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 2020.1.5(일) 맑음
장소 : 부산 장산
인원 : 3명
형제들의 첫발
배골집은 자식들을 늦게 봤다. 1950~60년대, 그때는 집집마다 아이들이 많았다. 한국전쟁 뒤여서 가족계획을 할 수 있는 국가적 여력이 없었다. 특히, 강원도 산골에는 의료나 복지가 전무했다. 코굴과 호롱불로 생활을 하였으니 아이가 들면 낳을 수밖에……. 우리 마을만 하더라도 집집마다 열 명 안팎의 아이들이 있었다.
그에 비해 배골집은 5남매를 두었다. 이웃들과 비교해도 많은 숫자는 아니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 이유가 없었던 건 아니다. 첫 부인과 헤어지고 재혼한 가정이다. 그 당시 토속적 문화로는 재혼도 수긍하기 힘들 때였다. 젊은 여자의 몸에서 줄줄이 자식들을 낳았으니 시샘이 없지는 않았으나 장손의 집안이다.
자식들이 커가면서 학교를 다녔다. 사춘기에 접어들 쯤 쫓겨나다시피 도시로 흩어졌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신호탄이 막 울릴 때였다. 시골에선 농사로 밥 먹고 살기 힘들었다. 화전밭 지주로는 당연한 생각인지 모르지만, 후처로 들어온 배골집 안주인은 어떡하든 자식들을 도시로 내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남들보다 일찍이 눈을 떴고 한 발 앞서 도시로 나왔다. 시골 처녀 총각들이 공순이 공돌이로 쏟아져 나갈 때였다.
우연찮게 첫 딸이 부산에 자리를 잡고, 뒤따라 장남인 나도 부산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삼척 하장에서 기차를 타려면 낙동강 발원지인 황지로 나가야 한다. 덜덜거리는 시골버스를 타고 황지로 나가서 또 다른 버스로 갈아타야 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석탄산업이 호황을 이룰 때였다. 황지는 현재의 태백이고, 석탄 광산이 전부였던 소읍이었다. 5분만 서있어도 석탄가루가 달라붙어 온 몸이 새카맸다.
의자도 없는 터미널에서 통리행 버스를 기다렸다. 시골에서 도시로 나오는 마지막 버스였다. 장손 집안에 장남이 외지로 떠난다니 어머니가 신발가게에서 새로 나온 주황색 운동화를 사주셨다. 그때가 봄이었고 통리역에 왔을 때는 오후 서너 시쯤 됐다. 대합실에서 배웅을 해도 되지만 입장권을 끊어서 기차가 들어오는 플랫폼까지 나오셨다. 그렇게 농사꾼의 아들은 움직이는 기차에서 어머니와 손을 흔들며 도시로 나왔다.
내가 부산으로 내려온 뒤 동생들은 충남과 서울로 흩어졌다. 둘째인 큰 동생은 삼척시내였던 북평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지금은 동해시가 되었다. 자식들이 모두 중‧고등학교를 마쳤거나 마치지 못했어도 도시행을 선택했다. 시골에는 늙은 부모님만 계셨는데 아버지는 서울올림픽이 있던 추운 겨울에 돌아가시고 어머니 혼자서 농사를 지으셨다. 2년을 짓고 나서 부산으로 오셨는데 셋째와 막내도 그때 합류하며 부산에 터를 잡았다.
다들 객지에서 뿌리를 내린지 30~40년이 넘는다. 배우자를 만나 가정을 꾸렸고, 2세인 조카들도 성인이 되면서 결혼을 하였거나 독립생활을 하고 있다. 이제 형제들은 중년에 접어들고, 나는 은퇴를 하고나서 여가 생활을 즐긴다. 힘든 고비는 넘겼다는 말이다. 그래 설까, 막내가 새해 들어 쌈빡한 제안을 해왔다. 다름 아닌 형제들과 함께하는 등산이다.
꽤 참신한 제안이었다. 물론 셋째를 위한 것도 있다. 셋째는 항상 하는 말이 있다. 숨쉬기 운동은 열심히 하고 있다고……. 그런 형을 끌어내기 위한 속셈이었지만 솔직히 친목도모를 생각하고 했던 말이다. 남자 형제끼리 땀 흘리는 등산은 건강에도 좋지만 친목도모에는 최고다. 내가 제안을 했더라면 거부했을지도 모른다. 동생의 제안이니 반대할 수도 없었을 터였다.
워밍업을 겸해 다 같이 첫발을 내딛었다. 지하철을 타고 벡스코역에서 만나면서 일은 급진전 되었다. 해운대 우동천 계곡을 시작으로 장산을 오른다. 성불사에 들러 커피로 공양하고 곧바로 임도에서 산길로 접어든다. 십 몇 년 만에 오르는 산길인데 자잘하던 솔이 내 키 두세 배쯤 훌쩍 커져있었다.
날씨는 생각보다 따스했다. 1월 초순이라 추울 거라 생각하고 얇은 타이즈를 입었는데 땀이 삐질삐질 났다. 잠시 성불사 화장실을 빌려야 했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산길을 걸어 올랐다. 셋째를 걱정했으나 예상보다 잘 걷고 힘들지도 않아 보였다. 금방 정상에 도달했다. 소뿔도 단김에 뺀다는 말이 있다. 이참에 ‘명산100’ 완등을 해보자는 또 다른 제안을 꺼냈다. 명산100 완등을 한 막내의 말이었다. 기분이 좋아선지 긍정적인 답변이 나왔다.
정상에서 자리를 잡고 점심을 먹을 때다. 김밥과 과일과 수정과에 커피를 준비해 갔다. 음식을 꺼내놓고 허기를 채우는데 많은 사람들이 우리 가까이로 지나갔다. 어떤 이는 겨울 날씨에도 맨발로 지나갔고, 도사 같은 분은 나무지팡이를 선보였고, 젊은이는 반바지에 반팔 차림으로 정상에 나타났다. 진짜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셋째가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기가 찼던지 상태가 좀 안 좋아 보인다고 했으나 계속해서 산꾼들을 만나면서 마음이 동요됐다. 그 중에는 걸음을 멈추고 삶과 건강에 대해서 조언을 해준 어느 부부 한 쌍을 만나고 부터였다.
그날 8부 능선을 걸어 억새밭도 구경했고, 헬기장을 경유하며 숲속 길을 걸어 장산계곡으로 내려왔다. 장산계곡과 대청공원을 지나면서 마음을 확실히 굳혔다. ‘명산100’에 도전해 보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조언을 해준 어른의 영향력이 많았다.
지금은 백세 시대다. 특별히 문제없으면 100세는 살수 있다는 전문가들의 예견이다. 직장인이 퇴직을 하더라도 끝이 아니다. 다시 인생 2모작을 시작한다. 재취업을 하던 사업을 하든 뭐라도 해야 하고, 할려고도 한다. 나는 흙과의 삶을 제2의 인생으로 잡았다. 그래서 떠나온 고향을 생각하고 있다.
지금 고향은 폐허와 같다. 다들 떠나고 흔적조차 없지만 남은 세 가구가 있다. 그곳으로 합류할 생각인데 사십 몇 년 만의 결정이다. 머지않아 동생들도 직장에서 퇴직한다. 그것들을 불러 모아 옛이야기 나눌 생각이다. 어쩌다 찾아오는 친구도 좋고 길손도 쉬어가게 구들방을 고칠 생각이다.
오래된 배골집은 지금도 남아있다. 부모님 계셨을 땐 먼 친척은 물론이고, 보따리 장사꾼도 묵어가게 베풀었다. 거기까진 아니어도 따뜻한 차 한 잔 대접해서 보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부모님 사후 거처인 묘지도 가까이에 붙어있다. 햇살 고운 봄날을 생각 중인데 막내가 내 마음을 읽었다.
[산행 이모저모]
우동천 계곡을 따라 산행을 시작합니다.
계곡을 오른지 얼마되지도 않았는데
땀이 삐질삐질 흐릅니다.
성불사 9층 석탑과 범종각입니다.
여기서 커피 공양을 하고 쉬었다가 오릅니다.
정상에 도착합니다.
오른쪽이 셋째고 왼쪽이 막내입니다.
해발634m가 새겨져 있는 정상석입니다.
왠지 이마가 잘려 나간 것 같은
모양입니다.
정상에 올랐으니 기념사진을 찍긴 찍습니다만
바위나 내 머리나
민둥한 건 비슷합니다.
도시란게
다닥다닥 붙은 개미집과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다들 잘 찾아서 잘 살고 있습니다.
해운대와 광안리입니다.
바다를 건너는 광안대교가 있고
고층빌딩이 쭈르르미 죽순처럼 솟았습니다.
가운데에 멀리 보이는
자그마한 섬이 오륙도입니다.
하늘과 바다에 운무가끼어 선명하지 못합니다.
또 다른 방향입니다.
해운대와 연제구와 동래구 방면인데
멀리 하얀 지붕이 사직동의 아시아드경기장입니다.
반여동의 주택들은 다닥다닥 붙었습니다.
상당히 정겹고 인간적입니다.
예전 군부대에서 지뢰를 뭍었던 곳입니다.
지금도 이런 표지판이 중간중간 남아있었습니다.
머지않아 구경하기 힘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이곳을 찾을 때면 꼭 사진으로 남깁니다.
8부 능선을 지나 억새밭으로 나왔습니다.
예전에는 아이스께끼 장사도 있고 했는데 지금은 깨끗합니다.
지금 그분들은 뭘하고 계시는지 궁금증도 생깁니다.
다들 잘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말입니다.
장산습지로 이동합니다.
도심 속의 장산은 참 아름답습니다.
우뚝 솟은 봉우리와 평지가 고루 섞여 있는
시민 품의 보물 같은 산입니다.
억새밭을 지나는 장면입니다.
막내가 이곳 '장산습지' 반딧불 동아리회원이라 합니다.
그때의 이야기를 듣고서 안내판을 봅니다.
날씨는 포근하지만
이곳 기온은 그렇지도 못한 가 봅니다.
고여 있는 웅덩이에 얼음이 얼었습니다.
철 이른 개구리가 땅 속에서 나올까봐 보호하는 것만 같습니다.
헬기장이 있는 만남의 광장입니다.
예전보다 이정표가 잘 만들어져 있습니다.
곁에는 산불감시원도 보였습니다.
이 길로 내려옵니다.
예전에는 흙길이었는데 지금 돌을 깔아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한, 애국지사의 집을 거칩니다.
이런 분들이 계셨기에
지금 우리가 있다고 봅니다.
고맙고 감사한 마음에 앞 마당으로 들어갔습니다.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돌아나왔습니다.
부산에는 이와 같은 마을 산들이 많습니다.
주말 오후에 잠깐씩 오를 수 있는 산들이 말입니다.
많은 분들이 산을 올라 건강했으면 좋겠습니다.
이 날을 계기로
저와 셋째는 블랙야크 '명산100'에 도전 중입니다.
현재 세 곳의 정상을 찍었고
낙동정맥도 세 곳을 찍었습니다.
언젠가는 '명산100'완등이 되리라고 봅니다.
다들
건강산행, 안전산행 하시기를 바라면서
형제들의 첫 도전을 스토리로 올립니다.
* 긴 글 여기까지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건강과 가정에 평화가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꾸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