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두 의학박사의 요양병원 이야기 (4)
사랑의 묘약
악성 우울증이었다. 어떤 항우울증 약에도 반응하지 않은 증세를 가진 78세 여성이었다. 아침 회진 때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있었고, 볼 때마다 한숨도 못 잤다고 호소하며 편두통도 있고, 설사 증세도 종종 있었다. 표정이 너무 고통스러워 보이며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것조차 힘들어 보이고 몸의 동작이 너무 느렸다. 울상이 되어 걸어 다니는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창밖을 보니 삭막한 대지는 바짝 말라 있었다. 하루는 이분이 외출시켜달라고 말했다.
“외출요? 아니, 어디 가실 겁니까?”
“미장원에 갔다 와야겠어요.”
‘미, 미장원?’
나는 귀를 의심했다.
항상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다니던 이분이 갑자기 미장원에 가겠다니….
하여간 무슨 변화가 일어난 것이 분명했다.
다음날 회진할 때 보니 이분은 침상에 앉아 미소를 짓고 있어 가슴이 철렁했다. 증세가 악화되어 백치가 되어 버린 것일까?
“좀 어떠세요?”
“웬일인지 두통이 많이 나아지고 잠도 잘 자고 기분이 좋네요, 선생님.”
다음날 병실을 지나다가 이분이 세면실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는데 ‘호호호’하며 크게 웃고 있는 것이었다. 이분 뒤에 어떤 남자가 웃으면서 따라 나오는 것이 보였다. 50여 명이 입원해 있는 병동에 방은 남녀가 분리되어 있고 화장실도 따로 쓰지만 세면실은 구분되어 있어도 종종 같이 쓰고 있었다.
“선생님, 오늘도 외출을 해야겠습니다.”
이분이 또 외출을 청하였다. 표정이 아주 밝아 보였고 연한 립스틱을 입술에 발라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기분 변화가 아주 큰 폭으로 발생한 것이다.
‘약을 잘못 쓴 것일까?’
이 사람에겐 항우울증 약을 쓰고 있는데 이 약은 말 그대로 우울증을 호전시키는 약으로 약물 부작용이 생겼는지 궁금하여 사용 중인 약물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집에서 환자를 간호하고 있을 사람이 없다. 누구든지 일을 해야 하기에 돌봄이 필요한 노령 환자는 병원이나 시설에 맡길 수밖에 없다. 나이 들어 치매가 생기거나 노환이나 혹은 암으로 병원 시설에서 보살핌을 받아야 할 경우가 많은데 아직도 요양병원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종종 있다. 요양병원은 가족이 해왔던 보살핌을 체계적으로 대신해 주는 곳이다.
하루는 이분의 보호자인 50대의 딸이 찾아왔다.
“원장님, 저의 어머니가 난데없이 화장품을 사달래요. 그것도 비싼 파운데이션을요. 이곳에서 화장품이 왜 필요합니까? 우리 어머니 혹시 미친 거 아닙니까?”
‘팔십이 다 되어가는 어머니가 갑자기 화장을 하고 미친 것 같다?’
병동에서 차트를 정리하고 있는데 50대의 수간호사가 말했다.
“선생님, 이꽃분 씨 바람난 거 아시지요? 일주전에 들어온 알코올 중독자 김판세 씨와 늘 외출하여 맛있는 것 먹고 돌아온답니다.”
60대 중반인 김판세 씨는 속된 말로 술주정뱅이로 가족들이 감당을 못하여 이곳에 들어왔다. 뇌출혈을 당하여 뇌 수술을 한 적이 있고 한쪽 팔다리가 마비되어 걷는데 조금 절뚝거리긴 하지만 평소엔 착한 사람이었다. 치매 증세도 있었지만 술을 끊지는 못했다. 악성 우울증으로 고생하던 이꽃분 씨는 복도에서 만난 60대 중반의 선량한 이 남자에게 꽂혔던 것이다.
“의심받지 않으려고 다른 시간대에 외출 나가지만 밖에서 만나 늦게 들어오기도 한답니다.”
중년의 수간호사는 예리하게 두 사람의 행적을 그리고 있었다. 어찌 되었거나 하여간 내가 담당한 환자의 우울증이 나아서 큰 다행이었다. 몇 가지나 쓰던 항우울증 약을 쓰지 않아도 되었다. 빈털터리 알코올 중독증 환자는 돈 많은 누님이 먹을 것 사주고, 술도 사주어 삭막한 이 병원에서 인생의 또 다른 행복을 느끼는 것 같았다.
보호자인 딸이 또 찾아왔다.
“원장님, 어머니가 매달 나오는 연금을 다 빼어 쓰고 이젠 마이너스까지 되었어요. 무슨 돈을 그렇게 쓰는지 모르겠어요.”
오늘 아침에 회진을 할 때 이꽃분 씨가 말했다.
“원장님, 오늘 외출해야겠어요. 은행 일도 봐야 하고.”
“이꽃분 씨, 어제 따님이 와서 연금을 다 써버려 마이너스라고 하던데요.”
싸아~ 소나기가 창문을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삭막한 대지에 비가 내렸다. 고목에 아름다운 꽃이 피고 있었다. 몇 달 후에 이꽃분 씨는 당뇨와 뇌졸중의 오랜 후유증으로 돌아가셨다. 짧게나마 행복했던 그 시간들이 없었다면 더 힘들게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노년에 배우자를 먼저 보내는 사람이 많다. 자녀들은 연로한 부모가 혼자 외롭거나 말거나 누구와 사랑을 나누거나 친구로 지내거나 하는 것을 못마땅해하는 경우가 많다. 재산 문제나 체면, 그리고 노년의 성에 대한 무지 때문이다. 젊은 사람도 아닌데 웬 사랑타령이야? 쳇, 혼자 조용히 살다가 돌아가시면 될 걸 하는 마음이다. 노후라도 누구와 사랑에 빠진다면 얼마나 축복받은 삶인가! 사랑은 우울증, 편두통, 식욕부진, 무기력 등 많은 것을 치료할 수 있는 묘약이다.
자녀들이여! 부모님 인생을 그냥 담담히 지켜봐 주자. 도와줄 수 있다면 응원해 주자. 배우자를 잃고도 노후에 행복할 권리가 있다. 누구도 노후의 사랑을 방해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