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화진 선교사묘원과 절두산 순교성지
(사적 제399호)
양화진은 순수한 우리말로 풀이하면 '버드나무꽃이 핀 나루터' 란 뜻이다. 그리고 잠두봉은
생김새가 누에의 머리를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양화나루와 잠두봉은 15세기 태종 때부터
17세기 인조때까지 주로명나라 사신들을 접대하던 곳으로, 국내의 고관과 사대부들이 별장을 지어놓고
풍류를 즐기던 이름난 명승지였다. 지리적으로는 서울에서 양천, 김포를 거쳐 강화에 이르는
중요한 통로이자 삼남지방의 조운선과 한강 유역의 각종 어선들이 모여드는 곳이기도 하였다.
때문에 양화나루는 도성으로 들어오는 사람과 물품들을 조사하고 도적들을 단속하던 장소가 되었으며
구한말에는 청, 일과 서구열강에 의해 개시장으로 지목되면서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가 되기도 하였다.
양화진은 또한 조선시대 교통과 국방의 요충지로써 영조 30년(1754) 군진이 설치된 곳으로.
1866년 병인양요 때는 프랑스군이 양화진까지 들어오는데 도움을 주었다는 이유로
이곳에서 천주교인들을 처형했으며 그로 인해 절두산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한국선교 백주년기념관
양화진 선교사 묘원
복음이 선교사에 앞서 전해진 한반도에는, 조선의 문호가 개방되고
1886년, 언더우드와 아펜셀러 등 서양선교사들이 본격적으로 입국하였다.
1890년 7월, 미국이니 의료선교사 헤론이 사망하자 미공사관은 조영통상수호조약에 의거,
조선조정에 묘지를 요구하였으며 조선조정은 양화진 인근의 땅을 묘지로 제공하였다.
이를 계기로 양화진에는 외국인 묘지가 조성되었고 해방 이후 주한미군의 묘지로도 쓰였다.
양화진에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의 복음화와 근대화를 진력한 선교사와 그 가족의
묘소가 있는데 이들은 복음전파와 성경번역, 교육과 의료사업, 그리고 당시 조선의 국권회복을 위해
헌신하였다. 재단법인 한국기독교 100주년기념재단은 1985년 경성구미인묘지회로부터
양화진외국인묘지 소유권을 증여받았다. 재단은 양화진을 개신교성지로 가꾸기로 결정,
1986년, 한국교회 성도들과 재계인사들의 헌금으로 선교기념관을 건립하고,
당시 선교사들이 출석하던 서울유니온교회로 하여금 관리토록 하였다.
이후 한국기독교와 100주년기념재단은, 정부와 서울시에 명실상부한 성지공원 조성을
청원하였고 그 결과 2003년, 서울시와 마포구로부터 개신교의 외국인묘지와
천주교의 절두산성지를 아울러 양화진성지로 명명하고, 두 성지 사이에
양화진성지공원을 조성하였다.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144번지 일대 13,324 ㎡의
이곳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는 언더우드 일가를 비롯하여
145명의 선교사와 가족들을 합쳐 417명의 외국인이 안장되어 있다.
묘역배치도
선교사묘역 바로 아래에 위치한 보호수 느티나무
홀 가족, 묘지와 공적비
홀, 윌리엄 제이스(1860-1894), 홀, 로제타 셔우드(1865-1951), 홀, 에디스(1895-1898),
홀, 셔우드(1893-1991), 홀, 마리안 보텀리(1895-19910), 홀, 프랭크 에스(1934-1934)
울리암 홀은 캐나다 출신으로서 자수성가로 의대를 마치고 의사가 되었다. 그는 뉴욕 빈민가에서 의료봉사를 하면서
조선선교를 준비하던 의사 로제타를 만나 서울에서 결혼하였고 평양에서 의료봉사를 하면서 교회를 개척하였다.
윌리압은 1894년 평양에서 벌어진 청일전쟁의 부상자들과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서 불철주야 노력하다가 전염병에 걸려
한국에 온지 3년만인 1894년 소천하였다. 로제타는 남편 사후 두 자녀를 데리고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1897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평양에 남편을 기념하는 기홀병원을 설립했으며 한국의 여성 한분을 미국으로 유학시켜 한국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로 키워냈다. 로제타는 한글맞춤법에 맞는 점자법을 개발하였고, 평양에 최초의 맹아학교를 세웠다.
우리 민족을 위한 그녀의 헌신은 45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이들의 아들 셔우드 홀은 토론토의대를 졸업하고
역시 의사인 아내 마리안과 함께 한국에 와서 16년 동안이나 의료선교를 하였다. 그는 해주에 우리나라 최초의
폐결핵요양원을 세워 환자들을 돌보았으며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해서 결핵퇴치운동을 펼쳤다.
이곳 양화진에는 울리엄 홀 부부와 아들 셔우드 홀 부부를 비롯해 모두 6명의 가족이 묻혀 있으며
셔우드 홀 박사의 공적비가 있다.
독립유공자 영국인 배설, 묘지 및 묘비문
본명이 베델(1872-1909)인 배설 선교사는, 영국출신 언론인으로, 1904년 러일전쟁 취재차 특파원으로 귀국,
이후 한국에서 매일신보와 코리아데일리뉴스를 창간, 일제의 침략과 야욕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한편
한민족의 애국심을 고양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시에는 장자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이 황성신문에
게재되자 대한매일신보에 장자연의 행동을 찬양하는 글을 싣고 호외까지 발행, 일본을 규탄하였고
그로 인해 일본재판에 회부, 6개월의 근신형과 3주간 금고형을 받았으며 상하이로 끌려가 금고형을 살았다.
이후 다시 서울로 돌아왔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심신쇄약으로 1908년 5월 1일 37세로 소천,
양화진에 외국인묘소에 안장되었다. 죽기 전 그는 "나는 죽더라도 매일신보는 영생케하여 한국민족을 구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1968년 3월 1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지정, 건국훈장 대통령장(72호)을 수여받았다.
무어 선교사 추모비
'백정전도의 개척자이자 백정해방운동의 조력자로 알려져 있는 사무엘 무어는, 미국 매코믹신학교 재학시절
언더우드로부터 한국선교에 대한 도전을 받고 졸업 후 미 북장로교 선교사로 1892년 한국에 들어왔다.
서울에서 노방전도를 통해 100여명에게 세례를 베풀었으며 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가르쳤다. 이때 학생들 중
백정의 아들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장티부스에 걸려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당시 고종의 시의였던
에비슨 선교사와 함께 그를 치료하여 완쾌시켰는데 그가 바로 박성춘이었다. 천민으로 천대받던 자신을
왕의 시의를 통해 치료해 준 것에 감격한 그는 무어가 세운 곤당골교회에 출석하였으며, 처지가 같은
백정들을 상대로 전도활동을 펼쳐 많은 백정득을 교회로 인도하였다. 이후 그는 승동교회(곤당골교회)에서
장로가 되었고 아들 박서양은 에비슨이 세운 제중원의학교(세브란스의대의 전신)를 졸업, 의사가 되었다.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헌신한 무어는 곤당골교회를 비롯하여 20여 교회를 세웠으며 1906년 전국에
전염병이 창궐하자 자신보다 한국인들을 먼저 돌보다 장티부스에 걸려 사망,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첫 미국선교사 언더우드 일가의 묘
본명이 언드우드(1850-1916)인 원두우 목사는 우리나라에 정식선교사로 입국한 최초의 서양선교사로서
새문안교회와 성서공회, 연세대학교 등을 세우고, 기독교경건회와 기독교서회 등을 창립하는 등
근세 여명기에 선교와 문화의 개척자로 크게 헌신했으며 대를 이어 한국 선교에 기여한 고귀한 인물이다.
부인 릴리아스 홀톤(1852-1921)는 의사로서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인술을 펼쳤으며, 아들인
원한경(1890-1951) 박사 또한 연희전문학교에서 교장으로 봉사하는 등 대를 이어 한국땅에서
신하였고, 부인인 에델 밴 와그너(1888-1949) 여사는 광복 후 혼란기에 이 땅에서 순교하였다.
언드우드 선교사 사모의 묘
G묘역
태어나서 1-2 년 안에 순교한 선교사 자녀들의 무덤들로써 64기의 무덤에 65명이 안장되어 있다.
양화진옛터
이 일대는 조선시대 국방의 요충지로써 1754년에는 한강수로의 경비를 통해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서
군진이 설치되어 상비군을 주둔시켰던 곳이다. 2000년, 이곳 일대를 양화진 공원으로 조성하면서
이러한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군진 옛터의 일부를 장대석으로 구획해 놓았다.
절두산 천주교 순교성지
병인양요는 프랑스 함대가 조선 해안과 한강을 탐사하고 프랑스 군인들이 강화도에 상륙하여
약탈을 자행하다가 패퇴한 사건으로, 위정자들에게 깊은 적대감과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천주교 박해를 부추기는 원인이 되었다. 1866년 10월 이전까지 새남터나 서소문 밖에서 이루어지던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이 갑자기 양화진으로 변경된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이후 이듬해까지 양화진
잠두봉에서는 수많은 턴주교 신자들이 군문효수형으로 처형되었으며 그러므로 이 일대는
천주교 신자들의 머리가 발린 봉우리라는 뜻에서 절두산으로 불리게 되었다.
절두산 순교자 13인의 초상
절두산에서 처형된 천주교 신자들은 대부분 프랑스 선교사와 교류한 일이 있거나 병인양요를 일으킨
프랑스함대와 관련혐의가 있는 신자들이었다. 그들이 포도청 문초때 여기에 연관되어 있는지를
집중적으로 추궁한 사실이 이를 잘 설명해 준다. 절두산 최초의 순교자 이의송은 문초때 추궁을 받자
"서양선박이 조선에 올 것이라는 이야기는 1865년 12월에 베르뇌 주교에게서 들었다." 고 진술하였다.
실제로 이의송 김이쁜 부부와 아들 이봉익은 천주교 신자로 서양세력을 불러들였다는 죄목 아래
군문효수형을 받았다. 또한 강요한은 체포될 당시에 선교사의 편지를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
중죄인으로 분류되기도 하였다. 교회순교록을 통해 추정되는 병안박해 당시 절두산 순교자는
200명 내외이고 기록으로 확인되는 천주교 순교자는 29명이다.
당시 순교자들의 목을 쳤던 장검들
형구석
당시 흥선대원군(1820-18980의 지시로 신자들에게 교수형을 집행키 위해 고안된 잔혹한 형구
오성석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다블뤼(1818-1866) 주교와 위앵(1836-18660 신부, 오메르트(1837-1866) 신부,
한국인 교인 황석두(1813-1866), 장주기( 등 다섯명의 순교자들이 처형지인 갈매못으로 끌려가기 전
그 길목인 충남 아산군 음봉면의 길가 바위에 앉아서 신앙을 다짐했던 바위로
다섯명의 순교 성인을 모셨던 바위라 해서 다서바위 즉 오성석으로 명명하고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 한다.
첫 한국인 신부 김대건 동상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비석
병인박해 당시 천주교 신자들의 목을 쳤던 절두산 순교지
양화진성지공원 내의 감나무에서 감이 순교의 열매처럼 주렁주렁 달렸다.
2호선 전철이 성지 바로 옆을 지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