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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04-01)
질투를 넘어서는 은혜
야고보서 4장 1-10절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정욕(情慾)은 행동의 동기가 됩니다. 좋은 면으로 일을 추진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절제되지 않으면 경계선이 무너진 정욕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고 분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성숙한 사람은 정욕을 잘 다스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다툼이 일어납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싸움과 다툼은 정욕에서 나오며, 우리가 구해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면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줍니다. 마음을 성결하게 하고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면 주님이 높이십니다.
싸움과 다툼의 원인(1-3)
세상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경쟁합니다. 다른 사람을 이기고 최고 자리에 도달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정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아무리 노력하고 과도하게 경쟁한다 해도 결코 원하는 만족은 얻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목표에서 더 멀어질 뿐입니다.
1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2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3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1-3)
우리들도 마찬가지이지만, 믿을 가진다고 한 순간에 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직 초대교회 성도들도 미숙한 공동체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긴 했지만 크고 작은 분쟁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교회 안에서 분쟁은 무엇 때문에 일어나겠습니까? ‘분쟁(分爭)’은 이기적인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1) 다툼의 근원(1-2a)
야고보는 그 다툼의 근본 원인이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정욕’이라고 지적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다투는 이유를 외부에 있는 것으로 보지 않고, 내부에 있는 이기적인 마음, ‘정욕(情慾)’때문이라고 단정합니다.
‘정욕’이란 ‘기쁨(헤도네)’으로 여기서 판생된 단어가 ‘쾌락’과 ‘쾌락주의(hedonism)’가 있습니다. 즉, ‘마음속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욕구’라고 표현합니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욕구들을 절제하지 못함으로 결국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욕심으로 부리고, 욕심이 싸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 싸움은 정욕끼리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성령과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욕을 억누르려고 하기 보다는 성령에 압도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직 성령의 충만으로 모든 싸움을 멈출 수 있습니다.
(2) 얻을 수 없는 이유(2b-3)
누구나 욕심을 내면서 얻을 수 있고, 살인하고 시기해서라도 취할 수 있다면 싸움이 줄어들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욕심은 그 깊이와 넓이를 알 수 없을 만큼 깊고 크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 구할 수 있는 특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하지 않거나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싸워도 얻지 못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2b). 얻는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말입니다. 성도들이 얻는 방법은 딱 하나,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아무 노력 없이 기도만 하면 된다는 말이 아니라 싸우고 시기하고 살인할 정도로 다투어서 얻는 삶이 아니라 구하는 삶이 하늘의 지혜라는 말입니다.
두 번째 잘못된 방법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3). 맘대로 써 버리기 위해 구하는 것은 비참한 결말이 예견된 ‘잘못된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는데 ‘탐욕’으로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욕구를 위해 나쁘게 구하기 때문에 기도해도 응답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른 자세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면 받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에게 주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눅 12:32). 후히 주는 분입니다(약 1:5).
‘욕심’을 생각하면 어린 시절이 생각이 납니다. 남자분이라면 어린 시절에 땅 따먹기를 해보았을 것입니다. 땅따먹기에서 땅을 따먹으면 선을 그리는데 욕심이 많은 아이들은 선을 반듯하게 그린 것이 아니라 불룩하게 그립니다. 다른 편 아이들이 보고, 항의하기 시작하면서 싸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서양 녘에 노을이지는 저녁이면, 어머니들이 저녁 먹으라고 자녀들을 부르면 모든 것을 두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다음날이면 새롭게 시작합니다.
교회 안에서 분쟁이 일어나는 것은 자신이 모든 일의 중심이 되고 싶은 마음,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반드시 이루겠다는 욕심이 분쟁을 초래합니다. 욕심, 곧 정욕에서 시작한 봉사, 헌신, 사역은 그 끝이 아름답지 못합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한 삶(4-8)
모든 불화와 분쟁은 영적인 문제입니다. 성도는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하는 것입니다(엡 6:12). 모든 갈등의 밑바탕에는 하나님을 향한 영적 교만과 불순종이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마귀를 대적하면서 회개와 겸손을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때 참된 화해와 일치를 맛볼 수 있습니다.
4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5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6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4-6)
하나님의 공동체에서 분쟁을 가져오는 ‘정욕’을 버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개인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마음과 삶의 태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1) 간음한 여인들(4)
야고보는 육신의 욕심으로 싸우는 자들을 ‘간음한 여인들’이라고 말합니다(4). ‘간음한 여인들’이란 말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계에서 회계를 촉구할 때, 사용되는 관용구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계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입니다(사 54:5,6). 그러나 불순종과 반역을 일삼는 피조물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간음한 여자’가 되는 경우는, 세상의 것을 얻기 위해서 세상의 지혜와 방법대로 싸우고 다투는 모습을 취할 때입니다. 얻기 위해서 남편 되신 하나님께 구하지 않을 때입니다. 그렇게 남편에게 구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쾌락을 위해 맘대로 쓰려고 잘못 구할 때입니다.
이런 행동을 야고보는 ‘세상과 벗됨’이라고 말합니다. ‘세상과 벗됨’이란 세상의 가치 기준을 다라 살고, 목숨 바쳐 세상을 사랑하지만, 하나님의 뜻에는 무관심하고 세상의 방식으로 세상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을 친구 삼으면 그것이 곧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 됩니다.
정욕적인 삶의 예로 간음하는 행위를 듭니다. 간음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행동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간음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간음하는 이유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정욕을 이기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의 모습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분의 뜻을 행해야 합니다.
(2) 하나님과 원수들(5-6)
세상에는 빛과 어두움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빛 가운데로 가면 자연스럽게 어두움은 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두움으로 가면 빛이 임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가면 하나님의 빛이 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멀리하면 영적 어두움이 임하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과 벗됨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면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시기를 받게 됩니다(5). 이 ‘시기심(프도노스)’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이 질투는 결코 제 3자가 끼어 들 수 없는 부부 관계에서 생기는 배타적 절대적 적개심입니다. 용서가 안 되는 질투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쟁취하기 위해서 싸우고,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정욕으로 쓰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면, 그래서 세상과 벗하면, 하나님께서 결코 가만히 있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절대적, 배타적 질투로 변해서 심판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 하나님의 질투를 해결하는 길은 그 질투를 넘어서는 ‘더욱 큰 은혜’를 받는 것뿐입니다(6). 더욱 큰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비결이 바로 ‘겸손’입니다(6).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십니다. ‘교만’은 하나님 말씀 위에 서 있는 태도로, 얻기 위해 싸우고,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정욕대로 쓰려고 하나님을 이용하는 태도입니다. 솔로몬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라고 경고합니다(잠 16:18).
성도가 관심을 쏟아야 하는 것은 선하신 하나님을 닮기 위해 노력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가까이 하시며 정욕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시편 73:28)라고 했던 것입니다.
주 앞에 선 겸손한 삶(7-10)
하나님께서는 두 마음을 품는 자를 싫어하십니다. 그들은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자리까지 높아져서 차지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죄’라고 지적하지만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무서워하며 애통하며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만한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7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8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9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10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7-10)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마음이 정결한 사람, 애통하는 사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사람입니다. 7-10절에서 겸손을 설명합니다.
(1) 겸손한 삶(7-8)
첫째로 겸손이란 마귀를 대적하는 것입니다(7). 이것은 하나님께 복종하므로 하나님의 뜻 아래 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기록된 말씀 아래 머무는 것입니다.
교만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적하시고, 겸손하면 우리가 마귀를 대적할 수 있습니다. 겸손하면 마귀가 피하고 교만하면 하나님이 피하십니다. 여기서 두 가지 유의할 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마귀의 피함은 일시적인 것이라는 점, 둘째는 마귀를 대적하는 것은 싸우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아래 머물러 그의 궤계를 피하거나 떠나는 것입니다.
둘째로 겸손이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8). 이것은 외적으로는 손을 깨끗이 하여 행동을 바꾸는 것이고, 내적으로는 세상과 벗되고 하나님과도 벗될 수 있다는 두 마음을 정리하여 성결케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하나님께로만 돌리는 것이다. 의심과 믿음 중에 믿음을 선택하고(1:6-8), 세상과 하나님 중에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이 두 마음을 성결케 하는 것입니다(4:4).
셋째로 겸손이란 애통하는 것입니다(9). 이 말은 세상과 벗하면서, 세상 방식대로 살고, 세상을 즐거워하는 그 마음을 애통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이 말은 슬프게 살라는 말이 아니라 진정한 기쁨을 위해 기뻐할 자격을 갖추라는 말입니다. 그 자격이 바로 세상과 벗된 나를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애통이 있을 때 진정으로 하나님의 질투를 능가하는 더욱 큰 은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겸손이 하늘의 지혜입니다.
모든 분쟁은 욕망을 이루려는 헛된 집념에서 시작됩니다. 신앙은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주님은 말씀을 통해서 욕망을 다스리고 이기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그 은혜는 겸손한 자에게 임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