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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거듭남) 그것은 무엇인가?
송재국 지음 / 전도출판사
(인터넷에 있는 것을 실린 것을 발췌 / 맞춤법 수정과 약간의 수정을 하였음 / 성경은 현대어성경(성서원)으로 수정하였음)
서 론
육신적인 변화와 결심 등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거나 된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다. 더욱이 교회생활에 충실하면서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가운데 그렇다. 이런 착각 속에 천하보다 더 귀한 생명이 지옥으로 향하는 현실을 직시하면서 펜을 들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가르침은 하나님께로 난 자만이 하나님의 자녀이며 이것이 중생 곧 거듭남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중생 곧 거듭남을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다. 행위와 노력으로 되는 것으로 알고 있거나 신비스러운 것들을 체험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성경의 어느 구절에서 그런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그런 주장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성경의 가르침도 아니다. 또한 영적인 사람의 가르침 역시 아니다. 그러면 누구의 가르침인가?
두말할 것 없이 그것은 사단의 가르침이며 사단의 속임수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는 이와 같은 가르침을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와 같은 상태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사단의 가르침을 받아왔단 말인가? 사단의 가르침을 받으면서도 그처럼 교회에 충성할 수 있는가?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그 해답을 제시한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종교인들, 기독교인들이 하나 같이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성경의 대답이 아니면 아닌 것이다. 더 이상 다른 대답이 필요 없다.
그러면 잘못 가르치는 사람들이 성경을 보지 않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그들 중에는 성경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 혹은 전문 목회자들도 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의 가르침을 올바로 전할 수 없단 말인가?
여기에 대한 대답을 하는 대신 몇 가지 현실적 상응을 제시하고 싶다.
가령 이단에 속한 소수의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있지 않은가? 그들의 주장이 성경을 인용하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오직 인간적인 가르침과 교훈에만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들이 더욱 철저하게 성경을 인용하고 있다. 그들이 더욱 열성적이며 많은 시간과 물질을 투자하여 헌신하고 있다. 중세기의 로마 가톨릭이 성경을 외면했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이런 이유는 신약의 전시대를 걸쳐서 성경을 생명의 말씀으로 받기보다는 인간의 지식과 학문적인 연구 대상으로 삼고 오히려 자신들의 사상과 주장을 뒷받침하는데 이용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인류에게 하신 말씀을 마음으로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척하고 받지 않았을 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로 오해하였도다’(마 22:29)라고 하셨다.
그들은 성경을 읽고 그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사람들이었다. 성경만을 연구하는 서기관들도 있었다. 성경에 대한 그들의 자부심도 대단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이 성경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의 능력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했기에 결국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으며, 그 후 사도들의 가르침도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다, 오늘날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면서도 성경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가르침, 분별, 지식을 전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난 것일까? 성경은 한마디로 이것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고전 2:14 /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은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는 하나님의 일을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그에게는 그 말이 어리석게만 들릴 뿐 이해되지 않습니다. 마음으로 성령을 영접한 사람만이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육은 아무리 개선되어도 육이다. 성경에 대한 지식은 누구나 쌓을 수 있으며, 유창하게 설교하거나 기도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생명은 전할 수 없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그런 사람들은 아직 거듭나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생(거듭남)’이란 중요한 문제를 다루기를 원한다. 그러기 위하여 먼저 두 가지를 부탁하고 싶다.
첫째, 기존의 선입관을 버리고 제시한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의 귀를 기울이고
둘째, 마음과 귀에 거슬릴지라도 끝까지 읽어 주기를 바란다. 마귀는 계속 방해할 것이다. 여러 가지 핑계와 이유를 제기할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읽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하면 믿기를 바란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 것’을 알게 될 것이다.
1. 중생(거듭남)의 의미
성경은 육과 영의 두 영역을 말하는데 육은 육체에 속한 것, 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을 말한다.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호흡하며 활동하고 생각하며 살고 있는 것은 육체의 삶이다. 이러한 삶은 공통적이다. 부모를 통해서 태어나면 성장기를 거치게 되고 장년기에 이르러 노쇠현상이 시작된다. 그리고 결국은 그 생명의 끝이 온다. 이것이 육적 생명이다.
성경은 또 다른 생명에 관해서 소개하고 있으니 곧 영적 생명으로 육적 생명과 대조되는 것이다. 영적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께로 간다. 이것은 육체의 생명이 땅으로부터 나서 땅으로 가는 것과 현격한 차이이다.
영적 출생에 대해서 성경은 다양하게 그 어휘를 사용하고 있으나 그 대표적인 것이 거듭남 곧 중생이다. 그런데 오늘날 ‘거듭나다’라는 말이 너무 흔하게 사용되고 있다. 사회 일각에서 어떤 변화를 모색할 때 거듭나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살펴보면 거듭남은 어떤 변화나 개선이 아님을 금방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사회적인 용어가 죄인들이 거듭나야 한다는 말을 오해하게 만들었다. 육은 아무리 개선된다고 할지라도 ‘육으로 난 것은 육’(요 3:6)이다.
니고데모라는 인물
요한복음 3장을 열었을 때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 거듭남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내용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니고데모라는 인물을 살펴봄으로서 거듭남이 무엇인지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의 종파는 유대교의 바리새파에 속하였다 전통적으로 성경을 믿으며 메시아가 오시기를 기다리는 민족주의자에 해당하는 종파였다. 그는 유대인의 관원으로 이스라엘의 최고 종교 의회였던 산헤드린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또한 지적인 수준으로는 당시에 존경받는 랍비 중의 한 사람으로서 이스라엘의 선생에 해당되었으며 종교적, 사회적 경험을 많이 쌓은 노년기를 지나고 있었다.
이로 보건데 그는 지식과 인격을 겸비한 존경받는 사람이었음에 틀림없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에 대해서도 비교적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는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능력 행함을 통해서 예수님은 하늘로써 오신 분이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계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니고데모는 종교적으로 열심이 있었고 지식인으로 가르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었다. 사회적으로 또한 경륜으로 보아도 부족할 것이 없는 인물이었는데 왜 예수님을 찾아 왔을까? 그가 무엇을 원해서 예수님을 찾아왔을까?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한 말을 보면 나름대로 짐작을 할 수가 있다.
요 3:1-2 / 어느 날 밤이 이슥할 무렵 바리새파에 속한 니고데모라는 유대인 지도자 한 사람이 예수께 회견을 청해 왔다. `선생님,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르치시려고 선생님을 보내신 줄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보이신 표적이 그 사실을 충분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놀라서 찾아왔다고 하였다. 그러나 성령님의 이끌림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니고데모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거듭나는 것이다.
니고데모의 종교적, 사회적인 지위 또한 남을 가르칠 수 있는 지식도 거듭남이란 말조차 모르고 있었기에 성령님의 이끌림에 의하여 예수님 앞에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요 6:65).
누구를 막론하고 거듭나기를 원한다면 예수님께 나아와야 한다. 니고데모가 그러했다. 종교적인 위치와 사회적인 신분과 당신의 경륜이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세상에는 다양한 지식과 철학이 있으며 사상과 학문이 있지만 이 문제만은 그것으로 해결되지 못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오직 예수님께만 있다. 비록 예수님의 모습은 서른을 갓 넘은 때였지만 니고데모의 백발로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기에 예수님께 올 수밖에 없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이와 반대되는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다. 크고 웅장한 예배당이 있는 곳에 가야만 문제해결을 받고 축복받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박사 학위라도 있는 지도자에게 가야만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할 것으로 생각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하여 웅성거리는 곳이라야 진리가 선포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런 것들을 선호하신 적이 있었던가? 예수님이 그 문제의 열쇠이듯이 우리들에게 있어서 성경을 통해 성령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것이 문제 해결이다. 이렇게 하기만 하면 간단히 그 문제점들은 해결될 것이다.
약 1:5 / 만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무엇을 바라시는가 알고 싶거든 하나님께 여쭈어 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꺼이 여러분에게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혜를 구하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후하게 나누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일로 결코 여러분을 꾸짖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생각해 보라. 맞지 않은 열쇠로 문을 열려고 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 ! 그들은 결국 헛된 수고만 남길 뿐 결코 열지 못할 것이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당신이 만일 그와 같은 모습을 옆에 있는 사람에게 보고 있다면 당신의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 15:9 / 그들이 나를 경외하며 제물을 바친다고 해도 아무 쓸모없는 일이다. 그들은 나를 세계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기들에게 편리한 대로 생각해 내어 만든 규정에 따라서만 나를 높이고 섬기기 때문이다.
또한 여기에서 당신에게 적극적으로 권하고 싶은 말이 있다. ‘혹시 당신도 맞지 않은 열쇠로 거듭남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하는 가운데 있지 않은가? 영생의 문을 열려고 노력하면서도 열쇠가 되신 예수님을 제쳐두고 당신이 열쇠가 되어 애쓰고 있지 않은가?’ 생각해 볼 일이다. 하나님이 당신 앞에 계신다고 생각하고 당신 자신을 점검해 보라. 아니 하나님이 지금 당신 앞에 계시니 당신의 거듭남의 문제를 진단해 보라. 바울 사도도 고린도 교회에게 보낸 둘째 편지에서 ‘여러분 자신을 잘 살펴보십시오. 여러분이 참다운 그리스도인입니까? 그리스도인이 되는 시험에 합격하였습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임재를 경험하며 여러분 속에 역사하시는 그분의 능력을 더욱더 실감하고 있습니까? 그와 반대로 사실은 그렇지 않으면서도 그리스도인이 된 흉내만 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고후 13:5)라고 하였다.
요한복음 3:3의 ‘거듭남’이란 말은 개역성경의 난외에는 ‘위에서’라는 주석을 붙이고 있다. 거듭난다는 것은 위에서 혹은 위로부터 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3).
이 말의 의미는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받은 자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기를 ‘모태신앙’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모태로부터 태어난 것은 죄 있는 육신의 모습이다. 죄의 성품을 갖고 죄인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 사람이 아무리 선하고 신실하다고 해도 그대로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롬 5:12 /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아담의 후손은 아브라함의 계보에 속해 있다고 할지라도 죄인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사망이 이르렀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그러므로 혈통으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육정’으로도 나지 않는다고 하셨다. 이것은 사람의 감정이나 느낌 혹은 생각의 변화 등을 말한다. 혹자는 어느 시점에서 지난 모든 죄를 하나님의 활동사진처럼 생각나게 하셔서 회개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거듭난 것일까? 마귀는 교묘하게 우리를 속이고 있다. 눈물을 흘리며 회개기도를 했다고 해서 거듭난 것일까?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 가운데서 지금까지 혈통을 의지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부모가 진실한 교인들이었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졌기에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을 믿었다고 생각하고 있는가? 그 생각을 버려야 한다. 혹은 육신적인 어떤 변화를 믿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알지 못했던 것을 깨달았다고 하여 새롭게 변화된 것은 아니다. 깨달은 대로 살려고 다짐하였다고 해서 거듭난 것일까? 그렇다면 그때의 그 감정이 몇 시간이나 갔는가? 얼마나 그 감정이 오래 유지되었는가? 인간의 결심은 순식간에 변한다. 특히 환경이 변할 때 더욱 그런 양상들이 나타난다. 혹은 하루에도 몇 번씩 결심하고 바뀌곤 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씨 뿌리는 비유’가 이를 잘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께로 난 자만이 자녀라 인정을 받는다. 니고데모는 누구보다 더 종교적으로, 혈통으로도 인격적으로도 아무 손색이 없었다. 그뿐 아니라 니고데모가 ‘선생님,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르치시려고 선생님을 보내신 줄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보이신 표적이 그 사실을 충분히 증명하고 있습니다.’라고 한 것을 보면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럴지라도 예수님 앞에 나왔을 때 니고데모도 거듭나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남들이 체험해보지 못한 환상을 보았다고 하여 거듭난 것일까? 병 고침을 받았거나 그런 은사를 가졌다고 생각하거나 방언과 환상 등의 신비로운 것을 체험했기에 그것을 거듭난 증거라고 믿고 있는가? 때로는 그것이 마치 하나님의 자녀 곧 거듭남의 증거인 것처럼 인정받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거듭난 것은 아닐 것이다.
세상에는 믿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그와 같은 신비스러운 것들을 경험한 귀신들린 사람들이 많다. 놀랍게도 우리가 기독교 안에서 인정하는 예언, 투시, 방언, 신유 등이 이교도들 속에서도 있다. 모세나 다니엘 때처럼 지금도 승려들이나 무당들도 나름대로 예언도 하고, 병도 고치고, 투시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나 다니엘을 통해 이런 술객들을 물리치고 오히려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인정하게끔 하셨다. <참고로 이런 은사체험은 거듭남이나 신앙생활하기에 나아가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도움이 되는 것일 뿐 거듭남은 아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거듭남의 증거가 자기의 종교적인 직분인 것으로 알고 있다. 직분을 받을 정도로 인정받았으니 그것이 증거라는 것이다. 그러나 착각하지 않아야 한다. 마귀는 항상 교묘하게 속이며 위장을 해왔다.
예수님께서 70인을 따로 세워서 전도를 보내셨다. 그들이 돌아와서 했던 보고와 그 상황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눅 10:17 / 일흔두 제자들이 기쁨에 넘친 모습으로 돌아와서 예수께 보고 드렸다.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명령하자 귀신들이 다 저희에게 복종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이었는가?
눅 10:20 /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복종한 사실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
많은 사람들, 특히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받아서 일한다는 많은 사람들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심이 적다. 오직 병 고치는 일과 병 고침을 받는 일에만 관심이 있다. 개인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관심을 두기 보다는 하나님의 것으로 생각하는 일들을 얼마나 크게 하느냐에 대한 것에 관심이 더 많다. 청중들도 근사하고 매끈한 설교를 듣고 일정한 액수의 헌금을 하는 것으로 만족을 얻으려고 한다. 자신들의 영혼에 관심을 기울이며 그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 것은 전혀 무관심한 모습들이다.
만약 우리에게 기쁨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이며, 이것이 최대의 관심사이어야 한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누려야 한다. 그렇다면 당신의 이름은 과연 하나님 나라의 생명책에 기록되었는가? 그러나 당신은 당신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생각하며 평생을 봉사했는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알지도 못하실 수도 있다고 하셨다.
마 7:21-23 / 종교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이라 해서 다 믿음이 깊은 사람은 아니다. 그들이 내게 ‘주님’이라 부른다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22) 심판 때에 많은 사람이 ‘주님 ,주님,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였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이적을 행하였습니다.’라고 말하더라도 23)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예수님은 이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셨다. 이것은 ‘결코 알지 못한다’, ‘나는 너를 알았던 적이 없다’라는 뜻이다. 그들은 헌신했던 부류다, 선지자 노릇도 하고 귀신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교회에서 칭찬과 인정을 받았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정의하셨다. 불법은 죄다. 죄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다. 무서운 일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조용히 하나님 앞에서 생각해 보자. 그들이 왜 이러한 절박한 가운데 있어야 했던가? 우리는 좀 더 말씀을 살펴본 후 결론을 내리도록 하자.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서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셨다. 이것은 최후에 버림을 받은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다시 돌이킬 수 없는 마지막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이들이 있을 곳이 어디겠는가? 그곳이 영원한 형벌의 장소인 지옥 곧 불못이다. 그들은 그곳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착각에 빠졌던 것을 영원히 후회하면서 살게 될 것이다.
이들은 ‘믿습니다’와 ‘아멘’을 반복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입과 머리로만 믿었지 결코 마음으로 믿은 적이 없는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위에 그 믿음을 두지 아니한 자들이다, 오직 그들은 행위와 감정과 생각에 그들의 믿음의 기초를 쌓고 그 위에 집을 지었던 사람들이다.
무엇이 그들로 버림을 받게 하였는가? 그들이 충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저주를 받아야만 했는가?
그들이 불행한 일을 당한 것은 거듭남을 잘못 알고 있었던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면 거듭남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위로부터 난 것을 말한다. 모태를 통해서 육신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다. 영적으로 다시 태어난 것 곧 하나님께로 태어난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원어는 ‘다시’라는 말과 ‘출생’이라는 말이 합해진 복합어로써 ‘다시 출생, 거듭 출생’을 말한다.
모든 인간은 모태를 통해서 태어나 호흡하며 살고 있다. 이것은 육으로 난 것이다. 이제 하나님으로 인하여 다시 태어나는 것, 이것이 성령으로 난 것이요 거듭난 것임을 말한다.
요 3:3 /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누구든지 새롭게 다시 나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2. 중생(거듭남)의 필요성
거듭남에 대해서 예수님은 대단히 강조하셨다. 거듭나는 것이 그처럼 중요하며 필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요한복음 3:7에서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고 하셨다.
지금 당신은 ‘거듭나야 한다’는 말에 대해서 의아스럽게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거듭나야 한다’는 말에 대해서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고 하셨다. 그렇다. 조금도 이상스럽게 여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영어성경에는 ‘You must be all born again’이라고 하셨다.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반드시 거듭나야만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거듭나지 않으면 하늘나라의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모든 봉사와 헌신을 하기 전에,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각종 수고를 하기 이전에 당신은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마태복음 7장에는 ‘종교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이라 해서 다 믿음이 깊은 사람은 아니다. 그들이 내게 `주님'이라 부른다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마 7:21)고 하셨다.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함으로 그 영혼이 처한 비참한 상황을 성경은 밝혀주고 있다.
누군가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했다. 누군가가 주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다. 또한 누군가는 주의 이름으로 많은 능력을 베풀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마 7:23 /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너희는 내 사람이 아니다. 물러가라. 이 악한 자들아!'
이것이 그들이 받았던 최후였다. 어떤 이들은 이 사람들이야말로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말한다. 또는 몸과 마음을 다해서 행하지 아니했던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들이 주님 앞에서 열심히 봉사와 헌신을 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진리되시는 예수님에게서 벗어났다. 자기가 우상이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이들은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경을 공부하고 전문적인 지식을 쌓고, 목회하며 교회에서 직분을 받아 말씀대로 봉사했다고 하더라도 거듭나지 못하면 열납되지 못한다. 하나님은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죄인들의 손에서 무엇인가를 받으시는 분이 아니다.
행 17:24-25 / 그분은 이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신 분입니다. 그분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손으로 만든 신전에는 계시지 않습니다. 25) 또한 인간의 손으로는 그분이 원하시는 바를 채워 드릴 수조차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필요한 것이 하나도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분 자신이 모든 인간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시고 필요한 것을 만족하게 채워 주십니다.
그러므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모르기 때문에 반드시 거듭나야만 한다.
고전 2:14 /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은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는 하나님의 일을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그에게는 그 말이 어리석게만 들릴 뿐 이해되지 않습니다. 마음으로 성령을 영접한 사람만이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당신이 반드시 거듭나야 하는 그 첫 번째 이유는 예수님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거듭남에 대해서 대단히 심각하게 강조하신 것은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나타나 있다.
‘진실로 진실로’라는 말은 요한복음에서 25회 사용된 반복 용법으로 최상급의 의미를 가진다. 이와 같은 강조형은 어떤 것이 확정되거나 혹은 확고히 하는데 쓰이는 부사로서 이어지는 말의 중요성을 한층 더하고 있다.
이것은 더 이상의 중요한 것이 없는 대단히 중요한 것을 말해준다. 어떤 다른 이의를 제기가 필요 없음을 아예 선언하는 것이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만 하는 당위성을 제시한다.
예수님은 먼저 이와 같이 말씀하시고 이어서 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것처럼 거듭나는 것은 중요할 뿐만 아니라 천국에 들어가는 필연적인 조건이요 자격이다. 특히 니고데모와의 대화 가운데 3번이나 거듭 반복하여 ‘진실로 진실로’를 사용하심으로 예수님의 마음이 간절함을 표현하신 것이다.
특히 예수님과 대화하고 있는 상대가 바리새인이요 관원이며, 이스라엘의 선생으로 나이가 지긋한 니고데모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이스라엘 밖의 사람이요, 이방인인 우리로서는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말씀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있다. 교회에서 성경을 배우고 봉사하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있다. 혹은 교회에서 행하고 있는 각종 집회에 빠짐없이 참석하며 모이는 일에 열성적인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성경에 대한 약간의 지식을 갖고 있는 것과 종교적인 열심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으로 거듭남을 이해하려고 한다. 그러나 주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어느 누구도 이런 열심과 봉사, 거듭남, 그 증거도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라도 깨달아야 한다.
그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약 15세기 동안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종교생활과 유대교의 의식들을 지키고 있었다. 안식일을 비롯해서 각종 절기들을 잘 지키며 구제와 봉사와 금식을 귀하게 여기므로 정기적으로 이것을 행하였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기 위해서 열심을 냈던 것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더구나 메시아의 나타남을 간절히 기다리던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거듭나야만 했던 것이다.
구약의 모든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셨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내셔서 그들을 깨우치시고 지키시며 함께 하셨다.
엡 2:11-12 /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여러분은 전에는 다만 이교도에 불과하였습니다. 게다가 유대 사람들로부터 하나님을 믿지 않는 더러운 자라고 손가락질을 당하였습니다. 그러한 사실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유대인들도 아직 더러운 상태에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하나님을 섬기는 표로 할례를 받고 경건하게 의식을 행하고 예배를 드린다고 하지만 12)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전혀 모르던 시절을 생각하여 보십시오. 그때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원수가 되어 있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아무런 도움을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도 모르고 희망도 없는 멸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이상의 말씀이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인 우리의 차이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특권을 갖고 있었지만 거듭나는 것에 대해서는 예외가 아니었다. 더욱이 하나님에 대해서 정통한 니고데모까지도 거듭나야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특권이 있을 수 없었다. 하물며 이방인인 우리는 어떠하겠는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2. 당신이 반드시 거듭나야 되는 것은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기독교 안에 있는 사람들이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 결과 육적인 것들이 변화되고 개선되므로 영적인 것이 되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변화를 계속하면 거듭나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닌 것이다. 예수님께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 3:6)라고 하신 것은 변화나 개선을 의미하신 것이 아니라 두 부류의 출생을 의미하신 것이다.
‘육으로 낳다’는 것은 부모를 통해서 이루어진 자연적인 출생을 의미한다.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경험하는 것이다. 그 때 모든 사람들이 죄의 성품을 갖고 태어난다.
시 51:5 / 이 몸은 태어날 때부터 죄를 업고 태어났습니다.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죄를 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적으로 많은 봉사와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결코 영적인 것이 될 수 없다. 가령 육이 도덕적인 상태에 있던지 흑은 문화적이거나, 인격적이거나, 종교적인 상태에 있다고 할지라도 ‘나의 형제들이여, 이 점을 명심해두십시오. 살과 피로 이루어진 땅위의 몸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 썩어질 몸으로는 영원히 살 수 없는 것입니다.’이다(고전 15:50).
그것은 무슨 이유인가? 혈과 육은 이미 죽음의 선고 아래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들의 마음이 혹은 양심이,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변화되고 개선되는 것으로 거듭난 것인 줄 착각하지 말라.
우리는 한 가지 부류를 더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전통교단에 소속된 것으로 만족하고 있는 사람, 모태에서부터 예수님을 믿었다고 하는 모태신앙, 유아세례까지 받은 세례교인, 교회에서 직분을 맡아 충성스럽게 봉사하고 있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야 말로 거듭나지 않고도 거듭난 것으로 착각하기 쉬운 대표적인 경우들이다.
사랑하는 독자들이여! 속지 말아야 한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도 거듭난 사람처럼 활동할 수 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스스로 착각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잠 29:21 / 어릴 적부터 종을 곱게 기르면 나중에는 버릇이 없어져서 자식처럼 굴리라.
모 명문대학에서 일어났던 K라는 학생의 일은 매스컴을 통해서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그 명문대학 입시에 3번이나 불합격하였다. 그러자 이제는 집안 식구들과 친구들에게 면목이 서지 않았다. 주위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합격하여 정식으로 입학절차를 밟는 학생들처럼 책을 구입하고 강의에 빠짐없이 출석을 했다. 2학년이 되었을 때, 우수한 성적과 리더십이 인정을 받아 여러 면에서 모범인 그를 급우들은 간부로 추천하게 되었다. 그는 맡은바 책임을 성실하게 잘 감당하므로 칭찬을 받았고 이어 3학년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런 학적검사로 인해서 그가 정식학생이 아닌 가짜학생으로 들어났다. 급우인 것으로 알았던 다른 학생들과 교수들은 그에 대해서 아쉬운 마음과 칭찬을 아끼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는 정식학생이 아니었다. 결국 그 강의실에서 학생으로서 수업도 활동도 할 수 없었다.
오늘날 교회생활하고 있는 많은 분들이 ‘믿음이 좋다’는 인정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여러 가지 직분을 맡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교회 일에 능숙하고 열성적인 것으로 신임을 받고 있는 것이 거듭난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며 영에서 나온 것은 영이다.’(요 3:6)라고 하셨다. 육으로 난 것은 많은 변화의 개선이 있다고 한들 육이라는 말이다. 육이 영이 될 수 없다. 이것은 출생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김’이라는 성씨를 갖고 있다고 하자. 그가 김씨가 된 것은 그의 학문에 의해서 얻은 것이 아니다. 그의 경력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그의 됨됨이에 따라서 된 것도 아니다.
오직 그가 김씨가 된 것은 그의 출생에 의해서 된 것으로 그의 조상들이 ‘김’이라는 성씨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가 김씨가 된 것뿐이다. 이것은 그의 노력의 소산물이 아니었다. 그의 김씨 집안사람다운 행동에 의해서 된 것도 아니다. 다만 그는 태어날 때부터 김씨로 태어났던 것이다.
거듭나는 것은 이와 같이 ‘하나님께로서 난 것’(요1:13)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라 칭함을 받는다. 그의 하나님의 자녀다운 생활에 의해서도 아니요 성경의 지식의 유무에 의해서도 아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면 천국 간다’고 한다. 그것은 백번 맞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함으로 착각 가운데서 행하고 있는 자들이 많다. 성경말씀을 먼저 살펴보자.
마 7:21 / 종교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이라 해서 다 믿음이 깊은 사람은 아니다. 그들이 내게 ‘주님’이라 부른다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므로 착각했던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면서 심판 날에 심판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떨고 서 있는 모습의 한 사람을 보아야 한다. 그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겸손한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 당신은 심판장 앞에서 아래와 같이 변명하며 애원할지도 모른다.
마 7:22 /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며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좇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맡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이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많은 일을 했던 사람들이다. 이렇게 행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으로 생각했다. 이렇게 헌신하는 것이 믿는 것으로, 믿음이 좋은 것으로, 잘 믿는 것으로 생각하고 자신들의 일생을 허비했던 것이다.
교회 안에는 봉사와 헌신이 필요하다. 그러나 봉사와 헌신을 거듭남으로 오해하였기에 이러한 부류들이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에 대해서 심판주의 판결이 어떠하였는가?
마 7:23 /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너희는 내 사람이 아니다. 물러가라, 이 악한 자들아!’(마 7:23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너희는 내 사람이 아니다. 물러가라, 이 악한 자들아!')
심판주께서 이들에게 내린 판결의 요지는 ‘불법을 행함, 지옥에 수감’이었다. 이들은 무슨 돌이킬 수 없는 잘못(불법)을 범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은 결과가 되었으며(롬 10:3) 거듭남을 헌신과 봉사로 착각했던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요 6:29)이며 또한 ‘아들을 보고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 것’(요 6:40)이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있는 독자께 감히 묻지 않으면 더 이상 계속할 수 없는 긴박하며 절실한 질문을 갖고 있다. 이 질문은 주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대단을 기다리고 있는 질문이다. 당신은 당신의 하나밖에 없는 영혼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솔직하게 대답하실 수 있어야 한다.
‘당신은 거듭나셨는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예’와 ‘아니요’의 둘 중의 하나다. 이것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당신은 그 증거를 갖고 있어야 한다. 성경은 그것을 ‘확증하라’(고전 13:5)고 하셨다. 그렇지 못하다면 아직도 당신은 거듭나지 않았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3. 거듭나야 하는 이유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판단하기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롬 3:23)라고 함으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죄인으로서 죄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 선하게 산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비춰볼 때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다.
혹자는 행위로 나타난 결과만이 죄라고 생각하지만 행위는 마음 가운데 있는 악한 것들이 인간의 육신을 통해서 행위라는 수단으로 표출된 것이다. 특히 우발적인 범죄까지도 평상시에 마음에 품고 있었던 악한 생각들이 무심코 행한 행위와 언어를 통해서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마음 가운데 있는 생각이나 의도도 죄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마 5:21-22).
그러면 우리가 왜 죄인인가? 성경은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맡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롬 5:19)라고 함으로 인류의 조상의 범죄의 결과가 그 모든 후손에게 죄의 속성을 유전적으로 물려주게 되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죄인된 것은 출생에 따른 것이다.
인간이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죄인이 되었다기보다는 죄인으로 출생하였기 때문에 죄인이다. 그러므로 죄인이 된 것은 혈통에 의해서 된 것이므로 혈통을 바꾸지 않는 한 결코 의인이 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죄인이 된 것을 환경 탓이나 조상 탓으로 돌리기도 한다. 물론 환경은 범죄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이것은 핑계에 불과하다. 아담과 하와는 최고의 환경 속에서 살고 있었지만 인류 최초의 범죄자가 되지 않았는가! 그들에게는 먹을 것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추위나 더위로 인해 무엇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재산을 늘리기 위해서 애써야 하는 일도 없었다. 남에게 거짓말을 하여 속여야 할 필요도 없었다. 그들의 환경이 그들로 범죄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범죄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함께 하시며 은혜를 주시기 때문에 변명은 오히려 독이 될 뿐이다.
이러한 모든 죄들은 마귀로부터 왔다. 마귀는 죄의 근원이다. 죄인으로 태어난 인류는 결국 마귀와 함께 꺼지지 않는 불 가운데 가게 될 것이다(마 25:41).
요 3:7 / 그러니 내가 네게 새롭게 다시 나야 한다고 한 말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죄의 결과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를 최고의 쾌적한 환경 가운데 살도록 하신 하나님은 그들이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며 순종하도록 동산 안에 풍성한 과일들과 아울러 특히 동산 중앙에 선악과와 생명나무를 두셨다.
창 2:9 /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동산에 아름다운 나무뿐 아니라 맛있는 과일이 열리는 나무도 자라나게 하셨다. 또한 동산 한가운데에는 따먹으면 생명을 주는 열매가 열리는 나무와 따먹으면 무엇이 좋은 것이고 나쁜 것인지를 알게 해주는 열매가 열리는 나무도 자라게 하셨다.
동산에는 보기에 아름다운 열매들이 있었다. 그것들은 먹기에도 좋은 열매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이 지으신 사람들로 하여금 풍성한 식물을 먹으면서 사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으셨다. 그런 삶은 짐승과 같은 삶이다. 동물의 세계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상황이다. 오직 먹고 마시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삶은 동물이나 다를 바 없는 삶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같도다’(시 49:20)고 하셨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지만 짐승보다 못한 삶을 살 수도 있지 않은가? 차라리 동물보다 더 사악하고 거짓투성이인 더러운 모습들이 우리 안에 가득히 쌓여 있음을 변명할 여지가 없다.
베드로 사도는 이런 인간의 실상에 대해서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벧후 2:12)라고 정의하였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이와 같은 모습이다. 이 세상에서도 부모를 모르는 자식을 ‘짐승만도 못한 자’라고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류가 하나님을 의식하며 섬기면서 살기를 원하셨다. 이것은 기계처럼 강요되거나 만들어진 그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행동으로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신 것이다. 스스로의 판단과 인식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하기 위해서 에덴동산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시고 그 열매는 먹지 말도록 당부하셨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오해함으로 비난하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신 것은 인간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지극히 크고 고상한 은혜다. 우리들에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법이 있다는 것이 피조물로서 은혜가 아니고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인류의 첫사람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나무의 실과는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령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6-17)하셨다.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실과는 마음대로 먹도록 허용되었다. 그러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만은 먹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 세상에도 도덕적으로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해도 되는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이 있다. 법으로 제재를 받는 일과 허용되는 일이 있다. 하나님 앞에서 인류가 이런 제약을 받는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의 법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는 것이었다. 만약 이와 같은 하나님의 법을 어겼을 때,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했을 때 그 결과는 이렇다. ‘정녕 죽으리라’
그러나 첫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기 보다는 불순종하는데 더 빨랐다. 그 결과 첫사람에게 임한 불순종의 결과는 오늘 모든 인류에게 그대로 적용되어 죄의 값이 치러지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라고 하셨다. 최초의 인간을 대상으로 하셨던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인류에게 그대로 적용되어 누구나 죄 값을 치르도록 하셨다.
비단 죄의 값은 죽음으로만 치르는 것이 아니다. 이 땅에서 수고하며 애쓰면서 살아야 하는 것도 죄의 결과다. 여자가 해산의 수고를 해야 하는 것도 성경은 죄의 대가라고 가르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갖가지 범죄는 또 다른 불행하고 슬픔 일을 이웃과 본인에게 끼치므로 죄로 인한 슬픔과 고통이 그칠 날이 없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죄의 대가는 그런대로 견디면서 살고 있다. 그런데 절망적인 죄의 대가를 치러야하는 때가 온다. 그것은 지옥의 형벌이다. 그 형벌은 영원하다. 돌이킬 수 없는 절망적인 것이다.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로써 소금을 치듯 하는 극심한 형벌이다. 이를 갈며 슬피 울어야 하는 비극적인 곳이다. 어떤 도움도 바랄 수 없는 곳이다. 그리고 영원히 그 상황이 바꿔지지 않는 불못에서 죄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형벌이다.
이런 절망적인 죄에 대한 심판 까닭에 죄사함을 받아야 한다. 거듭나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태어나 사랑받는 자녀가 되어야 하는 이유, 그 필요성이 이것이다.
요 3:7 / 그러니 내가 네게 새롭게 다시 나야 한다고 한 말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3. 중생(거듭남)의 방법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거듭남의 필요성을 알고 또한 거듭나기를 원하고 있지만 그 방법을 알지 못함으로 막연하게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은 ‘얼마나 열심히 충성을 할까? 얼마나 전도를 많이 할까? 얼마나 하나님을 잘 섬길까?’ 하는 문제가 아니다.
이런 것들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전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문제가 더욱 시급한 일이다. 거듭나지 못한 체 평생 헌신과 봉사를 하다가 지옥에 간다면 그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일생동안 고난과 시련 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했지만 마지막 심판에서 심판장으로부터 버림을 받는다면 그것이 당신에게 무슨 의미를 줄 수 있는 것인가?
바라건대 모든 가르치는 분들이여! 생명의 갈급함 때문에 교회를 찾는 영혼들에게 봉사와 헌신과 충성을 가르치기 이전에 거듭남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거듭나도록 도와야 한다. 영혼을 사모하는 영혼들에게 교회를 섬기는 방법과 헌금하는 방법 그리고 전도하는 방법을 가르치기 이전에 중생의 중요성을 가르쳐야 한다. 제발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믿기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가르치지 말기 바란다.
‘여러분이 교회에 나오기를 결심하고 교회에 나오는 그 순간 하늘의 생명책에 여러분의 이름이 기록되었다’고 하는 가벼운 속삭임으로 천하보다 귀한 영혼들로 하여금 착각에 빠져 안심하도록 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니고데모를 대하셨던 것처럼 진지한 마음과 자세로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지, 무엇을 믿어야 할지, 어떻게 믿어야 할지를 가르쳐서 그들로 먼저 거듭나게 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혼구령에 전심전력을 해야 한다.
순전한 마음
거듭나기 위해서 순진한 마음으로 말씀을 대해야 한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찾아왔다. 그에게 있어서 거듭나고자 하는 열망이, 생명의 진리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 마음이 그로 하여금 밤에 조용히 예수님을 찾도록 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길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지만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시다.
요 14:6 /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오지 못한다.
행 4:12 / 그분의 힘을 입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그 이름밖에 없습니다.'
롬 10:17 / 믿음은 이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에 귀를 기울이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듣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 이루어 놓으신 위대한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혹자는 말하기를 ‘나는 매주 교회에 나가서 설교를 듣는데 어떻게 하란 말이냐?’고 반문할 것이다. 또는 ‘매일 성경을 읽고 있는데 어떤 다른 방법이 있는가?’라고 말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적은 경문을 몸에 붙이고 다녔다. 안식일과 절기마다 반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눈은 열려 있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없었다.
바로 이것이다. 당신이 당시의 마음속에 어떤 선입감을 갖고 있다면 당신의 눈은 떠질 수 없다. 니고데모 역시 예수님에 대한 평범한 선입관을 갖고 나아왔을 때, 예수님은 그의 말을 막으셨다. 그러므로 당신의 육신적인 눈으로 보는 것과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들을 버리고 순전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도록 하라.
거듭남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니고데모의 질문이 이러했다.
요 3:4 / 니고데모가 말하였다. `무슨 뜻입니까? 나이 많은 사람이 어떻게 어머니 태에 들어가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이 질문은 바리새인의 지도자다운 질문이 아니다. 산헤드린 의원의 질문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선생이 한 질문은 더욱 아니다. 이것은 어린아이의 티 없고 가식없는 질문이다. 이런 자세로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한다면 당신은 곧 거듭남의 방법을 이해하게 될 것이며 거듭남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죄사함에 대해서
이제 우리는 니고데모가 예수님 앞에서 말씀을 듣는 심경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자. 성경은 증거하기를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중한 일 또는 거짓말 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계 21:27),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계 22:15)고 하셨다. 죄인은 그 죄가 어떤 것이든 반드시 심판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죄가 없는 사람이 누구인가?
그러므로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와 같은 죄를 용서함 받기 위해서 각양의 많은 수고들을 하고 있다.
중세에는 속죄부를 팔았다. 그리고 지금도 고해성사를 통해서 죄사함을 약속받는다. 흑은 율법을 지켜서 죄의 문제를 해결을 받고자 한다. 죄를 짓지 않으려고 은둔생활을 한다. 특히 매일 같이 생각나지 않은 죄까지도, 알게 지은 죄, 모르게 지은 죄 할 것 없이 철저하게 용서를 구한다. 이런 방법들을 통해서 죄사함을 얻어 구원받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성경 어디를 살펴보아도 이런 방법으로 죄사함을 얻는 길이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우리의 수고와 노력과 행위는 죄사함과 무관한 것이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12)고 밝히고 있다.
구약시대에는 죄를 짓는 대로 생축의 피로써 속죄제를 드렸다. 죄는 사람이 짓지만 무고한 송아지나 염소나 비둘기가 대신 죽임을 당한 것이다. 어린양이 사람이 지은 죄를 대신해서 그 목이 꺾이고 피를 쏟으며 희생을 당했다. 그 후에야 비로소 죄를 지은 사람은 그 죄로부터 벗어났다. 생축이 사람이 지은 죄의 값을 죽음으로 치루는 것을 의미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범죄한 영혼은 반드시 그 대가가 죽음이기 때문이다(롬 6:23, 겔 18:4, 20).
그러나 이 제사는 한없이 반복해야만 했던 제사였다. 인간은 무능하고 온전치 못하여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죄를 범했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또 다른 생축의 피로써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만 했다. 이런 반복된 제사는 그칠 날이 없었다. 온전한 제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만약 누구든지 이런 생축으로 드려진 제사로써 죄의 값을 완전히 지불할 수만 있다면 예수님께서 또 다른 제사를 드려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이런 제사들은 오늘날 죄에 대한 반복된 회개와 고백으로서 자신들의 죄가 용서된다고 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상반된 것이다.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회생이 있어야 한다. 당신이 당신의 죄를 회개할 때마다, 혹은 고백할 때마다 그 죄를 위한 속죄제물이 없이는 대속을 받을 수 없다. 당신의 어떤 죄든지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히 9:22, 레 17:11)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린양 되신 예수님께서 드리신 제사는 구약에 드려졌던 수많은 생축의 제사와는 다른 제사였다.
히 9:25-28 /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땅 위의 대제사장이 해마다 정한 날에 짐승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뿌린 것처럼 자신의 몸을 해마다 희생제물로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26) 만일 그래야 한다면 세상이 시작되던 때부터 몇 번이고 거듭 죽으셔야 했을 테지만 절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시대의 끝 날에, 죽음으로 죄의 세력을 영원히 제거하시려고 단 한 번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 28)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들의 죄를 제거하시기 위하여 자기 몸을 드려 한 번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는 우리의 죄 때문에 다시 희생제물이 되는게 아니라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실 것입니다.
그렇다. 그리스도께서 죄를 없게 하시려고 오셨다. 그는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므로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다.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다(벧전 3:18). 십자가에서 당하신 그리스도의 고난이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반복적인 회개로써 죄를 용서받으려고 시도한다면 그리스도께서 도대체 하루에도 몇 번이나 피를 흘리셔야 된다는 말인가?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셨다.
사 53:6 / 우리는 모두 목자를 떠난 양들처럼 길을 잃고 헤매며 제멋대로 돌아다녔으나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모두 그에게 지워 놓으셨다.
그러기에 히브리서 저자는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 10:10)고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우리의 죄를 대속할 희생제물로 드리셨기에 우리가 거룩함을 얻은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면서도 아직도 죄에 매여 있는가? 당신은 아직도 회개해야 할 죄가 남아 있단 말인가?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물이 되신 십자가의 희생은 구약의 제사처럼 죄를 지을 때마다 희생제사를 드려야 하는 불완전하며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제사가 아니다. 예수님이 제물이 되셨던 희생제사는 영원하고도 온전한 제사이다.
죄를 위해서 무엇을 또 드려야 하는 짐승으로 드리는 제사가 아니라 ‘한 재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히 10:14)하는 제사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값진 희생이 당신의 모든 죄를 완전하게 대속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얻었다’(엡 1:7)는 말씀을 마음속에 깊이 새겨놓기를 바란다.
거듭남의 방법
이상에서 우리는 우리의 죄가 십자가의 보혈로 온전히 깨끗하게 되었다는 말씀을 살펴보았다.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죗값을 남김없이 지불하셨다. 선한 행위와 율법으로 깨끗하게 할 수 없었던 죄악들을 깨끗하게 하시고 값없이 의롭다고 하신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찬양을 돌릴 뿐이다.
다시 니고데모에게 우리의 시선을 돌려보자. 그가 예수님께 나아왔을 때 거듭나는 방법에 대해서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가장 시급하고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시고 계셨다. 그러므로 그의 말을 막으셨다. 그의 고상한 지식과 종교적인 경륜은 아무 유익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직 속히 해결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곧 거듭남, 중생하는 일이다.
그러면 중생하는 방법이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을 들어보자.
요 3:5 /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진정으로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새롭게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거듭나는 것이 물과 성령으로 된다고 예수님은 가르치셨다. ‘물과 성령’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지만 많은 사람이 이 부분을 오해함으로 자신들 뿐만 아니라 그 말을 듣는 사람까지 거듭남의 진리를 잘못 알게 하므로 혼돈하게 한다,
‘물’이 의미하는 것
어떤 사람들은 물을 ‘세례’라고 말한다. 비슷하지만 영세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결국 세례나 영세를 받아야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이것은 중세기에 있었던 천주교회의 산물이다. 세례를 받아야만 교인으로 등록되고 아울러 특권을 누릴 수 있었던 당시의 상황에서 누구나 세례받기를 원하는가 하면 강제로 세례를 받게 해서 개종시킨 불명예스런 일들이 많았다.
세례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마치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특별한 은혜를 누리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나 성경은 단 한곳에서도 이와 같은 견해를 지지하지 않는다. 바울은 말하기를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주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 그리스도에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 전케 하려 하심이니’(고전 1:14, 17)라고 하셨다.
바울은 그의 일생을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해서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던 사람이다. 만약 세례나 영세가 거듭나게 하는 것이라면 바울이 오히려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해야만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가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세례나 영세는 거듭나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말해주는 것이다.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즉 거듭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역사하시는 성령으로 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
히 4:12-13 /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능력이 넘칩니다. 날이 선 칼보다도 더 날카로워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생각이나 욕망까지도 가르고 그 정체를 드러내게 합니다. 13) 하나님께서는 누가 어디에 가 있든지 그 사람들을 다 알고 계십니다. 살아 계신 우리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것이 다 벌거숭이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눈앞에 숨겨질 수 있는 피조물이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언젠가는 우리도 우리 자신이 행한 모든 일들을 하나님 앞에서 낱낱이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렘 23:29 / 내 말을 알아내는 방법은 바로 이것이다. ‘내 말은 언제나 불처럼 무엇을 태운다. 내 말은 바위를 부수는 쇠망치와 같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모든 역사가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리기도 하시고 죽이기도 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이 원인과 결과를 만드신다.
벧전 1:23 / 여러분은 새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생명은 여러분의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 아닙니다. 부모에게서 받은 생명은 곧 썩어 버리지만 거듭난 이 새 생명은 영원히 계속됩니다. 이 새 생명은 인간 가운데 영원히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났다’고 가르쳤다. 야고보서에서는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 1:18).
결론은 분명하다.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뜻한다. 그러므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때 나타나는 하나님의 역사를 말한다. 주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고 하지 않았는가? 베드로도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뉘게로 가오리이까’(요 6:68)라고 고백하였다.
거듭남의 확신
그러면 어떻게 거듭난 것을 알 수 있는가? 우리는 이미 우리 자신의 모든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깨끗하게 되었으며 죄에 대한 값이 지불되었다는 사실을 성경이 말씀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요 1:29 / 다음날 요한은 예수께서 오시는 것을 보고 외쳤다. `보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십니다.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담당하셨다. ‘세상 죄’는 바로 우리 모두의 죄이다. 세상 죄는 인류의 역사의 시작부터 존재한 최초의 범죄로부터 인류역사의 종말에 있을 마지막 범죄까지를 말한다.
그 세상 죄 속에는 당신의 과거의 죄와 지금 짓고 있는 죄와 당신이 미래의 어느 날 지을 수 있는 가능한 죄까지를 포함한다. 또한 세상 죄는 예수 그리스도를 찾는 사람이건 배반하며 외면하는 사람이건 상관 없다. 모든 죄를 다 포함한다. 바로 이 모든 세상의 죄를 십자가에서 친히 담당하셨다(벧전 2:24). 이것은 성경의 가르치심이요 하나님의 말씀이다.
당신은 이 사실이 믿어지는가? 그렇다면 당신의 죄는 어느 작은 것이라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 위해서 남아 있는 것은 없다.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요 그 대가를 지불하셨기 때문이다.
당신이 갚아야 되는 부분이 조금도 남아있지 않다.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는 당신의 죄에 대한 대가가 이미 지불되었다는 증거이다 이것을 믿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다.
요 1:12 / 그러나 그분을 영접한 사람들, 곧 그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 곧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속의 사역을 개인적으로 마음에 받아들이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다.
‘영접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공로를 자기의 것으로 취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이 주어진다. 이것은 영원히 변치 않는 자녀의 신분이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그렇게 약속하셨다. 이 약속의 말씀은 천지가 없어져도 결코 없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듭남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말씀 때문이다. 말씀이 십자가의 대속 사역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약한 인간들이 어떻게 거듭날 수 있으며 그것을 알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이 이것을 밝히시고 알려주시지 않는다면 이 세상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감사하리니 하나님은 이것을 확실하게 밝히고 있다. ‘성령님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셨다’(롬 8:16).
맺는 말
이제 우리는 이 글을 마치면서 중대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십자가에서 희생되시므로 인류의 죄를 완전히 도말하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믿을만한 증거를 제시하셨다. 이것은 바로 우리를 위한 희생이었으며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심이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대속이 우리의 모든 죄를 남김없이 그 대가를 치르신 것을 믿음으로 거듭난다.
이제 마지막 문제는 우리 자신에게 있다.
이와 같은 대속의 사실을 당신이 믿고 있는가?
아직도 믿으려고 노력하는 중인가?
혹은 관심조차 없는가?
이것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었음을 기억하라. 그리고 이것을 확증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의 마음을 쏟아 그 약속의 말씀을 믿음으로 의지하라, 이것이 영원한 생명이요 거듭남이다.
요 3:16 / 하나님이 이처럼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독생자(외아들)을 보내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요 3:36 /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다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그분을 믿지도 순종하지도 않는 사람은 결코 하늘나라를 보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