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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가다 일하다.
나는 한국에서 일하면서 “노가다” 란 말이 듣기 좋다. “노가다” 라는 말은 나쁜 말이 아니다. 일본 말이다. 한국에서는 아직도 일본이 남겨 놓은 말을 현장이나 생활에서 널리 사용하고 있다. “노가다”는 조선말로 “근로자” 혹은 “일군” 이라는 뜻이다.
현재 젊은 세대들 중에서 어떤 외래어를 자기의 한국말로 알고 있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한번 30대 젊은 애와 일하게 되였다, 현장에서 일하면서 내가 손 밀차를 가리키면서 “이것을 뭐라고 하냐?”고 물으니 “리어꺼”라 한다. 그는 내가 중국 사람이라 한국말 모르는 줄 아는가봐. 내가 다시 “리어꺼가 어디 말이냐?” 물으니 아무 망설임도 없이 “한국말이다.” 라고 대답한다. 나는 너무도 기가 막혀 “야. 너는 한국 사람으로서 한국말도 제대로 모르고 있느냐? 리어꺼는 일본말이야.” 그러면서 나는 속으로 소용없는 걱정이지만 이러다간 한국인이 한국말을 잊고 모두 외래어만 사용하게 되겠구나. 하는 근심도 나더라.
중국 조선족들이 한국에 처음 와서 일하면서 같은 조선말이지만 언어가 통하지 않아 많은 애를 먹인다. 특히 현장에서 일하면서 사용하는 연장(工具)이름은 대부분 외래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나는 몇 년 전 배 타러 가서 한국인과 일하면서 많은 외래어를 배우기는 했지만 이번에도 또 여러 번 애 먹었다.
한번 현장에서 일하면서 목수가 오헴마를 가져오라고 한다. 하여 무엇이오헴마인가 물으니 “야, 이놈아 오헴마도 몰라. 망치. 큰 망치다.”라고 한다. 나는 속으로 “벌써 망치라고 했으면 인차 알지. 왜 하필 한국 사람이 한국말을 안 하고 외래어를 사용하는지 모르겠다.”
지금은 “노가다”라 하는 것보다 응당히 “일당일”이라 해야 옳을 것 같다. 하루 일하고 하루 돈을 받으니까. “노가다”는 인력소개소의 소개로 매일 매일 일을 분배받아 현장에 나가 일하는 것이다. 그리고 10%의 소개비만 내면 된다. 숙식도 제공해 주는 곳도 있지만 한 달에 얼마마한 돈을 지불해야한다. 오히려 혼자 집 잡고 있는 것이 더 편하다.
노가다 일을 하게 되는 원인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일자리 찾기 쉽다. 아무 사람이나 아무 때고 아무 지역에서 일을 찾아 할 수 있다. 인력 소개소에 등록만하면 매일 일이 생긴다. 둘째는 돈 못 받을 근심이 없다. 월급 받는다면 혹시 지연될 수도 있고 심지어 한 달 두 달 월급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일당일은 매일매일 현찰을 받을 수 있다.
“노가다”는 무슨 일이든 다 한다. 도시에서 하는 일은 보통 건설현장 일이다. 건물 짓고, 건물 철거하고, 도로건설, 석재. 방수. 용접, 철근가공 등 한가지일을 장기적으로 할 수 있지만 농촌에서는 이따금 건설현장도 뛰지만 주요 농사일이 많다. 밭에 거름 펴는 일, 밭에 약하는 일. 배추, 양파, 고구마작업. 인삼밭. 잔디밭, 벌초, 등등 너무도 많다. 그리고 매일매일 일하는 현장도 같지 않다. 어떤 때는 하루에 한 개 군의 여러 면을 돌아다니며 일하니 차타고 다니는 시간이 일하는 시간보다 더 많다. 그렇지만 언제나 오후 6시 전에는 반드시 인력소개소에 데려다 준다. 이따금 늦어지는 때도 있지만 그만큼 돈을 더 준다. 그리고 더럽고 아주 힘든 일, 목수, 용접 등 기술일은 몇 만원 더 받는다.
“노가다” 일은 회사와 달리 일요일, 혹은 빨간 날이라도 휴식하지 않는다. 휴식하게 되는 날은 보통 비 오는 날이다. 그리고 구정(春節)이나 추석에는 일도 적거니와 모두 휴식하니까 일이 없다. 그 대신 돈도 없다. 나도 한 달에 29일 일한 적이 있다. 매일 돈 받는 재미로 너무 힘들어 하루 휴식하겠다고 생각했지만 아침 일어나 또 나가군 한다. “노가다”는 어떤 때는 한 가지 일만 몇 달 할 때도 있지만 보통 매일 같지 않는 일, 같지 않은 현장에 분배 받을 때가 많다. 어떤 사람은 한 가지 일만 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나는 매일 같지 않는 일을 좋아한다. 다니며 구경하는 곳도 많고 이것저것 모든 일을 해 볼 수 있기에.
중국에서는 한 갑이 넘은 노인이지만 한국에 와서는 모두 청년이다. 일하는 것을 보면 젊은 사람 못지않다. 그리고 “노가다”라 하면 모두 힘들고 고생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한국인의 습관으로 무엇이나 “빨리, 빨리” 못해 먹는다 하지만 한국에도 이제는 모두 노년화라 “노가다” 일하는데 60이 넘은 한국 노인도 아주 많다. 그러니 일하는데 젊었을 때처럼 힘 있게 활발하게 일을 해치울 수 없다. 다만 서 있지 않고 천천히 부지런히 움직이면 업주는 좋아한다. 또한 모든 현장에는 장비가 좋아 무거운 물건이나 삽질 같은 것은 모두 기계로 하니 그냥 옆에서 안전에 주의하고 사소한 심부름이나 한다. 이따금 아주 더러운 일, 냄새가 역한 일이 있지만 그러한 일은 잠시 견뎌 낼 수 있다. 돈 벌러 왔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그런 일이라도 해야 한다.
“노가다” 현장에서 이런 말이 있다. “노가다 일하면서 땀 흘리면 3 대가 망한다.” 천천히 움직이고 너무 힘들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한번 태양열 현장에 며칠 다녔다. 남녀 수십 명이 넓은 벌판에 여기저기 흩어져 제각기 일하는데 사장님은 모두 돌 볼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은 볼트(螺絲) 한 주머니 가지고 천천히 걸어 다니며 기둥마다 하나씩 던져놓고 그 뒤로 또 한 사람이 노트(羅母) 한 주머니 들고 따라 다니며 하나씩 던진다. 쇠파이프도 한사람이 들어도 될 것을 둘이서 들고 다니고. 2 메타 짧은 파이프도 하나씩만 들고 다닌다. 그러다 점심 먹자는 소리가 나면 무조건 아무 일이나 그대로 버리고 간다. 한번 태양열판 높은 틀에 여섯 명이 굵은 앵글을 들어 올리는 중 점심 먹자는 소리가 들리자 이미 허리 위까지 들었던바 올려놓으면 좋으련만 그냥 땅에 던져 버리고 가버린다. 그리고 오후 다섯 시가 되면 시계만 들여다보며 퇴근 시간만 기다린다.
그렇다고 매일 쉬운 일만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양계장에서 몇 달 일하다 해남에 와서 노가다일을 시작했다. 시작하는 첫날이다. 나 혼자 업주를 따라 일하러 갔었다. 화장실 구덩이 파는 일인데 마을 좁은 골목이라 포클레인도 들어가지 못하는 모퉁이다. 만약 포클레인으로 작업한다면 몇 삽 퍼내면 끝이다. 그렇지만 장비가 들어갈 수 없으니 사람이 괭이질하고 한 삽씩 퍼내야했다. 본래 해남이라는 이 지역은 아무리 깊이 파도 돌 하나 보이지 않는 황토 땅이지만 이곳만은 자갈이 많이 섞인 굳은 땅이다. 그런데다 물까지 스며 나오니 괭이질도 삽질도 너무도 힘들었다. 직경 2메타 깊이 2메타의 구덩이를 둘이서 아침부터 저녁 해질 때까지 제대로 휴식도 못하고 겨우 일을 마쳤다. 나뿐만 아니라 업주도 땀도 많이 흘리고 많이 지쳤다. 해남말로 너무 뻗쳤다.
첫날 고생하고는 만약 매일 이렇다면 어떻게 “노가다”일을 하겠는가 걱정이 들었다. 일을 못할 것만 같았다. 그래도 나는 몇 달 “노가다”를 하면서 못해 본 일이 없다. 미장 따라다니며 폼 나르고, 벽돌과 모래 져 올리고. 밭에서 퇴비 뿌리고, 약할 때 줄 잡아주고. 볏짚 운반하고, 고구마, 양파, 배추작업. 그리고 바다가에서 가두리 만들고. 벌초, 잔디 심고. 나무 심고, 분뇨처리장 지하실 청소, 철근 가공, 섬에 나가 염전 일 등.
현재 한국에 60이 넘은 남자들 많이 왔지만 여자들이 더 많다. 40-50대 여자들은 식당이나 회사에서 일하고 혹은 개인집 보모일 한다. 회사나 기업에서 일하면 돈은 많지 않지만 비교적 흥그럽다. 일요일과 빨간 날은 휴식이고 월말이 되면 제때에 돈도 주고 여름휴가 혹은 절일에는 떡값이라는 보너스도 준다. 그렇지만 집을 잡아야하고 아침저녁은 자기기 해결해야한다. (어떤 큰 회사는 숙식을 제공해 준다.)
60대가 넘은 여자들은 요양원에서 간병하는 사람들이 많다. 간병일은 힘들지 않지만 10-20만원의 돈을 내고 자격증을 따야한다. 1;1로 하는 일도 있고 한 사람이 한 병실을 맡아 4-5명을 돌보는 것도 있다. 무조건 하루 24시간은 지켜야한다. 조금 걸을 수 있는 환자라면 그래도 편한 셈이다. 화장실 다니고 복도를 거닐 때 부축해주면 된다. 하지만 중환자는 밥을 먹여 주고 입술도 닦아 주어야 한다. 대소변도 받아 줘야한다. 밤에는 병실 땅바닥에 이불을 펴놓고 잠을 자야한다. 그렇지만 월급은 많다. 보통 160만 이상이다. 오래되면 200만 넘을 수도 있다. 인내성이 있어야한다. 부부간이라면 병실을 각기 맡아 하지만 서로 힘든 일은 도와줄 수 있다. 잠자리는 함께 할 수는 없어도 이야기 할 기회가 있어 고독하지는 않다.
내가 아는 여성 한 분은 식당일이 힘들고 돈이 적다며 친구의 소개로 간병일 하러 갔었다. 작업복 값 15 만원 내고 2일 실습하고 3일 째 첫날 일 시작하였다. 그런데 신수가 사나운지 중병환자를 화장실에서 부축하다 허리를 상하여 오히려 100만원 치료비를 쓰게 되었다. 돈 많이 벌러 갔다가 오히려 돈을 곱배 손해 보았다. 참으로 혹 떼로 갔다가 혹을 붙이고 온 셈이다. 이것보다 더 상심한 일은 없을 것이다.
만약 부부가 서로 돌봐주고 위로해 줄려면 같은 현장이나 한 회사서 일하면 좋다. 그러나 쉽지 않다. 부부 팀이라고 하는데 보통 농장 일이라던가 혹은 돈사, 양계장 일이다. 도시에서는 모텔 청소 혹은 간병하는 일이다. 이런 일은 부부 팀을 환영한다. 오래 꾸준히 할 수 있으니까? 숙식은 제공해 주지만 보통 자기절로 해 먹는다. 주인집에서는 쌀과 채소를 사다 줄 뿐이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부부간이 항상 함께 있으니 서로 돌봐 줄 수 있고 밤에 이야기 할 동무가 된다.
모텔 청소도 쉽지 않다. 방이 100여 칸이 넘을 수도 있고 작은 모텔도 5-60 칸이다. 이 많은 방을 혼자 혹은 두 사람이 매일 청소하고 정리하기도 하루 종일 바빠야 한다. 평일에는 조금 괜찮지만 주말이면 더 바쁘다. 관광 지역은 시절에 따라 바쁘고 고생이다. 모텔에 들어오는 손님들은 부부간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연인이거나 애인을 데리고 하루 밤 묵어가던가. 한 두 시간 쉬여 간다. 5-60세의 늙은이도 있고 20대 젊은 학생들도 있다. 그들이 가고 나면 방안은 난장판이다. 남녀가 같이 있던 침대가 조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다 먹던 음식 찌꺼기. 이불과 수건은 모두 다시 씻어야 한다. 휴식일은 한 달에 2-3일이다.
나도 처음 한국에 와서 부부가 한 곳에서 일 할러고 어느 양계장에서 다섯 달 일하였다. 쉬운 일이 아니다. 아침 6.00시에 일어나 외바퀴 손 밀차로 사료를 한 번 돌려주고 8 시가 넘어서야 아침밥을 먹는다. 아침밥 한 시간 쉬고 계란을 줍는다. 계란 줍는 일은 재미나는 일이라고 하지만 너무도 많고 매일 하는 일이니 허리가 아프고 돈을 벌기 위해 겨우 하는 일이다. 닭장이 다섯 동(洞) 닭이 몇 만 마리다. 점심 먹고 아무리 부리나케 손놀림을 하여도 3-4시간이 걸린다. 12시 혹은 1시가 넘어 점심 먹는다. 조금 휴식하고는 또 사료를 한번 준다. 그러고 나면 날이 어둡는다. 그제야 저녁을 해먹고 8.00시가 넘어야 잠 잘 수 있다.
한 동은 분변처리장비가 고장이 나서 바닥은 온통 똥과 죽은 닭 썩은 것이 두껍게 깔려 발잔등을 잠긴다. 장화를 신고 사료 실은 손 밀차를 밀고 다니고 계란을 줍자니 그 독한 냄새에 머리가 아프다. 하루에도 몇 번 다녀야한다.
먹는 것은 쌀과 채소를 사다주어 자작 해 먹는다. 닭고기와 계란은 사장님은 먹으라고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매일 마음대로 먹는다. 알아도 뭐라고는 하지 않겠지만 그것도 몇 번 먹으니 그만이다, 하여 풋 채소를 먹으려도 제때에 사다주지도 않는다. 추운 날이라도 샤워하는 따스한 물이 없기에 물 데우는 화로를 사다 주긴 하지만 자주 고장이 생기는데 여러 번 재촉해야 사다준다. 월급도 더 안준다. “에라 못하겠다.” 하여 다섯 달 하고는 떠나고 말았다. 아무리 돈 벌로 왔다고 해도 너무도 고생이다.
땅 끝 해남에 와서는 부부가 함께 일할 마땅한 자리가 없기에. 갈라져 일하게 되었다. 마누라는 소개비를 내고 어느 식당에서 일하게 되었고, 나는 “노가다”를 하게 되었다.
농촌에 일은 고구마 심고 캐고, 배추 묶고 찍고. 양파 거두는 일이다. 아줌마들이 주워 박스에 담아 놓으면 남자들은 그것을 차에 옮겨 싣는다. 대부분 중국에 한족(漢族)사람 혹은 베트남, 태국인이 많다. 그들은 한국말을 모르는지라 한 가지 일만 맡아 하는 것이 편리하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기한이 넘어 불법으로 외딴 농촌마을에서 일한다. 그러다가 신고가 들어가면 도망하여 피하거나 잡혀가는 수도 있다. 내가 알고 있는 심양 무순에 있는 왕 x x는 식당에서 점심 먹다가 경찰에 잡혀 짐도 챙기지 못하고 중국에 돌려보냈다. 배추 작업은 더 고생이다. 늦은 가을철이라 아침에는 서리가 내려 9-10시가 넘어서야 시작하는데 밤 9-10시 까지 한다. 배추를 찍고 망에 담고 몇 대의 큰 화물차를 가득 채워야 한다.
이러쿵저러쿵 업주를 잘 만나야한다. 어떤 한국 사람은 우리가 돈 벌로 왔다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머저리로 생각한다. 그러기에 어떤 때는 말싸움이나 인명사고도 일어난다. 시간이 오래니 이제는 중국에 조선족을 인정해 주고 많이 믿어준다.
한번 나도 칼을 휘두른 일로 경찰까지 출동한 적도 있다. 하루는 저녁이 되어 일군들이 하나 둘 돌아오고 우리 몇은 저녁까지 먹었다. 그런데 한국에 한 분이 술이 푹 취하여 들어오더니 내보고 술 부어달라고 한다. 그는 내가 중국술 사다가 먹는 줄 알고 있다. 그도 중국 독한 술을 먹기 좋아한다. 내보다 퍽 후배다. 나는 이미 술 먹고 밥도 먹은지라 그와 맞서기도 싫다. 내가 술통이 저 방안에 있는데 가져다 마시라 했다. 그런데 내보고 가져다 부어 달라는 것이다. 둘이 몇 마디 오가다 그가 “중국에서 온 놈의 새끼가 왜 말이 많은가.” 한다. 이 말에 나는 폭발적인 성질이 있는지라 “뭐야. 또 말해.”하고 소리 지르면서 싱크대 위에 식칼을 집어 들고 콱 찔러 죽이겠다며 시늉을 하였다. 실제 나도 감히 찌르지는 못한다. 단지 위협 줄 뿐이다. 그러니 그도 술 취한 상태라 삐칠 거리며 맞 설려는 것을 옆에 사람이 말려 침대에 넘어지면서 이불장 문에 부딪혀 이마에 피까지 나온다. 그러니 칼로 자기를 찔렀다며 밖에 나가 경찰에 신고 하는가봐. 조금 후에 경찰 몇이 왔다. 나도 겁은 났다. 중국으로 추방 할 가봐. 구경군도 몇이 있었다. 소장님도 있었다. 소장님이 일의 자초지종 어떻다고 말하고 옆에 사람들이 증명을 듣고서야 경찰은 싸움을 해도 칼을 들고 있으면 범죄라며 말하고는 돌아갔다.
노가다 일하면서 매일매일 현찰을 받은 재미는 있다. 그리고 여기저기 다니며 일하니 구경도 많이 하고 자유가 있어 너무 피곤하면 아무 때고 휴식 할 수 있다.
그러나 집을 잡아야하고 아침과 저녁은 자기가 해결해야하니 고생이다. 그리고 일이 없거나 일 못 나가면 돈도 없을 뿐만 아니라 매일 돈을 만지니 너무 헛되게 낭비 할 때가 많다.
이렇게 나는 몇 달 현장 노가다 일을 하다가 우연히 남향레미콘 회사의 경비로 일하게 되었다. 돈은 적지만 밤에 자기만 하고 낮에는 별일이 없다. 먹을 근심, 잠자리 근심 아무런 부담도 없다. 아주 편한 셈이다. 처음은 돈이 적어 계속 할까 말까 하면서 고민했지만, 벌써 10여년이란 시간을 이 회사에서 세월을 보냈다.
그동안 남들과 같이 큰돈은 못 벌었지만 배운 것이 많았고 내 몸 관리에 아주 편리를 주었다. 산악회 따라다니며 구경하고, 친구 사귀고 하면서 돈도 많이 낭비했다. 그러나 나는 아깝다는 생각이 없다. 후회도 없다. 남이 주는 돈 쓰는 것도 아니고 내가 벌면서 쓰는 것이기에.
지금까지 한국 생활에 정들고 마음이 안착되어 더 오래 있고 싶지만 이제는 내 고향에 돌아가고 싶다. 자식들은 모두 제 가족 살림하기에 이전처럼 함께 모여 살지는 못하겠지만 우리 부부 둘이서라도 마음 푹 놓고 자유로이 생활하면서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즐기고 싶다.
2014년 10월 25일 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