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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 고려인 과거 급제자
가정집 잡록
이중보(李中父)가 사명을 완수하고 원나라 조정으로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며 지은 서
한림 이중보가 정동행성에 사명을 받들고 왔다가 일을 마치고 돌아가려 할 즈음에 나에게 들러 하직을 고하기에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진사과(進士科)의 시험을 통해서 인재를 뽑는 것은 본래 당나라 때에 성행하였다. 장경(長慶) 초기에 김운경(金雲卿)이 최초로 신라 빈공(賓貢)의 신분으로 두사례(杜師禮)가 주관한 과거에 급제하였다. 이로부터 시작해서 천우(天祐) 말년에 이르기까지 빈공을 대상으로 실시한 과거에 급제한 자는 모두 합쳐서 58인이었고, 오대(五代)의 양(梁)과 당(唐) 때에는 또 32인이 나왔는데, 대개 발해(渤海)의 제번(諸蕃) 출신인 10여 인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사람들 모두가 동방의 인사들이었다.
우리 고려에서도 일찍이 송나라에 인재를 천거하여 과거에 응시하게 하였다. 그 결과 순화(淳化) 연간에 손하(孫何)가 주관한 과거에서 왕빈(王彬)과 최한(崔罕)이 급제하였고, 함평(咸平) 연간에 손근(孫僅)이 주관한 과거에서 김성적(金成績)이 급제하였고, 경우(景祐) 연간에 장당경(張唐卿)이 주관한 과거에서 강무민(康撫民)이 급제하였다. 정화(政和) 연간에는 또 황제가 친히 시험을 보여 권적(權適)과 김단(金端) 등 4인에게 특별히 상사 급제(上舍及第)를 내렸다. 이를 통해 동방에 대대로 인재가 끊이지 않았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이른바 빈공과(賓貢科)라는 것은 본래 과거를 거행할 때마다 별도로 치르는 시험으로서 급제자 명단의 끄트머리에 이름을 덧붙일 뿐 정식으로 급제한 사람 축에 끼이지도 못하였다. 그래서 제수하는 것을 보더라도 낮고 한산한 관직인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어떤 때는 관직도 없이 그냥 돌려보내기도 하였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거룩한 원나라에서는 천하의 사람들을 평등하게 대우하며 똑같이 사랑하기 때문에, 인재를 등용할 때에도 출신 성분을 따지지 않고 있다. 그런 까닭에 우리 동방의 인사들이 중원의 준수한 인사들과 나란히 응시하여 급제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 자가 이미 여섯 명이나 된다.
중보가 맨 마지막에 나오긴 하였으나 우수한 성적으로 뽑혀서 조정의 관직을 제수받았고, 그 영예가 양친에게까지 미쳐서 모두 은명(恩命)을 입기에 이르렀다. 게다가 영광스럽게 조서를 받들고 고국에 사신으로 와서 고당(高堂)의 모친을 뵙고 선영(先塋)에 분황(焚黃)을 하여 살아 계신 분이나 돌아가신 분 모두에게 영예가 돌아가게 하였다. 그러고 보면 중보가 득의양양하게 고향에 돌아온 것이야말로, 장경(長卿)이나 옹자(翁子)가 촉(蜀)과 월(越)에서 뻐기던 정도일 뿐만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 집안의 문창공(文昌公) -휘(諱)는 치원(致遠)으로, 본국에서 추봉(追封)한 것이다.- 은 나이 12세에 당나라로 유학을 가서 18세이던 함통(咸通) 15년(874, 신라 경문왕14)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리하여 중산위(中山尉)를 거쳐 회남(淮南) 고 시중(高侍中 고변(高騈) )의 막좌(幕佐)가 되었으며 관직이 전중시어사 내공봉(殿中侍御史內供奉)에 이르렀다. 그리고는 28세에 사명을 받들고 귀국하였으므로, 고향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미담으로 전해 오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으로 말하면 당나라 말기로 사방에서 병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래서 공이 사방으로 외롭게 떠돌아다니며 번진(藩鎭)에서 기식(寄食)하였으며, 또 어사의 직질(職秩)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실직(實職)이 아니었다. 그리고 동쪽으로 돌아와서도 나라가 또 크게 혼란한 가운데 길이 막혀서 복명(復命)을 하지도 못하였다. 그러니 그 평생을 논해 본다면 고생만 하였을 뿐 영화를 누린 것은 별로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와 반대로 우리 중보는 아름답고 밝은 세상을 만나 화려한 근시(近侍)의 지위에 올랐다. 여기에 또 나이가 바야흐로 장년(壯年)인 데다가 뜻이 갈수록 겸손하기만 하여 그 양양한 전도(前途)를 쉽게 헤아릴 수 없고 보면, 집안을 드러내고 나라를 영예롭게 하는 것이 어찌 지금 한때로 그치겠는가. 필시 부귀를 한껏 누리고 공명을 천하에 가득 떨치는 가운데 주금(晝錦)의 당우(堂宇)를 동한(東韓)에 크게 짓는 것을 보게 되리니, 모르겠다마는 후세 사람들이 중보를 옛날 동방의 사람들과 비교해서 어떻게 평하겠는가.
이와 함께 기억나는 것이 또 있다. 나도 지치(至治) 원년(1321, 충숙왕8)에 외람되게 연경에 가서 회시(會試)에 응시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해에는 거자(擧子)가 정액(定額)을 채우지도 못해서 좌방(左榜)에 오른 자가 겨우 43인이었는데 나는 요행히 21번째에 끼이게 되었다. 그리고 개모 별가(蓋牟別駕)의 임명을 받았으나 그 관직에 부임한 지 몇 개월 만에 병을 이유로 면직을 청하였다. 지금 향리에 물러나 살아온 지 어언 13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그동안 품었던 장한 뜻도 날이 갈수록 줄어들어 이제는 다시 날고뛰는 기세를 볼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요즈음 중보를 보노라면 내가 끝내는 자포자기하여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게 되었음을 더욱 실감하게 된다. 그러니 성명(聖明)하신 임금님의 기대를 저버린 부끄러움을 또 어떻게 말로 다할 수가 있겠는가. 중보는 아무쪼록 더욱 힘쓸지어다. 그리하여 한 삼태기의 흙이 부족해서 아홉 길의 산을 만들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할지어다. 나는 중보와 친하게 지내는 사이이다. 그래서 그의 행실을 칭송한 다음에 나의 졸렬한 과거의 행적을 스스로 비판함으로써 그를 다시 북돋우려고 하였다.
원통 을해년(1335, 충숙왕 복위4) 3월 1일에 계림(鷄林) 최해(崔瀣)는 서(序)한다.
送奉使李中父還朝序[崔瀣]
翰林李中父奉使征東。已事將還。過辭予。因語之曰。進士取人。本盛於唐。長慶初。有金雲卿者。始以新羅賓貢。題名杜師禮牓。由此以至天祐終。凡登賓貢科者五十有八人。五代梁唐又三十有二人。盖除渤海諸蕃十數人。餘盡東士。逮我高麗。亦甞貢士於宋。淳化孫何牓。有王彬,崔罕。咸平孫牓榜。有金成績。景祐張唐卿牓。有康撫民。政和中。又親試權適,金端等四人。特賜上舍及第。擧是可見東方代不乏材矣。然所謂賓貢科者。每自別試。附名牓尾。不得與諸人齒。所除多卑冗。或便放歸。欽惟聖元一視同仁。立賢無方。東士故與中原俊秀竝擧。列名金牓已有六人焉。中父雖後出。廼擢高科。除官禁省。施及二親。俱霑恩命。光捧詔書。來使故國。謁母高堂。焚黃先隴。爲存歿榮。得志還鄕。不獨長卿,翁子夸于蜀,越矣。吾家文昌公。諱致遠。本國追封之。 年十二西游。十八。登咸通十五年第。歷尉中山。佐淮南高侍中幕。官至侍御史內供奉。二十八。奉使歸國。鄕人至今傳以爲美談。當是時也。屬於唐季。四海兵興。而公以羇旅孤蹤。寄食於藩鎭。雖授憲秩。職非其眞。及乎東歸。國又大亂。道梗不果復命。論其平生。可謂勞勤。而其爲榮無足多者。曷若吾中父遇世休明。致身華近。而且年方強壯。志愈謙光。其前途有未易量者。則顯榮家國。豈止此一時。必見富貴苦逼。功名滿天下。晝錦之堂。將大作於東韓。未識後來視中父與昔東人爲何如也。因記在至治元年。亦自猥濫與計而偕。是年。擧子尙未滿額。登左牓者才四十三人。予幸忝第二十一名。拜盖牟別駕。赴官數月。以病求免。今玆退安里巷十有三年。壯志日消。無復飛騰之勢。比見中父。益知予之終於自棄而無成也。慚負聖明。又奚言哉。中父尙勉旃。毋以一簣進止。而虧九仞之高也。予與中父厚。旣美其行。且訟予拙而復勖之云。元統乙亥三月初吉。鷄林崔瀣。序。
동문선 제84권 / 서(序)
송 봉사 이중보환조서(送奉使李中父還朝序)
최해(崔瀣)
한림(翰林) 이중보(李中父)가 사명을 받들어 정동성(征東省)에 들렀다가 일을 마치고 돌아가려 할 적에 나를 찾아와서 작별하므로 말하기를, “진사(進士)로 사람을 취택한 것이 본래 당(唐) 나라 장경(長慶) 초년부터 성했는데 김운경(金雲卿)이란 이가 비로소 신라의 빈공(賓貢)으로 두사례(杜師禮)의 방(牓)에 이름이 올랐으며, 이로 말미암아 천우(天祐)의 종년(終年)까지 무릇 빈공과(賓貢科)에 오른 이가 58명이 있었으며 오대(五代)의 양(梁)ㆍ당(唐)에 또 32명이 있었으니, 대개 발해(渤海)의 10여 인을 재외하고 나머지는 다 동국 사람이었다. 우리 고려에 이르러서도 역시 송(宋) 나라에 가서 과거를 보게 되어 순화(淳化) 연간 손하(孫何)의 방(牓)에 왕빈(王彬)ㆍ최한(崔罕)이 있었고, 함평(咸平) 연간 손근(孫僅)의 방에 김성적(金成積)이 있었고, 경우(景祐) 연간 장당경(張唐卿)의 방에 강무민(康撫民)이 있었으며, 정화(政和) 연간의 친시(親試)에서 또 권적(權適)ㆍ김단(金端) 등 4명에게 특히 상사급제(上舍及第)를 주었으니, 이를 보면 족히 동국이 대대로 인재가 결핍되지 않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른바 빈공과(賓貢科)란 것은 매양 별시(別試)를 거쳐서 방의 말미(末尾)에 이름을 붙여 모든 사람과 더불어 나란히 끼어 있을 수는 없었으며, 벼슬을 제수함에 있어서도 비관(卑官)이나 용관(宂官)이 많으며 혹은 그대로 돌아가게 하였다. 오직 신성한 원(元) 나라만이 일시동인(一視同仁)하여 어진이를 세움에 있어서는 일정한 방향이 없었다. 그러므로 동국에서도 중국의 준수(俊秀)와 더불어 과거를 함께 보게 되어 금방(金𤗐)에 이름이 오른 사람이 이미 6명이 있었다. 중보(中父)가 비록 후진이나 바로 높은 과거에 선발되어 궁성(宮省)의 벼슬에 제수되고 양친(兩親)에게까지 미치어 모두 은명(恩命)을 입게 되었다. 빛나게 조서를 받들고 고국에 사신으로 가서 모친을 고당(高堂)에서 뵙고 선산에 분황(焚黃)하여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 다 영광되게 하였으니, 소원을 이루고 고향에 돌아온 것은 저 장경(長卿)이 촉월(蜀越)에서 자랑을 독차지하지 못하게 되었다.
우리 집 문창공(文昌公 최치원)이 12세의 나이에 서쪽으로 가서 18세인 함통(咸通) 15년 과거에 올라 중산위(中山尉)를 지내고, 회남(淮南) 고 시중(高侍中)의 막(幕)을 보좌하였고, 벼슬이 시어사(侍御史) 내공봉(內供奉)에 이르렀다가 28세에 사명을 받들고 고국에 돌아왔기로 고향 사람들이 이제껏 미담(美談)으로 전해 오는 것이다. 이때야말로 당 나라의 말엽에 속하여 사방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공은 객지의 외로운 몸으로 번진(藩鎭)에서 기식(寄食)하였으며, 비록 헌질(憲秩)을 제수받았지만 직이 진직(眞職)이 아니었다. 고국에 돌아오자 나라가 또 크게 어지러워 길이 막혀서 끝내 복명(復命)을 못하였으니, 그 평생을 논한다면 근로(勤勞)는 대단했으나 그 영광된 것은 별로 칠 만한 것이 없었다. 어찌 우리 중보와 같이 휴명(休明)한 세상을 만나서 화근(華近)한 벼슬 자리에 몸을 두고, 또 나이가 바야흐로 강장한데 뜻은 더욱 겸손하니, 그 전도가 얼마나 양양한지 헤아리기조차 어려울 정도이니, 가국(家國)을 현영(顯榮)하는 것이 어찌 이 한때에만 그치랴. 반드시 부귀에 파묻히고 공명이 천하에 가득하여 주금당(晝錦堂)이 장차 동국에서 크게 지어질 것을 보게 될 것이니, 후세 사람들이 중보 보기를 옛날의 동인(東人)은 어떠했다 할는지 모르겠다.
다시 기억하건대 지치(至治) 원년에 나 자신도 또한 외람되이 계부(計簿)를 갖고 가는 자와 동행하였는데, 그해에 과거보는 자가 오히려 제 액수[額]에 차지 못하여 용방(龍𤗐)에 오른 자가 겨우 43명이었다. 나는 다행히 제21명에 참여하여 개모별가(盖牟別駕)에 제수되어 부임한 수개 월만에 병들어 면직을 요청하고, 지금 이와 같이 마을 구석에 물러앉아 휴양한 지가 13년이나 되었으니, 씩씩한 뜻이 날로 소모되어 다시 비등(飛騰)할 만한 기세가 없다. 요즘 중보를 보니, 나는 스스로 포기하는 데 그치고 하나도 이룬 것이 없음을 더욱 깨달았다. 성조(聖朝)를 저버린 것이야 더구나 할 말이 있으랴. 중보여, 더욱 힘써서 아예 한 삼태기의 흙을 다 채우지 못함으로써 커다란 공을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나는 중보와 더불어 의가 두텁기로, 이미 그 행함을 아름답게 여기고 또 나의 졸(拙)함을 외워서 더욱 힘쓰게 하는 것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남만성 (역) | 1969
送奉使李中父還朝序
翰林李中父。奉使征東。已事將還。過辭予。因語之曰。進士取人。本盛於唐。長慶初。有金雲卿者。始以新羅賓貢。題名杜師禮牓。由此以至天祐終。凡登賓貢科者。五十有八人。五代梁,唐。又三十有二人。盖除渤海十數人。餘盡東士。逮我高麗。亦甞貢士於宋。淳化孫何牓。有王彬,崔罕。咸平孫僅牓。有金成績。景祐張唐卿牓。有康撫民。政和中。又親試。權適,金端等四人。特賜上舍及第。擧是可見東方代不乏才矣。然所謂賓貢科者。每自別試。附名牓尾。不得與諸人齒。所除多卑冗。或便放歸。欽惟聖元。一視同仁。立賢無方。東士故與中原俊秀竝擧。列名金牓。已有六人焉。中父雖後出。迺擢高科。除官禁省。施及二親。俱霑恩命。光捧詔書。來使故國。謁母高堂。焚黃先隴。爲存歿榮。得志還鄕。不獨長卿翁子夸于蜀越矣。吾家文昌公年十二西㵀游。十八登咸通十五年第。歷尉中山。佐淮南高侍中幕。官至待御史內供奉。二十八奉使歸國。鄕人至今傳以爲美談。當是時也。屬於唐季。四海兵興。而公以羇旅孤蹤。寄食于藩鎭。雖授憲秩。職非其眞。及乎東歸。國又大亂。道梗不果復命。論其平生。可謂勞勤而其爲榮。無足多者。曷若吾中父遇世休明。致身華近。而且年方強壯。志愈謙光。其前途有未易量者。則顯榮家國。豈止此一時。必見富貴苦逼。功名滿天下。晝錦之堂。將大作於東韓。未識後來視中父。昔東人爲何如也。復記在至治元年。亦自猥濫。與計而偕。是年擧子尙未滿額。登龍牓者。纔四十三人。予幸忝第二十一名。拜蓋牟別駕。赴官數月。以病求免。今玆退安里巷。十有三年。壯志日消。無復飛騰之勢矣。比見中父。益知予之終於自棄而無成也。慚負聖朝。又奚言哉。中父尙勉旃。毋以一簣進止而虧九仞之高也。予與中父厚。旣美其行。且訟予拙而勖復之云。
拙藁千百卷之二 / [文] / 送奉使李中父還朝序
翰林李中父奉使征東。已事將還。過辭予。因語之曰。進士取人。本盛於唐。長慶初。有金雲卿者。始以新羅賓貢。題名杜師禮榜。由此以至天祐終。凡登賓貢科者五十有八人。五代梁唐。又三十有二人。盖除渤海十數人。餘盡東士。逮我高麗。亦甞貢士於宋。淳化孫何榜。有王彬,崔罕。咸平孫僅榜。有金成績。景祐張唐卿榜。有康撫民。政和中。又親試。權適,金端等四人特賜上舍及第。擧是可見東方代不乏才矣。然所謂賓貢科者。每自別試。附名榜尾。不得與諸人齒。所除多卑冗。或便放歸。欽惟聖元一視同仁。立賢無方。東士故與中原俊秀竝擧。列名金榜。已有六人焉。中父雖後出。迺擢高科。除官禁省。施及二親。俱霑恩命。光捧詔書。來使故國。謁母高堂。焚黃先壠。爲存歿榮。得志還鄕。不獨長卿,翁子夸于蜀,越矣。吾家文昌公。年十二西游。十八。登咸通十五年第。歷尉中山。佐淮南高侍中幕。官至侍御史內供奉。二十八。奉使歸國。鄕人至今傳以爲美談。當是時也。屬於唐季。四海兵興。而公以羇旅孤跡。寄食于藩鎭。雖授憲秩。職非其眞。及乎東歸。國又大亂。道梗不果復命。論其平生。可謂勞勤。而其榮無足多者。曷若吾中父遇世休明。致身華近。而且年方強壯。志愈謙光。其前途有未易量者。則顯榮家國豈止此一時。必見富貴苦逼。功名滿天下。晝錦之堂。將大作於東韓。未識後來視中父與昔東人爲何如也。復記在至治元年。亦自猥濫與計而偕。是年擧子尙未滿額。登左牓者纔四十三人。予幸忝第二十一名。拜盖牟別駕。赴官數月。以病求免。今玆退安里巷十有三年。壯志日消 。無復飛騰之勢矣。比見中父。益知予之終於自棄而無成也。慚負聖明。又奚言哉。中父尙勉旃。毋以一簣進止而虧九仞之高也。予與中父厚。旣美其行。且訟予拙而復勖之云。元統乙亥三月初吉。
졸고천백 제2권
사명(使命)을 받들고 왔다가 원나라 조정으로 돌아가는 이중보(李中父)를 떠나보내며 주는 글
한림(翰林) 이중보(李中父)가 사명을 받들고 정동행성(征東行省)에 왔다가 일을 마치고 돌아가려 하면서 나에게 들러 하직 인사를 하기에,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진사(進士)로 인재를 뽑는 것은 본래 당(唐)나라 때 성행하여, 장경(長慶) 초에 김운경(金雲卿)이란 사람이 처음으로 신라(新羅)의 빈공(賓貢)으로서 두사례(杜師禮)가 주관한 시험에 합격하였고, 이때부터 천우(天祐) 말년까지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한 사람이 모두 58명이며, 오대(五代)의 후량(後梁)과 후당(後唐) 때에 또 32명이 있는데, 발해(渤海) 출신 10여 명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우리나라 사람들이다. 우리 고려에 와서도 일찍이 송(宋)나라에 선비를 보내어, 순화(淳化) 연간에 손하(孫何)가 주관하는 시험에 왕빈(王彬)과 최한(崔罕)이 합격하였고, 함평(咸平) 연간에 손근(孫僅)이 주관하는 시험에 김성적(金成績)이 합격하였고, 경우(景祐) 연간에 장당경(張唐卿)이 주관하는 시험에 강무민(康撫民)이 합격하였고, 정화(政和) 연간에 또 친시(親試)를 시행하여 권적(權適), 김단(金端) 등 4명에게 특별히 상사급제(上舍及第)를 내렸으니, 이를 통해 우리나라에 대대로 인재가 끊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른바 빈공과(賓貢科)라는 것은 정식 과거시험 때에 매번 별도로 시험을 치러 방목(榜目) 끄트머리에 그 이름을 붙이는 것으로서 정식 과거의 급제자들과는 동등한 대접을 받지 못하였다. 그래서 제수받는 관직도 대부분 낮거나 별로 중요하지 않은 관직들이고, 더러는 곧바로 돌려보내기도 하였다.
그런데 원(元)나라에 와서 온 천하 사람들을 똑같이 대우하여 인재를 등용할 때에 출신 지역을 따지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 중원(中原)의 수재(秀才)들과 나란히 응시하여 금방(金牓)에 이름이 오른 자가 이미 여섯 명이나 된다. 중보는 비록 이들보다 뒤에 나오기는 하였으나 과거에서 높은 등급으로 발탁되어 황궁(皇宮)의 관직에 제수되었고, 그 은택이 양친(兩親)에게 미쳐 모두 은명(恩命)을 입었다. 그리고 황제의 조서(詔書)를 받들고 고국에 사신으로 와서 모친(母親)을 고당(高堂)에서 알현하고 선영(先塋)에 분황(焚黃)하여 살아 계신 분이나 돌아가신 분 모두에게 영예를 안겼으니, 뜻을 성취하여 고향으로 돌아옴이 장경(長卿)과 옹자(翁子)가 촉(蜀)과 월(越)에서 출세를 과시했던 정도만이 아니었다.
우리 가문의 문창공(文昌公)은 나이 12세에 서쪽 당나라로 유학을 가서 18세에 함통(咸通) 15년의 과거에 등제하였고, 중산위(中山尉)를 거쳐 회남(淮南) 고 시중(高侍中)의 막하에서 보좌하여 관직이 시어사내공봉(侍御史內供奉)에 이르렀다. 28세에 사명(使命)을 받들고 귀국하니, 고향 사람들 사이에 지금까지 미담(美談)으로 전해오고 있다. 당시는 당나라 말기에 속하여 사방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공은 객지살이하는 외로운 몸으로 번진(藩鎭)에서 기식(寄食)하였으며, 비록 헌질(憲秩)을 제수받기는 하였으나 실직(實職)이 아니었다. 본국으로 귀국하였으나 나라가 또 크게 어지러워 길이 막혀서 복명(復命)도 하지 못하였다. 평생을 논해볼 때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영화는 그다지 누리지 못한 사람이라 할 것이다. 어찌 우리 중보(中父)가 좋은 세상을 만나 화근직(華近職)에 오르고 게다가 한창 강장(强壯)한 나이에 뜻까지 더욱 겸손하여 그 전도(前途)를 쉽게 헤아릴 수 없는 것과 같겠는가. 그러니 가문과 국가를 드러내 영광되게 하는 것이 어찌 이 한때에 그치겠는가. 반드시 부귀로 몸을 감싸고 공명을 천하 가득 떨치고 주금당(晝錦堂)을 우리나라에 크게 짓는 것을 보게 되리니, 후대 사람들이 중보를 우리나라의 옛 인물들과 비교하여 어떻게 평가할는지 모르겠다.
다시 기억하건대 지치(至治) 원년(1321, 충숙왕 8)에 나 또한 외람되이 원나라에서 시행되는 회시(會試)에 응시한 적이 있었는데, 이해에 응시자가 정원을 채우지 못해 좌방(左牓)에 오른 자가 겨우 43명이었다. 그 가운데 나는 요행히 제 21 명에 들어 개모별가(盖牟別駕)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한 지 몇 달 만에 병을 이유로 면직을 청하여 고향 마을로 물러나 살아온 지 이제 13년이 되었다. 그동안 젊을 때의 웅장한 포부도 날이 갈수록 사그라져 더 이상 날고 뛰는 기세가 없어지고 말았다. 근래에 중보를 보고 나서는 내가 끝내 자포자기에 안주하여 아무것도 이룬 게 없음을 더욱 잘 알게 되었으니, 성명(聖明)하신 임금님을 저버린 부끄러움을 또 어찌 다 말하겠는가.
중부는 부디 노력하여 한 삼태기의 흙을 붓지 않아서 아홉 길의 높은 산을 완성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도록 하게나. 나는 중보와 절친한 사이인지라 먼저 그의 행실을 칭찬하고 또 과거 나의 어리석음을 질타함으로써 그로 하여금 더욱 힘쓰게 하는 바이다.
원통(元統) 을해년(1335, 충숙왕 복위 4) 3월 초길(初吉)에 쓰다.
[주-D001] 이중보(李中父) : 중보는 이곡(李穀 : 1298 ~ 1351)의 자이다. 이곡의 초명은 운백(雲白), 호는 가정(稼亭),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아버지이자 이제현(李齊賢)의 문인이다. 1320년(충숙왕 7)에 문과에 급제하여 복주사록참군(福州司錄參軍)이 되었고, 1332년(충숙왕 복위 1)에 정동성 향시(征東省鄕試)에 제 1 등으로 합격한 뒤 이듬해인 1333년에 원나라 제과(制科)에 제 2 갑(第二甲)으로 급제하였다. 원나라 재상의 추천으로 한림국사원검열관(翰林國史院檢閱官)에 임명되었고, 1335년에 흥학(興學)의 조서(詔書)를 가지고 고려에 환국하였다가 다시 원나라로 돌아갔다. 그 후 정동행중서성 좌우사원외랑(征東行中書省左右司員外郞)이 되었으며 원나라 황제에게 건의하여 고려에서의 처녀 징발을 중지하게 하였다. 고려에서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지내고 다시 원나라에 가서 중서사 전부(中瑞司典簿)가 되었다. 1344년 충목왕이 즉위하자 귀국하여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고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졌다. 이제현과 함께 민지(閔漬)가 편찬한 《편년강목(編年綱目)》을 증수(增修)하고, 충렬왕ㆍ충선왕ㆍ충숙왕 3대의 실록(實錄)을 편수하였다. 백이정(白頤正), 우탁(禹倬), 정몽주(鄭夢周) 등과 함께 경학(經學)의 대가로 꼽힌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며, 문집으로 《가정집(稼亭集)》이 있다. 이 글은 1335년 이곡(李穀)이 흥학(興學)의 조서를 가지고 정동행성(征東行省)에 왔다가 돌아갈 때 지어준 것이다.[주-D002] 장경(長慶) : 당나라 목종(穆宗)의 연호로, 821년 ~ 824년이다.[주-D003] 빈공(賓貢) : 외국에서 중국에 보내어 과거에 응시하게 한 선비를 이른다. 《송사(宋史)》 권487 외국열전(外國列傳) 고려(高麗) 조에, “선비를 바치는 것〔貢士〕에는 세 등급이 있는데, 왕성(王城)에서 바친 선비를 토공(土貢)이라 하고, 군읍(郡邑)에서 바친 선비를 향공(鄕貢)이라 하고, 타국(他國)에서 바친 선비를 빈공(賓貢)이라 한다.” 하였다.[주-D004] 천우(天祐) : 당나라 마지막 황제인 애제(哀帝)의 연호로, 904년 ~ 907년이다.[주-D005] 빈공과(賓貢科) : 《동사강목(東史綱目)》 당(唐) 소종(昭宗) 용기(龍紀) 원년(889, 진성여주〈眞聖女主〉 3년) 조에, “장경(長慶) 초에 김운경(金雲卿)이 처음으로 빈공과에 합격하였다. 빈공과는 과거가 있을 때마다 외국인을 위하여 보이는 별시(別試)로서 과거의 방(榜) 끝에 그 이름을 붙인다. 김운경으로부터 당 말기까지 과거에 합격한 자가 58인이며, 오대(五代)의 후량(後梁)과 후당(後唐) 때에도 32인에 이르렀다. 그 가운데 두드러지게 이름을 나타낸 자는 최이정(崔利貞), 김숙정(金叔貞), 박계업(朴季業), 김윤부(金允夫), 김입지(金立之), 박양지(朴亮之), 이동(李同), 최영(崔霙), 김무선(金茂先), 양영(楊潁), 최환(崔渙), 최광유(崔匡裕), 최치원(崔致遠), 최신지(崔愼之), 김소유(金紹游), 박인범(朴仁範), 김악(金渥), 최승우(崔承祐), 김문울(金文蔚) 등으로 모두 성재(成材)하여 일가를 이루었는데, 박인범은 시(詩)로 명성을 날렸고, 김악은 예(禮)로 일컬어졌다. 그 가운데서도 최치원, 최신지, 최승우가 가장 이름이 알려져 있다. 또 원걸(元傑), 왕거인(王巨仁), 김수훈(金垂訓) 등은 모두 문장으로 저명하나 사서(史書)에 빠져 있어 전하지 않는다.” 하였다.[주-D006] 순화(淳化) : 송나라 태종(太宗)의 연호로, 990년 ~ 994년이다.[주-D007] 왕빈(王彬)과 최한(崔罕) : 《고려사(高麗史)》 선거지(選擧志) 제과(制科) 조에, “성종(成宗) 5년(986)에 최한(崔罕)과 왕림(王琳)을 송나라에 보내어 국자감에 입학시켰는데, 11년(992)에 최한과 왕림이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여 비서랑(秘書郞)에 제수되었다.”고 하였다. 한편 《송사(宋史)》 권487 외국열전(外國列傳) 고려(高麗) 조에는 “순화 3년에 상(上)이 각 도의 공거인(貢擧人)들을 친히 시험하여 고려(高麗)의 빈공(賓貢)인 진사(進士) 왕빈(王彬)과 최한(崔罕) 등에게 급제를 주고 관직을 제수한 다음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하였다. 위에서 보듯이 왕빈(王彬)의 경우 그 이름이 《고려사》에는 왕림(王琳)으로 되어 있고 《송사》에는 왕빈(王彬)으로 되어 있다.[주-D008] 함평(咸平) : 송나라 진종(眞宗)의 연호로, 998년 ~ 1003년이다.[주-D009] 김성적(金成績) : 《고려사》 선거지 제과 조에, “목종(穆宗) 원년(998)에 김성적(金成績)이 송나라에 들어가 등제(登第)하였다.” 하였다.[주-D010] 경우(景祐) : 송나라 인종(仁宗)의 연호로, 1034년 ~ 1037년이다.[주-D011] 정화(政和) : 송나라 휘종(徽宗)의 연호로, 1111년 ~ 1117년이다.[주-D012] 권적(權適), 김단(金端) 등 4명 : 《고려사》 선거지 제과 조에, “예종(睿宗) 10년(1115) 7월에 김단(金端), 견유저(甄惟底), 조석(趙奭), 강취정(康就正), 권적(權迪)을 송나라 태학(太學)에 보내었고, 12년(1117)에 권적, 조석, 김단이 상사급제(上舍及第)로 등제(登第)하였다.” 하였다. 《고려사》에는 권적(權適)이 권적(權迪)으로 되어 있으며, 급제자 수는 4명이 아니라 3명으로 되어 있다. 반면에 《고려사》 세가(世家) 예종(睿宗) 12년 5월 조에는 “황제가 처음으로 권적(權適) 등을 집영전(集英殿)에서 몸소 시험을 보여 권적 등 4인에게 상사급제를 하사하고 권적에게는 특별히 화요직(華要職)을 제수하였다.”라 하여 본문과 일치한다.[주-D013] 금방(金牓) : 과거 급제자의 이름을 써서 걸어두는 방문(榜文)으로 금방(金榜)이라고도 한다.[주-D014] 여섯 명 : 《고려사》 선거지 제과 조에 의하면, 충숙왕 5년(1318)에 안진(安震)이 제과(制科)에 응시하여 합격하고, 8년(1321)에는 최해(崔瀣)가, 11년(1324)에는 안축(安軸)이 각각 합격하였다. 나머지 세 명은 미상이다. 이곡은 충숙왕 복위 2년(1333)에 합격하였다.[주-D015] 높은 등급 : 이곡이 1333년에 원나라 제과(制科)에 제 2 갑(第二甲)으로 급제한 것을 말한다.[주-D016] 황궁(皇宮)의 관직 : 이곡이 제과에 급제한 후 원나라 재상의 추천으로 한림국사원 검열관(翰林國史院檢閱官)에 임명된 것을 말한다.[주-D017] 분황(焚黃) : 관직이 추증(追贈)될 때에 그 자손이 추증된 이의 무덤 앞에 나아가 이를 고하고 사령장의 부본(副本)인 누런 종이를 불태우던 일을 말한다.[주-D018] 장경(長卿)과 …… 정도 : 장경은 한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자이다. 사마상여가 고향인 촉(蜀)을 떠나 장안(長安)으로 가면서, 승선교(昇仙橋)를 지나다가 다리 기둥에 쓰기를, “높은 수레와 사마(駟馬)를 타지 않고는 이 다리 밑을 지나지 않으리라.〔不乘高車駟馬 不過汝下〕” 하였다. 그 뒤 사마상여의 자허부(子虛賦)를 읽은 한 무제(漢武帝)가 그를 등용하여 중랑장(中郞將)으로 임명한 후 촉 땅에 사신으로 파견하자, 태수(太守) 이하 관원들과 그동안 자신을 박대하던 사람들로부터 환대를 받았다. 《輿地廣記 卷29》《漢書 卷57 司馬相如傳》 옹자(翁子)는 주매신(朱買臣)의 자(字)이다. 주매신은 한 무제 때 엄조(嚴助)의 천거를 받아 고향인 오월(吳越)의 회계 태수(會稽太守)가 되었는데, 부임하는 길에 수년 전 가난하게 지낼 때 자신을 버리고 떠난 옛 아내가 개가(改嫁)한 새 남편과 함께 부역에 나가 길을 닦고 있는 것을 보고는 그들 부부를 뒷수레에 싣고 가서 마소를 먹이는 심부름을 시켰다. 또 주매신은 예전에 회계군(會稽郡)의 수저승(守邸丞)에게 기식(寄食)을 한 적이 있었는데, 회계 태수가 된 뒤 일부러 예전에 입던 옷을 그대로 입고 인끈을 품속에 감추고서 도보로 군저(郡邸)에 부임하여 관아의 아전들을 깜짝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漢書 卷64 朱買臣傳》[주-D019] 문창공(文昌公) : 문창후 최치원(崔致遠)을 이른다.[주-D020] 함통(咸通) 15년 : 이규경(李圭景)의 ‘최문창(崔文昌) 사적(事蹟)에 대한 변증설〔崔文昌事蹟辨證說〕’에 의하면, 최치원이 배찬(裵瓚)이 주관한 과거에 합격한 것은 18세이며, 당나라 희종(僖宗) 건부(乾符) 원년(874)으로 신라 경문왕(景文王) 14년의 일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함통 14년(873) 7월에 의종(懿宗)이 죽고 이듬해에도 함통의 연호를 계속 사용하다가 11월에 가서야 건부로 개원(改元)을 했기 때문에 함통 15년과 건부 원년은 실제 같은 해를 가리킨다.[주-D021] 고 시중(高侍中) : 당나라 장수 고변(高騈)을 가리킨다. 황소(黃巢)의 난 때 회남 절도사(淮南節度使)로 난을 진압하다 최치원이 떠나고 3년 뒤인 887년에 부장(部將) 필사탁(畢師鐸)에게 살해당했다.[주-D022] 헌질(憲秩) : 어사(御史)의 직위를 가리킨다.[주-D023] 화근직(華近職) : 황제를 측근에서 모시는 화려한 직임을 이른다. 이 역시 이곡이 한림국사원 검열관(翰林國史院檢閱官)에 임명된 것을 가리킨다.[주-D024] 주금당(晝錦堂) : 위국공(魏國公) 한기(韓琦)가 출세를 한 후 고향인 상주(相州)에 세운 건물로서, 동시대의 문장가 구양수(歐陽脩)가 한기를 위해 지은 상주주금당기(相州晝錦堂記)가 있다. 《古文眞寶 後集 卷6》 주금(晝錦)은 의금주행(衣錦晝行)의 준말로서 반대어인 의금야행(衣錦夜行)에서 나온 말이다. 즉 진(秦)나라 말기에 항우(項羽)가 관중(關中)에 입성하여 진나라 서울인 함양(咸陽)을 도륙할 때, 어떤 이가 항우에게 관중에 그대로 머물 것을 권유하였는데, 진나라 궁궐이 이미 파괴된 것을 본 항우는 고향인 강동(江東)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부귀를 얻고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비단옷을 입고 밤에 돌아다니는 것과 같다.〔富貴不歸故鄕 如衣錦夜行〕”고 대답하였다. 이 고사에서 연유하여 후대에 부귀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금주행(衣錦晝行), 줄여서 주금(晝錦)이라 한 것이다. 《漢書 卷31 項籍傳》[주-D025] 다시 기억하건대 : 국역 대본에는 ‘復記’로 되어 있는데, 이곡의 문집인 《가정집(稼亭集)》 잡록(雜錄)에 수록된 동일 작품에는 ‘復’ 자가 ‘因’ 자로 되어 있다. 《韓國文集叢刊 第3輯 232쪽》[주-D026] 나 또한 …… 있었는데 : 《고려사》 선거지(選擧志) 제과(制科) 조에, “충숙왕 7년(1320) 10월에 안축(安軸), 최해(崔瀣), 이연종(李衍宗)을 보내어 과거에 응시하게 하였는데, 8년(1321)에 최해가 제과(制科)에 합격하니 황제가 칙명(勅命)으로 요양개주판관(遼陽盖州判官)을 제수하였다.” 하였다.[주-D027] 좌방(左牓) : 《원사(元史)》 선거지(選擧志)에 의하면, 원나라 때에 과거 합격자의 방을 게시하면서 좌우로 두 개의 방을 붙였는데, 지배층인 몽고인(蒙古人)과 터키ㆍ이란ㆍ유럽 등의 색목인(色目人)을 우대하여 우방(右牓)에 게시하고 금(金)나라 유민인 화북(華北)의 한인(漢人)과 남송(南宋)의 유민인 강남(江南)의 남인(南人)은 좌방(左牓)에 게시하였다. 고려인이 좌방에 게시된 것으로 보아, 고려가 원나라로부터 우대를 받는다는 최해의 형식적인 표현과 달리 실제로는 중하등의 대우를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동문선》에 수록된 동일 작품에는 ‘용방(龍牓)’으로 되어 있다.[주-D028] 한 삼태기의 …… 못하는 : 《서경(書經)》 여오(旅獒)에 “밤낮으로 모든 일에 부지런하소서. 사소한 일이라 하여 신중히 처리하지 않으면 결국 큰 덕에 누를 끼치게 될 것이니, 아홉 길의 산을 쌓으면서 한 삼태기의 흙이 모자라 완성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夙夜 罔或不勤 不矜細行 終累大德 爲山九仞 功虧一簣〕” 하였다.[주-D029] 초길(初吉) : 초하루를 이른다.
ⓒ 한국고전번역원 | 최채기 (역) | 2006