. 그런데 헌관(獻관)이 세 분이 아니라 한 분이다. 모두 생소하다는 표정들이다. 이선당에는 온돌방이 설치되어 있는데, 아궁이가 보이지 않았다. 뒤편으로 가보니, 아궁이와 굴뚝이 나란히 붙어있다. 서원 강당의 전면은 유교라는 종교적 행사가 거행되는 신성한 영역이다. 그래서인지, 일상적인 모습은 가능하면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현풍 도동서원의 강당인 중정당(中正堂)은 아궁이를 감춰놓았다.
경산서당의 향사분정표
경산서당 이선당 뒷편에 있는 아궁이와 굴뚝
경산서당을 본 일행은 서백당으로 향했다. 서백당을 향해 걸었던 그 길은 숨겨진 길이었다. 답사의 고수이신 이 원장님도 처음 가보는 길이라 말씀하신다. ‘송첨(松簷)’이라 부르기도 하는 서백당(書百堂)은 월성손씨 대종택이다. 회재 선생의 외조부가 되시는 양민공(襄敏公) 손소(孫昭) 선생이 1454년(성종 15)에 지은 집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주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서백당은 설창산의 지맥이 응집된 곳으로, 위대한 인물 셋이 태어날 명당이라 전해진다. 실제로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과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이 서백당에서 태어났다. 월성손씨들은 마지막 한 명의 위인은 자신들의 집안에서 태어나기를 고대하고 있다. 그래서 시집간 딸이 서백당에서 출산을 못 하도록 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서백’의 의미는 무엇일까? 『小學』에 여기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간단히 소개하면, 장공예(張公藝)는 9대가 함께 모여 화목하게 살았다고 한다. 당나라 고종이 장공예의 집으로 찾아가 그 비결을 물었더니, 장공예는 참을 인(忍)을 백번 써서 바쳤다고 한다. 종손의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堂號라고 할 수 있다.
서백당은 높은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그렇지만 서백당 대청 끝에 앉아서 앞을 보니 참 아늑한 느낌이 든다. 눈앞에는 성주봉이 가까이 있는데, 산세가 참으로 편안하다. 여기서 우리 단체 사진도 찍었다. 사당 앞에는 양민공(襄敏公)께서 심으셨다는 향나무가 있어 이 집의 오랜 역사를 보여주고 있었다.
서백당 사랑채 대청
서백당에서 바라본 성주봉
양민공 손소 선생이 직접 심으셨다는 향나무
서백당을 본 우리 일행은 양동마을 입구를 향해서 걸었다. 양동마을을 보고 난 여운을 즐기면서 천천히 걸었다. 걸으면서 리듬감이 있는 마을 길, 집집이 있는 향나무와 회화나무 이야기도 하였다. 愚齋와 晦齋를 이야기하면서, 松齋와 退溪의 이야기도 나왔다. 양동 마을의 모습은 ‘勿’자 모양의 명당인데, 일제가 명당의 맥을 끊기 위해 철도를 건설했다는 이야기도 누군가가 하였다. 일본이 철도를 건설하면서 ‘血’으로 바뀌어 버렸다는 슬픈 이야기도 나왔다. 일본 철도나 도로의 건설을 통하여 우리 강산의 혈맥을 잘랐다는 이야기를 어느 정도 믿어야 할지 의문을 제기한 분도 계셨다. 우리 일행은 모두 양동 마을의 역사와 풍경을 가슴에 안고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첫댓글 전에 박약회에서 답사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쓴 답사기입니다. 상당부분 답사지가 겹치니, 많이 부족하지만 도움이 될까 싶어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