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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제7회
시인 김광협 선생 서거 28주년 추모 문학제
일시: 2021. 11. 6(토) 오후 2시
장소: 천지연 김광협 시비
주최: 솔동산문학회
후원: 카노푸스음악회. 천지연휴게소. 좋은사람들
<내지>
제7회
시인 김광협 선생 서거 28주년 추모 문학제
일시: 2021. 11. 6(토) 오후 2시
장소: 천지연 김광협 시비
주최: 솔동산문학회
후원: 카노푸스음악회. 천지연휴게소. 좋은사람들
제7회 시인 김광협 선생 서거 28주년 추모문학제
식순
사회 고현심(시인)
1부: 서귀포의 서정
○ 김광협 문학연보 소개 ----------------------- 사회자
○ 김광협의 문학세계 --------------------- 시인 윤봉택
○ 추모 공연(살풀이춤)------------------- 김하월 무용가
2부: 천파만파에 기대어
시낭송(찬란한 밤)------------------------- 시인 한성국
시낭송(뼉다귀) -------------------------- 시인 한지헌
시낭송(천파만파) ----------------------- 시인 조승훈
노래(님의 향기) ------------------------------ 이화호
시낭송(밤비)-------------------------- 시인 강승원
시낭송(추풍) ------------------------- 시인 박인선
노래(My Way)-------------------------- 김찬수
시낭송(청년찬가 2)------------------- 시인 박지호
시낭송(누이 전) ------------------------- 시인 현신철
노래(가을 사랑) ---------------------- 현기열·박인선
시낭송(강설기)-------------------------- 한성국/고현심
노래(유자꽃피는마을)----------------------------- 시민
연주(색소폰) 천상재회 ----------------------- 한준철
감사 말씀---------------------------- 문학회장 강승원
<시인 김광협 선생 문학 연보>
1941. 8. 6. 서귀포시 호근동 1851번지에서 출생(부 김남운. 모 김사열)
1948. 서호초등학교 2학년으로 입학
1953. 서귀중학교 입학. 국어교사 玄敬元 선생의 영향으로 처음 문학에 흥미를 가짐.
1956. 서귀농림고등학교 농학과 입학, 국어교사 강군황 선생의 문학 지도를 받음.
1957. 제1회 한라예술제 백일장 시(천지연) 장원
1959. 서울대학교 사법대학 국어교육과 입학. 작품 활동함
1963. 23세. 월간종합교양지『신세계』 제1회 신인상 시(빙하를 위한 시) 당선(심사 박두진)
1965.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강설기) 당선
1961. 『詩學』동인 참가(권오윤. 이성부. 이탄. 최하림)
1969. 29세 부애숙과 결혼
1970. 월간문학 6월호에 ‘유자꽃 피는 마을’발표
1970. 첫 시집 『강설기』 발간
1971. ‘폐습’ 연재 중에 필화 사건에 말려듦
1973. 제2시집 『천파만파』 발간
1974. 34세. 현대문학상 수상
1976. 36세. 동인지『詩文章』 창간(강우식. 강은교. 권오윤. 신중신. 이성부. 정진규. 조창환)
1981. 41세 제3시집 『농민』 발간
1981. 대한민국문학상 수상
1983. 자선시집 『황소와 탱크』 발간
1983. 제4시집 『예성강곡』 발간
1984. 제5시집 『돌하르방 어디 감수광』 발간
1990. 50세. 자선시집 『유자꽃 마을』 발간
1991. 번역시집 『아메리칸 인디언 청년시집』 발간
1992. 제6시집 『사촌서정』 발간
1992. 번역시집 『투르게네프 산문시』발간
1993. 7. 5. 53세. 서울성모병원에서 지병으로 영면
1993. 7. 7. 서귀포문학회장으로 엄수, 호근리 학수바위 선영에 안치.
《시인 김광협 선생에 대하여》
시인 김광협 선생은
1941년 6월 서귀포시 호근동 1851번지 조부모님 댁에서 아버지 김남운 어머니 김사열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나셨다. 본은 광산이며, 자호는 소운小雲이다. 태어난 이듬해에 아버지가 당시 경성대학 부속 생약연구소에 취직하게 되자, 아버지 따라 가족들이 토평동 관사로 이사를 하게 된다. 4세 때 석주명 박사가 나비 잡는 모습을 보았고, 부친에게 천자문을 익힌 다음,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 다시 호근동 조부모 댁으로 가서 서호초등학교 2학년으로 입학하다.
11세가 되던 1951년 4·3사건이 발발하자 외갓집 신효동으로 내려와서 살다가 1953년 서귀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는 다시 토평동으로 가서 살았다. 1956년 16세에 서귀농림고등학교에 입학하고, 그곳에서 국어교사 강군황 선생을 만나 문학 지도를 받았다. 교내 백일장에 수필 등으로 장원을 하는 등 창작 활동을 하 면서, 1957년 17세 때 제1회 한라예술제 백일장에서 시‘천지연’으로 장원을 하다. 이후 1959년 19세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 입학하면서 창작 활동을 계속하다.
김광협 시인은 서귀포가 낳은 이 시대의 최고의 시인이자 서귀포시에서 현대 시단에 등단한 최초의 시인이기도 하다. 서귀포시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196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강설기)가 당선되었고, 동아일보에 입사한 뒤 제주인으로 서는 처음으로 수도 서울에서 문인으로 대성하여, 1981년 41세에 대한민국문학 상을 수상하다.
1963년 23세에 월간 종합교양잡지『신세계』에서 공모한 제1회 신인상 시 부문 에‘빙하를 위한 시’가 박두진 선생의 심사로 당선되어 문단에 첫 발자국을 내딛 기까지, 1956년 서귀농림고등학교(현 서귀과학고) 국어 교사 姜君璜 선생의 지도를 받았다고 시집 『황소와 탱크』 연보에서 밝히고 있다. 시인 박두진 선생은 김광협 시인의 첫 시집『강설기』의 서문에서 “시를 쓰는 사람 중에는 시가 무엇인지를 잘 모르고 쓰는 사람과, 시가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쓰는 사람과, 시가 무엇이며 어떤 것인가를 초월하는 차원에서 쓰는 사람의 세 부류가 있다.”고 하면서,“김광협 시인은 시가 무엇인지보다는 시가 어떠한 것인지, 어떠해야 하는 것인지를 잘 알고 쓰는 시인임이 분명하다.”고 하다. 그리고 한기팔 시인은 시인 김광협 선생을 “바람처럼 왔다가 구름처럼 떠나는 시인”이라고 하다.
소설가 현길언 선생은 김광협 시인과의 사반세기 우정에서 “그의 기질은 아름다운 서귀포의 자연과 감귤꽃 향취에 취하여 땅에 순응하고 하늘만 쳐다보며 사는 온유한 모습만은 아니었다. 바람과 돌짝밭과 파도에 닳고 닳은 심장과 무쇠 같이 탄탄한 팔뚝으로 자연과 싸우면서 살아온 힘 있는 농부의 정서다. 그것은 배반을 용납하지 않고, 정직을 훼손하는 모든 상황을 묵과하지 못하는 논리를 세워 주었다. 그의 詩作과 기자 생활을 관류했던 하나의 철학은 바로 거기에서 연유되었다.”고 하다.
50세에 이르러서는 건강이 많이 악화되었다. 가끔 고향에 내려오시면 음료수 병에 몰래 술을 담아서 마시곤 할 만큼 선생께서는 술을 가까이하셨는데, 이는 분명 척박한 서울 환경을 이겨내기 위한 자신만의 한 방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육신이 병마에 지쳐가면서도 선생께서는 1990년 자선시집『유자꽃 마을』을 펴내셨고, 이어서 1991년 번역시집『아메리칸 인디언 청년시집』을 병상에서 번역 발간하셨으며, 1992년 제6시집『산촌서정』, 번역시집 『투르게네프 산문시』 또한 병상에서 발간하시다.
1990년 『유자꽃 마을』책머리에서 선생은 “시인이란 적어도 자기 자신의 삶, 이웃 이야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는 물론, 자연과 천지 우주에 대한‘각자(覺者)’ (그것도 대단한)이어야 한다…… 중략…….지금도 나는 모든 것을 연습 중이다.”고 하다.
또한 마지막 시집『山村抒情』의 자서에서 “ 내 시는 아직도 암야행(暗夜行) 중이다.”하며 자신의 노정에 방점을 하다. 이후 1993년 7월 5일 새벽 2시 35분 강남성모병원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53세의 나이로 영면하시다.
선생을 서귀포로 운구하여 7월 7일 당시 서귀포문학회(회장 강문신) 주관으로 전 회원들의 뜻을 모아 제주문학사에서는 처음 문학회장(서귀포문학장)으로 엄수하다.
1995년에는 김광협 시인 시비건립추진위원회가 구성되어, 서귀포시의 지원을 받아 1996년 시인 김광 협 선생의 詩‘천지연’에서 밝힌 바와 같이“이제 / 너를 닮아 / 살겠다던 소년, / 天地淵 / 네 곁에 원히 살으리라.”처럼 천지연 입구에‘유자꽃 피는 마을’ 김광협 시비가 세워졌다. 이 또한 서귀포에서는 최초의 詩碑이다.
찬란한 밤
시 김광협
낭송 한성국
나는 이 밤에 나를 잠재우려 듭니다
나는 이 밤에 나를 잠재우지 못 합니다
밤이 하도 찬란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나의 젊음은 밤의 밤입니다
나는 밤의 한가운데를 뜁니다
누워있는 채로 밤의 한가운데를 뜁니다
찬란하기 그지없는 밤을 뜁니다
밤은 모든 것을 잠재웁니다
나의 약점을 곧잘 잠재웁니다
그러나 오늘 이 밤은 나와 함께 눈을 치뜹니다
나의 눈과 밤의 눈과가 맞부딪칩니다
그래서 찬란한 밤이 됩니다
이같이 찬란한 밤엔
나는 나를 잠재주지 못합니다.
뼉다귀
시 김광협
낭송 한지헌
더불어 살던 살점이란 것은 떨어져 나가고
떨어져 나가 질겅질겅 貪慾(탐욕)에 기여하고
종내는 개숫물에 섞이어 마지막이 되고 마는데
살점과 함께 살던 뼉다귀,
그 뼉다귀란 것은 어디 그런가.
뼉다귀란 것은 시퍼런 칼날,
육곳간의 칼날도 이기고
이겨 벗어나 내동댕이쳐지고
내동댕이쳐져 風霜(풍상)에 놓이고
風霜에 놓여 땎이고 치이고
그것과 더불어 놀며 곱디고운 白骨(백골)이 되고
그것이 되어서도 한 百年(백년)은 조히 살고,
한 자그마한 예를 들면
한 마리 개, 섣부른 一千(일천)마리 개
그놈의 개들도 뼉다귀를 탐해
貪慾의 이빨로 짓이기고 물어뜯고
뼉다귀와 맞부닥쳐 내뒹굴며 熾熱(치열)하고 제 아무리 해보지만
잇자죽마저 단 하나 받아들이지 않는다.
측은스런 뼉다귀
천파 만파
시 김광협
낭송 조승훈
남정네들이 낫을 간다.
낫이 무디어졌다고 슥삭슥삭
낫의 날을 세운다.
보리 한 단을 베어 넘기기 위해서
숫돌의 몇 분지 몇 푼을 축낸다.
뻐꾸기 소리와 꿩꿩 장서방 소리가 와
낫의 날과 숫돌 사이에 와서 먹는다.
낫의 날과 숫돌 사이에 파도 소리가 와서 먹는다.
파도가 넘실 넘실 넘실거린다.
낫의 날과 숫돌 사이에 파도가 일어난다.
보리밭에 파도는 천파만파로 들락퀸다.
에익, 파도를 넘자, 넘어서 가자.
남정네 한 평생 까짓, 파도쯤이야.
시퍼렇게 날이 선 낫을 허리춤에 차고
이 세상 더러운 세상 까짓,
낫 한자루, 그것이라도 휘두르며 넘어서 가자.
(1973. 5. 31. 제주신문)
밤 비
시 김광협
낭송 강승원
세종로에 밤비가 내리누나.
사람들은 다 돌아가고
어데로인지 다 돌아가고
이 밤 세종로에 찾아오는 빗줄기,
나도 돌아갈까부다.
어데로든지 돌아갈까부다.
비 내리는 밤 꿈 속에서라도
고향엘 가거나 아무데라도,
정말 나도 한번 돌아갈까부다.
생전 가볼 데라곤 없이
떠돌아다니기만 떠돌아다니기만
지친 몸 호졸근히 적셔주는 밤비.
밤비가 세종로에 소리 없이 내리누나.
밤새 내리는 이 비는 언제나 그치리.
떠돌아다니기만 떠돌아다니기만
언제나 어느 곳에
몸 둘 곳을 정하리
추 풍
시 김광협
낭송 박인선
젊은들에게도 無常(무상)이라는 말이 있음직한 것이다. 여름 한철 무성하게 草綠(초록)으로 빛나면서 기어오르는 담쟁이덩굴 이래서 담쟁이덩굴 같이 싱상한, 그리고 그 垂直(수직)의 가파로운 딱닥한 벽을 기어오르는 숨찬 이야기를 하다간 어느새 담쟁이덩굴이 凋落(조락)을 맞이할 때 그 아래에 와서 젊음의 敗北(패배)와 嘆息(탄식을 털어놓게도 되는 것이니 말이다.
담쟁이덩굴은 이제 한줄기 秋風(추풍)이 털고 가버리면 벗은채로 그래도 垂直(수직)의 壁(벽)에 死力(사력)으로 찰싹 붙어 죽음이 겨울을 迎送(영송)하고 그리고 또 봄을 맞이할 것이다.
그래서 그 봄도 가고 또 다시 여름이 왔을 때 젊은이는 그 담쟁이덩굴 아래서 다시 만나 敗北의 盞(잔)을 던지고 새 盞(잔)을 맞비벼댈 것이니 젊은이는 그렇게도 幸福(행복)한 것이다. 이런 것을 각별히 일컬어 젊은이의 無常(무상)이라는 말로 부름직도 한 것이다.
靑年 讚歌·2
시 김광협
낭송 박지호
十년전 江山에 젊음이 탈 때
十년전 山河에 피 강물 흐를 때
겨레는 보았다. 義로운 젊음.
統治者(통치자)가 썩을 때
그들이 專斷(전단)할 때
나라가 어려울 때
겨레가 괴로울 때
詩代가 어두울 때
젊음은 한갖 불쏘시개
젊음은 한낱 티끌인 것을
겨레는 똑똑히 보았다.
十년전 四월 十九일
大邱에서 馬山에서
서울 鐘路에서 光化門에서
景武臺(경무대)가는 길 어귀에서
自由를 달라
獨裁者는 물러가라
不正腐敗를 몰아내자
젊음을 불사르던 것을
凶彈에 맞아 꽃처럼 지던 것을
겨레는 보았다. 겨레는 알고 있다.
그날이 다시 오고
十년이 되고
詩代도 江山도 변하였건만
十년전 그날을
그날의 義憤(의분)을, 非嘆(비탄)을
그날의 歡呼 (환호)를, 그날의 榮光(영광)을
뉘라서 잊을소냐. 뉘라서 잊을소냐.
젊음이여, 榮光(영광)의 젊음이여.
내 나라의 젊음이여.
내 겨레의 靑年이여.
우리들의 사랑이여.
영원한 깃발이여.
詩代의 횟불이여.
前進(전진)의 操航手(조항수)여.
젊은이여, 겨레의 앞에 서서
횃불을 밝히라. 횃불을 밝히라.
누이 전
시 김광협
낭송 현신철
나이 술이 過(과)하여 간다.
누이야,
너는 콜드크림이라도 한 통 샀느냐?
나의 술은 過(과)하여 가도
너의 콜드크림은 없는
이 恨 많은 세상.
나의 술이 더욱 과하여 간다.
長醉(장취) 끝에 아럼풋이,
밭고랑 너의 괭이질 소릴 듣다간
나는 운다.
북받쳐 不眠(불면)의 밤을 운다
강설기
시 김광협
낭송 한성국/고현심
눈은 숲의 어린 가지에 흰 깁을 내린다.
「프로스트」 氏도 이제는 말을 몰고 돌아가버리었다.
밤은 숲의 어린 가지에 내려온 흰 깁을 빨아 먹는다.
흰 깁은 밤의 머리를 싸맨다.
셀레이던 바람도 잠을 청하는 시간, 나는 엿듣는다.
눈이 숲의 어린 손목을 잡아 흔드는 것을,
숲의 깡마른 볼에 입맞추는 것을,
저 잔잔하게 흐르는 애정의 일월을,
캄캄한 오밤의 푸른 박명을,
내 아가의 무량의 목숨을 엿듣는다.
뭇 영아들이 등을 키어들고 바자니는 소리를,
씩씩거리며 어디엔가 매달려 젖 빠는 소리를,
나는 엿듣는다.
숲 가에서 나는 너의 두개의 유치를 기억한다.
너의 영혼이 잠시 지상에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너의 다수운 입김이 아침의 이슬로 되었던 것을 기억한다.
생명의 빛이 너의 눈동자에 가득차 있었음을 기억한다.
너의 손을 내저어 대기를 흔들었음을 기억한다.
비록 부둥켜 안아 너의 보행을 연습시키었을지라도
너의 발을 디뎌 지구를 느끼었음을 기억한다.
너의 언어는 무에 가까웠을지라도 체득의 언어였으며,
너의 사색은 허에 이웃했을지라도
혈육을 감지하는 높은 혜지였음을 기억한다.
잃어버린 모든 기억들을 나는 상기할 수가 있다.
그러나 나는 상기 단 한가지 죄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숲 가에서 나는 너의 두 개의 유치를 기억한다.
눈은 숲의 어린 가지에 흰 깁을 내린다.
내리어라 내리어라 내리어라.
밤이 눈의 흰 깁을 빨아먹더라도
그의 이마에서 발 끝까지 와서 덮이어라.
온유의 성품으로 사픗사픗 내려오는 숲의 母性이여.
숲은 내 아기의 변모.
곁에 서면 세월이 머리를 쓰다듬는 소리
역사가 장신구를 푸는 소리들,
시름에 젖은 음절로 되어
꽃잎처럼 흩어져 기어다닌다.
괴괴한 이 밤의 얼어붙은 지류에서
서성이는 나의 체읍, 나의 기쁨.
내가 내 자신과 내 아가와 내 인류에게 가까이 돌아가는
청징하고 힘 있는 내 자신의 발자국 소리를 듣는다.
잃어버린 모든 것들을 상기할 수가 있다.
그러나 나는 상기 단 한 가지 죄의 의미를 모른다.
내 숲이여, 내 아가야, 내 자신이여, 내 인류여.
나는 참으로 단 한 가지 죄의 의미를 모른다.
<1965.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
유자꽃 피는 마을
시 김광협
낭송 시민/관광객
내 소년의 마을엔
유자꽃이 하이얗게 피더이다.
유자꽃 꽃잎 새이로
파아란 바다가 촐랑이고,
바다 위론 똑딱선이 미끄러지더이다.
툇마루 위에 유자꽃 꽃잎인듯
백발을 인 조모님은 조을고
내 소년도 오롯 잠이 들면,
보오보오 연락선의 노래조차도
갈매기들의 나래에 묻어
이 마을에 오더이다.
보오보오 연락선이 한소절 울 때마다
떨어지는 유자꽃.
유자꽃 꽃잎이 울고만 싶더이다.
유자꽃 꽃잎이 섧기만 하더이다.
<월간문학. 1980. 6>
<시인 김광협 선생 추모 발자취>
1996. 10. 26. 김광협 시비(유자꽃 피는 마을) 제막
1998. 7. 4. 서거 5주기 김광협 문학제(서귀포문협)
2005. 8. 19. 김광협 시인의 밤
(자연을 사랑하는 문학의 집·서울)
2015. 10. 3. 솔동산문학회(2015. 6. 20. 창립)에서 창립 기념사업으로, 서귀포시에서 최초 시인으로 등단한 김광협 선생 추모 사업을 전개하기로 하여, 2015. 10. 3. 천지연 김광협시인 시비에서 제1회 「시인 김광협선생 서거 22주년 추모문학인 밤」을 개최
- 주요 참석자
미망인 부애숙 여사 및 가족
시인 김용길 ; 김광협과 서귀포에 관한 말씀
화가 이왈종 ; 김광협의 문학세계에 대한 말씀
현을생 시장, 오광협 전시장. 고영우 화백 등
서귀포문협회장 문상금
- 주요 행사
김광협 연보 소개
김광협 시 10편 낭송 등
2015. 10. 26. 김광협문학상 제정
(시전문지 계간 “발견”/발행인 황학주)
2015. 12. 30. 「솔동산문학」 창간호 발간
2016. 2. 1. 김광협문학상 업무 협약식
(서귀포시·발견·서귀포예총)
2016. 10. 22. 제1회 김광협 전도 시낭송대회
(김정문화회관/예총)
제1회 김광협 전도 백일장대회(예총)
○ 제2회 시인 김광협 선생 추모문학제
2016. 10. 29. 서거 23주년 추모 문학의 밤
(주관; 솔동산문학회)
○ 제3회 시인 김광협 선생 추모 문학제
2017.10.28.(공동주관; 솔동산문학회. 서귀포문협)
- 부대행사 ; 제2회 김광협 시 전도낭송대회
제2회 김광협문학제(김광협 시인 문학탐방)
○ 제4회 시인 김광협 선생 추모 문학제
2018. 10. 27~28.
(공동주관; 솔동산문학회. 서귀포예총)
○ 제5회 시인 김광협 선생 추모 문학제
2019. 10. 5(주관; 솔동산문학회)
○ 제6회 시인 김광협 선생 추모 문학제
2020. 10. 17(주관; 솔동산문학회)
제7회
시인 김광협 선생 서거 28주년 추모 문학제
일시: 2021. 11. 6(토) 오후 2시
장소: 천지연 김광협 시비
주최: 솔동산문학회
후원: 카노푸스음악회. 천지연휴게소. 좋은사람들
<내지>
제7회
시인 김광협 선생 서거 28주년 추모 문학제
일시: 2021. 11. 6(토) 오후 2시
장소: 천지연 김광협 시비
주최: 솔동산문학회
후원: 카노푸스음악회. 천지연휴게소. 좋은사람들
제7회 시인 김광협 선생 서거 28주년 추모문학제
식순
사회 고현심(시인)
1부: 서귀포의 서정
○ 김광협 문학연보 소개 ----------------------- 사회자
○ 김광협의 문학세계 --------------------- 시인 윤봉택
○ 추모 공연(살풀이춤)------------------- 김하월 무용가
2부: 천파만파에 기대어
시낭송(찬란한 밤)------------------------- 시인 한성국
시낭송(뼉다귀) -------------------------- 시인 한지헌
시낭송(천파만파) ----------------------- 시인 조승훈
노래(님의 향기) ------------------------------ 이화호
시낭송(밤비)-------------------------- 시인 강승원
시낭송(추풍) ------------------------- 시인 박인선
노래(My Way)-------------------------- 김찬수
시낭송(청년찬가 2)------------------- 시인 박지호
시낭송(누이 전) ------------------------- 시인 현신철
노래(가을 사랑) ---------------------- 현기열·박인선
시낭송(강설기)-------------------------- 한성국/고현심
노래(유자꽃피는마을)----------------------------- 시민
연주(색소폰) 천상재회 ----------------------- 한준철
감사 말씀---------------------------- 문학회장 강승원
<시인 김광협 선생 문학 연보>
1941. 8. 6. 서귀포시 호근동 1851번지에서 출생(부 김남운. 모 김사열)
1948. 서호초등학교 2학년으로 입학
1953. 서귀중학교 입학. 국어교사 玄敬元 선생의 영향으로 처음 문학에 흥미를 가짐.
1956. 서귀농림고등학교 농학과 입학, 국어교사 강군황 선생의 문학 지도를 받음.
1957. 제1회 한라예술제 백일장 시(천지연) 장원
1959. 서울대학교 사법대학 국어교육과 입학. 작품 활동함
1963. 23세. 월간종합교양지『신세계』 제1회 신인상 시(빙하를 위한 시) 당선(심사 박두진)
1965.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강설기) 당선
1961. 『詩學』동인 참가(권오윤. 이성부. 이탄. 최하림)
1969. 29세 부애숙과 결혼
1970. 월간문학 6월호에 ‘유자꽃 피는 마을’발표
1970. 첫 시집 『강설기』 발간
1971. ‘폐습’ 연재 중에 필화 사건에 말려듦
1973. 제2시집 『천파만파』 발간
1974. 34세. 현대문학상 수상
1976. 36세. 동인지『詩文章』 창간(강우식. 강은교. 권오윤. 신중신. 이성부. 정진규. 조창환)
1981. 41세 제3시집 『농민』 발간
1981. 대한민국문학상 수상
1983. 자선시집 『황소와 탱크』 발간
1983. 제4시집 『예성강곡』 발간
1984. 제5시집 『돌하르방 어디 감수광』 발간
1990. 50세. 자선시집 『유자꽃 마을』 발간
1991. 번역시집 『아메리칸 인디언 청년시집』 발간
1992. 제6시집 『사촌서정』 발간
1992. 번역시집 『투르게네프 산문시』발간
1993. 7. 5. 53세. 서울성모병원에서 지병으로 영면
1993. 7. 7. 서귀포문학회장으로 엄수, 호근리 학수바위 선영에 안치.
《시인 김광협 선생에 대하여》
시인 김광협 선생은
1941년 6월 서귀포시 호근동 1851번지 조부모님 댁에서 아버지 김남운 어머니 김사열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나셨다. 본은 광산이며, 자호는 소운小雲이다. 태어난 이듬해에 아버지가 당시 경성대학 부속 생약연구소에 취직하게 되자, 아버지 따라 가족들이 토평동 관사로 이사를 하게 된다. 4세 때 석주명 박사가 나비 잡는 모습을 보았고, 부친에게 천자문을 익힌 다음,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 다시 호근동 조부모 댁으로 가서 서호초등학교 2학년으로 입학하다.
11세가 되던 1951년 4·3사건이 발발하자 외갓집 신효동으로 내려와서 살다가 1953년 서귀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는 다시 토평동으로 가서 살았다. 1956년 16세에 서귀농림고등학교에 입학하고, 그곳에서 국어교사 강군황 선생을 만나 문학 지도를 받았다. 교내 백일장에 수필 등으로 장원을 하는 등 창작 활동을 하 면서, 1957년 17세 때 제1회 한라예술제 백일장에서 시‘천지연’으로 장원을 하다. 이후 1959년 19세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 입학하면서 창작 활동을 계속하다.
김광협 시인은 서귀포가 낳은 이 시대의 최고의 시인이자 서귀포시에서 현대 시단에 등단한 최초의 시인이기도 하다. 서귀포시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196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강설기)가 당선되었고, 동아일보에 입사한 뒤 제주인으로 서는 처음으로 수도 서울에서 문인으로 대성하여, 1981년 41세에 대한민국문학 상을 수상하다.
1963년 23세에 월간 종합교양잡지『신세계』에서 공모한 제1회 신인상 시 부문 에‘빙하를 위한 시’가 박두진 선생의 심사로 당선되어 문단에 첫 발자국을 내딛 기까지, 1956년 서귀농림고등학교(현 서귀과학고) 국어 교사 姜君璜 선생의 지도를 받았다고 시집 『황소와 탱크』 연보에서 밝히고 있다. 시인 박두진 선생은 김광협 시인의 첫 시집『강설기』의 서문에서 “시를 쓰는 사람 중에는 시가 무엇인지를 잘 모르고 쓰는 사람과, 시가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쓰는 사람과, 시가 무엇이며 어떤 것인가를 초월하는 차원에서 쓰는 사람의 세 부류가 있다.”고 하면서,“김광협 시인은 시가 무엇인지보다는 시가 어떠한 것인지, 어떠해야 하는 것인지를 잘 알고 쓰는 시인임이 분명하다.”고 하다. 그리고 한기팔 시인은 시인 김광협 선생을 “바람처럼 왔다가 구름처럼 떠나는 시인”이라고 하다.
소설가 현길언 선생은 김광협 시인과의 사반세기 우정에서 “그의 기질은 아름다운 서귀포의 자연과 감귤꽃 향취에 취하여 땅에 순응하고 하늘만 쳐다보며 사는 온유한 모습만은 아니었다. 바람과 돌짝밭과 파도에 닳고 닳은 심장과 무쇠 같이 탄탄한 팔뚝으로 자연과 싸우면서 살아온 힘 있는 농부의 정서다. 그것은 배반을 용납하지 않고, 정직을 훼손하는 모든 상황을 묵과하지 못하는 논리를 세워 주었다. 그의 詩作과 기자 생활을 관류했던 하나의 철학은 바로 거기에서 연유되었다.”고 하다.
50세에 이르러서는 건강이 많이 악화되었다. 가끔 고향에 내려오시면 음료수 병에 몰래 술을 담아서 마시곤 할 만큼 선생께서는 술을 가까이하셨는데, 이는 분명 척박한 서울 환경을 이겨내기 위한 자신만의 한 방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육신이 병마에 지쳐가면서도 선생께서는 1990년 자선시집『유자꽃 마을』을 펴내셨고, 이어서 1991년 번역시집『아메리칸 인디언 청년시집』을 병상에서 번역 발간하셨으며, 1992년 제6시집『산촌서정』, 번역시집 『투르게네프 산문시』 또한 병상에서 발간하시다.
1990년 『유자꽃 마을』책머리에서 선생은 “시인이란 적어도 자기 자신의 삶, 이웃 이야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는 물론, 자연과 천지 우주에 대한‘각자(覺者)’ (그것도 대단한)이어야 한다…… 중략…….지금도 나는 모든 것을 연습 중이다.”고 하다.
또한 마지막 시집『山村抒情』의 자서에서 “ 내 시는 아직도 암야행(暗夜行) 중이다.”하며 자신의 노정에 방점을 하다. 이후 1993년 7월 5일 새벽 2시 35분 강남성모병원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53세의 나이로 영면하시다.
선생을 서귀포로 운구하여 7월 7일 당시 서귀포문학회(회장 강문신) 주관으로 전 회원들의 뜻을 모아 제주문학사에서는 처음 문학회장(서귀포문학장)으로 엄수하다.
1995년에는 김광협 시인 시비건립추진위원회가 구성되어, 서귀포시의 지원을 받아 1996년 시인 김광 협 선생의 詩‘천지연’에서 밝힌 바와 같이“이제 / 너를 닮아 / 살겠다던 소년, / 天地淵 / 네 곁에 원히 살으리라.”처럼 천지연 입구에‘유자꽃 피는 마을’ 김광협 시비가 세워졌다. 이 또한 서귀포에서는 최초의 詩碑이다.
찬란한 밤
시 김광협
낭송 한성국
나는 이 밤에 나를 잠재우려 듭니다
나는 이 밤에 나를 잠재우지 못 합니다
밤이 하도 찬란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나의 젊음은 밤의 밤입니다
나는 밤의 한가운데를 뜁니다
누워있는 채로 밤의 한가운데를 뜁니다
찬란하기 그지없는 밤을 뜁니다
밤은 모든 것을 잠재웁니다
나의 약점을 곧잘 잠재웁니다
그러나 오늘 이 밤은 나와 함께 눈을 치뜹니다
나의 눈과 밤의 눈과가 맞부딪칩니다
그래서 찬란한 밤이 됩니다
이같이 찬란한 밤엔
나는 나를 잠재주지 못합니다.
뼉다귀
시 김광협
낭송 한지헌
더불어 살던 살점이란 것은 떨어져 나가고
떨어져 나가 질겅질겅 貪慾(탐욕)에 기여하고
종내는 개숫물에 섞이어 마지막이 되고 마는데
살점과 함께 살던 뼉다귀,
그 뼉다귀란 것은 어디 그런가.
뼉다귀란 것은 시퍼런 칼날,
육곳간의 칼날도 이기고
이겨 벗어나 내동댕이쳐지고
내동댕이쳐져 風霜(풍상)에 놓이고
風霜에 놓여 땎이고 치이고
그것과 더불어 놀며 곱디고운 白骨(백골)이 되고
그것이 되어서도 한 百年(백년)은 조히 살고,
한 자그마한 예를 들면
한 마리 개, 섣부른 一千(일천)마리 개
그놈의 개들도 뼉다귀를 탐해
貪慾의 이빨로 짓이기고 물어뜯고
뼉다귀와 맞부닥쳐 내뒹굴며 熾熱(치열)하고 제 아무리 해보지만
잇자죽마저 단 하나 받아들이지 않는다.
측은스런 뼉다귀
천파 만파
시 김광협
낭송 조승훈
남정네들이 낫을 간다.
낫이 무디어졌다고 슥삭슥삭
낫의 날을 세운다.
보리 한 단을 베어 넘기기 위해서
숫돌의 몇 분지 몇 푼을 축낸다.
뻐꾸기 소리와 꿩꿩 장서방 소리가 와
낫의 날과 숫돌 사이에 와서 먹는다.
낫의 날과 숫돌 사이에 파도 소리가 와서 먹는다.
파도가 넘실 넘실 넘실거린다.
낫의 날과 숫돌 사이에 파도가 일어난다.
보리밭에 파도는 천파만파로 들락퀸다.
에익, 파도를 넘자, 넘어서 가자.
남정네 한 평생 까짓, 파도쯤이야.
시퍼렇게 날이 선 낫을 허리춤에 차고
이 세상 더러운 세상 까짓,
낫 한자루, 그것이라도 휘두르며 넘어서 가자.
(1973. 5. 31. 제주신문)
밤 비
시 김광협
낭송 강승원
세종로에 밤비가 내리누나.
사람들은 다 돌아가고
어데로인지 다 돌아가고
이 밤 세종로에 찾아오는 빗줄기,
나도 돌아갈까부다.
어데로든지 돌아갈까부다.
비 내리는 밤 꿈 속에서라도
고향엘 가거나 아무데라도,
정말 나도 한번 돌아갈까부다.
생전 가볼 데라곤 없이
떠돌아다니기만 떠돌아다니기만
지친 몸 호졸근히 적셔주는 밤비.
밤비가 세종로에 소리 없이 내리누나.
밤새 내리는 이 비는 언제나 그치리.
떠돌아다니기만 떠돌아다니기만
언제나 어느 곳에
몸 둘 곳을 정하리
추 풍
시 김광협
낭송 박인선
젊은들에게도 無常(무상)이라는 말이 있음직한 것이다. 여름 한철 무성하게 草綠(초록)으로 빛나면서 기어오르는 담쟁이덩굴 이래서 담쟁이덩굴 같이 싱상한, 그리고 그 垂直(수직)의 가파로운 딱닥한 벽을 기어오르는 숨찬 이야기를 하다간 어느새 담쟁이덩굴이 凋落(조락)을 맞이할 때 그 아래에 와서 젊음의 敗北(패배)와 嘆息(탄식을 털어놓게도 되는 것이니 말이다.
담쟁이덩굴은 이제 한줄기 秋風(추풍)이 털고 가버리면 벗은채로 그래도 垂直(수직)의 壁(벽)에 死力(사력)으로 찰싹 붙어 죽음이 겨울을 迎送(영송)하고 그리고 또 봄을 맞이할 것이다.
그래서 그 봄도 가고 또 다시 여름이 왔을 때 젊은이는 그 담쟁이덩굴 아래서 다시 만나 敗北의 盞(잔)을 던지고 새 盞(잔)을 맞비벼댈 것이니 젊은이는 그렇게도 幸福(행복)한 것이다. 이런 것을 각별히 일컬어 젊은이의 無常(무상)이라는 말로 부름직도 한 것이다.
靑年 讚歌·2
시 김광협
낭송 박지호
十년전 江山에 젊음이 탈 때
十년전 山河에 피 강물 흐를 때
겨레는 보았다. 義로운 젊음.
統治者(통치자)가 썩을 때
그들이 專斷(전단)할 때
나라가 어려울 때
겨레가 괴로울 때
詩代가 어두울 때
젊음은 한갖 불쏘시개
젊음은 한낱 티끌인 것을
겨레는 똑똑히 보았다.
十년전 四월 十九일
大邱에서 馬山에서
서울 鐘路에서 光化門에서
景武臺(경무대)가는 길 어귀에서
自由를 달라
獨裁者는 물러가라
不正腐敗를 몰아내자
젊음을 불사르던 것을
凶彈에 맞아 꽃처럼 지던 것을
겨레는 보았다. 겨레는 알고 있다.
그날이 다시 오고
十년이 되고
詩代도 江山도 변하였건만
十년전 그날을
그날의 義憤(의분)을, 非嘆(비탄)을
그날의 歡呼 (환호)를, 그날의 榮光(영광)을
뉘라서 잊을소냐. 뉘라서 잊을소냐.
젊음이여, 榮光(영광)의 젊음이여.
내 나라의 젊음이여.
내 겨레의 靑年이여.
우리들의 사랑이여.
영원한 깃발이여.
詩代의 횟불이여.
前進(전진)의 操航手(조항수)여.
젊은이여, 겨레의 앞에 서서
횃불을 밝히라. 횃불을 밝히라.
누이 전
시 김광협
낭송 현신철
나이 술이 過(과)하여 간다.
누이야,
너는 콜드크림이라도 한 통 샀느냐?
나의 술은 過(과)하여 가도
너의 콜드크림은 없는
이 恨 많은 세상.
나의 술이 더욱 과하여 간다.
長醉(장취) 끝에 아럼풋이,
밭고랑 너의 괭이질 소릴 듣다간
나는 운다.
북받쳐 不眠(불면)의 밤을 운다
강설기
시 김광협
낭송 한성국/고현심
눈은 숲의 어린 가지에 흰 깁을 내린다.
「프로스트」 氏도 이제는 말을 몰고 돌아가버리었다.
밤은 숲의 어린 가지에 내려온 흰 깁을 빨아 먹는다.
흰 깁은 밤의 머리를 싸맨다.
셀레이던 바람도 잠을 청하는 시간, 나는 엿듣는다.
눈이 숲의 어린 손목을 잡아 흔드는 것을,
숲의 깡마른 볼에 입맞추는 것을,
저 잔잔하게 흐르는 애정의 일월을,
캄캄한 오밤의 푸른 박명을,
내 아가의 무량의 목숨을 엿듣는다.
뭇 영아들이 등을 키어들고 바자니는 소리를,
씩씩거리며 어디엔가 매달려 젖 빠는 소리를,
나는 엿듣는다.
숲 가에서 나는 너의 두개의 유치를 기억한다.
너의 영혼이 잠시 지상에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너의 다수운 입김이 아침의 이슬로 되었던 것을 기억한다.
생명의 빛이 너의 눈동자에 가득차 있었음을 기억한다.
너의 손을 내저어 대기를 흔들었음을 기억한다.
비록 부둥켜 안아 너의 보행을 연습시키었을지라도
너의 발을 디뎌 지구를 느끼었음을 기억한다.
너의 언어는 무에 가까웠을지라도 체득의 언어였으며,
너의 사색은 허에 이웃했을지라도
혈육을 감지하는 높은 혜지였음을 기억한다.
잃어버린 모든 기억들을 나는 상기할 수가 있다.
그러나 나는 상기 단 한가지 죄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숲 가에서 나는 너의 두 개의 유치를 기억한다.
눈은 숲의 어린 가지에 흰 깁을 내린다.
내리어라 내리어라 내리어라.
밤이 눈의 흰 깁을 빨아먹더라도
그의 이마에서 발 끝까지 와서 덮이어라.
온유의 성품으로 사픗사픗 내려오는 숲의 母性이여.
숲은 내 아기의 변모.
곁에 서면 세월이 머리를 쓰다듬는 소리
역사가 장신구를 푸는 소리들,
시름에 젖은 음절로 되어
꽃잎처럼 흩어져 기어다닌다.
괴괴한 이 밤의 얼어붙은 지류에서
서성이는 나의 체읍, 나의 기쁨.
내가 내 자신과 내 아가와 내 인류에게 가까이 돌아가는
청징하고 힘 있는 내 자신의 발자국 소리를 듣는다.
잃어버린 모든 것들을 상기할 수가 있다.
그러나 나는 상기 단 한 가지 죄의 의미를 모른다.
내 숲이여, 내 아가야, 내 자신이여, 내 인류여.
나는 참으로 단 한 가지 죄의 의미를 모른다.
<1965.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
유자꽃 피는 마을
시 김광협
낭송 시민/관광객
내 소년의 마을엔
유자꽃이 하이얗게 피더이다.
유자꽃 꽃잎 새이로
파아란 바다가 촐랑이고,
바다 위론 똑딱선이 미끄러지더이다.
툇마루 위에 유자꽃 꽃잎인듯
백발을 인 조모님은 조을고
내 소년도 오롯 잠이 들면,
보오보오 연락선의 노래조차도
갈매기들의 나래에 묻어
이 마을에 오더이다.
보오보오 연락선이 한소절 울 때마다
떨어지는 유자꽃.
유자꽃 꽃잎이 울고만 싶더이다.
유자꽃 꽃잎이 섧기만 하더이다.
<월간문학. 1980. 6>
<시인 김광협 선생 추모 발자취>
1996. 10. 26. 김광협 시비(유자꽃 피는 마을) 제막
1998. 7. 4. 서거 5주기 김광협 문학제(서귀포문협)
2005. 8. 19. 김광협 시인의 밤
(자연을 사랑하는 문학의 집·서울)
2015. 10. 3. 솔동산문학회(2015. 6. 20. 창립)에서 창립 기념사업으로, 서귀포시에서 최초 시인으로 등단한 김광협 선생 추모 사업을 전개하기로 하여, 2015. 10. 3. 천지연 김광협시인 시비에서 제1회 「시인 김광협선생 서거 22주년 추모문학인 밤」을 개최
- 주요 참석자
미망인 부애숙 여사 및 가족
시인 김용길 ; 김광협과 서귀포에 관한 말씀
화가 이왈종 ; 김광협의 문학세계에 대한 말씀
현을생 시장, 오광협 전시장. 고영우 화백 등
서귀포문협회장 문상금
- 주요 행사
김광협 연보 소개
김광협 시 10편 낭송 등
2015. 10. 26. 김광협문학상 제정
(시전문지 계간 “발견”/발행인 황학주)
2015. 12. 30. 「솔동산문학」 창간호 발간
2016. 2. 1. 김광협문학상 업무 협약식
(서귀포시·발견·서귀포예총)
2016. 10. 22. 제1회 김광협 전도 시낭송대회
(김정문화회관/예총)
제1회 김광협 전도 백일장대회(예총)
○ 제2회 시인 김광협 선생 추모문학제
2016. 10. 29. 서거 23주년 추모 문학의 밤
(주관; 솔동산문학회)
○ 제3회 시인 김광협 선생 추모 문학제
2017.10.28.(공동주관; 솔동산문학회. 서귀포문협)
- 부대행사 ; 제2회 김광협 시 전도낭송대회
제2회 김광협문학제(김광협 시인 문학탐방)
○ 제4회 시인 김광협 선생 추모 문학제
2018. 10. 27~28.
(공동주관; 솔동산문학회. 서귀포예총)
○ 제5회 시인 김광협 선생 추모 문학제
2019. 10. 5(주관; 솔동산문학회)
○ 제6회 시인 김광협 선생 추모 문학제
2020. 10. 17(주관; 솔동산문학회)
제7회
시인 김광협 선생 서거 28주년 추모 문학제
일시: 2021. 11. 6(토) 오후 2시
장소: 천지연 김광협 시비
주최: 솔동산문학회
후원: 카노푸스음악회. 천지연휴게소. 좋은사람들
<내지>
제7회
시인 김광협 선생 서거 28주년 추모 문학제
일시: 2021. 11. 6(토) 오후 2시
장소: 천지연 김광협 시비
주최: 솔동산문학회
후원: 카노푸스음악회. 천지연휴게소. 좋은사람들
제7회 시인 김광협 선생 서거 28주년 추모문학제
식순
사회 고현심(시인)
1부: 서귀포의 서정
○ 김광협 문학연보 소개 ----------------------- 사회자
○ 김광협의 문학세계 --------------------- 시인 윤봉택
○ 추모 공연(살풀이춤)------------------- 김하월 무용가
2부: 천파만파에 기대어
시낭송(찬란한 밤)------------------------- 시인 한성국
시낭송(뼉다귀) -------------------------- 시인 한지헌
시낭송(천파만파) ----------------------- 시인 조승훈
노래(님의 향기) ------------------------------ 이화호
시낭송(밤비)-------------------------- 시인 강승원
시낭송(추풍) ------------------------- 시인 박인선
노래(My Way)-------------------------- 김찬수
시낭송(청년찬가 2)------------------- 시인 박지호
시낭송(누이 전) ------------------------- 시인 현신철
노래(가을 사랑) ---------------------- 현기열·박인선
시낭송(강설기)-------------------------- 한성국/고현심
노래(유자꽃피는마을)----------------------------- 시민
연주(색소폰) 천상재회 ----------------------- 한준철
감사 말씀---------------------------- 문학회장 강승원
<시인 김광협 선생 문학 연보>
1941. 8. 6. 서귀포시 호근동 1851번지에서 출생(부 김남운. 모 김사열)
1948. 서호초등학교 2학년으로 입학
1953. 서귀중학교 입학. 국어교사 玄敬元 선생의 영향으로 처음 문학에 흥미를 가짐.
1956. 서귀농림고등학교 농학과 입학, 국어교사 강군황 선생의 문학 지도를 받음.
1957. 제1회 한라예술제 백일장 시(천지연) 장원
1959. 서울대학교 사법대학 국어교육과 입학. 작품 활동함
1963. 23세. 월간종합교양지『신세계』 제1회 신인상 시(빙하를 위한 시) 당선(심사 박두진)
1965.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강설기) 당선
1961. 『詩學』동인 참가(권오윤. 이성부. 이탄. 최하림)
1969. 29세 부애숙과 결혼
1970. 월간문학 6월호에 ‘유자꽃 피는 마을’발표
1970. 첫 시집 『강설기』 발간
1971. ‘폐습’ 연재 중에 필화 사건에 말려듦
1973. 제2시집 『천파만파』 발간
1974. 34세. 현대문학상 수상
1976. 36세. 동인지『詩文章』 창간(강우식. 강은교. 권오윤. 신중신. 이성부. 정진규. 조창환)
1981. 41세 제3시집 『농민』 발간
1981. 대한민국문학상 수상
1983. 자선시집 『황소와 탱크』 발간
1983. 제4시집 『예성강곡』 발간
1984. 제5시집 『돌하르방 어디 감수광』 발간
1990. 50세. 자선시집 『유자꽃 마을』 발간
1991. 번역시집 『아메리칸 인디언 청년시집』 발간
1992. 제6시집 『사촌서정』 발간
1992. 번역시집 『투르게네프 산문시』발간
1993. 7. 5. 53세. 서울성모병원에서 지병으로 영면
1993. 7. 7. 서귀포문학회장으로 엄수, 호근리 학수바위 선영에 안치.
《시인 김광협 선생에 대하여》
시인 김광협 선생은
1941년 6월 서귀포시 호근동 1851번지 조부모님 댁에서 아버지 김남운 어머니 김사열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나셨다. 본은 광산이며, 자호는 소운小雲이다. 태어난 이듬해에 아버지가 당시 경성대학 부속 생약연구소에 취직하게 되자, 아버지 따라 가족들이 토평동 관사로 이사를 하게 된다. 4세 때 석주명 박사가 나비 잡는 모습을 보았고, 부친에게 천자문을 익힌 다음,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 다시 호근동 조부모 댁으로 가서 서호초등학교 2학년으로 입학하다.
11세가 되던 1951년 4·3사건이 발발하자 외갓집 신효동으로 내려와서 살다가 1953년 서귀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는 다시 토평동으로 가서 살았다. 1956년 16세에 서귀농림고등학교에 입학하고, 그곳에서 국어교사 강군황 선생을 만나 문학 지도를 받았다. 교내 백일장에 수필 등으로 장원을 하는 등 창작 활동을 하 면서, 1957년 17세 때 제1회 한라예술제 백일장에서 시‘천지연’으로 장원을 하다. 이후 1959년 19세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 입학하면서 창작 활동을 계속하다.
김광협 시인은 서귀포가 낳은 이 시대의 최고의 시인이자 서귀포시에서 현대 시단에 등단한 최초의 시인이기도 하다. 서귀포시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196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강설기)가 당선되었고, 동아일보에 입사한 뒤 제주인으로 서는 처음으로 수도 서울에서 문인으로 대성하여, 1981년 41세에 대한민국문학 상을 수상하다.
1963년 23세에 월간 종합교양잡지『신세계』에서 공모한 제1회 신인상 시 부문 에‘빙하를 위한 시’가 박두진 선생의 심사로 당선되어 문단에 첫 발자국을 내딛 기까지, 1956년 서귀농림고등학교(현 서귀과학고) 국어 교사 姜君璜 선생의 지도를 받았다고 시집 『황소와 탱크』 연보에서 밝히고 있다. 시인 박두진 선생은 김광협 시인의 첫 시집『강설기』의 서문에서 “시를 쓰는 사람 중에는 시가 무엇인지를 잘 모르고 쓰는 사람과, 시가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쓰는 사람과, 시가 무엇이며 어떤 것인가를 초월하는 차원에서 쓰는 사람의 세 부류가 있다.”고 하면서,“김광협 시인은 시가 무엇인지보다는 시가 어떠한 것인지, 어떠해야 하는 것인지를 잘 알고 쓰는 시인임이 분명하다.”고 하다. 그리고 한기팔 시인은 시인 김광협 선생을 “바람처럼 왔다가 구름처럼 떠나는 시인”이라고 하다.
소설가 현길언 선생은 김광협 시인과의 사반세기 우정에서 “그의 기질은 아름다운 서귀포의 자연과 감귤꽃 향취에 취하여 땅에 순응하고 하늘만 쳐다보며 사는 온유한 모습만은 아니었다. 바람과 돌짝밭과 파도에 닳고 닳은 심장과 무쇠 같이 탄탄한 팔뚝으로 자연과 싸우면서 살아온 힘 있는 농부의 정서다. 그것은 배반을 용납하지 않고, 정직을 훼손하는 모든 상황을 묵과하지 못하는 논리를 세워 주었다. 그의 詩作과 기자 생활을 관류했던 하나의 철학은 바로 거기에서 연유되었다.”고 하다.
50세에 이르러서는 건강이 많이 악화되었다. 가끔 고향에 내려오시면 음료수 병에 몰래 술을 담아서 마시곤 할 만큼 선생께서는 술을 가까이하셨는데, 이는 분명 척박한 서울 환경을 이겨내기 위한 자신만의 한 방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육신이 병마에 지쳐가면서도 선생께서는 1990년 자선시집『유자꽃 마을』을 펴내셨고, 이어서 1991년 번역시집『아메리칸 인디언 청년시집』을 병상에서 번역 발간하셨으며, 1992년 제6시집『산촌서정』, 번역시집 『투르게네프 산문시』 또한 병상에서 발간하시다.
1990년 『유자꽃 마을』책머리에서 선생은 “시인이란 적어도 자기 자신의 삶, 이웃 이야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는 물론, 자연과 천지 우주에 대한‘각자(覺者)’ (그것도 대단한)이어야 한다…… 중략…….지금도 나는 모든 것을 연습 중이다.”고 하다.
또한 마지막 시집『山村抒情』의 자서에서 “ 내 시는 아직도 암야행(暗夜行) 중이다.”하며 자신의 노정에 방점을 하다. 이후 1993년 7월 5일 새벽 2시 35분 강남성모병원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53세의 나이로 영면하시다.
선생을 서귀포로 운구하여 7월 7일 당시 서귀포문학회(회장 강문신) 주관으로 전 회원들의 뜻을 모아 제주문학사에서는 처음 문학회장(서귀포문학장)으로 엄수하다.
1995년에는 김광협 시인 시비건립추진위원회가 구성되어, 서귀포시의 지원을 받아 1996년 시인 김광 협 선생의 詩‘천지연’에서 밝힌 바와 같이“이제 / 너를 닮아 / 살겠다던 소년, / 天地淵 / 네 곁에 원히 살으리라.”처럼 천지연 입구에‘유자꽃 피는 마을’ 김광협 시비가 세워졌다. 이 또한 서귀포에서는 최초의 詩碑이다.
찬란한 밤
시 김광협
낭송 한성국
나는 이 밤에 나를 잠재우려 듭니다
나는 이 밤에 나를 잠재우지 못 합니다
밤이 하도 찬란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나의 젊음은 밤의 밤입니다
나는 밤의 한가운데를 뜁니다
누워있는 채로 밤의 한가운데를 뜁니다
찬란하기 그지없는 밤을 뜁니다
밤은 모든 것을 잠재웁니다
나의 약점을 곧잘 잠재웁니다
그러나 오늘 이 밤은 나와 함께 눈을 치뜹니다
나의 눈과 밤의 눈과가 맞부딪칩니다
그래서 찬란한 밤이 됩니다
이같이 찬란한 밤엔
나는 나를 잠재주지 못합니다.
뼉다귀
시 김광협
낭송 한지헌
더불어 살던 살점이란 것은 떨어져 나가고
떨어져 나가 질겅질겅 貪慾(탐욕)에 기여하고
종내는 개숫물에 섞이어 마지막이 되고 마는데
살점과 함께 살던 뼉다귀,
그 뼉다귀란 것은 어디 그런가.
뼉다귀란 것은 시퍼런 칼날,
육곳간의 칼날도 이기고
이겨 벗어나 내동댕이쳐지고
내동댕이쳐져 風霜(풍상)에 놓이고
風霜에 놓여 땎이고 치이고
그것과 더불어 놀며 곱디고운 白骨(백골)이 되고
그것이 되어서도 한 百年(백년)은 조히 살고,
한 자그마한 예를 들면
한 마리 개, 섣부른 一千(일천)마리 개
그놈의 개들도 뼉다귀를 탐해
貪慾의 이빨로 짓이기고 물어뜯고
뼉다귀와 맞부닥쳐 내뒹굴며 熾熱(치열)하고 제 아무리 해보지만
잇자죽마저 단 하나 받아들이지 않는다.
측은스런 뼉다귀
천파 만파
시 김광협
낭송 조승훈
남정네들이 낫을 간다.
낫이 무디어졌다고 슥삭슥삭
낫의 날을 세운다.
보리 한 단을 베어 넘기기 위해서
숫돌의 몇 분지 몇 푼을 축낸다.
뻐꾸기 소리와 꿩꿩 장서방 소리가 와
낫의 날과 숫돌 사이에 와서 먹는다.
낫의 날과 숫돌 사이에 파도 소리가 와서 먹는다.
파도가 넘실 넘실 넘실거린다.
낫의 날과 숫돌 사이에 파도가 일어난다.
보리밭에 파도는 천파만파로 들락퀸다.
에익, 파도를 넘자, 넘어서 가자.
남정네 한 평생 까짓, 파도쯤이야.
시퍼렇게 날이 선 낫을 허리춤에 차고
이 세상 더러운 세상 까짓,
낫 한자루, 그것이라도 휘두르며 넘어서 가자.
(1973. 5. 31. 제주신문)
밤 비
시 김광협
낭송 강승원
세종로에 밤비가 내리누나.
사람들은 다 돌아가고
어데로인지 다 돌아가고
이 밤 세종로에 찾아오는 빗줄기,
나도 돌아갈까부다.
어데로든지 돌아갈까부다.
비 내리는 밤 꿈 속에서라도
고향엘 가거나 아무데라도,
정말 나도 한번 돌아갈까부다.
생전 가볼 데라곤 없이
떠돌아다니기만 떠돌아다니기만
지친 몸 호졸근히 적셔주는 밤비.
밤비가 세종로에 소리 없이 내리누나.
밤새 내리는 이 비는 언제나 그치리.
떠돌아다니기만 떠돌아다니기만
언제나 어느 곳에
몸 둘 곳을 정하리
추 풍
시 김광협
낭송 박인선
젊은들에게도 無常(무상)이라는 말이 있음직한 것이다. 여름 한철 무성하게 草綠(초록)으로 빛나면서 기어오르는 담쟁이덩굴 이래서 담쟁이덩굴 같이 싱상한, 그리고 그 垂直(수직)의 가파로운 딱닥한 벽을 기어오르는 숨찬 이야기를 하다간 어느새 담쟁이덩굴이 凋落(조락)을 맞이할 때 그 아래에 와서 젊음의 敗北(패배)와 嘆息(탄식을 털어놓게도 되는 것이니 말이다.
담쟁이덩굴은 이제 한줄기 秋風(추풍)이 털고 가버리면 벗은채로 그래도 垂直(수직)의 壁(벽)에 死力(사력)으로 찰싹 붙어 죽음이 겨울을 迎送(영송)하고 그리고 또 봄을 맞이할 것이다.
그래서 그 봄도 가고 또 다시 여름이 왔을 때 젊은이는 그 담쟁이덩굴 아래서 다시 만나 敗北의 盞(잔)을 던지고 새 盞(잔)을 맞비벼댈 것이니 젊은이는 그렇게도 幸福(행복)한 것이다. 이런 것을 각별히 일컬어 젊은이의 無常(무상)이라는 말로 부름직도 한 것이다.
靑年 讚歌·2
시 김광협
낭송 박지호
十년전 江山에 젊음이 탈 때
十년전 山河에 피 강물 흐를 때
겨레는 보았다. 義로운 젊음.
統治者(통치자)가 썩을 때
그들이 專斷(전단)할 때
나라가 어려울 때
겨레가 괴로울 때
詩代가 어두울 때
젊음은 한갖 불쏘시개
젊음은 한낱 티끌인 것을
겨레는 똑똑히 보았다.
十년전 四월 十九일
大邱에서 馬山에서
서울 鐘路에서 光化門에서
景武臺(경무대)가는 길 어귀에서
自由를 달라
獨裁者는 물러가라
不正腐敗를 몰아내자
젊음을 불사르던 것을
凶彈에 맞아 꽃처럼 지던 것을
겨레는 보았다. 겨레는 알고 있다.
그날이 다시 오고
十년이 되고
詩代도 江山도 변하였건만
十년전 그날을
그날의 義憤(의분)을, 非嘆(비탄)을
그날의 歡呼 (환호)를, 그날의 榮光(영광)을
뉘라서 잊을소냐. 뉘라서 잊을소냐.
젊음이여, 榮光(영광)의 젊음이여.
내 나라의 젊음이여.
내 겨레의 靑年이여.
우리들의 사랑이여.
영원한 깃발이여.
詩代의 횟불이여.
前進(전진)의 操航手(조항수)여.
젊은이여, 겨레의 앞에 서서
횃불을 밝히라. 횃불을 밝히라.
누이 전
시 김광협
낭송 현신철
나이 술이 過(과)하여 간다.
누이야,
너는 콜드크림이라도 한 통 샀느냐?
나의 술은 過(과)하여 가도
너의 콜드크림은 없는
이 恨 많은 세상.
나의 술이 더욱 과하여 간다.
長醉(장취) 끝에 아럼풋이,
밭고랑 너의 괭이질 소릴 듣다간
나는 운다.
북받쳐 不眠(불면)의 밤을 운다
강설기
시 김광협
낭송 한성국/고현심
눈은 숲의 어린 가지에 흰 깁을 내린다.
「프로스트」 氏도 이제는 말을 몰고 돌아가버리었다.
밤은 숲의 어린 가지에 내려온 흰 깁을 빨아 먹는다.
흰 깁은 밤의 머리를 싸맨다.
셀레이던 바람도 잠을 청하는 시간, 나는 엿듣는다.
눈이 숲의 어린 손목을 잡아 흔드는 것을,
숲의 깡마른 볼에 입맞추는 것을,
저 잔잔하게 흐르는 애정의 일월을,
캄캄한 오밤의 푸른 박명을,
내 아가의 무량의 목숨을 엿듣는다.
뭇 영아들이 등을 키어들고 바자니는 소리를,
씩씩거리며 어디엔가 매달려 젖 빠는 소리를,
나는 엿듣는다.
숲 가에서 나는 너의 두개의 유치를 기억한다.
너의 영혼이 잠시 지상에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너의 다수운 입김이 아침의 이슬로 되었던 것을 기억한다.
생명의 빛이 너의 눈동자에 가득차 있었음을 기억한다.
너의 손을 내저어 대기를 흔들었음을 기억한다.
비록 부둥켜 안아 너의 보행을 연습시키었을지라도
너의 발을 디뎌 지구를 느끼었음을 기억한다.
너의 언어는 무에 가까웠을지라도 체득의 언어였으며,
너의 사색은 허에 이웃했을지라도
혈육을 감지하는 높은 혜지였음을 기억한다.
잃어버린 모든 기억들을 나는 상기할 수가 있다.
그러나 나는 상기 단 한가지 죄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숲 가에서 나는 너의 두 개의 유치를 기억한다.
눈은 숲의 어린 가지에 흰 깁을 내린다.
내리어라 내리어라 내리어라.
밤이 눈의 흰 깁을 빨아먹더라도
그의 이마에서 발 끝까지 와서 덮이어라.
온유의 성품으로 사픗사픗 내려오는 숲의 母性이여.
숲은 내 아기의 변모.
곁에 서면 세월이 머리를 쓰다듬는 소리
역사가 장신구를 푸는 소리들,
시름에 젖은 음절로 되어
꽃잎처럼 흩어져 기어다닌다.
괴괴한 이 밤의 얼어붙은 지류에서
서성이는 나의 체읍, 나의 기쁨.
내가 내 자신과 내 아가와 내 인류에게 가까이 돌아가는
청징하고 힘 있는 내 자신의 발자국 소리를 듣는다.
잃어버린 모든 것들을 상기할 수가 있다.
그러나 나는 상기 단 한 가지 죄의 의미를 모른다.
내 숲이여, 내 아가야, 내 자신이여, 내 인류여.
나는 참으로 단 한 가지 죄의 의미를 모른다.
<1965.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
유자꽃 피는 마을
시 김광협
낭송 시민/관광객
내 소년의 마을엔
유자꽃이 하이얗게 피더이다.
유자꽃 꽃잎 새이로
파아란 바다가 촐랑이고,
바다 위론 똑딱선이 미끄러지더이다.
툇마루 위에 유자꽃 꽃잎인듯
백발을 인 조모님은 조을고
내 소년도 오롯 잠이 들면,
보오보오 연락선의 노래조차도
갈매기들의 나래에 묻어
이 마을에 오더이다.
보오보오 연락선이 한소절 울 때마다
떨어지는 유자꽃.
유자꽃 꽃잎이 울고만 싶더이다.
유자꽃 꽃잎이 섧기만 하더이다.
<월간문학. 1980. 6>
<시인 김광협 선생 추모 발자취>
1996. 10. 26. 김광협 시비(유자꽃 피는 마을) 제막
1998. 7. 4. 서거 5주기 김광협 문학제(서귀포문협)
2005. 8. 19. 김광협 시인의 밤
(자연을 사랑하는 문학의 집·서울)
2015. 10. 3. 솔동산문학회(2015. 6. 20. 창립)에서 창립 기념사업으로, 서귀포시에서 최초 시인으로 등단한 김광협 선생 추모 사업을 전개하기로 하여, 2015. 10. 3. 천지연 김광협시인 시비에서 제1회 「시인 김광협선생 서거 22주년 추모문학인 밤」을 개최
- 주요 참석자
미망인 부애숙 여사 및 가족
시인 김용길 ; 김광협과 서귀포에 관한 말씀
화가 이왈종 ; 김광협의 문학세계에 대한 말씀
현을생 시장, 오광협 전시장. 고영우 화백 등
서귀포문협회장 문상금
- 주요 행사
김광협 연보 소개
김광협 시 10편 낭송 등
2015. 10. 26. 김광협문학상 제정
(시전문지 계간 “발견”/발행인 황학주)
2015. 12. 30. 「솔동산문학」 창간호 발간
2016. 2. 1. 김광협문학상 업무 협약식
(서귀포시·발견·서귀포예총)
2016. 10. 22. 제1회 김광협 전도 시낭송대회
(김정문화회관/예총)
제1회 김광협 전도 백일장대회(예총)
○ 제2회 시인 김광협 선생 추모문학제
2016. 10. 29. 서거 23주년 추모 문학의 밤
(주관; 솔동산문학회)
○ 제3회 시인 김광협 선생 추모 문학제
2017.10.28.(공동주관; 솔동산문학회. 서귀포문협)
- 부대행사 ; 제2회 김광협 시 전도낭송대회
제2회 김광협문학제(김광협 시인 문학탐방)
○ 제4회 시인 김광협 선생 추모 문학제
2018. 10. 27~28.
(공동주관; 솔동산문학회. 서귀포예총)
○ 제5회 시인 김광협 선생 추모 문학제
2019. 10. 5(주관; 솔동산문학회)
○ 제6회 시인 김광협 선생 추모 문학제
2020. 10. 17(주관; 솔동산문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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