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is De Bondy Lyon France-Korea Minhwa Arts Festival 2019,
지중해 연안을 끼고 시원하게 펼쳐진 앙티브 해안, 기원전 4세기경 건설된 고대도시, “코트 다 쥐르” 지역, 큰 요트항구를 가진 프랑스에서 가장 사랑받는 도시, 겨울철 휴양지이기도 한 이곳, 겨울철에는 우기가 있어 자주 비가 내린다, 이번 프랑스 여행은 「한국민화국제교류협회」가 기획한 열 두 번 째 국제展으로 <2019, 한국민화국제아트페스티벌> 전시와 함께 진행되었다. 그동안 활발하게 활동해온 한국민화국제교류협회의 해외展은, 미국 LA와 뉴욕, 캐나다, 독일, 중국, 베트남, 등 이며, 프랑스 전시만 6년째 이다, 파리 「메타노이아갤러리」에서 3년, 리옹 시립 전시관 「팔래 디 봉디」에서 3년, 전시를 연 이어 개최하였으며, 2020년 10월경에도 전시가 계획되어 있다.
「한국민화국제교류협회」가 주최하고 프랑스「바그꼬레엔느」협회와 리옹시 「한글학교」가 후원한 <2019, 한국민화국제아트페스티벌>전시회가 리옹시 시립전시관(Palais De Bondy)에서 11월 5일~ 11월12일까지 9개의 부스전과 회원전으로 140여점의 작품들이 전시되었으며, 이번 전시의 중요 프로젝트로 김용권 민화박사, 현 겸재미술관 관장의 민화 강의와 2일간의 민화체험을 「바그꼬레엔느」 협회와 리옹시 한글학교 후원으로 이루어졌으며, 교포들, 한글학교 학생들 현지 프랑스인들이 함께 참여하는 거대한 행사로 진행되었다. 프랑스인들에게 우리의 민화를 좀더 친숙하고 가깝게하여 우리 민화에 대한 이해를 돕는 한편, 교포들에게는 향수를 불러일으켜 조국에 대한 애국심을 유도하려는 계획이었다. 예상대로 뜨거운 반응을 일으키기에 충분했으며, 프랑스 현지인들과 교포들이 직접 민화를 배우고 싶다는 간청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번 전시와 함께 계획되었던 미술관투어를 프랑스 남동부지역, 아를과 앙티브, 니스, 지역을 주요 여행지로 결정 하였다. 「한국민화국제교류협회」 참가회원들로 구성된 우리 일행들은 예정대로 11월 6일(수) 기차를 이용, 2시간 30분 소요, 아를로 향했다.
네델란드 출신 반 고흐가 1880년 처음 그림을 시작, 파리로 이주 1888년 남프랑스 지역인 아를에 정착, 수많은 작품을 남기며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였지만 신경질환과 우울증으로 시달렸으며 결국은 자신의 귀를 자르며 정신이상 증세를 보여 병원에 입원했다. 이후 파리근교의 오베르 쉬르 우아르(Auvers sur Oise)로 이주해 작품 활동을 하였지만, 1890년 까마귀 나는 밀밭을 그린 이틀 후, 권총자살을 하며 짧은 화가의 인생을 마감 했다.
고흐가 유년기시절을 보내던 아를마을은 우리 일행들을 반기듯 겨울비가 촉촉이 내리고 있었다. 미리 준비하였던 우산과 우비를 입고 다녀야 하는 불편함은 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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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치 있는 옛 중세도시의 아름다음에 흠뻑 빠져 연신 카메라 샤타를 눌러댔다. 이미 유명한 관광지가 되어있는 고흐가 입원 하였던 정신병원을 찾았다. 1년 6개월의 입원 기간에 300여점의 작품을 남겼다고 한다. 고흐의 유명한 작품, <별이 빛나는 밤>소재가 되었던 론강의 다리와 노란색 까페를 작품으로 남겼던 장소를 찾아 우리 일행들은 따뜻한 아메리카노 커피 한잔을 마시며 잠시나마 고흐의 영혼과 소통을 했다.
11월 8일(금) 리옹시가 주최한 「국제현대미술비엔날래」展 관람, 그 다음날 11월 9일(토) 테제베 기차를 이용, 4시간30분 정도의 시간을 소요, 니스에 도착, 호텔에 여정을 풀었다. 프랑스 남동부의 앙티브 해안선 지대와 인접한 내륙지역, 시미에 언덕위에 위치하고 있는 붉은 오렌지색의 <빌라 제누아(Villa Genoie)>는 17세기 니스의 시장이었던 “귀베르 나타” 가 별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이탈리아식 건물을 마티스미술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피카소미술관 역시 앙티브 해안을 끼고 있다. 1946년 피카소가 이곳에 머물며 도자기작업을 했던 작업실을 미술관으로 꾸며놓은 곳 이다.
피카소가 19세 되던 1900년 프랑스로 유학, 무명시절 당대 미술계의 거장으로 활동하던 마티스를 만나면서 마티스를 정신적 멘토로 삼았다. 이후 두 사람은 예술적 영감을 주고받으며 각별한 인연을 이어갔다. 단순 명쾌한 선과 밝고 순수한 빛과 화려한 색조의 표현은 야생짐승 (Fauves)같다고 하여 야수파 화풍으로 불리었던 마티스가 예민하고 신중하며 냉정한 인격의 소유자라고 하면, 피카소는 입체파 양식으로 브라크와 함께 큐비즘(cubism)화풍을 이루며, 열정적이며 직감에 의한 그림을 표현 하였다. 20세기 미술의 거장, 피카소와 마티스는 폴세잔 이후 현대미술의 양대축을 이루며, 평생의 라이벌로 영원한 동지로서 일생을 보냈다.
샤갈미술관 역시 니스의 시미에 지구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1949년 니스의 부근 생폴드 방스에 거주하면서 칼베르 노트르담 성당 벽화를 그렸으나 <아가서>를 모티브로 한 작품들이 너무 선정적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하자 그와 절친으로 지내던 당시 문화부 장관이었던 “앙드레 말로(Andrè Malraux)”가 그의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 미술관을 설립하자고 제안하였으며, 대신 그의 작품을 국가에 기증하면 상속세를 면제해 주는 조건으로 샤갈미술관이 건립되었다. 그런 이유로 인해 니스의 샤갈미술관은 성서내용을 중심으로 그려진 인간창조, 노아의 방주, 등 구약성서에 관련된 작품들이 시리즈로 전시되어있다.
현대미술은 대략 19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를 의미한다. 근대미술 뒤의 미술을 의미하지만 그 경계는 모호하며, 현대미술의 시작을 인상주의 미술의 등장으로 부터 보는 연구자들이 많다.
고흐
고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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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 아를의 붉은 고추밭 1888년 켄버스에 유채.
과거 우리나라 미술계 역시 동양화단의 주류를 형성했던 중국의 강한 영향에도 불구하고 우리만의 풍토적 소재와 오방채색화(五方彩色畵)(고구려벽화, 신라의 단청문양, 고려불화, 조선의 민화) 그림으로 나름의 화풍으로 우리의 숨결이 베어있는 자생적 회화로 발전하였으며, 일제 강점기의 문화 말살정책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전통채색화로 명맥을 이어왔다.
고구려 벽화(무용총 수렵도)
일본에 소장된 고려불화, (포스터)
고려불화 (수월관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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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채색화 운동에 의해 평론가 최병식선생이 기획한 민화와 채묵전 표지
민화와 채묵전 속 표지
민화와 채묵전 참가자 명단.
민화작가 이규완, 나정태, 정하정
1960년대 한국적 문화모색에 이어 한국미술의 재정립 열풍이 우리나라 각처에서 일어났으며, 이러한 관심은 1970년대 수묵화(水墨畵) 운동에 이어 1980년대 채색화 운동이 고조되면서 한국의 채색화가 일색(日色), 일본그림의 잔재가 아니라 한국의 전통미에 근거한 색채미술로서 화려한 궁중화를 비롯하여 화조화 등, 서민들의 민화에 이르기까지 전통채색화인 민화에 뿌리를 두었다는 확실한 논거를 마련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90년대 미술계는 한국성 찾기 운동이 일어났으며, 미술계의 일각에서는 한국적이라는 용어가 잠시나마 사용되기도 하였다.
최근 우리나라 미술계에는 이른바 민화열풍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인사동이 온통 크고 작은 민화전시회로 가득하다.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한국의 민화가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이에 인사동 표구사, 화랑, 갤러리, 식당들까지도 그 바람을 타고 민화전시의 열기를 계속 이어나가려는 분위기이다. 몇 몇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을 미술한류라고 지칭하며 마치 미술계가 민화로 인해 되살아날 것 이라는 기대감을 표현하기도 했다. 어찌 보면 민화열풍의 시작은 19세기경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의 선교사들, 특히 일본 민예학자, 야나기 무네요시 등에 의한 한국적인 미술에 대한 관심이 고조 되었으며, 1960년대 미국에서 열린 조자룡의 한국 호랑이 전시회로 이어졌다고 볼 수 가 있겠다. 그러한 영향에 의해 1990년대 대부분의 고학력 주부들이 경제력을 앞세워 민화계에 등장하면서, 새로운 기류를 형성하게 되었으며, 민화 종사자들이 대거 확산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최근 정병모(경주대 교수)미국에서의 책거리展,등 해외에서 열린 민화 전시회 등, 고미술품 경매장에 민화가 등장, 고액의 판매 기록 등이 민화의 열기를 고조시키기에 충분했다.
「한국민화국제교류협회」 역시 2008년 한-독미술교류협회를 한국미협 전통미술 보존위원회 회원들로 구성, 창립하였으며, 2012년 교류회 총회를 거쳐 「한국민화국제교류협회」로 명칭 변경하였으며, 이번 해외 전시회가 열 두 번 째 해외展 이기도 하다. 하지만 민화의 열풍이 좋은 결과로만 지속되리라는 기대에는 민화의 종사자들이 대부분 전승미술에서 출발되었으며, 밑그림에 의존하는 것으로 타 미술장르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동양화의 북종화(北宗畵)계열은 밑그림을 그리고 그위에 실전의 그림을 그리면서 디테일(detail)한 부분을 표현 하는 방법으로서 밑그림을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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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채색화 화가들은 밑그림을 사용한다, 서양화의 스케치와 같은 방식으로 보면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밑그림은 본인 작가가 직접 사유한 내용이어야 할 것이다.
민화의 열풍이 계속 지속되려면 다양성을 추구하는 창의적인 민화에 대한 작업과 화론이 중요하다. 과거는 현존을 위한 창조물로서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그것이 결핍된것에 대한 보안물이든 아니면 시대적 요청이든 간에 소화된 과거의 정신적 산물들은 온고지신의 정신을 지니고 오늘의 관점에서 재해석 되어야 한다.
현재 민화계는 전승미술의 쏠림 현상으로 지나치게 기울어 있는 현상으로 볼 수 가 있으며, 이러한 민화계의 묘한 분단 상황을 타파하고 이를 전통미술과 현대미술의 맥락과 접목, 다양한 형식, 실험 등을 통해 새로운 민화어법을 창조하는데 전진, 세계 미술 속 한계에 도전함으로써 21세기에 걸 맞는 현대미술, 민화로 재탄생 되어야 할 시점이라고 보겠다.
끝으로 「한국민화국제아트페스티벌」전시에 주옥같은 작품으로 참여해 주신 회원님들에게도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