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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을 느끼는 주요 감각기관은 어디이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
“아름다움을 느끼는 주요 감각기관은 어디이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먼저 짚고 넘어가 보겠다.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아름다움이란 ‘보이는 대상이나 음향, 목소리 따위가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눈과 귀에 즐거움과 만족을 줄 만하다.’라고 표기되어있다. 내 생각도 이와 별다르지 않다. 내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이란 “눈, 귀, 코, 입 등을 통에서 흥미를 얻을 때 또는 감정적(좋은 기분)으로 느껴질 때 아름다움을 느낀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눈, 귀, 코, 입 즉, 시각, 청각, 후각, 미각에서 느낄 수 있는 대표적인 것들은 그림, 음악, 노래, 향기, 음식 등이 있고 이것들을 여러 종류로 나누어 조합, 결합하여 만든 것을 ‘예술’이라고 부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의 이런 생각은 “예술”을 넓은 관점으로 보았을 때의 기준을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아름다움만으로 관점의 폭을 좁혀보자면, “아름다움이란 색깔이나 모양, 형태, 비율 같은 것에서 느껴지는 매력 혹은 만족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따라 시각을 통해 얻고,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았다.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것은 매우 인간적인 감정이며 이것은 몇백 만 년 동안이나 우리와 함께해왔다. 심지어 초기의 인류가 사용했던 주먹도끼 모양까지 대칭을 이루고 있다. 완벽한 대칭은 아니지만, 언 듯 보기에 물방울 모양을 띠고 있다. 도구를 사용하는 데 있어 도구의 역할만 다하면 끝인데 왜 굳이 우리의 선조들은 도구를 보기 좋게 만드는데 까지 시간을 투자했을까? 연구자들은 이에 관련된 현실적인 이유를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그럴듯한 이유를 밝혀내지 못했다고 한다. 가장 현실적인 답은 “그저 보기 더 좋게”라는 답변이 가장 현실적으로 가까운 것 같다.
역사를 통틀어, 미의 기준은 많이 변해왔다. 미의 기준이 변화를 거치거나 완전히 뒤바뀌어 버린 경우도 있다. 오늘날의 예시를 들어보자면, 한국에서 미의 기준이 외모라 했을 때 브라질은 엉덩이가 큰 사람이 미의 기준이라고 한다. 타지키스탄에선 일자로 이어진 눈썹이 미의 기준 중 하나라고 하고 일본에선 치아의 덧니를 귀엽고 매력이 있게 받아드려 미의 기준으로 정해져 있다. 이처럼 나라마다 문화의 배경에 따라 미의 기준은 다 다르다. 그러나 개개인의 취향 차이를 넘어,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보편적인 기준들도 있다. 황금비율이나 대칭, 혹은 프랙탈 등이 있는데 앞에 말한 아름다움의 기준들로 만들어진 예술품이나 건축물은 과거나, 현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우리가 시각으로 확인했을 때, “와, 이쁘다!”라고 말 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예시로 에펠 탑, 비너스 동상이 있고, 생소하지만, 비스무트라고 불리는 광물이 있다.
우리는 왜 에펠 탑, 비너스 동상, 비스무트 광물과 같은 것들을 보면 아름답다고 느낄까? 황금비율, 대칭, 프랙탈 등처럼 이러한 패턴들은 자연물들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프랙탈 패턴은 달팽이 껍데기, 꽃, 파도, 구름 등이 있고, 또 다른 패턴인 대칭성은 줄기, 나무, 잎, 꽃 등이 있다. 이를 통하여 우리의 조상은 싱싱한 식물과 불안전한 환경을 구분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잎이 파릇파릇한 식물은 토양에 영양분이 많다는 뜻으로, 구름이 많이 끼거나 바다의 파도가 평소와 다른 거친 패턴을 보이면 위험하다는 뜻으로 말이다.
이처럼 대칭성 패턴은 너무 흔하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에 우리 인간의 뇌에 매우 친숙한 것으로 이미지가 잡혀있다. 하지만, 이것에 집착하며 살고 있진 않다. 한가지의 예로 가구를 설치하거나 놓을 때 우리는 보편적으로 대칭이 되도록 가구를 설치하려 하고 또는 “어디에 놓아야 이뻐 보이고, 잘 보일까?”를 고민하며 이리저리 옮겨도 보고, 황금비율을 찾아 놓으려고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아름다움 즉, ‘이뻐 보이고, 잘 보일까?’라는 인식을 하며 각도, 시선, 위치, 모든 것을 고려하여 아름다움에 침착하는 것이 아니라 가구로써의 아름다움을 최대한 얻으려고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
지금까지 인간이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왜 그것들을 인간이 아름다움으로 느끼지는 지에 대해 정리 해보았다. 이건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자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초록색이 평화나 낙원 등을 상징이유도 여기에 숨어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이에 대해 번외편으로 글을 써보겠다.
현대사회에서는 초록색은 안전의 의미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이유로 사용하는 것에 많은 이유가 있다. 신호등에서의 초록색은 ‘지나가도 괜찮다.’라는 승인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고, 초록색의 십자가 모양은 병원과 같이 안전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나마 가장 현실적인 이유는 20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레이저 기술이 발달하게 되었고, 이때 적은 전력으로 가장 높은 효율을 낼 수 있는 색깔인 초록색을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지금 인간들은 오랜 과거 인간들과 달리 자연과 숲 등의 환경에서 사는 것이 아닌 자신들이 만들어낸 환경에서 살고 있다. 예를 들어 여러 종류의 건물이나 공원, 인도와 도로, 심지어 이동 수단까지 말이다. 종종 거리에 나무나 풀, 꽃 등을 통해 초록색을 볼 수 있지만, 앞서 이야기한 이유로 우리들은 초록색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초록색을 사용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의 조상들로부터 내려오는 본능 때문이 아닐까 조심 있게 이야기해본다.
본론으로 돌아와 “아름다움을 느끼는 주요 감각기관은 시각이고, 이에 대한 이유는 대칭성 패턴, 프랙탈 패턴, 황금비율 등이 있다.”라고 답할 수 있다. 좀 더 정확하게 답변하자면, “아름다움을 느끼는 주요 감각기관은 시각이지만, 애초에 ‘미’라는 개념은 추상적이기 때문에 아름다움이란 뇌에서 느끼는 것이라고 말하는 게 좀 더 정확한 표현 같다. 이에 따른 이유를 말해보겠다. ‘대칭성 패턴, 프랙탈 패턴, 황금비율’ 등은 오랜 시간 동안 선조 때부터 함께 있었다. 선조들을 이를 이용하여 상한 식량과 신선한 식량, 안전한 환경과 불안전한 환경을 구분하였고, 지금의 우리는 이것들을 미의 기준으로 새워 건축물, 예술품 등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물론 황금비율, 대칭성 패턴, 프랙탈 패턴을 확인하는 데 있어 시각이 꼭 필요하지만, 뇌에서 느껴지는 매력과 만족감이 없었더라면, 앞서 이야기했던 패턴들, 황금비율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법에 복종하지 않는 행위가 이성적인 행동일 수도 있을까?
‘법에 복종하지 않는 행위가 이성적인 행동일 수도 있을까?’ ‘법이란 국가의 강제력을 수반하는 사회 규범. 국가 및 공공 기관이 제정한 법률, 명령, 규칙, 조례 따위이다.’라고 네이버 국어사전에 나와 있다. 본론으로 넘어가기 전에 법에 대해 좀 더 깊게 들어가 보겠다. 서로 다른 생각과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아가는 사회에는 규칙이 필요하다. 농구 경기를 예로 들어보겠다. 농구 경기를 하는데 규칙이 없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해보자. 선수들이 서로 반칙을 하며 크게 다칠 수 있다. 여러 개의 농구공이 경기장에 들어올 수 있고, 각 팀의 인원에 차이가 있을 수 있으며 농구공을 어디에 넣어야 하는지에 관한 규칙이 없어 어떤 팀이 이겼는지 졌는지 판단하기 어려워질 수도 있다. 이처럼 규칙이 없는 농구 경기는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 되어버린다. 규칙이 생긴다면 이야기는 정반대로 흘러가겠지만 말이다. 앞에서의 예시처럼 농구 경기가 사회로 바꾸어버린다면, 사회는 질서를 잃어버리고 엄청난 사회 혼란을 몰고 올 것이다. 그리고 이를 막기 위해서 인간은 ‘사회규범’이란 것을 만들었다.
우리 사회에는 다양한 사회규범이 있는데, 도덕과 법이 대표적이다. 도덕은 선의 실현 목적으로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할 규범을 뜻하고 법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며 정의를 실현할 목적으로 국가가 만든 사회규범이다. 도덕과 법의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는 각각 자율성과 강제성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도덕의 예시로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는데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행동, 길에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않는 행동 등이 있다. 법의 예시로는 저작권, 도로교통법, 교육기본법 등이 있다. 도덕을 지키지 않았을 경우 처벌 받거나 국가로부터 제재 받지 않지만, 법을 지키지 않을 때 처벌을 받거나 국가로부터 제재를 받을 수 있다. 또한 법은 도덕과 달리 행위의 결과를 중시한다. 만약 내가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쳐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준다.”라고 했을 때 도덕은 ‘다른 사람을 도와준다.’라는 동기 즉, 마음을 보지만, 법은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친다.’라는 행동을 본다. 또한 법은 정의의 실현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뿐만 아니라 공공복리의 증진을 목적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공공복리의 증진이라 하면 ‘사회 구성원 전체를 위한 복지와 이익’을 뜻한다. 따라 법은 특정 집단의 이익뿐만 아니라 사회구성원 다수가 행복과 이익을 증진하는 것을 목적으로도 만들어졌다. 공공복리의 증진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법의 예시로는 ‘흡연구역’이 있다. 인간에겐 ‘흡연권’이 있는데 이는 언제, 어디서나 자기가 원할 때 흡연을 할 수 있는 권리를 뜻한다. 그러나 만약 이 흡연권을 아무런 제한 없이 인정된다면, 사람이 많은 공공장소에서의 흡연까지 인정받게 되어버린다. 이는 공공복리를 위협하는 행위이다. 물론 흡연자에게 흡연권은 중요한 기본권이지만, 흡연권을 보장해 주기 위해 흡연하지 않는 다른 사람에게까지 피해를 줄 순 없기 때문이다. 따라 흡연구역을 따로 만들어 다른 사람에게 피해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흡연자들이 흡연권을 누릴 수 있게 만들어졌다.
본론으로 돌아와 법의 궁극적인 목적은 정의의 실현이다. 여기에서 정의는 ‘대체로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 법은 열심히 일한 사람에게는 정당한 보상을 주고, 법에 위반되는 행위를 한 사람들에겐 마땅한 제재 또는 처벌을 내린다. 자 그렇다면, 앞서 이야기한 내용들을 두고 “법에 복종하지 않는 행위가 이성적인 행동일 수도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보았을 때 당연히 ‘법을 어긴 행동을 한 사람이 비이성적인 사고와 행동을 보인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법의 목적과 목표는 내가 보기에 너무 올바르고 곧기 때문이다. 만약 법이 특정한 사람들만을 위해 만들어지고, 모두에게 동등하지 않았더라면 법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할뿐더러 공공복리는커녕 사람들 간에 분쟁만 더 일으켰을 것이다. 다행히 오늘날의 법은 공정하고 합리적이기 때문에 법을 어기거나 남에게 상당한 피해를 준 부분에 있어서 합당한 처벌을 내린다.
그래서 난 ‘법이 있는 이상 우리의 삶에는 커다란 문제가 없다.’라고 생각했다. 법은 공정하고 합리적이니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이를 부정하듯 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도 있다. 물론 각자만의 사연이 있겠지만 법을 어기는 행위는 엄연한 죄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난 법이 가지고 있는 오류는 있는지 없는지를 찾아보았다. ‘아무리 법을 어겼다 하더라도 억울한 사람이 있을 것 같다’라는 나의 생각 때문에 이곳저곳에서 찾아보다 유튜브에 한 영상을 보게 되었다. 영상에서는 법의 단점, 부당함을 이야기하고 도덕에 지나치게 어긋난 법에 대한 사례를 이야기 했다. ‘김웅’이라는 사람은 영상 속에서 이렇게 이야기 했다.
“법이라는 건 되게 잘못 생각하시는 게 뭐냐면 그걸 다루는 사람이 잘못한 것이지 법 자체는 되게 공정하고 되게 유용할 거라고 보통 사람들이 생각을 해요. 안 그래요! 법 자체에서 우리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없는 게 많아요. 그 사례를 좀 이야기해드릴게요. 말기 암에 시달리는 남편을 두고 있는 부인이 있어요. 부인은 남편을 정말 사랑해요. 남편이 너무 고통스러워하니까 이 부인은 독극물을 가져와서 주사를 놓고 안락사를 시킵니다. 남편이 너무 고통스러워하니까. 그 바로 옆집에 자동차 경주 광이 살고 있어요. 그래서 차량을 불법 개조를 해서 밤마다 불법 경주를 합니다. 그러다 중앙선을 침범해서 마주 오는 차를 들이받아서 그 차의 운전자를 죽입니다. 부인이 한 일은 살인죄에요. 우리나라 죄로 쳐도 무기 또는 징역 20년 이상입니다. 자동차 경주 광은 과실치사에요. 금고 5년 이하에요. 여러분 누가 나쁜지는 바로 알 수 있죠? 지탄을 받을 사람이 누군지는 정확히 알죠! 근데 법률적인 판단은 전혀 달라요. 법이 여러분이 생각한 것처럼 정의나 구체적인 현실에서 우리가 누구나 납득 할 수 있는 그런 결과 자체를 보여줄 수 없다는 사례 중에 하나입니다. (중략) 여러분 공직선거법이라는 거 아시죠? 아주 고통스럽게 어려운 법인데 공직선거법은 선거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만든 법이에요. 그럼 공직선거법에 의해서 처벌하면 다 선거에 공정성이 확보될 것 같죠? 예전에 아주 되게 유명한 정치인 한 분이 공직선거법으로 기소가 됐습니다. 유죄까지 선고를 받았어요. 아주 나쁜 사람 같죠? 근데 이 사람한 건 뭐냐면 명함을 지하철 매표소 부근에서 나눠준 거예요. 그게 공직선거법 위반이기 때문에 이 사람은 기소가 됐어요. 근데 거기에서 한 1~2미터 떨어져서 매표소에서 좀 떨어진 데서 나눠주면 불법이 아닙니다. 몇 미터 떨어진 데서 그걸 나눠줬다고 해서 이 사람이 처벌을 받는 거 그래서 불법으로 받는다. 이 양반이 그거를 납득을 하겠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처벌한다고 해서 우리나라 선거 제도가 올바로 갈 것 같나요? 아니잖아요. 법이 오히려 분란을 일으킬 수도 있는 거예요. (중략) 우리는 법과 제도가 우리 문제를 해결해 주고 좋은 세상을 만들어 줄 거라고 생각 하죠. 가장 법을 많이 얘기했던 순자는 그렇게 이야기를 해요. 사람을 좋게 만들고 이사회를 좋게 만드는 것은 법이 아니고 교육하고 도덕이다. (중략) 법에 저는 불신을 주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법이 가지고 있는 부당한 권위를 없애자는 거 에요. 법이 없어지면 절대 안 돼요!”라고 김웅은 말씀하셨다.
출처: 유튜브 (김웅 검사가 말하는 법의 한계와 그 의미 / 어쩌다 어른 2019)
유튜브를 다 보고 나니 잠시 고민에 빠졌다. 공동체 생활에 있어 규범을 만드는 것은 반드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강제성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만큼 중요한 규범이라면 따라야 한다고 생각해왔고 그렇게 살아왔다. 심지어 부모님이 교통법에 따라 올바르지 않은 마음가짐을 보였을 때도 뒷좌석에서 한 소리 했다. “신호등 신호 안 따르면서 왜 다른 교통법은 지켜? 그렇게 융통성을 들먹이면서 이 규칙 저 규칙 지키고 싶은 규칙만 지킬 거면 규칙이 왜 있어?”라고 말이다. 난 아직 면허도 없고 교통법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아빠가 신호를 지키고 있는 와중에 엄마가 “빨리 가라고, 이 정도는 괜찮다고”라고 하며 아빠를 재촉했다. 아빠는 법을 중시하여 신호를 지켰고 엄마는 융통성과 도덕을 중시하며 신호를 무시했다. 난 솔직히 도덕은 법을 못 이긴다고 생각한다. 이번 발제를 하는 지금도 “법은 도덕의 위”라고 생각한다. 나의 FM 같은 고유 특성 때문인지 아니면 공동체에서의 냉혹함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인지 원인은 모르겠지만, 법은 지켜야 한다는 내 생각은 흔들리지 않는다.
이번 주제 ‘법에 복종하지 않는 행위가 이성적인 행동일 수도 있을까?’에 대한 나의 답변은 ‘법에 복종하지 않는 행위는 이성적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없다. 물론 이성, 도덕을 잃고 죄를 지은 사람들도 있지만, 아무리 이성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법의 냉혹함 때문에 사소한 것만으로도 죄를 지은 것으로 판단될 수 있다. 그러나 공동체에서의 냉혹함은 필요하다. 이 사람 사정, 저 사람 사정을 다 들어주고 사면하여 준다면 이것을 악용할 수 있는 상황이 벌어질뿐더러 법이 있는 이유와 목적이 사라진다. 예를 들어 흡연구역 규칙이 정상 상태로 유지되는데 흡연을 안 하면 정신이상이 오는 A라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보겠다. A는 1시간 주기로 담배를 태우지 않으면 극심한 불안함과 환각, 환청, 환후, 호흡곤란을 겪는다고 한다. 어느 날 A는 담배 태우는 일을 잠시 미루다가 결국 사람이 많은 공공장소에서 흡연을 하게 되었고, 이를 본 시민이 A를 고소했다. 재판받게 된 A는 법정에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했고 법정은 A의 사정을 이해하고 공공장소에서 흡연을 할 수 있는 공공장소 흡연권을 줬다고 한다. 말도 안 되는 예시지만, 이러한 경우 뒤따라올 흡연구역 규칙에 관련된 수많은 제기와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있을지 모를 사람이 본인도 공공장소 흡연권을 달라며 항소하는 여러 사람들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법을 완벽하게 지키라는 말이 아니다. 법이라는 틀에서 완전히 벗어난 행위를 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기에 공동체를 향한 법의 태도는 냉정해야만 하며 도덕을 벗어난 판결을 했다 하더라도 법은 공동체 속에서 자신의 역할과 위치를 지켜야 한다.’
정의와 자유의 차이는 무엇인가?
‘정의와 자유의 차이는 무엇인가?’ 정의란 ‘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 철학적 해석으로는 ‘개인 간의 올바른 도리. 또는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공정한 도리.’라고 네이버 국어사전에 나와 있다. 자유란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 철학적 해석으로는 ‘자연 및 사회의 객관적 필연성을 인식하고 이것을 활용하는 일.’라고 네이버 국어사전에 나와 있다. 일단 내 생각부터 이야기해보겠다. 단어가 가지고 있는 뜻만 두고 생각해보자면, 정의와 자유의 차이는 너무나도 명확하다. 간단히 말해 정의는 법을 중시하여 개인의 선택을 공정한 범위 안에 앞세운 느낌이고, 자유는 공정보단 개인의 선택이 더 중요시되는 느낌이다. 다른 말로는 정의는 사회주의, 자유는 자유주의로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정의와 자유가 상반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정의 안에 자유가 있고 자유 안에 정의가 있다고 느낀다. 자유가 없으면 정의가 있을 수 없고 정의가 없다면 자유도 있을 수 없다. 인부를 예로 들어보겠다. 인부는 윗사람에게 돈을 받고 공사장에서 본인의 노동력을 가치삼아 일한다. 만약 윗사람이 인부에게 ‘너는 나에게 돈을 받고 일하는 사람이니까 나가서 내 밥 좀 사 와’라고 한다면, 인부는 부당함을 느낄 것이다. 인부가 노동력을 가치삼아 공사장에서 일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윗사람의 밥을 위해서 일하고 돈을 받는 것은 아니까 말이다. 따라 이런 경우엔 정의가 실현되지 못한다. 인부의 자유를 침해당했으니까 말이다. 또 다른 경우로는 퇴근 시간에 윗사람이 인부에게 ‘야, 너는 남아서 일 더 하고 가!’라고 말한다면, 인부는 방금과 같이 부당함을 느낄 것이다. 윗사람의 권력으로 인부는 정해진 일보다 더 많은 일을 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따라 이런 경우엔 자유가 실현되지 못한다. 인부의 퇴근 시간은 정해져 있으나 권력남용으로 인한 정의가 침해당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유와 정의는 서로가 없다면 성립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른 철학자들이 정의한 정의와 자유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품고 조사를 시작했다. 결국 오늘도 유튜브를 샅샅이 뒤지던 와중에 ‘자유주의적 정의관’에 대해 다룬 영상이 있어서 시청하게 되었다. 영상에서는 두 철학자의 주장을 이야기하며 시작했다.
‘자유주의 사상’이라는 것이 있다. ‘누구나 독립된 자아로서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개인이 자유롭게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사회 전체의 부가 증가한다는 전제를 두고 있다. 자유주의 사상에 바탕을 둔 ‘자유주의적 정의관’은 ‘자유 경쟁을 통해 공정하게 획득한 개인의 권리와 이익을 중시’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자유주의적 정의관 안에서도 서로 다른 의미를 추구하는 두 철학자가 있는데 먼저 ‘존 롤스’라는 사람의 주장에 대해 이야기해보겠다. 존 롤스는 자유주의적 정의관에서 공정한 분배를 중요시했다. 이에 대한 기준은 ‘공정한 절차’를 따른다고 말했다.
하지만, 공정한 절차 또한 기준이 필요했고 롤스는 스스로 질문을 했다. ‘사회 구성원 모두 정의에 대한 합의에 도달할 수 있을까?’라고 말이다. 롤스는 이를 맞추기 위해 가상 실험을 하나 제안했다. 가상 실험의 조건은 ‘무지의 베일, 그 뒤에 가려진 원초적인 상태’라고도 불리는데 여러 사람이 모여 어떠한 사회에 공정한 법칙을 만든다고 가정하고 이 사람들은 본인이 어떤 지위를 가졌는지 모른 상태에서 공정한 법칙을 만든다고 한다. 즉, 자신이 남성인지 여성인지 백인인지 흑인인지 부자인지 가난한 자인지 종교와 성격까지 포함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공정한 법칙을 만든다고 한다면 서로가 합의 할 수 있는 공정한 법칙을 만들 수 있다고 롤스는 말했다. 각자의 조건과 입장이 다르면 합의점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 모두가 같은 입장이고 아무도 사적 이익에 유리한 원칙을 세울 수 없다면 공정한 합의와 협상의 결과로 정의의 원칙이 도출된다는 것이 롤스의 주장이다. 롤스의 주장을 듣고 나서 ‘자신이 상위층에 속할지, 하위층에 속할지 모른다면 어떤 소득 분배가 정당하다고 생각하고 어떻게 그게 공정한 법칙이 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롤스 역시 이에 대한 답변을 내놓았다. 롤스의 답변은 ‘원초적인 상태의 나는 하위층이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 때문에 하위층을 배려하는 선택을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따라 앞서 이야기했던 가상 실험을 전제로 사회의 공정한 법칙을 만든다고 했을 때 롤스는 ‘공공정책의 목표는 사회 최빈곤층의 복지를 증가시키는 것이 되어야 한다.’라고 결론 내렸다. 이처럼 롤스는 사회적 약자에게 생기는 이익을 중요시했으며 가상 실험을 통해 우리가 만들어야 할 원칙을 ‘왜’ 사회적 약자를 위해 만들어야 하는지 깨닫게 해주었다.
그러나, 다른 의견을 주장하는 또 한 명의 철학자가 있었는데 ‘로버트 노직’이라는 사람이었다. 노직은 ‘로크’라는 철학자의 자연권 즉, 소유권의 개념에 주목했다. 인간 스스로 자신의 소유물과 신체를 처분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의 상태를 누린다는 자연권을 토대로 ‘개인의 재산은 절도나 강제로 얻은 것이 아닌 한 절대적으로 보장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 정부가 소득 재분배를 위해 사회 구성원들의 소득을 옮기거나 변화시켜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우리는 파이 한 조각 잘못 썰었다고 다시 썰고 있는 사람의 곁에 있는 어린아이가 아니다.”라고 말한 것을 보면 그가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지 잘 드러나 있다.
롤스와 노직의 의견 충돌은 이뿐만이 아니다. 우리가 태어나면서 선천적으로 지니게 된 재능을 바라볼 때에도 두 사람은 다른 의견을 주장했는데 롤스의 주장은 “타고난 재능은 우연의 산물이다. 배타적인 소유권이 아니라 사회 공동의 자산이다. 타고난 재능으로 사회적 약자의 처지를 개선하는 데 노력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반면 노직의 주장은 “타고난 재능이야말로 개인의 소유권이다. 재능 있는 개인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이익을 누리기도 한다.”라고 말했다.
이 둘의 대립되는 의견을 들은 나는 생각에 잠겼다. 정의와 자유를 챙기면서 둘 다 틀리진 않은 의견들을 냈었지만, 롤스의 의견은 너무 도덕적이고 노직의 의견은 원칙적인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나는 원칙적인 것을 좋아해서 영상을 보는 동안 노직의 편에 서서 응원했다. 무엇보다 롤스의 주장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롤스의 주장대로라면 남을 돕는 행위, 사회적 약자를 돕는 행위가 원칙으로 바뀐다는 것인데 배려와 도덕이 법칙으로 되어버리고 정부가 개입하여 돈 많은 사람들의 돈을 뺏어 약자에게 나누어 준다는 것이다. 나는 이 의견에 극구 반대한다. 물론 롤스의 주장도 정의와 자유가 포함되어 있지만, 돈이 많은 사람들은 땅을 파거나 하늘에서 떨어진 돈을 얻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여 돈을 얻어낸 것이다. 설령 부모님의 돈이라 하여도 부모님의 시간과 에너지를 할애하여 자신들의 미래를 위해 마련한 자금이다. 돈이 없다면 본인들이 벌어야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 아닌가? 그리고 배려와 도덕이 원칙이 되어버린다면 그것을 배려, 도덕이라고 칭할 수 있는 건가? 당연히 가난사람, 사정이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사회주의의 부도덕성에 대한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 부가 재분배 되는 것은 냉정하게 말하자면 돈이 없는 누군가를 위해 돈이 많은 누군가의 돈을 일부분 강제로 가져가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에 대한 거부감, 괴리감을 느낀다.
본론으로 돌아와 ‘정의와 자유의 차이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하자면, ‘정의와 자유는 서로 대등하고, 서로 없어서는 성립이 될 수 없다. 마치 한 짝의 신발처럼 말이다. 하지만, 존 롤스와 로버트 노직의 의견을 가져와 자유주의적 정의관에 대한 둘의 의견 중 누구의 의견에 더 동의하냐를 묻는다면 로버트 노직에 투표할 것이다. 돈이 많은 사람의 돈을 재분배하여 돈 없는 사람에게 주는 사회 보다 개인의 재산은 절도나 강제로 얻은 것이 아닌 한 절대적으로 보장받는 사회에서 살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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