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 꼬리를 따라 떠나는 히말라야 히든 코스-마르디히말(Mardi Himal)-
처음 한국에서 길을 나서며 약 한 달 여정을 준비했던 나는 지난 ABC(Annapuruna Base Camp)코스를 끝으로 집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 잘 도착해 이젠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아쉬움에 발길을 떼기 힘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집에서 기다리는 사랑하는 가족들을 만난다는 설레임에 가벼운 발길로 하산하다 지누단다(Jinudanda)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이었다. 내게 한 통의 전화가 왔다. 한국에서 온 남편의 전화. 비자 기간이 일주일 이상 남아있으니 간 김에 마르디히말 루트까지 다녀오는 것이 어떻겠냐는 것.
이제는 집에 간다고 맘을 놓고 있던 내게 약간은 서운한 기분이 드는 전화여서 처음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고 진정이 되자 그곳이 어떤 곳인지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결국 현지에서 도움을 주는 에이전시 사장 라쥬에게 급히 마르디 팀스퍼밋(TIMS & Permit)을 만들도록 부탁한 후 새 루트로의 트레킹을 나기로 결정. 보통 포카라에서 마르디히말 트레킹을 간다면 택시를 타고 칸데(kande)까지 이동해 오스트리아캠프를 거쳐 마르디히말라야 베이스캠프로 가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한다. 하지만 ABC를 마치고 온 나는 그럴 필요가 없다. 이곳 지누단다에서 란드룩(Landruk)을 거쳐 곧장 마르디히말 루트를 시작하기로 한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연상케 한 포레스트캠프
지누단다에서 뉴브릿지(New Bridge)를 지나자 바로 란드룩으로 가는 표지판이 보인다. 뜨끈한 온천욕으로 이미 전열을 가다듬은 상태인 나는 란드룩으로 가는 길 중에서도 조금 가파른 고갯길을 경유하는 힘든 길로 가보기로 하였다. 하지만, 길을 나서서 오르막이 시작되자 곧바로 후회가 된다. 80도 이상의 경사진 길은 오르는 내내 ‘아이구’하고 신음소리가 날 정도의 난이도 높은 트레킹이었다. 힘들어하는 나의 모습을 본 가이드 마힌드라는 “누나 묵티나트(Muktinath)보다 힘들어요?” 한다. “묵티나트 가는 길이 제일 힘들어” 했던 지난번 안나푸르나 라운딩 때 나의 말이 기억난 모양이다.
그렇게 2시간가량 걸었을까…. 갑자기 넓게 펼쳐진 평지가 나타나더니 곧 들꽃이 만발한 자그마한 정원이 딸린 롯지 입구가 나타났다. 롯지 입구에서 독일인 여자 둘, 남자 한 명 그리고 네팔인 가이드를 만났는데 가이드는 마힌드라와 안면이 있는 형이었다. 그는 마르디에 여러 번 온 친구로 우리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편한 다른 길이 있는데 우리가 급경사의 오르막으로 온 것을 지적해 준다.
급경사를 오르느라 온몸이 땀에 젖은 우리는 셔츠와 양말을 롯지 주인이 사용하는 수돗가에서 빨래한 후 넓게 펼쳐진 앞마당에 널었다. 마당이 텐트를 여럿 설치할 수 있을 정도로 넓어 주인에게 물어보았더니 이곳은 열린지 얼마 안 된 루트로 롯지가 생기기 전에는 주로 텐트를 치고 캠핑을 하며 이동하는 루트였단다. 우리와 함께 롯지에 온 친구들은 넓은 잔디 위에 돗자리를 펴고 앉아 가지고 온 카드로 게임을 하거나, 나와 독일인 친구 하나처럼 가지고 온 책을 보고 글을 쓰며 시간을 보냈다.
롯지 주인에게 주문한 밀크티 한 잔을 마주하고 돗자리에 앉아 바라보는 저녁 일몰은 영화 속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아름다움이 탄성을 자아내게 하였다. 때마침 전망 좋은 울타리 근처에서 담소를 나누는 독일인 남녀의 모습은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연상하게 할 정도였다. 일몰 후 미리 피워 둔 난로가 있는 다이닝룸에서 함께 저녁도 먹고 서로 잘 안 되는 짧은 영어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이드 마힌드라 외에는 한국말을 할 곳이 없었고 포터 키산드라와는 네팔어를, 트레킹 중 만나는 외국인들과는 영어를 하다보니 하루하루 갈수록 다국적인 사람이 되어가는 듯한 생각이 든다. 아름다운 일몰을 함께한 친구들과 난롯가에서 한동안 이야기하다 난롯가의 다이닝룸에서 자야만 하는 사우지(여자사장), 사우니(남자사장)를 배려해 9시경 각자 방으로 돌아갔다.
롯지 밀크티와 함께한 혼자만의 일출
피곤해서인지 이를 닦고 방에 침낭 속에 쏙 들어가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2시간쯤 잤을까? 부스럭 부스럭 소리에 잠이 깨었다. 무슨 소린가 하고 한참을 들어보니 방안 어딘가에 쥐가 들어왔는지 찍찍대는 소리가 난다. 어린 시절 재래식 부엌에 내려서다 발로 쥐를 밟은 경험이 있는 나는 공포로 온몸이 얼어붙었다. 늦은 밤인지라 가이드를 깨울 수도 없을뿐더러 침상 아래로 발을 내릴 수도 없는 공포의 상태라 꼼짝달싹 못하고 귀만 쫑긋하고 누워 있다가 침낭 속에 두었던 이어폰을 끼고 음악으로 쥐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노력하다 잠이 들었다. 이른 새벽 쥐소리가 안 들리는 것을 확인하고 침낭 속에 미리 넣어둔 따뜻해진 속옷과 셔츠로 갈아입고 발아래를 확인한 후 신발을 신고 방을 뛰쳐나와 가이드 마힌드라를 찾아 밤사이 이야기를 하였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는 방을 한 번 확인해 주었고 사우니와 사우지에게 낮에 방문을 열어두지 말라고 말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른 아침 쥐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일어난 나는 지난번 타다파니(Tadapani)와는 또 다른 일출을 맞이하게 되었다. 마침 밑동이 잘린 나무가 있어 그곳에 사우니가 준비해 준 밀크티를 그러쥐고 앉아 태양이 하늘을 밝게 물들이는 일련의 과정을 천천히 감상할 수 있었다. 이 아름다움을 다른 이들에게도 알려주고 싶었으나 다들 한밤중이라 혼자만의 일출을 보게 되었다.
오늘도 이른 아침을 먹고 이제는 일상이 된 구스 침낭을 기계적으로 구겨 넣으며 빠르게 짐을 싸놓고 가이드와 로캠프(Low Camp)를 향해 길을 나섰다. 길을 나서며 밤새 추운 이곳에서 부엌일로 힘들 사우니에게 ABC에서 만난 한국청년이 준 군용 핫팩을 그녀 손에 쥐어주며 아쉬운 이별을 하였다.
마차푸차레를 풍경 삼아 점심을 먹을 수 있는 로캠프
이 곳 마르디히말 루트는 야영을 하며 이동하였다면 그것도 나름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을 접할 수 있었다. 나지막한 오솔길은 오르막 내리막이 간간히 반복 되었지만 계단이 대부분인 ABC와는 달리 오래된 낙엽과 흙길로 이루어진 길들이라 수많은 계단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가는 내내 간간히 들리는 독특한 새소리는 이국적인 숲길을 걷고 있음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었다. 한참을 가다 경험이 많은 키산드라가 멈춰 서더니 낙엽 위에 눌린 자국을 손으로 가리켜 곰 발자국이란다. 그리고 근처 나무 위에 긁힌 자국도 곰의 흔적이라며 이곳은 밤에는 곰과 호랑이가 출몰한다고 알려 준다.
그 말에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져 사진 한 컷을 간신히 찍고 그 자리를 서둘러 벗어났다. 한참을 숲길을 가다 멀리서 물고기 모양을 한 마차푸차레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로캠프 입구에 마차푸차레 롯지라고 씌여진 깔끔한 롯지에 들어서 밤사이 충전 못한 핸드폰과 보조배터리를 꽂아두고는 점심으로 스파케티를 주문하고 조금 춥지만 따스한 햇볕을 받으며 마차푸차레가 보이는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주문한 블랙티에 정제 안 된 덩어리 설탕을 넣어 여러 번 저어 마시며 아름다운 풍경을 온전히 혼자 앉아 만끽하였다. 하지만 잠시 후 나온 스파게티는 기름에 너무 오랜시간 볶은 탓인지 스파게티가 아닌 프라이드 누들이 되어 나타났다.
결국은 반도 못 먹었지만 멋진 풍경으로 대신 배를 채우고 배터리가 충전 될 동안 조금 더 쉬다 일어나 길을 떠났다. 30분여를 지나자 드디어 3200m 반달단다(Badal Danda)가 나타났다. 그 곳에서 전 날 함께 묵었던 독일인 친구들이 점심을 먹고 있었다. 창너머로 손을 흔들고 우리도 거기서 차를 마실까 하고 마힌드라에게 물었더니 포터 키산드라가 안개가 몰려오고 날씨가 이상하다고 서둘러 가자고 한다. 키산드라 말대로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안개비가 몰려오며 시야가 부쩍 흐려지기 시작하였으며 간간히 옅은 비도 뿌리기 시작 하였다. 고도가 높아진데다 안개에 옅은 비까지 뿌려 평소와 달리 사진을 찍기 힘들었다. 주머니에 소지품을 다 집어넣고 멀리 보이기 시작한 하이캠프를 향해 언뜻 보면 비슷한 길들을 부지런히 이동하였다.
까만 하늘 수많은 별들이 가득했던 하이캠프의 밤
한참을 가자 안개에 둘러싸인 롯지 앞에 네팔 전통모자를 쓴 새까만 노인이 뒷짐을 지고 서 있다 인사를 한다. 하이캠프 롯지의 사우지란다. 인사를 하고 서둘러 뛰어 들어가 정해준 방에 짐을 풀어놓고 추운 몸을 녹이러 다이닝룸으로 나왔다. 추워진 날씨로 야크똥(네팔에서는 나무 값이 비싸 대신 야크 똥을 건조해 연료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으로 피워둔 난롯가에는 이미 유럽인 두 명이 앉아 쉬고 있었다. 추워하는 내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옆자리에 앉으라며 옆으로 자리를 내어주었다. 언 몸을 녹이고 점심 먹은 지 오래 지나지 않아 노트를 펴들고 앉아 바깥풍경을 감상하려 하였으나 오후부터 몰려든 안개로 주변이 자욱해져 한 치 앞을 볼 수 없었다. 하이캠프(3550m)에서의 일몰은 포기하고 가족과의 연락을 위해 와이파이 연결을 시도하였으나 날씨가 좋지 않아선지 인터넷도 불통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포레스트 캠프처럼 확 트인 외벽 쪽이 잘 연결될 것 같아 가이드와 함께 근처를 돌아다녀 보았으나 역시 되지 않았다.
롯지 다이닝룸에 들어올 때마다 혼자였던 나는 늘 외롭고 어색했었는데 이젠 혼자가 익숙해져 남의 눈을 신경 쓰지 않고 혼자 앉아서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며 나만의 소일거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곳은 워낙 롯지 상태가 열악하고 그 수가 부족해 가이드들이 잘 때 사용하는 한편에 높이 쌓인 이불들을 꺼내 추위에 떨며 한 두 개씩 무릎에 덮고 앉아 있었다. 난로 바로 앞자리를 다투는 사람들은 특히나 추위로 힘들어하였는데 이상하게 나는 그리 크게 춥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더 추운 곳(쏘롱 라 패스, 5480m)에 있다가 왔기 때문인 것 같다. 밤이 늦었지만 웬일인지 잠이 오지 않던 나는 독일인 쪽 가이드, 롯지 사우지, 가이드 마힌드라, 포터 키산드라와 함께 밤늦게까지 한국에서 가져온 육포와 간식 등을 나눠먹으며 한국과 네팔에 대한 이야기꽃을 피우다 방에 들어왔다. 조금 지나자 마힌드라가 물병에 뜨거운 물을 담아 가지고 방문을 두드리더니 하늘에 별이 가득하다고 나오란다.
방 밖으로 나온 나는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하늘의 별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렇게 까만 하늘도 처음, 또한 그렇게 반짝이는 또렷한 별도 처음 보았다. 그 모습을 보고 껄껄 웃던 마힌드라는 손짓으로 가리키며 가장 밝게 보이는 불빛들이 모인 오른쪽이 포카라, 왼쪽으로 어둡게 보이는 길이 내려다보이는 곳이 뱀부, 도반, 데우랄리 라고 하였다. 거쳐온 그곳들이 새삼 가까운 곳이었다고 느낄 수 있었다. 한바탕 별을 감상한 후 새벽 일출을 보기 위해 다시 잠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으나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이 계속 아른거려 혼자 겉옷을 다시 챙겨 입고 나와 한참을 별을 보고 나서야 다시 잠이 들 수 있었다.
마르디히말의 핑크빛 일출
알람소리에 눈을 뜬 나는 오늘도 침낭 안에 넣어 미리 덥혀두었던 옷으로 갈아입고 바라클라바에 털모자까지 눌러쓰고 스틱을 들고 새벽공기를 맞으며 아직 깜깜한 새벽길을 나섰다. 마르디는 그 동안 내가 일출을 보기 위해 갔던 곳들과는 달리 어두운 낭떠러지 비슷한 내리막과 오르막을 반복하며 이동해야하는 험한 길이었다. 모두 헤드랜턴을 필수로 장착하고 스틱을 꼭 사용해야 하는 곳이지만 포터 키산드라는 스틱도 없이 잘도 간다. 오늘은 이곳이 초행인 마힌드라 대신 키산드라가 리딩을 한다. 길이 험해 뒤에서 따라오는 나의 안전을 수시로 살피는 세심함에 키산드라가 계속 포터만 하는 것에 안타까움이 들 정도다.
어느덧 어둠이 걷히고 하늘이 조금씩 열리더니 점차 핑크빛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오렌지 빛 또는 주황 빛 하늘은 그동안 본 일출에 많이 등장하였었지만 아름다운 핑크빛은 처음인데다, 마치 물꼬기의 꼬리지느러미(마차푸차레)로 물장구를 치다 생긴 물결같이 네 가닥 구름이 길게 그어져 그림으로 그려도 나오기 힘들어 보이는 풍경이 내 주위를 빙돌며 나타났다. 나는 숨을 쉴 수도 없는 아름다움에 둘러싸여 “와…” 하는 탄성만 내지르다 곧 정신을 차리고 한 자리에 자리를 잡고 서서 빙글 몸을 돌리며 동영상을 찍기 시작하였다. 사진만 보여주면 다른 이들이 그림이라고 믿지 않을까 싶어 영상으로 남기고 싶은 마음에 조급증이 들어 사진을 찍는 내내 숨도 쉴 수 없었다. 그렇게 소중한 나의 인생 기념 동영상을 건질 수 있었다. 일출을 만끽하며 뷰포인트까지 오자 롯지에서 만났던 유럽인 커플들이 베이스캠프까지 갔다 내려오다 가이드와 우리 셋의 기념사진을 찍어주고 가던길 마저 내려간다. 손에 잡힐 듯 앞에 가깝게 보이는 마르디히말 베이스캠프(4500m)를 보고 금방 다녀오겠지 하고 걷기 시작하였는데 뷰포인트까지 오는데 만도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베이스캠프까지는 예정대로 진행이 잘 되었는데 해가 뜨자 상황이 달라졌다. 해발 4000m대에서 직선으로 내리쬐는 직사광선을 챙모자 하나 없이 올랐던 나는 하이캠프까지 돌아오는 내내 얼굴이 다 익어버려 이후 1주일 이상을 얼굴화상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오전 11시경 하이캠프 롯지로 돌아와 점심을 먹고 30분 정도를 휴식하고 가방을 다시 챙겨 독일팀과 이별을 고했다. 가지고 있던 에너지 바와 홍삼젤리를 독일팀 가이드에게 주며 아쉬운 이별을 했다.
트레킹을 하며 문득 이런 의문이 고개를 내밀었다. ‘내가 온 이 때에만 이렇게 아름다운 것일까? 다른 계절의 네팔은 어떨까?’ 하고. 나는 내일 갈 오스트리아캠프(Australian Camp)를 끝으로 이번 트레킹을 마치기로 예정되어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로 끝이 아님을 그때 이미 직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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