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5년 8월25일 오후 4시 인하부고 龍頭體育館
저는 이 학교에 학생들을 가르치러 왔고 학생들을 가르치다 떠나갑니다. 이런 華麗한 格式보다는 1시간 정도 학생들과 대화를 하는 것으로 퇴임식을 대신하는 것이 저의 소망이었는데 그것마저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시간 관계로 지금 제가 드릴 말씀은 10개의 에피소드를 문맥에 관계없이 옴니버스 형식으로 나열하였습니다. 토막토막 들으시고 퍼즐맞추기처럼 組合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995년 여름에 워싱턴 DC의 백악관 앞뜰을 거닐고 있었는데 드넓은 잔디밭에 달랑 인디언 텐트 한 채가 눈에 띠었습니다. 민속기념물인줄 알았는데 인디언들이 露宿을 하며 미국정부를 상대로 영토반환투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다음해 집사람이 인천고등학교에 있을 때 한 달간 시카고의 아르곤 국립과학연구소에서 硏修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나를 운디드 니에 묻어다오'라는 책을 제게 소개해주었습니다.
그 책의 15페이지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1620년 폴리머스에 상륙한 英國人들은 원주민들의 따뜻한 도움이 없었더라면 거의 굶어죽었을 것이다. 인디언들은 폴리머스에 상륙한 白人 정착민들을 의지할 데 없는 어린애로 알고 惻隱히 여겨 곳간에 있는 옥수수를 나누어주고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어 겨울을 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듬해 봄에는 옥수수씨앗을 나누어주고 심고 가꾸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몇 해 동안 영국 사람들과 인디언들은 이웃해 平和롭게 살았다. 그러자 백인들은 배를 타고 계속 몰려들었다. ...1625년에 백인 몇 명이 페마퀴드 족 酋長 사모셋에게 1만2천에이커를 더 떼어달라고 요구했다. 사모셋은 '大地는 위대한 精靈이 내려주신 神聖한 것이며 하늘과 같이 무한한 것이어서 어느 한 사람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백인들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땅을 넘겨주는 儀式을 거행하고, 백인들을 위해 만든 문서에 서명을 했다. 이것이 영국식민지인에게 인디언이 땅을 넘겨주면서 만들어준 최초의 증서다.
이 때 조선은 仁祖3년으로 大同法 때문에 시끄러웠고 2년 뒤에는 金나라 군사들이 渡江하여 이른바 丁卯胡亂이 일어나 임금이 江華로 避身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壬辰倭亂의 戰雲이 가시지 않은 채 30년도 안된 그런 때였습니다. 그나마 그럭저럭 領土와 民族은 保存한 셈입니다.
이번 여름에 천영기 선생님의 好意로 금강유역을 돌아보면서 공주의 우금치에 들렀습니다. 1894년 官吏의 부패에 저항한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淸나라와 日本에서 군인들이 파견되었고 迂餘曲折끝에 동학군은 이 곳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그리고 甲午更張이 있었고 이듬해 2월2일 고종은 德體智를 基調로 신교육에 대한 綱領을 발표합니다. 즉 德養은 五倫을 바탕으로 사회의 행복을 증진하고, 體養은 强壯無病으로 즐거움을 누리며, 智養은 格物致知와 窮理盡性하여 公衆의 이익을 도모하라. 虛名과 實用을 分別하여 實事求是로 旋回한 느낌입니다. 그리고 그는 2년 뒤인 1897년에 大韓帝國을 세우고 皇帝가 되었습니다. 올 해가 2005년이니까 110년 전의 일입니다. 그리고 제 나이 이제 60이니 적어도 저는 신교육 역사의 반을 그 틀에서 살아온 셈입니다.
20餘 年前 국어선생으로 인하부고 校門을 들어섰을 때 맨 처음 눈에 띈 것은 참되자라는 敎訓과 '민주시민을 기른다는 敎育目標였습니다. 그것을 저는 나름대로 民主主義를 배워서 實踐하여 德을 쌓자' 라는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와서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에게 다섯 손가락이 있으니 우선 그 손가락 하나마다에 仁義禮智信을 붙여봅시다. 仁이란 더불어 산다는 뜻입니다. 義란 영원한 것으로 定義해 봅시다. 不義가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는 屬性을 이 해한다면 正義가 무엇인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禮는 天地自然 모든 被造物에 대한 人間의 사랑입니다. 그것을 아는 것이 智慧입니다. 여기에 믿음을 더해보면 더불어 사는 믿음, 永遠하다는 믿음, 그리고 存在에 대한 믿음과 智慧에 대한 믿음으로 한 개인도 우리 共同體도 모두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確信할 수 있습니다.
제가 남궁영 선생 나이쯤이었을까? 딸깍발이로 유명한 一石선생의 招待로 그 書齋에서 차를 한 잔 나눈 일이 있었는데 民主主義 발전에 대한 제 질문에 無知의 克服! 이 한마디를 해주셨습니다. 다시 생각해보면 공동체가 더불어 행복을 추구한다는 이 생각 - 즉 智慧는 배우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敎育이 중요한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 는 말을 제자들에게 呪文을 외우듯 했는데, 自身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은 他人도 또 天地自然의 貴重함도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나아가 民主主義의 旗幟아래 國家를 생각하는 사람은 국민 한 사람의 權益이 국가보다 크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교육이 아니라 깨달음입니다. 覺醒입니다. 個人이 없으면 宇宙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장 明確히 說破한 분은 싣달타입니다. 학생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눈을 감으면 世界는 暗黑입니다. 그러나 눈을 부릅뜨면 저 안드로메다의 星座도 한 눈에 담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自覺하고 눈을 크게 뜨라고 洪思容은 '나는 王이로소이다' 라고 가슴을 폈고, 尹東柱는 별 하나에 이름을 붙였고, 李陸史는 '自己의 별을 노래하자' 고 목청을 가다듬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理性的 사회에 피를 돌게 하는 것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奴隸도 일주일에 하루는 쉬어야한다고 외쳤고 사랑은 원수도 感化한다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깨닫지 못하면 사랑도 모른다는 것은 이미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冠禮를 치른 成人입니다. 高等學校는 義務敎育이 아닙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스스로의 앞날을 開拓해나가야 합니다. 여러분의 學問은 注入式 暗記가 아니라 자신이 하나의 별이 되도록 깨달음을 얻는 것이 되어야한다는 것은 여러분이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을 터이고, 제 象徵이요 隱喩요 또 暗示인 몇 가지 이야기로 새삼 확인했으리라 믿습니다.
요즘 過去事淸算이라는 말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 문제의 核心은 歷史를 통해서 무엇이 잘못되었고 무엇이 잘 되었는지를 明鏡에 비추어 앞으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진정한 OECD국가의 班列에 나란히 설 수 있는가를 확실히 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의 역사가 乙巳五賊과 不正蓄財者, 獨裁者들을 모두 包容하고도 이만한 成長을 해왔다면 앞으로 그들의 잘못을 조금만 고친다면 이 공동체의 발전을 그만큼 앞당길 수 있다는 그런 취지입니다. 오늘은 제가 이 학교에서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나의 20년을 말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여러분의 人生을 덧없이 나처럼 浪費하지 말라는 뜻에서 간단히 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신교육 110년은 1984년부터 1945년까지 前半期와 1945년 미군정으로부터 비롯된 後半期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저는 1945년 이 나라가 日帝로부터 해방되고 그 덕에 監獄에서 풀려나온 아버지에 의해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大韓民國이 수립되고 일년-제가 세 살 때에 고하 백범 몽양 이런 분들이 피살되고 渦中에 저의 아버지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3년간의 6.25와 나머지 10년의 드난살이 이야기는 그 사이에 3선 改憲과 4.19와 5.16이 있었다는 정도로 넘어가기로 합니다. 우리나라는 憲法이 9번이나 바뀐 나라입니다. 그런데도 모 법과대학 중간고사 시험준비를 하는 학생들이 헌법 책을 들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연행되는 그런 시대가 또 대략 30년 계속되었습니다. 제 인생 60에서 이런 4--50년을 빼면 무엇이 남았겠습니까? 그렇지만 무엇보다 보릿고개의 뙤약볕에서 굶주린 배를 움켜쥔 農民들을 생각하고 熱砂의 사우디에서 흘린 땀으로 이렇게 훌륭한 학교를 지어준 勤勞者들을 생각한다면 저의 苦痛은 한낱 感傷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올봄에 고등학교 동창들이 졸업 40주년이라고 저를 불렀습니다만 가지 못했습니다. 이제 저는 60이 되어서야 겨우 고등학교의 문을 나서게 될 터이니 고등학교 재학시절을 회고해보겠습니다. 그 때는 정말 많은 훌륭한 선생님들이 - 정말 많은 것을 제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언어와 수리, 과학과 사회와 음악과 미술 등 모든 분야에 걸쳐 배웠던 것들은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 밥보다 귀중한 營養이었습니다. 그것은 머리가 허옇게 된 제 친구들도 異口同聲으로 입을 모아 하는 말입니다. 어떤 科目이 중요하고 어떤 時間이 덜 중요하다는 생각은 정말 버리십시오. 한 가지를 잘 하는 사람은 열 가지를 잘한다는 것은 정말로, 정말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존경하는 선생님을 만드십시오! 일생에 존경하는 선생님을 갖지 못한 사람은 불행합니다. 선생님이 곁에 계시든 돌아가시든 그 가르침은 영원히 자신의 영혼이 되어 함께한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또 고등학교 때는 꿈을 꾸는 기간입니다. 굳이 릴케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고등학교 때 꿈이 없는 사람은 늙어 지팡이를 짚고 노인정을 방황할 것입니다. 저는 카메라를 메고 세계를 도는 National Geographic의 기자가 되고 싶었고, 법조계에서도 일해보고 싶었고 가정환경으로 주변에서는 醫師가 되었으면 하기도 했고 建築家도 되어보고 싶었습니다. 비행기를 몰고 세계일주를 하는 꿈도 꾸었고 또 대학 강단에도 서보고 내친 김에 대학교도 하나 만들어보고 싶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어 보이지만 靜石선생이 이 학교를 지어주셨고 여러분의 선배들 그러니까 나와 함께 공부한 졸업생들이 의사도 되고 교수도 되고 대한항공의 기장도 되고 법조계에서도 일하고 있으니 저는 이 모두를 인하부고를 통해 한꺼번에 이룬 셈입니다. 저는 지금 더 바랄 것도 남부러울 것도 없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저는 서울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仁川의 인하부고에 재입학(?)해서 또 많은 젊은 선생님들을 만났습니다. 그 선생님들은 새로운 정보와 지식으로 낡고 굳은 제 머리를 신선하게 해주었으며 그 기쁨으로 세월이 흘러가는 줄도 모르고 즐겁게 살았습니다. 40년 동안 관심을 가져왔던 漢字敎室을 열었던 일, 밤을 새워 교지를 만들던 일, 답사의 기획을 하고 자료집을 만들던 일 그리고 시화전을 열었던 일들은 모두 제 가슴에 있습니다.
또한 제가 눈을 뜨고 있는 동안 100년의 斷絶을 딛고 竹의 帳幕이 걷히고 저의 北京滯留中 선생님들이 다녀가시고 우리의 文化後孫인 일본에 국어과선생님과 여행했던 일은 출국이 源泉禁止되었던 저의 젊은 시절에 비하면 꿈같은 일이었습니다. 나아가 금강산 길이 열리고 철도가 이어지고 남북이 서울에서 축구를 하고 조용필이 평양에서 공연을 한다는 것도 제게는 거의 믿어지지 않는 일입니다. 인하부고 는 仁川에서 가장 進步的이고 民主的이며 創意力을 發揮하는 학교입니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뒤로 돌아갈 수도 있지만 제가 50이 되어서야 이룰 수 있었던 일이 여러분들에게 10살에 이미 가능하다면 저보다 40년은 단축하고 앞서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꿈의 실현에 邁進하기 바랍니다.
여러분! 하찮은 것 가운데 神이 있습니다. 돌을 보고 놀랄 줄 아는 사람이 金을 찾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책을 많이 읽으십시오! 꼭 사서 읽고 자신만의 책장을 갖으십시오! 그 책장을 할아버지가 되면 손자를 위해 다시 열어야한다는 먼 장래를 생각하며 정돈하십시오! 말을 할 때는 꼭 써서 하는 습관을 기르세요! 그리고 남의 말을 들을 때 事實과 眞實을 구별하며 愼重하게 듣고 예의를 갖추십시오! 또 자신의 생각을 꼭 글로 적으세요! 言語는 人間의 비롯됨이요 成長이며 完成이고 傳統이요 歷史입니다.
누군가는 이 순간을 離別이라는 아쉬운 말로 表現합니다. 그러나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닙니다. 宇宙의 시간은 無限해서 여러분의 컴퓨터에 紀錄이 저장되고 그 記憶이 새로운 組合을 만들어 내듯이 永遠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의 20년은 이 학교의 無窮한 歷史와 더불어 잘못 된 것은 잘못된 그대로 잘한 것은 잘 한대로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지금부터 그 새로운 combinatorics-아날로그가 사랑과 和合과 幸福과 기쁨으로 點綴되기를 바랍니다.
때로는 왜 내게 宗敎가 없었는가를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여러분들이 바로 나의 信仰이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지난 20년간 여러분에게 드린 말씀들은 懇切한 나의 祈禱文이었을 것입니다. 나의 주님이 그 말씀을 들어주시지 않는다 할지라도 또 들을 수 없을 만큼 멀리 있다하여도 나는 그 祈禱를 멈추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 학교에 있는 동안 女息의 婚事가 있었고 그리고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그때 物心兩面으로 도와주신 여러분께 다시 한번 人事를 드립니다. 제가 이 나이까지 이 학교에 출근하도록 하루도 빠짐없이 도시락을 만들어준 아내를 생각합니다. 그 아내에게 한번도 生日을 챙겨준 일이 없으므로 이제 한번은 생일상을 차려볼까 합니다. 그때는 여러분도 招待했으면 합니다. 단 한 점의 血肉에게도 너무 疎忽했습니다. 生日은 고사하고 학교에 다니는 동안 입학식에도 가본 일이 없으므로 혹 하늘이 도와 마지막 졸업을 하게 되면 그때는 우리집 도련님과 함께 참석해볼까 합니다. 그리고 저 자신을 위해서도 지난 40년간 한번도 머리손질을 안했는데 여러분처럼 무스도 바르고 멋도 좀 내고 헬스클럽에도 가볼까 합니다.
아까 우금치이야기를 했었습니다. 그 우금치를 지나 부여 강경 한산 益山을 거쳐 장수의 물뿌랭이마을에서 407킬로를 흐르는 금강의 源泉을 보았습니다. 그 물은 겨우 한 움큼이었는데 진안에서는 용담호를, 옥천에서는 대청호를 만들고 馬韓과 百濟를 건설했으며 熊浦에 이르러서는 거대한 흐름이 되었습니다. 그런 肅然한 생각으로 그 물들을 머금고 있는 덕유산에 올랐었습니다.
부드러운 구름은 德裕 山허리를 감고...
떨키나무 숲을 이불처럼 덮고 있었습니다.
붉은 꽃! 하얀 꽃! 아름다운 산꽃들이 피어있었습니다.
구름이 흘러가며 그 香氣를 품고 갔습니다.
이윽고 안개비가 제 옷깃에 이슬방울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벚꽃이 휘날리는 인하의 동산에서 만났습니다.
그렇게 저도 인하동산의 香氣를 안고 가려합니다.
부디 健康하십시오.
仁荷여 기리 빛나라!
인하만세!
感謝합니다.
2005년 8월24일 마지막 여름비내리는 밤 鐵馬山 書齋에서...梁曉星 謹識
|
첫댓글 역시 별이셨어~ 그 중에서도 새벽 별이셨어~ 曉星!
새벽시간 동쪽 하늘에 빛나는 샛별. 태양과 달을 제외하고는 가장 밝은 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