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18일 수요일 오전, 추석 다음날. 공휴일이니 무리개미 한 번 가보기로 신청해놓았습니다.
아침9시까지 가려면 7시에는 일어나야 하는데, 세연이가 며칠 전 드디어 두발 자전거에 성공해서 매일 세시간씩 타다보니 깨우기가 망설여집니다. 결국 추석음식으로 받아온 전, 김치, 밥을 한데 넣고 숟가락 챙겨서 넣었습니다. 8시에 깨워서 세수만 하고 출발했습니다.
지하철도 버스도 아주 한산하고 도로에 차가 없어서 40분만에 도착했어요. 밥은 버스 환승을 기다리며 맛있게 먹었습니다. 이름표가 많았는데 14명이나 모이신다고 해요.
임소현 개미님을 2회 숲의향연 이후로 다시 만났어요. 주일학교 교사로서 여름캠프 갔다가 오시느라 숲향 당일에 엄청나게 화려한 온갖 머리끈과 페이스페인팅을 하고 나타나셨지요. 뒤풀이자리에서 세연이랑 민규, 두 초등학생의 엄청난 텐션을 감당하셔서 감탄했었는데 다시 만나서 반가웠어요! 오늘은 평소 모습 그대로 오셔서 하마터면 못알아볼 뻔했답니다^^ 숲향때 인사하셨던 가족, 유진군과 어머니 임선영님도 다시 만났어요. 조경비평으로 석사를 한 어머니가 잊고 지내던 숲과 나무를, 아들이 먼저 노을공원에 가는 바람에 다시 찾게 된 멋진 이야기였어요^^
노고시모는 일단 인원이 다 모이면 서로 자기소개부터 합니다. 14명이나 되는데 빨리 대충 소개하고 일하는 것도 안됩니다. 추석연휴에 노을공원에 온 이상한 사람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각자 자세히 소개해야 합니다. 노고시모는 존재의 소중함을 생각하고 일의 과정을 찬찬히 다 밟지요. 일하러 왔다가 끝나면 헤어지지만, 시작 전에 서로를 한 번이라도 같이 익히고 나면 참 좋은 사람들을 만난다는 뿌듯한 기분이 들어요.
정세연, 강고운(모녀) 김한아, 이지연, 박아름송이, 초별, 조준영, 이유경(커플) 유진, 임선영(모자), 이찬희, 구도희(커플), 이지송, 임소현 님입니다. 이지송님은 앞으로 노고시모에서 활동가로 일하실 예정이래요. 캐비넷에 이름표가 붙었어요. 금방 또 뵐 수 있겠어요. 초별님은 노고시모에서 초창기부터 활동하셨고(백수건달이셨겠어요^^) 환경연합 등에서도 오래 일하셨다고 해요. 사회적협동조합 한강 염대표님도 잘 알고 계셨어요. 오늘은 따릉이를 타고 오시고 얼음물을 준비해주셨는데, 초별님의 경험 덕에 오늘 여러 사람 목숨이 살았습니다!
유진님은 노을공원에서의 경험을 미국 농무부에 에세이로 제출해서 농무부가 제공하는 캠프에 무료로 다녀오셨다고 하네요. 우와~ 노을공원까페에 공개해주시면 매우 감사하겠습니다! 노고시모의 진정성은 세계시민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점이 있을거예요^^ 그간에 어느 개미는 노르웨이에 교환학생 다녀오시고, 졸업도 취업도 하시고, 다들 각자의 인생을 쌓아가면서도 어떻게든 시간을 내어 또 노을공원에 오시는 소중한 분들이었어요~
작업은 주차장에서 집씨통을 털어 마대에 넣어 노을공원 사면에 두고, 나무자람터에서는 어느 정도 자란 나무들을 캐와서 두 종류의 나무들을 노을집씨정원으로 이름지은 곳에 심는 일입니다. 묘상에서 나무를 캐자니 참나무뿌리가 깊어서 쉽지 않았어요. 10여 명이 함께 캤는데도 꽤 오래 걸렸습니다. 중간에 수박과 계란을 먹어가면서 겨우겨우 다 캤습니다. 이제 아까 집씨통어린참나무를 가져다 둔 사면으로 다시 갑니다.
덕님이 오늘은 낭떠러지에다가 심는다고 하시더니 정말로 낭떠러지였어요. 경사면이 아니고 낭떠러지. 서있지도 못할 곳에 어떻게 나무를 심나 했더니, 일단 계단을 만든다고 해요. 흙을 긁어내려서 2단으로 계단을 만들고 아랫단에는 서고 윗단에다가 아주 어린 나무와 조금은 큰 나무를 적절히 심는 거죠. 일단은 덕님이 시범을 보여주셨어요. 그렇게 하면 될 것 같기는 한데, 이런 방식을 생각해낸 그간의 경험이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14년간의 경험과 지식이 없었다면 낭떠러지에 나무를 심는 일은 감히 시도하지 못할 거예요.
일단 큰 삽으로 흙을 긁어서 2단으로 계단을 만듭니다. 생각보다 흙은 부드러웠어요. 철사도 풀뿌리도 많지만 늘 그렇지요. 작은 나무는 한 20그루, 큰 나무는 한그루 심었더니 그만 하래요. 진짜 많이 남았는데...덕님이 오후 내내 하면 금방 한다고 하셨지만, 혼자 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 같고 일을 하다 만 것 같아서 죄송했어요. 결국 초별님과 이지송님은 내려가서 좀 쉬다가 다시 올라오겠다고 하셨어요. 저도 마음은 함께하고 싶었는데 이미 지친데다 세연이한테 끝나면 <녹기전에>에 간다고 말해둔 바람에 다시 가지는 못했어요. 점심은 김성란 박사님이 우동을 끓이시고 쯔유를 붓고 해서 컨테이너에서 만드셨어요. 초별님과 지송님은 드시고 덕님이 드실만한 음식을 들고 다시 노을집씨정원으로 올라간다고 하셨어요. 지금이 오후 5시인데.. 지금쯤은 끝나셨을까요? 정말 오후 내내 더웠는데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난지천공원을 지나서 버스를 기다려 7016번을 타고 공덕동쪽으로 갔습니다. 40분정도 버스를 타고 용강초등학교 앞에 내렸어요. 가다보면 살짝 뒷길에 간판없는 정말 작은 가게가 나와요. 여기구나..입구 앞에 아이스크림 모형이 없었으면 지나쳤을 것 같아요.
나무문을 열고 들어가니 2달 전 숲의향연에서 뵈었던 멋진 수염의 녹싸님이 서있으셨어요. (녹기전에 사장=녹싸) 가게 안 곳곳에 위트가 가득해요. 하나하나 읽어보면 너무 재미있어요. 레몬생강맛, 로투스맛을 골라서 먹어봤는데 정말 맛있었어요^^
저는 숲향에서 녹싸님이 너무 멋있게 말씀도 잘하시고 그날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나게 많은 양의 젤라또 후식을 무료로 다 주시길래, 녹싸님이 돈을 많이 버시는 부자일 거라고 혼자 상상했어요. 매장도 배스킨라빈스마냥 넓을 줄 알았답니다. 여러곳에 기부도 많이 하신다고 하는데, 녹싸님도 사실 소상공인이셨던 거예요. 매장은 세 명이 서있으면 꽉 찰 만한 크기였어요. 판매대도 작고 작업장도 작아보였어요.
저의 흔해빠진 오해가 부끄러웠어요. 사장님은 돈을 많이 버니까 나누기도 남보다 쉬울 거야라는 뭐 그런 생각이요. 게다가 오늘은 김성란 박사님께서 굳이 꼭 노을공원 이름으로 녹싸님이 등록해놓은 쿠폰이 있으니 그걸 사용하는 것이 녹싸님을 위한 일이라고 하셔서.. 결국 저는 가격도 모르고 무료로 먹었습니다.
매장이 이상해요. 간판도 없고 가격표도 어디있는지 잘 모르겠고, 간판이 시각을 알려주는 디지털 시계예요. 간판이 시계라니. 무얼 말하는 걸까요.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는 이야기일까요?
삶의 열정이 다 닳기 전에, 흔한 중년 아줌마가 되기 전에, 저 자신을 잘 다듬어야 할 것 같아요. 그냥 살지 말고 잘 살고 싶은데, 쉽지는 않아요. 그래도 오늘도 노고시모에서 휴일을 보내는 멋있게 이상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서 행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