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윤기의 일본 속 우리 고대사⑧ ‘여자’를 뜻하는 일본말 ‘온나(おんな)’의 뿌리는 우리 방언 ‘에미나’
흔히 일본의 나라(奈良) 하면 백제를 떠올린다. 백제계 왕들의 조정이 이곳에서 일본 땅에서는 처음으로 나라로서 모습을 갖췄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나라 지역 곳곳에 신라의 자취가 진하게 배어 있다. 일상과 신화를 오가며 일본인들의 의식에 깊숙이 자리한 나라 지역 신라인들의 자취를 살펴본다.
일본 나라현 사쿠라이(櫻井)시의 성산(聖山)인 미와산(三輪山)에 자리 잡은
오미와진자(大神神社)는 신라신인 오쿠니누시노카미(大國主神)를 모신다.
경내에는 ‘뱀신 삼나무 제사터(巳の神杉)’로 불리는 대국주신의 신화가 얽힌
수령 700년의 삼나무가 서 있다. 왼쪽으로 보이는 나무가 ‘뱀신 삼나무 제사터’다.
40여 년 전 일본의 현 가운데 ‘나라(奈良)’라는 이름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듣고 매우 신기했었다. 그때야 필자가 일본을 들락거리기 전이었지만 이 말을 듣는 순간 무언가 짚이는 것이 있었다. 몹시 귀에 익은 이 ‘나라’라는 호칭은 분명 ‘국가’라는 뜻의 우리말이리라는 느낌이었다. 하여 이곳저곳 그 발자취를 캐 들어갔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짐작이 틀림없음을 알게 됐다. 일본의 저명한 언어학자 마쓰오카 시즈오(松岡靜雄)의 <일본옛말사전(日本古語大辭典)>(1937)을 뒤져 나라(ナラ, 那良, 那羅, 奈良) 항목을 살펴보니 아니나 다를까 분명 우리말이었다. 해설문에는 친절하게도 한글로 ‘나라’라는 표기까지 해놓았다. 잠시 살펴보자.
“야마토(大和)의 옛 왕도의 지명. 나라는 한국어(나라)로 국가라는 뜻이므로 상고시대에 이 지역을 점거했던 사람들이 붙인 이름일 것이다.”
현대
일본의 역사학자인 간사이가쿠인(關西學院)대 나가시마 후쿠타로(永島福太郞) 교수도 “나라는 한국어로 국가를 의미한다고 한다. 한국인들이 그 거주지에 이름을 붙인 것으로 해석된다”(<奈良> 吉川弘文館 1963)면서 현재는 ‘헤이조쿄(平城京)’라고 발음하는 고대 나라 땅 왕도의 지명도 본래는 ‘나라(平城)’였음을 지적했다.
필자가 찾아낸 최초 기록은 110여 년 전 일본의 저명한 역사지리 학자 요시다도고(吉田東伍, 1864∼1918) 박사가 쓴 <대일본지명사서(大日本地名辭書)>(1900)였다. 책은 “나라(奈良,
ナラ)는 국가라는 뜻이다. ‘야마토’ 지역의 옛 땅이름이며, 상고시대에 이 고장을 점령하고 살던 한국 출신 이즈모족(出雲族) 사람들이 붙인 이름으로 본다. 이 부근의 ‘소후’라는 군(郡) 이름 역시 조선어”라고 밝혔다.
우리나라 경상도와 마주보는 동해 건너 일본 땅의 이름은 지금도 이즈모(出雲)다. 이 일대의 이즈모족이 신라인들이라는 것은 일본 사학계의 통설이다. 특히 이 지역에는 달걀을 먹지 않는다는 신라인들의 후손들(본지 2012년 1월호 참조)도 살고 있다. 와세다(早稻田)대 사학과 미즈노 유(水野祐)
교수도 이즈모에서 신라 신(神)인 “스사노오 노미코토를 받들던 집단은 조선계 도래인 집단이며 또한 한국 대장간 부족이며 샤먼적 집단”(<出雲神話> 1973)이라고 밝혔다. 리쓰메이칸(立命館)대 사학과 마쓰마에 다케시(松前健) 교수 (<出雲神話> 1976)와 교토(京都)부립대 사학과가도와키 데이지(門 脇禎二) 교수(<出雲の古代史> 1976) 등의 주장도 한결같다. 피는 속이지 못하는 것일까? 미즈노유 교수는 “이즈모 지역 사람들은 혈액형도 신라인들과 똑같다”(<日本民族> 1963)고 못 박았다.
나라
땅에는 고대 한국인들의 굵직한 역사의 발자취와 흥미진진한 사연들이 곳곳에 배어 있다. 흔히 한국인들은 나라 하면 손바닥 만 한 곳으로 잘못 알기 십상이다. 나라를 관광하는 경우도 드물거니와 어쩌다 나라 땅을 밟는다 해도 나라 시내 북동쪽 언덕배기의 도다이지(東大寺)를 둘러보는 정도로 그치기 때문이다. 좀 더 깊이 들어간다고 해도 기껏해야 나라 시내에서 남서쪽으로 약 8km 떨어진 이코마(生駒)군 이카루가(斑鳩)의 호류지(法隆寺) 정도다.
나라시를 포함하는 나라현은 총면적 3692km²로 충청북도(총면적
7431km²) 넓이의 절반 남짓 되지만 일본에서는 우리의 경주에 해당하는 곳으로 살펴볼 곳이 너무나도 많다. 나라시에서 남쪽으로 1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텐리(天理)시에는 ‘백제왕의 칠지도’를 신주로 모시는 이소노카미진구(石上神宮)가 있고 여기서 다시 10km를 내려가면 사쿠라이(櫻井)시가 나오는데 이곳에는 백제사의 옛터로 추정되는 곳이 자리 잡고 있다. 인근에는 헤이죠쿄 이전의 왕궁인 후지와라쿄(藤原京)의 자취도 남아있다.
인근에는 서기 712년 백제계 여왕으로 이름난 스이코(推古, 재위 592~628)
여왕 조정에 우리 고대 왕실음악인 ‘아악(雅樂)’을 전해줘 일본 음악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백제인 미마지(味麻之, 6~7 세기) 선생이 활약했던 옛 터전 ‘쓰치부타이(石舞臺)’ 유적이 주택가 산속에 아직껏 고스란히 자리하고 있다. 쓰치부타이는 백제계로 이 시기 일본 왕실을 좌지우지했던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 ?∼626) 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서 고개를 하나 넘으면 고구려식 벽화로 이름 높은 다카마쓰즈카(高松塚)가 나온다. 이 일대가 스이코 천황의 왕도 아스카(飛鳥. 明日香)다. 이곳이야말로 한국인이라면
반드시 한 번은 찾아볼 만큼 우리 역사를 돌아볼 수 있는 다양하고 다채로운 역사 유적지가 곳곳에 널려 있다.
아스카는 거리는 가깝지만 접근하기가 만만찮다. 열차를 두 번이나 갈아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사카에서 편도 2시간이면 충분해 짧게 돌자면 하루에도 충분히 다녀올 거리다. 물론 자세히 살피자면 둘러볼 곳이 너무 많아 제대로 답사하려면 열흘도 모자란다. 이런 이유로 한국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관광회사들은 좀처럼 이곳을 찾지 않는다.
신라신인 ‘대국주신’은
밀애의 고수
▶공중에서 본 오미와신사 앞 젓가락무덤.
최근 한 지기가 필자에게 충고랄까 비아냥거림이랄까 한마디 했다.
“선생은 ‘일본 속 백제’에만 미친 줄 알았는데 요즘 <월간중앙>에 연재하는 것을 보니 이번에는 또 ‘일본 속 신라’에 미쳐 있더군.”
“독도는 일본땅”이라고 요란법석을 떠는 철없는 일본인들보다 한 술 더 떠 “만리장성은 평양까지 이어졌다”는 ‘동북공정(東北工程)의 허풍이 판치는 형국이니 어찌 우리가 역사에 미치지 않고 배겨낼 수 있으랴. 실상 일본 속 신라에 미친 지도 백제에 못지않으니, 내친 김에 이달에는 나라 땅에 배어 있는 신라인들의 발자취나 잔뜩 밟아보자.
나라
땅 사쿠라이시(櫻井市)의 성산(聖山)인 미와 산(三輪山, 467m)은 원뿔형 산이다. 이미와 산에는 신라 신인 오쿠니 누시노카미(大國主神)를 모시는 오미와진자(大神神社)가 자리잡고 있다.
대국주신은 ‘오모노누시노카미(大物主神)’ 등 일곱 가지나 되는 다양한 이름을 가진 신(靑木周平 교수 외 <日本の神の事典> 1997)이다. 미와산의 자그마한 산체는 그 자체로 대국주신의 몸둥이(神體)로 추앙받는다. 이곳에 가려면 오사카에서 긴테쓰 열차를 타고 2시간 남짓 걸려 사쿠라이 역까지 가거나 교토(京都)에서 JR나라
열차를 타고 ‘나라역’까지 간 다음 다시 사쿠라이선을 갈아타면 된다. 이 경우에는 약 3시간 정도 걸린다. 사쿠라이역에 내려 버스를 타도 되나 초행인 사람이 버스를 타기에는 조금 복잡하다. 택시를 타면 약 20분 거리다.
오미와진자는 미와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이름난 큰 사당이다. 오미와진자 경내에서 특히 눈에 띄는 장소는 다름 아닌 ‘뱀신(巳神)의 사당’이다. 사당이라고 해야 자그마한 촛대가 놓일 정도지만 ‘뱀신 삼나무 제사터(巳の神杉)’로 불리는 우뚝 솟은 삼나무 고목은 수령 700년이 넘는다고
한다. 참배객들은 뱀신에게 정성껏 삶은 달걀을 바친 다음 머리 숙여 참배한다. 이 삼나무에는 유서 깊은 사연이 깃들여 있다. 대국주신은 잘생겼다고 이름난 신이다. 이 잘생긴 대국주신이 자그마한 실뱀으로 변신해 밤마다 어여쁜 처녀의 방 열쇠구멍으로 들어가 정을 통했다는 로맨스는 일본에서도 유명한 신화다.
신라 땅에서 일본 이즈모로 건너왔다는 대국주신은 밀애의 고수였다. 그는 나라 땅 미와 산으로 거처를 옮겨 살면서 밤이면 밤마다 애정행각에 나섰다. 그가 자주 찾은 여인은 인근 대가집 어여쁜 처녀
오미나이쿠타마요리히메였다. 대국주신은 밤마다 실뱀으로 변신해 남몰래 이쿠타마요리히메를 찾았다. 열쇠구멍을 통해 방으로 잠입한 대국주신은 이윽고 원래 상태인 훤칠한 청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이 늠름한 청년과 오미나(おみな、일본 옛말의 여자)의 사랑은 날이 새는 줄 몰랐다. 어느 사이엔가 오미나의 아랫배가 불룩해졌다. 딸의 배가 부른 것을 눈치 챈 오미나의 부모는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딸을 붙잡아 앉히고는 사정을 캐물었다.
“네 배가 부른 것을 보니 분명 아이를 밴 모양이다. 사귀는 남자도 없는
것 같았는데 처녀의 몸으로 어떻게 아이를 가질 수 있었느냐?” “실은 밤마다 잘생긴 젊은 사내를 만나고 있었어요. 그런데 아직 이름도 몰라요. 매일 밤마다 제 방으로 찾아와 함께 지낼 뿐이에요.” 딸의 말을 들은 부모는 적잖이 당황했다. 그러나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밤마다 찾아온다는 그 젊은이의 정체부터 알아야 했다. 이윽고 부모가 딸에게 말을 했다.
견훤의 지렁이신화와 닮은 ‘실뱀신화’
“네 방 마룻바닥에 붉은 흙을 뿌려 두거라. 그리고
긴 삼실을 바늘에 꿰어 그 사내가 찾아 들면 몰래 옷깃에 꽂아 두거라.” 오미나는 부모가 가르쳐준 대로 했다. 남자가 돌아간 이튿날 아침 살펴보니 삼실은 방문 열쇠구멍을 통해 밖으로 이어져 있었다. 부모는 그 삼실을 따라 갔다. 삼실은 나라 땅 미와 산허리에 이르러서는 그곳의 신을 모시는 사당 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매일 밤 열쇠 구멍을 통해 오미나의 방으로 찾아 들었던 실뱀은 미와산 산신이었던 것이다. 달이 차자 오미나이쿠타마요리히메는 옥동자를 낳았다.
이 쿠타마요리히 메가 뱀심과 사랑을 나누고
얻은 옥동자는 누구일까? 도쿄(東京)대 교양학부 오바야시 다료(大林太良) 교수는 오미 나이쿠타마요리히메의 몸에서 태어난 “아들의 이름은 ‘오타 다네코(大田田根子)’이고, 아버지인 뱀신은 오쿠니 누시노카미”(<日本神話の構造>1987)라고 밝힌 바 있다. 오쿠니 누시노카미가 누구인가 바로 신라 신인 대국주신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여인의 이름이 귀에 익다. 여인의 이름은 오미나 이쿠타마요리히메. 가쿠슈인대 국문학과 오노 스즈무(大野晋) 교수는 ‘오미나’라는 말이 뒷날 ‘온나(おんな,
女, 여자)로 어형이 변화했다는 연구를 그의 저서(<日本語の世界>1980)에서 지적한 바 있다. 일본의 고대 한자어사전(<新撰字經> 9세기)에서도 여자를 ‘오미나’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필자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오노 교수가 말하는 일본어 ‘오미나’의 뿌리는 한국어의 방언인 ‘에미나’에서 온 것으로 추정한다. 지금도 강원도나 함경도 쪽에서는 ‘에미나(계집애)’ 혹은 ‘에미네(여편네)’라는 말을 쓴다. 경상도 방언에서는 어머니의 비칭인 ‘어미’를 ‘에미’로 쓰기도 한다. 이 ‘에미나’가
일본으로 건너가 처음에는 ‘오미나’라는 귀공녀의 대명사 구실을 하다 나중에 일반명사인 ‘온나(여자)’ 로 바뀌지 않았을까? 언어학자들에게 좀 더 확인할 일이다.
흥미로운 것이 하나 더 있다. 잠시 기억을 더듬어보자. 대국주신이 밤마다 뱀으로 변신해 오미나의 방으로 찾아 들었다는 이 이야기를 한국인이라면 어디서 많이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 우리 역사책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이 이야기와 매우 비슷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맞다. 후백제왕(後百濟王) 견훤(진훤)에 관한 이야기다.
“옛날
한 부자가 광주(光州) 땅 북촌에 살고 있었다. 그에게는 어여쁜 딸이 있었다. 어느 날 딸이 아버지에게 놀라운 사실을 고백했다. ‘늘 자줏빛 옷을 입은 남자가 저의 침실로 찾아와 그 사람과 함께 지내게 되었어요.’ 딸의 말을 들은 아버지는 몹시 당황하였으나 정신을 차리고 딸에게 한마디 했다. ‘기다란 실을 바늘에 꿰어 그 사람의 옷깃에 꽂아두도록 해라.’
다음날 아침 실을 따라 북쪽 담 밑으로 가보니 실을 꿴 바늘은 큰 지룡(地龍·지렁이)의 허리에 꽂혀 있었다. 이로부터 딸에게 태기가 있었고 마침내
한 사내아이를 낳게 되었다. 이 아이가 자라 15세가 되자 스스로 자신을 가리켜 ‘견훤’이라 칭했다. 그는 경복 원년인 임자(892)에 이르자 스스로 ‘왕’이라 일컫고 완산군에 도읍을 정했다.”
견훤의 탄생설화와 일본의 개국신 중 한 신인 대국주신의 아들에 관한 설화는 누가 읽어봐도 똑같은 내용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본 고대문화가 고조선시대 이후 한반도로부터 옮겨간 발자취는 이렇게 일본의 신화에 다양하고 다채롭게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지난 1월 15일 오미와진자를
방문했다. 신사의 최고위 신관인 스즈키 간지(鈴木寬治) 궁사는 직접 필자를 ‘뱀신 삼나무 제사터’로 안내했다. 궁사는 높게 솟은 삼나무 고목을 가리키며 조심스럽게 “지금도 뱀신이 이 신성한 삼나무에 살고 계십니다”라고 말했다. 그에게 몇 가지 질문을 했다.
“그 뱀신이 이쿠타마요리히메와 사랑했다는 오쿠니누시노카미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오쿠니누시노카미가 신라신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물론입니다. 오쿠니누시노카미는 신라신 스사노오노미코토의 아드님입니다.”
스즈키
궁사에게 견훤의 탄생설화를 들려주자 “아, 그렇습니까? 역시 그랬군요” 하고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바로 그 순간 그의 얼굴에서 알 수 없는 따사로움이 느껴졌다. “혈액형은 무엇인가요?” 하 고 묻자 짐작대로 “A형인데요. 왜 물으시나요?” 하는 말이 돌아온다. 도쿄대 의학과 후루하다 다네모토(古畑種基) 교수의 ‘혈청학’ 연구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동해에 맞닿은 이즈모 지방 등의 일본 주민과 우리나라 경상도 주민들의 A형 혈액형 분포율이 똑같이 약 42%에 이른다는 유사성이었다. 필자 역시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도쿄대의
구로카와 마요리(黑川 眞賴, 1829∼1906) 교수는 1905 년 저술한 <공예지료(工藝志料)>라는 일본 고대문화 해설서에서 “일본에서 최초로 신사(神社)를 세운 것은 태고로부터 대국주신(大國主神)의 신령을 야마토(大和) 땅의 동산(東山)에 제사 모시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가리켜 ‘미모로(美毛呂)’라고 한다. 동산이란 다름 아닌 ‘미와 산(三輪山)’”이라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뱀신(巳神)인 신라 대국주신이 지금도 살고 있다는 ‘삼나무 제사터’는 일본인들만이 받드는 신성한 터전일까?
바람둥이 신의
애정행각
대국주신이 머무르는 미와산에서 남쪽으로 제법 떨어진 거리에 위치한 숲 속에는 오랜 성상을 고즈넉이 숨죽여오는 고분 하나가 자리 잡고 있다. 오미와진자에서 걸어서는 가기 어려운 거리여서 승용차나 자전거를 타고 가야 한다. 이 무덤에는 ‘젓가락무덤(箸墓)’이라는 다소 엉뚱한 이름이 붙어 있다. 그러나 이 무덤에는 엉뚱하다기보다 차라리 참담하다는 말이 어울릴 처절한 전설이 얽혀 있다. 옛날 한 여인이 너무 분통이 터진 나머지 스스로 자신의 음부를 젓가락으로 찔러 자살했다는 이야기다.
▶1 나라(奈良)이라는 이름의 뿌리가 한국말임을 밝힌 마쓰오카 시즈오(松岡靜雄) 교수의 일본옛말사전(日本古語大辭典, 1937) 일부. 해설문 셋째 줄에 ‘나라’라는 한글이 보인다. 2 나라현 아스카의 아스카니이마스진자(飛鳥坐神社)에서 모시는
‘큰남근석어황산신령(奧の大石御皇産靈神)’이라는 남근석. 일본 여성들이 찾아와 머리를 조아려 손뼉을 두 번 치고 합장하며 “아들을 점지해주소서” 하고 기원한다. 남근석 귀두에 둘러친 금줄은 고대 한국으로부터 전래돼온 서낭당 등에 있던 금줄의 잔재다.
대국주신은 일본 고대사에서 7개나 되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대국주신 외에 오모노누시노카미(大物主神)·오쿠니타마노카미(大國玉神)·오아나무치노카미(大己貴神)·오쿠니타마노카미(大國魂神)·야치호코노카미(八千戎神)·오아나무치노미코토(大穴牟遲命) 등이다. 도쿄대 교양학부 오바야시 다료(大林太良) 교수가 지적했듯 “대국주신은 대단히 잘생겼으며 신들 중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바람둥이( 艶福家)”(<日本神話の構造> 1987)였다. 그래서 여기저기 신화
속에서 서로 다른 이름으로 자신을 숨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대국주신에게는 부인이 한둘이 아니거니와 앞에서 살핀 나라 지역에서만 오미나이쿠타마요리히메 외에 또 다른 어여쁜 오미나 ‘모모소 히메(百襲姬)’라는 공주와 사랑도 뜨거웠다. 이 신화에서는 대국주신 이 오모노누시노카미, 즉 대물주신으로 등장한다.
모모소히메는 낮에는 전혀 기척도 없다 매일 밤이 되어서야 자신의 방으로 찾아오는 연인 대국주신의 진짜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몹시 궁금했다. 하여 한 번이라도 제대로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신들의 시대이니만큼 밤은 언제나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그날도 여전히 밤이 되어서야 찾아온 대국주신에게 모모소히메가 넌지시 말했다.
“저는 언제나 당신을 한낮에는 뵈올 수 없어 그 거룩한 얼굴을 전혀 보지 못하네요. 제 소원이오니 오늘 밤에는 돌아가지 말고 여기서 주무셔요. 그러면 날이 밝는 아침에는 늠름한 당신의 모습을 뵈올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공주의 말을 들은 대국주신이 모모소히메에게 대답했다.
“정히 그렇다면 내가 내일 아침 그대의 빗통(빗 따위를
담는 화장품 보관용 나무그릇) 속에 들어가 있을 테니 제발 내 모습을 보고 놀라지 마시오.”
그 말에 오히려 궁금증이 더해진 모모소히메는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 혹시나 하면서 방 한구석에 댕그라니 놓아두었던 빗통을 열어 보았다. 거기에는 옷에 매다는 자그만 끈만 한 실로 아름다운 뱀이 한 마리 들어 있는 게 아닌가? 이 모습을 본 모모소히메는 자지러지게 놀라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그 순간 뱀은 즉시 사람의 모습으로 변신하더니 성을 내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너는 꾹
참지 못하고 내게 창피를 주었다. 이번에는 내가 네게 창피를 주겠다!”
말을 마친 대국주신은 대뜸 드높은 하늘을 향해 휙 날아오르더니 미와 산으로 올라가버렸다. 텅 빈 하늘을 쳐다보며 후회하던 모모소히메는 마침내 땅바닥에 풀썩 주저앉아 젓가락으로 자신의 음부를 찔러 그 자리에서 죽어버렸다. 죽은 모모소히메의 시신은 ‘오치(大市, 현재의 나라 현 사쿠라이 시의 오치묘)’에 장사지냈다. 이 후 사람들은 이 무덤을 가리켜 ‘젓가락무덤’이라고 불렀다. 이 무덤을 낮에는 사람들이 만들고, 밤에는 신이 만들었다고
한다.
이 신화 속 ‘젓가락무덤’이 자리 잡은 숲의 둘레에는 큰 도랑을 파 마치 물속의 섬처럼 만들어져 있다. 현재는 군데군데 물이 말라 젓가락무덤이 있는 숲 어귀까지 들어갈 수 있다. 젓가락무덤은 숲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으나 길이가 280m에 이르는 대형분이라고 한다. 조성된 시기는 믿거나 말거나 3세기께로 추정된다. 흔히 젓가락무덤은 ‘하시하카(はしはか, 大市墓)’로 불리기도 한다.
이왕 이야기를 꺼냈으니 대국주신이미와산에 머무를 때 있었던 또 다른 결혼설화도
소개하자. 미와산 인근에 세야 다타라히메라는 이름을 가진 아가씨가 살고 있었다. 이 아가씨가 마음에 든 대국주신은 어떻게 하면 그 오미나를 자신의 아내로 삼을 것인지 궁리하다 먼발치에 숨어 오미나가 화장실로 들어가기만을 기다렸다. 당시에는 화장실을 흐르는 냇물 위에 세웠다고 한다. 자연적인 수세식 화장실인 셈이다.
남근석 앞에서 득남 기원하는 여인들
1 대국주신의 또 다른 결혼설화의 주인공인 이스케요리히메의 목상.
대국주신이 세야다타라히메라는 처녀와 정을 통해 낳은 딸이 이스케요리히메다.
2 남부 오사카 스에무라(陶邑) 지역은 야요이 시대 말기 이후부터
신라 하지(土師) 씨 가문이 ‘하지키(土師器)’를 만들던 고장으로도 알려져 있다.
하지키란 신불(神佛)에게 제물을 바치는 점토로 구워낸 고배(高杯) 등
제기를 말하는데, 신라·가야 등의 제기(祭器)와 유사하다.
드디어 대국주신이 기다리던 시간이 다가왔다. 아가씨가 집에서 나와 화장실로 들어가자 대국주신은 재빨리 화살로 변신했다. 그 화살은 붉은 황토를 바른 ‘단도시(丹塗矢·니누리야)’였다. 화살로 변신한 대국주신은 물속으로 첨벙 뛰어들었다. 그러고는 아가씨가 화장실에 앉아 옷을 벗고 아랫도리를 내놓는 순간 음부에 날아가 꽂혔다. 붉은 화살에 기습을 당한 아가씨는 화장실 바닥에 나자빠졌다가 버둥대면서 간신히 화살을 뽑아 들었다.
▶대국주신이 실뱀으로 변신해 이쿠타마요리히메와 사랑을 나누어 생긴 아들인 오타타네코(大田田根子)를 모시는 스에무라(陶邑)의 일본 왕실 관할 스에아라타진자(陶荒田神社).
몹시 부끄러워 낯이 붉게 달아오른 오미나는 서둘러 남몰래 자신의 방으로 숨어들었다. 그런데 그때까지 들고 있던 화살을 내려놓자 그 화살은 멋진 청년으로 변해 아가씨를 덥석 껴안았다. 세야 다 타라히메는 그날로 대국주신의 또 다른 아내가 되었다. 이 둘 사이에서 여자아이가 태어났는데 그 이름이 이스케요리히메다.
이 신화와 유사한 전설이 교토의 시모카모진자(下鴨神社) 신주인 여신 다마요리히메에게도 전한다. “다마요리히메는 아버지가 다케쓰누미(賀茂建角身)이고 어머니는 이카고야 히메(伊可古夜日女)다. 다마요리히메가 냇가에서 놀고 있을 때 윗물에서 붉은 화살 ‘단도시’가 떠내려왔다. 다마요리히메는 그 화살을 주워 집으로 돌아와 자신의 방 침상 곁에 꽂아두었다. 그랬더니 이게 웬일인가. 그녀는 곧 배가 불러 왔고 마침내 옥동자를 낳았다. 태어난 아기는 가모노와 케이카쯔치노미코토(賀茂別 雷命)다.”
이
신화는 대국주신과 다마요리히메 사이의 미와산 신화의 유형이라고 본다. 고대 일본에서는 대국주신이 여성을 기습했듯 이른바 ‘요바이(よば い)’라고 해서 여성을 훔쳐다 아내를 삼는 관습이 있었다. 요바이란 밤에 몰래 처녀의 침실로 기어드는 것을 가리킨다. 신화학자 호리우치민이치(掘內民一)는 “인간세계의 결혼도 신혼(神婚)의 형식을 답습했다. 밖이 어두워지면 여자의 집으로 찾아드는 남자는 자기 이름을 고하고는 처녀의 뜻을 물었는데 그것이 요바이의 형식”(<大和の神話> 1964)이라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대국주신은 요바이의
두주자라고 할 수 있겠다.
나라 땅의 다마오키진자(玉置神社)에서는 흰 차돌 여러 개를 고목나무 가지 사이에 잔뜩 깔아 놓고 대국주신의 몸뚱이(神體)로 공경하면서 제사를 모신다. 이들 옥석을 ‘요리시로(依代)’라고 하는데 ‘의대’란 신이 머무르는 장소라는 뜻이다. 신은 돌이나 나무, 산과 강물 등에 머무른다는 것. 대자연의 신비함에 대한 외경이기도 하고 신을 받드는 신앙의 바탕이기도 하다.
사쿠라이에서 남쪽으로 5km 정도 가면 아스카다. 이곳 아스카에는 전각(奧の社)
안에 큼직한 남근석(男根石)을 신주(神主)로 고이 모시는 아스카니 이마스진자(飛鳥坐神社)가 있다. 이 신사에서 모시는 주신은 다름 아닌 대국주신이다. 대국주신은 이곳의 신화에서도 정식 부인만 모두 6명을 거느린 것으로 나타난다. 첫 번째 오미나는 야가미히메다. 그 다음으로 스세리히메·누마카와 히메· 다키리히메·가미야타테히메·도리미미 등이 있다. 대국주신은 이들 부인과 사이에 자그마치 181명의 자식을 거느린다. 그래서인지 일본 여성들은 아스카니 이마스 신사의 남근석을 찾아와 머리를 조아려 손뼉을 두
번 치고 합장하며 “아들을 점지해주소서” 하고 간절히 기원한다. 인도의 힌두교에서도 여신도들이 시바신의 거대한 남근상을 받들면서 머리를 조아리는 것과 비슷하다.
아스카니 이마스 신사에 찾아온 여성들이 손뼉을 치며 절하는 이 사당 남근석의 정식 이름은 ‘큰 남근석어 황산신령(奧の大石御 皇産靈神)’이다. 아기를 갖지 못하는 여성들이 치성을 드리는 ‘큰 남근석 신령님’의 귀두에는 부정이 타는 것을 막고 역귀가 범하지 못하도록 새끼줄로 만든 ‘금줄’을 둘러쳐 놓았다. 이 금줄에는 흰 무명 헝겊을
꿰어 놓았다. 고대 한국으로부터 전래된 서낭당 등의 금줄의 잔재다.
이 남근석은 아스카니이마스 신사 경내 서쪽 깊숙이 후미진 곳의 독립된 사당(奧の社)에 모셔져 있다. 사당 가까이에 있는 “아스카가와(飛鳥川)에서 묘하게 생긴 큰 돌이 발견되자 마을 사람들이 그 돌을 모셔다 아스카니 이마스 신사에 바친”(掘內民一 <大和の神話> 1964) 것이라고 한다. 이곳뿐 아니라 아스카역사공원의 유물전시관 등 여러 곳에도 대국주신의 남근을 상징하는 석물이 있다.
이 사당에서 남쪽으로
불과 100m 떨어진 곳에는 596년 백제에서 건축가와 기와공 등이 건너와 세운 일본 최초로 기와지붕을 얹고 주춧돌을 사용한 칠당 가람인 아스카데라(飛鳥寺, <日本書紀>에 나오는 본래 명칭은 法興寺)가 있다. 그곳에는 7세기 초 백제의 사마지리가 제작한 철불상 ‘아스카대불’을 모신 안교인(安居院)이 서 있다.
이번에는 미와산이 그 자체로 신체가 된 발자취를 찾아보자. 이에 대한 이야기는 <니혼쇼키(일본서기)>에 상세히 기록돼 있다. 이야기는 제10대 스진(崇神) 천황(BC97∼30)이 꿈에 신라신인 대국주신을
만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스진 천왕 5년에 나라 안에는 전염병이 돌아 백성 두 명 중 한 명이 사망할 지경이었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스진 천황은 덕으로 다스리려 했으나 백성 중에 떠나가는 자는 물론 반역하는 자까지 나오게 되었다. 견디다 못한 스진 천황은 아침저녁으로 천지신명에게 기도를 올렸다. 정성을 올리고 신점(神占)을 쳐보니 모모소히메노미 코토(百襲姬命)’를 통해 신의 말씀이 내려졌다.
“어째서 천황은 나라를 다스리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느냐? 그대가 나를 공경하여
제사를 지내준다면 틀림없이 자연스럽게 세상을 잘 다스릴 수 있게 될 것이로다.” 이에 천황이 당황하며 여쭈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은 하늘에 계신 어느 신이십니까?” “나로 말하자면 야마토국 경내에 살고 있는 신이다. 내 이름은 대국주신이로다.” “대국주신?” “그대가 내 아들인 오타다네코(大田田根子)를 제주로 삼아 나에게 제사를 지내준다면 즉시 나라가 평정될 것이다.” “아드님이 오타다네코입니까? 즉시 그 분을 찾아보겠나이다.” 신점에 나타난 대국주신의 지시에 천황은 몹시 기뻐했다. “이제 살았구나. 서둘러 제주인 오타다네코님을
찾아내자.”
스진 천황은 즉시 천하에 포고령을 내려 대국주신의 제주가 될 오타다네코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스에무라(陶邑)에서 오타다네코를 찾아냈다는 기별이 왔다. 스에무라는 미와산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사카이시 동남부 도키산(陶器山) 서쪽 지역”(大野晉 外 <日本書紀註解> 1979)이다. 스진 천황은 왕족과 신하들을 거느리고 몸소 거둥하여 오타다네코에게 직접 물었다.
“그대는 누구의 자식이오?” “아버지는 대국주신이며 어머니는 여신 이쿠타마요리히메라고
합니다.” “아아, 그렇소? 그렇다면 이제 과인은 틀림없이 나라를 번영케 할 것이로다.”
스진 천황은 감격했다. 즉시 오타다네코를 제주로 삼아 대국주신에게 제사를 올릴 준비를 하는데 어느새 고장마다 질병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곧 나라는 안정됐고 오곡은 풍성하게 여물었다. 마침내 12월 20일 스진 천황은 대국주신의 아들 오타 다네코로 하여금 제사를 드리게 했다. 대국주신에게 제사 드린 곳은 나라땅 미와 산 기슭에 마련한 신전, 즉 지금의 오미와 신사다. 이때부터 일본 왕실에서는 미와 산의 신체 대국주신에게
국가 제사를 지내게 된다. 마쓰마에다 타케시 교수는 “오타다네코의 직계 후손인 오미와(大神) 씨 집안에서 미와산 오미와 신사의 궁사(宮司)를 세습해왔다. 오미와 씨 가문은 본래 한반도에서 건너온 도래인이거나 한국에 연고가 깊으며, 5세기 이후 신산(神山)이 된 미와산의 제사권(祭祀權)을 장악했다고 본다”(<出雲神話> 1976)고 밝혔다.
오타 다네코가 살았다고 전하는 스에무라는 남부 오사카 지방에서 야요이 시대 말기에서 고분시대에 걸쳐 신라 도래인들이 ‘스에키(須惠器)’라는 단단한 도기를 만들던
곳이다. 신라도기 스에키는 ‘쇠처럼 단단하다’는 뜻의 ‘쇠기(鐵器)’에서 비롯한 표현이라고도 한다.
또한 이 고장은 야요이 시대 말기 이후부터 신라 하지(土師) 씨 가문이 ‘하지키(土師器)’를 만들던 고장으로도 알려져 있다. 하지키란 신불(神佛)에게 제물을 바치는 점토로 구워낸 고배(高杯) 등 제기를 말 한다. 이들 하지키 제작자는 신라 천일창 왕자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필자는 지금도 스에무라를 중심으로 한 지역을 조사 중이다.
[홍윤기]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과 석좌교수. 일본 센슈대학 대학원 국문학과 문학박사. 한국외국어대 외국어연수평가원 교수, 단국대 대학원 일본역사 초빙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왕인학회장, 한일천손문화연구소장. 저서로 <일본문화사신론> <일본 속의 백제>(총3권) <메이지 유신의 대해부> <일본천황은 한국인이다> <한국인이 만든 일본국보> 외 다수다.
(월간중앙 2012.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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