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익은공파에서는 수백 년 동안 실존이었던 익은공 준(遵)의 생졸년을 충장공(忠莊公)과 부자(父子)관계를 성립시키기 위하여 세종 17년 1435년 5월 13일에 출생하여 성종 12년 1481년 7월 6일에 卒한 인물이라고 1998년에 편찬한 무인보(戊寅譜)에 기록하고 이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익은공 준(遵)의 백부(伯父)와 두 사촌형제가 이미 《고려사》 공민왕 22년(1373년) 3월의 기록에 등장하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준(遵)의 실제 생존 시기는 익은공파에서 현재 주장하는 연대보다 약 100여 년 앞선 시대였을 것으로 해석이됩니다.
새롭게 확인된 고려사 사료에 의하여, 진주 익은공파가 지난 300여 년간 제기해 온 주장은 모두 거짓임이 밝혀졌습니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 할 것입니다. 고려사의 기록과 은열공파 족보의 기록이 일치합니다.
▶ 고려사1373년 03월 기록
고려사 권121 列傳 권제34 효우(孝友)
정유가 왜구로부터 아버지를 구하다.
倭寇河東郡.
왜구가 하동군을 노략질하였다.
晉州人鄭任德
진주 사람 정임덕이(준(遵)의 백부)
嘗戍是郡,
일찍이 이 군에서 수자리를 살다가
※수자리(戍): 군역(軍役)으로 그 고을에 나가 적을 지키는 일
適, 被疾,
마침 병에 걸렸으므로,
子愈愻
아들 유(愈)와 손(愻)이 (준(遵)의 사촌)
擁父走避.
아버지를 부축하고 달아나서 피하였다.
賊追及之,
왜적이 추격하여 이르자
愈射殺數人,
정유(鄭愈)가 여러 사람을 활로 쏘아 죽이니,
賊不敢前,
적이 감히 앞으로 나오지 못하다가
忽一賊奮劍突進,
갑자기 한 적이 칼을 휘두르면서 뛰어나와서
剌任德頰.
정임덕의 뺨을 찔렀다.
愻以身蔽之,
정손(鄭遜)이 몸으로 그를 막고
且斬四人,
또 4인의 목을 베었으나
竟歿於賊.
끝내 적에게 죽었다.
事聞,
일이 알려지니,
拜愈爲宗簿寺丞.
정유(鄭愈)를 종부시승에 임명하였다.
▶진양정씨 은열공파 을사보(1785년)
(진주 익은공파가 충장공파로 옮기기 前의 족보)
▶ 진양정씨 은열공파 신축보(1901년)
▶ 족보 번역)
愈
유
初諱貽蔭
처음 이름은 이음(貽蔭)였다.
禮儀判書
예의판서(禮儀判書)에 있을 때,
恭愍王二十一年
공민왕 21년(1372년)에
備倭於河東府
하동부(河東府)에서 왜구를 방비하고 있었다.
倭寇乘夜猝至
어느 날 밤, 왜적이 어둠을 타고 불시에 들이닥치니
衆皆遁
무리가 모두 놀라 도망쳤다.
旣圖公病
기도공(旣圖公,정임덕)은 병을 앓고 계셔
不能騎馬
홀로 말을 탈 수조차 없는 형편이었다.
孤與弟愻
외로이 아우 손(愻)과 함께
扶擁而出
공을 부축하여 품에 안다시피 하며 겨우 탈출하니
賊追之
도적들이 그 뒤를 바짝 쫓아왔다.
公射殺數十人
공께서 활을 당겨 적 수십 명을 쏘아 맞혀 죽이시니
賊不敢前
적들이 감히 더는 앞으로 나서지 못하였다.
有一賊奮釣突進
이때 한 왜구가 갈고리를 휘두르며 돌진하여
刺版圖公頗惡
판도공(版圖公)을 바짝 위협하며 사나운 기세로 찔러오자
以身蔽之
공께서 온몸으로 그 앞을 가로막아 방어하시고
且斬四人
다시 적 네 명을 베어 쓰러뜨리시며
力戰却之
혼신의 힘을 다해 싸워 마침내 적을 물리치셨다.
愻竟沒於賊
그러나 애석하게도 아우 손(愻)은 끝내 적의 손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幸聞授公宗簿寺丞
이 참혹하나 장렬한 소식이 조정에 전해져, 공에게 종부시승(宗簿
寺丞)의 벼슬을 내리셨으니
載麗史及東國通鑑
이 충절과 효의 행적이 『고려사』와 『동국통감』에 깊이 기록되어 전해진다.
▶ 진주 익은공파가 충장공파로 옮겨간 이후 은열공파 족보기록
▶ 족보 번역)
遵
준
通政大夫 興海郡事
통정대부로서 흥해군사를 지냈다.
按乙巳譜
살펴보건대, 을사년(1785)의 족보에 이르기를,
有三子
세 아들이 있었으니,
和守、仲守、昌守
화수(和守)·중수(仲守)·창수(昌守)이다.
其十三世孫 重權
그들의 13세손인 중권(重權)이
作合譜序
합보의 서문을 지었는데,
乃松谷派也
이는 곧 송곡파이다.
其十五代世系
그 계통의 15대 세보(世系)는
明白可証
분명하여 충분히 고증할 수 있다.
而因僞誌
그런데 위조된 지문(誌文)으로 인하여
遷忠莊公派
충장공파로 옮겨갔으므로
故拔而不錄
이를 빼어 더 이상 기록하지 아니하였느니라.
▶ 충장공파로 옮겨온 後의 진주 익은공파 족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