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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유스님의 선문찰요 1회
마음 밖에 불성이 없다. (달마대사 : 남인도 향지왕의 셋째 아들.)
삼계: 욕계(탐심).색계(치심).무색계(치심)=미혹한 생각으로 윤회하고 있는 모습을 세 가지로 구분한 것.
복잡한 삼계라고 할지라도 똑같이 한 마음으로 돌아가니, 과거의 전불 미래의 후불도 마음으로서 마음을 전하시고 문자를 내 세우지 아니했다.
물어 가로되,
만약 문자를 내세우지 않는다면 무엇으로써 마음이라고 하겠습니까?
답해 가로되,
네가 나에게 물은 것이 곧 너의 마음이요, 내가 너에게 답한 것이 곧 나의 마음이니, 나에게 만일 마음이 없다고 하면 무엇을 인해서 너에게 답을 할 줄 알며, 그대에게 만일 마음이 없다고 하면 무엇을 인해서 나에게 물을 줄을 알겠느냐?
나에게 질문한 것이 곧 너의 마음이니라. 이 마음이 언제부터 시작했느냐 하면... 오늘이라는 날이 어제에서 오늘로 연결 1년전 10년전 천년전.... 맨 처음 끝이 언제냐?
맨 처음이 어디있습니까? 만일 누가 요 때부터 시작됐다고 하면 그러면 그전에는 무엇이냐고 따지기 시작하면 ..... 그러니까 불교에서 말하면 시작도 없다. 시작이 없는 것이 장차 미래 천년 여러 수억만년 후에, 이 이상 없다고 하면 그 후에는 뭐냐고 따지게 되면, 역시 그것도 끝이 없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무시무종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다고 하는 것은 끝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것입니다. 몸은 인간 몸이니까 사람뿐만이 아니라 미물 곤충까지도 육신이 태어나면 늙고 병들어 결국 흩어져버리고 말지만, 이 육신이 내가 아니고, 육신 속에 육신이 아닌 내가 눈을 통해서 빛을 보고 귀로 통해 소리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주위 환경을 의식하고 있다. 육신을 통해서 의식하고 있는 이 주인공 이거는 육신이 몸이 났다고 해서 같이 나고 몸이 없어졌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했어요. 영원히 영원히 불생불멸이다 이겁니다.
아득하게 끝없는 과거로부터 일상생활에서 움직이는 모든 모습이 낮이나 밤이나 장소를 막론하고 이것이 다 너의 근본 마음이며 이것이 너의 근본 부처님이니 곧 마음이 부처라고 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니라. 이 마음을 제거한 밖에는 마침내 다른 부처를 얻을 수 없으니, 이 마음을 떠난 밖에 깨달음과 열반을 찾으면 옳은 것이 없느니라.
우리의 성품은 진실하여 원인도 아니고 결과도 아니며, 법이라는 것이 곧 마음이라는 뜻이니, 자기 마음이 보리이며 자기 마음이 열반이니라. 만일 말하기를 마음 밖에 부처와 보리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면 잘못이니 마음밖에 보리니 열반이니 부처가 있다고 하면 그런 부처와 보리가 다 어느 것에 있는고?
비유건태 어떤 사람이 손으로 허공을 잡으려고 한다면 허공을 잡을 수 있는가?
허공이라 것은 다만 이름만 있고 모양이 없는 것이니, 취하려고 해도 취할 수 없고 버리려고 해도 버릴 수 없으며, 허공을 잡지 못하는 것과 같아서 이 마음을 제거한 밖에 부처를 찾는다 하는 것은 마침내 얻지 못하느니라.
지유스님의 선문찰요 2회
마음밖에 불성이 없다.
부처라고 하는 것은 자기 스스로가 부처를 만드는 것이지, 남이 나를 부처를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다.
자심에서 우리가 자기가 깨달으면 되는 것이고, 깨달음이라는 것은 찬줄 알고 더운 줄 아는 바로 이것이다. 이것은 깨닫고 안 깨닫고 관계없는 것입니다. 이건 줄 알면 되는 것입니다. 알면 내가 바로 부처님이 되는 거고, 아무리 일러 주어도 아니라고 부인하면 할 수 없이 자기 스스로가 중생이 되기 원해서 고생하러 질머지고 나가는 것입니다.
부처란 자기 스스로의 마음에서 만들어지는 것인데, 무엇을 인해서 이 마음을 떠난 밖에 부처를 찾는고? 부처를 알고 싶거든 자기 마음을 확인하라 이겁니다.
과거의 부처나 미래의 부처도 다만 그 마음을 말하는 것이니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곧 부처님이고 부처님이 곧 마음이어서, 마음밖에 부처가 없고 부처밖에 마음이 없느니라.
만약 마음 밖에 부처가 있다고 한다면 부처는 어느 곳에 있는가? 마음 밖에 이미 부처가 없다고 하는 것을 확인했다고 하면 어째서 부처를 보려는 소견을 일으키는가? 부처님을 보고 싶으면 자기 본심을 돌아보라 본심 그 자리가 부처님이다. 그래서 그런 생각 버리지 못하면, 서로 서로가 속고 속여서 능히 자기 본심을 깨닫지 못하고 저 무정물에 (목불이나 토불이나 물질로 만든 부처님 형상) 사로잡혀 자유롭지 못하다.
만일 이 말을 믿지 못하면 스스로 속고 이익이 없다. 부처는 아무런 허물이 없는데 중생들이 엎어지고 자빠져, 자기 마음이 이것이 부처인 줄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느니라.
만일 자기 마음이 부처인 줄 알았다면 마땅히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지 말지어다.
부처가 부처를 제도하지 않으니, 마음을 가지고 부처를 찾으면 부처를 알지 못하여서 그런 것이다. 단지 바깥에 부처님이 있다고 보는 사람은 모두가 자기 마음이 부처인 줄 모르기 때문이니라.
또한 부처를 가지고 부처에게 절하지 말며 마음을 가지고 부처를 생각하지 말지어다.
부처는 경을 외우지 않으며, 부처는 계를 지니지 않으며, 부처는 계를 범하지 않으며 부처님은 가지고 범한다 하는 것이 없으며 또한 선도 악도 짓지 않느니라.
만일 부처를 찾고자 할진댄 모름지기 자기 성품을 보아야 곧 이것이 부처이다.
만약 자기가 자기 마음을 보지 못하고 자성을 보지 못하면, 염불하거나 경을 외우거나 제계를 가지거나 계율을 지녀도 또한 이익되는 곳이 없느니라, 염불하면 항상 부처님을 생각하기 때문에 부처님이 계시는 국토에 태어나는 인과를 얻고, 경전을 외우면 총명해지고 계율을 지니면 하늘에 태어나고 보시하면 복의 과보를 얻으니 부처를 찾는 데는 마침내 얻지 못하느니라.
지유스님의 선문찰요 3회
만약 자기를 분명하게 요달하지 못했거든, 선지식을 참례해서 생사의 근본을 요각할지어다.
견성하지 못했다면 선지식이라고 할 수 없으니, 그렇지 않으면 비록 십이부경을 설할 수 있어도 생사를 면하지 못하여 삼계에 윤회하여 고통을 받으면서 벗어날 시기가 없으리라.
옛날에 선성비구가 있어 십이부경을 외우고 있어도 스스로 윤회를 면치 못한 것은 견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니라. 선성비구도 이와 같았는데, 요새 사람이 서너댓 가지 경론을 강하고 그것으로 불법을 삼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로다.
자기 마음을 깨닫지 못하면 부질없는 문자를 외워도 아무런 쓸모가 없느니라. 만일 부처를 찾는 곳을 요구한다면, 바로 성품을 보아야 하니 성품이 곧 부처이니라. 부처란 자제한 사람이며, 어디든 구속받고 구애되고 그렇지가 않다. 가고 싶으면 가고, 오고 싶으면 오고, 서고 싶으면 서고, 앉고 싶으면 앉고, 누구에게 눈치 볼 것도 없어요. 또 일이 없고(마음속에 망상이 없다) 조작이 없는 자제한 사람이니라.
만일 자기 자성을 보지 못했다면 하루 종일 망망(공부가 아득하다)하여 바깥을 향해 치달아 구하기 때문에 부처를 찾아도 원래 얻지 못하느니라. 비록 한 물건도 얻을 것이 없다고 하지만, 만약 알지 못하면 또한 선지식을 참례해서 간절히 근고히 구해서 자기 마음으로 알게 해야 할지어다.
생사의 일은 큰일이니,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말지어다. 그대로 두면 자기가 스스로 속고 아무런 이익이 없느니라. 보배가 산더미 같고 권속이 항하사 모래 같다 하더라도 살아 있을 때는 눈을 뜨면 볼 수 있으나 눈 감으면 다시 볼 수 있는가? 그러므로 알라, 세상의 일은 마치 꿈과 환상과 같은 것이니라. 스승을 급히 찾지 않으면 헛되이 일생을 보내리라.
그런데 불성은 사람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스승을 인하지 않으면 끝내 밝게 깨닫지 못하니라. 스승을 인하지 않고 깨닫는 사람은 만 명 중에 드문 일이니라. 만약 자기가 혼자 공부해서 인연으로 뜻과 합치하여 성인의 뜻을 얻으면, 선지식을 참례할 필요가 없으니 이것은 나면서 아는 뛰어나 배움이니라.
만일 깨닫지 못했다고 할진댄 모름지기 근고히 참례하여 배워야 하니, 가르침을 인해서 비로소 깨달음을 얻느니라.
스승을 만나면 같은 점을 먼저 확인하고, 그다음에 다른 점이 있으면 몸과 마음을 닦아 나아가야 되는거 아닙니까? 그게 성불입니다.
< 금강경에 보면 그런 말이 있잖아요.
"수보리야 아라한 도를 얻은 사람이, 나는 아라한 도를 얻었다고 생각하느냐?"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일 아라한 도를 얻은 사람이 아라한 도를 얻었다고 한다고 하면, 부처님께서는 그 사람이 도를 얻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에 도를 얻었다고 합니다."
참된 도인은 옆에 같이 있어도 모릅니다. 내가 상이 없어지면. 상 없는 사람을 알아본다고 그랬어요. 만약 스스로 밝게 알았다면 배우지 않더라도 또한 얻을 것이니, 미 한 사람과는 같지않느니라.
능히 검고 흰 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편다면, 부처를 비방(자기 마음을 가린다고 하는말)하고 법을 망년되게 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무리는 설법하기를 하늘에서 빗물 떨어지듯이 청산유수처럼 비 오듯 하여도 이것이 다 마구니의 소리여서 곧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니, 스승은 마의 왕이고 제자는 마의 백성이거늘 미 한 사람은 그런 사람의 지위에 맡겨서 생사의 바다에 빠져 있는것도 깨닫지 못하는 도다.
다만 견성하지 못한 사람이 망년되이 이것이 부처라고 일컫지만, 이런 중생은 큰 죄인이어서 일체중생을 속여서 그들을 마계에 들게 하느니라. 만일 견성 하지 못하면 십이부경교를 설득한다 할지라도 모두 마설이며 마가의 권속이어서 이것은 불가의 제자가 아니니라. 이미 검고 흰 것을 가리지 못하니 무엇을 의지하여 생사를 면하리오? 만일 견성하면(자성을 보았다고 하면) 곧 부처님이요. 견성 하지 못했다면 곧 중생이니라.
만일 중생상을 떠나서 따로 불성을 얻을 수 있다고 하면 부처가 지금 어느 곳에 있는가?
중생성이 곧 불성이니라. 성품 바깥에 부처가 없어서 부처란 곧 이 성품이니 이 성품을 제외한 밖에는 부처도 가히 얻을 수 없는 것이고, 부처 밖에는 성품도 가히 얻을 수 없느니라
지유스님의 선문찰요 4회
《문자를 세우지 않고 견성하면 성불이다》
도는 결국 본래의 마음자리. 본심
“어떤 것이 불법입니까?”라는 질문은 결국
“어떤 것이 나의 본래의 마음자리입니까?”라는 의미
2. 마음을 미하고 만행함은 윤회를 면치 못한다.
묻기를, 만일 견성하지 못하였더라도 염불, 송경, 보시, 지계, 정진하여 널리 복리를 이으키면 성불할 수 있습니까?
답해 가로되, 얻지 못하느니라.
또 묻되, 어째서 얻지 못합니까?
답해 가로되,
작은 법이라도 얻은 것이 있다고 하면, 이것은 유위법이며 인과며 과보를 받는 것이며 윤회하는 법이어서 생사를 면하지 못하는 것이니, 어느 때에 불도를 이를 수 있겠는가? 부처를 이룬다는 것은 모름지기 자기 자성을 보는 것이니라. 만일 견성하지 못하면, 인과 등의 말들이 모두 외도법이니 만일 불도를 닦는 불자라고 하면 외도법을 익히지 말지니라.
부처님은 일이 없는 사람이며 인과가 없으니, 작은 법이라도 얻은 것이 있다면 모두 부처를 비방하는 것이어서 무엇을 의지해서 이룰 수 있겠는가? 다만 한 마음, 한 가지 능함, 한 가지 아는 것, 한 가지 소견에 주착하면 부처님께서 도무지 허락하지 않으시니라. 부처는 가지고 범하는 것이 없으니 계를 지님과 변함이 없어서, 마음이 본래 비어 있으며 또한 어떤 만물속에 들어갔다 해도 때 묻고 깨끗해짐이 없어서 새삼스레 닦고 증득함이 없으며, 원인도 없고 결과도 없으니라.
부처는 계를 가지지도 않고 부처는 선도 닦지도 않으며 부처는 악도 짓지도 아니하며 부처는 정진하지도 않으며 게으르지도 않으니, 부처님은 지음이 없는 사람이어서 다만 마음속에 소견에 주착하면 부처님께서 곧 허락하지 않으시니라. 부처가 부처가 아니니 부처라는 알음알이를 짓지 말지어다. 달리 표현하면 도가 도가 아니니, 도란 생각을 하지 말아라.입니다.
만일 이런 뜻을 모르면, 일상생활의 모든 시간과 모든 곳이 이 대로가 본심인 줄을 모르느니라. 성품을 보지 못하고 생각을 일으키면 안 되는구나 그러면 생각 일으키지 말아야 되겠다하는(무작법) 그런 생각으로 모든 부딪칠 때마다 생각을 죽이고 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무작법을 한다고 하면 이 사람은 큰 죄인이며 어리석은 사람이니라. 무기공 중에 떨어져서 어둡고 어두운 것이 술 취한 사람과 같아서, 좋고 나쁜 것을 가리지 못하리라.
만일 생각을 쉬는공부(무작법)를 닦으려고 하면, 먼저 모름지기 견성한 후에 생각을 쉴 것이니 만일 자성을 보지 못하고 불도에 이른다고 하는 것은 옳은 것이 없다.
어떤 사람이 인과가 없다 선을 짓거나 악을 짓거나 본래 공인데 아무리 나쁜 짓 하더라도 관계없다. 이렇게 인과를 없애어서 치연히 악업을 짓되 망녕되이 말하기를 본래 공이기 때문에 악업을 짓더라도 허물이 없다고 하니, 이런 사람은 간단없는 어두운 지옥에 떨어져서 영원히 나올 시기가 없으리니, 만일 지인이라고 하면 마땅히 이러한 견해를 하지 말지니라.
물어 가로되, 이미 일상생활의 움직임과 낮이나 밤이나 모두 본심이라고 하면, 육신을 가지고 있을 때는 어째서 본심을 보지 못합니까?
답해 가로되, 본심이 항상 앞에 나타나 있는데 네가 스스로 보지 못하는 도다.
물어 가로되, 마음이 이미 나타나 있다면 어째서 보지 못합니까?
스승이 이르되, 네가 꿈을 꾸어본 일이 있느냐?
답해 가로되, 꿈을 꾸어보았습니다.
물어 가로되, 네가 꿈을 꿀때에 그 몸이 네 몸이더냐?
답해 가로되, 제 몸입니다.
또 묻되, 네가 말하고 생활하는 모든 것이 너와 다르더냐 다르지 않더냐?
답해 가로되, 다르지 않습니다.
스승이 이르되, 이미 다르지 않다고 하면, 곧 이 몸이 너의 본 법신이며 곧 이 법신이 너의 본심이니라. 이 마음이 끝이 없는 광대한 겁 이래로 지금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어 생사가 있어 본 적이 없어서 나지도 않았고 멸하지도 않았으며, 늘어난 것도 없고 줄어든 것도 없으며, 때 묻지도 않았고 깨끗해진 일도 없으며, 좋아지지도 않고 나빠지지도 않았으며, 오지도 않았고 가지도 않았으며, 또한 옳고 그른 것도 없으며, 남자니 여자니 하는 모양도 없으며, 승려니 속인이니 늙은이니 젊은이니 하는 것도 없으며, 성인과 법부의 모양도 없으며, 또한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으며, 또한 닦고 증득할 것도 없고, 인과도 없고 근력도 없으며, 또한 모양이 없는 것이 마치 허공과 같아서 취할래야 취할 수도 없고 버릴래야 버릴 수도 없느니라.
산이나 강이나 돌이나 벽들이 능히 장애가 되지 않아서, 나가고 빠지고 오고 가는데에 자재하게 신통해서 오온(육신)의 산을 뚫고, 생사의 물을 건너나니 온갖 업으로 이 법신을 구속할려야 구속할 수가 없느니라. 이 마음은 미묘하여 보기 어려워, 이 마음이 모양 있는 것과 같지 않으니 이 마음이 부처이니라.
사람들이 다 얻어보고자 하나니 이 광명 속에 손을 움직이고 발을 움직이는 것이 항하의 모래수와 같이 수없이 움직이고 생활하고 있었지만, 물어보면 다 말을 하지 못함이 마치 나무 사람과 같으니 모두가 다 자기가 수용하고 있는데 자기 손으로 만지고 느끼고 있는데 어째서 알지 못하는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체중생이 다 미 한 사람이어서 그것 때문에 업을 지으므로 생사의 물에 떨어져서 나오려고 하나 오히려 빠져버린다 하시니 다만 견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니라. 중생이 만일 미하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물어보면 그중에 한 사람도 아는 자가 없는고?
자가의 손을 움직이고 발을 움직임을 무엇 때문에 알지 못하는가? 성인의 말씀은 그릇된 것이 아니지만, 미 한 사람이 스스로 알지 못하는 도다.
그러므로 알라, 이 마음은 밝히기 어려우니라, 오직 부처님 한 사람이 능히 이 마음을 알고, 나머지 인간과 천상과 중생 등은 다 밝게 알지 못하느니라. 만일 지혜로이 마음을 밝게 요달하면 바야흐로 이름이 법성이라고 하며 또한 이름을 해탈이라고도 하니 생사에 거리낌이 없으며, 일체 온갖 법으로 이것을 구속할려야 구속할 수 없기 때문에 이름이 대 자재왕여래이며 또한 부사의라고 하며 또 성체라고 하면 또 장생불사라고 하며 또 대선(신선 중에서 제일 큰 신선)이라고 하며 이름은 비록 같지 않지만, 체는 곧 하나이니라.
성인이 가려놓은 분별이 다 자심을 떠난 것이 아니라 하시니 마음의 양이 넓고도 커서 응해
써도 다함이 없어서, 눈에 응해서는 빛을 보며 귀에 응해서는 소리를 들으며 코에 응해서는 냄새를 맡으며 혀에 응해서는 맛을 알며 나아가 일상의 모든 움직임이 모두 자기의 마음이며 일체 우리 생활 중에 다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자리가 있으니 곧 자심이니라. 그러므로 말하되, 여래색에는 다함이 없으며 지혜도 또한 그러하다 하시니 색이 다함이 없는 것이 자심이니라. 우리 마음이 일체 모든 것을 잘 분별하며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모두 지혜이니 마음에 형상이 없기 때문에 지혜도 또한 다함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말하되, 여래색이 다함이 없고 지혜도 또한 그러하다 하시니 사대색신은 곧 번뇌여서 색신은 곧 생멸이 있지만, 법신은 영원히 멸하지 않기 때문에 상주하면서도 머무는 바가 없어서 여래의 법신은 항상 변하고 달라지지 않느니라. 그러므로 경에서 말씀하시되, 중생이 마땅히 불성이 본신에 있는 줄 알아야 한다 하시니, 가섭존자는 다만 본성을 깨친 것이니라.
본성이 곧 이것이 마음이오, 마음이 곧 성품이니 곧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마음과 같아서 과거 부처님이나 미래 부처님이 다만 이 마음을 전한 것이니 이 마음을 제외한 밖에 부처도 가히 얻을 수 없다.
전도된 중생이 자기의 마음이 부처인 줄 알지 못하고, 바깥을 향해서 치닫고 구하는데 종일토록 바쁘고 바빠서 염불도 하고 예불도 하니 부처는 도대체 어느 곳에 있는가? 마땅히 이런 소견을 짓지 말지어다. 다만 자기의 마음만 알면 마음 밖에 다시 다른 부처가 없는 것이니라. 경에 말씀하시기를, 모든 모양 있는 것은 다 허망하다 하시고 또 말하되, 내가 있는 곳에 바로 부처님이 계시다 하시니 자기 마음 이것이 부처다. 마땅히 부처를 가지고 부처에게 절하지 말지어다. 다만 부처와 보살의 모양이 있고 홀연히 앞에 나타나더라도 간절히 절하지 말지어다.
내 마음이 텅텅 비어서 본래 이런 모양이 없으니, 만일 그런 모양을 취하게 되면 마구니에 말려 들어가는 것이어서 다 삿된 도에 떨어지리라. 만일 그런 환상이 마음을 좇아 일어난 줄을 알면 곧 절을 하지 않느니라. 절하는 사람은 알지 못하는 것이요. 아는 사람은 절하지 않으니 절하면 마군에 말려 들어가게 된다. 배우는 사람이 공부하다가 이런 경계가 나타나면 모르고 말려 들어갈까 걱정되어 이런 말을 하였노라.
모든 여래의 본상 체상에는 도무지 이러한 모양이 없으니 간절히 마음속에 새겨둘지어다.
다만 이상한 경계가 있더라도 간절히 캐묻지도 말며 또한 두려운 생각도 내지 말며 의심도 하지 말지니라. 내 마음이 본래 청정하니 어디에 이런 모양이 있겠는가? 심지어 하늘의 천룡, 야차, 귀신, 재석천왕, 범천왕 등의 모양이 나타나더라도 마음속에 공경하고 존중하는 마음을 내지 말며, 또한 두려운 생각도 하지 말지니라.
내 마음이 본래 공적 하여서 일체 모양이 모두 망년된 모양이니 다만 모양을 취하지 말지어다. 만일 부처에 대한 견해나 법에 대한 견해를 일으키거나 부처님이나 보살 모양이라도 경중한 마음을 내면 스스로 중생의 자리에 떨어지리라. 만일 진실로 알고자 한다면 다만 일체의 상을 취하지 않으면 곧 얻을 것이니 다시 별다른 말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경에 말씀하시기를, 무릇 모양 있는 것은 다 허망하다 하시니 모두 일정한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니며, 환상은 정해진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이것이 무상법이니 다만 모양을 취하지 않으면 성인의 뜻에 합하리라.
그러므로 경에 말씀하시기를, 일체상을 떠나면 제불이라 하시니라.
지유스님의 선문찰요 5회
3. 공경하지 않는 까닭을 밝히다.
물어 가로되, 어째서 부처님과 보살 등에 절하지 말라고 했습니까?
답해 가로되,
마왕 파순과 아수라가 신통으로 나투어 보살의 모습을 지어서, 가지가지로 변화하나니 이는 외도여서 모두 부처가 아니니라. 부처는 내 마음이어서 예배하지 말지어다. 부처라는 것은 서쪽 인도의 말이니, 이 땅에서는 각성이라고 하느니라. 각이라고 하는 것은 신령스럽게 알고 있는 것이니 만 가지 근기에 응해서 만물에 접하며 눈썹을 드날리고 눈썹을 깜빡거리기도 하며, 손을 들고 발을 움직이는 것이 모두 자기의 영각의 성품이니라.
성품이 곧 마음이요 마음이 곧 부처요 부처가 곧 도요 도가 곧 선이니 선이라는 한 글자는 범부가 헤아릴 바가 아니니라.
또 이르되, 본성을 보는 것이 선이니 만일 본성을 보지 못하면 곧 선이 아니니라. 설령 천경과 만론을 설할 수 있다 하더라도, 자기 본성을 보지 못하면 다만 범부이지 불법이 아니니라. 지극한 도는 깊고도 깊어서 말로는 알 수 없으니, 경전의 무엇을 의지해서 미치겠느냐? 다만 자기 본성만 알면 글자 하나를 모르더라도 또한 얻어 지니라. 자기 성품을 보는 것이 곧 부처이니 성인의 체는 본래 깨끗하여 잡되고 더러운 것이 없느니라. 있는바 말이라고 하는 것이 다 성인의 마음을 좇아 작용을 일으킨 것이니, 용의 체가 본래 공하여 이름과 말이 오히려 미치지 못하는데 12부경이 무엇을 의지해서 미치겠는가?
도는 본래 원만히 이루어진 것이어서 새삼 닦고 증득할 필요가 없으며, 도는 소리도 빛도 아니어서 미묘하여 볼 수 없으니, 어떤 사람이 물을 마실 때 차고 따뜻함을 스스로 아는 것과 같으니라. 가히 남을 향해서 말해줄 수 없는 것이로다. 오직 여래만이 알 수 있고 나머지 인간이나 하늘의 무리 들은 도무지 깨달아 알지 못하느니라. 범부는 지혜가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집착함이 있느니라.
자심이 본래 공적한 줄 알지 못하고 망녕되이 상과 일체 법을 집착하면 곧 외도에 떨어지리라. 만일 모든 법이 마음을 좇아 난 줄 알면 응당 집착함이 없으니 집착하면 알지 못하느니라. 만일 자기 본성을 보면 12부 경전들이 모두 부질없는 문자니라. 천 가지 경전 만 가지 논서가 다만 마음을 밝힌 것이니, 말끝에 알아차리면 교는 장치 어디에 쓰겠는가? 지극한 진리는 말이 끊어진 것이요. 교는 말이니 실제로는 도가 아니니라. 도는 본래 말이 없기 때문에 말은 망녕된 것이니라.
만일 밤에 꾸는 꿈에 누각, 궁전, 코끼리, 말, 이런 무리들과 나무, 총림, 못, 정자, 이와 같은 등의 상을 볼지라도 한 생각 낙착심을 일으키지 말지니 이것이 모두 생을 의탁하는 곳이니라. 간절히 모름지기 뜻에 둘지어다. 임종 때에 그러한 상을 취하지 않으면 곧 의심을 제거할 수 있지만, 마음이 잠깐 일어나면 거기다 조금이라도 의심을 낸다든지 좋다는 생각을 일으키면 마에 끌어 당겨진다.
법신은 본래 청청하여 받는 것이 없지만, 다만 미혹하기 때문에 미한 연고로 깨닫지도 못하고 알지 못하니, 그 때문에 망녕되이 과보를 받으므로 그러기 때문에 낙착이 있어서 자재하지 못하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만일 본래의 몸과 마음을 깨달으면 곧 습기에 물들지 않으리니, 만일 성인으로 좇아 범부에 들어서 갖가지 잡류를 나투어 보이는 것은 스스로 중생을 위하기 때문이니라. 성인은 역경계와 순경계에 모두 자재하시어 일체 업이 성인을 구속할 수 없느니라. 성인은 이룬지가 오래되어서 큰 위덕이 있으니, 일체 품류의 업이 저 성인의 군림을 입어서 천당과 지옥이 어찌할 수 없느니라.
범부는 정신 혼미하여 성인이 안과 밖이 명철한 것과 같지 않느니라. 만약 의심이 있으면 곧 짓지 말지니 짓게 되면 곧 생사에 흘러가 후회하여도 서로 구할 곳이 없으리라. 빈궁과 곤고가 모두 망상을 좇아 난 것이니, 만약 이 마음을 알고 서로 권하고 힘써서 다만 지음 없이 지으면 곧 여래의 지견에 들어가리라.
처음 마음을 발한 사람은 정신이 모두 고정되어 있지 않으니, 만일 꿈속에서 자주 이상한 경계를 보더라도 문득 의심하지 말지어다. 모두가 자기 마음으로부터 일어난 것이어서 바깥에서 좇아온 것이 아니니라. 꿈에 만일 광명이 나타나는데 해보다 더한 것을 보게 되면 곧 나머지 습기가 단번에 다하고 법계성이 나타나느니라. 만일 이런 일이 있으면 곧 이것이 성불하는 인이 되니 오직 스스로 알고 남을 향해 말하지 말지어다.
혹은 고요한 동산 숲속에서 가고 머물고 앉고 눕다가 눈으로 광명이 혹은 크고 혹은 작은 것을 보더라도 남에게 말하지 말며, 또한 취하지도 말지니 또한 이것이 자성 광명이니라. 혹은 밤 고요한 어둠 속에서 가고 머물고 앉고 눕다가 눈으로 광명이 낮과 다름이 없는 것을 보더라도 괴이하게 여기지 말지니, 아울러 이것도 자기 마음이 밝게 나타나고자 하는 것이니라. 혹은 밤 꿈속에 별과 달이 분명한 것을 보면 또한 자심의 모든 반연이 쉬고자 함이니 또한 남을 향해서 말하지 말지어다.
꿈에 만일 어둡고 어두운 것이 마치 그늘 어둠 속에 가는 것 같으면, 또한 이것이 자심의 번뇌 장애가 무거운 것이니, 또한 스스로 알고 있을 따름이니라. 만일 본성을 보면 독경이나 염불을 쓸 필요가 없으니, 많이 배우고 많이 아는 것은 이익이 없어서 마음이 점점 어두워지느니라.
교를 베풀어 놓은 것은 다만 마음을 표한 것이니, 만일 마음을 알면 어째서 경 보는 일을 쓰겠는가? 만일 범부를 좇아 성인에 들어간다면, 곧 업을 쉬어서 정신을 기르고 분에 따라 시간을 보낼지어다. 만일 감정이 너무 많아 성냄과 기뻐함이 많으면 성품이 바뀌어 도와 서로 어긋나는 것이니 스스로 속고 이익이 없느니라. 성인은 생사 속에서 자재하게 출몰하시어 숨고 나타남이 일정하지 않으니, 일체 업으로도 구속할 수 없으며 성인은 시비를 깨뜨리느니라.
일체중생이 다만 자기의 본성만 보면 나머지 습기가 단번에 사라지고, 정신이 어둡지 않아 모름지기 곧바로 알아차리니 다만 지금 여기에서 참으로 도를 알고자 한다면 한 법도 집착하지 말고 업을 쉬어서 정신을 기를지어다. 나머지 습기가 또한 다하면 자연히 명백하여 공덕 씀을 빌지 않으리라.
모든 악한 일은 하지 말고
모든 선한 일을 받들어 행하지만
스스로 마음을 맑게 하는 것이 (마음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니라
지유스님의 선문찰요 6회
가히 우습다.
소를 찾는 자여!
소를 타고도 소를 찾는 도다.
구하면 구할수록 멀어지고
찾으면 찾을수록 동떨어진다.
구하지 말아라
찾지 말아라
마음이 온갖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온갖 환상을 하고 있다 이 말입니다. 파도 일어나 전 그것이야말로 파도의 본바탕이 아닙니까? 바람이 일어나자 물이 충격받고 울퉁불퉁 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물의 본래 모습은 아닙니다. 본래 모습 물이라고 하는 것은 파도가 생겼다고 같이 생기거나 파도가 없어졌다고 해서 물이 같이 없어집니까?
파도는 생겼다가 없어졌다 하지만, 물은 절대로 새로 생기고 없어지는 일이 없습니다. 영원히 영원히 불생불멸이란 말입니다. 그와 같듯이 우리가 모든 감정 생각들이 나자신의 모습인 것만은 틀림없지만, 본래 모습은 아니다. 본래 모습 그 자리만큼은 모든 미물 곤충 부처님까지도 똑같은 모습이라고 그랬어요.
환상을 보니까 환상이 자기 자신을 둘러싸고 있어요.
좋고 나쁘고 온갖 감정 이게 답답하고 괴로운게 아닙니까
환상하는 놈은 환상이겠어요. 환상은 환상일지라도 환상을 만들어논 놈은 환상이 아니다.
생각하고 있는 놈이 마음이 온갖 환상을 하고 있다 그러면 마음도 환상이냐 마음은 환상이 아니다. 환상을 할지언정..
망상 집착으로 말미암아 생각을 하게 되면 환상 아닙니까? 누가 했느냐? 내가 한 겁니다.
내가 아버지 생각을 하게 되면 아버지 그림자가 떠오릅니다. 그림자가 내 마음속을 자리를 차지하다 보니 목전에 있는 책이 눈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아요. 이 환상을 누가 했을꼬?, 하고 환상 일어난 자체를 들여다보면 환상이 없어집니다. 그림자도 없어져요. 그래 내 모습이 나타났느냐고 하면 내 모습은 보이지 않아요.
내 속에 책이 보이거든, 마음은 형태 모양이 없어요. 형태 모양 없는 속에 모든 물체들이 두두물물이 소리도 있고, 냄새도 있고 모든 형체들이 다있다 이겁니다. 생각 가릴 때는 하나도 들어오지 않지요. 생각을 쉬라. 생각 때문에 앞에 것이 들어나지 않았는데 생각을 쉬니까 책이 보입디다. 됐다 바로 그 자리이다. 그래서 이것을 확인해놓고 보면, 옛날 부처님이나 나나 임제선사도 얻어터졌을 때 몰랐는데, 나중에 깨닫고 보니까 황벽선사 제나나나 똑같은데 이 자리는 똑같아요.
하지만 이 자리를 우리가 모르고 이때까지 생활해 왔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자기 마음속에 사람마다 탐·진·치·욕심·감정이랄지 시기 질투 모두 그대로 있어요. 그렇잖아요. 이놈이 경계에 부딪칠 때마다 남을 없신여기고 남을 어떻게 본다 좋다 나쁘다 감정이 남아 있잖아요. 그것이 나를 괴롭히고 있다.
그러니까 모든 감정이라는 환상이 마음속 깊숙이 자리 잡고 앉아 좀처럼 떠나지 않아 그거 소화 시키는 방법이 한 생각 일어나기 전에 본래 모습의 자리를 지금은 조그마한 용량이작아 이것을 확대해야 점점 키워 나가야 되거든, 산란심 혼침 욕심 감정 이런 것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감정 일어나려고 하면 정신 바짝차려야 한다. 나도 모르게 망상 딱 일어났다. 일어난 것을 걱정하지 말아라. 생각이 일어나면 바로 알아차려라
화났다 해도 화 일어나기 전에 딱 안정되어버리면 무슨 감정이 남아있겠어요. 생각들이 일어나드라도 음 요런 것들이...! 객관적으로 구경하고만 있으면 된다. 일어나도 괴롭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화나면 화 이놈 일어났구나, 재미있게 구경하고 있으면 될거 아닙니까. 그러면 화났다가 어디로 도망가버립니다. 흔적도 없어요. 객관적으로 보듯이 화났다고 억지로 누르려고 했다간 서로 상대가 되니까 깔아 앉키는커녕 더 커지지요. 일어나면 어디까지 가는지 한번 보자하고 지켜보면 없어집니다. 그만큼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외도는 부처님의 뜻을 알지 못하므로, 공력은 가장 많이 쓰나 성인의 뜻을 위배하는 도다. 하루 종일토록 몰아대며, 염불도 하고 독경도 하더라도 심성은 점점 어두워져 윤회를 면하지 못하느니라. 부처님은 한가로운 분이어서, 어째서 그렇게 몰아대는 일을 쓰겠으며, 널리 명리를 구하여 나중에 어디에 쓰겠는가?
자기의 자성을 보지 못한 사람은 독경하고 염불하며 오래 정진하는 것을 배우며, 밤낮 할 것 없이 행도하며 오래 좡좌불와를 배우기도 하며 널리 배우고 많이 들음을 불법으로 삼으니, 이러한 중생은 모두 불법을 비방하는 사람이니라. 과거의 부처님이나 미래의 부처님이 다만 자성을 보는 것을 말씀하시니 사량분별은(제행) 무상한 것이어서, 만일 자성을 보지 못하고 망녕되이 말하되, 내가 아뇩보리를 얻는다고 하면 이는 큰 죄인이니라.
10대 제자 중에 아란존자는 성문중의 제일이라고 하니 부처는 지식이 아니어서, 다만 성문과 이승 외도로 하여금 식심분별을 없애게 하시니, 식수로서 닦아 증득해 나가는 계급절차라고 하는 것은 다 인과 속에 떨어진 것이니라. 이는 중생의 업보여서 생사를 면하지 못하여 부처님 뜻에 위배하는 것이니, 곧 이것은 부처를 비방하는 중생이어서 죽여(생각을없애라)도 허물이 없느니라.
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일천제는 신심을 내지 않으니 죽여도 허물이 없다 하시니라. 만일 신심이 있으면 이 사람은 부처님 지위의 사람이니라. 만일 자성을 보지 못했으면 곧 경솔하게 하여 다른 어질고 착한 사람을 비방하지 말지어다. 스스로 속고 이익이 없느니라. 좋고 나쁜 것이 뚜렷하고 인과가 분명하여 천당과 지옥이 바로 눈앞에 있느니라. 어리석은 사람은 믿지 않아서 현실에 흑암지옥속에 떨어져 있어도 깨닫지도 못하고 알지 못하니 다만 업장이 무겁기 때문에 믿지 못하는 것이니라.
비유컨대 눈 없는 사람에게 해에 광명이 있다고 말해주어도 믿지 못하는 것과 같이, 비록 저를 향해 설하여도 또한 믿지 않으니, 다만 눈멀었기 때문이어서 무엇을 의지해서 햇빛을 분별하리오? 어리석은 사람도 또한 이와 같아서, 현재 축생의 잡류에 떨어지며 빈궁하고 하천한 곳에 태어나며 살려고 해도 살 수 없고 죽으려고 해도 죽을 수 없으니 비록 이 고통을 받고 있으나 바로 물어보면 또한 말하되, 내가 지금 쾌락한 것이 천당과 다르지 않다고 하니 그러므로 알라, 일체중생은 나는 곳을 낙으로 삼아 깨닫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도다. 이와 같은 악인은 다만 업장이 무겁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능히 신심을 발할 줄 모르는 것이요. 스스로 남을 말미암은 것이 아니니라. 만일 자기 마음이 부처인 줄 보면, 수염과 머리 깎는데 잇지 않으니, 흰옷(속인)을 입은 이도 또한 부처이니라. 만약 자성을 보지 못했다고 하면, 머리 깎고 수염 깎았더라도 또한 외도이니라.
4. 도는 산야에 있지 아니하다.
물어 가로되, 흰옷 입은 이는 처자가 있어 음욕을 없애지 못하는데, 무엇을 의지해서 성불할 수 있습니까?
답해 가로되,
다만 견성만 말한 것이요 음욕을 말한 것이 아니니, 다만 견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만 자성을 봤다고 하면 음욕이 본래 공적이어서 흔적도 없기때문에 끊는 것을 빌지 않으며, 그렇다고 해서 낙착하지 않으니 비록 나머지 습기가 있다 할지라도 능히 해가 되지 않느니라.
어째서 그러한가? 우리 자성이 본래 청정하기 때문이니 비록 오온의 색신 중에 있더라도 그 성품이 본래 청정하여 물들일 수 없느니라. 법신은 본래 받음이 없으며 배고픔과 목마름도 없으며 찬 것도 뜨거운 것도 없으며 병도 없으며 은혜도 없고 권속도 없으며 고락도 없고 좋고 나쁨도 없으며 길고 짧음도 없고 강하고 약함도 없으며 본래 한 물건도 얻을 것이 없지만 다만 이 색신이 있는 것을 인연하여 곧 배고프고 목마르고 차고 뜨겁고 장병이라는 모양이 있으니, 만일 속지 않으려고 하면 한번 짓는 데에 맡길 지이다.
만일 생사중에 자재함을 얻어서 일체법을 굴려서, 성인의 신통과 더불어 자재하여 걸림이 없으면 불안한 곳이 없으리라. 만일 마음에 의심이 있으면 결정코 일체 경계를 뚫고 지나가지 못하리니, 짓지 않는 것이 가장 좋아서 짓게 되면 생사 윤회함을 면하지 못하리라. 만일 견성만 하면 전다라(백정)라도 성불할 수 있느니라.
*생각을 쉬어라. 쉬지 못하면 생각 때문에 나타나지 않던 것이 생각 쉬어버리니까 나타나더라. 뭐가 나타나느냐. 소리요. 물체요 우리가 여태까지 종소리 목탁 소리 온갖 소리 듣고 있었지만 온갖 생각 속에 듣고 있었기 때문에 별로 신통치 않게 자기가 느끼고 있었는데 지금에 모든 생각이 덜어져 버렸을 때 꽝! 하는 바람에 아이구야 아! 바로 여기..
생각한다고 하는 것이 잘못이로구나 생각 놔버리면 종소리요 목탁 소리요 바람 소리 새소리 할 것도 없이 어린애들이 우는 소리까지도 그대로 무상법문이다. 두두물물이 그러니까 빙긋이 웃으면서 아~ 참~ 눈앞에 나 두고 괜히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그런데 우리가 보려고 하는 생각을 일으키면 보고 싶어도 봐 지지도 않고 놔버리면 보기 싫어도 봐 진다. 그렇치요! 그렇게 보려고 애쓸 때는 안봐지고 놔버리니까 저절로 바지더라. 앞에 우리가 가리면 보입니까? 놓으니까 제대로 보이잖아, 가린다는 것은 생각이 아닙니까 환상입니다. 그래 우리가 찾고 있는 불법 진리 하는 것은 전부 환상이다.
도가 어디도입니까? 나도 도를 찾아야 되겠다. 도라는 이미지를 머릿속에 잡아넣었잖아요. 그건 환상의 도지, 나도 부처님을 친견해야 되겠다. 부처님을 찾아야 되겠다. 하는 머릿속에 부처라는 생각 그것도 환상의 부처지, 진짜 부처는 환상이 아닙니다. 정말로 도는 환상이 될 수 없잖아요. *
도가 뭐냐,
자기의 모든 환상에서 탈피한 마음에서 볼 때,
모든 것이 도아닌 것이 없고 진리 아닌 것이 없다.
금강경에
“내가 일체 중생을 영원히 편안한 자리에 들게 하느니라. 실제는 누구 한 사람도 들어간 사람이 없느니라.” 들어가게 했다는 것은 가짜다 이말 아닙니까, 한사람도 들어가지 않았다고하는 것이 실제이고, 연야달다가 찾았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고 찾았다고 하는 것이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은 잃어버렸다고 하는 것도 거짓말 아닙니까. 잃어버리지 않는 것을 잃어버렸다고 착각한 것을 잃었다 하고, 그것을 알아차린 것을 얻었다고 한 것이지, 실제는 얻은 것이 아니다.
마음속에 혼침과 산란이 떨어지면 생사가 본래 없는 불생불멸
아미타 무량수불은 나 자신의 불생불멸의 자리라고 한다.
지유스님의 선문찰요 7회
선이 뭡니까? 하고 물어본다고 하면 여러분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것은 자기의 본래의 모습
진정한 자기라고 하는 거는 달리 표현하면 참된 자기다
번뇌 망상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해도
한 마음속에 번뇌 망상이지,
사람이 고통에서 벗어 날려고 애를 쓰는데
고통이란 지혜가 부족해서 생긴 것이다.
자기 속에서 일어난 생각에 사로잡혀서
생각이 자기를 괴롭히고
생각이라는 것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
생각이란 것은 그림자 존재지 실제 존재가 아닙니다.
그림자가 나를 괴롭힙니다.
그림자가 누가 했느냐? 내가 했다 이 겁니다.
나도 그림자냐? 나도 그림자겠어요.
그림자도 아닌 존재가 한 생각 일어나면 그림자가 된다.
그림자라고 하는 것은 환상이지
그래 어디서 환상이 일어났느냐?
그림자가 아닌 곳에서 환상이 일어난 겁니다.
그림자 아닌 곳에서 환상이 일어나다 보니까
일어나는 것까지는 괜찮지만
환상에 사로잡혀 버리니까
환상 이전의 자리를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자기 속에서 자리잡고 있는 환상을 상대해서 시비하고 있다.
모든 환상이 나온 본바탕 그거는 환상이 아닙니다.
환상이 일어나는 것까지는 괜찮지만
환상에 사로잡혀 버리니까 자기 본고향을 잊어버리고 있다
모든 환상이 나온 본바탕 그것은 환상이 아닙니다.
고통이라는 것은 결국 환상이라고 했는데
환상이 없는 자리이기 때문에 고통이 있을 수 없어요.
영원히 영원히 편안한 자리입니다.
선이란
생각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그 생각을 돌이켜 생각이 일어난 본 자리를 확인하고, 그자리에서 바깥환경에 부대끼며 살아나가는 것. 즉 환상에 사로잡히지 않고 살아나가는 것.
5. 백정도 또한 성불할 수 있다.
물어 가로되,
전다라는 살생으로 업을 짓고 있는데 어떻게 성불할 수 있습니까?
답해 가로되,
다만 견성을 말하는 것이요 작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니, 비록 업을 짓는다 할지라도 미혹한 사람과는 같지 않아서, 일체 업이 그를 구속하지 못하느니라. 끝없는 과거로부터 다만 견성하지 못하였으므로, 지옥 중에 떨어져서 업을 지어 생사에 윤회하였지만, 본성을 깨닫고 나서부터는 마침내 업을 짓지 않느니라.
만일 견성하지 못하면 염불을 하더라도 과보를 면하지 못하니 생명을 죽이는 것을 논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견성하여 의심이 문득 사라지게 하면 생명을 죽일지라도 또한 그를 어찌하지 못하느니라. 서천 28조로부터 다만 서로 심인을 전하시고, 내가 이제 이 땅에 온 것도 오직 돈교의 대승 즉심시불을 전한 것이고, 지계나 정진의 고행과, 물이나 불에 자유자제하게 들어가는 것과 칼날에 오르는 것이나 하루 한 번 공양하나 좡좌불와를 말하지 않았으니 모두 외도의 유위법이니라.
만일 일상생활에서 움직이고 있는 영각의 성품을 신령스럽게 알면, 네가 곧 제불의 마음이니라. 과거의 전불이나 미래의 후불이 다만 마음을 전한 것만 말씀하시고, 다시 다른 법이 없느니라. 만일 이 마음을 알면 범부 세간에서 글자 하나 모르더라도 또한 부처이니라.
만일 자기의 영각의 성품을 알지 못하면, 몸을 깨뜨리기를 티끌과같이 하여도 부처 찾는 데는 마침내 찾지 못하느니라. 부처란 또한 이름이 법신이며 또한 이름이 불심이라고 하니, 이 마음은 형상이 없는 것이며 또 인과도 없으며 우리 몸처럼 힘줄이나 뼈가 없어서 마치 허공과 같아 취할 수 없으니 물질과 같지 않으며 외도와 같지 않느니라.
이 마음은 오직 여래 한 사람만이 능히 알 수 있고 그 나머지 중생인 미혹한 사람은 밝게 요달하지 못하느니라. 이 마음은 사대의 색신 속을 떠난 것이 아니니, 만일 이 마음을 떠나면(송장) 곧 능히 운동하지 못하느니라. 이 몸에 앎이 없는 것이 풀, 나무, 기와, 돌멩이와 같아서 몸에 생각이 없으니 무엇을 인해서 운동하겠는가?
만일 마음이 움직임으로부터 내지 말하고 시위 운동하는 보고 듣고 깨달아 아는데 이르기까지 모두 마음을 움직이고 용을 움직인 것이니라. 동이란 마음이 움직인 것이요 움직임이라 그 용이니, 도용하는 것 외에 따로 마음이 없는 것이고 마음밖에는 움직임이 없기 때문이니라.
동(움직임)은 마음이 아니요, 마음은 움직임이 아니니, 움직임에는 본래 마음이 없고 마음에는 본래 움직임이 없기 때문이니라. 움직임은 마음을 떠난 것이 아니요, 마음은 움직임을 떠난 것이 아니니 마음이 떠났어도 떠난 것이 없고 마음이 움직여도 움직인 것이 없느니라.
이 마음이 용하고 용한 것이요 이 마음이 동하고 동한 것이니, 곧 마음이 용하고 동한 것이며, 곧 마음이 동하고 동한 것이기 때문이니라. 용이 곧 마음의 용이나 마음은 동하지 않고 동하지 않으니 용의 체는 본래 공하여서 공의 근본은 움직임이 없기 때문이니라. 용의 체는 본래 공하여서 공의 근본은 움직임이 없기 때문이니라. 동과 용이 마음과 같으나 마음의 근본은 움직임이 없도다.
그러므로 경에 말씀하시되, 움직였다 해도 움직인 바가 없다 하시니 종일토록 오고 갔으나 일찍이 오고 간 적이 없고 종일토록 보았으나 일찍이 본 적이 없고 종일토록 웃었으나 일찍이 웃은 적이 없고 종일토록 들었으나 일찍이 들은 적이 없고 종일토록 알았으나 일찍이 안 적이 없고 종일토록 기뻐했으나 일찍이 기뻐한 적이 없고 종일토록 갔으나 일찍이 간 것이 없고 종일토록 머물지만 일찍이 머문 적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경에 말씀하시되, 말 길이 끊어지고 마음 가는 곳이 없다 하시니, 보고 듣고 깨달아 아는 것이 본래 스스로 뚜렷이 고요한지라, 성내고 기뻐하고 아프고 가렵다 하는 것이 어찌 나무 사람과 다르겠는가? 이런 것을 인연하여 미루어 아무리 아프고 가렵다 할지라도 찾아보면 아프고 가려움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 말씀하시되, 악업은 곧 고의 과보를 얻고 선업은 선의 과보가 있다고 하시니 다만 성내면 지옥에 떨어질 뿐만 아니고 기뻐하면 하늘에 나는지라 만일 성내고 기뻐하는 바탕이 공한 줄 알아서 다만 집착하지 않으면 곧 업에서 벗어나리라. 만일 자성을 보지 못하면 경을 강하여도 결정코 의지할 곳이 없느니라. 설명은 또한 끝이 없으므로 간략히 사와 정을 표시한 것이 이와 같이 하였으나 하나 히나에 미치지 못하겠도다.
게송에서 가로되,
마음 마음 마음이여 찾기 어렵도다.
(왜 어렵겠어요 찾으니까 어려운게 아니냐 안 찾으면 되는데)
너그러운 때는 법계를 두루하고(우주 전체를 삼키고도 남는다.)
좁을 때는 조그마한 바늘도 용납하지 않도다.
내가 본래 마음을 구한 것이지
부처를 구한 것이 아니어서
삼계가 공하여 물건이 없는 줄 깨달아 알았도다.
만일 부처를 구하고자 할진댄 다만 마음을 구할지니
다만 이 마음이 마음이요 마음이 이것이 부처이니라
내가 본래 마음을 구한다고 했지만, 마음은 스스로 가진지라
마음을 구함에 마음 알기를 기다리지 말지어다.
불성은 마음 밖을 좇아 얻어지는 것이 아니니
마음이 나면 곧 이것이 허물이 나는 때이니라.
내가 본래 이 땅에 온 것은
법을 전하여 미혹한 마음을 구함이라
한 꽃에 다섯 잎에 결과가 자연히 이루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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