梁秀雅(1920-1972)
조선시대 문인화의 거장 양팽손 선생의 15대손인 양수아는 1920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일본 가와바다 미술학교에서 공부했다.
해방후 목포사범학교를 시작으로, 문태중·목포여중·목포여고 등에서
후진을 양성했다. 양수아는 일견 엄격한 풍모였지만 언제나 훈훈하고
인정이 많았으며 여간 잘못하지 않는 한 화를 내지 않았다. 제자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려 막걸리를 즐길 만큼 사제간 벽도 없었다. 그러나
제자들의 그림에 대한 평은 항상 진지해서 "가난에 굴복하지 말도록",
"파레트에 물감이 마르지 않도록" 독려했다. 호쾌한 미술이론, 특히
작가의 실험 정신을 강조하곤 했던 양수아의 강의는 열성적이었으며
실기지도는 먼저 잘된 곳을 지적해 주었다. 구도, 선, 표현기법, 양식
등을 소상하게 이야기 해주었고, 루오·고흐· 고갱·피카소·세잔느·마티스
등을 자주 말했다. 양수아는 특히 고흐의 삶에 많은 애정을 갖고 있었다.
6·25 전쟁때 그는 지리산에 들어가 빨치산 활동을 했다.
<낮에는 조릿대밭에 엎드려 쥐죽은 듯/포스터를 그리고 글씨를
쓰고 숨죽이며 울었다/...결코 죽어서는 안된다라고/살아서 반드시
어린 것들 품에 안아야지라고/나는 나에게 눈 부릅떠서 말했다..>
양수아의 빗점절 시절 이야기를 시인 이성부가 풀어쓴 시다. 빗점골은
지리산 벽소령 아래 골짜기. 생과 사를 넘나들며 빨치산 활동을 했던
때의 이야기다. 이태의 소설 《남부군》에도 '양지하'라는 가명으로
등장하는 양수아는 이현상부대의 정치부 소속 종군화가였다.
이태는 양수아를 유머가 풍부하고 인간적이며 쫒기는 산중생활에서도 끊임없이 그림을 그렸던 동지로 기억했다.
전쟁 후 전향서 제출과 함께 무죄석방 되어 광주사범학교에서
미술교사로 근무하면서 추상화를 본격화시켰다. 천성적인
내향성과 정형화 될 수 없는 비규격품적인 도전성이 그의 특징이었다.
그의 천성적인 내향성은 시련과 좌절의 현실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심한 갈등과 자기 혼돈에 빠지기도 했다. 또 그의 비규격품석 도전성은
선과 원근과 명암의 회화 법칙에 순응할 수 없었으며 단순한 시각적 사상의
회화성을 부정함으로써 숙명적인 비구상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었다. 현실에
대한 좌절과 갈등, 격정의 시대와 충돌하는 자아를 비정형 추상으로 표현된 그의
추상화는 계획된 기하학적 '차가운 추상'이 아니라 자기 내면 세계를 자유분방하게
표현한 '뜨거운 추상'이었는데, 이는 틀을 강요하는 기성의 체제와 권위에 대한 도전이자
저항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앵포르멜 회화를 이해할 사람은 그리 흔치 않았다. 그래서
그 길은 고독한 길이었다. 그는 그림을 팔기 위해 전시회를 열 때마다 몇 점의 구상화를
곁들였는데 그는 이 구상화를 "위조지폐"라고 했다. 말하자면 비굴한 타협이라고 스스로
자학했던 것이다.
60년대 초 그는 미술 교사를 그만 두고 화실을 열었다. 양수아는 그림을 그린다기 보다는
아예 그림의 세계에 푹 빠져 열중하는 모습이었다. 그림에 몰두해 있는 모습은 여느 때와는 달랐다.
자식들을 대하는 자상한 얼굴도, 술에 취해 기분 좋은 그런 얼굴도, 평소 언뜻언뜻 보여지는
우울한 그런 얼굴도 아니었다. 마치 목욕재계하고 신성한 일을 수행하는 종교인과 같은 엄숙하고
경건한 모습이었다. 다리를 꼬고 앉아 정신없이 붓질하거나, 나이프로 문지르거나, 물감을
덧바르거나 열심을 작업을 하다가 뒤로 몇 걸음 물러나 눈을 가늘게 뜨고 한참 바라본다.
그러다가 또 다시 캔버스 앞으로 다가가 또 정신없이 물감을 칠하곤 했다. 양수아는
사실로서의 회화가 아닌 느낌으로서의 회화를 추구했다. 사랑, 고독, 꽃잎이 흩날리는 소리,
늦은 봄의 나른하고도 달콤한 빗소리, 격정과 환희 등을 색체의 리듬을 통해 표현하고 싶어했다.
1968년 무렵 양수아는 늘 취해 있었고, 유쾌했고, 날마다 노래를 불렀다. 빨간 마후라는 하늘에
사나이/하늘에 사나이는 빨간 마후라...
헝클어진 보헤미안 스타일의 머리칼과 꿰뚫어 보는 듯 이글거리는 눈, 카랑카랑한 목소리,
절름거리며 비틀거리며 걷다가 길을 가로막는 전보대와 피투성이가 되도록 시비를 벌였다.
그러다가 아무데서나 잠들었다. 더러는 철길 언덕에서, 혹은 파출소에서, 그리고 밭두렁에서
옷을 벗어 단정하게 정돈해 놓고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 잠든 곳에서 다음날 화실로 출근하는 것이 예사였다.
양수아는 돈이 들어오면 지체할 겨를도 없이 술값으로 나갔다. 오지호, 배동신, 강용운 화백과
노상 술자리를 함께 했는데 그곳은 격렬한 논단이자 흥겨운 굿판이었다. 양수아는 곧잘
'서커스 노래'를 부르면서 줄타는 흉내를 냈는데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빗자루를
양산처럼 흔들며 엉덩이 춤을 신명나게 추었다.
어느 해 겨울이었다. 양수아가 자기 화실에서 밤늦도록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얘기하다가 미닫이 문을 여니 세상이 온통 눈으로 덮여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양수아는 "나처럼 오염된 놈은 이 깨끗한 눈을 밟을 자격이 없어." 하면서
양말을 벗고 구두를 양손에 들고 눈 위를 아이처럼 걸었다.
양수아는 기분좋게 술이 취하면 아내를 팔에 안은 채 괴테의 시를 중얼거렸다.
"뜨거운 가슴에 복받쳐 내리는 눈물, 이것이 마지막 눈물은 아닐지니. 형언키
어려운 새로운 고뇌로 고통은 점증하여 가슴은 진정되도다. 오, 언제 어디서나 영원한
사랑을 느끼게 날 좀 내버려 두오. 계속 파고들게 하고 싶도다. 나의 마음 언젠가 당신으로
꽉 채워 영원토록 지내고자. 아, 긴 세월 마음 속에 사무칠 이 아픔, 지상에서 얼마나 계속 될 것인가?"
달이 아름다운 밤이면 아내의 손을 이끌고 소리 죽인 발걸음으로 뒷동산 잔솔밭으로 안내했다.
무성한 나무 사이로 달빛이 스며들고, 잔솔나무 다소곳이 감미로운 향기를 흩날리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아름다운 달밤에 어찌 잠을 잘 수가 있으랴. 아미(부인의 이름)여, 이 다음에 이 다음에 좋은
세상이 오면 함께 그림 그리자." "새를 놓으면 새가 되고 꽃을 놓으면 꽃이 되는 마음"으로
미싱자수를 해서 생계를 꾸려가는 부인이 안스러웠던 것이다.
양수아 집에 낡아빠진 라디오가 하나 있었다. 낡다 못해 케이스가 깨져 내부가 다 드러난 부서진 라디오였다.
한번은 딸이 방에 들어 온 지도 모르고 그 라디오를 거의 껴안듯이 귀를 바짝 대고 열심히 듣고 있었다.
곡은 베토벤의 운명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양수아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양수아는
음악을 들으면서 울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서럽게 소리 죽여 흐느끼면서….
2004년 광주시립미술관/부국문화재단 공동기획으로 [격동기의 초상-양수아 꿈과 좌절전]
이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열렸다.생전 작업실을 재현한 '양수아의 방'에서는 편지들과 화구,
육필원고 등을 만날 수 있고 '자화상 시리즈'코너에서는 '인간 양수아'를 보다 가깝게 느낄
수 있었다. 아내와 아이들과 주고받은 편지에서는 가난하고도 살가운 한 아버지와 남편을 만나게 된다.
<코보짱은 왜 아버지에게 편지 한 장도 않쓰지? 코 닦을 시간이 많아서 그랬구나..아버지는 너 보고 싶어 죽겠다….
엄마 보고 십원만 하지 마.> 현재 연극 배우로 활동하고 있는 막내아들 승걸에게 보낸 편지다.
71년 서울에서의 개인전 실패후 그가 보낸 편지에는 <정말로 정말로 사랑하는 아내에게…
지금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소. 내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소… 서울에서 돈을 가지고
광주에 가리라고 생각하지 말아요. 당신의 노고를 생각하면 또 눈물이 흐르고….>라는 대목이 있다.
부인 곽아미씨가 보낸 편지 중에도 <당신은 얼마나 고생이 되시는지? '일을 해도 해도
내 생활 풀리지 않고 그럴 때 조용히 내 손금을 본다.'라는 구절이 생각납니다>라고 적혀 있다.
돈 되지 않는 비구상 화가의 삶, 가난은 평생 그를 따라 다녔다. 빨치산 활동을 했던
이력 때문에 그는 또한 평생 감시에 시달리는 생활을 해야 했다.
가난과 소외, 감시 속에서도 양수아는 치열한 자기응시와 성찰을 놓지 않았다. 구상에서
비정형 추상에 이르기까지 유난히 자화상이 많은 이유다. 정면을 응시하는 눈빛, 강건하면서도 온화했던
초기의 자화상은 점점 일그러지고 뭉개져 간다. 67년에 그린 자화상에 심지어 해골의 형상이 드러나기도 한다.
생애의 밑바닥을 이미 봐버린 자의 조용한 체념 혹은 절규처럼….
*2004년 광주시립미술관에서 "격동기의 초상-양수아 꿈과 좌절"회고전을 가졌는데, 시립미술관 역사상
최다 관람객이 다녀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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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대순의 세상보기] 양수아의 아름다운 가난과 예술
ꡐ촌놈이다. 촌놈들아, 촌놈들 세상이다ꡑ. 화가 양수아가 애창하는 노래 말이다. 술을 마실 때,
그리고 취하여 돌아가면서 때로 밤길 길 바닥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그를 단속하는 순경에게,
가끔은 그를 가로막는 전신주를 향하여 오줌을 누면서 그렇게 외쳤다.
그것은 금남로, 계림동 할 것 없이 60년대 광주의 그리운 풍경이다. 1972년 10월 어느 날 그는 쓰러졌다.
그의 상가에는 영전으로 그가 술잔을 들고 있는 모습의 사진이 걸렸다. 누구보다도 그를
아꼈던 오지호 선생은 문상하면서 ꡐ술 좀 그만 마셔라ꡑ 면서 눈물지었다.
ꡐ격동기의 초상 양수아의 꿈과 좌절ꡑ을 테마로 지금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양수아의 유작전이 열리고 있다.
규모 있는 기획전으로 비구상이 대표하는 그의 대표작이 제1실에 진열되고 유별나게 많은 그의
자화상만으로 제2실이 채워져 있다. 제3실에는 그의 생애를 비교적 상세히 적은 연보와 데생 등
소품과 회상의 사진들이 걸려있고 제4실에 작업중인 그의 아트리의 풍경과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거의 잊혀지고 있는 이 땅의 큰 예술가를 다시 살려 놓은 전시회에 나는 지금까지 몇 번이고 찾아가
형언할 수 없는 나의 갈증을 풀었다. 폐막까지 몇 번이고 다시 갈 생각이다.
그는 한국화단 비구상의 선구자의 한 사람이었다. 1950년대 중엽 그는 광주에서 최초로 앙폴멜을
표방하는 비구상 전시회를 가진 사람이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의 파리 화단은 비구상의 에스프리가 지배했었다.
그리고 그 분위기는 일본 화단을 통하여 뒤늦게 한국에 단편적으로 소개되었다. 그러나 한국의 ꡐ
. 낙서나 데생 말고는 이 시기의 그림은 거의 보관되어 있지 않다. 제2기는 그가 산에서 돌아 온 직후의
1950년 중엽부터 1960년대 전반까지의 비구상 화이트 시기로 역동적이고 치열한 생명을 표현하고 있다.
화이트는 복합적인 것으로 그가 떠난 지리산과 대륙의 설경 속의 인간의 실존을 담은 것으로 해석된다.
제3기는 1960년대 후반부터 작고할 때까지의 주로 암갈색으로 절망을 표현했던 암울한 시기였다.
이태의 ꡐ남부군ꡑ에 의하면 지리산의 양수아는 공산주의가 무엇인지도 모른 너무 순수한 화가였다.
그 뒤 만일 그가 서울에 살면서 야합하고 국전에 참여하고 패거리를 만들어 치부하고 그 돈으로
파리에 가고 미국에 가서 이름을 남겼다면 오늘 그는 한국 추상화의 대가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출세 지향의 그런 양수아는 양수아가 아니다. 내가 디오니소스를 광기로 좇는 미나드
여신처럼 그를 그리워하는 것은 그가 아름다운 가난의 예술가였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