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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2 강 - 般若品- 8
善知識아
智慧로 觀照하면 內外明徹하야 識自本心하리니
若識本心하면 卽本解脫이오
若得解脫하면 卽是般若三昧며 卽是無念이니
何名無念고 若見一切法하야도 心不染着하면
是爲無念이니 用卽徧一切處하되 亦不着一切處하고
但淨本心하야 使六識으로 出六門하되
於六塵中에 無念無雜하야 來去自由, 通用無滯하면
卽是般若三昧며 自在解脫이라 名無念行이어니와
若百物을 不思하야 當令念絶케하면 卽是法縛이라
卽名邊見이니라
善知識아
悟無念法者는 萬法盡通하며 悟無念法者는
見諸佛境界하며 悟無念法者는 至佛地位니라
***
반야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육조스님의 법문이지만,
또 뒤에 제자들이 법문을 모아서 편집을 하면서
막연하게 어디까지의 법문 내용을 자르고
한 것이 아니라, 그 주제가 계속 분명하게 있어서
그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쭉 잃지 않고 내려오는
그런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상당히 말은 그렇게 다듬어지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어떤 형식은 격식을 잃지 않고 있다 싶은 생각이 듭니다.
善知識(선지식)아
智慧(지혜)로
觀照(관조)하면
內外明徹(내외명철)이라 그랬어요.→
반야가 智慧니까요.
그래서 지혜로서
觀照하면. 이
內外明徹이라는 말은
禪家(선가)에서 잘 쓰고,
또 열반하신 성철스님이 잘 쓰시던 말인데,
내외명철이라→ 안팎이 아주 환하다.
환해도 이 徹자는 사무칠 철자니까
어디에 남겨놓고 미진한 구석이
조금이라도 있고 한 것이 아니고,
아주 시원스럽게, 어느 한 구석도
어두운 구석이 없이 완전히,
그늘이라고 하는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을 아주 밝음을 뜻하는 것이지요.
깨달음의 지혜로서 비춰볼 것 같으면,
內外明徹→
內=
내 개인의 문제이고,
개인의 인생의 문제라면.
外= 나 이외의
어떤 다른 사람의 문제. 또는 세상사.
삼라만상에 관한 현상의 내면. 이런 것 까지,
內= 나의 문제.
外= 나 이외의 문제. 이렇게 보면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 공부도 어쭙잖게 하는 사람들에게
제일 문제되는 것이, 세상사.
또는 바깥일에 너무 모르고 어리석은 것.
이것이 늘 문제로 등장을 하는데,
제대로 깨달은 사람.
제대로 지혜를 터득한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지요.
아무리 익히지 않았다 손치더라도
이치는 환하게 보이니까요.
이치에 昧(매)하질 않는 것이지요.
이치가 안 보인다면 그것은 제대로
깨달은 사람이 아니고,
제대로 지혜를 이룬 사람이 못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여기서 지혜로서 관조할 것 같으면
내외명철이다.
“理에는 밝은데, 事에는 어둡다.”
그런 말을 잘 핑계 삼아 하는데,
그것은 정말 핑계지요.
이에도 밝고 사에도 밝아야
그것이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처음부터 그런 것을 다 갖추기는 어렵지만요.
제가 좋아하는 徒然草(도연초) 라고 하는
아주 작은, 일본스님이 쓴 책이 있는데,
일본 교과서에도 등장 한다고 하는
1400년경에 스님이 쓴 책인데요.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젊은 스님이 ‘훌륭한 법사가 되어야 되겠다.
’하는 마음을 먹고는 나중에 공부를 해서 법사가
되어 놓으면...
그때는 제일 고급 교통수단이
말을 타고 다니는 것이니까
말을 타고 다녀야 되겠다고 생각을 해서,
말 타는 걸 배워야 되겠다 싶어서
공부는 뒷전이고 말 타는 것부터 배워서...
그러니까 이사에 어둡지 않으려고 아마 그랬던
모양입니다.
“理事를 겸한다.” 그런 말을 써요.
“理事(이사)를 兼(겸)했다.”
“禪敎(선교)를 겸했다.”
이런 말을 불가에선 잘 쓰는데,
말 타는 것은 事가 되겠지요.
事의 문제. 말 타는 걸 배우고
그 당시 일본사회적 분위기가 그런지,
말을 실컷 배워 놓으니까 말 타고 법회도 하고,
그러다보면 법문도...
또 사교계에 나가서 노래도 한번 불러야 되는데,
노래를 못 부르면 그것도 또 법사 체면이 아니다.
그래서 또 노래 부르는 것을 배웠다는 거예요.
그러다보니 세월이 다 가버리고
정말 법사가 해야 할 법에 대한 공부는
하나도 모르더라고 하는
그런 이야기가 도연초에 있어요.
제가 참 그걸 읽고는...
제가 제일 많이 읽은 책이 아마 금강경
다음에 도연초일 겁니다.
거기엔 참 좋은 말 많아요.
아주 짤막짤막한 말들인데,
‘할까 말까 망설여지는 일은 대개 안 하는 것이 좋다.’
그런 말...
거의 그걸 실천합니다. 할까 말까 망설여지는 일.
그럴 때, 판단이 안 서지면 딱. “도연초”
그 말을 떠올려 가지고 아, ‘안 하는 것이 좋다.’
하더라.
그러고 안 하는 경우가 많아요. 사실 그렇거든요.
확신이 안서서 할까 말까 망설여지는 일은
대개의 경우. 안 하는 것이 훨씬 나아요.
안 하려고 했는데 하다가 이렇게 됐다 하던지,
오늘 안 나오려고 했는데 나와 가지고
문제가 생겼다든지, 망설여질 때는
대개 안 하는 것이 좋아요.
거의 그렇다고요. 보면...
內外明徹(내외명철)해야 되는 것이.
사실 궁극적으로 이것이 목표인데,
理에는 밝고. 事에는 어둡다.
또 事에 너무 밝고, 理에 어두우면
그것도 문제지요.
그래 우리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와 사를 좀 겸해서,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
理라면,
어떤 이치. 인생의 문제. 삶의 문제.
이런 것이지요. 사실은...
지금 우리가 좀 쉽게 표현하자면,
어떤 삶의 문제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대한 그런 어떤 이치.
원론적인 것. 이런 것이고,
事라고
한다면 사는 방법이겠지요. 사는 방법.
직장을 어떻게 가질 것인가?
우리가 어떻게 충실하게 직업인이 될 것인가?
사업을 한다 하면, 사업에 아주 투철하게 밝다 던지,
최소한도 자기가 하는 사업에는 누구의 추종도
불허할 만치, 그만큼 잘 알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사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는 방법에만 밝고, 정작 주체. 사람이 사는데
사는 방법에는 밝은데, 사람이라고 하는 그 자체.
그 자체에 대해서는 어둡고 모른다면,
주객이 전도가 된 상태지요. 어떤 데는 보면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해놓지요.
아무리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했다 하더라도,
인생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으면
설사, 사회적으로 업적을 많이 쌓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제로(zero)의 연속에 불과한 것입니다.
제로가
두개. 세 개. 네 개. 열개. 스무 개가
연속 되어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끝내 제로에 불과 하지요.
그러나 제로가 하나 둘만 있다 하더라도
거기에 1 이라고 하는
實數(실수)가 앞에 놓이게 되면,
그것은 열도되고, 백도 되고, 천도된다는 것이지요.
제로는 백 개. 천개가 아무리 나열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끝내 제로일 뿐이다.
이런 식으로 표현을 해요.
인생 그 자체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그 외에 어떤 사는 방법상의 성공은
그것은 허망하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정말 사람의 삶의 문제.
존재의 원리라고 할까? 삶의 실상이라고 할까? ←
이런데 눈을 떠야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야 사는 보람이 있다.
그 외에는
아무리 큰 성공을 거뒀다 하더라도
그것은 정말 허망한 것에 불과 하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內外(내외)가 明徹(명철)해서...
내외명철을 이야기하려면 바로 그런 것이지요.
사는 방법상에 성공하는 것과,
삶의 그 자체에 대한 그런 깊은 이해.
그것을 뭐 道라고 할까요? 법이라고 하던지,
인생이라고 하던지, 그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內가 되겠고,
그 외에 사는 방법은 外가 되겠고, 그렇겠지요.
識自本心(식자본심)하리니→
명철해서 자기의 본심을 꿰뚫어 알게 될 것이다.
若識本心(약식본심)하면→
만약 본심을 알 것 같으면,
卽本解脫(즉본해탈)이오→
그것이 곧 본래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해탈이다.
하는 것입니다.
본해탈 이라는 말은
본래로 우리는 해탈이 되어 있다는 말 이예요.
성철스님
법문 속에 이런 것이 많이 있지요.
거의 그런 견해에서 벗어나지 않고
이야기를 하는 데,
우리는 본래 해탈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따로 해탈 하는 것이 아니고,
해탈 되어 있는 것을 우리가 누리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할 뿐이라는 것이지요.
본해탈.
본심을 아는 것. 그것이 本解脫입니다.
우리가 본래가지고 있는
마음의 세계라고 하는 것은
이것을 한마디로 해탈이라고 이야기를 했지만,
해탈이라는 말로는 부족하지요 사실은...
이 본심의 세계라고 하는 것은
정말 어마어마한 세계입니다.
卽本解脫(즉본해탈)이오
若得解脫(약득해탈)하면→
만약 해탈을 얻을 것 같으면,
卽是般若三昧(즉시반야삼매)다→
곧 그것이 즉시반야삼매다.
즉시반야삼매 라고 하는 것은,
앞에 처음부터 지혜로 관조하면 했기 때문에
그것이 반야로 관조하면 하는 말 하고 같은데,
여기 삼매 라고 하는 것을 붙인 것은,
“온통 반야의 삶이다.” 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에서 열까지 전부
“지혜의 삶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삼매지요.
三昧라고 하는 것은
전 생활이 반야의 생활이 됐다는 것입니다.
卽是無念(즉시무념)이니→
그걸 또 다른 말로하면,
전부 뜻은 같은데 말을 여러 가지로 했고,
또 경전 상에서 여러 가지 다른 표현이
따지고 보면 하나라는 거예요.
卽是無念(즉시무념)이니→ 곧 무념이니
何名無念(하명무념)고→
무엇을 이름 해서 무념이라고 하느냐?
若見一切法(약견일체법)하야도→
만약에 일체법. 모든 현상을 본다 하더라도
그 현상에,
心不染着(심불염착)하면→
마음이 거기에 물들지 않으면...
우리는 어떤 사물을 보면, 보는 족족 물들지요?
싫다고 하는 것. 그것 역시 물든 거예요.
좋다고 하는 것도 말할 것 없이 물드는 것이고,
똑 같습니다. 좋다고 해서 집착하는 것만
물드는 것이 아니고, 싫다고 마음으로부터
거부하고 배제하는 것도 그 나름의 물이예요.
좋다고 하는 것만큼 똑같은 물입니다.
마음에 染着하지 아니할 것 같으면,
是爲無念(시위무념)이니→ 이것이 무념이다.
그러니까 인생을 구름에 달 가듯이, 술렁술렁
집착 없이 지나가는 것이지요. 그것이 무념이지,
목석처럼 된 상태가 무념이 아닙니다.
일일이 다 감지하면서, 거기에 염착하지 않는 것이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자꾸 이렇게 들으면,
편안한 상태일 때는 어느 정도 납득이 됩니다.
그리고
또 어떤 상황에 부딪치더라도,
이런 것이 우리 마음의 밭에 종자가 뿌려져 있어서,
그것을 耳根種子(이근종자)라고 그러지요.
귀뿌리로 지나간 종자에 불과 하지만,
가슴에 크게 와 닿는 그런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래도 그것이 상당히 효과가 있을 때가 있다고요.
心不染着.
마음에 염착하지 않는 것.
그것이 無念이다. 물들지 않는 것.
用卽徧一切處(용즉편일체처)하되→
우리가 마음을 쓰지요? “무념”이라고.
“무념”이라고 하지만,
정작 쓸 때는 일체처에 두루 해요.
사용할 때는... 곧 일체처에 두루 하지만.
亦不着一切處(역불착일체처)하고→
또한 일체처에 집착하지 않고.
온갖 좋은 것 다 갖고,
가질 것 다 가지고,
할 것 다하고,
소유 할 것 소유 하지만,
그러면서
거기에 집착 하지 않을 수 있으면,
그것 참 잘 사는 겁니다.
정말 소유 할 것을 소유 하면서,
거기에 집착 하지 않는 것.
집착 하지 않으면서 소유 할 것 소유 하고,
그래서 언제든지 나로부터 떠나더라도...
명예가 됐든 재산이 됐든 간에 나로부터 떠나더라도,
거기에 대해서 아무런 동요가 없을 수 있다면,
그것이 물들지 않는 삶이지,
처음부터 하나도 안 갖고, 물들지 않았다면,
그것은 별 가치 없습니다. 사실은...
가지고 있으면서 물들지 않을 수 있는 것이
대단히 힘든 일이지만,
그것을 늘 우리 마음속에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준비를 항상 하라는 것이지요.
亦不着一切處에 집착하지 않고,
但淨本心(단정본심)하야
使六識(사육식)으로
出六門(출육문)하되→
다만 본심을 깨끗이 해서, 청정하게 해서
육식으로 하여금...
육문= 육근이고,
於六塵中(어육진중)에→
육진=육경이라고도 하는데,
색. 성. 향. 미. 촉. 법.
어떤 대상에 대해서 내가 감지할 수 있는
여섯 가지 문. 또는 육근.
그 관계 속에서 어떤 인식 작용이 거기에 일어나지요.
그것이 육식이 됩니다.
바로 이 세 가지 육근. 육진. 육식. 12처. 18계.
이 세 개를 합쳐서 3×6=18. 18界가 됩니다.
그러니까
인식하는 것. “눈” 하면
눈의 대상은 사물.
거기서 눈의 인식작용. 그래서
眼根(안근).
色塵(색진).
色境(색경)이라고도 하고,
색성향미촉= 색경.
眼識(안식). 눈의 인식작용.
“안이비설신의”하면,
그 다음에 “색성향미촉법”
이렇게 대상이 되어서, 거기서 일어나는
인식작용이 있으니까 그래서
18계가 되는데, 그 18은 전부가 하나의 세계지요.
領域(영역)이라는 말을 써요. 그래서
“눈의 영역”
이러면 눈과, 눈이 보는 대상, 사물과
그리고 그 눈과 눈의 대상 사물과의 사이에서
활동하는 인식작용까지 합해가지고
“눈의 영역”
그래요. 또는 眼界(안계)라고도 합니다.
세계라고 하는 界자를...
영역이라고 하는 말이 아주 좋은 표현 이예요.
이런 분류는
불교에서 아주 세밀하게 잘 되어있어요.
어떤 철학이나 어떤 종교에서도
우리 현상. 그 현상을 인식하는 인식의 주체와
그 관계에서 일어나는 인식의 활동.
이런 것들을 분류해 놓은 것은 어떤 종교에서도
그렇게 세밀하게 해 놓지는 못했습니다.
육식으로
하여금 육문 에서 나오되,
於六塵中(어육진중)에서
無念無雜(무념무잡)하야→
육진에 무념무잡이라.
거기에 染着. 염착하는 것도 없고,
잡념. 무념무잡 이라고 하는 것은
거기에 뒤섞여가지고,
“거기에 젖어든다.” 이 말입니다.
물들지 아니하면 어떻지요? 거래자유지요.
來去自由(래거자유)다.→ 오고가고 하는데 자유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이렇게 시원스럽게 뛰어날 수 있으면.
집착하지 않고 시원하게 뛰어나고
매이지 않을 수 있다면, 참 거 대단한 겁니다. 사실...
결국은 그렇게 살아야
좀 사람이 사는 보람이 있는데
너무 매여가지고 그렇게 사는 것이,
스스로 생각해도 참 불쌍할 때가 있지요.
너무 매여가지고...
시원하게 그야말로 바람이 그물을 뚫고
시원하게 지나가 버리듯이...
거래자유해서
通用無滯(통용무체)하면→
통용무체 라고 하는 것은
“통해서 쓰는데, 체함이 없다.”
“막힘이 없다.”
이것은 아마 우리는 지금 가물가물하게
이렇게 어렵게 짐작은 하지만,
육조스님 같은 경우는 아주 시원하게
맛을 보면서 하신 말씀일 거예요.
래거자유하고 통용무체하면
卽是(즉시)→ 이것이
般若三昧(반야삼매)다 이겁니다.
그대로 반야의 삶이다. 지혜의 삶이다 이겁니다.
삶 전체가 반야다 이겁니다.
그것이 반야삼매지요.
自在解脫(자재해탈)이라→
자재요 해탈이라 그래도 좋지요.
자유자재가 해탈이고,
해탈은 곧 자유자재니까요.
名無念行(명무념행)이어니와→
이것을 무념행 이라고 한다.
다른 말로하면 “생각 없이 행하는 것이다.”
思量分別(사량분별)이 끊어졌다는 뜻이 아니라,
염착이 없다. 물들지 않고 집착이 없는 그런 행이다.
그 뜻이지요.
금강경에서 無住(무주)라고 그러지요?
“妙行無住分(묘행무주분)”
그런 말이 있는데, 아름다운 행위는
“염착하지 않는다.”
“執着(집착)하지 않는다.”
“머물지 않는다.”
그랬어요. 그러니까 아름다운 행위라고 하는 것은
어디 물들지 않고, 아주 시원스럽게 뛰어난 상태.
그것을 “아름답다.” = “묘행” 이라고 표현합니다.
若百物(약백물)을
不思(불사)하야→
만약에 온갖 사물을 생각하지 아니해서,
當令念絶(당영염절)케하면→
마땅히 생각으로 하여금 끊어지게 한다.
우리가 하루가운데 접하고 있는
어떤 사건. 사물. 이런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기 백물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하루 중에 접하고 있는
모든 사람과 사건과 사물.
이런 모든 것들을 표현할 수가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하지 아니해서...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하지 아니할 것 같으면,
卽是法縛(즉시법박)이라→
어느 정도 상태가 된 것이라고 할 수는 있어요.
어떤 법을, 뭐라고 할까? 체득했다고 할까?
법에 대한 상당한 知見(지견)이 생겼다고 할까?
그렇게 표현할 수가 있는데,
그것은法縛이다. 이겁니다.
法縛.
법에 대한 束縛(속박).
이것은 상당히 단계가 높은 것입니다.
束縛이라고 표현했지만,
그러나 상당히 단계가 높은 것입니다.
법에대한 束縛이다.
卽名邊見(즉명변견)이라→
치우친 소견이다.
거기에서 마저도 벗어나야 된다는 것이지요.
법에 대한속박마저도...
진리가 좋고 깨달음이 좋기는 해요.
그렇지만 “깨달음이 좋다.” 라고 하는
거기에 주저앉아 있으면,
그것은 이름이
“깨달음에 대한束縛이고
법에 대한束縛이다.”
그것은
“치우친 소견이다.” 이겁니다.
그것마저도 벗어나버린 상태. 그것을
中道(중도)라고 할 수가 있겠지요.
“변견.” 변견이라는 말을 禪家(선가)에서 잘 쓰지요.
“치우친 소견.”
善知識(선지식)아
悟無念法者(오무념법자)는→ 무념법을 깨달은 사람은,
萬法盡通(만법진통)하며→
만법을 다 통해요.
어느 하나 “남겨놓고 통하는 것이 아니다.” 이겁니다.
아까 내외명철이라고 말을 했는데
안팎으로 다 통 하는 것.
이것이 萬法盡通 입니다.= 내외명철.
무념법을 깨달은 사람은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디에는 막히고,
어디에는 통하고, 그것이 아니지요.
오무념법자는
見諸佛境界(견제불경계)하며→
모든 깨달은 사람의 경계를 다 보며,
무념법을...
깨달은 사람이 바로 부처이고,
자기가 부처라면 다른 부처의 경계까지도
다 볼 수 있어야지요. 당연히...경지가 같으니까요.
부처 佛자의 의미가 석가모니 같은
그런 역사적인 아주 위대한 스승을 지칭할 때가
물론 있습니다마는,
이런 때는
“諸佛(제불)”
“제불” 모든 諸자가 붙었을 때는,
불교역사에 있어서, 또는 그 이전이라 하더라도,
정말 제대로 깨달은 사람이라면,
그것을 뭉뚱그려서 그냥 “제불” 이라고 그래요.
대승경전의 성립은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 5~700년경 까지 내려오면서
결집이 되는데 그런 대승경전을 결집할만한 사람들은
전부 부처님의 깨달음 못지않은
그런 깨달음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깨달음을 체험하지 않고 어떻게 감히
부처님의 이름으로 경을 편찬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건 안 되는 일이지요.
부처님의 이름으로 자신 있게 경전을 편찬할 수 있다면
깨달음이 석가모니부처님하고 똑 같기 때문에,
5~600년경에도 경전을 부처님의 이름으로
결집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 과정에서 많은 깨달으신 분들이 계셨는데,
그런 분들을 뭉뚱그려서 그냥 “제불”이라고
하는 겁니다. 저는 늘 그렇게 생각이 들어요.
대개 이 “제불”이라고 하는 말은
대승경전상에 많이 나타나거든요.
그러면 대승경전이 5~600년경에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그쯤에서 주로 많이 결집이 되었는데요.
그 동안에 1년에도 깨달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 오랜 세월동안 많은 깨달은 분들이 계셨는데,
그 분들을 어떻게 대접해야 좋겠어요?
그래
경전상에서 “제불”이라 이렇게 표현하지 않았나?
제가 아마 그 당시에 경전을 결집한다 하더라도,
그런 표현을 썼을 것이다. 하는 생각이 들어요.
悟無念法者는
至佛地位(지불지위)니라→ 처음부터
悟無念法者(오무념법자)는
萬法盡通(만법진통).
悟無念法者는
見諸佛境界(견제불경계).
悟無念法者는 至佛地位(지불지위)→
무념법을 깨달은 사람은 부처의 지위에 이뤘다.
無念爲宗(무념위종)이라.
무념으로서 으뜸을 삼는다.
하는 그런 표현을 선가에서 잘 쓰지요.
無念이라고 하는 것은 목석처럼 됐다는 뜻이 아니라,
“妄念(망념)이 없다.”
“雜念(잡념)이 없다.”
染着(염착).
생각이 어떤 현상에 “물들어 있지 않다.”
물들고 집착하지 않았다는 그런 뜻이지,
아무것도 없다는, 정말 아무것도 없다는
그런 뜻은 아니지요.
“빈병”하면, 甁(병)이 비어 있다는 뜻이지,
“空甁(공병)”하면 병이 없다는 뜻이 아니거든요.
“無念(무념)”이라면 생각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잡념이 없다.”
그 마음의 세계 속에서 어떤 물들고 집착하는
그런 “잡념이 없다.”하는 그런 뜻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